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한참 동안 상처 입은 자신의 손바닥을 쳐다보다가 이승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요.”괜찮다, 어젯밤에 그가 무엇을 했든 이미 지칠 대로 지친 그녀는 더 이상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워싱턴 거리의 벤치에 앉아 하룻밤을 꼬박 앉아 있는 동안 그녀는 정신이 들었다. 그녀와 이승하는 근본적으로 다른 세상의 사람들이었다. 그녀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그 남자는 그녀가 쉽게 쳐다볼 수 없는 위치의 사람이었다.이 남자처럼 먹이 사슬 꼭대기에 있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세상을 살고 있는지 그녀는 알 수가 없다. 충분히 알지도 못하는 이 사람에 대해 믿음을 가졌다가 결국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두 사람 사이에 이러한 신분 차이가 있어도 예전의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저 용감하게 이 사람을 사랑한다면 아름다운 결과가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두 사람이 데이트할 때,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그녀가 메뉴판에 적힌 프랑스어를 읽을 수 없을 때.국회의사당에 참관하러 갔는데 그 안의 사람들이 이승하를 보고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건넬 때.그녀를 데리고 만나러 간 친구들이 모두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던 전 세계의 귀족들이었을 때. 다른 여자랑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고 있는 것을 보고 들어가 물어보려는 찰나 경비원이 문밖에서 그녀의 길을 막을 때. 비를 맞으며 호텔까지 쫓아왔지만 이곳은 영국 왕실 귀족들만 출입할 수 있는 곳이라고 들어가지도 못할 때.그녀는 비로소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문제가 서로에 대한 믿음뿐만이 아니라 엄청난 신분과 배경 차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와 함께 하면서 그녀는 자신의 힘으로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위치에 서고 싶었다. 하지만 그동안...평범한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그가 있는 정상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벽을 넘어야 하는지 그를 보면서 알게 되었다. 하필이면 그녀가 뛰어넘으려고 애쓰고 있을 때, 그에 대한 그녀의 마음은 산산조각이 났고 마음이 무너지게 된 그녀는 완전히
서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당신이 약속했잖아요. 잃어버린 물건들을 찾게 되면 우리 사이도 끝이 날 거라고요. 이젠 물건을 되찾았으니 우리 그만해요.”그 말에 몸이 굳어버린 그는 온몸에서 전해진 엄청난 고통과 절망감에 두 눈이 빨갛게 달아올랐고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이를 악물고 있는 그의 얼굴에 핏줄이 선명히 드러났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며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소독약을 발라주었다. 서유는 고개를 숙인 채 그를 쳐다보면서 이 사람의 따뜻한 온기에 더 이상 흔들리지 않겠다고 경계심을 부쩍 치켜세웠다. 잠시 후, 그가 거즈를 다 감은 것을 보고 그녀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이승하 씨, 귀국하는 비행기표 이미 샀어요. 오늘 이 별장을 떠날 거예요. 그동안 고마웠어요.”미련 없는 그녀의 말에 그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 눈시울이 붉어진 그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당신과 내가 이 워싱턴에서 이 별장에서 얼마나 많은 추억들이 있었는데. 고작 고맙다는 말 한마디뿐이야?”서유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되물었다.“이승하 씨, 내 몸까지 당신한테 바쳤는데 그거면 충분하지 않나요?”그녀의 말을 듣고 이승하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서유, 지금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매번 잠자리는 늘 그가 먼저 원해서였지만 서유도 그를 거절하지는 않았다. 근데 헌신이라는 말로 그녀는 두 사람 사이에 남아 있는 아름다운 추억들을 형용하고 있다. 자신이 한 말이 조금은 과격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녀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침묵하는 그녀의 모습은 그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만들었다. 그는 떨리는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당신이 이것들을 발견한다면 망설임 없이 떠날 거라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나한테조차 전혀 미련이 없을 줄은 몰랐네 .”승하 씨에서 이승하 씨로 변한 서먹한 호칭, 불과 나흘 만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그녀를 보며 이승하는 그 상황
서유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가 이런 말까지 할 줄 전혀 몰랐던 눈치였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이승하 씨, 사실 당신은 날 그토록 사랑하는 거 아니잖아요. 뭐 하러 굳이...”그가 그녀의 말을 끊어버렸다.“내 마음을 꺼내서 당신한테 보여줘야 내가 당신을 정말 사랑한다는 걸 믿을 거야?”그동안 그가 몸을 던져 자신을 구하고 세심하게 보살폈던 일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사랑이 있어서 그런 거겠지. 하지만 그녀를 얻은 뒤에 차갑게 변했던 그의 모습도 진실이었다. 어젯밤의 일을 겪고 나니 그는 지금 뜨겁게 달아오르는 단계인 것 같다. 그녀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가 어떤 단계에 있든 두 사람은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었고 쓸데없이 얽힐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서유는 자신의 얼굴을 감싸고 있던 그의 손을 밀어내고는 가방에서 카드 두 장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이젠 돌려줄게요.”카드를 보고 이승하는 두 눈이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졌고 차갑게 식어갔다. 그가 한 쪽 무릎을 꿇은 채 그녀의 앞에 비굴한 자세로 앉아 있다. 그러나 태생부터 고귀한 그는 마치 하늘에서 끌려 내려온 신선처럼 전혀 비천해 보이지가 않았다. 그가 손을 들어 다시 그녀의 얼굴을 만지려 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절망적인 이승하는 실소를 터뜨렸다.“서유, 그동안 당신한테 난 뭐였어?”서유는 그를 쳐다보며 차갑게 대답했다.“그냥 가볍게 만난 거예요. 뭘 그리 진지하게 받아들여요?”그녀는 그에게 일말의 희망도 주지 않았다. 마치 지옥에서 혼을 거두러 온 저승사자처럼 매정했다. 우뚝 솟은 그의 몸이 순식간에 아래로 가라앉았고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가 한 손으로 소파를 짚고 고개를 살짝 젖힌 채 연민조차 없는 그녀를 쳐다보았다.“그냥 가볍게 만난 거니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라?”그는 차갑게 웃었다.“그러니까... 당신은 나랑 잠자리를 하면서도 송사월한테 전혀 미안한 마음이 없었던 거
자신만의 흔적을 새기려는 듯 그가 그녀의 어깨를 꽉 물자 어깨에서 진한 고통이 전해졌다. 그녀는 아픔을 참으며 고개를 돌리고는 빨간 눈을 하고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이승하 씨, 당신이 이러면 난 당신을 더 원망할 거예요.”그녀의 말에 흠칫하던 이승하는 상관없다는 듯 대답했다.“그럼 원망해. 날 원망하라고. 최소한 당신 마음에 내가 있다는 뜻이니까.”짙은 눈 밑에 차가운 기운으로 가득 찼다. 이내 그가 고개를 떨구고 그녀의 어깨를 더욱 세게 물었다.엄청난 고통에 서유는 식은땀을 흘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미친 듯이 그녀에게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잠시 후, 만족할 때까지 물고 난 뒤에야 남자는 그녀를 놓아주었고 차가운 그의 손끝이 그녀의 맨살을 가로질렀다. “이제는 아이를 가릴 차례야.”말을 마친 그는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려 자신의 몸 위에 앉히고는 그녀의 허리를 눌렀다. 두 사람이 하나가 되었을 때 그가 광기가 가득 찬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미친 듯이 그녀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그녀는 그가 주는 고통을 오롯이 받아내고 있었다. 그날 밤, 그를 떠나고 싶다는 그녀의 마음은 더 굳어졌다. 결국, 그녀는 비행기를 놓쳤고 그는 그녀를 밤새도록 괴롭히다가 그녀가 기절하고서야 그녀를 놓아주었다. 다음 날 아침, 정신을 잃었던 그녀가 천천히 눈을 떠보니 그가 침대 앞에 있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조용히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깼어?”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허우적거릴 힘도 없이 온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모습에 이승하는 손을 뻗어 그녀를 부축해 앉힌 뒤 백합죽 한 그릇을 들고 다가왔다.그는 죽을 휘저으면서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서유, 내가 만든 죽 좀 먹어봐.”그는 한 숟가락 떠서 그녀의 입술 앞에 가져다 댔다. 죽을 건네주는 그의 모습을 보며 흐릿한 그녀의 눈망울에 실망감이 가득 찼다.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는 그녀를 보고 이승하는 어쩔 줄 몰라 했다.“서유, 지난번처럼 내가 먹여줘야 먹을 거야?”
그는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또다시 그녀를 탐했다. 가뜩이나 머리가 아팠던 서유는 더 진한 고통이 전해져 온몸을 떨었다.눈앞에 차갑기만 한 그의 모습을 보고 그녀는 실망감이 더 커졌다.“내가 싫증 나게 되면 그땐 날 보내줄 건가요?”이승하는 손끝으로 그녀의 피부 곳곳을 어루만졌다. “당신이 싫어지는 날은 없을 거야. 그러니까 나한테서 도망칠 생각은 진작에 버리는 게 좋을 거야.”차가운 그의 손길에 서유는 무서워서 피하고 싶었지만 그가 그녀의 몸을 누른 채 그녀를 꼼짝도 못 하게 만들었다.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며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아이가 생기면 내가 떠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그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떠올랐다.“아이가 생기면 당신은 영원히 내 곁에 있게 될 거야.”세 식구가 행복하게 살고 있는 그림을 상상하고 있는 듯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서유는 그런 그를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당신의 아이를 갖는다고 하더라도 난 떠날 거예요.”살갗을 어루만지던 손끝이 순식간에 굳어졌고 남자의 슬픈 눈빛이 싸늘하게 변해갔다. “그건 당신 마음대로 안 될 거야.”그는 그녀를 이 별장에 가둘 생각이었다. 그녀가 아이를 임신한다면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자유를 잃고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서유는 밥도 먹지 않고 약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았다.그녀는 침대에 엎드려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창밖에 펼치진 바다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승하는 침대 옆에 앉아 약을 들고 그녀를 달랬다.“밥은 먹지 않더라도 약은 먹어야 할 거 아니야?”침대 위의 그녀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완전히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듯했다. 그는 갑자기 맥이 빠졌다.“그렇게 그 사람한테 가고 싶은 거야?”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녀가 대답하기만을 기다렸지만 그녀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이승하는 손에 들고 있던 약을 꽉 쥐더니 깊은숨을 들이마시고는 천천히 손을 폈다. “서유, 내가 돌아오면 오로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병원 입구에 멈춰 섰고 그는 그녀를 품에 안고 응급실로 뛰어갔다. 병원 원장은 특별 전화를 받자마자 급히 달려왔고 혼수상태에 빠진 그녀를 응급실로 밀어 넣었다. 이승하는 차가운 바닥에 앉아 넋이 나간 얼굴로 굳게 닫힌 응급실의 문을 쳐다보았다. 잠시 후, 안에서 원장이 나오는 것을 보고 그제야 고개를 들고 의사 가운을 입고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이 대표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영양실조에 걸린 상태에서 몸이 너무 피곤했기 때문에 갑자기 의식을 잃은 겁니다. 별일 아닙니다.”그의 말에 무감각했던 그의 심장은 그제야 조금이나마 온기를 되찾았다. 그는 고개를 들고 원장을 쳐다보았다.“다른 데는요?원장은 상냥한 말투로 그를 안심시켰다. “다른 곳은 별문제 없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셔도 됩니다.”그가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가락을 살짝 웅크린 채 답을 알면서도 결국 한마디 물었다.“임신했습니까?”흠칫하던 원장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서유 씨는 아이를 갖기 힘든 사람입니다.”얼굴이 창백해진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왜죠?”그의 물음에 원장은 사실대로 대답했다.“피임약을 너무 많이 먹은 탓도 있고 게다가 신체적인 상처가 큽니다. 또한 지금 먹고 있는 약의 부작용도 큰 편이고요.”피임약...이 세글자가 그의 심장을 후려쳤고 그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핏기가 전혀 없어 보였다. 아이를 갖고 싶었고 그녀를 곁에 남겨두고 싶었다. 그러나 예전에 저지른 잘못 때문에 그의 희망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그는 실소를 터뜨리더니 이내 눈가가 촉촉해졌다. 평소에 늘 카리스마 넘치던 이 대표가 이런 낭패한 모습을 보이자 원장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이 대표님...”이승하는 눈물을 삼키고 싸늘한 눈빛으로 원장을 쳐다보았다. 그의 차가운 눈빛에 원장은 눈치껏 이내 자리를 떴다.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고민에 빠져있던 그는 벽을 짚고 일어나 병실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병실 안, 침대에 누워있는 서유는 이미
그녀는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고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이승하 씨, 내가 당신의 아이를 낳으면 그땐 날 보내줄 건가요?”고통에 빠져있던 남자는 그녀의 말에 몸이 굳어졌고 고개를 숙인 채 그녀를 쳐다보지 못하였다.그의 감정을 눈치채지 못한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아이를 낳을 수 있어요. 아이를 낳고 나면 그땐 떠나게 해줘요.”이승하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고 온몸이 차가워졌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침대에 누워 있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핏기 하나 없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그는 숨이 막힐 정도로 가슴이 아팠다. 한참 동안 그녀를 쳐다보던 그가 차갑고 떨리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아이 낳지 마. 당신... 보내줄게.”마지막 한 마디를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어렵게 한 글자 한 글자 내뱉었다. 그가 미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포기하고 싶지 않지만 그녀를 어쩔 수 없이 놓아줘야만 했다. 처음부터 그녀를 다치게 한 사람은 그였다. 그녀한테서 엄마가 될 자격을 빼앗아버린 사람도 그였다. 이런 치명적인 잘못은 평생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이리 늘 불행한가 보다. 이 모든 건 다 그가 스스로 자초한 것이었다. 그러니 누구를 탓하겠는가?서유는 의아한 표정으로 얼굴이 하얗게 질린 그를 쳐다보았다.‘날 보내준다고? 아이도 낳을 필요 없이? 내가 정신을 잃었던 것 때문에 이러는 건가?’그가 왜 갑자기 허락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그럼 나 언제 떠날 수 있어요?”이승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몸이 회복되면 공항에 데려다줄게.”그 말에 서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을 감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동안 살이 많이 빠진 그녀를 보고 이승하는 자신이 큰 잘못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손을 잡고는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미안해. 당신한테 그런 약 먹게 해서. 아이를
한참 동안 묵묵히 그녀를 지켜보던 이승하는 천천히 그녀의 손을 놓아주고는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준 뒤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을 떠났다. 별장으로 돌아온 그는 부엌으로 가서 백합죽 한 솥을 끓였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위해 죽을 끓이는 것처럼 온갖 정성을 쏟았다.죽을 다 끓인 후 그는 도시락통에 죽을 넣고 그녀가 좋아하는 반찬 몇 가지를 챙겨 병원으로 향했다. 그가 돌아왔을 때, 피곤했던 서유는 이미 한잠 자고 일어난 상태였다. 양손 가득 물건을 들고 병실로 들어오는 그를 발견하고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승하는 손에 들고 있던 도시락을 침대 위 테이블에 올려놓고는 작은 그릇을 하나 꺼내 백합죽 한 그릇을 담았다. 그는 침대 옆에 앉아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 서유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배 많이 고프지?”그녀는 눈초리를 가늘게 떨며 대답이 없었다. 이승하는 침대를 일으키고 죽 한 숟가락을 떠서 그녀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입도 벌리지 않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기만 하는 그녀의 모습에 이승하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조금이라도 먹어. 그래야 빨리 회복하지.”그녀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듯 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다정했다.서유는 입을 벌리고 그가 건넨 죽을 조금씩 먹었다. 그녀에게 죽을 먹이고 그는 반찬을 몇 가지 집어 그녀에게 주었다. 서유는 더 이상 반항하지 않고 그가 주는 대로 다 먹었다. 두 사람은 그동안의 화기애애한 모습으로 돌아간 듯 평온해 보였다. 그러나 이 평온한 겉면 아래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는 그들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잠시 후, 그녀가 거의 다 먹은 것을 보고 이승하는 그릇을 내려놓고 눈을 치료하는 약을 꺼내 그녀의 입에 가져다 댔다.“약 먹어.”서유는 그를 한 번 쳐다보고는 천천히 입을 벌렸고 약을 입에 넣자마자 그가 물을 건네주었다.물 한 모금을 마시고 약을 모조리 삼키자 그가 휴지를 꺼내 그녀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이전의 광기 어린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한없이 다정다감한 그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