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장서 나온 서유는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신속하게 레스토랑으로 향했다.서유가 차에서 내렸을 때 날은 이미 어둑어둑해졌고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날씨에도 레스토랑의 핑크빛 분위기는 전혀 영향받지 않았다.서유는 도로변에 서서 맞은편 레스토랑을 멀찍이 내다봤다. 거기엔 외모와 몸매가 빼어난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남자는 까만 슈트 차림을 하고 소파에 기댄 채 고개를 살짝 젖히고 맞은편에 앉은 빨간 입술의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여자는 섹시한 빨간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남자와 똑같은 자세로 소파에 기대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보며 뭐라 말하고 있었다.서유는 그들의 표정까지는 잘 보지 못했지만 레스토랑의 분위기를 보니 이승하가 저번에 서유를 데리고 간 그 프랑스 레스토랑이 생각났다.서유는 두 사람이 데이트 중이라고 믿고 싶지 않았지만 심장이 자꾸만 벌렁거렸다.무서움이 용기를 완전히 대체했고 그쪽으로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서유는 그 자리에 선 채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용기 내어 레스토랑으로 향했다.인도를 건너 맞은편으로 건너가는데 이승하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봤다.서유를 발견한 이승하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꽂혔다. 서유는 얼른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지만 잘생긴 얼굴엔 아무 표정이 없었고 차가운 얼굴이 그녀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이승하의 예쁜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정함은 3년 전 그를 만나고 있을 때보다 다 차가웠다.뼛속까지 시린 그의 눈빛에 들고 있던 서유의 손이 그대로 허공에서 굳어버렸다.그를 다시 받아주면서 사실 걱정이 들기도 했다. 원하는 걸 손에 넣으면 순간 차가워질 수도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서유는 지금 자신의 몸과 마음을 이승하에게 다 바쳤지만 걱정했던 일을 해가지는 못한 것 같았다.서유는 한참을 그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그녀는 주먹을 꼭 쥔 채 이승하를 찬찬히 뜯어봤다. 그가 그렇게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봤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가 않았다.혹시 그녀를 보지 못해서
유리창에 손이 닿기도 전에 성이나가 서유의 손목을 낚아챘다.“서유 씨, 승하의 태도를 보고도 희망을 버리지 못한 거예요?”우산을 쓴 성이나는 오만한 표정으로 피를 홀딱 맞은 서유를 내려다봤다.“정말 가엽네요. 애초에 내 당부를 들었으면 얼마나 좋아요. 그럼 이 지경까지는 안 됐을 텐데.”서유는 성이나의 손을 뿌리친 채 그녀를 차갑게 쏘아보더니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창문을 두드리려 했다.성이나가 한발 먼저 우산으로 서유의 손을 막더니 경멸에 가득 찬 눈빛으로 서유를 바라봤다.“서유 씨, 아까 문 앞에서 그렇게 애타게 들여보내 달라고 하는 걸 승하도 봤을 텐데 나오지 않았어요. 이건 뭘 의미하는 걸까요?”“새로 사귄 여자 친구 앞에서 엑스를 도와주고 싶지 않다는 얘기죠. 이렇게 매정한 사람한테 그렇게 매달리고 싶어요?”서유는 주먹을 너무 꽉 움켜쥐는 바람에 손톱이 살을 뚫고 들어가 피가 새어 나왔다. 서유는 그제야 마음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성이나 싸울 기분도 힘도 없는 서유는 더는 무의미한 입씨름을 하기 싫었지만 성이나가 계속 그녀의 귀에 대고 중얼거렸다. “서유 씨, 얼른 꿈에서 깨요.”“승하는 그냥 서유 씨가 예쁘고 몸매도 좋고 하니까 침대에서 갖고 놀기 좋다고 생각해 옆에 둔 것뿐이에요.”“봐요, 새로운 사냥감이 생기니까 바로 찬밥 신세인 거. 아직 헤어지자는 소리를 못 했을 뿐 사랑은 아니라는 거죠.”“이 세상의 많은 남자들이 여자가 먼저 헤어지자고 말하게 하려고 일부러 정서적으로 냉대하죠. 이건 서유 씨도 잘 알고 있잖아요.”“그러니 여기서 비련의 여주인공 연기 좀 그만해요. 보는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승하도 전혀 동정하지 않는데 왜 굳이…”참을 데까지 참은 서유는 성이나가 끝도 없이 가시 돋친 말을 늘어놓자 성이나의 귀뺨을 사정없이 내리쳤다.“그 입 좀 다물어요!”서유는 아까 날린 그 싸대기에 남은 힘을 전부 쏟아부었다. 빠르고 정확하고 매섭게 내리친 덕분에 성이나의 볼은 금세 부어올랐다.성이나는 그 자리에 넋을
목소리는 가벼웠지만 온 힘을 다해, 용기를 끌어모아 외친 이름이었다.거칠게 쏟아지는 빗물이 진흙탕을 뒤집어쓴 서유의 가녀린 몸집에 떨어졌다.서유는 그렇게 길가에 고인 더러운 구정물에 엎드린 채 아무런 생기 없이 밤하늘을 올려다봤다.가로등 불빛을 통해 바닥으로 내리꽂히는 큰 빗방울을 보고 서유는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하늘도 그녀의 멍청함을 비웃고 있다.도대체 누가 준 용기로 한번 상처를 받고도 여전히 그 이름 석 자를 내려놓지 못해 서로에게 다시 기회를 준 것일까...한번 죽었다 깨난 걸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걸까?도대체 이승하를 얼마나 사랑하면 매번 마음을 모질게 먹지 못하고 잘못된 길을 또 한 번 걸으려고 하는지 모르겠다.서유는 과거에 겪었던 아픔이 다시 떠올랐고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창백한 미소가 핏기 없는 얼굴에 번지자 죽기 ㅁ직전의 일그러진 얼굴보다 더 봐주기 힘들었다.서유는 까진 손바닥으로 땅을 짚고 일어났다. 아직 포기하지 못한 건지 아니면 완전히 포기하고 싶어서 그러는 건지 그녀는 비틀거리며 호텔로 향했다. 하지만 수십 명의 보디가드에 가로막혀 호텔은 들어가지도 못했다.“이곳은 영국 왕실 인원만 드나들 수 있는 곳입니다. 외부인의 출입은 엄격히 금지하고 있으니 얼른 물러나세요.”영국 왕실이라...이러한 배경은 서유가 평생 바라보지도 못할 그런 존재였다.그래도 그녀는 더없이 귀티 나는 그 남자가 자신과 결혼할 거라고 생각했다.서유는 갑자기 생각을 정리한 듯 환한 미소로 보디가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물러날게요...”그녀는 몸을 돌려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에서 내려왔다. 가녀린 몸집이 비바람 속에서 유난히 얇고 외로워 보였다.하지만 서유는 결과를 원했기에 진짜 떠나지 않고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서유는 그렇게 비를 맞으며 호텔 대문을 지켜봤다. 낯선 날에 홀로 조용히 자신을 끔찍이 사랑한다는 그 남자를 기다렸다.그녀는 속으로 여러 번 다짐했다. 만약 지금 그가 호텔에서 나온다면
정말 오랫동안 벤치에 앉아있던 서유는 얼굴에 남은 눈물을 말끔히 닦아냈다.심이준에게 답장을 보내고 화면을 나오려는데 어제밤 워싱턴에서 걸려 온 전화가 몇 개 있었다. 다 모르는 번호였다.그 번호들을 한번 확인했을 뿐인데 핸드폰은 끝내 버티지 못하고 전원이 꺼졌다. 잠금 버튼을 다시 누르니 화면에 배터리 부족이라고 떴다.서유는 걸려 온 몇 통의 스팸 전화를 신경 쓰지 않고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러더니 지나가는 택시를 불러 별장으로 향했다.뒷정원으로 들어갔기에 아무도 깨지 않았고 쥐도 새도 모르게 이층 안방으로 향했다.이승하의 전화를 받은 도우미들이 얼른 공손하게 말했다.“대표님, 서유 씨 아직 깨기 전이에요.”서유한테 전화가 걸리지 않아 미간을 살짝 찌푸린 이승하가 물었다.서유는 엄두를 내지 못하고 얼른 안방으로 문을 열고 살며시 들어갔다.침대에 누워 두 눈을 꼭 감고 있는 서유를 보고 나서야 이승하의 불안한 마음도 천천히 풀리기 시작했다.도우미가 빠르게 방에서 나가더니 다시 수화기를 들고 이승하에게 말했다.“대표님, 서유 씨 정말 주무시고 계십니다.”이승하는 그제야 시름 놓고 도우미에게 당부했다.“영양가 가득한 아침 좀 챙겨서 먹게 해요.”이승하는 이렇게 말하더니 마친 시간이 없는 듯 얼른 전화를 끊고 옆에 있는 강세은에게 핸드폰을 던졌다.자신을 매몰차게 대하는 이승하에 파란색 가면을 쓴 남자를 힐끔 쳐다보더니 살짝 인내심이 떨어지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작전 시작 전 그렇게 급한 상황에서도 아끼던 와이프한테 전화하더니 작전이 끝나기도 전에 그걸 못 참고 다시 전화하는 거예요?”“전화하는 것도 모자라 내 폰을 빌려서 하다니, 핸드폰 하나 더 개통하면 어디 덧나요?”이승하는 강세은에게 대꾸하지 않았다. 자꾸만 마음이 당황스러운 게 어딘가 불안했고 이에 이승하는 점점 기분이 언짢아졌다.“아직도 얼마나 있어야 끝나는데?”얼굴을 하얀 거위 털 가면 아래에 숨긴 강세은은 고개를 돌리고 다시 코웃음을 쳤다.“그런
그들은 판자촌에서 떠나 호텔로 다시 돌아왔고 시시티브이가 없는 곳에 차를 세웠다.이승하와 강세은은 동시에 가면을 벗어 택이에게 던져주며 처리하라고 하더니 얼른 차에서 내려 호텔로 향했다.둘은 시시티브이에 손을 댄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특수 통로를 통해 얼른 방으로 향했다.문이 닫히는 순군 강세은이 이승하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오빠 대신 나서줘서 고마워요. 방금 처리한 그 사람들 나 혼자서는 무리였을 거예요.”“그리고 특수한 내 신분이 혹시나 사람들의 이목을 끌까 싶어 연인인 척 알리바이를 만들어준 것도 고마워요.”이승하는 더는 그녀와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하여 얼른 몸을 돌려 정문 방향으로 빠르게 빠져나가려 했다.“잠깐만요.”하이힐을 신은 강세은이 걸어나오더니 이승하에게 말했다.“요즘 국내외로 우리를 조사하는 사람이 많다고 오빠가 당부하랬어요. 절대 신분을 노출해서는 안 돼요.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 해도 털어놓지 말아요.”이승하의 흠 잡을 데 없는 얼굴이 점점 차가워졌다.“육성재를 건드리지만 않았다면 누가 너희를 조사하겠어?”강세은은 이승하의 뼈 때리는 말에 말문이 막혔다. 이번에 S 본부에 이렇게 큰일이 벌어진 건 확실히 오빠가 육성재를 잘못 건드려서였다.논리적으로 달린다는 걸 알고 있는 강세은은 군말 없이 이승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미안해요. 앞으로 조심할게요.”이승하는 차가운 시선을 거둔 채 신속하게 1층으로 내려가 로비를 가로질렀다. 사람들의 주시하에 이승하는 빠른 속도로 호텔 앞에 세워둔 차로 향했다.서유는 도우미가 가고 나서야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흠뻑 젖은 옷을 벗어 던지고 욕조에 물을 받아 샤워했다.몸을 깨끗하게 씻고 손바닥 상처를 처리한 서유는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아래층에 있는 서재로 향했다.서재의 맨 뒤편의 책장에서 잃어버렸던 물건을 가져와 거실에 있는 유리 테이블에 전부 올려놓았다.준비를 마친 서유는 소파에 앉아 조용히 이승하를 기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링컨이 별장 앞에 도착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한참 동안 상처 입은 자신의 손바닥을 쳐다보다가 이승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요.”괜찮다, 어젯밤에 그가 무엇을 했든 이미 지칠 대로 지친 그녀는 더 이상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워싱턴 거리의 벤치에 앉아 하룻밤을 꼬박 앉아 있는 동안 그녀는 정신이 들었다. 그녀와 이승하는 근본적으로 다른 세상의 사람들이었다. 그녀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그 남자는 그녀가 쉽게 쳐다볼 수 없는 위치의 사람이었다.이 남자처럼 먹이 사슬 꼭대기에 있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세상을 살고 있는지 그녀는 알 수가 없다. 충분히 알지도 못하는 이 사람에 대해 믿음을 가졌다가 결국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두 사람 사이에 이러한 신분 차이가 있어도 예전의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저 용감하게 이 사람을 사랑한다면 아름다운 결과가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두 사람이 데이트할 때,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그녀가 메뉴판에 적힌 프랑스어를 읽을 수 없을 때.국회의사당에 참관하러 갔는데 그 안의 사람들이 이승하를 보고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건넬 때.그녀를 데리고 만나러 간 친구들이 모두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던 전 세계의 귀족들이었을 때. 다른 여자랑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고 있는 것을 보고 들어가 물어보려는 찰나 경비원이 문밖에서 그녀의 길을 막을 때. 비를 맞으며 호텔까지 쫓아왔지만 이곳은 영국 왕실 귀족들만 출입할 수 있는 곳이라고 들어가지도 못할 때.그녀는 비로소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문제가 서로에 대한 믿음뿐만이 아니라 엄청난 신분과 배경 차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와 함께 하면서 그녀는 자신의 힘으로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위치에 서고 싶었다. 하지만 그동안...평범한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그가 있는 정상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벽을 넘어야 하는지 그를 보면서 알게 되었다. 하필이면 그녀가 뛰어넘으려고 애쓰고 있을 때, 그에 대한 그녀의 마음은 산산조각이 났고 마음이 무너지게 된 그녀는 완전히
서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당신이 약속했잖아요. 잃어버린 물건들을 찾게 되면 우리 사이도 끝이 날 거라고요. 이젠 물건을 되찾았으니 우리 그만해요.”그 말에 몸이 굳어버린 그는 온몸에서 전해진 엄청난 고통과 절망감에 두 눈이 빨갛게 달아올랐고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이를 악물고 있는 그의 얼굴에 핏줄이 선명히 드러났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며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소독약을 발라주었다. 서유는 고개를 숙인 채 그를 쳐다보면서 이 사람의 따뜻한 온기에 더 이상 흔들리지 않겠다고 경계심을 부쩍 치켜세웠다. 잠시 후, 그가 거즈를 다 감은 것을 보고 그녀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이승하 씨, 귀국하는 비행기표 이미 샀어요. 오늘 이 별장을 떠날 거예요. 그동안 고마웠어요.”미련 없는 그녀의 말에 그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 눈시울이 붉어진 그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당신과 내가 이 워싱턴에서 이 별장에서 얼마나 많은 추억들이 있었는데. 고작 고맙다는 말 한마디뿐이야?”서유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되물었다.“이승하 씨, 내 몸까지 당신한테 바쳤는데 그거면 충분하지 않나요?”그녀의 말을 듣고 이승하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서유, 지금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매번 잠자리는 늘 그가 먼저 원해서였지만 서유도 그를 거절하지는 않았다. 근데 헌신이라는 말로 그녀는 두 사람 사이에 남아 있는 아름다운 추억들을 형용하고 있다. 자신이 한 말이 조금은 과격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녀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침묵하는 그녀의 모습은 그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만들었다. 그는 떨리는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당신이 이것들을 발견한다면 망설임 없이 떠날 거라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나한테조차 전혀 미련이 없을 줄은 몰랐네 .”승하 씨에서 이승하 씨로 변한 서먹한 호칭, 불과 나흘 만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그녀를 보며 이승하는 그 상황
서유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가 이런 말까지 할 줄 전혀 몰랐던 눈치였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이승하 씨, 사실 당신은 날 그토록 사랑하는 거 아니잖아요. 뭐 하러 굳이...”그가 그녀의 말을 끊어버렸다.“내 마음을 꺼내서 당신한테 보여줘야 내가 당신을 정말 사랑한다는 걸 믿을 거야?”그동안 그가 몸을 던져 자신을 구하고 세심하게 보살폈던 일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사랑이 있어서 그런 거겠지. 하지만 그녀를 얻은 뒤에 차갑게 변했던 그의 모습도 진실이었다. 어젯밤의 일을 겪고 나니 그는 지금 뜨겁게 달아오르는 단계인 것 같다. 그녀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가 어떤 단계에 있든 두 사람은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었고 쓸데없이 얽힐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서유는 자신의 얼굴을 감싸고 있던 그의 손을 밀어내고는 가방에서 카드 두 장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이젠 돌려줄게요.”카드를 보고 이승하는 두 눈이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졌고 차갑게 식어갔다. 그가 한 쪽 무릎을 꿇은 채 그녀의 앞에 비굴한 자세로 앉아 있다. 그러나 태생부터 고귀한 그는 마치 하늘에서 끌려 내려온 신선처럼 전혀 비천해 보이지가 않았다. 그가 손을 들어 다시 그녀의 얼굴을 만지려 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절망적인 이승하는 실소를 터뜨렸다.“서유, 그동안 당신한테 난 뭐였어?”서유는 그를 쳐다보며 차갑게 대답했다.“그냥 가볍게 만난 거예요. 뭘 그리 진지하게 받아들여요?”그녀는 그에게 일말의 희망도 주지 않았다. 마치 지옥에서 혼을 거두러 온 저승사자처럼 매정했다. 우뚝 솟은 그의 몸이 순식간에 아래로 가라앉았고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가 한 손으로 소파를 짚고 고개를 살짝 젖힌 채 연민조차 없는 그녀를 쳐다보았다.“그냥 가볍게 만난 거니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라?”그는 차갑게 웃었다.“그러니까... 당신은 나랑 잠자리를 하면서도 송사월한테 전혀 미안한 마음이 없었던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