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지유는 그래도 박하선보다는 생각이 빨랐다. 이런 짓을 할 사람이라면 이승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박화영이 서유가 죽고 난 뒤 이승하가 서유 무덤까지 찾아가 손목을 그으며 자살하려 했다고 말한 것이 떠올랐다.연지유도 마침 박하선과 같이 서유가 죽기 전 화장실에서 손을 댄 적이 있었다. 그때 이승하도 함께였었다.그때 박하선이 서유를 그 자리에서 죽여버리려고 하니 이승하가 나서서 말리기도 했었다. 박하선이 물러나지 않고 박화영에게 말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이승하가 서유의 뺨을 때리기까지 했었다. 그래서 박하선의 화가 누그러진 것이었는데 누가 그게 박씨 집안 사람들로부터 서유를 지키기 위한 연기일 줄 알았겠는가. 그런 천한 년이랑 5년을 붙어먹으면서 내색 하나 하지 않고 참 이승하다웠다.지금은 서유가 죽었다고 거리낄 게 없는지 대놓고 저를 괴롭히고 있었다.연지유의 머리가 다른 사람에 의해 다시 들리자 연지유는 얼굴에 잔뜩 묻은 배설물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욕부터 해댔다."이승하, 네가 나랑 결혼한다고 네 형이랑 약속했잖아. 지금 나한테 이러는 거 네 형한테 미안하지도 않아?"연지유가 말을 마치자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이승하는 또 누구야?"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연지유는 더러운 것까지 참아내며 눈을 떠 주변을 둘러보았다.이승하는 보이지 않고 온통 낯선 사람들뿐이었다. 혹시나 이승하가 보낸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연지유가 다시 외쳤다."웃기지 마! 너희 이승하가 보내서 온 거잖아!"아까 말을 하던 남자가 다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아가씨, 아가씨 밑에 이사 하나가 우리 돈을 안 주고 도망갔어. 사람을 찾을 수가 없으니 그 윗대가리라도 잡아야지."연지유는 잠시 멈칫하다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하고 다시 한번 물었다."저번 달에 우리 회사에 와서 행패 부린 게 너야?"남자는 눈썹을 까딱이며 말했다."내가 아니면 누구겠어? 뭐 다른 사람들 돈도 가로챘나 봐?"연지유는 그제야 그들의 말을 믿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의심스러운지 다시 한
주서희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병원으로 옮겨진 후였다.주서희는 힘겹게 입을 열어 말했다."물..."큰 손이 주서희의 뒤통수를 받치더니 물을 그녀의 입가로 가져다 댔다.주서희는 그 물을 받아 마시고 갈증이 어느 정도 가시자 그제야 고개를 들어 물을 건네준 사람이 누군지 확인하였다.그 검은 눈동자와 눈을 맞추는 순간 주서희는 얼굴이 창백해졌고 흔들리는 눈동자에는 공포가 어려있었다."내가 그렇게 무서워?"소준섭은 컵을 내려놓고 침대 머리에 다리를 꼬고 앉아 주서희를 바라보았다.두려움을 담았던 주서희의 두 눈이 다시 냉정함을 되찾고는 소준섭을 향해 쏘아붙였다."여긴 왜 왔어요?"소준섭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우리 서희 보러왔지."그의 말투는 퍽이나 다정했지만 눈빛에는 조롱이 섞여 있었다."우리 서희 소 씨 집안 나가서 얼마나 잘 사나 보려고 왔지..."소준섭은 손을 들어 다 터진 주서희의 살결을 매만지며 말했다."이것 봐. 얼마나 잘 지냈으면 멍까지 들었네"주서희는 이미 그의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습관이 되어 있어서인지 별생각이 없었지만 그의 손길이 몸에 닿을 때마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역겨웠다.주서희는 고개를 돌리며 그 손길을 피하고는 말했다."다 봤으면 가요 이제. 나 쉴 거에요."이 말에 화가 난 건지 아니면 손길을 피한 데서 화가 난 건지 소준섭의 표정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소준섭은 주서희의 턱을 잡아당겨 저를 보게 만들고 말했다."우리 서희가 이젠 내가 무섭지 않나 봐. 그런 말투로 나한테 말을 다 하고..."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턱을 쥐어 잡힌 탓에 주서희가 옅은 신음을 내뱉으며 말했다."아파요..."그러자 소준섭의 손아귀에 힘이 조금은 풀렸다. 전에는 주서희가 아무리 아프다고 해도 그만두는 법을 모르던 사람이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의아했다.주서희는 고개를 들어 소준섭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눈에 담으니 평온한 주서희의 시선과는 달리 소준섭은 얼마 못 가서 눈을 피했다.주
소준섭은 병실 문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급하게 뛰어오는 소수빈을 마주쳤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소준섭은 잠시 잊고 있던 증오의 감정이 솟구쳐 오름을 느꼈다. 아까 주서희를 보며 간질거렸던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소준섭은 소수빈을 노려보며 그의 어깨를 밀쳐냈다. 소수빈이 한쪽으로 넘어지는 것을 보고 나서야 소준섭은 기분 더럽다는 듯이 자리를 떴다.그 뒷모습을 보는 소수빈의 표정 역시 좋지 않았다. 몇 년 동안 잠잠하더니 또 주서희 옆에 모습을 드러낸 소준섭이 탐탁지 않았다.소준섭이 싫어하는 사람은 소수빈 자신이었지만 늘 주서희를 찾아가 괴롭히는 그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가 무엇을 생각하든 소수빈이 주서희 옆을 지키고 있는 한 다시는 괴롭히지 못하게 할 것이다. 소수빈은 소준섭을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고 주서희의 병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주서희의 상처들을 눈에 담는 순간 아까의 분노 대신 걱정과 안쓰러움이 밀려왔다."서희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나 괜찮아요."주서희는 괜찮다고 하며 멍이 들어있는 소수빈의 얼굴부터 걱정했다."오빠 얼굴은 왜 이래요?"소수빈은 멋쩍게 얼굴을 만졌다.사실 이승하가 서유를 보러 가던 날, 소수빈은 이승하가 따라오지 말라 했음에도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아 몰래 그를 따라나섰다.무덤 쪽으로 가는 이승하를 보고 소수빈은 서유를 보러 가는 줄 알고 따라 들어가진 않았는데 갑자기 박화영이 보낸 사람들에게 업혀 나오는 이승하를 보게 된 것이다.손목에 피가 흐르는 채로 쓰러져있는 이승하를 보고 박화영이 보낸 사람들한테 당한 걸로 착각하고는 바로 달려들어 이승하를 지키려 했지만 결국 본전도 못 찾고 박화영 지시로 감금까지 당한 상태였다.소수빈은 이 사실을 굳이 말하기 싫어 대충 둘러댔다."말하자면 좀 길어. 나중에 얘기해줄게."주서희도 더 묻지 않고 말했다."오빠 내가 지금까지 모은 돈 그래도 꽤 되잖아요. 그거 가혜 씨 줘요."주서희가 서유를 구할 때 서유가 깨어나기만 한다면 서유
꿈에서 깬 가혜는 한참을 울었다.이 세계에서 서유는 정말 한순간도 행복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어릴 때 심장병을 유전 받고 조금 커서 만난 첫사랑한테는 그렇게 배신당하고.아무리 오해였다 해도 서유가 힘들었던 시간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그리고 만난 마지막 사랑의 손에 숨을 거두고... 죽을 때도 실망과 유감만 한가득 안고 떠난 것 같다.서유가 미련을 둘 거라곤 전혀 없는 세계니 오고 싶지 않은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여러 번 꾼 꿈속에서 본 저승에서 서유는 정말 잘 지내는 듯 보였다. 그편이 서유가 더 행복한 길이라면 가혜는 그걸로 만족했다.사람은 언젠가는 죽는 것이고 저도 명이 다하는 그 날, 그곳으로 가 서유를 만나게 될 것이다.서유가 꿈속에서 늘 가혜와 송사월이 그곳으로 가게 되면 예쁜 집을 지어놓고 마중 나오겠다고 말했었다. 그러면 보육원에서처럼 한 집에서 셋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비록 이승에선 오래 함께하지 못한 인연일지라도 그곳에선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정신을 차린 가혜는 서유가 남긴 글을 읽으며 담담히 말했다."그래..."가혜는 여기서 남은 생을 열심히 살아내고 꼭 서유를 만나러 가서 다시는 헤어지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가혜가 생각 정리를 마치자 마침 초인종이 울렸다.가혜는 김시후가 돌아온 줄 알고 얼른 일어나 문을 열어줬는데 눈에 보이는 이는 다름 아닌 이승하의 비서 소수빈이었다.이승하와 관련된 모든 것에 치를 떠는 가혜가 그를 반갑게 맞아줄 리가 없었다. 가혜가 다시 문을 닫으려 하자 소수빈이 다급하게 말했다."잠시만요. 서희가 부탁해서 왔어요."주서희라는 이름을 듣고 가혜는 문은 닫지 않았지만 그 태도는 여전히 냉랭했다."주 선생님이 뭘 부탁한 거죠?"소수빈은 그런 차가운 말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카드를 가혜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서희가 서유 씨랑 약속을 하나 했대요. 자기 돈 가혜 씨한테 주기로. 이건 서희가 주는 거니까 꼭 받아줘요."가혜는 잠시 멍해 있다가 급히 카드를 돌려주며 말
서유가 죽은 지 7일째 되던 날 김시후는 서울로 돌아왔다. 그는 서류봉투를 챙겨 정가혜의 아파트로 향했다.한편, 정가혜는 서유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많이 만들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이때, 집 안으로 들어온 김시후가 테이블 위에 놓인 음식들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뭘 이리 많이 준비했어요?”정가혜는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7일째 되는 날이면 한번 왔다 간다고 들었어. 서유가 가기 전에 내가 산 죽도 먹지 못했는데. 아마 며칠 동안 많이 배고팠을 거야. 서유가 와서 음식을 먹고 싶어 할까 봐 좀 많이 준비했어.” 그 말에 김시후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아픔이 밀려왔다. 정가혜의 말처럼 서유는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물도 마시지 못한 채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 쓸쓸하게 죽은 서유를 생각하니 그는 온몸에 힘이 빠져서 의자를 잡고 간신히 서 있었다. 그의 모습에 정가혜는 어서 앉으라고 말한 뒤 주방으로 가서 빈 그릇과 젓가락을 가져와 테이블 한쪽 편에 놓아두었다.“우리 같이 서유랑 밥 먹자.”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던 김시후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가 건네주는 젓가락을 받아 음식을 집어 들었지만 별로 입맛이 없었다. 정가혜도 입맛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억지로 먹었다. 밥 먹고 기운을 차려야 강은우 그 개자식한테 복수할 수 있을 테니까. 김시후는 몇 입 먹고는 수저를 내려놓고 정가혜에게 서류봉투를 건네줬다. “누나,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부동산이에요. 이미 누나 명의로 다 옮겼어요.”“그리고 다른 재산도 누나 은행 계좌로 옮겨두었으니 구체적인 금액은 누나가 직접 확인해 봐요.”“이제 저녁 일은 그만둬요. 몸 잘 챙기고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들으면 들을수록 그가 유언을 남기는 것 같아 정가혜는 마음이 불안해졌다.“너 왜 그래?”김시후는 담담하게 옅은 미소를 지었다.“걱정하지 말아요. 서유한테 누나를 잘 돌봐주겠다고 약속해서 그런 거예요. 하지만 누나도 알다시피 난 화진을 관리해야 해서
김시후는 국화꽃 한 다발을 사서 묘원으로 갔다.묘비로 걸어가던 중에 그는 멀리서 묘비 앞에 우뚝 솟은 그림자가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남자는 헝클어진 머리에 핏기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김시후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초췌한 모습이었다.이승하가 서유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것 같아서 그는 발걸음을 멈추었다.하지만 한참 동안 기다려도 이승하는 입을 열지 않았고 그저 그녀의 영정 사진만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김시후는 가까이 다가가서 국화꽃을 묘비 앞에 놓아두었다.인기척을 느낀 이승하는 눈꺼풀이 살짝 떨렸지만 누구인지 아는 사람처럼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두 사람은 그렇게 묘비 앞에 서서 그녀의 영정사진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서로를 쫓아낼 정도로 적대시하지도 않았다.오랜 침묵이 흐른 후 김시후가 먼저 입을 열었다.“서유를 사랑하나요?”이승하는 가슴이 아팠고 절망에 휩싸여 나락으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는 떨리는 손을 들어 오른쪽 손목에서 피가 나올 때까지 있는 힘껏 눌렀고 그제야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그의 손목에 난 상처를 본 김시후가 뭔가 깨달은 듯 입을 열었다.“이 대표님은 서유를 사랑하나 봅니다...” 이승하는 여전히 입술을 오므린 채 아무 말이 없었고 오른쪽 손목을 더 힘껏 눌렀다. 한편, 김시후는 그를 쳐다만 볼 뿐 그를 막지 않았다.“서유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합니까?”그의 말에 이승하는 자극받은 듯 고개를 들고는 빨간 눈으로 김시후를 노려보았다.“서유가 사랑한 사람은 당신이었습니다.”지난 5년 동안, 그녀는 잠결에 송사월의 이름만 불렀었고 단 한 번도 그의 이름을 부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어찌 그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다만 그녀가 남긴 몇 마디 말을 들어보면 그녀가 자신에게 마음이 움직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움직였다 하더라도 그게 사랑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문득 이승하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유의 마음조차 잘 알지 못하
서유와 오랫동안 함께 있으면서 그는 서유를 건드린 적이 없다. 아무리 사랑이 깊어도 그녀한테 키스만 했을 뿐이다.그녀와 결혼을 하고 멋진 가정을 꾸린 다음 그녀와 관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서유는 그를 위해 자신을 이승하에게 바쳤다. 몸만 나누는 사이로 시작해서 그녀는 점점 이승하에게 마음이 움직였다.서유와 관계를 가지지 않은 걸 후회하는 건 아니다. 다만 그녀를 생각하면 너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을 다 이승하에게 주었는데 이승하는 그녀한테 이리 못되게 굴었다. 그가 보는 앞에서 서유를 강요하는 일까지 한 걸 보면 이승하는 그녀를 사람이 아닌 욕정을 푸는 도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승하가 질투심에 불타올라 화를 내고 소유욕 때문에 이성을 잃었다는 걸 알면서도 김시후는 여전히 서유가 이승하에게는 과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서유와 잠자리를 했다고 오해하고 있는 이승하에게 진실을 말해줄 생각이다. 그가 평생 서유를 오해한 죄책감 속에 살기를 바랐다. 김시후의 말은 그에게 또 한 번 큰 충격을 주었다.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이승하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그는 간신히 몸을 지탱한 채 눈을 붉히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두 사람... 잔 적이 없다는 겁니까?”서유는 분명히 자신에게 김시후와 잠자리를 가진 적이 있다고 했었다. 하지만 김시후는 그녀를 건드린 적이 없다고 한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믿지 않는 그의 모습을 보며 김시후는 참지 못하고 차갑게 웃었다.“누구나 다 당신처럼 사랑하면 꼭 그녀를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사랑하는 사람을 내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면 그게 어찌 사랑인가?이승하의 머릿속에는 그녀를 사랑한다면 그녀를 차지하고 그녀의 몸과 마음도 다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었다.그러나 김시후는 지금 그한테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꼭 그 사람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럼 내 사랑은 사랑이 아니고 김시후 이 자의 사랑만이 사랑인
“사월...”“송사월...”하얀 셔츠를 입은 소년이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책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햇빛이 나뭇가지 사이를 뚫고 소년의 몸을 비추며 부드러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이때, 소녀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캠퍼스 밖에서부터 들려왔다.“사월아, 너 보러 왔어.”그 소리를 듣고 소년은 고개를 들었고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는 소녀의 모습을 보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천천히 뛰어.”천천히 달리라는 소년의 말에 소녀는 반항하듯 더 빨리 달렸고 소년은 참지 못하고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소녀를 향해 뛰어갔다.그는 그녀를 안은 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그녀의 콧등을 쓰다듬었다. “심장병도 있는 애가 이렇게 빨리 뛰어다니면 어떡해? 참 말 안 들어.” 소녀는 그의 허리를 껴안고 그의 가슴에 머리를 얹으며 애교를 부렸다. “나 매일 약도 잘 챙겨 먹고 있어. 아주 착하다고.”소년은 옅은 미소를 짓더니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서유야, 너희 학교는 서울대랑 너무 멀어. 다음부터는 이렇게 힘들게 찾아오지 말고 내가 보고 싶으면 나한테 전화해. 내가 너 보러 갈 테니까. 알았지?” 그의 품에 안겨있던 소녀는 고개를 들고 자상하게 말했다.“넌 공부하느라고 바쁘잖아. 됐어. 내가 시간 날 때마다 너 보러 올게.”소년은 그녀를 말리고 싶었지만 그녀가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사월아, 방금 학교 문 앞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서 나무 밑에 앉아 있었어. 누구에게 맞았는지...되게 불쌍해 보여서 물 한 병 줬더니 날 무시하더라고.”소녀는 말을 하면서 입을 삐죽거렸다.“이상한 사람 아니야?”소년은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그제야 소녀는 만족한 듯 입꼬리를 올렸다.“역시 우리 사월이가 최고야.” 소년은 빙그레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고는 햇살을 받으며 그녀와 나란히 걸었다. 바람이 산들거리고 향기로운 꽃향기가 풍겨왔다. 서유가 서서히 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