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는 서유를 데리고 공항을 빠져나가 고급 차에 올라탔다.뒷좌석에 앉은 서유가 안전벨트를 매려고 할 때, 이승하의 큰 손이 다가가 그녀에게 안전벨트를 매주었다. 잠시 후, 그가 차가운 눈빛으로 서유를 쳐다보았다.평온한 얼굴로 몸을 곧게 펴고 앉은 그녀를 보고 이승하는 소수빈한테 차를 출발하라고 명했다. 차가 출발하자 서유는 고개를 돌리고 아무 말도 없이 창밖을 쳐다보았다.이승하 역시 고개를 돌리고 차가운 표정을 지은 채 묵묵히 창밖을 내다보았다. 두 사람은 같은 뒷좌석에 앉아있지만 낯선 사람들처럼 사이가 멀어 보였다. 얼마 후, 이승하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그녀는 문에 기대어 앉아있었고 반쯤 열린 차창으로 산들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풍성한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창밖을 바라보는 그녀의 순한 모습은 예전에 그와 함께 했던 그 시절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승하는 그런 그녀를 보며 눈시울이 붉어졌고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차 세워.”소수빈은 바로 속도를 줄이고 옆으로 차를 세운 뒤, 눈치껏 차를 빠져나왔다. 그 모습에 서유는 고개를 돌리고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사월이한테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이승하는 초조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며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만나러 갈 거야. 하지만...”잠깐 머뭇거리던 그가 서유를 향해 다가갔다.“그 사람을 만나러 가지 전에 우리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까?”그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뭐라고요?”이승하는 애틋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그녀의 이목구비를 어루만졌다.“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한 번만 내 여자가 되어줘.”그녀는 그가 자신의 몸을 원하는 줄 알고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그럴 수는 없어요.”그가 손길을 멈추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그 사람 만나러 가기 전까지 그냥 예전처럼 지내면 안 될까?”문뜩 서유의 머릿속에는 이승하가 그녀를 안고 거실에서 물도 먹여주고 음식도 먹여주는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이승하는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붙잡고 그녀한테 눈을 마주치라고 압박했다.눈앞의 남자는 예전처럼 세련된 모습이었고 잘생긴 얼굴은 변함이 없었다. 다만 깊은 눈매 아래 다크서클이 생겼을 뿐, 외모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꼼꼼하게 빗어넘긴 그의 머리는 기품이 넘쳐 보였고 극도의 금욕을 보여주고 있었다. 정장 재킷 아래의 흰 셔츠는 그녀로 인해 단추 두 개가 풀려있었다. 네크라인이 살짝 열리면서 그의 쇄골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더 내려가면 탄탄한 가슴과 늘씬한 허벅지가 눈에 띄었다. 그녀는 다시 돌아온 후 처음으로 그를 이리 자세히 살펴보게 되었다. 그의 모습은 변한 것 같기도 하고 변하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이승하는 그녀의 눈에 자신의 모습이 비치는 것을 보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이런 순간에만 그녀의 눈에 자신이 있는 것 같다.뼈마디가 뚜렷한 손으로 그녀의 단발머리를 만지며 그가 입을 열었다.“예전에는 긴 머리를 좋아했던 걸로 기억하는데.”그의 말에 서유는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 예전의 그녀는 머리를 기르는 것을 좋아했었다. 이 남자가 긴 머리를 좋아해서 단 한 번도 단발로 자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은 지현우의 핍박에 의해 단발머리를 하긴 했지만 이 또한 그녀가 과거를 끊어버리겠다는 결심이기도 했다. 앞으로는 더 이상 이승하를 위해 긴 머리를 기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승하의 손끝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따라 내려가더니 그녀의 심장에 멈추었다. 심장에 손길이 닿는 순간, 그는 뭔가 생각난 듯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여기... 아직도 아파?”서유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이식 수술한 후부터는 안 아파요.”그녀는 자신의 심장 위에 놓인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그녀는 무심결에 고개를 숙여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손목에는 칼에 베인 듯한 네 개의 깊은 흉터가 있었다. 그리고 손바닥에도 네 개의 흉터가 있는데 다 아물었지만 뼈가 보일 정도로 무서워 보였다.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연녀가 되고 싶지 않다고 했던 서유였다. 근데 그가 어떻게 서유를 실망시키는 일을 할 수 있겠는가?그녀를 꼭 껴안은 채 그가 참지 못하고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당신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난 평생 어떤 여자와도 결혼하지 않을 생각이었어.”그 말에 서유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혐오가 가득 찼던 그녀의 눈빛이 점점 의아한 눈빛으로 변해갔다. 그녀는 그가 이런 생각을 할 줄은 꿈에서도 생각지 못했던 것 같다.그녀는 속으로 매우 놀랐지만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고 그에게 왜 연지유와 결혼하지 않았는지도 묻지 않았다.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볼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내가 결혼하고 싶었던 사람은 당신이었으니까.”무거운 그의 목소리에 참을 수 없는 깊은 감정이 섞여 있었다. 그녀는 깜짝 놀랐지만 이내 불신으로 가득 찼다. 잠시 후, 이승하가 무슨 말을 더 하려 할 때 앞쪽에서 소수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도착했습니다.”이승하는 살짝 고개를 들고 서유를 바라보며 아쉬운 듯 그녀를 다시 한번 안았다. 그녀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고 그녀의 눈빛은 약속을 지키지 않은 그를 탓하고 있는 듯했다. 씁쓸하게 웃던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이젠 끝났어.”서유는 그를 한 번 쳐다보고는 그의 목덜미를 감싸고 있던 손을 풀고 그의 다리에서 내려왔다. 차 문을 밀고 내리는데 이승하가 그녀를 불렀다.“서유.”서유는 고개를 돌려 차 안에 앉아 있는 기품이 넘치고 차가움이 넘치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차 안의 빛이 어두워서 그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의 몸은 온통 어둠으로 휩싸여 그를 그림자 속에서 헤어 나올 수 없게 만들었다. 고개를 약간 기울인 그가 붉은 눈으로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예전에 내가 너무 당신한테 쌀쌀맞게 대해서 당신이 지금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믿지 않나 보군.”그의 물음에 서유는 더 이상 피하지 않고 그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의 짙은 눈매가 내려앉았
이승하는 손바닥을 펴고 흉터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피식 웃었다. 그렇게 절망스럽기 짝이 없는 웃음을 서유는 처음 봤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그를 향해 한 발짝 다가갔다.“가까이 오지 마.”그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고 그의 무거운 목소리가 차 안에서 흘러나왔다.“앞에 있는 저 별장이 바로 그 사람이 있는 곳이야. 그 사람한테 가봐.”서유는 별장 쪽과 차 안의 남자를 한 번씩 쳐다보고는 결국 뒤돌아서 별장을 향해 걸어갔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송사월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이승하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마치 모든 과거를 덮어 버리고 더 이상 언급하지도 강요하지도 않을 것처럼 손바닥을 움켜쥐었다. 소수빈은 고개를 돌리고 이승하를 쳐다보았다.“대표님, 대표님께서도 서유 씨 때문에 자살하신 적 있으시잖아요.”그의 말에 이승하는 그저 담담하게 말했다.“이 일은 절대 서유한테 알려서는 안 돼.”미간을 찌푸리던 소수빈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왜입니까?”‘서유 씨를 위해 그리 많은 일을 하셨으면서 왜 그녀에게 말하지 않으시는지...’이승하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두 사람이 잘되기를 바라야지.”소수빈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그를 쳐다보았다.“그럼 대표님은요? 대표님은 어떡합니까?”서유를 사랑하다 못해 매번 그녀의 기일이면 손바닥과 손목에 칼자국을 남겼던 이승하였다. 그렇게 그녀를 사랑하고 소유욕이 강한 남자가 지금 자기 손으로 그녀를 다른 남자에게 보내다니... 그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이승하는 소수빈의 말에 대답이 없었고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차창 밖의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을 바라보았다. 빛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이젠 그의 것이 아니었다.억지로 놓아주지 않는다 해도 그 빛은 그에게로 오지 않을 것이고 그에게 따뜻함을 줄 수 없을 것이다. 사랑에 빠지면 안 된다고 가르침을 받았을 때부터 어쩌면 그는 평생을 외롭게 살아가고 영원히 사랑받지 못할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한편, 별장 입구에 도착한 서
익숙한 목소리에 휠체어를 타고 있던 남자는 몸이 굳어버렸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계단 위에 서 있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붉은색 긴 치마에 짧은 머리, 산들바람이 불어와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기억 속에서 수없이 꿈꿔왔던 얼굴이다. 비록 예전 같지 않은 옷차림새지만 그녀의 얼굴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그는 꽃밭을 사이에 두고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고 조금도 움직이지 못한 채 먼발치에서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녀는 이런 식으로 여러 번 나타났었다. 하지만 매번 그가 그녀에게 달려갈 때마다 그녀는 사라져 버렸다. 눈앞의 사람도 아마 환각일 것이다. 잡을 수 없다면 그녀를 방해하지 않고 좀 더 이곳에 머물게 하고 싶었다.“사월아.”부드럽고 조용한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또다시 불렀고 그는 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잠시 후, 그녀가 계단에서 천천히 내려와 꽃밭을 건너 그에게로 걸어오는 것을 보고 그는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손에 들고 있던 책이 갑자기 땅에 떨어졌고 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살짝 젖히고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너...”그는 마치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힘겹게 한 마디 내뱉었다.서유는 눈시울을 붉히며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잘생긴 얼굴, 부드러운 이목구비에 짙은 눈매는 빛이 비치지 않을 정도로 검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의 모습이 비치자 그의 눈에 밝은 빛이 들어왔다. 그는 흰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예전처럼 온화하고 우아해 보였다.다만 그 정장 바지 아래의 두 다리는 힘이 빠진 듯 휠체어에 늘어져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서유는 천천히 쪼그리고 앉아 손을 뻗어 그의 다리를 만져보았다. “사월아, 다리가 왜 이래?”그는 여전히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너... 정말 서유야?”그녀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쳐다보는 남자와 눈을 맞추었다.“사월아, 나 서유야. 내가 돌아왔어.”휠체어를 탄 남자는
하지만 그 당시 그는 직접 서유를 화장터로 보냈었다. 근데 서유가 어떻게 이리 멀쩡하게 그의 앞에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그는 그녀가 환각이라는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등을 쓰다듬는 손에서 그녀의 체온을 느끼게 되자 그는 비로소 그녀가 진실한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떨리는 두 손으로 다리 위에 엎드려 울고 있는 소녀의 얼굴을 들고 자세히 그녀를 훑어보았다.3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어도 그녀는 변한 게 없었다. 예전에 창백했던 얼굴은 지금 생기가 넘쳐 보였다. 병고에 시달리던 과거와는 결별한 듯 지금의 그녀는 새롭게 태어난 것 같았다. 그런 그녀를 보며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서유야.”서유는 그를 올려다보며 눈물을 머금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나 여기 있어.”그녀는 항상 있었다. 송사월의 따뜻한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다행이다. 네 말 들어서.” “무슨 말?”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송사월은 흠칫했다.‘서유가 나한테 했던 말을 잊어버렸나 보네. 하지만 괜찮아. 내가 기억하고 있으니까.’그는 손을 뻗어 혼신의 힘을 다해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서유야, 이번에는 난 널 잊지 않았어.”그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는 날마다 수없이 그녀를 생각하고 그녀의 얼굴을 머릿속에 깊이 새겼다. 가끔 기억이 흐릿해져도 그는 그녀를 잊지 못하였다. 서유가 그한테 다음 생에는 다시는 자신을 잊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서유는 또다시 눈물을 왈칵 쏟았다.“사월아, 미안해.”‘이렇게 날 사랑하는 사람인데. 내가 죽기 전에 다른 남자를 만나고 싶어 했을 때 사월이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송사월은 그녀를 껴안고 몇 번이나 이 말을 반복했다.“서유야, 나한테 미안해하지 마.”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흐느끼고 있는 그녀를 보며 그는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그녀를 위로했다. 두 사람은 함께 부둥켜안고 예전처럼 서로 의지하며 서로를 알아가고 있었다. 유일하게 변한 것은 그가 그녀를 잊어버렸던
멍하니 서 있던 그녀는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천천히 시선을 그의 다리로옮겼다. “다리는 왜 이렇게 된 거야?”송사월은 그녀의 시선을 따라 불구가 된 자신의 다리를 쓰다듬으며 담담하게 말했다.“총상일 뿐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총상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서유는 그가 자신 때문에 자살했다는 생각이 떠올라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내 묘비 앞에서...”그는 고개를 흔들며 부정했다.“아니야 그런 거.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니까 너무 자책하지 마.”그러나 그의 말을 믿지 않았던 서유는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사월아, 우리가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마인데. 나한테 말 못 할 얘기가 뭐가 있어?”두 사람은 서로의 첫사랑이자 오랜 세월을 가족처럼 지낸 사이라서 세월이 흘러도 지울 수 없는 정이 있었다. 그녀를 보며 한참을 침묵하던 그가 마침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네가 죽고 7일째 되던 날, 너 따라가려고 했는데 이승하 씨가 날 막았어.”말을 하면서 그는 무의식적으로 서유를 쳐다보았다. 아무런 변화가 없는 그녀의 안색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이승하 씨가 내 손에 있던 총을 빼앗아 갔어. 난 죽을 마음이 확고했고 그 사람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다리에 총상을 입게 되었어.”서유는 고개를 들고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바보 같이 이게 뭐야?”그녀의 말에 그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서유야, 너 없이 사는 게 나한테 무슨 의미가 있겠니?”마음속의 죄책감이 더 커져 참을 수 없을 만큼 그녀를 아프게 만들었다. 송사월은 살아있지만 다리를 다쳐서 예전처럼 자유롭게 행동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그녀와 무관한 일이라며 자책하지 말라고 한다. 이 모든 것이 다 그녀 때문에 일어나 일인데 말이다.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다리를 쓰다듬으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미안해, 내가 널 이렇게 만들었어.”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를 다독였다. “서유야, 정말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 내가 잘못해서 다친
주저 없이 별장을 나서는 서유의 뒷모습에 송사월은 눈시울이 붉어졌다.심장을 칼로 후벼파는 듯한 고통에 숨이 멎을 것만 같았고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녀를 안고 가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하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병신이 되어버린 그가 무슨 자격으로 그녀를 옆에 남기겠는가.그는 고개를 들어 노을을 바라보며 가득 차오른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애썼지만 바람과는 달리 계속 볼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손으로 눈을 가린 채 마음이 찢어질 듯 울고 있는데 가녀린 몸집 하나가 나타나 눈을 찌르는 햇살을 가려줬다.손 틈 사이로 어렴풋이 서유가 고개를 살짝 비튼 채 손에 든 생수를 따서 그에게 건네주는 게 보였다.“사월아, 입술이 말라서 갈라졌길래 물 가지러 민정이한테 다녀왔어. 내가 도와줄게.”간 줄 알았던 서유가 아직 여기에 남아있다.송사월은 기쁜지 아니면 짐이 될까 봐 걱정인지 알 수 없었다.그저 얌전하게 입을 벌린 채 그녀가 챙겨줄 수 있게 했다.서유는 송사월이 고분고분 말을 듣자 입꼬리가 올라갔고 다시 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사월아, 나한테 짐이 될까 봐 나를 밀어내려 하는 거 다 알아.”“전에 내가 그렇게 심한 심장병을 앓을 때도 넌 나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극진하게 보살펴줬잖아.”“지금 나 때문에 다리를 다쳐서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내가 널 두고 어떻게 가.”서유는 송사월의 다리를 만지며 결심이라도 한 듯 말했다.“이 다리가 다 나아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네 곁에 남을 거야. 그때도 내가 귀찮게 느껴진다면 그때 다시 밀어내.”그녀의 진심에 송사월은 마음이 따뜻해졌다.“서유야, 넌 항상 날 바보 같다고 놀려도 사실 제일 바보 같은 건 너야.”서유의 예쁘장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송사월 씨, 바보라는 단어는 아무래도 너한테 더 잘 어울리는 거 같은데?”서유가 죽기 전 그렇게 모진 말을 했는데도 그는 주저하지 않고 그녀를 따라 죽음을 선택했다.그래도 바보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서유는 어두워진 주위를 살피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