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목소리에 휠체어를 타고 있던 남자는 몸이 굳어버렸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계단 위에 서 있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붉은색 긴 치마에 짧은 머리, 산들바람이 불어와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기억 속에서 수없이 꿈꿔왔던 얼굴이다. 비록 예전 같지 않은 옷차림새지만 그녀의 얼굴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그는 꽃밭을 사이에 두고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고 조금도 움직이지 못한 채 먼발치에서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녀는 이런 식으로 여러 번 나타났었다. 하지만 매번 그가 그녀에게 달려갈 때마다 그녀는 사라져 버렸다. 눈앞의 사람도 아마 환각일 것이다. 잡을 수 없다면 그녀를 방해하지 않고 좀 더 이곳에 머물게 하고 싶었다.“사월아.”부드럽고 조용한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또다시 불렀고 그는 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잠시 후, 그녀가 계단에서 천천히 내려와 꽃밭을 건너 그에게로 걸어오는 것을 보고 그는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손에 들고 있던 책이 갑자기 땅에 떨어졌고 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살짝 젖히고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너...”그는 마치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힘겹게 한 마디 내뱉었다.서유는 눈시울을 붉히며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잘생긴 얼굴, 부드러운 이목구비에 짙은 눈매는 빛이 비치지 않을 정도로 검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의 모습이 비치자 그의 눈에 밝은 빛이 들어왔다. 그는 흰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예전처럼 온화하고 우아해 보였다.다만 그 정장 바지 아래의 두 다리는 힘이 빠진 듯 휠체어에 늘어져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서유는 천천히 쪼그리고 앉아 손을 뻗어 그의 다리를 만져보았다. “사월아, 다리가 왜 이래?”그는 여전히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너... 정말 서유야?”그녀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쳐다보는 남자와 눈을 맞추었다.“사월아, 나 서유야. 내가 돌아왔어.”휠체어를 탄 남자는
하지만 그 당시 그는 직접 서유를 화장터로 보냈었다. 근데 서유가 어떻게 이리 멀쩡하게 그의 앞에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그는 그녀가 환각이라는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등을 쓰다듬는 손에서 그녀의 체온을 느끼게 되자 그는 비로소 그녀가 진실한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떨리는 두 손으로 다리 위에 엎드려 울고 있는 소녀의 얼굴을 들고 자세히 그녀를 훑어보았다.3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어도 그녀는 변한 게 없었다. 예전에 창백했던 얼굴은 지금 생기가 넘쳐 보였다. 병고에 시달리던 과거와는 결별한 듯 지금의 그녀는 새롭게 태어난 것 같았다. 그런 그녀를 보며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서유야.”서유는 그를 올려다보며 눈물을 머금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나 여기 있어.”그녀는 항상 있었다. 송사월의 따뜻한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다행이다. 네 말 들어서.” “무슨 말?”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송사월은 흠칫했다.‘서유가 나한테 했던 말을 잊어버렸나 보네. 하지만 괜찮아. 내가 기억하고 있으니까.’그는 손을 뻗어 혼신의 힘을 다해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서유야, 이번에는 난 널 잊지 않았어.”그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는 날마다 수없이 그녀를 생각하고 그녀의 얼굴을 머릿속에 깊이 새겼다. 가끔 기억이 흐릿해져도 그는 그녀를 잊지 못하였다. 서유가 그한테 다음 생에는 다시는 자신을 잊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서유는 또다시 눈물을 왈칵 쏟았다.“사월아, 미안해.”‘이렇게 날 사랑하는 사람인데. 내가 죽기 전에 다른 남자를 만나고 싶어 했을 때 사월이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송사월은 그녀를 껴안고 몇 번이나 이 말을 반복했다.“서유야, 나한테 미안해하지 마.”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흐느끼고 있는 그녀를 보며 그는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그녀를 위로했다. 두 사람은 함께 부둥켜안고 예전처럼 서로 의지하며 서로를 알아가고 있었다. 유일하게 변한 것은 그가 그녀를 잊어버렸던
멍하니 서 있던 그녀는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천천히 시선을 그의 다리로옮겼다. “다리는 왜 이렇게 된 거야?”송사월은 그녀의 시선을 따라 불구가 된 자신의 다리를 쓰다듬으며 담담하게 말했다.“총상일 뿐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총상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서유는 그가 자신 때문에 자살했다는 생각이 떠올라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내 묘비 앞에서...”그는 고개를 흔들며 부정했다.“아니야 그런 거.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니까 너무 자책하지 마.”그러나 그의 말을 믿지 않았던 서유는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사월아, 우리가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마인데. 나한테 말 못 할 얘기가 뭐가 있어?”두 사람은 서로의 첫사랑이자 오랜 세월을 가족처럼 지낸 사이라서 세월이 흘러도 지울 수 없는 정이 있었다. 그녀를 보며 한참을 침묵하던 그가 마침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네가 죽고 7일째 되던 날, 너 따라가려고 했는데 이승하 씨가 날 막았어.”말을 하면서 그는 무의식적으로 서유를 쳐다보았다. 아무런 변화가 없는 그녀의 안색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이승하 씨가 내 손에 있던 총을 빼앗아 갔어. 난 죽을 마음이 확고했고 그 사람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다리에 총상을 입게 되었어.”서유는 고개를 들고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바보 같이 이게 뭐야?”그녀의 말에 그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서유야, 너 없이 사는 게 나한테 무슨 의미가 있겠니?”마음속의 죄책감이 더 커져 참을 수 없을 만큼 그녀를 아프게 만들었다. 송사월은 살아있지만 다리를 다쳐서 예전처럼 자유롭게 행동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그녀와 무관한 일이라며 자책하지 말라고 한다. 이 모든 것이 다 그녀 때문에 일어나 일인데 말이다.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다리를 쓰다듬으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미안해, 내가 널 이렇게 만들었어.”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를 다독였다. “서유야, 정말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 내가 잘못해서 다친
주저 없이 별장을 나서는 서유의 뒷모습에 송사월은 눈시울이 붉어졌다.심장을 칼로 후벼파는 듯한 고통에 숨이 멎을 것만 같았고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녀를 안고 가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하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병신이 되어버린 그가 무슨 자격으로 그녀를 옆에 남기겠는가.그는 고개를 들어 노을을 바라보며 가득 차오른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애썼지만 바람과는 달리 계속 볼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손으로 눈을 가린 채 마음이 찢어질 듯 울고 있는데 가녀린 몸집 하나가 나타나 눈을 찌르는 햇살을 가려줬다.손 틈 사이로 어렴풋이 서유가 고개를 살짝 비튼 채 손에 든 생수를 따서 그에게 건네주는 게 보였다.“사월아, 입술이 말라서 갈라졌길래 물 가지러 민정이한테 다녀왔어. 내가 도와줄게.”간 줄 알았던 서유가 아직 여기에 남아있다.송사월은 기쁜지 아니면 짐이 될까 봐 걱정인지 알 수 없었다.그저 얌전하게 입을 벌린 채 그녀가 챙겨줄 수 있게 했다.서유는 송사월이 고분고분 말을 듣자 입꼬리가 올라갔고 다시 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사월아, 나한테 짐이 될까 봐 나를 밀어내려 하는 거 다 알아.”“전에 내가 그렇게 심한 심장병을 앓을 때도 넌 나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극진하게 보살펴줬잖아.”“지금 나 때문에 다리를 다쳐서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내가 널 두고 어떻게 가.”서유는 송사월의 다리를 만지며 결심이라도 한 듯 말했다.“이 다리가 다 나아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네 곁에 남을 거야. 그때도 내가 귀찮게 느껴진다면 그때 다시 밀어내.”그녀의 진심에 송사월은 마음이 따뜻해졌다.“서유야, 넌 항상 날 바보 같다고 놀려도 사실 제일 바보 같은 건 너야.”서유의 예쁘장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송사월 씨, 바보라는 단어는 아무래도 너한테 더 잘 어울리는 거 같은데?”서유가 죽기 전 그렇게 모진 말을 했는데도 그는 주저하지 않고 그녀를 따라 죽음을 선택했다.그래도 바보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서유는 어두워진 주위를 살피더
김민정이 가고 나서도 서유는 약간 어리둥절했다. 이승하가 송사월을 구해줬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구해 보살피게 도와줬다니, 생각도 못 한 일이었다.서유가 멍해 있자 송사월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손에 든 수저를 내려놓으며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서유야, 3년간 이승하 씨가 나를 살아가게 하려고 많은 일을 해줬어...”“이런 방법으로 속죄하려는 것 같아.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몰라도 너를 참 많이 사랑하는 건 알겠더라.”마지막 한마디로 송사월은 그때 서유에게 진실대로 말하지 못한 아쉬움을 완전히 씻어냈다.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몰래 그녀를 지켜봤다. 3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이승하를 사랑하고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말이다.서유는 시선을 아래로 늘어트리며 눈동자에 깃든 감정을 숨기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근데 너는 분명 살아 있는데 왜 뉴스에서는 네가 죽었다고 그러는 거야?”서유가 송사월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피했다는 건 아직 마음속에 이승하를 담고 있는 걸까 아니면 이미 내려놓았다는 걸까...송사월은 더는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돌아온 답안을 받아들일 수 없을까 봐 티 나지 않게 대답했다.“누군가가 나를 죽이려고 해, 나를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가짜 뉴스를 뿌린 거야.”서유가 죽은 지 7일이 지나고 송사월도 서유를 따라서 죽으려고 하다가 실패하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달려 나와 그를 향해 총을 쏘아댔다.하지만 한발 빨랐던 이승하가 단숨에 그를 밀어내고 지켜내면서 그를 해치려는 사람과 싸웠다.이승하가 데려온 사람이 총소리를 듣고 달려와 합세하지 않았으면 이승하도 묘지에서 목숨을 달리했을 수도 있다.송사월은 그때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서유에게 알려주고는 말했다.“이승하 씨도 그때 나 구하느라 많이 다쳤어...”그는 살고 싶지 않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승하가 그의 목숨을 구해줬다.서유가 이 별장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것도 아마 이승하가 보냈을 것이다.하여 더는 서유에게 이 사실을 감춰서는 안 된다고 생각
젓가락을 쥔 송사월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멍한 표정으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서유를 바라봤다.서유는 지현우의 전화를 끊어버리고 설명했다.“사월아, 나 깨어나고 네가 죽었다는 소식에 너무 믿을 수가 없어서 하루라도 빨리 귀국해서 진위를 확인하고 싶었어. 근데 현우 씨는 내가 언니 심장을 가지고 갔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까 봐 귀국을 막았고. 그래서 일단은 김초희의 이름으로 현우 씨와 결혼한 거야. 난 이 사람한테 아무 감정 없어.”이를 들은 송사월의 눈빛이 경악에서 동정으로 바뀌었다.“서유야, 미안해. 내 잘못된 선택 때문에 이런 사람에게 협박이나 당하게 하고.”서유는 고개를 저으며 마치 모든 걸 꿰뚫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내가 결혼하지 않겠다고 해도 언니 심장 때문에 꽉 잡고 있을 거야.”송사월의 미간이 점점 구겨졌다.“서유야, 지현우 좋은 사람 아니야. 그 사람이랑 같이 있으면 너도 상처받게 될 거야.”이 점은 서유도 잘 알고 있었다.“좋은 사람 아닌 거 알아. 나도 그 사람이 나를 놓아줄 수 있게 방법을 생각해 볼 거야.”송사월은 서유가 다른 남자에게 빌어야 한다는 생각에 표정이 어두워졌다.만약 그가 아직 화진 그룹의 대표였다면 지현우와 대적해 서유를 이런 곤란한 상황에서 빼줄 수 있을 텐데 말이다.하지만 지금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고 그저 휠체어에 앉아있는 병신이라 서유를 돕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서유의 보살핌을 받아야 했다.그런 그의 머릿속에 갑자기 이승하가 떠올랐다. 권력이 하늘을 찌르는 이승하가 나선다면 무조건 서유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그는 주먹을 불끈 쥐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서유야, 이승하 씨 지금 이씨 가문과 박씨 가문의 수장이기도 하고 화진 그룹의 주주거든. 지씨 집안은 절대 상대가 안 돼. 이승하 씨가 나서준다면...”서유는 멈칫하더니 그의 말을 끊었다.“사월아, 나더러 이승하를 찾아가라는 거야?”송사월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그 사람만이 지현우와 대
주서희는 서유가 고맙다고 하자 점점 죄책감이 들었다. 그때 있었던 일이 계속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김시후 앞이라 하고 싶은 말이 많아도 일단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주서희는 서유와 잠깐 얘기를 나누고는 바로 김시후의 다리를 검사했다. 주요하게는 위축 상황에 대한 확인이었다.다리 신경이 이미 괴사했기에 다시 일어나기는 어렵지만 다리가 너무 위축되지 않게 유지해 줘야 했다.검사가 끝나고 서유가 다급하게 물었다.“주 선생님, 상황은 어떤가요? 언제면 일어나서 걸을 수 있어요?”사실대로 말하려는데 휠체어에 앉아있던 김시후가 한쪽 주먹을 쥐고는 헛기침하며 주서희에게 말하지 말라고 눈치를 주었다.주서희는 미간을 찌푸렸다. 김시후가 왜 서유에게 숨기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잠깐 망설이더니 서유에게 말했다.“직접 물어봐요.”주서희는 더는 누군가의 병세를 숨겨주는 일 따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일은 환자가 직접 마주하게 할 생각이었다.서유는 고개를 돌려 송사월을 힐끔 쳐다봤다. 그의 눈빛이 흔들리자 서유는 전에 그가 자신을 속이고 있음을 알아챘다.하지만 딱히 까밝히지는 않았다. 그저 주서희에게 이렇게 말했다.“주 선생님, 완치 가능성 있나요?”주서희는 김시훈을 힐끔 쳐다봤다. 그가 고개를 끄덕여서야 주서희는 사실을 말했다.“없습니다.”너무 잔혹한 현실에 서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자책감이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았다.송사월은 그런 서유를 얼른 다독였다.“서유야, 걱정하지 마. 휠체어에 이미 적응했고 이래도 좋아.”이를 들은 서유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결심이라도 한 듯 약속했다.“사월아, 네가 휠체어에 얼마나 오래 앉아있든 상관없어. 난 영원히 네 곁을 지키면서 보살펴줄 테니까.”김민정은 이 약속을 듣더니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만약 서유가 송사월을 평생 보살핀다면 이승하는 어떡하지?송사월이 멈칫하더니 복잡한 표정을 지었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그도 사실 잘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를 보살피려고 하는 건 다
주서희가 멈칫하더니 이내 둘이 이미 만났다는 걸 알아챘다.하긴 이승하가 직접 데려오지 않고서는 이 별장을 쉽게 드나들 수 없었다.하지만 서로 만나고도 서유가 이렇게 거부감을 드러낼 줄은 몰랐다. 설마 아직 오해가 풀리지 않은 걸까?주서희는 잠깐 망설이더니 다시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서유 씨, 대표님 사실 서유 씨 많이 사랑합니다. 서유 씨 죽고 나서도...”“주서희 씨.”서유가 갑자기 주서희의 이름을 불렀고 이에 주서희는 그대로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귀국하고 4번째로 듣는 말이에요. 그 사람이 나를 많이 사랑한다고 말이에요.”지현우, 정가혜, 송사월, 주서희, 하나도 빠짐없이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마치 이승하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사실만 알면 그녀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승하 곁으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하듯 말이다.하지만 그들은 그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이 없다.그녀가 이승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이다.서유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눈시울이 붉어졌다.“서희 씨, 나를 사랑한다는 사람이 헤어지고 내게 무릎 꿇고 술을 따르라고 윽박지르겠어요?”“나를 사랑한다는 사람이 천억짜리 수표를 내 얼굴에 던지면서 5년간 서비스한 비용이라고 하겠어요?”“나를 사랑한다는 사람이 내게 더럽혀진 노리개라고 하겠어요?”“나를 사랑한다는 사람이 약혼녀의 허리를 감싸고 내게 너 따위가 뭐냐고 물었겠어요?”“나를 사랑한다는 사람이 내가 심장병이 있는 걸 뻔히 알면서 그렇게 모질게 내 따귀를 때렸겠어요?”“나를 사랑한다는 사람이 내 전화번호도 없겠어요?”“나를 사랑한다는 사람이 내가 죽기 전 연지유와 같이 잠자리에 들었겠어요?”서유는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단숨에 이렇게 쏟아내더니 주서희에게 물었다.“서희 씨, 말해봐요. 도대체 뭐가 사랑인지.”서유의 물음에 주서희는 멍해서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승하의 편을 들자 해도 어떻게 들어야 할지 몰랐다.서유가 말한 일 중에 뒤에 3건은 설명이 가능하지만 다른 건 주서희도 도대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