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만의 흔적을 새기려는 듯 그가 그녀의 어깨를 꽉 물자 어깨에서 진한 고통이 전해졌다. 그녀는 아픔을 참으며 고개를 돌리고는 빨간 눈을 하고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이승하 씨, 당신이 이러면 난 당신을 더 원망할 거예요.”그녀의 말에 흠칫하던 이승하는 상관없다는 듯 대답했다.“그럼 원망해. 날 원망하라고. 최소한 당신 마음에 내가 있다는 뜻이니까.”짙은 눈 밑에 차가운 기운으로 가득 찼다. 이내 그가 고개를 떨구고 그녀의 어깨를 더욱 세게 물었다.엄청난 고통에 서유는 식은땀을 흘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미친 듯이 그녀에게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잠시 후, 만족할 때까지 물고 난 뒤에야 남자는 그녀를 놓아주었고 차가운 그의 손끝이 그녀의 맨살을 가로질렀다. “이제는 아이를 가릴 차례야.”말을 마친 그는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려 자신의 몸 위에 앉히고는 그녀의 허리를 눌렀다. 두 사람이 하나가 되었을 때 그가 광기가 가득 찬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미친 듯이 그녀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그녀는 그가 주는 고통을 오롯이 받아내고 있었다. 그날 밤, 그를 떠나고 싶다는 그녀의 마음은 더 굳어졌다. 결국, 그녀는 비행기를 놓쳤고 그는 그녀를 밤새도록 괴롭히다가 그녀가 기절하고서야 그녀를 놓아주었다. 다음 날 아침, 정신을 잃었던 그녀가 천천히 눈을 떠보니 그가 침대 앞에 있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조용히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깼어?”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허우적거릴 힘도 없이 온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모습에 이승하는 손을 뻗어 그녀를 부축해 앉힌 뒤 백합죽 한 그릇을 들고 다가왔다.그는 죽을 휘저으면서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서유, 내가 만든 죽 좀 먹어봐.”그는 한 숟가락 떠서 그녀의 입술 앞에 가져다 댔다. 죽을 건네주는 그의 모습을 보며 흐릿한 그녀의 눈망울에 실망감이 가득 찼다.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는 그녀를 보고 이승하는 어쩔 줄 몰라 했다.“서유, 지난번처럼 내가 먹여줘야 먹을 거야?”
그는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또다시 그녀를 탐했다. 가뜩이나 머리가 아팠던 서유는 더 진한 고통이 전해져 온몸을 떨었다.눈앞에 차갑기만 한 그의 모습을 보고 그녀는 실망감이 더 커졌다.“내가 싫증 나게 되면 그땐 날 보내줄 건가요?”이승하는 손끝으로 그녀의 피부 곳곳을 어루만졌다. “당신이 싫어지는 날은 없을 거야. 그러니까 나한테서 도망칠 생각은 진작에 버리는 게 좋을 거야.”차가운 그의 손길에 서유는 무서워서 피하고 싶었지만 그가 그녀의 몸을 누른 채 그녀를 꼼짝도 못 하게 만들었다.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며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아이가 생기면 내가 떠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그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떠올랐다.“아이가 생기면 당신은 영원히 내 곁에 있게 될 거야.”세 식구가 행복하게 살고 있는 그림을 상상하고 있는 듯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서유는 그런 그를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당신의 아이를 갖는다고 하더라도 난 떠날 거예요.”살갗을 어루만지던 손끝이 순식간에 굳어졌고 남자의 슬픈 눈빛이 싸늘하게 변해갔다. “그건 당신 마음대로 안 될 거야.”그는 그녀를 이 별장에 가둘 생각이었다. 그녀가 아이를 임신한다면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자유를 잃고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서유는 밥도 먹지 않고 약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았다.그녀는 침대에 엎드려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창밖에 펼치진 바다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승하는 침대 옆에 앉아 약을 들고 그녀를 달랬다.“밥은 먹지 않더라도 약은 먹어야 할 거 아니야?”침대 위의 그녀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완전히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듯했다. 그는 갑자기 맥이 빠졌다.“그렇게 그 사람한테 가고 싶은 거야?”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녀가 대답하기만을 기다렸지만 그녀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이승하는 손에 들고 있던 약을 꽉 쥐더니 깊은숨을 들이마시고는 천천히 손을 폈다. “서유, 내가 돌아오면 오로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병원 입구에 멈춰 섰고 그는 그녀를 품에 안고 응급실로 뛰어갔다. 병원 원장은 특별 전화를 받자마자 급히 달려왔고 혼수상태에 빠진 그녀를 응급실로 밀어 넣었다. 이승하는 차가운 바닥에 앉아 넋이 나간 얼굴로 굳게 닫힌 응급실의 문을 쳐다보았다. 잠시 후, 안에서 원장이 나오는 것을 보고 그제야 고개를 들고 의사 가운을 입고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이 대표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영양실조에 걸린 상태에서 몸이 너무 피곤했기 때문에 갑자기 의식을 잃은 겁니다. 별일 아닙니다.”그의 말에 무감각했던 그의 심장은 그제야 조금이나마 온기를 되찾았다. 그는 고개를 들고 원장을 쳐다보았다.“다른 데는요?원장은 상냥한 말투로 그를 안심시켰다. “다른 곳은 별문제 없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셔도 됩니다.”그가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가락을 살짝 웅크린 채 답을 알면서도 결국 한마디 물었다.“임신했습니까?”흠칫하던 원장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서유 씨는 아이를 갖기 힘든 사람입니다.”얼굴이 창백해진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왜죠?”그의 물음에 원장은 사실대로 대답했다.“피임약을 너무 많이 먹은 탓도 있고 게다가 신체적인 상처가 큽니다. 또한 지금 먹고 있는 약의 부작용도 큰 편이고요.”피임약...이 세글자가 그의 심장을 후려쳤고 그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핏기가 전혀 없어 보였다. 아이를 갖고 싶었고 그녀를 곁에 남겨두고 싶었다. 그러나 예전에 저지른 잘못 때문에 그의 희망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그는 실소를 터뜨리더니 이내 눈가가 촉촉해졌다. 평소에 늘 카리스마 넘치던 이 대표가 이런 낭패한 모습을 보이자 원장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이 대표님...”이승하는 눈물을 삼키고 싸늘한 눈빛으로 원장을 쳐다보았다. 그의 차가운 눈빛에 원장은 눈치껏 이내 자리를 떴다.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고민에 빠져있던 그는 벽을 짚고 일어나 병실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병실 안, 침대에 누워있는 서유는 이미
그녀는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고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이승하 씨, 내가 당신의 아이를 낳으면 그땐 날 보내줄 건가요?”고통에 빠져있던 남자는 그녀의 말에 몸이 굳어졌고 고개를 숙인 채 그녀를 쳐다보지 못하였다.그의 감정을 눈치채지 못한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아이를 낳을 수 있어요. 아이를 낳고 나면 그땐 떠나게 해줘요.”이승하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고 온몸이 차가워졌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침대에 누워 있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핏기 하나 없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그는 숨이 막힐 정도로 가슴이 아팠다. 한참 동안 그녀를 쳐다보던 그가 차갑고 떨리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아이 낳지 마. 당신... 보내줄게.”마지막 한 마디를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어렵게 한 글자 한 글자 내뱉었다. 그가 미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포기하고 싶지 않지만 그녀를 어쩔 수 없이 놓아줘야만 했다. 처음부터 그녀를 다치게 한 사람은 그였다. 그녀한테서 엄마가 될 자격을 빼앗아버린 사람도 그였다. 이런 치명적인 잘못은 평생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이리 늘 불행한가 보다. 이 모든 건 다 그가 스스로 자초한 것이었다. 그러니 누구를 탓하겠는가?서유는 의아한 표정으로 얼굴이 하얗게 질린 그를 쳐다보았다.‘날 보내준다고? 아이도 낳을 필요 없이? 내가 정신을 잃었던 것 때문에 이러는 건가?’그가 왜 갑자기 허락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그럼 나 언제 떠날 수 있어요?”이승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몸이 회복되면 공항에 데려다줄게.”그 말에 서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을 감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동안 살이 많이 빠진 그녀를 보고 이승하는 자신이 큰 잘못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손을 잡고는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미안해. 당신한테 그런 약 먹게 해서. 아이를
한참 동안 묵묵히 그녀를 지켜보던 이승하는 천천히 그녀의 손을 놓아주고는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준 뒤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을 떠났다. 별장으로 돌아온 그는 부엌으로 가서 백합죽 한 솥을 끓였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위해 죽을 끓이는 것처럼 온갖 정성을 쏟았다.죽을 다 끓인 후 그는 도시락통에 죽을 넣고 그녀가 좋아하는 반찬 몇 가지를 챙겨 병원으로 향했다. 그가 돌아왔을 때, 피곤했던 서유는 이미 한잠 자고 일어난 상태였다. 양손 가득 물건을 들고 병실로 들어오는 그를 발견하고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승하는 손에 들고 있던 도시락을 침대 위 테이블에 올려놓고는 작은 그릇을 하나 꺼내 백합죽 한 그릇을 담았다. 그는 침대 옆에 앉아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 서유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배 많이 고프지?”그녀는 눈초리를 가늘게 떨며 대답이 없었다. 이승하는 침대를 일으키고 죽 한 숟가락을 떠서 그녀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입도 벌리지 않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기만 하는 그녀의 모습에 이승하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조금이라도 먹어. 그래야 빨리 회복하지.”그녀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듯 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다정했다.서유는 입을 벌리고 그가 건넨 죽을 조금씩 먹었다. 그녀에게 죽을 먹이고 그는 반찬을 몇 가지 집어 그녀에게 주었다. 서유는 더 이상 반항하지 않고 그가 주는 대로 다 먹었다. 두 사람은 그동안의 화기애애한 모습으로 돌아간 듯 평온해 보였다. 그러나 이 평온한 겉면 아래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는 그들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잠시 후, 그녀가 거의 다 먹은 것을 보고 이승하는 그릇을 내려놓고 눈을 치료하는 약을 꺼내 그녀의 입에 가져다 댔다.“약 먹어.”서유는 그를 한 번 쳐다보고는 천천히 입을 벌렸고 약을 입에 넣자마자 그가 물을 건네주었다.물 한 모금을 마시고 약을 모조리 삼키자 그가 휴지를 꺼내 그녀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이전의 광기 어린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한없이 다정다감한 그였
며칠 동안 서유는 병원에서 링거를 맞았고 이승하는 그녀의 옆에서 세심하게 그녀를 돌보았다.퇴원 당일, 그녀가 욕실로 들어가 씻는 동안 이승하는 버티지 못하고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밖에서 지키고 있던 경호원이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달려와 그를 부축했다.“대표님, 괜찮으십니까?”그는 경호원을 밀어내고 한 손으로 벽을 짚으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차 대기시켜.”그가 걱정되기는 했지만 경호원은 그의 분부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병실을 나갔다. 이승하는 소파에 앉아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피로가 가득한 얼굴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잠시 후, 욕실을 나온 그녀는 몸이 불편한 듯 눈을 감은 채 소파에 앉아있는 그를 발견하였다. 그녀는 옷을 껴안고 그를 향해 다가갔고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머리가 아파. 조금 앉아 있다가 별장에 데려다줄게.”서유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를 다시 한번 쳐다보며 물었다.“의사 선생님 불러줄까요?”그녀의 물음에 그는 손을 저었다.“그럴 필요 없어.”말을 마치고는 이내 눈을 감았다.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돌아서서 병실에 있는 옷가지를 챙겼다. 잠시 후, 경호원이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대표님, 차 준비되었습니다.”다시 눈을 뜬 이승하는 경호원에게 자신을 부축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의 옆에서 오랫동안 그를 보필해 온 경호원은 그의 눈빛 하나만으로 이내 그의 뜻을 알아차렸고 냉큼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이승하는 경호원의 부축을 받아 소파에서 일어나 몸을 안정시킨 후 등지고 서 있는 서유를 향해 걸어갔다. “짐은 다 썼어?”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닥에 있는 상자를 들어 올리려고 손을 뻗었다. 바로 그때, 이승하가 그녀를 막아서며 다정하게 말했다. “이런 건 경호원들 시켜.”말을 마친 그는 그녀를 끌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차에 올라탔다.그는 경호원들에게 짐을 정리하라고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와 함께 더 있고 싶은 마음에서 그런 걸지도 모른
차는 곧 공항에 도착하였고 서유가 차에서 내리려고 하자 그가 그녀의 손을 빠르게 잡아당겼다.얼굴이 하얗게 질린 그는 그녀의 손을 꼭 쥐고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데려다줄게.”그녀가 말을 하려할 때 그가 그녀의 말을 끊어버렸다.“당신 배웅하고 갈 거니까 거절하지 마.”그는 그녀를 데리고 차에서 내렸고 경호원에게 그녀의 물건을 가져오라고 한 후 직접 그녀를 공항 안까지 데려다주었다.공항 안에 앉아 있는 심이준을 발견한 그녀는 고개를 살짝 들고 옆에 있던 남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이쯤에서 돌아가요.”이내 그녀가 한 마디 더 보탰다.“그동안 고마웠어요.”말을 마친 그녀가 손을 빼려고 하는데 그가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몇 번 발버둥 치던 그녀는 그를 올려다보았다.“또 약속 안 지킬 거예요?”이승하는 고개를 흔들며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 그가 고개를 숙이고는 그녀의 어깨에 기대어 그녀에게 애원했다. “서유, 한 번만 더 나 좀 안아줄래?”그 말에 독하게 마음먹었던 그녀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러나 그녀는 손을 뻗어 그를 안지 않고 그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는 그녀를 보고 그는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아팠고 힘없이 그녀를 놓아주었다. “가. 뒤돌아보지 말고.”그녀는 그를 한번 쳐다보고는 경호원의 손에서 캐리어를 건네받은 뒤, 망설임없이 뒤돌아서서 심이준의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아담한 뒷모습을 보면서 이승하는 눈시울이 붉여졌다. 그녀는 결국 그를 버리고 떠났다...물거품처럼 모든 것이 그만의 헛된 꿈이 되고 말았다. 그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지친 몸을 힘겹게 가누고 있었다. 떨리는 손을 들어 경호원의 어깨에 얹었는데 갑자기 복부에서 피가 솟구치는 느낌이 들었다. 몸이 뒤집힐 정도로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이 전해졌고 결국 참지 못하고 그가 입에서 피를 토해냈다.“대표님.”깜짝 놀란 경호원은 입가에 피를 흘리고 있는 그를 일으켜 세우고는 다른 경호원들을
임무 때문에 귀국하려던 강세은은 마침 공항에 들어서자마자 피를 토하고 있는 이승하를 발견하게 되었다.깜짝 놀란 그녀는 선글라스를 벗고 하이힐을 신은 채 그의 앞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이승하를 쳐다보고는 경호원을 향해 물었다.“이 대표님, 왜 이러시는 거예요?”경호원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젓더니 공항 검색대를 통과하고 있는 여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경호원의 시선을 따라 뒤도 돌아보지 않는 서유를 쳐다보고는 이내 동정 어린 표정으로 이승하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빠의 말대로 이승하는 사랑에 목숨 거는 사람이었다.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그녀는 좋은 마음으로 경호원에게 당부했다.“공항 부근에 우리 병원이 있어요. 대표님 모시고 가서 링거라도 맞게 해요.”할 수만 있다면 머리에도 침을 놓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 때문에 죽느냐 사느냐 하는 모습이 참 마음에 안 들었다.양아버지는 이승하가 초등학교 때부터 비밀리에 모든 것을 기획해 왔다. 이것은 양아버지가 평생 심혈을 기울인 것이었고 결코 저버릴 수가 없는 것이었다. 강세은은 경호원에게 당부한 뒤 전용기를 타러 가려고 발걸음을 돌렸다. 바로 이때, 그녀는 먼 곳에서 그녀를 쳐다보는 성이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질투심에 가득 찬 성이나의 표정을 보면서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무의식적으로 이승하를 힐끗 쳐다보았다.‘설마 성이나가 이 대표님한테...’강세은 손에 들고 있던 선글라스로 항상 그녀의 곁에 붙어 다니던 여자 경호원을 쿡쿡 찔렀다. “가람아, 저 여자에 대해 좀 알아봐.”변가람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캐리어를 그녀한테 넘기고 이내 자리를 떴다. 한편, 강세은은 캐리어를 붙잡고 다시 한 번 이승하를 쳐다보았다.“이 대표님, 몸 잘 챙기세요. 그럼 전 이만.”서유밖에 안 보이는 이승하는 강세은을 신경조차 쓰지 않았고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듣지 못했다. 그는 서유를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한편으로는 그녀가 돌아보기를 바랐고 또 한편으로는 그녀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