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마친 상철수는 이내 자리를 떴다. 그가 떠난 후, 이승하의 머릿속에 있는 칩이 다시 카운트다운을 시작했고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머릿속의 카운트다운 그리고 서유의 임신 모든 게 그를 향한 경고였다. 약속한 대로 약속을 지키라는 것. 그렇지 않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승하가 그녀에게 귀띔을 하든 안 하든 그녀가 그의 사정을 눈치채든 눈치채지 못하든 그건 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상철수가 원하는 건 오로지 두 사람이 완전히 헤어지는 것이니까. 상철수는 언제든지 서유의 뱃속의 아이를 소리 없이 제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승하의 머릿속에 있는 칩은 그를 통제하고 그가 영원히 루드웰을 떠날 수 없게 만들 것이다. 루드웰을 떠나지 못하면 서유도 아이도 지키줄 수가 없다. 일단 이곳에서 나가는 게 급선무였다. 모든 힘을 빌려 상철수를 제거하여야만 모든 것이 다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의 만남은 이제 곧 이별이 될 것이다.그 생각에 숨이 막힐 정도로 가슴이 아팠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고 얼굴의 가면을 벗었다. 메인 자리에 앉아 있던 서유도 가면을 벗었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두 사람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다.잠시 후, 카운트다운 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자 이승하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아직 회복되지 않은 몸을 간신히 이끌고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몸을 웅크리지도 않고 의자에 앉지도 않고 빛을 등진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당신...”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며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지난번에 죽을 때까지 만나지 않겠다고 해서 난 당신이... 영원히 날 만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보는데 빛을 등지고 있어 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부부 사이에 싸우다 보면 심한 말도 할 수 있는 거죠. 기분 상했어요?”그녀의 말에 참고 있던 눈물이 하마터면 뚝 떨어질 뻔했다. 그녀가 알아차리
그의 눈썹 아래 아름다운 두 눈이 밤하늘의 별처럼 어둡고 깊어서 복잡한 그의 생각을 꿰뚫어 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런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무언가를 찾으려 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혔다. 심장 이식 수술을 받은 뒤로 심장이 약해진 것 같다.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늘 통증이 전해졌다. 그러나 또 한 번 죽을 고비를 겪고 나니 예전보다 많이 이성적으로 변한 것 같다. 지금처럼 그녀는 통증을 억누르고 침착하게 그를 바라볼 수가 있었다.“루드웰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데 왜 집에 안 돌아왔어요? 왜 나한테 연락 안 한 거예요?”따지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답을 듣고 싶었다. 계속해서 눈을 내리깔고 있던 그가 한동안 침묵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돌아가기 싫어서. 당신한테 연락하기도 싫고...”숨이 멎을 것처럼 심장이 아팠다. 말 한마디가 이렇게 잔인하고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할 줄이야.오랫동안 그리웠던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연지유 때문이에요?”그가 옅은 미소를 짓는데 눈이 반달모양이 되었다. 눈 밑의 새빨간 빛을 감춘 뒤 그가 담담하게 한마디 내뱉었다.“맞아.”그 말이 가슴을 찔러 그녀를 아프게 했지만 그녀는 아픔을 꾹 참고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승하 씨, 연지유 때문에 당신이 날 세 번이나 아프게 만들었어요. 계약이 끝났을 때 한 번 날 아프게 했고 나한테 이혼을 강요하면서 날 아프게 했고 그리고 이번이에요. 정말 너무 아픈데 그럼에도 불구하고...”“그 여자 때문에 집에 안 돌아오고 나한테 연락 안 했다는 말 난 믿지 않아요. 당신이 그 여자를 사랑할 수 있다면 진작 사랑했을 거니까. 나와 결혼할 일도 없었겠죠.”말을 마친 그녀는 손을 뻗어 꽉 움켜쥐고 있는 그의 손을 잡았다.그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그녀보다 더 온기가 없었다.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큰 손을 바라보았다. 예전 같았으면 그가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와 깍지
“여기 CCTV 있어서 말하기가 불편해요?”CCTV를 꺼달라고 상철수를 찾아가려는데 그가 그녀를 잡아당겼다.“메인 통제 구역은 상철수의 개인 구역이라서 CCTV가 없어.”Ace에서 이곳만 CCTV가 없었고 상철수는 누구도 자신의 사생활을 엿볼 수 없게 만들었다. 메인 통제실 안을 둘러보니 온통 금속 질감의 벽이었고 문조차도 무거운 금속 문이었다. “그럼 여기 방음은 잘 돼요? 그가 엿들을까 봐 두려워요...”조심스러워하는 그녀의 모습에 이승하는 참지 못하고 미소를 지으며 다정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방음 잘 돼. 게다가 내 신분에 대해 모르고 있으니 아마 관심도 없을 거야.”그녀는 상철수가 연지유로부터 이승하의 신분을 듣고 그의 자유를 제한했고 짐작했었다. 그런데 이승하는 상철수가 그의 신분을 모르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녀의 손을 꼭 잡은 채 다정한 말투로 설명했다. “상철수가 내 신분을 알았다면 내가 어떻게 이리 멀쩡하게 당신 앞에 나타났겠어?”그의 말이 일리가 있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의심스러웠다. “그럼...”그녀가 무엇을 묻고 싶은지 잘 알고 있었던 이승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던 건 연지유가 내 신분을 가지고 날 협박했기 때문이야. 루드웰을 떠나지도 못하게 하고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못하게 했어.”“난 내 신분이 밝혀지지 않기 위해 연지유의 말에 따르기로 선택했고 하루빨리 루드웰의 보스가 누구인지 알아내어 당신 곁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었어.”그가 이런 말을 한 것은 그녀의 의심을 풀기 위해서였다. 그녀의 의심을 풀어야만 평화롭게 헤어질 수 있을 테니까. 그녀에게 귀띔을 하든 안 하든 또 그녀가 그의 사정을 눈치채든 눈치채지 못하든 솔직히 다 소용이 없었다.상철수가 원하는 건 두 사람이 완전히 헤어지는 것이었고 만약 헤어지지 못한다면 그는 영원히 이곳에서 나갈 수 없고 서유의 뱃속의 아이도 죽게 될 것이다. 그가 여기서 나가지 못하고 죽는 건 사실 상관없었다. 다만 어렵게 그
눈 안의 별빛이 흐릿한 안개처럼 눈 밑의 깊고 어두운 표정을 가리고 있어 그녀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내뱉은 말은 너무 아팠다. 듣기만 해도 코끝이 찡하고 눈시울이 붉어져 애써 참으려고 해도 참을 수가 없었다. “왜요? 연지유가 당신을 협박한 거예요?”지난번에는 그녀의 목숨을 걸고 이승하를 협박하였기 때문에 그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밀어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루드웰 리더의 자격으로 연지유를 해결할 테니까 당신 겁먹지 말아요.”단호한 그녀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따뜻한 목소리에 그는 저도 모르게 미안함이 몰려왔다.“그런 거 아니야. 내가 당신이랑 이혼하고 싶어서 그래.”그 자리에서 멍해졌다. 가슴이 답답해지고 코끝이 찡해지더니 눈물이 마치 실이 끊어진 구슬처럼 흘러내렸다.“왜요...”마음이 변한 것도 아니고 자유를 잃은 것도 아니고 협박을 받은 것도 아닌데 왜 이혼하려고 하는 건지?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모습에 당황한 그가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눈물을 닦아 주었다.“서유... 나랑 같이 있으면서 많이 힘들었지?”그는 다정하게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다정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고 애틋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그러나 그가 한 말은 다정하기는커녕 너무 잔인했다. “택이는 나 때문에 죽었고 S 조직의 멤버들이 이곳에서 죽었어. 내가 짊어져야 할 게 너무 많아. 당신이 계속 나랑 같이 있으면 많이 힘들 거야. 그래서 말인데...”잠깐 망설이던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헤어지자.”눈물이 고인 눈을 들어 눈앞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헤어지자는 말이 그의 입에서 이리 나올 줄은 몰랐다. 처음 그가 계약서를 들고 와서 헤어지자고 했을 때, 그녀는 더 이상 매달리지 않고 쿨하게 떠났다.그때는 그가 다시 자신을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마음을 접으려고 노력했었다. 그런데 나중에 그가 계속 그녀를 찾아왔다.귀국
그녀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를 탓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손을 더욱 꽉 움켜쥐었다.“난 상철수의 외손녀 따위 하고 싶지 않아요. 그의 자리를 이어받는 것도 거절하고 당신의 편을 들 수 있다고요. 그래도... 헤어져야 하나요?”시종일관 굳건한 그녀의 모습은 초라한 그를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말을 하면 할수록 자신이 점점 더 잔인하고 못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혈연은 끊을 수 없는 거야. 당신이 루드웰의 리더라는 걸 상철수가 선언한 그 순간부터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야. 아마 이제 곧... 루드웰의 사람들은 당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겠지.”“그리고 S 조직의 사람들도 당신이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고. 알게 되면 그들이 당신을 놓아줄 것 같아?”잔뜩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는 그의 말에 온몸이 떨렸고 무언가에 사로잡혀 헤어 나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힘없이 그의 손을 놓아주었다. 맑고 반짝이던 그녀의 눈은 점차 안개가 드리워졌고 앞날을 내다볼 수가 없었다. 이승하의 손이 부드럽고 매끄러운 그녀의 곱슬머리에서 그녀의 얼굴로 천천히 이동했다. 귀한 보물이라도 만지듯 그녀의 눈매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나중에 S 조직의 멤버들이 당신을 해치는 것을 보고 내가 참지 못하고 멤버들에게 손을 쓸까 봐 두려워. 난 S 조직의 리더인데. 내가 그들에게 손을 대면 어떻게 조직을 이끌고 복수할 수 있겠어?”“그때 가면 내 입장만 곤란해질 거고 당신은 당신 대로 많이 힘들 거야. 그래서 헤어지자는 거고.”어쩔 수 없다는 말을 이렇게까지 하는데 그녀라고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는가?“당신은 이미 두 번이나 날 버렸어요. 이번이 세 번째죠. 이번에 헤어지면 나 다시는 돌아보지 않을 거예요. 정말 결심한 거예요?”첫 번째는 그의 부득이한 사정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그의 강요에 의해 의혼한 것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인 지금, 그한테는 이게 최선이었다. 한 번 또 한 번 버려지는 게 얼마나 힘든 일
“서유.”자리를 뜨려는데 그가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 고개를 돌리니 그가 마침 자신의 배를 쳐다보고 있었다.“나... 아이 좀 만져볼 수 있을까?”임신하고 지금까지 그는 곁에 없었고 아이를 만져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한번 만져보고 싶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 그녀도 자신의 배를 쳐다보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아랫배에 갖다 댔다. 볼록한 배에 손끝이 닿는 순간 찢어지게 아프던 마음이 순식간에 따뜻해졌다. 그의 다정한 눈빛을 보며 그녀는 문뜩 이연석이 동화책을 들고 가혜 뱃속의 아이한테 이야기를 들려주던 모습이 떠올랐다. 아빠가 아이한테 말을 걸어주면 헤어지고 나서도 후회가 덜 될 것 같아 그에게 물었다.“아이한테 하고 싶은 말 있어요?”그녀의 말에 그는 흠칫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지만 조심스럽게 그녀의 배를 만지며 입을 열었다.“안녕...”한마디 하고는 긴장한 듯 그녀를 올려다보았다.“아이가 내 말 들을 수 있나?”그녀는 자신의 배를 만지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6개월이 다 돼가요. 태동도 있고 가끔 내가 말을 하면 손 내밀고 발로 차는 게 느껴져요.”처음 아빠가 된 그는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이가 뱃속에서 손을 뻗고 발을 뻗는다는 말에 그는 또다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런데... 왜 지금은 움직이지 않는 거지?”아무리 자세히 만져봐도 그녀가 말하는 태동을 느끼지 못하였다.“당신이... 애한테 말을 너무 적게 한 게 아닐까요?”인사만 했을 뿐이니 그의 목소리에 익숙하지 않는 뱃속의 아이가 그를 무시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그는 볼록한 그녀의 배를 쳐다보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의자에서 일어나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최대한 아이에게 가까이 다가가 아직 보이지 않는 생명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너희 엄마가 널 가지려고 정말 애 많이 썼어. 그러니까 무사하게 건강하게 태어나야 해.”“아빠로서 너의 곁에 있어 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옆에서 동화책도
서유는 복도를 따라 걷다가 회의실 앞을 지날 때 안에서 날카로운 호통 소리가 들려오는 걸 듣고는 걸음을 멈췄다. 열려 있는 문 너머로 보니 회의실에 있는 조종자들이 상철수에게 호되게 꾸중을 듣고 있었다. “다음에도 또 이런 짓을 한다면, B구역 2조 사람들은 중구역 베팅에 절대 관여하지 마. 돈 벌 방법이 남아있을지 한번 보지!” 상철수는 호통을 치고서 고개를 들어 문밖에 있는 그녀를 보고는 말끝을 흐리며 목소리를 한층 낮췄다. “나가봐.” 사람들이 모두 나간 뒤, 상철수는 손을 들어 부드럽게 그녀에게 손짓했다. “들어오거라.” 서유는 잠시 망설이다가 안으로 들어갔고, 상철수의 권유로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앉자마자 상철수는 서랍을 열고 매실 한 통을 꺼내어 그녀 앞에 놓았다. “대화는 끝났니?” 서유가 답하려던 순간, 상철수가 갑자기 그녀를 지나쳐 바깥쪽을 보고는 지나가던 이승하를 불렀다. “잠깐 들어와.” 이승하는 발길을 멈추고 회의실 쪽을 돌아보았다가, 서유를 발견하고는 잠시 멈칫하더니 곧 안으로 들어왔다. “맡은 일은 다 끝났나?” 상철수의 의도를 알아챈 이승하는 뒤로 감춘 주먹을 꽉 쥐었지만, 표정은 드러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끝났습니다.” “잘 됐군. 2조 책임자가 초대 손님을 모셔 오다가 일이 틀어졌다고 하더군. 자네가 B국 화영시에 가서 좀 도와줘.” 서유는 상철수가 이승하의 정체를 알아챈 뒤 자신을 위협하여 이승하와 헤어지게 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그 의심을 확인하고자 들어온 것이었지만, 상철수의 말을 듣고 그 의심은 조금씩 사라져 갔다. 만약 상철수가 정말 이승하의 정체를 알고 있다면, 그를 루드웰에 가둬두지 왜 이렇게 쉽게 보내줄까? 상철수의 깊고 교활한 계산 앞에 누구도 당해낼 수 없었다. 이승하조차도 그가 불렀을 때 그의 의도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승하는 떠날 기회를 얻었으니 지금 이 순간 마음속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로 했다.
서유는 생이별의 아픔을 맞닥뜨리고 싶지 않다는 듯, 말을 다 잇지 못한 채 뒤로 한 걸음 물러서더니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다른 임산부들은 다들 통통하게 보이지만, 서유는 임신한 지금조차도 여전히 마른 몸이었다. 그녀가 바람이라도 불면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이는 모습에, 이승하는 참을 수 없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서유야.” 그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발걸음을 멈췄으나 뒤돌아보진 않았다. 그녀는 그가 우리 함께 떠나자고 말하길 바랐지만 그런 말은 끝까지 들려오지 않았다.“난 S를 위해 복수할 거야. 넌 루드웰에 남아있지 마, 여긴 위험해.” 그가 한 말은 그뿐이었다. 서유는 깊은 실망을 삼키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뒤돌아보지 않은 채 A구역의 별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번엔 이승하도 그녀를 불러세우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간절했지만 자신이 떠난다면 상철수가 그녀를 해치지 않으리란 걸 알기에 참아야 했다. 상대방의 행동을 예상하고 있었기에 이승하는 상철수의 계획에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녀를 떠나야 하는 아픔은 여전했다. 마치 그의 아쉬움을 감지한 듯, 서유는 몇 걸음 걷다 말고 다시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전할 정보가 두 가지 있어요. S가 설립된 건 승하 씨가 태어나기 전이고, 그때는 ‘darkness’라고 불렸어요. 상철수 씨가 S를 노리는 이유는 S의 누군가가 외할머니를 잔혹하게 살해했기 때문이에요. 이걸 단서로 ‘darkness’와 상철수 씨 사이의 원한을 추적해 봐요.” 서유는 말을 마치고 다시 발길을 돌려 걸어갔고 이승하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S가 그의 출생 전부터 존재했고 그때는 ‘darkness’라고 불렸다니?그런데 강중헌은 그의 세력을 키워주기 위해 S를 설립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로는, 그 모든 것이 김율을 위한 것이었다. 만약 S가 이미 그의 출생 전에 존재했다면 강중헌은 처음부터 자신을 속인 것이었다. 도대체 왜 거짓말을 한 걸까?
이제 막 열여덟 살이 된 제시카는 그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그러나 그가 걸음을 옮길 때까지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이를 악물고 애써 참았다. 이하준, 이번 생에 절대 내 손안에 떨어지지 마. 평생 후회하게 만들어줄 거니까. 그러나 아직까지 감정이라는 게 뭔지 몰랐던 이하준은 그녀의 복수심을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잠시 후, 연이를 업고 계단을 내려오면서 하준이는 연이가 뚱뚱하다고 투덜댔고 화가 난 연이는 그의 머리카락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렇게 두 남매는 웨딩카에 올라타는 그 순간까지도 옥신각신 다투었다. 두 사람을 지켜보며 고개를 가볍게 흔들던 이승하는 서유의 손을 잡고 웨딩카의 뒤를 따라 결혼식장으로 향했다. 아빠가 없는 연이에게 오늘 이승하는 아빠 노릇을 해주기로 했다. 연이의 손을 잡고 버진로드를 걸어가 그녀의 손을 신랑에게 맡겼다.입장하기 전, 문밖에 서 있던 연이가 곱게 화장한 얼굴을 치켜들고는 그를 쳐다보았다.“이모부, 제가 어렸을 때부터 이모부한테 손도 못 대게 하시더니. 오늘은 어쩔 수 없죠?”검은 정장 차림의 그가 담담한 얼굴로 하이힐을 신고 있는 연이를 내려다보았다.“오늘만이야. 다음은 없어.”연이가 입을 삐죽거리며 눈을 흘겼다.“어쩜 이리 하준이랑 똑같아요? 이렇게 좋은 날 꼭 그런 말을 해야겠어요?”한참을 고민하던 그가 덕담 한마디 내뱉었다.“우주랑 평생 행복하길 바란다. 이번 생에 이리 네 손 잡고 입장하는 건 한 번으로 족해...”연이는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가 연이의 손을 잡고 입장하여 그녀의 손을 심우주에게 건네주었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조카한테 경고했다.“내 딸한테 잘해. 안 그러면 내가 너 가만 안 둬.”그 말 한마디에 연이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흐릿한 시선 속에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이승하의 얼굴이 들어왔다.이모부한테 그녀는 처음부터 딸이었다...감동을 받은 연이는 발길을 돌리려는 이승하를 덥석 끌어안고 낮은
그가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힘겹게 말을 뱉었다.“연이야, 뒤돌아서 나 좀 봐봐.”화를 참으며 고개를 돌리니 얇은 셔츠 차림에 눈밭에 서서 눈시울을 붉히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잠깐 멈칫하던 그녀는 차갑게 시선을 돌렸다. “심우주, 나 이제 너한테 관심 없어. 그러니까 더 이상 귀찮게 찾아오지 마.”말을 마친 연이는 전화를 끊고 남자 친구의 손을 잡은 채 숙소로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이때, 남자 친구가 허를 찌르는 물음을 내던졌다.“그렇게 귀찮아할 거면서 왜 연락처를 아예 차단하지 않았어?”차단하면 다시는 연락할 수 없을 것이다. 눈을 내리깔며 한동안 망설이던 연이는 남자 친구 앞에서 심우주의 연락처를 차단해 버렸다.연이를 찾을 수 없었던 심우주는 2년 동안 혼이 빠진 사람처럼 살았다. 문자를 받지도 못하는 그녀의 핸드폰으로 2년 동안 수없이 많은 문자를 보냈다. 시간이 지나 졸업을 앞두고 연이의 남자 친구는 바람을 피우고 연이를 차버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화가 나야 할 상황인데 연이는 오히려 침착하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그를 찾아가 따지지도 않았다. 그후, 심우주 학교의 퀸카가 그를 미친 듯이 따라다닌다는 소식을 듣고 연이는 그제야 남자 친구의 바람에 자신이 왜 전혀 개의치 않았던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남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심우주였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누구한테 먼저 고개를 숙일 사람이 아니었다. 졸업식 당일 밤, 우연히 심우주를 다시 만난 그녀는 지난 4년 동안 그가 수없이 몰래 찾아와서 자신을 보고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마음이 변치 않은 그를 보며 그녀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어렸을 때부터 날 좋아하지 않았던 애가 언제부터 날 좋아하게 된 걸까?그녀의 의혹에 그는 대답을 하지 않고 진한 키스로 뒤늦게 알아버린 자신의 진심을 쏟아냈다. 그의 고백을 받아들일 때, 연이는 뼛속까지 보수적이었던 자신을 다행으로 여겼다. 첫 번째 남자 친구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지 않았기 때
이승하를 따라 차에 올라탄 하준이는 서유의 모습을 발견하고 어안이 벙벙해졌다.“엄마, 엄마가 여긴 어떻게...”오랜만에 만난 아들이 이젠 어엿한 어른이 된 모습에 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졌다.“몰래 네 얼굴만 보고 갈 생각이었는데. 이런 일이 있을 줄이야...”얼굴에 찍힌 신발 자국을 보니 서유는 더 마음이 아팠다. 손을 뻗어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지려다가 아이가 어색해할까 봐 허공에서 손이 굳어버렸다. 조심스러워하는 엄마를 보고 하준이는 예전처럼 무뚝뚝하게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수척해진 아이의 얼굴에 손끝이 닿는 순간, 그녀는 비에 흠뻑 젖은 아들을 품에 꽉 끌어안았다.“네가 외국에서 이렇게 괴롭힘을 당하는 걸 알았더라면 5년 전에 엄마는 절대 널 외국으로 보내지 않았을 거야.”아이가 그녀보다 더 큰 손을 뻗어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어쩌다 이런 일이 생긴 거예요. 평소에는 제가 애들을 괴롭히는 편이에요.”아이가 당하는 꼴을 직접 눈으로 본 서유는 자신을 위로하는 아이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그녀는 아이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어디 다친 데는 없어?”그 물음에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저 나름 솜씨가 좋아요. 그러니까 아빠가 올 때까지 버티고 있었던 거고요.”말을 마치고 그가 고개를 들어 앞줄에 앉아 수건으로 머리를 닦고 있는 남자를 우러러보았다.“아빠, 방금 절 구해주던 아빠의 모습은 진짜 영웅 같았어요.”옅은 미소를 짓던 이승하는 소수빈이 건네준 수건을 받아 아이에게 건네줬다.“너도 이제 다 큰 어른인데. 언제까지 내가 와서 구해주기만을 기다릴 거야? 나중에 아빠가 없으면 어떡하려고 그래?”수건을 받아 대충 머리를 닦던 아이는 모처럼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아빠가 얼마나 대단하고 위풍당당한 사람인데 어떻게 없을 수가 있겠어요?”아이의 말에 차가운 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서유도 소수빈도 아무 말이 없었고 차 안의 분위기가
비가 쏟아진 그날 밤, 이하준은 우산을 쓰고 학교를 나와 골목으로 들어갔다. 마침 쇠몽둥이를 든 외국인 무리와 마주쳤고 그들은 하나 같이 근육질 몸매에 흉악한 얼굴이었다. 가끔 멍청이 같은 사람들이 그를 귀찮게 할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그는 이승하의 말을 명심하고 애써 참았지만 상대의 모함을 받게 되었다. 한 번은 누군가 그가 개발한 약을 교수의 물컵에 넣었다. 다른 친구가 발견하지 않았다면 사람이 죽었을지도 모른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던 이하준은 그들을 응징하기로 결심했다. 하루 만에 수십 명의 사람들을 응징했고 학교 측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교수가 그를 믿고 지켜주지 않았더라면 학교에서 쫓겨났을지도 모른다. 그를 무너뜨리지 못한 악당들은 교수의 신임을 받고 있는 그를 질투하고 증오했다. 지금 눈앞의 놈들은 분명 그들이 그를 혼내주려고 부른 사람들일 것이다.학교에 다니면서도 소지섭에게 격투 기술을 배우는 걸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두렵지가 않았다. 우산을 살짝 받쳐 드는 순간, 얼음처럼 차가운 눈이 드러났고 그 눈 밑에 살의가 가득했다.근육질 남자들은 순식간에 그를 에워쌌고 이하준은 손에 든 우산을 접어 날카로운 한끝으로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을 세게 찔렀다. 싸움 실력이 뛰어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아무리 실력이 대단하더라도 점점 더 많이 달려오는 근육질의 남자들을 혼자 당해낼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손을 대지 않겠다고 교수님과 약속했었지만 수세에 몰리자 그는 어쩔수 없이 허리춤에 있던 금빛 칼을 빼 들고 근육질 남자의 복부를 향해 찔렀다. 어린 나이에 칼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고 몇몇 근육질의 남자는 흠칫했다. 그러나 이내 쇠몽둥이를 들어 온 힘을 다해 이하준의 머리를 내리쳤다.이하준의 목숨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바보로 만들어달라는 요구가 있었다. 한 사람을 바보로 만들려면 머리를 쳐야 한다. 바보가 안 된다면 적어도 식물인간으로 만들어야 하니까. 근육질의 남자들은 이하준을 제압하기 위해
그가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입을 열었다.“난 죽는 게 두려운 사람이 아니었어. 그런데 당신을 만난 후부터 죽는 게 그렇게 겁이 나더라.”죽는 게 두려웠기 때문에 전 서계를 돌아다니며 의사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원하는 결과는 끝내 얻지 못하였고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기만 했다. 겁이 난 서유는 그를 꼭 껴안았다. 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당신한테는 내가 있고 우리 하준이가 있어요. 그러니까 절대 죽으면 안 돼요. 당신이 죽으면 우리는 어떡하라고요?”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미 5년을 버텨온 그는 점점 더 통증이 심해졌고 하느님이 조금씩 조금씩 그의 목숨을 빼앗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통이 전해지는 횟수가 갈수록 늘어나고 통증은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칩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것 같았다. 다만 떠나기 전에 모든 일을 다 마치고 가야 하는데...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품 안에 있는 여인이 가장 걱정되었다. 소리 없이 흐느끼는 그녀의 모습에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깊이 파고들었다.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릴 만큼 뜨겁고 짜릿한 느낌, 슬픈 마음을 녹일 수 있을 것 같아 두 사람은 뜨겁게 몸을 섞으며 하나가 되었다. 그녀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할 때쯤, 두 사람의 아찔한 행위가 끝이 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고 소중한 물건을 끌어안듯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유람선 안으로 들어온 희미한 달빛을 빌려 그가 세월의 흔적도 없는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다음 생에도 당신이 내 여자였으면 좋겠는데. 당신의 다음 생은 송사월한테 주기로 약속했었나?”아직 잠들지 않은 서유가 그의 가슴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번 생에 당신이 나보다 먼저 가면 나 절대 당신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다음 생에 당신 안 만날 거라고요.”그가 슬픈 표정을
그 당시 풋풋한 어린 소녀였던 연이는 심우주가 자신과 같은 학교에 간다는 말을 듣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교과서는 정말 내가 가져오지 않았어. 아마도 애들이 가져간 것 같은데 내일 학교에 가면 돌려주라고 할게.”연이도 하준이와 마찬가지로 학교에서는 짱이었다. 친구를 괴롭히는 일은 없었지만 너무 인기가 많아서 여자아이들이 그녀를 짱으로 받들고 남자아이들도 하루 종일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꼬리를 흔들었다.반면, 심우주는 착실히 공부만 했고 가끔 연이의 괴롭힘에 그는 반격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였기 때문에 심우주는 그런 그녀가 얄미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가 제멋대로 하는 걸 사랑스럽게 지켜보았았다. 다들 오냐오냐하니까 연이는 학교에서도 늘 제멋대로였다. 그러나 그 당시 자신의 마음을 잘 몰랐던 심우주는 연이의 그런 모습에 조금 짜증이 나기도 했다. 잠시 후, 어른들에게 차례로 작별 인사를 마친 이하준이 차에 올라탔다. 늘 차갑기만 하던 아이가 한동안 머뭇거리더니 차에서 내려와 서유를 덥석 끌어안았다.“엄마, 몸 잘 챙겨요.”갑작스러운 아이의 행동에 서유는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하준아, 엄마 아빠는 집에서 우리 하준이 기다리고 있을게.”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있는 힘껏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손을 풀고 옆에 있던 이승하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아빠, 제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아빠도 절 이길 수 없을 거예요.”입꼬리를 살짝 올리던 그가 손을 뻗어 아이의 어깨를 토닥였다.“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남의 칼에 찔리기 쉬운 법이야. 자세를 낮추는 법을 배우거라.”아빠의 충고를 아이는 가슴 깊이 새겼다.“네, 그렇게 할게요.”이내 그가 허리춤에서 ‘S'라고 새겨진 금빛 칼을 꺼내 아이한테 건네주었다. “돌잡이 때 네가 잡은 칼이야. 이제는 네가 갖고 있어.”전에 소지섭한테서 아빠의 이야기를 들은
서유는 어쩔 수 없이 의사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문밖을 지키고 있던 소지섭은 의사가 떠나는 것을 보고 급히 물었다.“방금 연이랑 하준이가 와서 묻더라고요. 대표님한테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냐고...”서유가 입을 열기도 전에 안에서 이승하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감기라고 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고개를 끄덕이던 소지섭은 자리를 떴고 그녀 혼자 덩그러니 문밖에 서 있었다. 그가 얼마나 더 그녀와 함께 할 수 있을지...어느 순간 갑자기 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가 옆에 있어도 그녀는 여전히 불안한 마음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하준이 유학길에 오른 그날, 이씨 가문과 상씨 가문 사람들이 그를 배웅하러 왔다. 마치 하준이의 돌잡이 때처럼 정원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어른들의 모습이 이미 많이 변했고 아이들도 훌쩍 자란 상태였다. 서유와 이승하의 우월한 유전자만 이어받은 이하준은 10살밖에 안 된 나이지만 정교한 이목구비에 곧은 몸매를 가지고 있어 보기만 해도 귀티가 철철 흘러넘쳤다. 게다가 180 가까이 되는 아이큐를 가지고 있어 누가 봐도 엄친아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특히 이연석은 흰색 스웨터 차림에 한 손은 주머니에 넣고 한 손에 가방을 든 채로 계단을 내려오는 이하준의 모습을 보고 숨이 턱 막힐 것만 같았다. 그는 옆에서 초등학생 교복을 입은 채 케이크를 뺏어 먹고 있는 오뚝이와 깡순이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똑같은 10살인데 이게 뭐냐? 누구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명문 학교에 입학하고 누구는 아직도 초등학교나 다니고 있으니.”그 말에 정가혜가 그를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나는 거죠. 내가 몇 번을 말해요. 자꾸만 애들 다그치지 말라고 했죠.”이를 갈던 그가 두 아이 앞으로 다가가 케이크를 낚아채 입에 쑤셔 넣었다.“너희들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로 일찍 진학 못 하면 아빠 진짜 가만 안 둬.”두 아이는
“승하 씨...”깜짝 놀란 그녀는 미친 듯이 핸드폰을 찾았지만 온몸에 힘이 빠져 일어서지도 못하였다. 어떻게 의사를 찾아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애틋한 그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긴장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녹아내렸고 바닥을 짚고 있던 손에도 덩달아 힘이 풀렸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고 입술이 파르르 떨려 말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당신... 왜... 그래요?”지난 10년 동안, 이승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지내온 그녀는 거의 울어본 적이 없다. 잠깐 정신을 잃은 모습에도 이렇게 펑펑 우는 것을 보니 그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 애써 두통을 참으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던 그가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녀를 품에 안고 소파에 쓰러지더니 세월조차 비껴간 잘생긴 얼굴을 살짝 치켜들었다.“깊게 잠이 든 것뿐이야. 왜 이렇게 겁을 먹어?”말을 하면서 손을 뻗어 눈물로 뒤덮인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부러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당신 요즘 살이 좀 오른 것 같은데.”화제를 돌리려고 했지만 그녀는 눈물이 글썽한 두 눈을 들어 그의 창백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도 그렇죠. 어떻게 사람이 깨우는데 아무 반응이 없어요?”맑고 깨끗한 그녀의 눈을 그는 차마 마주칠 수가 없었다.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떼어 그녀의 등을 눌러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얹었다. “바보,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거야. 피곤할 때는 꿈을 꾸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거든.”그 말을 그녀는 당연히 믿지 못하였다.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어서 그의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왜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졌는지 그녀는 짐작할 수 있었다.단단한 가슴 위에 얹혀있던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미안해요. 당신 머릿속에 있는 칩을 꺼낼 의사를 찾아야 하는데...”겁이 났다. 이승하를 잃을까 봐 두려웠다. 자신을 목숨보다 더
지난주, 토론 대회에 나간다고 말하는 연이를 향해 이하준은 엄청 비꼬았다. 그 모습에 화가 난 연이는 씩씩거리며 이하준과 내기를 했고 뜻밖에도 그녀가 이기게 될 줄은 몰랐다.눈꺼풀을 내리깔던 하준이가 손을 힐끗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평소에 그렇게 재잘재잘하더니 실력 한번 제대로 발휘했네. 축하해.”진심으로 축하하는 것 같지 않고 그가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아무튼 이번에는 네가 졌어. 그러니까 잊지 말고 돈 입금해.”이하준은 천천히 냅킨을 깔면서 담담하게 말했다.“밥 먹고 나서 줄게. 근데 누나...”그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기세등등하게 연이를 쳐다보았다.“누나 올해 열일곱이지? 아직까지 고등학교에 다니고. 수시 자격도 따내지 못했으니 수능 봐서 어떤 대학에 합격할 수 있을지 정말 걱정이다.”그 말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너... 명문대에 합격했다고 잘난 척하지 마. 내년에 나도 그 학교에 합격할지 모르니까.”이하준은 칼과 포크를 집어 들고 스테이크를 썰어서 입에 넣었다.“그럼 내 후배가 되는 건가?”화가 난 연이가 반격할 겨를도 없이 그가 또 빈정거렸다.“내년에 학교에서 만나. 만나면 나한테 선배라고 부르는 거 잊지 말고.”“아악. 열받아 죽겠네.”연이가 가슴을 내리치더니 옆에 있던 의자를 끌어당겨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서유의 팔짱을 끼고 어깨에 기댄 채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이모, 하준이 쟤 정말 얄미워죽겠어요. 빨리 학교에 보내버려요.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요.”서유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막상 가고 나면 또 보고 싶을걸?”“아니요. 그럴 일은 절대 없어요.”입을 삐죽거리면서 시선은 이하준의 얼굴로 향해 있었다. 솔직히 이 녀석과 10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많이 싸우기도 했지만 정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얄미운 동생인 건 사실이다. “빨리 갔으면 좋겠어요.”웃음을 짓던 서유가 포크로 과일을 집어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연이는 과일을 받아먹으면서 이하준을 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