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제1395화

작가: 알라리
앞부분에서 연지유는 꼴좋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뒷부분을 듣자 더 이상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마치 정말로 부모의 죄로 인한 업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 세상 모든 것을 가졌지만 사랑하는 사람만은 끝내 가질 수 없었다. 반면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서유는 그의 사랑을 얻었고, 그는 그녀를 위해 연지유를 파멸로 이끌었다.

정말로 업보일까?

“하지만 이 모든 일은 부모님이 저지른 거야. 그때 난 너무 어렸고 전혀 알지 못했어. 왜 나한테까지 업보가 돌아와야 하는 건데? 왜 내가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건데?”

“왜냐하면.”

서유는 그녀의 얼굴을 움켜잡고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

“당신은 본질적으로 그 사람들과 똑같이 잔혹하고, 심지어 더 악랄하니까!”

어린 나이에 자신을 사랑해 주는 이시원을 해치고도, 끝내 자신이 그를 죽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 이 여인은, 그 자체로 악독하기 그지없었다.

서유는 말을 마치고 연지유의 얼굴을 휙 내던졌고, 그 순간 연지유는 주먹을 쥐고 그녀의 배를 치려 했지만 순발력 좋은 검은 옷의 남자들이 그녀를 붙잡았다.

연지유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외쳤다.

“서유, 넌 그냥 운이 좋은 거잖아. 내가 이승하를 이용해 널 여기로 유인하지 않았다면 넌 네 가족이 어디 있는지도 몰랐을 거야! 지금처럼 내 앞에서 큰소리를 칠 자격이 어떻게 생겼겠냐고?”

다시 의자에 앉은 서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이 점은 나도 감사해요. 당신의 계략과 복수만 아니었더라면 이렇게 당신의 일그러진 가면을 바라볼 기회가 없었을 테니까.”

연지유는 더욱 분개했다.

“대단할 것도 없잖아. 고작 좋은 탯줄 잡고 내 앞에서 큰소리치는 주제에. 그 신분 없이는 진흙탕에 뒹굴 파리 같은 존재일 뿐이야. 가치도 없는 쓰레기에 불과하다고!”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옆에 있던 검은 옷의 남자가 손바닥으로 연지유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아가씨 앞에서 말조심해. 그렇지 않으면 네 그 더러운 입을 찢고 뱀
잠긴 챕터
GoodNovel에서 계속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여 앱을 다운로드하세요

관련 챕터

  • 계약 해지: 놔줘요 대표님   제1396화

    서유는 굳이 연중서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 그녀에게 아버지라 불릴 만한 자격도, 그녀가 만날 가치가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대신 모니터에서 연중서와 연지유가 게임 구역에서 만나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연중서는 의외로 연지유를 무척 아꼈다. 처음 그녀를 보자마자 달려가 품에 안고 어린아이를 달래듯 그녀를 위로하며 아빠가 있으니 괜찮을 거라고 말했다. 연중서는 실제로 아버지다운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김초희와 서유에게는 단 한 번도 보인 적이 없었을 뿐이다. 아마 그의 마음속에 자식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연지유뿐이었으리라. 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 나니 서유도 마음이 편해졌다. 어떤 사람들은 원래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할 운명이기도 하다. 그렇게 생각하니 특별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하층 구역에서의 게임은 곧 시작되었고, 조종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운이 좋은 것인지 모르겠으나 매 단계를 순조롭게 통과해 벌을 받지 않았다. 각 단계를 넘길 때마다 그들은 기쁨에 겨워 서로를 끌어안았고, 마치 그들의 생명은 귀중하지만 서유의 생명은 쉽게 빼앗아도 되는 것처럼 보였다. 서유는 점점 불쾌해졌고 이제는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 일어나려던 그때, 모니터에서 연지유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내가 왜 잘못 선택한 거지? 그럴 리가 없어!” 그들이 있는 곳은 일곱 번째 관문으로, 잘못된 선택을 하면 뱀 구덩이에 빠지게 되는 단계였다. 그들이 진행 중인 A구역의 게임에서 뱀 구덩이가 열리는 방식은 발밑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문이 열리는 방식이었다. 눈앞의 죽음의 문이 열리는 순간 연지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모니터 방향을 바라보며 물었다. “왜?” 그녀는 이 한마디를 겨우 남겼고, 문 안에서 나온 로봇 팔이 재빠르게 그녀를 향해 뻗어왔다. 연지유는 상철수에게 따질 겨를도 없이 황급히 연중서 쪽으로 달려갔다. “아빠, 빨리 날 구해줘요!” 연지유가 달려오는 것을 보자 연중서는 잠시 주

  • 계약 해지: 놔줘요 대표님   제1397화

    서유는 이 장면을 보며 연지유의 삶이 정말 비참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을 사랑했던 이시원은 물론, 봉태규도 소중히 여기지 않았고 결국 자신을 아껴주던 유일한 아버지까지 손으로 죽게 했다. 연지유는 꿀단지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저 조금이라도 착하게 살았다면 그녀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오히려 가질 수 없는 것들에 집착하여 결국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만약 연지유가 그 사실을 이해할 수 있었다면, 자신의 뒤틀린 마음으로 모든 잘못을 서유에게 돌리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애초에 욕심으로 가득 찬 이 길을 선택했기에 오늘날의 결말을 맞이한 것이다. 하지만 연지유는 이해되지 않았다. 분명 상철수는 약속을 했는데, 왜 말을 지키지 않은 걸까?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차분히 생각해 보자 곧바로 깨달음을 얻었다. 상철수는 그들에게 조건을 제시하며, 서유 앞에서 이승하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했다. 이는 단지 그들을 안정시켜 함부로 말하지 못하게 하려는 술수였고, 서유가 이승하 때문에 상철수를 원망하지 않도록 하려는 계산이었다. 그들이 조건에 따르자마자 상철수는 게임 속에서 손을 써 그들이 첫 여섯 관문을 무사히 통과하도록 힌트를 주었다. 경계심이 풀린 순간을 틈타 그들을 제거하려 한 것이다. 상철수가 그들을 제거하려 한 이유는 연중서가 자신의 딸과 외손녀를 그렇게 다룬 것에 분노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들을 이용하고 나서는 함께 일망타진하려고 했던 것이다. 상철수의 의도를 완전히 파악한 연지유는 더 이상 살아남을 길이 없음을 직감했다. 어차피 상철수의 덫에 걸려 빠져나갈 길이 없다면, 차라리 서유와 상철수 사이의 믿음을 깨버리겠다는 결심이 섰다. 자신이 살 수 없다면, 그들도 고통 속에 빠지게 하겠다는 마음으로. 이렇게 생각하자 연지유는 빠르게 고개를 들어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한참을 말했지만 갑자기 모니터에서 소리가 사라져 서유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

  • 계약 해지: 놔줘요 대표님   제1398화

    상연훈이 떠난 후, 서유는 제자리에 서서 일부러 상철수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철수가 정말로 그녀를 따라 나왔다. 상철수는 그녀를 쫓아 나오면서 검은 옷의 남자에게 몇 마디를 일러두었고, 고개를 돌린 순간 서유가 사라진 것을 알아챘다. 그러나 이내 그녀가 복도에 기대어 멍하니 서 있는 걸 발견하고는 걸음을 늦추며 물었다. “서유야, 혹시 무서운 거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서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내 친아버지인데 조금 잔혹하게 느껴져서요.” 상철수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낳아놓기만 하고 키우지도 않은 채 아내와 자식을 버린 인간이 무슨 아버지야?” 서유는 그를 한 번 쓱 쳐다보고 반박하지 않았다.“아마 임신해서 그런지 이런 걸 보면 좀 불편한 것 같아요.” 상철수는 그녀의 말에 특별한 낌새를 알아채지 못하고 무심코 말했다. “불편하다면 가서 좀 쉬도록 해라.” 서유는 자연스럽게 물었다. “그럼 어디서 쉬면 돼요?” 상철수가 대답했다. “이제부터 네가 루드웰 보스니까 메인 통제실이 네 공간이야. 거기 가서 쉬면 되겠군.” 마침 메인 통제실에 가려던 서유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안에 휴게실도 있으니 임산부인 저한테는 딱이겠네요.” 상철수는 서유의 시선을 따라 그녀의 배를 한 번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비록 그는 이승하의 아이가 태어나길 바라지 않았지만, 조건을 수락한 이상 별수 없다고 생각했다. 서유가 상씨 가문에 머무는 한, 그 아이가 누구의 아이건, 길들이는 방법을 찾으면 그만이었으니까.서유는 상철수가 메인 통제실로 가라고 지시한 덕분에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고 그곳으로 향했다. 검은 옷의 남자가 긴급한 일이 생겼다며 상철수를 불렀고, 그는 떠나기 전에 서유에게 휴게실에서 푹 쉬라고 당부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그녀에게 전 구역에 대한 권한을 부여하겠다고 약속했다. 서유는 고분고분 대답했다. 그가 떠난 후 얼굴에는 어두운 빛이 드리워졌고 복잡한 심경을 숨기지 않

  • 계약 해지: 놔줘요 대표님   제1399화

    상연훈은 말을 마치고 문을 열고 나갔다. 그의 곧고 당당한 뒷모습은 결의에 찬 기운을 뿜어내며 서유에게 따스한 위로를 전해 주었다. “오빠, 고마워요.” 상연훈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힘찬 팔을 들어 흔들며 약간은 멋있는 태도로 답했다. 서유는 미소 지으며 시선을 거두고, 한가득 있는 간식을 바라보았다. 사실 먹을 생각은 없었는데 이렇게 많이 챙겨오다니... 오빠가 자신을 아껴주는 마음을 느끼며 서유의 마음은 서서히 따뜻해졌다. 마치 따스한 햇살이 마음속에 스며드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잠시 자리에 멈춰 서서 상연훈이 떠난 걸 확인하고 나서야 메인 통제실을 벗어나 모니터링 실로 향했다. 모니터링실 안에서 상철수는 조작대에 코드를 입력하고 있었다. 상연훈이 들어오자 그를 힐끗 보며 말했다. “중앙 구역 관리를 안 하고 여긴 왜 왔지?” 상연훈은 주먹을 살짝 쥐었다 풀며 태연한 척 다가섰다. “할아버지, 전에 연씨 부녀를 살려주기로 약속하셨잖아요.” 이 말을 듣자 상철수의 손가락이 멈췄다. 그는 냉정한 시선으로 상연훈을 보며 말했다. “내가 무슨 의도로 그러는지 모르겠냐?” 상철수의 추궁에 잠시 긴장했던 상연훈은 이내 차분하게 대답했다. “당연히 알죠. 그런데 너무 급하게 밀어붙이시면 서유가 눈치채지 않을까요?” 상철수는 차갑게 상연훈을 쳐다보다가 다시 조작대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좀 급했지. 하지만 어차피 서유도 언젠가는 깨닫게 될 거야. 그때가 되면 의심을 잠재울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역시나, 할아버지는 언제나 상황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상연훈조차 그의 속내를 헤아릴 수 없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서유를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그녀가 이미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는 사실을 상철수는 몰랐다. 상연훈은 서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은 채, 상철수를 보며 말했다. “물론 할아버지가 의심을 잠재우실 수 있겠지만, 언젠가는 진실이 드러날 거예요. 그때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상철수는 의심 어린 눈길로 상

  • 계약 해지: 놔줘요 대표님   제1400화

    상철수의 기억 속에서 서유는 언제나 온화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이렇게 화를 내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고, 순간 마음이 흔들렸지만 그 느낌은 금세 사라졌다. “너랑 이승하는 어울리지 않아.” 그 비웃음이 그녀의 입술을 따라 번져 나왔다. “전 그 사람과 벌써 십여 년을 넘게 함께해 왔어요. 생사의 고비를 넘고 온갖 고난을 함께 헤쳐왔는데, 당신이 무슨 근거로 우리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세요?” 상철수는 반박했다. “나는 이승하와 거래를 했다. 그자가 너랑 헤어지기만 하면 자유를 주기로 했지. 그자는 자유를 얻기 위해 너랑 주저 없이 헤어졌어. 언제든 너를 버릴 수 있는 그런 남자가 뭐가 좋다는 거냐?” 서유는 냉소했다.“승하 씨의 자유를 억압한 것도, 내 배 속 아이를 빌미로 협박한 것도 당신이잖아요. 혼자서 진흙탕에 빠져버린 승하 씨가 또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겠어요?” 이승하가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건 자유 때문이 아니라 단지 상철수의 집요한 압박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먼저 타협하고 다시 힘을 모아 돌아오려고 했다.언제나 단호하고 결단력 있는 그가 그녀와 아이를 지키기 위해 적 앞에서 고개를 숙여야만 했던 것은, 그가 진정으로 좋은 남편이자 아버지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상철수는 이를 절대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그자였다면, 어떤 위협을 받더라도 절대 헤어지는 걸 선택하지 않았을 거다. 그러니 이승하는 너를 그렇게까지 사랑하지 않는 거야.” 서유의 눈에는 비웃음이 가득했다. “그럼 할아버지는요? 과거에 정여희 씨와 첫사랑 사이에 억지로 끼어들어 강제로 그분을 손에 넣고도 결혼하지 않으셨잖아요. 그게 사랑인가요?” 상철수는 그녀가 자신의 선택을 비난하는 게 뜻밖이었는지, 화를 내며 소리쳤다. “네가 감히 나랑 네 외할머니 사이의 일에 끼어들어?” 그의 화난 얼굴을 보고 상연훈이 다급하게 나서서 서유를 붙잡으려 했지만, 서유는 그의 손을 밀어냈다. “할아버지 일에 제가 간섭

  • 계약 해지: 놔줘요 대표님   제1401화

    상철수는 잠시 멍하니 서유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엔 깊은 증오가 담겨 있었고, 문득 서유의 얼굴에서 과거의 정여희가 떠올랐다. 당시의 정여희도 이토록 강하고 단호했었다. 상철수는 아마도 정여희의 기억 때문에 마음속의 분노를 억누르고, 서유의 대담함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지나갔다. “연훈아, 네 동생을 데리고 메인 통제실로 돌아가 쉬게 해라.” 상연훈은 상철수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서유에게도 손찌검을 할 거라 예상했지만, 그저 조용히 돌아가라고 한 말에 순간 당혹스러웠다. 상철수에게도 약간의 죄책감이 있는 걸까? 상철수의 진의를 파악할 수 없었던 상연훈은 서유의 손을 잡아 메인 통제실로 향했다. 서유는 상연훈을 대신해 한마디 해주려 했지만, 상연훈은 여기서 쓸데없는 다툼을 벌이기보다 이곳을 벗어날 방법을 찾는 것이 급선무라며 그녀를 진정시켰다. 상연훈의 신호를 알아챈 서유는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풀고 상연훈과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두 사람이 문턱을 나서자마자 상철수의 차가운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서유야, 네가 이곳에 오기 전 앞으로 영원히 상씨 집안에 남겠다고 약속했던 거, 기억하니?” 서유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가 마치 생사마저 쥐락펴락하는 듯한 상철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 약속은 당신이 저를 속이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이루어진 것이었어요. 본인이 저를 속여놓고 어떻게 그 약속을 지키라 하세요?” 그녀가 약속을 깨겠다고 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상철수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 약속은 무효다. 이제부터는 네가 이승하를 대신해 영원히 이곳에 남아 있어야 한다.” 서유의 눈동자가 어두워졌고, 상철수는 그녀를 지나쳐 상연훈을 바라보며 말했다. “넌 감금실에 들어가 있어라. 내가 이승하를 처리하고 나면, 그때 풀어주마.” 상철수가 이승하를 처리하겠다는 말에 서유의 억눌렀던 분노가 불길처럼 치솟았다. “당신이 복수하려는 대상은 S 조직이고, 승하 씨는 그것과 아무 관련도

  • 계약 해지: 놔줘요 대표님   제1402화

    김해 삼역 외곽, 헬리콥터가 잔디밭에 조용히 착륙했다. 조종석의 정장을 입은 남자는 뒤돌아 눈을 감고 있는 남자를 향해 말했다. “어르신, 하차하시고 환승 준비하시죠.” 언제나처럼 짙고 길게 내려온 속눈썹이 서서히 올라가며, 차가운 살기가 눈동자에서 번져 나오자 정장 남자는 목덜미가 서늘해지더니 곧바로 시야가 흐려지며 조종대에 고꾸라졌다. 이승하는 무표정하게 손을 거둔 뒤, 셔츠 위쪽에 매고 있던 넥타이를 풀어 손가락에 감으며 헬리콥터에서 천천히 내렸다. 그를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비행사들이 그가 정장 남자를 제압한 모습을 보고 일제히 그를 둘러쌌다. 이승하는 손가락에 감아놓은 넥타이를 풀고 주먹을 꽉 쥔 뒤,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다가오는 이들을 향해 맹렬히 주먹을 날렸다. 그는 다쳤음에도 불구하고 루드웰에서 나온 이들을 순식간에 제압하며 단 한 순간도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쓰러진 비행사를 발로 밀어낸 그는 얼음같이 차가운 눈빛으로 주변을 스캔하며, 손에 감겨 있던 넥타이를 풀고 다시 헬리콥터를 향해 걸어갔다. 그는 조종간을 잡아 일련의 동작으로 헬리콥터를 공중으로 띄우며 김해 삼역을 빠져나갔다. 떠오르는 헬리콥터에서 낡은 검은 넥타이가 한 줄기 바람을 타고 떨어졌다. 그 넥타이를 바라보던 쓰러진 비행사들은 반쯤 정신을 차리며, 핸드폰을 들어 모니터링실로 전화를 걸었다. “보스, 이승하가 도망쳤습니다.” 통제실에 있던 이들은 그 소식을 듣고 모두 잠시 시선을 상철수에게 돌렸다. 그러나 그가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 “도망가게 놔둬.” 그는 호랑이를 산으로 돌려보내야 일망타진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나씩 처리하는 것은 너무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들 뿐이었으니까. 이승하는 헬리콥터를 조종해 김해 삼역을 벗어나면서도, 뇌에 심어진 칩이 반응하지 않는 걸 느끼며 상철수가 일부러 자신을 풀어줬음을 직감했다. 그는 상철수가 능수능란한 계략가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계약 해지: 놔줘요 대표님   제1403화

    이렇게 서 있는 이승하를 본 소수빈과 소지섭은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동시에 차 문을 열고 이승하를 향해 달려갔다. “대표님!” “대표님!” 두 남자가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 이승하는 살짝 감동했지만, 다리가 저절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이승하의 후퇴에 당황한 소수빈과 소지섭은 동시에 발걸음을 멈췄지만, 여전히 눈물을 머금고 빛 속에 서 있는 이승하를 바라봤다. “대표님,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정말 너무 잘 됐습니다. 저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릅니다!” 이승하는 두 사람을 몇 초간 바라보다가, 길게 뻗은 손가락으로 소수빈과 소지섭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미안해. 걱정시켜서.” 늘 변함없는 차분한 목소리와 어깨 위에 닿은 손길이 이상하게도 소수빈과 소지섭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그가 돌아온 이상, 어떤 문제라도 해결될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사람이 많은 공공장소라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기 어려웠던 두 사람은 이승하를 안내해 검은 차량으로 데려가 문을 열었다. 이승하가 타자 그들은 각각 운전석과 조수석에 탑승해 빠르게 차량을 출발시켰다. 차 안에서 소수빈과 소지섭은 반년 동안 이승하를 찾지 못해 애태웠던 심정을 차례로 토로하며, 누가 더 그를 걱정했는지를 두고 다투기 시작했다. “분명 내가 대표님을 더 걱정했어!” “무슨 소리야! 대표님을 제일 걱정한 건 나라고!” 뒷좌석에서 두 사람의 말다툼을 듣던 이승하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비로소 그가 살아 돌아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 미소도 잠시, 그의 마음속에서 메아리치는 한마디가 마음속에 깊이 파고들었다. 이번엔 정말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서유의 말이 그의 기쁨을 순식간에 어두운 심연으로 끌어내렸다. 그녀를 잃고 얻은 생존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이 생각에 마음이 쓰라리고, 허벅지 위에 얹어 놓았던 손가락이 저절로 꽉 쥐어졌다. 백미러를 통해 그의 변한 표정을 엿본

최신 챕터

  • 계약 해지: 놔줘요 대표님   제1552화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 계약 해지: 놔줘요 대표님   제1551화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 계약 해지: 놔줘요 대표님   제1550화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 계약 해지: 놔줘요 대표님   제1549화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 계약 해지: 놔줘요 대표님   제1548화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 계약 해지: 놔줘요 대표님   제1547화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 계약 해지: 놔줘요 대표님   제1546화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 계약 해지: 놔줘요 대표님   제1545화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 계약 해지: 놔줘요 대표님   제1544화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