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는 복도를 따라 걷다가 회의실 앞을 지날 때 안에서 날카로운 호통 소리가 들려오는 걸 듣고는 걸음을 멈췄다. 열려 있는 문 너머로 보니 회의실에 있는 조종자들이 상철수에게 호되게 꾸중을 듣고 있었다. “다음에도 또 이런 짓을 한다면, B구역 2조 사람들은 중구역 베팅에 절대 관여하지 마. 돈 벌 방법이 남아있을지 한번 보지!” 상철수는 호통을 치고서 고개를 들어 문밖에 있는 그녀를 보고는 말끝을 흐리며 목소리를 한층 낮췄다. “나가봐.” 사람들이 모두 나간 뒤, 상철수는 손을 들어 부드럽게 그녀에게 손짓했다. “들어오거라.” 서유는 잠시 망설이다가 안으로 들어갔고, 상철수의 권유로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앉자마자 상철수는 서랍을 열고 매실 한 통을 꺼내어 그녀 앞에 놓았다. “대화는 끝났니?” 서유가 답하려던 순간, 상철수가 갑자기 그녀를 지나쳐 바깥쪽을 보고는 지나가던 이승하를 불렀다. “잠깐 들어와.” 이승하는 발길을 멈추고 회의실 쪽을 돌아보았다가, 서유를 발견하고는 잠시 멈칫하더니 곧 안으로 들어왔다. “맡은 일은 다 끝났나?” 상철수의 의도를 알아챈 이승하는 뒤로 감춘 주먹을 꽉 쥐었지만, 표정은 드러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끝났습니다.” “잘 됐군. 2조 책임자가 초대 손님을 모셔 오다가 일이 틀어졌다고 하더군. 자네가 B국 화영시에 가서 좀 도와줘.” 서유는 상철수가 이승하의 정체를 알아챈 뒤 자신을 위협하여 이승하와 헤어지게 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그 의심을 확인하고자 들어온 것이었지만, 상철수의 말을 듣고 그 의심은 조금씩 사라져 갔다. 만약 상철수가 정말 이승하의 정체를 알고 있다면, 그를 루드웰에 가둬두지 왜 이렇게 쉽게 보내줄까? 상철수의 깊고 교활한 계산 앞에 누구도 당해낼 수 없었다. 이승하조차도 그가 불렀을 때 그의 의도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승하는 떠날 기회를 얻었으니 지금 이 순간 마음속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로 했다.
서유는 생이별의 아픔을 맞닥뜨리고 싶지 않다는 듯, 말을 다 잇지 못한 채 뒤로 한 걸음 물러서더니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다른 임산부들은 다들 통통하게 보이지만, 서유는 임신한 지금조차도 여전히 마른 몸이었다. 그녀가 바람이라도 불면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이는 모습에, 이승하는 참을 수 없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서유야.” 그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발걸음을 멈췄으나 뒤돌아보진 않았다. 그녀는 그가 우리 함께 떠나자고 말하길 바랐지만 그런 말은 끝까지 들려오지 않았다.“난 S를 위해 복수할 거야. 넌 루드웰에 남아있지 마, 여긴 위험해.” 그가 한 말은 그뿐이었다. 서유는 깊은 실망을 삼키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뒤돌아보지 않은 채 A구역의 별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번엔 이승하도 그녀를 불러세우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간절했지만 자신이 떠난다면 상철수가 그녀를 해치지 않으리란 걸 알기에 참아야 했다. 상대방의 행동을 예상하고 있었기에 이승하는 상철수의 계획에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녀를 떠나야 하는 아픔은 여전했다. 마치 그의 아쉬움을 감지한 듯, 서유는 몇 걸음 걷다 말고 다시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전할 정보가 두 가지 있어요. S가 설립된 건 승하 씨가 태어나기 전이고, 그때는 ‘darkness’라고 불렸어요. 상철수 씨가 S를 노리는 이유는 S의 누군가가 외할머니를 잔혹하게 살해했기 때문이에요. 이걸 단서로 ‘darkness’와 상철수 씨 사이의 원한을 추적해 봐요.” 서유는 말을 마치고 다시 발길을 돌려 걸어갔고 이승하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S가 그의 출생 전부터 존재했고 그때는 ‘darkness’라고 불렸다니?그런데 강중헌은 그의 세력을 키워주기 위해 S를 설립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로는, 그 모든 것이 김율을 위한 것이었다. 만약 S가 이미 그의 출생 전에 존재했다면 강중헌은 처음부터 자신을 속인 것이었다. 도대체 왜 거짓말을 한 걸까?
상철수는 서유를 중구의 감금실로 데려갔고 검은 옷을 입은 이가 문을 열기 전 그녀에게 설명했다. “네가 연중서 때문에 바다에 빠졌다는 걸 알고 나서 그들 부녀를 각각 감금해 두었다. 두 사람도 내가 네 외할아버지라는 걸 알았지.”“잠시 후, 내 외손녀라는 신분을 마음껏 이용해 그 부녀에게 하고 싶은 대로 해. 절대 쉽게 봐주지 말거라.” 서유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감금실 문이 열리자, 어둠이 가득한 방 안이 한순간 환하게 밝혀졌다. 눈을 찌르는 백열등 불빛에 연지유는 눈을 잠시 감았다가, 빛에 익숙해지자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의 시야에는 익숙한 얼굴이 하나 보였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연지유는 자리에서 일어나 달려가 그 얼굴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그녀는 그 얼굴이 증오스러웠다. 그 얼굴만 아니었다면, 이승하의 눈에 그녀가 들어왔을 리가 없었으니까. “네가 죽지 않았다니, 정말 유감이군. 그렇지 않았다면 불꽃놀이를 하며 축하했을 텐데.” 말이 떨어지자마자 문밖에서 상철수가 검은 옷을 입은 이에게 고갯짓을 했다. 그는 재빨리 감금실 안으로 들어와 연지유의 얼굴을 거세게 후려쳤다. “당신이 뭔데 우리 보스께 그 따위 말을 지껄이지?” 얼굴을 감싸며 통증에 몸을 웅크린 연지유는 그 말에 충격을 받은 듯, 불신 가득한 눈으로 서유를 바라보았다. “네가 루드웰의 보스라니?” 주먹을 쥔 채로 그녀를 노려보는 연지유에 비해 서유는 제법 침착해 보였다. 그녀는 몇 명의 검은 옷을 입은 이들 사이에서 문밖에서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왜요? 실망했어요?” 검은 옷을 입은 이가 가져온 의자에 앉으면서 서유는 부드럽게 부른 배를 살며시 감싸안았다. 여유롭게 앉은 서유에 비해, 연지유는 손발이 쇠사슬에 묶인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이 두 사람의 모습은 선명하게 대조를 이루며, 연지유의 질투심을 불타오르게 했다. 심지어 눈빛마저도 악독하게 변해갔다. “정말 네가 뭘 믿고 그 자리에 있는지 모르겠어.”
그때 이시원의 심장이 급격히 뛰기 시작했고 얼굴도 창백해졌다. 그 소식이 그의 마음을 짓누른 것처럼 보였으나, 실망한 잠깐의 순간이 지나자 그는 다시 침착함을 되찾았다. 이시원은 말했다. “나았다 한들 난 여전히 반신불수일 수 있어요. 지유 씨가 나랑 함께한다면 정말 힘들 거예요. 내 동생을 좋아한다면 두 사람 이어줄게요. 그것도 해방이겠죠.” 사실 이시원은 살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연지유가 바꾼 약을 스스로 삼켰고 약을 먹는 동안 내내 연지유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녀가 자신을 막아주길 바라는 듯했지만 연지유는 그러지 않았다. 결국 이시원은 약을 모두 삼켰고, 그 모습을 보며 연지유는 그가 자신이 약을 바꿔치기해 그의 몸이 나빠졌다는 것을 눈치챘음을 깨달았다. 이시원이 눈앞에서 입에 거품을 물고 발작을 일으키는 장면을 떠올리자, 연지유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그것이 그녀가 저지른 첫 번째 살인이자, 자신에게 그렇게 잘해주던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은 오래도록 그림자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연지유는 이시원을 죽인 게 자신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단지 약을 바꾸고 그 양을 늘렸을 뿐이라는 생각에 후회하는 기색조차 없이 서유를 향해 얕은 미소를 지었다. “약을 바꾼 건 나지만 시원 씨는 그걸 알고도 먹었어. 결국 나를 이루어주기로 선택한 건 시원 씨 본인이었으니까.” 서유는 반성의 기미도 보이지 않는 연지유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그녀가 미울 뿐 아니라 가엾기도 했다.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진실하고 소중한 사랑을 얻을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당신 손으로 그것을 망치고 승하 씨 형마저 죽였어요. 아마 그게 승하 씨가 당신을 영원히 사랑할 수 없었던 이유겠죠.”‘영원히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던 이유겠죠...’연지유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마치 무언가에 심하게 자극이라도 받은 듯, 그녀는 지독한 분노로 바닥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너는 뭐야? 내가 이승하를 먼저 알았고, 그 사람을 위해 한 일이 너보다 훨씬 많
앞부분에서 연지유는 꼴좋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뒷부분을 듣자 더 이상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마치 정말로 부모의 죄로 인한 업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 세상 모든 것을 가졌지만 사랑하는 사람만은 끝내 가질 수 없었다. 반면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서유는 그의 사랑을 얻었고, 그는 그녀를 위해 연지유를 파멸로 이끌었다. 정말로 업보일까? “하지만 이 모든 일은 부모님이 저지른 거야. 그때 난 너무 어렸고 전혀 알지 못했어. 왜 나한테까지 업보가 돌아와야 하는 건데? 왜 내가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건데?” “왜냐하면.” 서유는 그녀의 얼굴을 움켜잡고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 “당신은 본질적으로 그 사람들과 똑같이 잔혹하고, 심지어 더 악랄하니까!” 어린 나이에 자신을 사랑해 주는 이시원을 해치고도, 끝내 자신이 그를 죽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 이 여인은, 그 자체로 악독하기 그지없었다. 서유는 말을 마치고 연지유의 얼굴을 휙 내던졌고, 그 순간 연지유는 주먹을 쥐고 그녀의 배를 치려 했지만 순발력 좋은 검은 옷의 남자들이 그녀를 붙잡았다. 연지유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외쳤다. “서유, 넌 그냥 운이 좋은 거잖아. 내가 이승하를 이용해 널 여기로 유인하지 않았다면 넌 네 가족이 어디 있는지도 몰랐을 거야! 지금처럼 내 앞에서 큰소리를 칠 자격이 어떻게 생겼겠냐고?” 다시 의자에 앉은 서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이 점은 나도 감사해요. 당신의 계략과 복수만 아니었더라면 이렇게 당신의 일그러진 가면을 바라볼 기회가 없었을 테니까.” 연지유는 더욱 분개했다. “대단할 것도 없잖아. 고작 좋은 탯줄 잡고 내 앞에서 큰소리치는 주제에. 그 신분 없이는 진흙탕에 뒹굴 파리 같은 존재일 뿐이야. 가치도 없는 쓰레기에 불과하다고!”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옆에 있던 검은 옷의 남자가 손바닥으로 연지유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아가씨 앞에서 말조심해. 그렇지 않으면 네 그 더러운 입을 찢고 뱀
서유는 굳이 연중서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 그녀에게 아버지라 불릴 만한 자격도, 그녀가 만날 가치가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대신 모니터에서 연중서와 연지유가 게임 구역에서 만나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연중서는 의외로 연지유를 무척 아꼈다. 처음 그녀를 보자마자 달려가 품에 안고 어린아이를 달래듯 그녀를 위로하며 아빠가 있으니 괜찮을 거라고 말했다. 연중서는 실제로 아버지다운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김초희와 서유에게는 단 한 번도 보인 적이 없었을 뿐이다. 아마 그의 마음속에 자식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연지유뿐이었으리라. 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 나니 서유도 마음이 편해졌다. 어떤 사람들은 원래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할 운명이기도 하다. 그렇게 생각하니 특별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하층 구역에서의 게임은 곧 시작되었고, 조종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운이 좋은 것인지 모르겠으나 매 단계를 순조롭게 통과해 벌을 받지 않았다. 각 단계를 넘길 때마다 그들은 기쁨에 겨워 서로를 끌어안았고, 마치 그들의 생명은 귀중하지만 서유의 생명은 쉽게 빼앗아도 되는 것처럼 보였다. 서유는 점점 불쾌해졌고 이제는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 일어나려던 그때, 모니터에서 연지유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내가 왜 잘못 선택한 거지? 그럴 리가 없어!” 그들이 있는 곳은 일곱 번째 관문으로, 잘못된 선택을 하면 뱀 구덩이에 빠지게 되는 단계였다. 그들이 진행 중인 A구역의 게임에서 뱀 구덩이가 열리는 방식은 발밑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문이 열리는 방식이었다. 눈앞의 죽음의 문이 열리는 순간 연지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모니터 방향을 바라보며 물었다. “왜?” 그녀는 이 한마디를 겨우 남겼고, 문 안에서 나온 로봇 팔이 재빠르게 그녀를 향해 뻗어왔다. 연지유는 상철수에게 따질 겨를도 없이 황급히 연중서 쪽으로 달려갔다. “아빠, 빨리 날 구해줘요!” 연지유가 달려오는 것을 보자 연중서는 잠시 주
서유는 이 장면을 보며 연지유의 삶이 정말 비참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을 사랑했던 이시원은 물론, 봉태규도 소중히 여기지 않았고 결국 자신을 아껴주던 유일한 아버지까지 손으로 죽게 했다. 연지유는 꿀단지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저 조금이라도 착하게 살았다면 그녀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오히려 가질 수 없는 것들에 집착하여 결국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만약 연지유가 그 사실을 이해할 수 있었다면, 자신의 뒤틀린 마음으로 모든 잘못을 서유에게 돌리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애초에 욕심으로 가득 찬 이 길을 선택했기에 오늘날의 결말을 맞이한 것이다. 하지만 연지유는 이해되지 않았다. 분명 상철수는 약속을 했는데, 왜 말을 지키지 않은 걸까?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차분히 생각해 보자 곧바로 깨달음을 얻었다. 상철수는 그들에게 조건을 제시하며, 서유 앞에서 이승하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했다. 이는 단지 그들을 안정시켜 함부로 말하지 못하게 하려는 술수였고, 서유가 이승하 때문에 상철수를 원망하지 않도록 하려는 계산이었다. 그들이 조건에 따르자마자 상철수는 게임 속에서 손을 써 그들이 첫 여섯 관문을 무사히 통과하도록 힌트를 주었다. 경계심이 풀린 순간을 틈타 그들을 제거하려 한 것이다. 상철수가 그들을 제거하려 한 이유는 연중서가 자신의 딸과 외손녀를 그렇게 다룬 것에 분노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들을 이용하고 나서는 함께 일망타진하려고 했던 것이다. 상철수의 의도를 완전히 파악한 연지유는 더 이상 살아남을 길이 없음을 직감했다. 어차피 상철수의 덫에 걸려 빠져나갈 길이 없다면, 차라리 서유와 상철수 사이의 믿음을 깨버리겠다는 결심이 섰다. 자신이 살 수 없다면, 그들도 고통 속에 빠지게 하겠다는 마음으로. 이렇게 생각하자 연지유는 빠르게 고개를 들어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한참을 말했지만 갑자기 모니터에서 소리가 사라져 서유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
상연훈이 떠난 후, 서유는 제자리에 서서 일부러 상철수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철수가 정말로 그녀를 따라 나왔다. 상철수는 그녀를 쫓아 나오면서 검은 옷의 남자에게 몇 마디를 일러두었고, 고개를 돌린 순간 서유가 사라진 것을 알아챘다. 그러나 이내 그녀가 복도에 기대어 멍하니 서 있는 걸 발견하고는 걸음을 늦추며 물었다. “서유야, 혹시 무서운 거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서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내 친아버지인데 조금 잔혹하게 느껴져서요.” 상철수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낳아놓기만 하고 키우지도 않은 채 아내와 자식을 버린 인간이 무슨 아버지야?” 서유는 그를 한 번 쓱 쳐다보고 반박하지 않았다.“아마 임신해서 그런지 이런 걸 보면 좀 불편한 것 같아요.” 상철수는 그녀의 말에 특별한 낌새를 알아채지 못하고 무심코 말했다. “불편하다면 가서 좀 쉬도록 해라.” 서유는 자연스럽게 물었다. “그럼 어디서 쉬면 돼요?” 상철수가 대답했다. “이제부터 네가 루드웰 보스니까 메인 통제실이 네 공간이야. 거기 가서 쉬면 되겠군.” 마침 메인 통제실에 가려던 서유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안에 휴게실도 있으니 임산부인 저한테는 딱이겠네요.” 상철수는 서유의 시선을 따라 그녀의 배를 한 번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비록 그는 이승하의 아이가 태어나길 바라지 않았지만, 조건을 수락한 이상 별수 없다고 생각했다. 서유가 상씨 가문에 머무는 한, 그 아이가 누구의 아이건, 길들이는 방법을 찾으면 그만이었으니까.서유는 상철수가 메인 통제실로 가라고 지시한 덕분에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고 그곳으로 향했다. 검은 옷의 남자가 긴급한 일이 생겼다며 상철수를 불렀고, 그는 떠나기 전에 서유에게 휴게실에서 푹 쉬라고 당부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그녀에게 전 구역에 대한 권한을 부여하겠다고 약속했다. 서유는 고분고분 대답했다. 그가 떠난 후 얼굴에는 어두운 빛이 드리워졌고 복잡한 심경을 숨기지 않
이제 막 열여덟 살이 된 제시카는 그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그러나 그가 걸음을 옮길 때까지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이를 악물고 애써 참았다. 이하준, 이번 생에 절대 내 손안에 떨어지지 마. 평생 후회하게 만들어줄 거니까. 그러나 아직까지 감정이라는 게 뭔지 몰랐던 이하준은 그녀의 복수심을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잠시 후, 연이를 업고 계단을 내려오면서 하준이는 연이가 뚱뚱하다고 투덜댔고 화가 난 연이는 그의 머리카락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렇게 두 남매는 웨딩카에 올라타는 그 순간까지도 옥신각신 다투었다. 두 사람을 지켜보며 고개를 가볍게 흔들던 이승하는 서유의 손을 잡고 웨딩카의 뒤를 따라 결혼식장으로 향했다. 아빠가 없는 연이에게 오늘 이승하는 아빠 노릇을 해주기로 했다. 연이의 손을 잡고 버진로드를 걸어가 그녀의 손을 신랑에게 맡겼다.입장하기 전, 문밖에 서 있던 연이가 곱게 화장한 얼굴을 치켜들고는 그를 쳐다보았다.“이모부, 제가 어렸을 때부터 이모부한테 손도 못 대게 하시더니. 오늘은 어쩔 수 없죠?”검은 정장 차림의 그가 담담한 얼굴로 하이힐을 신고 있는 연이를 내려다보았다.“오늘만이야. 다음은 없어.”연이가 입을 삐죽거리며 눈을 흘겼다.“어쩜 이리 하준이랑 똑같아요? 이렇게 좋은 날 꼭 그런 말을 해야겠어요?”한참을 고민하던 그가 덕담 한마디 내뱉었다.“우주랑 평생 행복하길 바란다. 이번 생에 이리 네 손 잡고 입장하는 건 한 번으로 족해...”연이는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가 연이의 손을 잡고 입장하여 그녀의 손을 심우주에게 건네주었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조카한테 경고했다.“내 딸한테 잘해. 안 그러면 내가 너 가만 안 둬.”그 말 한마디에 연이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흐릿한 시선 속에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이승하의 얼굴이 들어왔다.이모부한테 그녀는 처음부터 딸이었다...감동을 받은 연이는 발길을 돌리려는 이승하를 덥석 끌어안고 낮은
그가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힘겹게 말을 뱉었다.“연이야, 뒤돌아서 나 좀 봐봐.”화를 참으며 고개를 돌리니 얇은 셔츠 차림에 눈밭에 서서 눈시울을 붉히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잠깐 멈칫하던 그녀는 차갑게 시선을 돌렸다. “심우주, 나 이제 너한테 관심 없어. 그러니까 더 이상 귀찮게 찾아오지 마.”말을 마친 연이는 전화를 끊고 남자 친구의 손을 잡은 채 숙소로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이때, 남자 친구가 허를 찌르는 물음을 내던졌다.“그렇게 귀찮아할 거면서 왜 연락처를 아예 차단하지 않았어?”차단하면 다시는 연락할 수 없을 것이다. 눈을 내리깔며 한동안 망설이던 연이는 남자 친구 앞에서 심우주의 연락처를 차단해 버렸다.연이를 찾을 수 없었던 심우주는 2년 동안 혼이 빠진 사람처럼 살았다. 문자를 받지도 못하는 그녀의 핸드폰으로 2년 동안 수없이 많은 문자를 보냈다. 시간이 지나 졸업을 앞두고 연이의 남자 친구는 바람을 피우고 연이를 차버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화가 나야 할 상황인데 연이는 오히려 침착하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그를 찾아가 따지지도 않았다. 그후, 심우주 학교의 퀸카가 그를 미친 듯이 따라다닌다는 소식을 듣고 연이는 그제야 남자 친구의 바람에 자신이 왜 전혀 개의치 않았던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남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심우주였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누구한테 먼저 고개를 숙일 사람이 아니었다. 졸업식 당일 밤, 우연히 심우주를 다시 만난 그녀는 지난 4년 동안 그가 수없이 몰래 찾아와서 자신을 보고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마음이 변치 않은 그를 보며 그녀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어렸을 때부터 날 좋아하지 않았던 애가 언제부터 날 좋아하게 된 걸까?그녀의 의혹에 그는 대답을 하지 않고 진한 키스로 뒤늦게 알아버린 자신의 진심을 쏟아냈다. 그의 고백을 받아들일 때, 연이는 뼛속까지 보수적이었던 자신을 다행으로 여겼다. 첫 번째 남자 친구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지 않았기 때
이승하를 따라 차에 올라탄 하준이는 서유의 모습을 발견하고 어안이 벙벙해졌다.“엄마, 엄마가 여긴 어떻게...”오랜만에 만난 아들이 이젠 어엿한 어른이 된 모습에 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졌다.“몰래 네 얼굴만 보고 갈 생각이었는데. 이런 일이 있을 줄이야...”얼굴에 찍힌 신발 자국을 보니 서유는 더 마음이 아팠다. 손을 뻗어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지려다가 아이가 어색해할까 봐 허공에서 손이 굳어버렸다. 조심스러워하는 엄마를 보고 하준이는 예전처럼 무뚝뚝하게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수척해진 아이의 얼굴에 손끝이 닿는 순간, 그녀는 비에 흠뻑 젖은 아들을 품에 꽉 끌어안았다.“네가 외국에서 이렇게 괴롭힘을 당하는 걸 알았더라면 5년 전에 엄마는 절대 널 외국으로 보내지 않았을 거야.”아이가 그녀보다 더 큰 손을 뻗어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어쩌다 이런 일이 생긴 거예요. 평소에는 제가 애들을 괴롭히는 편이에요.”아이가 당하는 꼴을 직접 눈으로 본 서유는 자신을 위로하는 아이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그녀는 아이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어디 다친 데는 없어?”그 물음에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저 나름 솜씨가 좋아요. 그러니까 아빠가 올 때까지 버티고 있었던 거고요.”말을 마치고 그가 고개를 들어 앞줄에 앉아 수건으로 머리를 닦고 있는 남자를 우러러보았다.“아빠, 방금 절 구해주던 아빠의 모습은 진짜 영웅 같았어요.”옅은 미소를 짓던 이승하는 소수빈이 건네준 수건을 받아 아이에게 건네줬다.“너도 이제 다 큰 어른인데. 언제까지 내가 와서 구해주기만을 기다릴 거야? 나중에 아빠가 없으면 어떡하려고 그래?”수건을 받아 대충 머리를 닦던 아이는 모처럼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아빠가 얼마나 대단하고 위풍당당한 사람인데 어떻게 없을 수가 있겠어요?”아이의 말에 차가운 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서유도 소수빈도 아무 말이 없었고 차 안의 분위기가
비가 쏟아진 그날 밤, 이하준은 우산을 쓰고 학교를 나와 골목으로 들어갔다. 마침 쇠몽둥이를 든 외국인 무리와 마주쳤고 그들은 하나 같이 근육질 몸매에 흉악한 얼굴이었다. 가끔 멍청이 같은 사람들이 그를 귀찮게 할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그는 이승하의 말을 명심하고 애써 참았지만 상대의 모함을 받게 되었다. 한 번은 누군가 그가 개발한 약을 교수의 물컵에 넣었다. 다른 친구가 발견하지 않았다면 사람이 죽었을지도 모른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던 이하준은 그들을 응징하기로 결심했다. 하루 만에 수십 명의 사람들을 응징했고 학교 측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교수가 그를 믿고 지켜주지 않았더라면 학교에서 쫓겨났을지도 모른다. 그를 무너뜨리지 못한 악당들은 교수의 신임을 받고 있는 그를 질투하고 증오했다. 지금 눈앞의 놈들은 분명 그들이 그를 혼내주려고 부른 사람들일 것이다.학교에 다니면서도 소지섭에게 격투 기술을 배우는 걸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두렵지가 않았다. 우산을 살짝 받쳐 드는 순간, 얼음처럼 차가운 눈이 드러났고 그 눈 밑에 살의가 가득했다.근육질 남자들은 순식간에 그를 에워쌌고 이하준은 손에 든 우산을 접어 날카로운 한끝으로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을 세게 찔렀다. 싸움 실력이 뛰어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아무리 실력이 대단하더라도 점점 더 많이 달려오는 근육질의 남자들을 혼자 당해낼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손을 대지 않겠다고 교수님과 약속했었지만 수세에 몰리자 그는 어쩔수 없이 허리춤에 있던 금빛 칼을 빼 들고 근육질 남자의 복부를 향해 찔렀다. 어린 나이에 칼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고 몇몇 근육질의 남자는 흠칫했다. 그러나 이내 쇠몽둥이를 들어 온 힘을 다해 이하준의 머리를 내리쳤다.이하준의 목숨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바보로 만들어달라는 요구가 있었다. 한 사람을 바보로 만들려면 머리를 쳐야 한다. 바보가 안 된다면 적어도 식물인간으로 만들어야 하니까. 근육질의 남자들은 이하준을 제압하기 위해
그가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입을 열었다.“난 죽는 게 두려운 사람이 아니었어. 그런데 당신을 만난 후부터 죽는 게 그렇게 겁이 나더라.”죽는 게 두려웠기 때문에 전 서계를 돌아다니며 의사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원하는 결과는 끝내 얻지 못하였고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기만 했다. 겁이 난 서유는 그를 꼭 껴안았다. 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당신한테는 내가 있고 우리 하준이가 있어요. 그러니까 절대 죽으면 안 돼요. 당신이 죽으면 우리는 어떡하라고요?”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미 5년을 버텨온 그는 점점 더 통증이 심해졌고 하느님이 조금씩 조금씩 그의 목숨을 빼앗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통이 전해지는 횟수가 갈수록 늘어나고 통증은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칩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것 같았다. 다만 떠나기 전에 모든 일을 다 마치고 가야 하는데...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품 안에 있는 여인이 가장 걱정되었다. 소리 없이 흐느끼는 그녀의 모습에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깊이 파고들었다.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릴 만큼 뜨겁고 짜릿한 느낌, 슬픈 마음을 녹일 수 있을 것 같아 두 사람은 뜨겁게 몸을 섞으며 하나가 되었다. 그녀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할 때쯤, 두 사람의 아찔한 행위가 끝이 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고 소중한 물건을 끌어안듯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유람선 안으로 들어온 희미한 달빛을 빌려 그가 세월의 흔적도 없는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다음 생에도 당신이 내 여자였으면 좋겠는데. 당신의 다음 생은 송사월한테 주기로 약속했었나?”아직 잠들지 않은 서유가 그의 가슴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번 생에 당신이 나보다 먼저 가면 나 절대 당신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다음 생에 당신 안 만날 거라고요.”그가 슬픈 표정을
그 당시 풋풋한 어린 소녀였던 연이는 심우주가 자신과 같은 학교에 간다는 말을 듣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교과서는 정말 내가 가져오지 않았어. 아마도 애들이 가져간 것 같은데 내일 학교에 가면 돌려주라고 할게.”연이도 하준이와 마찬가지로 학교에서는 짱이었다. 친구를 괴롭히는 일은 없었지만 너무 인기가 많아서 여자아이들이 그녀를 짱으로 받들고 남자아이들도 하루 종일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꼬리를 흔들었다.반면, 심우주는 착실히 공부만 했고 가끔 연이의 괴롭힘에 그는 반격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였기 때문에 심우주는 그런 그녀가 얄미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가 제멋대로 하는 걸 사랑스럽게 지켜보았았다. 다들 오냐오냐하니까 연이는 학교에서도 늘 제멋대로였다. 그러나 그 당시 자신의 마음을 잘 몰랐던 심우주는 연이의 그런 모습에 조금 짜증이 나기도 했다. 잠시 후, 어른들에게 차례로 작별 인사를 마친 이하준이 차에 올라탔다. 늘 차갑기만 하던 아이가 한동안 머뭇거리더니 차에서 내려와 서유를 덥석 끌어안았다.“엄마, 몸 잘 챙겨요.”갑작스러운 아이의 행동에 서유는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하준아, 엄마 아빠는 집에서 우리 하준이 기다리고 있을게.”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있는 힘껏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손을 풀고 옆에 있던 이승하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아빠, 제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아빠도 절 이길 수 없을 거예요.”입꼬리를 살짝 올리던 그가 손을 뻗어 아이의 어깨를 토닥였다.“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남의 칼에 찔리기 쉬운 법이야. 자세를 낮추는 법을 배우거라.”아빠의 충고를 아이는 가슴 깊이 새겼다.“네, 그렇게 할게요.”이내 그가 허리춤에서 ‘S'라고 새겨진 금빛 칼을 꺼내 아이한테 건네주었다. “돌잡이 때 네가 잡은 칼이야. 이제는 네가 갖고 있어.”전에 소지섭한테서 아빠의 이야기를 들은
서유는 어쩔 수 없이 의사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문밖을 지키고 있던 소지섭은 의사가 떠나는 것을 보고 급히 물었다.“방금 연이랑 하준이가 와서 묻더라고요. 대표님한테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냐고...”서유가 입을 열기도 전에 안에서 이승하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감기라고 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고개를 끄덕이던 소지섭은 자리를 떴고 그녀 혼자 덩그러니 문밖에 서 있었다. 그가 얼마나 더 그녀와 함께 할 수 있을지...어느 순간 갑자기 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가 옆에 있어도 그녀는 여전히 불안한 마음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하준이 유학길에 오른 그날, 이씨 가문과 상씨 가문 사람들이 그를 배웅하러 왔다. 마치 하준이의 돌잡이 때처럼 정원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어른들의 모습이 이미 많이 변했고 아이들도 훌쩍 자란 상태였다. 서유와 이승하의 우월한 유전자만 이어받은 이하준은 10살밖에 안 된 나이지만 정교한 이목구비에 곧은 몸매를 가지고 있어 보기만 해도 귀티가 철철 흘러넘쳤다. 게다가 180 가까이 되는 아이큐를 가지고 있어 누가 봐도 엄친아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특히 이연석은 흰색 스웨터 차림에 한 손은 주머니에 넣고 한 손에 가방을 든 채로 계단을 내려오는 이하준의 모습을 보고 숨이 턱 막힐 것만 같았다. 그는 옆에서 초등학생 교복을 입은 채 케이크를 뺏어 먹고 있는 오뚝이와 깡순이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똑같은 10살인데 이게 뭐냐? 누구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명문 학교에 입학하고 누구는 아직도 초등학교나 다니고 있으니.”그 말에 정가혜가 그를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나는 거죠. 내가 몇 번을 말해요. 자꾸만 애들 다그치지 말라고 했죠.”이를 갈던 그가 두 아이 앞으로 다가가 케이크를 낚아채 입에 쑤셔 넣었다.“너희들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로 일찍 진학 못 하면 아빠 진짜 가만 안 둬.”두 아이는
“승하 씨...”깜짝 놀란 그녀는 미친 듯이 핸드폰을 찾았지만 온몸에 힘이 빠져 일어서지도 못하였다. 어떻게 의사를 찾아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애틋한 그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긴장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녹아내렸고 바닥을 짚고 있던 손에도 덩달아 힘이 풀렸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고 입술이 파르르 떨려 말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당신... 왜... 그래요?”지난 10년 동안, 이승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지내온 그녀는 거의 울어본 적이 없다. 잠깐 정신을 잃은 모습에도 이렇게 펑펑 우는 것을 보니 그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 애써 두통을 참으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던 그가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녀를 품에 안고 소파에 쓰러지더니 세월조차 비껴간 잘생긴 얼굴을 살짝 치켜들었다.“깊게 잠이 든 것뿐이야. 왜 이렇게 겁을 먹어?”말을 하면서 손을 뻗어 눈물로 뒤덮인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부러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당신 요즘 살이 좀 오른 것 같은데.”화제를 돌리려고 했지만 그녀는 눈물이 글썽한 두 눈을 들어 그의 창백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도 그렇죠. 어떻게 사람이 깨우는데 아무 반응이 없어요?”맑고 깨끗한 그녀의 눈을 그는 차마 마주칠 수가 없었다.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떼어 그녀의 등을 눌러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얹었다. “바보,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거야. 피곤할 때는 꿈을 꾸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거든.”그 말을 그녀는 당연히 믿지 못하였다.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어서 그의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왜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졌는지 그녀는 짐작할 수 있었다.단단한 가슴 위에 얹혀있던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미안해요. 당신 머릿속에 있는 칩을 꺼낼 의사를 찾아야 하는데...”겁이 났다. 이승하를 잃을까 봐 두려웠다. 자신을 목숨보다 더
지난주, 토론 대회에 나간다고 말하는 연이를 향해 이하준은 엄청 비꼬았다. 그 모습에 화가 난 연이는 씩씩거리며 이하준과 내기를 했고 뜻밖에도 그녀가 이기게 될 줄은 몰랐다.눈꺼풀을 내리깔던 하준이가 손을 힐끗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평소에 그렇게 재잘재잘하더니 실력 한번 제대로 발휘했네. 축하해.”진심으로 축하하는 것 같지 않고 그가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아무튼 이번에는 네가 졌어. 그러니까 잊지 말고 돈 입금해.”이하준은 천천히 냅킨을 깔면서 담담하게 말했다.“밥 먹고 나서 줄게. 근데 누나...”그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기세등등하게 연이를 쳐다보았다.“누나 올해 열일곱이지? 아직까지 고등학교에 다니고. 수시 자격도 따내지 못했으니 수능 봐서 어떤 대학에 합격할 수 있을지 정말 걱정이다.”그 말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너... 명문대에 합격했다고 잘난 척하지 마. 내년에 나도 그 학교에 합격할지 모르니까.”이하준은 칼과 포크를 집어 들고 스테이크를 썰어서 입에 넣었다.“그럼 내 후배가 되는 건가?”화가 난 연이가 반격할 겨를도 없이 그가 또 빈정거렸다.“내년에 학교에서 만나. 만나면 나한테 선배라고 부르는 거 잊지 말고.”“아악. 열받아 죽겠네.”연이가 가슴을 내리치더니 옆에 있던 의자를 끌어당겨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서유의 팔짱을 끼고 어깨에 기댄 채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이모, 하준이 쟤 정말 얄미워죽겠어요. 빨리 학교에 보내버려요.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요.”서유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막상 가고 나면 또 보고 싶을걸?”“아니요. 그럴 일은 절대 없어요.”입을 삐죽거리면서 시선은 이하준의 얼굴로 향해 있었다. 솔직히 이 녀석과 10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많이 싸우기도 했지만 정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얄미운 동생인 건 사실이다. “빨리 갔으면 좋겠어요.”웃음을 짓던 서유가 포크로 과일을 집어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연이는 과일을 받아먹으면서 이하준을 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