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지유는 그래도 박하선보다는 생각이 빨랐다. 이런 짓을 할 사람이라면 이승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박화영이 서유가 죽고 난 뒤 이승하가 서유 무덤까지 찾아가 손목을 그으며 자살하려 했다고 말한 것이 떠올랐다.연지유도 마침 박하선과 같이 서유가 죽기 전 화장실에서 손을 댄 적이 있었다. 그때 이승하도 함께였었다.그때 박하선이 서유를 그 자리에서 죽여버리려고 하니 이승하가 나서서 말리기도 했었다. 박하선이 물러나지 않고 박화영에게 말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이승하가 서유의 뺨을 때리기까지 했었다. 그래서 박하선의 화가 누그러진 것이었는데 누가 그게 박씨 집안 사람들로부터 서유를 지키기 위한 연기일 줄 알았겠는가. 그런 천한 년이랑 5년을 붙어먹으면서 내색 하나 하지 않고 참 이승하다웠다.지금은 서유가 죽었다고 거리낄 게 없는지 대놓고 저를 괴롭히고 있었다.연지유의 머리가 다른 사람에 의해 다시 들리자 연지유는 얼굴에 잔뜩 묻은 배설물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욕부터 해댔다."이승하, 네가 나랑 결혼한다고 네 형이랑 약속했잖아. 지금 나한테 이러는 거 네 형한테 미안하지도 않아?"연지유가 말을 마치자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이승하는 또 누구야?"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연지유는 더러운 것까지 참아내며 눈을 떠 주변을 둘러보았다.이승하는 보이지 않고 온통 낯선 사람들뿐이었다. 혹시나 이승하가 보낸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연지유가 다시 외쳤다."웃기지 마! 너희 이승하가 보내서 온 거잖아!"아까 말을 하던 남자가 다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아가씨, 아가씨 밑에 이사 하나가 우리 돈을 안 주고 도망갔어. 사람을 찾을 수가 없으니 그 윗대가리라도 잡아야지."연지유는 잠시 멈칫하다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하고 다시 한번 물었다."저번 달에 우리 회사에 와서 행패 부린 게 너야?"남자는 눈썹을 까딱이며 말했다."내가 아니면 누구겠어? 뭐 다른 사람들 돈도 가로챘나 봐?"연지유는 그제야 그들의 말을 믿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의심스러운지 다시 한
주서희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병원으로 옮겨진 후였다.주서희는 힘겹게 입을 열어 말했다."물..."큰 손이 주서희의 뒤통수를 받치더니 물을 그녀의 입가로 가져다 댔다.주서희는 그 물을 받아 마시고 갈증이 어느 정도 가시자 그제야 고개를 들어 물을 건네준 사람이 누군지 확인하였다.그 검은 눈동자와 눈을 맞추는 순간 주서희는 얼굴이 창백해졌고 흔들리는 눈동자에는 공포가 어려있었다."내가 그렇게 무서워?"소준섭은 컵을 내려놓고 침대 머리에 다리를 꼬고 앉아 주서희를 바라보았다.두려움을 담았던 주서희의 두 눈이 다시 냉정함을 되찾고는 소준섭을 향해 쏘아붙였다."여긴 왜 왔어요?"소준섭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우리 서희 보러왔지."그의 말투는 퍽이나 다정했지만 눈빛에는 조롱이 섞여 있었다."우리 서희 소 씨 집안 나가서 얼마나 잘 사나 보려고 왔지..."소준섭은 손을 들어 다 터진 주서희의 살결을 매만지며 말했다."이것 봐. 얼마나 잘 지냈으면 멍까지 들었네"주서희는 이미 그의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습관이 되어 있어서인지 별생각이 없었지만 그의 손길이 몸에 닿을 때마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역겨웠다.주서희는 고개를 돌리며 그 손길을 피하고는 말했다."다 봤으면 가요 이제. 나 쉴 거에요."이 말에 화가 난 건지 아니면 손길을 피한 데서 화가 난 건지 소준섭의 표정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소준섭은 주서희의 턱을 잡아당겨 저를 보게 만들고 말했다."우리 서희가 이젠 내가 무섭지 않나 봐. 그런 말투로 나한테 말을 다 하고..."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턱을 쥐어 잡힌 탓에 주서희가 옅은 신음을 내뱉으며 말했다."아파요..."그러자 소준섭의 손아귀에 힘이 조금은 풀렸다. 전에는 주서희가 아무리 아프다고 해도 그만두는 법을 모르던 사람이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의아했다.주서희는 고개를 들어 소준섭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눈에 담으니 평온한 주서희의 시선과는 달리 소준섭은 얼마 못 가서 눈을 피했다.주
소준섭은 병실 문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급하게 뛰어오는 소수빈을 마주쳤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소준섭은 잠시 잊고 있던 증오의 감정이 솟구쳐 오름을 느꼈다. 아까 주서희를 보며 간질거렸던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소준섭은 소수빈을 노려보며 그의 어깨를 밀쳐냈다. 소수빈이 한쪽으로 넘어지는 것을 보고 나서야 소준섭은 기분 더럽다는 듯이 자리를 떴다.그 뒷모습을 보는 소수빈의 표정 역시 좋지 않았다. 몇 년 동안 잠잠하더니 또 주서희 옆에 모습을 드러낸 소준섭이 탐탁지 않았다.소준섭이 싫어하는 사람은 소수빈 자신이었지만 늘 주서희를 찾아가 괴롭히는 그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가 무엇을 생각하든 소수빈이 주서희 옆을 지키고 있는 한 다시는 괴롭히지 못하게 할 것이다. 소수빈은 소준섭을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고 주서희의 병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주서희의 상처들을 눈에 담는 순간 아까의 분노 대신 걱정과 안쓰러움이 밀려왔다."서희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나 괜찮아요."주서희는 괜찮다고 하며 멍이 들어있는 소수빈의 얼굴부터 걱정했다."오빠 얼굴은 왜 이래요?"소수빈은 멋쩍게 얼굴을 만졌다.사실 이승하가 서유를 보러 가던 날, 소수빈은 이승하가 따라오지 말라 했음에도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아 몰래 그를 따라나섰다.무덤 쪽으로 가는 이승하를 보고 소수빈은 서유를 보러 가는 줄 알고 따라 들어가진 않았는데 갑자기 박화영이 보낸 사람들에게 업혀 나오는 이승하를 보게 된 것이다.손목에 피가 흐르는 채로 쓰러져있는 이승하를 보고 박화영이 보낸 사람들한테 당한 걸로 착각하고는 바로 달려들어 이승하를 지키려 했지만 결국 본전도 못 찾고 박화영 지시로 감금까지 당한 상태였다.소수빈은 이 사실을 굳이 말하기 싫어 대충 둘러댔다."말하자면 좀 길어. 나중에 얘기해줄게."주서희도 더 묻지 않고 말했다."오빠 내가 지금까지 모은 돈 그래도 꽤 되잖아요. 그거 가혜 씨 줘요."주서희가 서유를 구할 때 서유가 깨어나기만 한다면 서유
꿈에서 깬 가혜는 한참을 울었다.이 세계에서 서유는 정말 한순간도 행복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어릴 때 심장병을 유전 받고 조금 커서 만난 첫사랑한테는 그렇게 배신당하고.아무리 오해였다 해도 서유가 힘들었던 시간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그리고 만난 마지막 사랑의 손에 숨을 거두고... 죽을 때도 실망과 유감만 한가득 안고 떠난 것 같다.서유가 미련을 둘 거라곤 전혀 없는 세계니 오고 싶지 않은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여러 번 꾼 꿈속에서 본 저승에서 서유는 정말 잘 지내는 듯 보였다. 그편이 서유가 더 행복한 길이라면 가혜는 그걸로 만족했다.사람은 언젠가는 죽는 것이고 저도 명이 다하는 그 날, 그곳으로 가 서유를 만나게 될 것이다.서유가 꿈속에서 늘 가혜와 송사월이 그곳으로 가게 되면 예쁜 집을 지어놓고 마중 나오겠다고 말했었다. 그러면 보육원에서처럼 한 집에서 셋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비록 이승에선 오래 함께하지 못한 인연일지라도 그곳에선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정신을 차린 가혜는 서유가 남긴 글을 읽으며 담담히 말했다."그래..."가혜는 여기서 남은 생을 열심히 살아내고 꼭 서유를 만나러 가서 다시는 헤어지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가혜가 생각 정리를 마치자 마침 초인종이 울렸다.가혜는 김시후가 돌아온 줄 알고 얼른 일어나 문을 열어줬는데 눈에 보이는 이는 다름 아닌 이승하의 비서 소수빈이었다.이승하와 관련된 모든 것에 치를 떠는 가혜가 그를 반갑게 맞아줄 리가 없었다. 가혜가 다시 문을 닫으려 하자 소수빈이 다급하게 말했다."잠시만요. 서희가 부탁해서 왔어요."주서희라는 이름을 듣고 가혜는 문은 닫지 않았지만 그 태도는 여전히 냉랭했다."주 선생님이 뭘 부탁한 거죠?"소수빈은 그런 차가운 말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카드를 가혜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서희가 서유 씨랑 약속을 하나 했대요. 자기 돈 가혜 씨한테 주기로. 이건 서희가 주는 거니까 꼭 받아줘요."가혜는 잠시 멍해 있다가 급히 카드를 돌려주며 말
서유가 죽은 지 7일째 되던 날 김시후는 서울로 돌아왔다. 그는 서류봉투를 챙겨 정가혜의 아파트로 향했다.한편, 정가혜는 서유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많이 만들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이때, 집 안으로 들어온 김시후가 테이블 위에 놓인 음식들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뭘 이리 많이 준비했어요?”정가혜는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7일째 되는 날이면 한번 왔다 간다고 들었어. 서유가 가기 전에 내가 산 죽도 먹지 못했는데. 아마 며칠 동안 많이 배고팠을 거야. 서유가 와서 음식을 먹고 싶어 할까 봐 좀 많이 준비했어.” 그 말에 김시후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아픔이 밀려왔다. 정가혜의 말처럼 서유는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물도 마시지 못한 채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 쓸쓸하게 죽은 서유를 생각하니 그는 온몸에 힘이 빠져서 의자를 잡고 간신히 서 있었다. 그의 모습에 정가혜는 어서 앉으라고 말한 뒤 주방으로 가서 빈 그릇과 젓가락을 가져와 테이블 한쪽 편에 놓아두었다.“우리 같이 서유랑 밥 먹자.”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던 김시후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가 건네주는 젓가락을 받아 음식을 집어 들었지만 별로 입맛이 없었다. 정가혜도 입맛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억지로 먹었다. 밥 먹고 기운을 차려야 강은우 그 개자식한테 복수할 수 있을 테니까. 김시후는 몇 입 먹고는 수저를 내려놓고 정가혜에게 서류봉투를 건네줬다. “누나,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부동산이에요. 이미 누나 명의로 다 옮겼어요.”“그리고 다른 재산도 누나 은행 계좌로 옮겨두었으니 구체적인 금액은 누나가 직접 확인해 봐요.”“이제 저녁 일은 그만둬요. 몸 잘 챙기고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들으면 들을수록 그가 유언을 남기는 것 같아 정가혜는 마음이 불안해졌다.“너 왜 그래?”김시후는 담담하게 옅은 미소를 지었다.“걱정하지 말아요. 서유한테 누나를 잘 돌봐주겠다고 약속해서 그런 거예요. 하지만 누나도 알다시피 난 화진을 관리해야 해서
김시후는 국화꽃 한 다발을 사서 묘원으로 갔다.묘비로 걸어가던 중에 그는 멀리서 묘비 앞에 우뚝 솟은 그림자가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남자는 헝클어진 머리에 핏기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김시후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초췌한 모습이었다.이승하가 서유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것 같아서 그는 발걸음을 멈추었다.하지만 한참 동안 기다려도 이승하는 입을 열지 않았고 그저 그녀의 영정 사진만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김시후는 가까이 다가가서 국화꽃을 묘비 앞에 놓아두었다.인기척을 느낀 이승하는 눈꺼풀이 살짝 떨렸지만 누구인지 아는 사람처럼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두 사람은 그렇게 묘비 앞에 서서 그녀의 영정사진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서로를 쫓아낼 정도로 적대시하지도 않았다.오랜 침묵이 흐른 후 김시후가 먼저 입을 열었다.“서유를 사랑하나요?”이승하는 가슴이 아팠고 절망에 휩싸여 나락으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는 떨리는 손을 들어 오른쪽 손목에서 피가 나올 때까지 있는 힘껏 눌렀고 그제야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그의 손목에 난 상처를 본 김시후가 뭔가 깨달은 듯 입을 열었다.“이 대표님은 서유를 사랑하나 봅니다...” 이승하는 여전히 입술을 오므린 채 아무 말이 없었고 오른쪽 손목을 더 힘껏 눌렀다. 한편, 김시후는 그를 쳐다만 볼 뿐 그를 막지 않았다.“서유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합니까?”그의 말에 이승하는 자극받은 듯 고개를 들고는 빨간 눈으로 김시후를 노려보았다.“서유가 사랑한 사람은 당신이었습니다.”지난 5년 동안, 그녀는 잠결에 송사월의 이름만 불렀었고 단 한 번도 그의 이름을 부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어찌 그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다만 그녀가 남긴 몇 마디 말을 들어보면 그녀가 자신에게 마음이 움직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움직였다 하더라도 그게 사랑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문득 이승하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유의 마음조차 잘 알지 못하
서유와 오랫동안 함께 있으면서 그는 서유를 건드린 적이 없다. 아무리 사랑이 깊어도 그녀한테 키스만 했을 뿐이다.그녀와 결혼을 하고 멋진 가정을 꾸린 다음 그녀와 관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서유는 그를 위해 자신을 이승하에게 바쳤다. 몸만 나누는 사이로 시작해서 그녀는 점점 이승하에게 마음이 움직였다.서유와 관계를 가지지 않은 걸 후회하는 건 아니다. 다만 그녀를 생각하면 너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을 다 이승하에게 주었는데 이승하는 그녀한테 이리 못되게 굴었다. 그가 보는 앞에서 서유를 강요하는 일까지 한 걸 보면 이승하는 그녀를 사람이 아닌 욕정을 푸는 도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승하가 질투심에 불타올라 화를 내고 소유욕 때문에 이성을 잃었다는 걸 알면서도 김시후는 여전히 서유가 이승하에게는 과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서유와 잠자리를 했다고 오해하고 있는 이승하에게 진실을 말해줄 생각이다. 그가 평생 서유를 오해한 죄책감 속에 살기를 바랐다. 김시후의 말은 그에게 또 한 번 큰 충격을 주었다.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이승하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그는 간신히 몸을 지탱한 채 눈을 붉히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두 사람... 잔 적이 없다는 겁니까?”서유는 분명히 자신에게 김시후와 잠자리를 가진 적이 있다고 했었다. 하지만 김시후는 그녀를 건드린 적이 없다고 한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믿지 않는 그의 모습을 보며 김시후는 참지 못하고 차갑게 웃었다.“누구나 다 당신처럼 사랑하면 꼭 그녀를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사랑하는 사람을 내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면 그게 어찌 사랑인가?이승하의 머릿속에는 그녀를 사랑한다면 그녀를 차지하고 그녀의 몸과 마음도 다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었다.그러나 김시후는 지금 그한테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꼭 그 사람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럼 내 사랑은 사랑이 아니고 김시후 이 자의 사랑만이 사랑인
“사월...”“송사월...”하얀 셔츠를 입은 소년이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책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햇빛이 나뭇가지 사이를 뚫고 소년의 몸을 비추며 부드러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이때, 소녀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캠퍼스 밖에서부터 들려왔다.“사월아, 너 보러 왔어.”그 소리를 듣고 소년은 고개를 들었고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는 소녀의 모습을 보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천천히 뛰어.”천천히 달리라는 소년의 말에 소녀는 반항하듯 더 빨리 달렸고 소년은 참지 못하고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소녀를 향해 뛰어갔다.그는 그녀를 안은 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그녀의 콧등을 쓰다듬었다. “심장병도 있는 애가 이렇게 빨리 뛰어다니면 어떡해? 참 말 안 들어.” 소녀는 그의 허리를 껴안고 그의 가슴에 머리를 얹으며 애교를 부렸다. “나 매일 약도 잘 챙겨 먹고 있어. 아주 착하다고.”소년은 옅은 미소를 짓더니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서유야, 너희 학교는 서울대랑 너무 멀어. 다음부터는 이렇게 힘들게 찾아오지 말고 내가 보고 싶으면 나한테 전화해. 내가 너 보러 갈 테니까. 알았지?” 그의 품에 안겨있던 소녀는 고개를 들고 자상하게 말했다.“넌 공부하느라고 바쁘잖아. 됐어. 내가 시간 날 때마다 너 보러 올게.”소년은 그녀를 말리고 싶었지만 그녀가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사월아, 방금 학교 문 앞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서 나무 밑에 앉아 있었어. 누구에게 맞았는지...되게 불쌍해 보여서 물 한 병 줬더니 날 무시하더라고.”소녀는 말을 하면서 입을 삐죽거렸다.“이상한 사람 아니야?”소년은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그제야 소녀는 만족한 듯 입꼬리를 올렸다.“역시 우리 사월이가 최고야.” 소년은 빙그레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고는 햇살을 받으며 그녀와 나란히 걸었다. 바람이 산들거리고 향기로운 꽃향기가 풍겨왔다. 서유가 서서히 눈을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