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사월이... 아직 살아있는 거예요?”이승하는 주먹을 불끈 쥔 채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억누르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아직 살아있어.”깜깜하고 빛이 없던 그녀의 눈이 송사월이라는 세글자에 이내 빛을 발하였다.역시 송사월만이 그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다. 반면 이승하가 무슨 짓을 해도 그녀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다.이승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자신을 비웃었다. 그의 입에서 긍정적인 답이 나오자 서유는 눈시울을 붉혔다. “하지만 사월이는...”뉴스에 의하면 송사월은 자살했다고 했고 정가혜도 그가 죽었다고 했었다. 그런데 어떻게...이승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내가 살렸어.”눈물을 글썽이던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승하 씨가 사월이를 구했다고?’그녀는 조금 놀랐고 의심스러웠지만 결국은 짧게 고맙다는 인사만 했다.“고마워요.”그 고맙다는 말이 두 사람 사이를 완전히 멀어지게 만든 것 같아 이승하는 몹시 불쾌했다. 그가 차갑게 웃으며 서유에게 따져 물었다.“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고맙다고 하는 거야? 지현우의 와이프로 아니면 송사월의 와이프로?”그 말에 서유는 죄책감이 사라지기는커녕 한없이 커져 버렸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오므린 채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고 하도 손에 힘을 꽉 주고 있어 손톱이 손바닥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이승하는 꽉 쥐고 있는 그녀의 손을 풀어주며 그녀에게 말했다.“나랑 같이 송사월 씨 만나러 가자.”그의 큰 손이 작은 그녀의 손을 감싸고는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조금 더 파고들어 그녀와 깍지를 끼었다.그는 그녀를 끌고 문밖으로 나갔다.한편, 소수빈은 경호원들을 데리고 문밖에서 지현우를 막고 있었다. 지현우는 한 손을 양복 주머니에 넣은 채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수빈을 향해 호통쳤다.“기다려, 지금 당장 사람 불러올 테니까.”소수빈은 지씨 가문의 도련님 지현우가 그의 앞에서 전화를
이승하는 서유를 데리고 공항을 빠져나가 고급 차에 올라탔다.뒷좌석에 앉은 서유가 안전벨트를 매려고 할 때, 이승하의 큰 손이 다가가 그녀에게 안전벨트를 매주었다. 잠시 후, 그가 차가운 눈빛으로 서유를 쳐다보았다.평온한 얼굴로 몸을 곧게 펴고 앉은 그녀를 보고 이승하는 소수빈한테 차를 출발하라고 명했다. 차가 출발하자 서유는 고개를 돌리고 아무 말도 없이 창밖을 쳐다보았다.이승하 역시 고개를 돌리고 차가운 표정을 지은 채 묵묵히 창밖을 내다보았다. 두 사람은 같은 뒷좌석에 앉아있지만 낯선 사람들처럼 사이가 멀어 보였다. 얼마 후, 이승하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그녀는 문에 기대어 앉아있었고 반쯤 열린 차창으로 산들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풍성한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창밖을 바라보는 그녀의 순한 모습은 예전에 그와 함께 했던 그 시절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승하는 그런 그녀를 보며 눈시울이 붉어졌고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차 세워.”소수빈은 바로 속도를 줄이고 옆으로 차를 세운 뒤, 눈치껏 차를 빠져나왔다. 그 모습에 서유는 고개를 돌리고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사월이한테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이승하는 초조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며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만나러 갈 거야. 하지만...”잠깐 머뭇거리던 그가 서유를 향해 다가갔다.“그 사람을 만나러 가지 전에 우리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까?”그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뭐라고요?”이승하는 애틋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그녀의 이목구비를 어루만졌다.“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한 번만 내 여자가 되어줘.”그녀는 그가 자신의 몸을 원하는 줄 알고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그럴 수는 없어요.”그가 손길을 멈추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그 사람 만나러 가기 전까지 그냥 예전처럼 지내면 안 될까?”문뜩 서유의 머릿속에는 이승하가 그녀를 안고 거실에서 물도 먹여주고 음식도 먹여주는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이승하는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붙잡고 그녀한테 눈을 마주치라고 압박했다.눈앞의 남자는 예전처럼 세련된 모습이었고 잘생긴 얼굴은 변함이 없었다. 다만 깊은 눈매 아래 다크서클이 생겼을 뿐, 외모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꼼꼼하게 빗어넘긴 그의 머리는 기품이 넘쳐 보였고 극도의 금욕을 보여주고 있었다. 정장 재킷 아래의 흰 셔츠는 그녀로 인해 단추 두 개가 풀려있었다. 네크라인이 살짝 열리면서 그의 쇄골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더 내려가면 탄탄한 가슴과 늘씬한 허벅지가 눈에 띄었다. 그녀는 다시 돌아온 후 처음으로 그를 이리 자세히 살펴보게 되었다. 그의 모습은 변한 것 같기도 하고 변하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이승하는 그녀의 눈에 자신의 모습이 비치는 것을 보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이런 순간에만 그녀의 눈에 자신이 있는 것 같다.뼈마디가 뚜렷한 손으로 그녀의 단발머리를 만지며 그가 입을 열었다.“예전에는 긴 머리를 좋아했던 걸로 기억하는데.”그의 말에 서유는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 예전의 그녀는 머리를 기르는 것을 좋아했었다. 이 남자가 긴 머리를 좋아해서 단 한 번도 단발로 자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은 지현우의 핍박에 의해 단발머리를 하긴 했지만 이 또한 그녀가 과거를 끊어버리겠다는 결심이기도 했다. 앞으로는 더 이상 이승하를 위해 긴 머리를 기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승하의 손끝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따라 내려가더니 그녀의 심장에 멈추었다. 심장에 손길이 닿는 순간, 그는 뭔가 생각난 듯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여기... 아직도 아파?”서유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이식 수술한 후부터는 안 아파요.”그녀는 자신의 심장 위에 놓인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그녀는 무심결에 고개를 숙여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손목에는 칼에 베인 듯한 네 개의 깊은 흉터가 있었다. 그리고 손바닥에도 네 개의 흉터가 있는데 다 아물었지만 뼈가 보일 정도로 무서워 보였다.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연녀가 되고 싶지 않다고 했던 서유였다. 근데 그가 어떻게 서유를 실망시키는 일을 할 수 있겠는가?그녀를 꼭 껴안은 채 그가 참지 못하고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당신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난 평생 어떤 여자와도 결혼하지 않을 생각이었어.”그 말에 서유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혐오가 가득 찼던 그녀의 눈빛이 점점 의아한 눈빛으로 변해갔다. 그녀는 그가 이런 생각을 할 줄은 꿈에서도 생각지 못했던 것 같다.그녀는 속으로 매우 놀랐지만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고 그에게 왜 연지유와 결혼하지 않았는지도 묻지 않았다.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볼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내가 결혼하고 싶었던 사람은 당신이었으니까.”무거운 그의 목소리에 참을 수 없는 깊은 감정이 섞여 있었다. 그녀는 깜짝 놀랐지만 이내 불신으로 가득 찼다. 잠시 후, 이승하가 무슨 말을 더 하려 할 때 앞쪽에서 소수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도착했습니다.”이승하는 살짝 고개를 들고 서유를 바라보며 아쉬운 듯 그녀를 다시 한번 안았다. 그녀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고 그녀의 눈빛은 약속을 지키지 않은 그를 탓하고 있는 듯했다. 씁쓸하게 웃던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이젠 끝났어.”서유는 그를 한 번 쳐다보고는 그의 목덜미를 감싸고 있던 손을 풀고 그의 다리에서 내려왔다. 차 문을 밀고 내리는데 이승하가 그녀를 불렀다.“서유.”서유는 고개를 돌려 차 안에 앉아 있는 기품이 넘치고 차가움이 넘치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차 안의 빛이 어두워서 그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의 몸은 온통 어둠으로 휩싸여 그를 그림자 속에서 헤어 나올 수 없게 만들었다. 고개를 약간 기울인 그가 붉은 눈으로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예전에 내가 너무 당신한테 쌀쌀맞게 대해서 당신이 지금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믿지 않나 보군.”그의 물음에 서유는 더 이상 피하지 않고 그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의 짙은 눈매가 내려앉았
이승하는 손바닥을 펴고 흉터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피식 웃었다. 그렇게 절망스럽기 짝이 없는 웃음을 서유는 처음 봤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그를 향해 한 발짝 다가갔다.“가까이 오지 마.”그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고 그의 무거운 목소리가 차 안에서 흘러나왔다.“앞에 있는 저 별장이 바로 그 사람이 있는 곳이야. 그 사람한테 가봐.”서유는 별장 쪽과 차 안의 남자를 한 번씩 쳐다보고는 결국 뒤돌아서 별장을 향해 걸어갔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송사월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이승하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마치 모든 과거를 덮어 버리고 더 이상 언급하지도 강요하지도 않을 것처럼 손바닥을 움켜쥐었다. 소수빈은 고개를 돌리고 이승하를 쳐다보았다.“대표님, 대표님께서도 서유 씨 때문에 자살하신 적 있으시잖아요.”그의 말에 이승하는 그저 담담하게 말했다.“이 일은 절대 서유한테 알려서는 안 돼.”미간을 찌푸리던 소수빈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왜입니까?”‘서유 씨를 위해 그리 많은 일을 하셨으면서 왜 그녀에게 말하지 않으시는지...’이승하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두 사람이 잘되기를 바라야지.”소수빈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그를 쳐다보았다.“그럼 대표님은요? 대표님은 어떡합니까?”서유를 사랑하다 못해 매번 그녀의 기일이면 손바닥과 손목에 칼자국을 남겼던 이승하였다. 그렇게 그녀를 사랑하고 소유욕이 강한 남자가 지금 자기 손으로 그녀를 다른 남자에게 보내다니... 그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이승하는 소수빈의 말에 대답이 없었고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차창 밖의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을 바라보았다. 빛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이젠 그의 것이 아니었다.억지로 놓아주지 않는다 해도 그 빛은 그에게로 오지 않을 것이고 그에게 따뜻함을 줄 수 없을 것이다. 사랑에 빠지면 안 된다고 가르침을 받았을 때부터 어쩌면 그는 평생을 외롭게 살아가고 영원히 사랑받지 못할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한편, 별장 입구에 도착한 서
익숙한 목소리에 휠체어를 타고 있던 남자는 몸이 굳어버렸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계단 위에 서 있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붉은색 긴 치마에 짧은 머리, 산들바람이 불어와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기억 속에서 수없이 꿈꿔왔던 얼굴이다. 비록 예전 같지 않은 옷차림새지만 그녀의 얼굴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그는 꽃밭을 사이에 두고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고 조금도 움직이지 못한 채 먼발치에서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녀는 이런 식으로 여러 번 나타났었다. 하지만 매번 그가 그녀에게 달려갈 때마다 그녀는 사라져 버렸다. 눈앞의 사람도 아마 환각일 것이다. 잡을 수 없다면 그녀를 방해하지 않고 좀 더 이곳에 머물게 하고 싶었다.“사월아.”부드럽고 조용한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또다시 불렀고 그는 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잠시 후, 그녀가 계단에서 천천히 내려와 꽃밭을 건너 그에게로 걸어오는 것을 보고 그는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손에 들고 있던 책이 갑자기 땅에 떨어졌고 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살짝 젖히고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너...”그는 마치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힘겹게 한 마디 내뱉었다.서유는 눈시울을 붉히며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잘생긴 얼굴, 부드러운 이목구비에 짙은 눈매는 빛이 비치지 않을 정도로 검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의 모습이 비치자 그의 눈에 밝은 빛이 들어왔다. 그는 흰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예전처럼 온화하고 우아해 보였다.다만 그 정장 바지 아래의 두 다리는 힘이 빠진 듯 휠체어에 늘어져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서유는 천천히 쪼그리고 앉아 손을 뻗어 그의 다리를 만져보았다. “사월아, 다리가 왜 이래?”그는 여전히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너... 정말 서유야?”그녀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쳐다보는 남자와 눈을 맞추었다.“사월아, 나 서유야. 내가 돌아왔어.”휠체어를 탄 남자는
하지만 그 당시 그는 직접 서유를 화장터로 보냈었다. 근데 서유가 어떻게 이리 멀쩡하게 그의 앞에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그는 그녀가 환각이라는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등을 쓰다듬는 손에서 그녀의 체온을 느끼게 되자 그는 비로소 그녀가 진실한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떨리는 두 손으로 다리 위에 엎드려 울고 있는 소녀의 얼굴을 들고 자세히 그녀를 훑어보았다.3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어도 그녀는 변한 게 없었다. 예전에 창백했던 얼굴은 지금 생기가 넘쳐 보였다. 병고에 시달리던 과거와는 결별한 듯 지금의 그녀는 새롭게 태어난 것 같았다. 그런 그녀를 보며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서유야.”서유는 그를 올려다보며 눈물을 머금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나 여기 있어.”그녀는 항상 있었다. 송사월의 따뜻한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다행이다. 네 말 들어서.” “무슨 말?”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송사월은 흠칫했다.‘서유가 나한테 했던 말을 잊어버렸나 보네. 하지만 괜찮아. 내가 기억하고 있으니까.’그는 손을 뻗어 혼신의 힘을 다해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서유야, 이번에는 난 널 잊지 않았어.”그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는 날마다 수없이 그녀를 생각하고 그녀의 얼굴을 머릿속에 깊이 새겼다. 가끔 기억이 흐릿해져도 그는 그녀를 잊지 못하였다. 서유가 그한테 다음 생에는 다시는 자신을 잊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서유는 또다시 눈물을 왈칵 쏟았다.“사월아, 미안해.”‘이렇게 날 사랑하는 사람인데. 내가 죽기 전에 다른 남자를 만나고 싶어 했을 때 사월이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송사월은 그녀를 껴안고 몇 번이나 이 말을 반복했다.“서유야, 나한테 미안해하지 마.”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흐느끼고 있는 그녀를 보며 그는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그녀를 위로했다. 두 사람은 함께 부둥켜안고 예전처럼 서로 의지하며 서로를 알아가고 있었다. 유일하게 변한 것은 그가 그녀를 잊어버렸던
멍하니 서 있던 그녀는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천천히 시선을 그의 다리로옮겼다. “다리는 왜 이렇게 된 거야?”송사월은 그녀의 시선을 따라 불구가 된 자신의 다리를 쓰다듬으며 담담하게 말했다.“총상일 뿐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총상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서유는 그가 자신 때문에 자살했다는 생각이 떠올라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내 묘비 앞에서...”그는 고개를 흔들며 부정했다.“아니야 그런 거.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니까 너무 자책하지 마.”그러나 그의 말을 믿지 않았던 서유는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사월아, 우리가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마인데. 나한테 말 못 할 얘기가 뭐가 있어?”두 사람은 서로의 첫사랑이자 오랜 세월을 가족처럼 지낸 사이라서 세월이 흘러도 지울 수 없는 정이 있었다. 그녀를 보며 한참을 침묵하던 그가 마침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네가 죽고 7일째 되던 날, 너 따라가려고 했는데 이승하 씨가 날 막았어.”말을 하면서 그는 무의식적으로 서유를 쳐다보았다. 아무런 변화가 없는 그녀의 안색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이승하 씨가 내 손에 있던 총을 빼앗아 갔어. 난 죽을 마음이 확고했고 그 사람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다리에 총상을 입게 되었어.”서유는 고개를 들고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바보 같이 이게 뭐야?”그녀의 말에 그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서유야, 너 없이 사는 게 나한테 무슨 의미가 있겠니?”마음속의 죄책감이 더 커져 참을 수 없을 만큼 그녀를 아프게 만들었다. 송사월은 살아있지만 다리를 다쳐서 예전처럼 자유롭게 행동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그녀와 무관한 일이라며 자책하지 말라고 한다. 이 모든 것이 다 그녀 때문에 일어나 일인데 말이다.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다리를 쓰다듬으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미안해, 내가 널 이렇게 만들었어.”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를 다독였다. “서유야, 정말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 내가 잘못해서 다친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