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이나는 빼어난 자태를 뽐내며 승마장으로 향했다. 서유는 주먹을 으스러지게 움켜쥐었다.성이나는 말에 올라타자마자 빠른 속도로 이승하릉 따라잡았고 이승하와 뭔가 얘기를 주고받았다.이승하는 속도를 늦추더니 성이나가 가리킨 방향을 따라 대기석에 앉은 서유를 바라봤다.말을 탄 두 사람은 매우 잘 어울렸다. 하지만 말을 탈 줄 모르는 서유는 그저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서민의 절망이 이런 걸까? 태어날 때부터 뒤처진 스타트 선을 커서 아무리 따라잡으려 해도 따라잡기 힘들었다.아까 비록 성이나를 디스하긴 했지만 자비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여 서유는 시선을 거두고 탈의실로 향했다.성이나가 이승하에게 말했다.“이승하, 서유 씨 너 믿고 내 앞에서 나대는데 뭐라 좀 하지 그래?”이승하는 서유를 힐끔 쳐다보더니 안장에서 긴고 얇은 채찍을 꺼내 성이나가 탄 말의 엉덩이를 힘껏 내리쳤다.말은 고통에 울부짖으며 미친 듯이 경주로를 내달리기 시작했다.자세를 잡지 못한 성이나는 죽기 살기로 고삐를 틀어잡았기에 말에서 추락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말에 거꾸로 매달린 채로 일어나지 못했다.거꾸로 매달린 성이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선글라스를 끼고 말 등에 앉아 그녀를 차갑게 쏘아보는 이승하를 바라봤다. 너무 짜증 났다.서유는 그렇게 부드럽게 대하면서 왜 자기는 이렇게 매정하게 대하는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성이나의 승마 실력이 그나마 괜찮아서 그렇지 아니면 정말 그 채찍 한 번에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다.이승하는 차가운 시선을 거두더니 얼음장 같은 얼굴로 아무 말 없이 말을 돌려 마사로 향했다.이승하의 친구들은 그가 갑자기 성질을 내자 성이나를 보는 눈빛이 따라서 아니꼬워졌다.“누가 성이나를 부른 거야? 학교 다닐 때 승하가 성이나 싫어했던 거 몰라?”“레오 아닐까? 평소에 성이나랑 잘 지내는 편이잖아. 아마도 레오가 흘린 것 같은데?”친구들에게 지목된 레오는 얼른 고삐를 잡더니 뒤로 슬슬 물러나며 아무것도 모르는 척 몰래 승마장을
잡고 있던 손이 갑자기 허전해지자 마음도 따라서 허전해지는 것 같았다.서유는 먼 곳에 서서 여자와 이승하가 나누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고 표정도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저 여자 누군지 알아요?”성이나가 서유 곁으로 다가오더니 그녀와 나란히 먼 곳을 바라봤다.서유가 성이나의 말에 대꾸하지 않자 성이나는 혼잣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이름은 강세은, 유럽 4대 가문 중 강씨 집안의 딸이죠.”성이나는 고개를 돌려 표정은 변했지만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는 서유를 살폈다.“저런 집안이라면 나도 비길 수가 없는데 저보다도 뒤처진 서유 씨가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서유는 어딘가 허전한 손바닥을 꽉 움켜쥐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성이나를 노려봤다.“성 선생님, 뺏어야만 가질 수 있는 사랑이라면 저도 싫어요. 그러니 성 선생님도 그런 생각 버리는 게 좋을 거예요.”서유가 몸을 돌려 먼저 나가려는데 성이나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뒤를 따라 나왔다.“서유 씨, 승하가 만약 정말 서유 씨를 사랑한다면 아까 같은 상황에 서유 씨의 손을 잡고 먼저 나갔겠죠.”“승하는 서유 씨의 기분 따위 신경 쓰지 않아요. 당신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요. 계속 이렇게 잡고 있으면 아마 다치는 쪽은 서유 씨겠죠.”서유는 순간 걸음을 멈추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성이나를 쏘아봤다.“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한번 다쳐봐서 알아요. 두 번이라고 두려울 것도 없고요.”성이나는 과거 이승하와 서유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예 모르고 있었기에 서유의 말이 꽤 의미심장하게 들렸다.하지만 눈치가 빠른 성이나는 이승하와 서유가 전에도 만난 적이 있다는 걸 눈치챘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 있을까?성이나는 앞으로 팔짱을 낀 채 턱을 살짝 들고 서유를 바라봤다.“한번 상처받으면 다음에도 또 상처받을 거예요. 같은 남자한테 두 번 당하는 그 꼴이 어떨지 지켜볼게요.”성이나는 이 말을 뒤로 이승하와 강세은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서유는 더없는 권리를 가지고 있는 그들을 바라보며 자기
승마장에서 나온 서유는 밖에 세워진 수십 대의 고급 세단을 보며 어떡해야 할지 몰랐다.낯선 나라에 낯선 환경, 그리고 낯선 사람까지.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외로움에 그녀는 얼른 도망치고 싶었다.무거운 심정으로 문 앞에 서있는데 크고 따듯한 손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아줬다.“서유야.”걱정 어린 이승하의 목소리가 머리 위로 들렸다.서유는 고개를 들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저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린 채 아까는 자신의 손을 놓았지만 지금은 다시 잡고 있는 이승하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이승하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깍지를 낀 두 손을 힐끔 보더니 그제야 아까 그녀의 손을 놓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는 마음이 철렁해 얼른 허리를 숙여 그녀에게 사과했다 “서유야, 아까는 미안해. 내가 미처 상황 설명 없이 너의 손을 뿌리치고 다른 여자랑 자리를 비웠네. 내가 경솔했어. 나 미워해도 돼.”서유는 별처럼 반짝이는 이승하의 눈이 긴장감으로 가득 차자 자신이 너무 트집을 잡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안전감이 없는 서유는 머리가 복잡했지만 그래도 이승하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괜찮다는 세글자에 이승하는 더욱 가슴이 조여왔다. 허리도 따라서 점점 더 숙여졌다.그녀와 마주 볼 수 있을 높이까지 숙여서야 이승하는 그녀의 눈빛을 읽어낼 수 있었다. 온통 어두운 그녀의 눈동자에 그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그녀가 혹시나 실망했을까 봐 이승하의 잘생긴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서유야, 절대 오해하면 안 돼. 저 여자는 내가 협력하고 있는 한 분야의 파트너일 뿐이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야. 일적인 거 외에는 아무 관계도 없어.”서유는 거의 무릎이라도 꿇을 것 같은 이승하의 모습에 서운했던 마음이 천천히 풀리는 것 같았다.이승하 같은 남자 옆에 멋들어진 여자가 나타나는 건 지극히 정상이었다.그녀에게 미안할 짓만 하지 않으면 이런 하찮은 일에 트집을 잡을 필요가 없었다.생각을 정리한 서유는 이승하의 손을 다시 꼭 잡더니 입꼬리를 올
이승하는 서유를 안고 차로 향하더니 이렇게 말했다.“서유야, 집에 가려면 한 시간은 걸려. 일단은 조금 쉬고 있어.”서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창문에 기대있고 싶었지만 이승하의 기대에 찬 눈빛에 적극적으로 그의 다리에 앉았다.서유는 이승하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먼저 고백할 엄두를 내지 못했었다.이승하의 마음은 이미 확인했고 그녀도 이승하를 사랑하고 있으니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성이나가 말한 것처럼 같은 남자에게 두 번이나 상처를 받을까 봐 두렵긴 했지만 말이다.하지만 적어도 그런 결과가 다가오기 전 모든 걸 다 바쳐 용감히 사랑할 것이다.서유는 머리를 이승하의 어깨에 살포시 기대고는 그의 조각 같은 옆모습을 바라보며 나른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도착하면 불러요.”이승하는 고개를 돌려 서유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더니 옆에 놓인 담요를 그녀에게 덮어줬다.그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며 잠에 들 수 있게끔 이렇게 속삭였다.“서유야, 고마워.”착한 서유 덕분에 그는 다시 서유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승하는 앞으로 무슨 일이 있든 절대 이런 서유를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속삭임에 대꾸하지 않고 그의 몸에 기댄 채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는 순간의 풍경을 감상했다.별장으로 돌아온 서유는 비몽사몽한 채로 이승하에게 안겨 욕실로 향했다. 이승하도 처음엔 단순하게 그녀를 닦아주고 싶었지만 그러다...서유는 후들거리는 몸으로 욕실에서 나와 화장대 앞에 앉았다. 피부 관리를 하려는데 옆에 두었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그녀는 핸드폰 잠금을 풀어 낯선 번호로 온 문자를 확인했다.[서유 씨, 승하가 혹시 강세은 씨랑 그저 파트너라고 하지 않던가요?]서유는 잠깐 멈칫하더니 아직 욕실에 있는 이승하를 힐끔 쳐다봤다. 그쪽에서 시선을 떼기도 전에 똑같은 번호로 문자가 또 한 통 날아왔다.[절대 믿지 마요. 승하 강세은 씨랑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에요. 못 믿겠으면 사진 보내줄게요.]
욕실에서 나온 이승하는 머리가 젖은 채로 화장대에 앉아 피부관리를 하는 서유를 발견했다.이승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옆에 놓인 선풍기를 들어 그녀의 머리를 섬세하게 말려주기 시작했다.거울을 통해 자신을 살뜰하게 챙기는 이승하를 본 서유는 불안하던 마음이 점점 차분해졌다.이승하는 서유의 머리를 말려주고는 눈에 있는 이물을 제거하고 치료해 주는 약을 그녀에게 먹여주고는 그녀를 의자에서 번쩍 안아 올렸다.“서유야, 내일 핀란드에 오로라 보러 가자.”전에 서유와 만날 때 그녀가 오로라 사진을 찾아보는 걸 보고 아마 거기를 가보고 싶어 할 거라고 예상했다.하지만 그때 그들은 서로를 시험하기 바빴고 그렇게 얼마 남지 않은 따듯함을 모두 갉아 먹었다. 그러니 그녀를 위해 해줘야 하는 일은 한 번도 해준 적이 없었다.이승하는 여생으로 그녀의 아쉬움을 달래주고 그녀의 마음에 난 상처를 보듬어주어 좋은 기억만 남겨주리라 다짐했다.이승하의 품에 안긴 서유는 고개를 들어 선명한 그의 턱선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이승하는 서유를 침대에 내려주더니 그녀가 너무 힘들까 봐 더는 건드릴 엄두를 못 내고 그녀를 품에 안은 채 잠에 들었다.서유는 그런 이승하를 보며 은연중에 핀란드는 갈 수 없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예상대로 이튿날 아침을 먹기도 전에 별장 앞에 NASA에서 보내온 차 수십 대가 서 있었다.이승하의 신분과 즐비하게 서 있는 보디가드에 NASA 사람들은 들어올 엄두를 못 냈고 그저 사람을 보내 이승하를 항공기지에 모셔 오라고 했다.이승하는 서유를 데리고 오로라를 보러 가기로 했기에 NASA로 가는 걸 거절했지망 국장이 직접 모시러 왔다 두 사람은 서재에서 한참 티격태격하더니 국장이 어두운 표정으로 서재에서 나왔다. 뒤따라 나오는 이승하의 얼굴도 그리 곱지는 않았다.안 좋게 끝난 둘의 대화에 서유가 이승하를 설득했다.“오로라는 언제든지 보러 가면 되죠. 항공 프로젝트를 멈출 수는 없잖아요. 먼저 기지로
사진을 열어보니 이승하와 강세은이 레스토랑에 마주 앉아 있었다.커플 레스토랑은 맞았지만 둘 사이는 거리감이 확연하게 느껴졌다.그저 파트너로서 업무를 토론하는 것일 뿐 다른 건 말해줄 수 없었다.서유는 믿으려 하지 않았고 핸드폰을 옆에 던져둔 채 성이나의 악의적인 모욕과 유언비어를 무시했다.하지만 성이나는 쉬지 않고 문자했고 켜져 있는 핸드폰 화면으로 그녀가 보내온 사진들이 하나둘 보였다.서유는 성이나가 보내온 자극적인 사진들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다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서유 씨, 혹시 승하가 3일 동안 계속 NASA에서 항공 프로젝트 하느라 바빴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멍청하긴, 승하는 3일 동안 강세은 씨랑 같이 있었어요. 이 침대 셀카가 제일 확실한 증거겠네요.]서유는 떨리는 손으로 사진을 한 장씩 넘겼다. 원래도 하얀 얼굴이 거의 투명하다시피 창백해졌다.서유는 핸드폰을 꽉 움켜쥔 채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성이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통한 순간 서유는 화를 퍼붓기 시작했다.“성이나 씨, 합성한 사진을 나한테 보낸다고 내가 믿을 줄 알아요?”“승하 씨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제일 잘 알아요.”“난 승하 씨가 나한테 미안할 짓 절대 하지 않을 거라고 믿고요.”“승하 씨를 정말 갖고 싶다면 그 사람 마음을 얻을 생각을 해요!”“이런 비열한 수단으로 나를 괴롭히지 말고, 성이나 씨가 이럴수록 승하 씨는 더 역겨워할 거예요.”서유의 감정에 북받친 목소리에 성이나는 절반은 성공했다고 생각해 입꼬리가 올라갔다.“서유 씨는 아직 남자를 잘 모르나 보네요. 아직 손에 넣지 못한 여자라면 지극정성으로 아껴줄 수밖에 없어요.”“하지만 일단 손에 넣으면 그때부터 소중함이 점점 사라지는 거죠. 게다가 결혼하다는 소리도 꺼낸 적 없다면서요. 그건 당신과 결혼할 생각이 아예 없다는 거예요.”“나이도 웬만큼 먹었는데 사회 경험도 충분할 거 아니에요. 아직도 돈 있는 자들이 사람을 어떻게 갖고 노는지 모르는 거예요?”서유는 너무 화가 난
별장서 나온 서유는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신속하게 레스토랑으로 향했다.서유가 차에서 내렸을 때 날은 이미 어둑어둑해졌고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날씨에도 레스토랑의 핑크빛 분위기는 전혀 영향받지 않았다.서유는 도로변에 서서 맞은편 레스토랑을 멀찍이 내다봤다. 거기엔 외모와 몸매가 빼어난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남자는 까만 슈트 차림을 하고 소파에 기댄 채 고개를 살짝 젖히고 맞은편에 앉은 빨간 입술의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여자는 섹시한 빨간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남자와 똑같은 자세로 소파에 기대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보며 뭐라 말하고 있었다.서유는 그들의 표정까지는 잘 보지 못했지만 레스토랑의 분위기를 보니 이승하가 저번에 서유를 데리고 간 그 프랑스 레스토랑이 생각났다.서유는 두 사람이 데이트 중이라고 믿고 싶지 않았지만 심장이 자꾸만 벌렁거렸다.무서움이 용기를 완전히 대체했고 그쪽으로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서유는 그 자리에 선 채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용기 내어 레스토랑으로 향했다.인도를 건너 맞은편으로 건너가는데 이승하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봤다.서유를 발견한 이승하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꽂혔다. 서유는 얼른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지만 잘생긴 얼굴엔 아무 표정이 없었고 차가운 얼굴이 그녀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이승하의 예쁜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정함은 3년 전 그를 만나고 있을 때보다 다 차가웠다.뼛속까지 시린 그의 눈빛에 들고 있던 서유의 손이 그대로 허공에서 굳어버렸다.그를 다시 받아주면서 사실 걱정이 들기도 했다. 원하는 걸 손에 넣으면 순간 차가워질 수도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서유는 지금 자신의 몸과 마음을 이승하에게 다 바쳤지만 걱정했던 일을 해가지는 못한 것 같았다.서유는 한참을 그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그녀는 주먹을 꼭 쥔 채 이승하를 찬찬히 뜯어봤다. 그가 그렇게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봤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가 않았다.혹시 그녀를 보지 못해서
유리창에 손이 닿기도 전에 성이나가 서유의 손목을 낚아챘다.“서유 씨, 승하의 태도를 보고도 희망을 버리지 못한 거예요?”우산을 쓴 성이나는 오만한 표정으로 피를 홀딱 맞은 서유를 내려다봤다.“정말 가엽네요. 애초에 내 당부를 들었으면 얼마나 좋아요. 그럼 이 지경까지는 안 됐을 텐데.”서유는 성이나의 손을 뿌리친 채 그녀를 차갑게 쏘아보더니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창문을 두드리려 했다.성이나가 한발 먼저 우산으로 서유의 손을 막더니 경멸에 가득 찬 눈빛으로 서유를 바라봤다.“서유 씨, 아까 문 앞에서 그렇게 애타게 들여보내 달라고 하는 걸 승하도 봤을 텐데 나오지 않았어요. 이건 뭘 의미하는 걸까요?”“새로 사귄 여자 친구 앞에서 엑스를 도와주고 싶지 않다는 얘기죠. 이렇게 매정한 사람한테 그렇게 매달리고 싶어요?”서유는 주먹을 너무 꽉 움켜쥐는 바람에 손톱이 살을 뚫고 들어가 피가 새어 나왔다. 서유는 그제야 마음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성이나 싸울 기분도 힘도 없는 서유는 더는 무의미한 입씨름을 하기 싫었지만 성이나가 계속 그녀의 귀에 대고 중얼거렸다. “서유 씨, 얼른 꿈에서 깨요.”“승하는 그냥 서유 씨가 예쁘고 몸매도 좋고 하니까 침대에서 갖고 놀기 좋다고 생각해 옆에 둔 것뿐이에요.”“봐요, 새로운 사냥감이 생기니까 바로 찬밥 신세인 거. 아직 헤어지자는 소리를 못 했을 뿐 사랑은 아니라는 거죠.”“이 세상의 많은 남자들이 여자가 먼저 헤어지자고 말하게 하려고 일부러 정서적으로 냉대하죠. 이건 서유 씨도 잘 알고 있잖아요.”“그러니 여기서 비련의 여주인공 연기 좀 그만해요. 보는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승하도 전혀 동정하지 않는데 왜 굳이…”참을 데까지 참은 서유는 성이나가 끝도 없이 가시 돋친 말을 늘어놓자 성이나의 귀뺨을 사정없이 내리쳤다.“그 입 좀 다물어요!”서유는 아까 날린 그 싸대기에 남은 힘을 전부 쏟아부었다. 빠르고 정확하고 매섭게 내리친 덕분에 성이나의 볼은 금세 부어올랐다.성이나는 그 자리에 넋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