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의 수단은 서유도 아는 바 있기에 더 깊이 생각하기 싫어 이렇게만 대답했다.“아마도 워싱턴을 떠났나 보죠.”심이준도 이를 크게 신경 쓰지 않는지 인사만 하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서유가 핸드폰 연락처에서 빠져나오는데 정가혜가 영상통화를 걸어왔다.통화를 수락하자 바텐더에 기댄 정가혜가 화면에 나타났다.“서유야, 워싱턴에 간 지 보름이나 되는데 나 안 보고 싶어?”“보고 싶지.”서유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다 정가혜 손에 든 담배를 발견하고는 잔소리를 늘어놓았다.“가혜야, 담배 좀 적게 펴.”정가혜는 담배에 대한 의존성이 꽤 심한 편이었다. 금연한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다시 담배를 꺼내 들었다.여자는 그래도 술과 담배를 적게 하는 게 좋은데 정가혜는 신경 쓰지 않았다.맨날 술과 담배를 달고 살았고 클럽에 있는 시간이 많았기에 끊으려 해도 끊을 수가 없었다.정가혜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눈썹을 추켜세우며 말했다.“고급 담배라 몸 안 상해. 걱정하지 마.”서유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물었다.“가혜야, 보름 동안 잘 지냈어?”정가혜가 예쁜 눈을 흘기며 말했다.“이제야 내 생각이 난 거야? 보름 동안 뭐 했어? 문자해도 한참 뒤에나 답장하고...”서유는 민망한 듯 고개를 숙였다.“나...”“잠깐만.”정가혜는 뭔가 발견한 듯 눈을 크게 뜨고 서유의 목을 뚫어져라 쳐다봤다.“너 목에 그 빨간 흔적들은 뭐야?”이 말을 들은 서유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지더니 얼른 잠옷을 위로 당겼다.목을 가리고 싶었지만 잠옷은 마치 그녀와 심술이라도 부리듯 올리자마자 바로 아래로 떨어졌다.눈치가 빠른 정가혜는 그녀의 궁색한 모습을 보고 단번에 무슨 상황인지 알아챘고 일부러 서유를 놀려댔다.“모기한테 물리기라도 했나보지?”서유가 서둘러 해명하려 했지만 정가혜가 한발 먼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워싱턴의 모기가 이렇게 큰 줄은 몰랐네.”정가혜의 말에 웃음이 터진 서유는 올라왔던 홍조가 조금 가라앉았지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서유는 얼굴에 너무 화끈거려 몇 마디 반박하려는데 영상에서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하얀 슈트를 입은 남자가 정가혜 손에 들린 담배를 낚아채 비벼서 끄고는 쓰레기통에 버리더니 정가혜를 바라봤다.“담배 피우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왜 말을 안 들어요?”화면 너머로 갑자기 나타난 이연석을 보고 넋을 잃었다.정가혜는 서유보다 더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 이연석이 클럽으로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고 먼저 그녀에게 말을 걸 줄은 몰랐다.전에 클럽에서 그렇게 얼굴을 붉히고 나서는 만난 적이 없었다. 마치 죽을 때까지 마주치지 않을 듯한 기세였다.하지만 몇 달이 지난 지금 이연석은 자세를 낮추고 다시 정가혜의 클럽에 찾아왔고 예전처럼 그녀의 담배를 뺏어갔다.정가혜는 도대체 뭐 하자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저번에 병원에서 그가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자와 함께 산부인과로 가는 걸 분명 봤는데 말이다.조심스럽게 부축하는 모습은 여자를 임신시켜 놓고는 낙태하러 가는 게 틀림없어 보였다.이연석은 여자를 자주 바꿨지만 그래도 한번 만나면 꽤 일편단심이라는 걸 정가혜는 알고 있었다. 다른 여자가 생겼으면서 왜 그녀를 찾아온 걸까?정가혜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이연석은 딱히 표정이라고 할게 없이 그저 화면 속의 서유를 힐끔 쳐다봤다.“서유 씨, 친구 좀 빌려 갈게요.”이연석은 이렇게 말하더니 영상 통화를 끝냈다.서유는 그렇게 끝나버린 영상통화 화면을 보며 점차 정신을 차렸다.정가혜와 이연석의 사이는 사실 어딘가 복잡했다.서유는 정가혜에게 이연석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정가혜는 그냥 스쳐 가는 바람이라고 했다.하지만 3년이라는 시간을 사귀었는데 정말 스쳐 가는 바람이 맞을까?둘 사이의 감정은 두 사람이 알아서 해결하겠지.서유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원형 계단을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요 며칠 정말 너무 삭신이 쑤셨다. 계단 하나 내려가는 것도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였다.서유는 한 걸음 한 걸음 간신히 계단에서 내려와 거실로 향했다.
서유는 맑고 깨끗한 눈동자로 이 물건들을 한참이나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다시 봉지를 닫았다.뽀얀 얼굴은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이미 결정을 내렸으니 이런 작은 일에 휘둘리지는 않을 것이다.사실 서유는 잘 알고 있었다. 잃어버린 물건을 찾았음에도 제때 그녀에게 돌려주지 않은 건 그녀와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어서였을 것이다.이승하가 그녀를 위해 몸을 던졌을 때, 많이 다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부터 걱정할 때, 그때 이미 결정은 끝났다.서로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으면 이런 작은 꼼수쯤은 신경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서유는 봉지를 잘 닫은 뒤 아까 챙긴 도구들도 다시 원래 자리로 가져다 놓았다.그녀가 이 도구들을 가져간다면 이승하도 눈치챌 테니 아예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할 생각이었다.욕실에서 나온 이승하는 서유가 보이지 않자 마음이 불안해져 얼른 아래층으로 내려왔다.도우미들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이승하의 모습에 놀라 옆으로 비켜섰고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한바퀴 빙 둘러봐도 서유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잘생긴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혼자 나가게 하지 말라고 내가 당부하지 않았나요?”화를 억지로 누르는 듯한 목소리에 도우미들은 그가 왜 갑자기 이렇게 화가 났는지 알게 되었다.“미스터 이…”아까 서유와 얘기를 나누었던 도우미가 부들부들 떨며 앞으로 나왔다.“미스 서는 어디 간 게 아니라 서재에 그림 도구 찾으러 갔습니다.”이를 들은 이승하는 분노가 사그라들긴 했지만 이내 극도의 공포에 휩싸였다.그는 주먹을 불끈 쥔 채 서재로 향했고 마침 서재에서 나오는 서유와 마주쳤다.그는 멈칫하더니 앞으로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두려움이 그를 잠식했다.서유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얼굴에는 큰 감정 기복이 없어 보였다. 그저 그를 향해 입꼬리를 올릴 뿐이었다.“승하 씨, 니콜이 서재에 그림 도구가 있다고 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못 찾겠어요. 좀 찾아줄래요?”이 말에 딱딱하게 굳었던 이승하의 얼굴이 조금 풀렸고 꽉 움켜쥐었던 주먹에도 슬슬 힘이 풀렸다.그는 단숨
오전 내내 시달리고 나서야 이승하는 서재에서 그림 도구를 꺼냈다.서유는 손을 내밀어 받으려 했지만 이승하가 서유의 손을 잡더니 다른 서재로 데리고 갔다.이 서재는 전에 봤던 서재보다 더 컸다. 해살이 유럽풍 인테리어를 한 방안에 비쳐 들자 너무 따듯해 보였다.이승하는 물품을 기다란 테이블에 내려놓더니 고운 손으로 서유의 단발을 매만졌다.“서유야, 이 서재 괜찮아?”“괜찮네요.”건축 도면을 그리려면 긴 테이블이 필요했는데 원목으로 만든 이 테이블은 크고 넓은 게 치수를 재고 구도를 그리는데 딱이었다.서유는 테이블 앞에 앉아 도면을 펼치고 구도를 설계하려는데 이승하가 그녀를 안아 올렸다.이승하의 품에 안긴 이승하는 수줍어하며 밀어냈다.“아니...”이를 들은 이승하의 창백한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너 아직 점심 식사 전이잖아. 내려가서 뭐 좀 먹자.”이승하를 오해한 서유는 얼굴이 빨개지더니 머리를 그의 튼실한 가슴에 파묻고 품에 안긴 채 주방으로 향했다.오후에 심이준은 상대가 원하는 스타일을 소통한 후 서유에게 보내주며 먼저 초안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서유는 핸드폰 화면을 슬라이드 해서 여러 번 확인했고 설계 방향을 대략 정했다.그녀는 서재로 돌아와 테이블 앞에 앉아 펜슬과 자를 들고 도면을 그리기 시작했다.워싱턴의 사오월은 초봄이라 햇살이 따듯했다. 햇살은 창밖의 나뭇잎 사이를 뚫고 방 안으로 들어와 그녀의 몸을 따듯하게 비춰줬다.원래도 충분히 아름다운 얼굴에 햇살이 언뜻언뜻 비치니 더욱 매혹적으로 보였다.이승하는 창문 아래에 놓인 소파에 앉아 한 손으로는 책을 들고 한 손으로는 머리를 짚고 있었다.이승하는 덤덤한 눈빛으로 책을 보다가 열심히 도면을 그리고 있는 서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시선 한 번에 이승하는 그대로 빠져들었다. 어두웠던 눈동자에 점점 빛이 스며들었다.그는 서유가 도면을 그리는 걸 조용히 바라봤다. 두 사람이 서재에 앉아 있는 모습이 너무 따듯하고 아름다워 보였다.그렇게 앉아서 몇 시간을 그린 서유는 깔깔해진
“서유야.”이승하는 도면을 손으로 누르며 열심히 도면을 그리고 있는 서유를 내려다봤다.“내가 신분도 다시 찾아주고 회사도 만들어줄게. 앞으로는 네 신분으로 마음껏 설계해.”자를 들고 있던 서유가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이승하를 바라보며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신분을 되찾는 일은 언니 꿈 이뤄주고 나서 보는 걸로 해요.”언니 김초희는 좋아하는 프로젝트를 50개 넘게 받아왔지만 설계를 완성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서유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언니 신분으로 이 프로젝트를 잘 끝내 하늘에 있는 언니가 편히 쉴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다.“하지만 회사를 만드는 일은 됐어요.”언니의 꿈을 완성하고 나면 혼자만의 힘으로 이승하와 견줄 수 있는 자리까지 올라가고 싶었다.그와 맞먹는 위치까지는 아니더라도 지금처럼 학력도 배경도 없는 여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이승하는 마치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이렇게 말했다.“서유야, 난 너를 위해 그 무엇도 만들어줄 수 있어. 그러니 다른 생각은 안 해도 돼.”자리에서 일어난 서유는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이승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알아요. 하지만 어떤 일은 스스로 해내고 싶어요.”정말 어느날엔가 이승하가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한다면 스스로 정상까지 올라가지 않는 이상 남자 덕으로 성공했다는 타이틀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서유의 굳건한 눈빛에서 이승하는 전에는 보지 못했던 자신감을 느꼈다. 지금의 서유는 마치 다시 태어난 것처럼 우러러보게 했다.이에 서유에 대한 이승하의 사랑은 점점 깊어져만 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해야 할 게 있다면 반드시 해줄 테니 말이다.서유는 설계 도면에 집착했고 이승하가 말려도 듣지 않았다. 이승하는 별수 없이 그녀에게 먹거리와 약을 준비해 주고는 묵묵히 곁을 지켰다.새벽까지 노력한 끝에 초안의 틀은 거의 잡았지만 아직 더 다듬어야 했다.그녀가 다시 허리를 숙이고 그림에 몰두하려 하자 이승하가 그녀를 번쩍 안아 올리더니 안방으로 향했다.서유는
서유는 멈칫하더니 아무 생각 없이 이승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이승하는 턱을 살짝 들고 그녀의 눈동자를 조용히 바라보며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서유는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고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기억이 안 나는데…”만약 서유가 예전처럼 꿈에서 송사월의 이름을 외쳤다면 둘 사이는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다.이승하의 가슴에 올려진 서유의 손에 힘이 들어갔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미안해요. 나갈게요…”서유가 몸을 일으켜 나가려는데 이승하가 그녀를 안고 방향을 돌려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그러더니 예쁜 눈으로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이승하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볼에 키스하고는 그녀를 안고 욕실로 향했다.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소리가 물소리와 함께 간간히 들려왔다.이승하가 아직 욕구를 채 쏟아내지 못한 듯 매혹적인 목소리로 말했다.“서유야, 드디어 네가 꿈에서 내 이름을 불렀어…”서유는 너무 피곤했지만 그래도 억지로 버티면서 도면을 그렸다. 그리면서도 속으로 이승하를 욕했다.그렇게 분노로 가득 찬 마지막 한 획이 그어졌고 자를 내려놓는 순간 서유는 의자에 그대로 널브러졌다.얼마 쉬지도 못했는데 심이준이 전화를 걸어와 도면을 재촉했다.“도면 완성했어요?”서유는 힘이 다 빠진 목소리로 답했다.“완성했어요. 사진으로 보내줄게요…”“사진은 안 되고 원본이 필요해요. 주소 보내주면 내가 그쪽으로 갈게요.”서유는 창가에 앉아 경제 잡지를 보고 있는 이승하를 힐끔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심이준 씨가 직접 원본을 가지러 오겠다는데요?”이승하가 덤덤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말했다.“올 용기는 있고?”수화기 너머로 듣고 있던 심이준은 이승하의 차가운 목소리에 얼른 이렇게 대답했다.“실례가 많았네요. 그럼.”서유는 꺼진 화면을 바라보며 몇초간 멍해 있더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심이준은 왜 이승하를 이렇게 두려워하는 걸까?서유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있는데 심이준의 문자가 하나둘 날아왔다.[이승하 씨 너무 무서
워터풀 시티에 도착한 심이준은 눈앞에 펼쳐진 궁전 같은 별장에 조화롭던 얼굴이 일그러졌다.심이준은 이승하에게 작은 반항이라도 하기 위해 신고 온 슬리퍼를 내려다봤다.다시 한번 별장을 쳐다본 심이준은 방금 한 결정이 경솔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별장 문이 활짝 열리자 심이준은 침을 꿀꺽 삼키고 안으로 들어갔다.내부 인테리어가 밖에서 본 것보다 더 휘황찬란하자 심이준은 급 서러워지기 시작했다.“서유 씨, 혹시 그거 알아요? 대표님이 당신을 데려가던 그날 나는 어디서 지냈는지?”서유는 도면을 돌돌 말며 물었다.“어디서 지냈는데요?”심이준의 깔끔한 미소가 그대로 굳더니 이렇게 말했다.“육교 아래서 몇몇 아프리카 노숙자들과 함께요!”도면을 말던 서유의 손이 멈칫하더니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미안해요. 그런 줄은 몰랐네요…”심이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흔들며 이렇게 말했다.“비록 서유 씨가 나보다 좋은 데서 지내긴 하지만 당신은 2억을 잃었는걸요.”서유가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더 비참하다면 심이준도 그나마 심리적 위안을 찾을 수 있었다.“하지만 뭐, 대표님과 결혼한다면 2억도 아쉬운 돈은 아니겠네요.”다시 한번 찬찬히 짚어본 심이준은 불공평하다는 생각에 얼굴이 일그러졌다.똑같이 외국에서 일하는 처지에 서유는 재벌을 만나고 있는데 자신의 곁엔 아무도 없다는 생각에 심이준은 마음이 씁쓸했다.서유는 표정이 다채로운 심이준을 힐끔 쳐다보더니 잘 말아둔 도면을 그의 손에 넘겨줬다.“이준 씨, 빨리 가서 일 봐요. 고객 쪽에서 만족스럽지 않은 곳이 있다면 기록해서 나한테 알려줘요. 수정할게요.”심이준은 표정을 정리하고 도면을 받았다. 그러더니 씩씩거리며 서재를 나섰다.서재에서 나오자마자 앞으로 팔짱을 낀 채 원형 계단에 기대 선 이승하와 눈이 마주쳤다. 이승하는 그를 향해 턱을 살짝 세우더니 이렇게 말했다.“심이준 씨, 제 서재로 오시죠. 잠깐 할 얘기가 있습니다.”“아니요, 우리 사이에 무슨 할 얘기가 있다고…”심이준이 놀라서 뒤
수영장의 물은 매우 맑았고 달빛 아래 잔잔한 물결이 일고 있었다.이승하는 서유를 수영장 벽으로 몰더니 매혹적인 목소리로 그녀를 홀렸다.“서유야, 너 여태까지 나 사랑한다고 말해준 적 없어…”사랑한다는 말은 일종의 약속이었다.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맹세와도 같았다.아직 용기가 부족한 서유는 하늘에 떠 있는 청아한 달빛을 바라보며 어떻게 입을 떼야 할지 몰랐다.이승하는 품속의 여인을 바라보며 그녀가 ‘사랑한다’고 말해주길 기다렸지만 결국 원하는 답을 얻지는 못했다.이승하의 축 처진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입꼬리를 당기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내가 너무 많은 걸 바랐나 봐.”서유가 입을 뻐끔거리며 뭔가 말하려는데 이승하가 그를 번쩍 들어 올리더니 타올로 그녀의 몸을 감싸주고는 욕실로 데려갔다.이날 밤 이승하는 아무 말 없이 뒤에서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사실 이걸로 충분했다.서유가 몇 번이나 그를 돌아봤지만 그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녀가 뒤척거리며 잠을 이루지 못하자 이승하가 꼭 감고 있던 눈을 뜨더니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잠들 수 있게 다독였다.“서유야, 자. 내일 데려갈 데가 있어.”서유는 그의 다독임 하에 불안한 마음을 안고 꿈나라로 향했다.무슨 꿈을 꿨는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깨어나 보니 정신이 흐리멍덩했다.서유는 이런 정서를 잘 감추느라 애썼고 다행히 이승하도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와 같이 아침을 먹고는 그녀를 데리고 승마장으로 향했다.서유는 말을 타면서 힐링할 거라고만 생각하고 대충 연하게 화장하고 갔는데 알고 보니 그의 친구들을 만나러 간 것이었다.이승하의 친구는 다들 있는 집 자제들이었다. 국적은 미국, 영국, 프랑스 그리고 혼혈도 있었다.그들은 하나같이 키와 외모가 출중했고 성격도 젠틀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는 것에도 품위가 느껴졌다.서유는 영어를 꽤 잘하는 편이라 그들과 대화가 가능했다. 조금 더 얘기를 나누려는데 기다란 뒷모습 하나가 시야를 가렸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