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 당시 그는 직접 서유를 화장터로 보냈었다. 근데 서유가 어떻게 이리 멀쩡하게 그의 앞에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그는 그녀가 환각이라는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등을 쓰다듬는 손에서 그녀의 체온을 느끼게 되자 그는 비로소 그녀가 진실한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떨리는 두 손으로 다리 위에 엎드려 울고 있는 소녀의 얼굴을 들고 자세히 그녀를 훑어보았다.3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어도 그녀는 변한 게 없었다. 예전에 창백했던 얼굴은 지금 생기가 넘쳐 보였다. 병고에 시달리던 과거와는 결별한 듯 지금의 그녀는 새롭게 태어난 것 같았다. 그런 그녀를 보며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서유야.”서유는 그를 올려다보며 눈물을 머금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나 여기 있어.”그녀는 항상 있었다. 송사월의 따뜻한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다행이다. 네 말 들어서.” “무슨 말?”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송사월은 흠칫했다.‘서유가 나한테 했던 말을 잊어버렸나 보네. 하지만 괜찮아. 내가 기억하고 있으니까.’그는 손을 뻗어 혼신의 힘을 다해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서유야, 이번에는 난 널 잊지 않았어.”그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는 날마다 수없이 그녀를 생각하고 그녀의 얼굴을 머릿속에 깊이 새겼다. 가끔 기억이 흐릿해져도 그는 그녀를 잊지 못하였다. 서유가 그한테 다음 생에는 다시는 자신을 잊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서유는 또다시 눈물을 왈칵 쏟았다.“사월아, 미안해.”‘이렇게 날 사랑하는 사람인데. 내가 죽기 전에 다른 남자를 만나고 싶어 했을 때 사월이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송사월은 그녀를 껴안고 몇 번이나 이 말을 반복했다.“서유야, 나한테 미안해하지 마.”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흐느끼고 있는 그녀를 보며 그는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그녀를 위로했다. 두 사람은 함께 부둥켜안고 예전처럼 서로 의지하며 서로를 알아가고 있었다. 유일하게 변한 것은 그가 그녀를 잊어버렸던
멍하니 서 있던 그녀는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천천히 시선을 그의 다리로옮겼다. “다리는 왜 이렇게 된 거야?”송사월은 그녀의 시선을 따라 불구가 된 자신의 다리를 쓰다듬으며 담담하게 말했다.“총상일 뿐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총상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서유는 그가 자신 때문에 자살했다는 생각이 떠올라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내 묘비 앞에서...”그는 고개를 흔들며 부정했다.“아니야 그런 거.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니까 너무 자책하지 마.”그러나 그의 말을 믿지 않았던 서유는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사월아, 우리가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마인데. 나한테 말 못 할 얘기가 뭐가 있어?”두 사람은 서로의 첫사랑이자 오랜 세월을 가족처럼 지낸 사이라서 세월이 흘러도 지울 수 없는 정이 있었다. 그녀를 보며 한참을 침묵하던 그가 마침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네가 죽고 7일째 되던 날, 너 따라가려고 했는데 이승하 씨가 날 막았어.”말을 하면서 그는 무의식적으로 서유를 쳐다보았다. 아무런 변화가 없는 그녀의 안색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이승하 씨가 내 손에 있던 총을 빼앗아 갔어. 난 죽을 마음이 확고했고 그 사람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다리에 총상을 입게 되었어.”서유는 고개를 들고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바보 같이 이게 뭐야?”그녀의 말에 그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서유야, 너 없이 사는 게 나한테 무슨 의미가 있겠니?”마음속의 죄책감이 더 커져 참을 수 없을 만큼 그녀를 아프게 만들었다. 송사월은 살아있지만 다리를 다쳐서 예전처럼 자유롭게 행동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그녀와 무관한 일이라며 자책하지 말라고 한다. 이 모든 것이 다 그녀 때문에 일어나 일인데 말이다.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다리를 쓰다듬으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미안해, 내가 널 이렇게 만들었어.”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를 다독였다. “서유야, 정말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 내가 잘못해서 다친
주저 없이 별장을 나서는 서유의 뒷모습에 송사월은 눈시울이 붉어졌다.심장을 칼로 후벼파는 듯한 고통에 숨이 멎을 것만 같았고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녀를 안고 가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하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병신이 되어버린 그가 무슨 자격으로 그녀를 옆에 남기겠는가.그는 고개를 들어 노을을 바라보며 가득 차오른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애썼지만 바람과는 달리 계속 볼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손으로 눈을 가린 채 마음이 찢어질 듯 울고 있는데 가녀린 몸집 하나가 나타나 눈을 찌르는 햇살을 가려줬다.손 틈 사이로 어렴풋이 서유가 고개를 살짝 비튼 채 손에 든 생수를 따서 그에게 건네주는 게 보였다.“사월아, 입술이 말라서 갈라졌길래 물 가지러 민정이한테 다녀왔어. 내가 도와줄게.”간 줄 알았던 서유가 아직 여기에 남아있다.송사월은 기쁜지 아니면 짐이 될까 봐 걱정인지 알 수 없었다.그저 얌전하게 입을 벌린 채 그녀가 챙겨줄 수 있게 했다.서유는 송사월이 고분고분 말을 듣자 입꼬리가 올라갔고 다시 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사월아, 나한테 짐이 될까 봐 나를 밀어내려 하는 거 다 알아.”“전에 내가 그렇게 심한 심장병을 앓을 때도 넌 나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극진하게 보살펴줬잖아.”“지금 나 때문에 다리를 다쳐서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내가 널 두고 어떻게 가.”서유는 송사월의 다리를 만지며 결심이라도 한 듯 말했다.“이 다리가 다 나아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네 곁에 남을 거야. 그때도 내가 귀찮게 느껴진다면 그때 다시 밀어내.”그녀의 진심에 송사월은 마음이 따뜻해졌다.“서유야, 넌 항상 날 바보 같다고 놀려도 사실 제일 바보 같은 건 너야.”서유의 예쁘장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송사월 씨, 바보라는 단어는 아무래도 너한테 더 잘 어울리는 거 같은데?”서유가 죽기 전 그렇게 모진 말을 했는데도 그는 주저하지 않고 그녀를 따라 죽음을 선택했다.그래도 바보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서유는 어두워진 주위를 살피더
김민정이 가고 나서도 서유는 약간 어리둥절했다. 이승하가 송사월을 구해줬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구해 보살피게 도와줬다니, 생각도 못 한 일이었다.서유가 멍해 있자 송사월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손에 든 수저를 내려놓으며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서유야, 3년간 이승하 씨가 나를 살아가게 하려고 많은 일을 해줬어...”“이런 방법으로 속죄하려는 것 같아.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몰라도 너를 참 많이 사랑하는 건 알겠더라.”마지막 한마디로 송사월은 그때 서유에게 진실대로 말하지 못한 아쉬움을 완전히 씻어냈다.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몰래 그녀를 지켜봤다. 3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이승하를 사랑하고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말이다.서유는 시선을 아래로 늘어트리며 눈동자에 깃든 감정을 숨기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근데 너는 분명 살아 있는데 왜 뉴스에서는 네가 죽었다고 그러는 거야?”서유가 송사월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피했다는 건 아직 마음속에 이승하를 담고 있는 걸까 아니면 이미 내려놓았다는 걸까...송사월은 더는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돌아온 답안을 받아들일 수 없을까 봐 티 나지 않게 대답했다.“누군가가 나를 죽이려고 해, 나를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가짜 뉴스를 뿌린 거야.”서유가 죽은 지 7일이 지나고 송사월도 서유를 따라서 죽으려고 하다가 실패하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달려 나와 그를 향해 총을 쏘아댔다.하지만 한발 빨랐던 이승하가 단숨에 그를 밀어내고 지켜내면서 그를 해치려는 사람과 싸웠다.이승하가 데려온 사람이 총소리를 듣고 달려와 합세하지 않았으면 이승하도 묘지에서 목숨을 달리했을 수도 있다.송사월은 그때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서유에게 알려주고는 말했다.“이승하 씨도 그때 나 구하느라 많이 다쳤어...”그는 살고 싶지 않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승하가 그의 목숨을 구해줬다.서유가 이 별장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것도 아마 이승하가 보냈을 것이다.하여 더는 서유에게 이 사실을 감춰서는 안 된다고 생각
젓가락을 쥔 송사월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멍한 표정으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서유를 바라봤다.서유는 지현우의 전화를 끊어버리고 설명했다.“사월아, 나 깨어나고 네가 죽었다는 소식에 너무 믿을 수가 없어서 하루라도 빨리 귀국해서 진위를 확인하고 싶었어. 근데 현우 씨는 내가 언니 심장을 가지고 갔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까 봐 귀국을 막았고. 그래서 일단은 김초희의 이름으로 현우 씨와 결혼한 거야. 난 이 사람한테 아무 감정 없어.”이를 들은 송사월의 눈빛이 경악에서 동정으로 바뀌었다.“서유야, 미안해. 내 잘못된 선택 때문에 이런 사람에게 협박이나 당하게 하고.”서유는 고개를 저으며 마치 모든 걸 꿰뚫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내가 결혼하지 않겠다고 해도 언니 심장 때문에 꽉 잡고 있을 거야.”송사월의 미간이 점점 구겨졌다.“서유야, 지현우 좋은 사람 아니야. 그 사람이랑 같이 있으면 너도 상처받게 될 거야.”이 점은 서유도 잘 알고 있었다.“좋은 사람 아닌 거 알아. 나도 그 사람이 나를 놓아줄 수 있게 방법을 생각해 볼 거야.”송사월은 서유가 다른 남자에게 빌어야 한다는 생각에 표정이 어두워졌다.만약 그가 아직 화진 그룹의 대표였다면 지현우와 대적해 서유를 이런 곤란한 상황에서 빼줄 수 있을 텐데 말이다.하지만 지금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고 그저 휠체어에 앉아있는 병신이라 서유를 돕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서유의 보살핌을 받아야 했다.그런 그의 머릿속에 갑자기 이승하가 떠올랐다. 권력이 하늘을 찌르는 이승하가 나선다면 무조건 서유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그는 주먹을 불끈 쥐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서유야, 이승하 씨 지금 이씨 가문과 박씨 가문의 수장이기도 하고 화진 그룹의 주주거든. 지씨 집안은 절대 상대가 안 돼. 이승하 씨가 나서준다면...”서유는 멈칫하더니 그의 말을 끊었다.“사월아, 나더러 이승하를 찾아가라는 거야?”송사월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그 사람만이 지현우와 대
주서희는 서유가 고맙다고 하자 점점 죄책감이 들었다. 그때 있었던 일이 계속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김시후 앞이라 하고 싶은 말이 많아도 일단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주서희는 서유와 잠깐 얘기를 나누고는 바로 김시후의 다리를 검사했다. 주요하게는 위축 상황에 대한 확인이었다.다리 신경이 이미 괴사했기에 다시 일어나기는 어렵지만 다리가 너무 위축되지 않게 유지해 줘야 했다.검사가 끝나고 서유가 다급하게 물었다.“주 선생님, 상황은 어떤가요? 언제면 일어나서 걸을 수 있어요?”사실대로 말하려는데 휠체어에 앉아있던 김시후가 한쪽 주먹을 쥐고는 헛기침하며 주서희에게 말하지 말라고 눈치를 주었다.주서희는 미간을 찌푸렸다. 김시후가 왜 서유에게 숨기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잠깐 망설이더니 서유에게 말했다.“직접 물어봐요.”주서희는 더는 누군가의 병세를 숨겨주는 일 따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일은 환자가 직접 마주하게 할 생각이었다.서유는 고개를 돌려 송사월을 힐끔 쳐다봤다. 그의 눈빛이 흔들리자 서유는 전에 그가 자신을 속이고 있음을 알아챘다.하지만 딱히 까밝히지는 않았다. 그저 주서희에게 이렇게 말했다.“주 선생님, 완치 가능성 있나요?”주서희는 김시훈을 힐끔 쳐다봤다. 그가 고개를 끄덕여서야 주서희는 사실을 말했다.“없습니다.”너무 잔혹한 현실에 서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자책감이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았다.송사월은 그런 서유를 얼른 다독였다.“서유야, 걱정하지 마. 휠체어에 이미 적응했고 이래도 좋아.”이를 들은 서유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결심이라도 한 듯 약속했다.“사월아, 네가 휠체어에 얼마나 오래 앉아있든 상관없어. 난 영원히 네 곁을 지키면서 보살펴줄 테니까.”김민정은 이 약속을 듣더니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만약 서유가 송사월을 평생 보살핀다면 이승하는 어떡하지?송사월이 멈칫하더니 복잡한 표정을 지었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그도 사실 잘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를 보살피려고 하는 건 다
주서희가 멈칫하더니 이내 둘이 이미 만났다는 걸 알아챘다.하긴 이승하가 직접 데려오지 않고서는 이 별장을 쉽게 드나들 수 없었다.하지만 서로 만나고도 서유가 이렇게 거부감을 드러낼 줄은 몰랐다. 설마 아직 오해가 풀리지 않은 걸까?주서희는 잠깐 망설이더니 다시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서유 씨, 대표님 사실 서유 씨 많이 사랑합니다. 서유 씨 죽고 나서도...”“주서희 씨.”서유가 갑자기 주서희의 이름을 불렀고 이에 주서희는 그대로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귀국하고 4번째로 듣는 말이에요. 그 사람이 나를 많이 사랑한다고 말이에요.”지현우, 정가혜, 송사월, 주서희, 하나도 빠짐없이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마치 이승하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사실만 알면 그녀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승하 곁으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하듯 말이다.하지만 그들은 그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이 없다.그녀가 이승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이다.서유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눈시울이 붉어졌다.“서희 씨, 나를 사랑한다는 사람이 헤어지고 내게 무릎 꿇고 술을 따르라고 윽박지르겠어요?”“나를 사랑한다는 사람이 천억짜리 수표를 내 얼굴에 던지면서 5년간 서비스한 비용이라고 하겠어요?”“나를 사랑한다는 사람이 내게 더럽혀진 노리개라고 하겠어요?”“나를 사랑한다는 사람이 약혼녀의 허리를 감싸고 내게 너 따위가 뭐냐고 물었겠어요?”“나를 사랑한다는 사람이 내가 심장병이 있는 걸 뻔히 알면서 그렇게 모질게 내 따귀를 때렸겠어요?”“나를 사랑한다는 사람이 내 전화번호도 없겠어요?”“나를 사랑한다는 사람이 내가 죽기 전 연지유와 같이 잠자리에 들었겠어요?”서유는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단숨에 이렇게 쏟아내더니 주서희에게 물었다.“서희 씨, 말해봐요. 도대체 뭐가 사랑인지.”서유의 물음에 주서희는 멍해서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승하의 편을 들자 해도 어떻게 들어야 할지 몰랐다.서유가 말한 일 중에 뒤에 3건은 설명이 가능하지만 다른 건 주서희도 도대체
이승하는 예쁜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는데 눈빛은 몽롱했지만 정신은 말짱했다.그는 온 사람이 주서희임을 알고 있었고 그녀가 말릴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와인만 마셨다.주서희는 와인잔을 앗아가며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대표님, 계속 이러면 위세척을 해도 죽을 수 있어요.”이승하는 여전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만사가 귀찮아 보였고 긴 손가락을 뻗어 다른 술잔을 가져오려 했다.주서희는 고집스러운 그의 모습에 미간을 찌푸리더니 말했다.“대표님, 서유 씨 아직 살아 있잖아요. 얼른 힘내서 다시 만회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예전처럼 계속 술이나 마시고 있으면 어떡해요? 제가 아는 대표님은 이런 분이 아니었어요.”예전의 그는 하늘에 사는 신이라도 되는 듯 도도하고 고귀했다.하지만 지금 그는 삶의 의미를 완전히 잃었고 까마득한 눈은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주서희는 다시금 그의 손에 들린 와인잔을 앗아가며 말했다.“대표님, 대표님이 서유 씨 때문에 점점 시들어가도 서유 씨는 몰라요. 지금은 그저 전에 변덕스럽게 정신적 폭력을 가한 거랑 죽기 전에 연지유 씨와 밤을 보냈다는 거, 그렇게만 알고 있어요.”이승하가 멈칫하더니 충혈된 눈으로 주서희를 바라보며 말했다.“나는 연지유와 잔 적 없어.”이승하에게 이번 생에 여자란 서유뿐이었고 다른 여자는 건드리기도 역겨워했는데 잠자리를 가졌을 리는 더더욱 없었다.주서희는 난감한 듯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저는 알죠. 근데 서유 씨는 몰라요. 아직 오해가 깊어요. 대표님이 설명하지 않는데 서유 씨가 어떻게 알겠어요. 용서는 어떻게 하고요.”이승하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콧방귀를 꼈다.“신경 쓰지도 않을걸...”이는 이승하가 이미 설명했는데도 서유가 여전히 용서하려 하지 않는다는 말로 들렸다.하지만 아까 서유가 캐묻는 뉘앙스로 봐서는 아직 오해가 완전히 풀린 게 아닌 것 같았다.주서희는 그의 성격에 말을 제대로 잘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녀는 이내 한숨을 푹 내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