오전 내내 시달리고 나서야 이승하는 서재에서 그림 도구를 꺼냈다.서유는 손을 내밀어 받으려 했지만 이승하가 서유의 손을 잡더니 다른 서재로 데리고 갔다.이 서재는 전에 봤던 서재보다 더 컸다. 해살이 유럽풍 인테리어를 한 방안에 비쳐 들자 너무 따듯해 보였다.이승하는 물품을 기다란 테이블에 내려놓더니 고운 손으로 서유의 단발을 매만졌다.“서유야, 이 서재 괜찮아?”“괜찮네요.”건축 도면을 그리려면 긴 테이블이 필요했는데 원목으로 만든 이 테이블은 크고 넓은 게 치수를 재고 구도를 그리는데 딱이었다.서유는 테이블 앞에 앉아 도면을 펼치고 구도를 설계하려는데 이승하가 그녀를 안아 올렸다.이승하의 품에 안긴 이승하는 수줍어하며 밀어냈다.“아니...”이를 들은 이승하의 창백한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너 아직 점심 식사 전이잖아. 내려가서 뭐 좀 먹자.”이승하를 오해한 서유는 얼굴이 빨개지더니 머리를 그의 튼실한 가슴에 파묻고 품에 안긴 채 주방으로 향했다.오후에 심이준은 상대가 원하는 스타일을 소통한 후 서유에게 보내주며 먼저 초안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서유는 핸드폰 화면을 슬라이드 해서 여러 번 확인했고 설계 방향을 대략 정했다.그녀는 서재로 돌아와 테이블 앞에 앉아 펜슬과 자를 들고 도면을 그리기 시작했다.워싱턴의 사오월은 초봄이라 햇살이 따듯했다. 햇살은 창밖의 나뭇잎 사이를 뚫고 방 안으로 들어와 그녀의 몸을 따듯하게 비춰줬다.원래도 충분히 아름다운 얼굴에 햇살이 언뜻언뜻 비치니 더욱 매혹적으로 보였다.이승하는 창문 아래에 놓인 소파에 앉아 한 손으로는 책을 들고 한 손으로는 머리를 짚고 있었다.이승하는 덤덤한 눈빛으로 책을 보다가 열심히 도면을 그리고 있는 서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시선 한 번에 이승하는 그대로 빠져들었다. 어두웠던 눈동자에 점점 빛이 스며들었다.그는 서유가 도면을 그리는 걸 조용히 바라봤다. 두 사람이 서재에 앉아 있는 모습이 너무 따듯하고 아름다워 보였다.그렇게 앉아서 몇 시간을 그린 서유는 깔깔해진
“서유야.”이승하는 도면을 손으로 누르며 열심히 도면을 그리고 있는 서유를 내려다봤다.“내가 신분도 다시 찾아주고 회사도 만들어줄게. 앞으로는 네 신분으로 마음껏 설계해.”자를 들고 있던 서유가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이승하를 바라보며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신분을 되찾는 일은 언니 꿈 이뤄주고 나서 보는 걸로 해요.”언니 김초희는 좋아하는 프로젝트를 50개 넘게 받아왔지만 설계를 완성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서유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언니 신분으로 이 프로젝트를 잘 끝내 하늘에 있는 언니가 편히 쉴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다.“하지만 회사를 만드는 일은 됐어요.”언니의 꿈을 완성하고 나면 혼자만의 힘으로 이승하와 견줄 수 있는 자리까지 올라가고 싶었다.그와 맞먹는 위치까지는 아니더라도 지금처럼 학력도 배경도 없는 여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이승하는 마치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이렇게 말했다.“서유야, 난 너를 위해 그 무엇도 만들어줄 수 있어. 그러니 다른 생각은 안 해도 돼.”자리에서 일어난 서유는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이승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알아요. 하지만 어떤 일은 스스로 해내고 싶어요.”정말 어느날엔가 이승하가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한다면 스스로 정상까지 올라가지 않는 이상 남자 덕으로 성공했다는 타이틀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서유의 굳건한 눈빛에서 이승하는 전에는 보지 못했던 자신감을 느꼈다. 지금의 서유는 마치 다시 태어난 것처럼 우러러보게 했다.이에 서유에 대한 이승하의 사랑은 점점 깊어져만 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해야 할 게 있다면 반드시 해줄 테니 말이다.서유는 설계 도면에 집착했고 이승하가 말려도 듣지 않았다. 이승하는 별수 없이 그녀에게 먹거리와 약을 준비해 주고는 묵묵히 곁을 지켰다.새벽까지 노력한 끝에 초안의 틀은 거의 잡았지만 아직 더 다듬어야 했다.그녀가 다시 허리를 숙이고 그림에 몰두하려 하자 이승하가 그녀를 번쩍 안아 올리더니 안방으로 향했다.서유는
서유는 멈칫하더니 아무 생각 없이 이승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이승하는 턱을 살짝 들고 그녀의 눈동자를 조용히 바라보며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서유는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고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기억이 안 나는데…”만약 서유가 예전처럼 꿈에서 송사월의 이름을 외쳤다면 둘 사이는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다.이승하의 가슴에 올려진 서유의 손에 힘이 들어갔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미안해요. 나갈게요…”서유가 몸을 일으켜 나가려는데 이승하가 그녀를 안고 방향을 돌려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그러더니 예쁜 눈으로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이승하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볼에 키스하고는 그녀를 안고 욕실로 향했다.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소리가 물소리와 함께 간간히 들려왔다.이승하가 아직 욕구를 채 쏟아내지 못한 듯 매혹적인 목소리로 말했다.“서유야, 드디어 네가 꿈에서 내 이름을 불렀어…”서유는 너무 피곤했지만 그래도 억지로 버티면서 도면을 그렸다. 그리면서도 속으로 이승하를 욕했다.그렇게 분노로 가득 찬 마지막 한 획이 그어졌고 자를 내려놓는 순간 서유는 의자에 그대로 널브러졌다.얼마 쉬지도 못했는데 심이준이 전화를 걸어와 도면을 재촉했다.“도면 완성했어요?”서유는 힘이 다 빠진 목소리로 답했다.“완성했어요. 사진으로 보내줄게요…”“사진은 안 되고 원본이 필요해요. 주소 보내주면 내가 그쪽으로 갈게요.”서유는 창가에 앉아 경제 잡지를 보고 있는 이승하를 힐끔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심이준 씨가 직접 원본을 가지러 오겠다는데요?”이승하가 덤덤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말했다.“올 용기는 있고?”수화기 너머로 듣고 있던 심이준은 이승하의 차가운 목소리에 얼른 이렇게 대답했다.“실례가 많았네요. 그럼.”서유는 꺼진 화면을 바라보며 몇초간 멍해 있더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심이준은 왜 이승하를 이렇게 두려워하는 걸까?서유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있는데 심이준의 문자가 하나둘 날아왔다.[이승하 씨 너무 무서
워터풀 시티에 도착한 심이준은 눈앞에 펼쳐진 궁전 같은 별장에 조화롭던 얼굴이 일그러졌다.심이준은 이승하에게 작은 반항이라도 하기 위해 신고 온 슬리퍼를 내려다봤다.다시 한번 별장을 쳐다본 심이준은 방금 한 결정이 경솔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별장 문이 활짝 열리자 심이준은 침을 꿀꺽 삼키고 안으로 들어갔다.내부 인테리어가 밖에서 본 것보다 더 휘황찬란하자 심이준은 급 서러워지기 시작했다.“서유 씨, 혹시 그거 알아요? 대표님이 당신을 데려가던 그날 나는 어디서 지냈는지?”서유는 도면을 돌돌 말며 물었다.“어디서 지냈는데요?”심이준의 깔끔한 미소가 그대로 굳더니 이렇게 말했다.“육교 아래서 몇몇 아프리카 노숙자들과 함께요!”도면을 말던 서유의 손이 멈칫하더니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미안해요. 그런 줄은 몰랐네요…”심이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흔들며 이렇게 말했다.“비록 서유 씨가 나보다 좋은 데서 지내긴 하지만 당신은 2억을 잃었는걸요.”서유가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더 비참하다면 심이준도 그나마 심리적 위안을 찾을 수 있었다.“하지만 뭐, 대표님과 결혼한다면 2억도 아쉬운 돈은 아니겠네요.”다시 한번 찬찬히 짚어본 심이준은 불공평하다는 생각에 얼굴이 일그러졌다.똑같이 외국에서 일하는 처지에 서유는 재벌을 만나고 있는데 자신의 곁엔 아무도 없다는 생각에 심이준은 마음이 씁쓸했다.서유는 표정이 다채로운 심이준을 힐끔 쳐다보더니 잘 말아둔 도면을 그의 손에 넘겨줬다.“이준 씨, 빨리 가서 일 봐요. 고객 쪽에서 만족스럽지 않은 곳이 있다면 기록해서 나한테 알려줘요. 수정할게요.”심이준은 표정을 정리하고 도면을 받았다. 그러더니 씩씩거리며 서재를 나섰다.서재에서 나오자마자 앞으로 팔짱을 낀 채 원형 계단에 기대 선 이승하와 눈이 마주쳤다. 이승하는 그를 향해 턱을 살짝 세우더니 이렇게 말했다.“심이준 씨, 제 서재로 오시죠. 잠깐 할 얘기가 있습니다.”“아니요, 우리 사이에 무슨 할 얘기가 있다고…”심이준이 놀라서 뒤
수영장의 물은 매우 맑았고 달빛 아래 잔잔한 물결이 일고 있었다.이승하는 서유를 수영장 벽으로 몰더니 매혹적인 목소리로 그녀를 홀렸다.“서유야, 너 여태까지 나 사랑한다고 말해준 적 없어…”사랑한다는 말은 일종의 약속이었다.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맹세와도 같았다.아직 용기가 부족한 서유는 하늘에 떠 있는 청아한 달빛을 바라보며 어떻게 입을 떼야 할지 몰랐다.이승하는 품속의 여인을 바라보며 그녀가 ‘사랑한다’고 말해주길 기다렸지만 결국 원하는 답을 얻지는 못했다.이승하의 축 처진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입꼬리를 당기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내가 너무 많은 걸 바랐나 봐.”서유가 입을 뻐끔거리며 뭔가 말하려는데 이승하가 그를 번쩍 들어 올리더니 타올로 그녀의 몸을 감싸주고는 욕실로 데려갔다.이날 밤 이승하는 아무 말 없이 뒤에서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사실 이걸로 충분했다.서유가 몇 번이나 그를 돌아봤지만 그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녀가 뒤척거리며 잠을 이루지 못하자 이승하가 꼭 감고 있던 눈을 뜨더니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잠들 수 있게 다독였다.“서유야, 자. 내일 데려갈 데가 있어.”서유는 그의 다독임 하에 불안한 마음을 안고 꿈나라로 향했다.무슨 꿈을 꿨는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깨어나 보니 정신이 흐리멍덩했다.서유는 이런 정서를 잘 감추느라 애썼고 다행히 이승하도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와 같이 아침을 먹고는 그녀를 데리고 승마장으로 향했다.서유는 말을 타면서 힐링할 거라고만 생각하고 대충 연하게 화장하고 갔는데 알고 보니 그의 친구들을 만나러 간 것이었다.이승하의 친구는 다들 있는 집 자제들이었다. 국적은 미국, 영국, 프랑스 그리고 혼혈도 있었다.그들은 하나같이 키와 외모가 출중했고 성격도 젠틀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는 것에도 품위가 느껴졌다.서유는 영어를 꽤 잘하는 편이라 그들과 대화가 가능했다. 조금 더 얘기를 나누려는데 기다란 뒷모습 하나가 시야를 가렸다.이
이승하는 그녀의 찬란한 웃음에 어젯밤부터 먹먹하게 조여왔던 가슴이 금세 풀리는 것 같았다.이승하는 서유의 손을 잡고 탈의실로 향해 그녀에게 직접 승마복을 입혀주었다. 그러더니 관리원에게 자신의 전용 승마복을 가져오라고 했다.밖에서 기다리던 서유가 난간에 기댄 채 바닥에 놓인 자갈을 걷어차고 있는데 뒤에서 문이 서서히 열렸다.햇빛을 받으며 걸어 나오는 이승하의 도도한 얼굴에는 선글라스가 걸려 있었고 이는 그의 정교한 오관을 더 멋들어지게 받쳐주고 있었다.황금비율을 자랑하는 이승하는 위에는 타이틀한 하얀색 승마복에 허리춤에는 까만 벨트를 차고 있었다.아래도 색깔을 맞춰 하얀 승마용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이는 그의 기다란 다리를 더 돋보이게 했다. 그리고 무릎 아래로는 목 높은 까만색 부츠를 신고 있었다.이승하는 한 손으로 헬멧을 든 채 햇빛을 등지고 서서 살짝 고개를 한쪽으로 젖히고 서 있었다.오색찬란한 햇빛이 보일 듯 말 듯 그가 고개를 젖힌 방향으로 선글라스를 비춰주고 있었다.온몸으로 차가운 기운을 뿜어내는 이승하는 고전 유화 속에서 걸어 나온 귀공자와도 같았다.그는 서유에게로 다가와 뼈마디가 선명한 예쁜 손으로 헬멧을 그녀의 머리에 씌워줬다.그 모습도 너무 귀티 나고 우아했다.서유는 그런 이승하를 넋을 잃은 채 바라봤다. 이승하는 그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유를 데리고 말을 고르러 갔다.그는 서유에게 지극히 온순하고 몸집이 작은 말을 선택해 주고는 등에 올라타라고 하더니 고삐를 잡고 승마장 안쪽을 돌았다.서유는 그녀에게 열심히 승마를 가르쳐주는 남자를 내려다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렇게 빨리 배우지는 못할 것 같으니까 친구들이랑 가서 놀아요…”자신의 키보다 작은 말을 끄는 모습이 조금 웃기기도 했다. 건너편 승마장에 있는 귀공자들은 그런 이승하를 보고 웃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가 이렇게 그녀와 함께 승마장을 돌다가 친구들이 그를 비웃기라도 할까 봐 얼른 그에게 친구들에게로 가보라고 했다.이승하는 고삐를 잡은 채 그를 향
이승하가 서유에게 헬멧을 씌워주는 모습이 너무 부드럽고 애정 가득해 보여 성이나는 부러우면서도 질투가 났다.성이나는 외모로 서유에게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집안도 학벌도 서유가 비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하지만 많고 많은 사람중에 이승하는 왜 서유에게 반해버린 건지 성이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서유보다 백배 나은 자신은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하필 서유라니,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서유는 어딘가 여유로워 보이는 성이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그건 승하 씨한테 물어봐야 할 것 같네요.”서유도 왜 이승하가 자기에게 반했는지 몰랐기에 성이나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하지만 성이나가 듣기에 이 말은 도발이나 다름없었다. 성이나의 예쁜 얼굴이 순간 어두워지더니 이렇게 쏘아붙였다.“서유 씨, 그 우월감은 어디서 온 거죠?”서유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물었다.“성 선생님, 질문을 하셔서 거기에 대답을 해드린 건데 그게 우월감이랑 무슨 상관이죠?”성이나는 입꼬리를 살짝 당기더니 코웃음을 쳤다.“제 눈엔 그저 승하를 믿고 허세 부리는 것처럼 보이는데요.”서유는 말이 통하지 않은 성이나를 보며 입을 꾹 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성이나는 서유가 대꾸하지 않자 서유가 이를 인정했다고 생각하고는 하찮다는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여전히 높은 자태를 유지하며 서유에게 물었다.“서유 씨, 승하가 혹시 프러포즈 하던가요?”프러포즈라는 말에 서유는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아래로 늘어트리고는 자신이 신은 까만 부츠를 내려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서유의 이런 모습에 성이나는 뭔가 눈치챈 듯 이렇게 말했다.“하긴, 승하가 그렇게 쉽게 프러포즈할 리가 없지.”성이나는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의자에 걸터앉아 앞으로 팔짱을 낀 채 턱을 살짝 내밀고는 서유에게 경고했다.“서유 씨, 전에 서유 씨를 담당했던 의사로서 몇 가지만 당부할게요. 승하가 지금 서유 씨를 특별하게 대한다고 결혼까지 할 거라는 생각은 버려요.”“명문가 자제들은 통
성이나는 빼어난 자태를 뽐내며 승마장으로 향했다. 서유는 주먹을 으스러지게 움켜쥐었다.성이나는 말에 올라타자마자 빠른 속도로 이승하릉 따라잡았고 이승하와 뭔가 얘기를 주고받았다.이승하는 속도를 늦추더니 성이나가 가리킨 방향을 따라 대기석에 앉은 서유를 바라봤다.말을 탄 두 사람은 매우 잘 어울렸다. 하지만 말을 탈 줄 모르는 서유는 그저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서민의 절망이 이런 걸까? 태어날 때부터 뒤처진 스타트 선을 커서 아무리 따라잡으려 해도 따라잡기 힘들었다.아까 비록 성이나를 디스하긴 했지만 자비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여 서유는 시선을 거두고 탈의실로 향했다.성이나가 이승하에게 말했다.“이승하, 서유 씨 너 믿고 내 앞에서 나대는데 뭐라 좀 하지 그래?”이승하는 서유를 힐끔 쳐다보더니 안장에서 긴고 얇은 채찍을 꺼내 성이나가 탄 말의 엉덩이를 힘껏 내리쳤다.말은 고통에 울부짖으며 미친 듯이 경주로를 내달리기 시작했다.자세를 잡지 못한 성이나는 죽기 살기로 고삐를 틀어잡았기에 말에서 추락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말에 거꾸로 매달린 채로 일어나지 못했다.거꾸로 매달린 성이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선글라스를 끼고 말 등에 앉아 그녀를 차갑게 쏘아보는 이승하를 바라봤다. 너무 짜증 났다.서유는 그렇게 부드럽게 대하면서 왜 자기는 이렇게 매정하게 대하는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성이나의 승마 실력이 그나마 괜찮아서 그렇지 아니면 정말 그 채찍 한 번에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다.이승하는 차가운 시선을 거두더니 얼음장 같은 얼굴로 아무 말 없이 말을 돌려 마사로 향했다.이승하의 친구들은 그가 갑자기 성질을 내자 성이나를 보는 눈빛이 따라서 아니꼬워졌다.“누가 성이나를 부른 거야? 학교 다닐 때 승하가 성이나 싫어했던 거 몰라?”“레오 아닐까? 평소에 성이나랑 잘 지내는 편이잖아. 아마도 레오가 흘린 것 같은데?”친구들에게 지목된 레오는 얼른 고삐를 잡더니 뒤로 슬슬 물러나며 아무것도 모르는 척 몰래 승마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