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연훈이 떠난 후, 서유는 제자리에 서서 일부러 상철수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철수가 정말로 그녀를 따라 나왔다. 상철수는 그녀를 쫓아 나오면서 검은 옷의 남자에게 몇 마디를 일러두었고, 고개를 돌린 순간 서유가 사라진 것을 알아챘다. 그러나 이내 그녀가 복도에 기대어 멍하니 서 있는 걸 발견하고는 걸음을 늦추며 물었다. “서유야, 혹시 무서운 거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서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내 친아버지인데 조금 잔혹하게 느껴져서요.” 상철수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낳아놓기만 하고 키우지도 않은 채 아내와 자식을 버린 인간이 무슨 아버지야?” 서유는 그를 한 번 쓱 쳐다보고 반박하지 않았다.“아마 임신해서 그런지 이런 걸 보면 좀 불편한 것 같아요.” 상철수는 그녀의 말에 특별한 낌새를 알아채지 못하고 무심코 말했다. “불편하다면 가서 좀 쉬도록 해라.” 서유는 자연스럽게 물었다. “그럼 어디서 쉬면 돼요?” 상철수가 대답했다. “이제부터 네가 루드웰 보스니까 메인 통제실이 네 공간이야. 거기 가서 쉬면 되겠군.” 마침 메인 통제실에 가려던 서유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안에 휴게실도 있으니 임산부인 저한테는 딱이겠네요.” 상철수는 서유의 시선을 따라 그녀의 배를 한 번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비록 그는 이승하의 아이가 태어나길 바라지 않았지만, 조건을 수락한 이상 별수 없다고 생각했다. 서유가 상씨 가문에 머무는 한, 그 아이가 누구의 아이건, 길들이는 방법을 찾으면 그만이었으니까.서유는 상철수가 메인 통제실로 가라고 지시한 덕분에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고 그곳으로 향했다. 검은 옷의 남자가 긴급한 일이 생겼다며 상철수를 불렀고, 그는 떠나기 전에 서유에게 휴게실에서 푹 쉬라고 당부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그녀에게 전 구역에 대한 권한을 부여하겠다고 약속했다. 서유는 고분고분 대답했다. 그가 떠난 후 얼굴에는 어두운 빛이 드리워졌고 복잡한 심경을 숨기지 않
상연훈은 말을 마치고 문을 열고 나갔다. 그의 곧고 당당한 뒷모습은 결의에 찬 기운을 뿜어내며 서유에게 따스한 위로를 전해 주었다. “오빠, 고마워요.” 상연훈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힘찬 팔을 들어 흔들며 약간은 멋있는 태도로 답했다. 서유는 미소 지으며 시선을 거두고, 한가득 있는 간식을 바라보았다. 사실 먹을 생각은 없었는데 이렇게 많이 챙겨오다니... 오빠가 자신을 아껴주는 마음을 느끼며 서유의 마음은 서서히 따뜻해졌다. 마치 따스한 햇살이 마음속에 스며드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잠시 자리에 멈춰 서서 상연훈이 떠난 걸 확인하고 나서야 메인 통제실을 벗어나 모니터링 실로 향했다. 모니터링실 안에서 상철수는 조작대에 코드를 입력하고 있었다. 상연훈이 들어오자 그를 힐끗 보며 말했다. “중앙 구역 관리를 안 하고 여긴 왜 왔지?” 상연훈은 주먹을 살짝 쥐었다 풀며 태연한 척 다가섰다. “할아버지, 전에 연씨 부녀를 살려주기로 약속하셨잖아요.” 이 말을 듣자 상철수의 손가락이 멈췄다. 그는 냉정한 시선으로 상연훈을 보며 말했다. “내가 무슨 의도로 그러는지 모르겠냐?” 상철수의 추궁에 잠시 긴장했던 상연훈은 이내 차분하게 대답했다. “당연히 알죠. 그런데 너무 급하게 밀어붙이시면 서유가 눈치채지 않을까요?” 상철수는 차갑게 상연훈을 쳐다보다가 다시 조작대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좀 급했지. 하지만 어차피 서유도 언젠가는 깨닫게 될 거야. 그때가 되면 의심을 잠재울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역시나, 할아버지는 언제나 상황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상연훈조차 그의 속내를 헤아릴 수 없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서유를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그녀가 이미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는 사실을 상철수는 몰랐다. 상연훈은 서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은 채, 상철수를 보며 말했다. “물론 할아버지가 의심을 잠재우실 수 있겠지만, 언젠가는 진실이 드러날 거예요. 그때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상철수는 의심 어린 눈길로 상
상철수의 기억 속에서 서유는 언제나 온화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이렇게 화를 내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고, 순간 마음이 흔들렸지만 그 느낌은 금세 사라졌다. “너랑 이승하는 어울리지 않아.” 그 비웃음이 그녀의 입술을 따라 번져 나왔다. “전 그 사람과 벌써 십여 년을 넘게 함께해 왔어요. 생사의 고비를 넘고 온갖 고난을 함께 헤쳐왔는데, 당신이 무슨 근거로 우리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세요?” 상철수는 반박했다. “나는 이승하와 거래를 했다. 그자가 너랑 헤어지기만 하면 자유를 주기로 했지. 그자는 자유를 얻기 위해 너랑 주저 없이 헤어졌어. 언제든 너를 버릴 수 있는 그런 남자가 뭐가 좋다는 거냐?” 서유는 냉소했다.“승하 씨의 자유를 억압한 것도, 내 배 속 아이를 빌미로 협박한 것도 당신이잖아요. 혼자서 진흙탕에 빠져버린 승하 씨가 또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겠어요?” 이승하가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건 자유 때문이 아니라 단지 상철수의 집요한 압박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먼저 타협하고 다시 힘을 모아 돌아오려고 했다.언제나 단호하고 결단력 있는 그가 그녀와 아이를 지키기 위해 적 앞에서 고개를 숙여야만 했던 것은, 그가 진정으로 좋은 남편이자 아버지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상철수는 이를 절대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그자였다면, 어떤 위협을 받더라도 절대 헤어지는 걸 선택하지 않았을 거다. 그러니 이승하는 너를 그렇게까지 사랑하지 않는 거야.” 서유의 눈에는 비웃음이 가득했다. “그럼 할아버지는요? 과거에 정여희 씨와 첫사랑 사이에 억지로 끼어들어 강제로 그분을 손에 넣고도 결혼하지 않으셨잖아요. 그게 사랑인가요?” 상철수는 그녀가 자신의 선택을 비난하는 게 뜻밖이었는지, 화를 내며 소리쳤다. “네가 감히 나랑 네 외할머니 사이의 일에 끼어들어?” 그의 화난 얼굴을 보고 상연훈이 다급하게 나서서 서유를 붙잡으려 했지만, 서유는 그의 손을 밀어냈다. “할아버지 일에 제가 간섭
상철수는 잠시 멍하니 서유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엔 깊은 증오가 담겨 있었고, 문득 서유의 얼굴에서 과거의 정여희가 떠올랐다. 당시의 정여희도 이토록 강하고 단호했었다. 상철수는 아마도 정여희의 기억 때문에 마음속의 분노를 억누르고, 서유의 대담함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지나갔다. “연훈아, 네 동생을 데리고 메인 통제실로 돌아가 쉬게 해라.” 상연훈은 상철수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서유에게도 손찌검을 할 거라 예상했지만, 그저 조용히 돌아가라고 한 말에 순간 당혹스러웠다. 상철수에게도 약간의 죄책감이 있는 걸까? 상철수의 진의를 파악할 수 없었던 상연훈은 서유의 손을 잡아 메인 통제실로 향했다. 서유는 상연훈을 대신해 한마디 해주려 했지만, 상연훈은 여기서 쓸데없는 다툼을 벌이기보다 이곳을 벗어날 방법을 찾는 것이 급선무라며 그녀를 진정시켰다. 상연훈의 신호를 알아챈 서유는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풀고 상연훈과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두 사람이 문턱을 나서자마자 상철수의 차가운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서유야, 네가 이곳에 오기 전 앞으로 영원히 상씨 집안에 남겠다고 약속했던 거, 기억하니?” 서유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가 마치 생사마저 쥐락펴락하는 듯한 상철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 약속은 당신이 저를 속이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이루어진 것이었어요. 본인이 저를 속여놓고 어떻게 그 약속을 지키라 하세요?” 그녀가 약속을 깨겠다고 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상철수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 약속은 무효다. 이제부터는 네가 이승하를 대신해 영원히 이곳에 남아 있어야 한다.” 서유의 눈동자가 어두워졌고, 상철수는 그녀를 지나쳐 상연훈을 바라보며 말했다. “넌 감금실에 들어가 있어라. 내가 이승하를 처리하고 나면, 그때 풀어주마.” 상철수가 이승하를 처리하겠다는 말에 서유의 억눌렀던 분노가 불길처럼 치솟았다. “당신이 복수하려는 대상은 S 조직이고, 승하 씨는 그것과 아무 관련도
김해 삼역 외곽, 헬리콥터가 잔디밭에 조용히 착륙했다. 조종석의 정장을 입은 남자는 뒤돌아 눈을 감고 있는 남자를 향해 말했다. “어르신, 하차하시고 환승 준비하시죠.” 언제나처럼 짙고 길게 내려온 속눈썹이 서서히 올라가며, 차가운 살기가 눈동자에서 번져 나오자 정장 남자는 목덜미가 서늘해지더니 곧바로 시야가 흐려지며 조종대에 고꾸라졌다. 이승하는 무표정하게 손을 거둔 뒤, 셔츠 위쪽에 매고 있던 넥타이를 풀어 손가락에 감으며 헬리콥터에서 천천히 내렸다. 그를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비행사들이 그가 정장 남자를 제압한 모습을 보고 일제히 그를 둘러쌌다. 이승하는 손가락에 감아놓은 넥타이를 풀고 주먹을 꽉 쥔 뒤,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다가오는 이들을 향해 맹렬히 주먹을 날렸다. 그는 다쳤음에도 불구하고 루드웰에서 나온 이들을 순식간에 제압하며 단 한 순간도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쓰러진 비행사를 발로 밀어낸 그는 얼음같이 차가운 눈빛으로 주변을 스캔하며, 손에 감겨 있던 넥타이를 풀고 다시 헬리콥터를 향해 걸어갔다. 그는 조종간을 잡아 일련의 동작으로 헬리콥터를 공중으로 띄우며 김해 삼역을 빠져나갔다. 떠오르는 헬리콥터에서 낡은 검은 넥타이가 한 줄기 바람을 타고 떨어졌다. 그 넥타이를 바라보던 쓰러진 비행사들은 반쯤 정신을 차리며, 핸드폰을 들어 모니터링실로 전화를 걸었다. “보스, 이승하가 도망쳤습니다.” 통제실에 있던 이들은 그 소식을 듣고 모두 잠시 시선을 상철수에게 돌렸다. 그러나 그가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 “도망가게 놔둬.” 그는 호랑이를 산으로 돌려보내야 일망타진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나씩 처리하는 것은 너무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들 뿐이었으니까. 이승하는 헬리콥터를 조종해 김해 삼역을 벗어나면서도, 뇌에 심어진 칩이 반응하지 않는 걸 느끼며 상철수가 일부러 자신을 풀어줬음을 직감했다. 그는 상철수가 능수능란한 계략가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서 있는 이승하를 본 소수빈과 소지섭은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동시에 차 문을 열고 이승하를 향해 달려갔다. “대표님!” “대표님!” 두 남자가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 이승하는 살짝 감동했지만, 다리가 저절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이승하의 후퇴에 당황한 소수빈과 소지섭은 동시에 발걸음을 멈췄지만, 여전히 눈물을 머금고 빛 속에 서 있는 이승하를 바라봤다. “대표님,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정말 너무 잘 됐습니다. 저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릅니다!” 이승하는 두 사람을 몇 초간 바라보다가, 길게 뻗은 손가락으로 소수빈과 소지섭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미안해. 걱정시켜서.” 늘 변함없는 차분한 목소리와 어깨 위에 닿은 손길이 이상하게도 소수빈과 소지섭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그가 돌아온 이상, 어떤 문제라도 해결될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사람이 많은 공공장소라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기 어려웠던 두 사람은 이승하를 안내해 검은 차량으로 데려가 문을 열었다. 이승하가 타자 그들은 각각 운전석과 조수석에 탑승해 빠르게 차량을 출발시켰다. 차 안에서 소수빈과 소지섭은 반년 동안 이승하를 찾지 못해 애태웠던 심정을 차례로 토로하며, 누가 더 그를 걱정했는지를 두고 다투기 시작했다. “분명 내가 대표님을 더 걱정했어!” “무슨 소리야! 대표님을 제일 걱정한 건 나라고!” 뒷좌석에서 두 사람의 말다툼을 듣던 이승하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비로소 그가 살아 돌아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 미소도 잠시, 그의 마음속에서 메아리치는 한마디가 마음속에 깊이 파고들었다. 이번엔 정말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서유의 말이 그의 기쁨을 순식간에 어두운 심연으로 끌어내렸다. 그녀를 잃고 얻은 생존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이 생각에 마음이 쓰라리고, 허벅지 위에 얹어 놓았던 손가락이 저절로 꽉 쥐어졌다. 백미러를 통해 그의 변한 표정을 엿본
반년 만에 살아 돌아온 이승하를 본 주태현은 나이 든 얼굴에 감격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도련님,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저는 도련님께서...” “저는 괜찮아요.” 이승하는 손바닥을 들어 주태현의 어깨를 두드리며 간단히 그를 안심시킨 후, 곧바로 서재로 들어갔다. 이승하가 바쁜 듯 보이자 주태현은 더 이상 방해하지 않고, 마음을 다잡은 뒤 주방에 요리를 준비해 달라 부탁하고는 학교에 있는 연이를 데리러 나갔다. 이승하와 서유가 집을 떠난 후, 연이는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꺼냈다. 어른들이 겪은 일은 위험했지만 주태현은 아이가 걱정할까 봐 출장을 갔다고 둘러댔다. 그러나 연이는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똑똑해서, 출장 간 사람들이 전화나 영상 통화조차 할 수 없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더 이상 감출 수 없던 차에 이승하가 돌아와 주태현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연이도 안심시킬 수 있게 됐다. 이승하는 머릿속의 칩에 대한 문제를 소수빈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그런데 소수빈이 뒤따라 서재에 들어오자 그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소 비서, 난 이미 무사히 돌아왔으니 가족 곁으로 가서 아내와 아이를 돌봐.” 이승하가 떠난 동안, 소수빈은 아버지가 되었고 갓 태어난 아이와 산후의 아내에게는 남편의 보살핌이 필요했다. 하지만 소수빈은 떠나려 하지 않았다. “대표님, S 멤버들을 이끌고 복수를 하려면 많은 준비가 필요하실 겁니다. 저도 일을 나눠 맡게 해 주십시오.” 이승하는 잠시 고민하다가 책상 앞에 걸음을 옮겼다. 종이에 S 조직 전 소속인 ‘darkness’와 정여희의 이름을 적은 뒤, 이를 찢어 소수빈에게 건넸다. “이 조직이 왜 정여희를 죽이려 했는지 자세히 조사해.” “네!” 임무를 받은 소수빈은 즉시 메모를 받아들고 서재를 나갔다. 소수빈이 사라지자 이승하는 자신의 큰 체구를 소파에 기대며, 반년 동안 팽팽하게 긴장했던 신경이 조금씩 풀려나가는 걸 느꼈다. 하지만 잠시의 여유도 가질 새 없이, 그는 곧바로
가늘고 긴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빠르게 움직이며, 화면 속 코드가 처음의 암호화를 하나씩 돌파해 나갔다. 그러나...프로그래밍 작업 도중, 이연석은 칩 프로그램이 하나에서 둘로 나뉘는 것을 보고 직감적으로 이승하를 쳐다보았다. “형, 이건 해커 목록에서 본 적 있어. 사람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 사용된다고 하던데, 이걸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옆에서 손을 모아 차분히 앉아 있던 이승하는 살짝 눈길을 돌려 의문에 찬 이연석을 바라보았다. “내 머릿속에 있어.” 그 한마디에 이연석은 심장이 멎을 듯했고, 마치 독사에 발목을 물린 듯, 차가운 공포가 온몸을 타고 올라왔다. “형, 이건 치명적인 살인 무기라던데. 어떻게 형 머릿속에 이런 게 들어가 있을 수가 있어!”이연석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반면, 이승하는 의연하고 차분한 얼굴로 그저 사실을 전달할 뿐이었다. “이미 들어와 있는 걸 어쩌겠어. 네가 할 일은 이 시스템들을 멈출 수 있는지 말해주는 것뿐이야.” 이승하는 스스로 큰 고통을 겪으면서도, 언제나 무심한 듯 모든 것을 감내해 왔다. 이러한 성격 탓에 사람들은 그가 무적이라고 생각하고 그의 고통을 헤아리려 하지 않았다. 그런 이승하를 이해하는 사람은 오직 이연석뿐이었다. 그는 타이핑하던 손을 멈추고 조심스레 이승하의 머리 위로 손을 얹었다. 비록 상처가 보이지 않았지만, 이연석은 머릿속에 칩을 삽입하는 고통이 얼마나 클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마치 형을 위해 울 것 같은 눈빛으로 이승하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형, 많이 아프지?” 이승하는 다른 사람의 손이 머리를 만지는 것을 꺼렸지만, 이번만큼은 이연석의 진심 어린 위로에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의 손길을 잠깐 허락한 뒤, 곧 손을 멈추게 했다. “난 여전히 S를 이끌고 루드웰로 돌아가야 해. 그러니 내 머릿속의 감시, 위치 추적, 폭발 시스템을 최대한 빨리 해제해줘.”통제에서 벗어나야만 상철수와의 이 싸움에서 S를 이끌고 완전한
이제 막 열여덟 살이 된 제시카는 그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그러나 그가 걸음을 옮길 때까지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이를 악물고 애써 참았다. 이하준, 이번 생에 절대 내 손안에 떨어지지 마. 평생 후회하게 만들어줄 거니까. 그러나 아직까지 감정이라는 게 뭔지 몰랐던 이하준은 그녀의 복수심을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잠시 후, 연이를 업고 계단을 내려오면서 하준이는 연이가 뚱뚱하다고 투덜댔고 화가 난 연이는 그의 머리카락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렇게 두 남매는 웨딩카에 올라타는 그 순간까지도 옥신각신 다투었다. 두 사람을 지켜보며 고개를 가볍게 흔들던 이승하는 서유의 손을 잡고 웨딩카의 뒤를 따라 결혼식장으로 향했다. 아빠가 없는 연이에게 오늘 이승하는 아빠 노릇을 해주기로 했다. 연이의 손을 잡고 버진로드를 걸어가 그녀의 손을 신랑에게 맡겼다.입장하기 전, 문밖에 서 있던 연이가 곱게 화장한 얼굴을 치켜들고는 그를 쳐다보았다.“이모부, 제가 어렸을 때부터 이모부한테 손도 못 대게 하시더니. 오늘은 어쩔 수 없죠?”검은 정장 차림의 그가 담담한 얼굴로 하이힐을 신고 있는 연이를 내려다보았다.“오늘만이야. 다음은 없어.”연이가 입을 삐죽거리며 눈을 흘겼다.“어쩜 이리 하준이랑 똑같아요? 이렇게 좋은 날 꼭 그런 말을 해야겠어요?”한참을 고민하던 그가 덕담 한마디 내뱉었다.“우주랑 평생 행복하길 바란다. 이번 생에 이리 네 손 잡고 입장하는 건 한 번으로 족해...”연이는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가 연이의 손을 잡고 입장하여 그녀의 손을 심우주에게 건네주었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조카한테 경고했다.“내 딸한테 잘해. 안 그러면 내가 너 가만 안 둬.”그 말 한마디에 연이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흐릿한 시선 속에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이승하의 얼굴이 들어왔다.이모부한테 그녀는 처음부터 딸이었다...감동을 받은 연이는 발길을 돌리려는 이승하를 덥석 끌어안고 낮은
그가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힘겹게 말을 뱉었다.“연이야, 뒤돌아서 나 좀 봐봐.”화를 참으며 고개를 돌리니 얇은 셔츠 차림에 눈밭에 서서 눈시울을 붉히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잠깐 멈칫하던 그녀는 차갑게 시선을 돌렸다. “심우주, 나 이제 너한테 관심 없어. 그러니까 더 이상 귀찮게 찾아오지 마.”말을 마친 연이는 전화를 끊고 남자 친구의 손을 잡은 채 숙소로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이때, 남자 친구가 허를 찌르는 물음을 내던졌다.“그렇게 귀찮아할 거면서 왜 연락처를 아예 차단하지 않았어?”차단하면 다시는 연락할 수 없을 것이다. 눈을 내리깔며 한동안 망설이던 연이는 남자 친구 앞에서 심우주의 연락처를 차단해 버렸다.연이를 찾을 수 없었던 심우주는 2년 동안 혼이 빠진 사람처럼 살았다. 문자를 받지도 못하는 그녀의 핸드폰으로 2년 동안 수없이 많은 문자를 보냈다. 시간이 지나 졸업을 앞두고 연이의 남자 친구는 바람을 피우고 연이를 차버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화가 나야 할 상황인데 연이는 오히려 침착하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그를 찾아가 따지지도 않았다. 그후, 심우주 학교의 퀸카가 그를 미친 듯이 따라다닌다는 소식을 듣고 연이는 그제야 남자 친구의 바람에 자신이 왜 전혀 개의치 않았던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남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심우주였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누구한테 먼저 고개를 숙일 사람이 아니었다. 졸업식 당일 밤, 우연히 심우주를 다시 만난 그녀는 지난 4년 동안 그가 수없이 몰래 찾아와서 자신을 보고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마음이 변치 않은 그를 보며 그녀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어렸을 때부터 날 좋아하지 않았던 애가 언제부터 날 좋아하게 된 걸까?그녀의 의혹에 그는 대답을 하지 않고 진한 키스로 뒤늦게 알아버린 자신의 진심을 쏟아냈다. 그의 고백을 받아들일 때, 연이는 뼛속까지 보수적이었던 자신을 다행으로 여겼다. 첫 번째 남자 친구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지 않았기 때
이승하를 따라 차에 올라탄 하준이는 서유의 모습을 발견하고 어안이 벙벙해졌다.“엄마, 엄마가 여긴 어떻게...”오랜만에 만난 아들이 이젠 어엿한 어른이 된 모습에 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졌다.“몰래 네 얼굴만 보고 갈 생각이었는데. 이런 일이 있을 줄이야...”얼굴에 찍힌 신발 자국을 보니 서유는 더 마음이 아팠다. 손을 뻗어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지려다가 아이가 어색해할까 봐 허공에서 손이 굳어버렸다. 조심스러워하는 엄마를 보고 하준이는 예전처럼 무뚝뚝하게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수척해진 아이의 얼굴에 손끝이 닿는 순간, 그녀는 비에 흠뻑 젖은 아들을 품에 꽉 끌어안았다.“네가 외국에서 이렇게 괴롭힘을 당하는 걸 알았더라면 5년 전에 엄마는 절대 널 외국으로 보내지 않았을 거야.”아이가 그녀보다 더 큰 손을 뻗어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어쩌다 이런 일이 생긴 거예요. 평소에는 제가 애들을 괴롭히는 편이에요.”아이가 당하는 꼴을 직접 눈으로 본 서유는 자신을 위로하는 아이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그녀는 아이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어디 다친 데는 없어?”그 물음에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저 나름 솜씨가 좋아요. 그러니까 아빠가 올 때까지 버티고 있었던 거고요.”말을 마치고 그가 고개를 들어 앞줄에 앉아 수건으로 머리를 닦고 있는 남자를 우러러보았다.“아빠, 방금 절 구해주던 아빠의 모습은 진짜 영웅 같았어요.”옅은 미소를 짓던 이승하는 소수빈이 건네준 수건을 받아 아이에게 건네줬다.“너도 이제 다 큰 어른인데. 언제까지 내가 와서 구해주기만을 기다릴 거야? 나중에 아빠가 없으면 어떡하려고 그래?”수건을 받아 대충 머리를 닦던 아이는 모처럼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아빠가 얼마나 대단하고 위풍당당한 사람인데 어떻게 없을 수가 있겠어요?”아이의 말에 차가운 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서유도 소수빈도 아무 말이 없었고 차 안의 분위기가
비가 쏟아진 그날 밤, 이하준은 우산을 쓰고 학교를 나와 골목으로 들어갔다. 마침 쇠몽둥이를 든 외국인 무리와 마주쳤고 그들은 하나 같이 근육질 몸매에 흉악한 얼굴이었다. 가끔 멍청이 같은 사람들이 그를 귀찮게 할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그는 이승하의 말을 명심하고 애써 참았지만 상대의 모함을 받게 되었다. 한 번은 누군가 그가 개발한 약을 교수의 물컵에 넣었다. 다른 친구가 발견하지 않았다면 사람이 죽었을지도 모른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던 이하준은 그들을 응징하기로 결심했다. 하루 만에 수십 명의 사람들을 응징했고 학교 측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교수가 그를 믿고 지켜주지 않았더라면 학교에서 쫓겨났을지도 모른다. 그를 무너뜨리지 못한 악당들은 교수의 신임을 받고 있는 그를 질투하고 증오했다. 지금 눈앞의 놈들은 분명 그들이 그를 혼내주려고 부른 사람들일 것이다.학교에 다니면서도 소지섭에게 격투 기술을 배우는 걸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두렵지가 않았다. 우산을 살짝 받쳐 드는 순간, 얼음처럼 차가운 눈이 드러났고 그 눈 밑에 살의가 가득했다.근육질 남자들은 순식간에 그를 에워쌌고 이하준은 손에 든 우산을 접어 날카로운 한끝으로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을 세게 찔렀다. 싸움 실력이 뛰어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아무리 실력이 대단하더라도 점점 더 많이 달려오는 근육질의 남자들을 혼자 당해낼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손을 대지 않겠다고 교수님과 약속했었지만 수세에 몰리자 그는 어쩔수 없이 허리춤에 있던 금빛 칼을 빼 들고 근육질 남자의 복부를 향해 찔렀다. 어린 나이에 칼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고 몇몇 근육질의 남자는 흠칫했다. 그러나 이내 쇠몽둥이를 들어 온 힘을 다해 이하준의 머리를 내리쳤다.이하준의 목숨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바보로 만들어달라는 요구가 있었다. 한 사람을 바보로 만들려면 머리를 쳐야 한다. 바보가 안 된다면 적어도 식물인간으로 만들어야 하니까. 근육질의 남자들은 이하준을 제압하기 위해
그가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입을 열었다.“난 죽는 게 두려운 사람이 아니었어. 그런데 당신을 만난 후부터 죽는 게 그렇게 겁이 나더라.”죽는 게 두려웠기 때문에 전 서계를 돌아다니며 의사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원하는 결과는 끝내 얻지 못하였고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기만 했다. 겁이 난 서유는 그를 꼭 껴안았다. 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당신한테는 내가 있고 우리 하준이가 있어요. 그러니까 절대 죽으면 안 돼요. 당신이 죽으면 우리는 어떡하라고요?”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미 5년을 버텨온 그는 점점 더 통증이 심해졌고 하느님이 조금씩 조금씩 그의 목숨을 빼앗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통이 전해지는 횟수가 갈수록 늘어나고 통증은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칩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것 같았다. 다만 떠나기 전에 모든 일을 다 마치고 가야 하는데...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품 안에 있는 여인이 가장 걱정되었다. 소리 없이 흐느끼는 그녀의 모습에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깊이 파고들었다.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릴 만큼 뜨겁고 짜릿한 느낌, 슬픈 마음을 녹일 수 있을 것 같아 두 사람은 뜨겁게 몸을 섞으며 하나가 되었다. 그녀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할 때쯤, 두 사람의 아찔한 행위가 끝이 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고 소중한 물건을 끌어안듯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유람선 안으로 들어온 희미한 달빛을 빌려 그가 세월의 흔적도 없는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다음 생에도 당신이 내 여자였으면 좋겠는데. 당신의 다음 생은 송사월한테 주기로 약속했었나?”아직 잠들지 않은 서유가 그의 가슴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번 생에 당신이 나보다 먼저 가면 나 절대 당신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다음 생에 당신 안 만날 거라고요.”그가 슬픈 표정을
그 당시 풋풋한 어린 소녀였던 연이는 심우주가 자신과 같은 학교에 간다는 말을 듣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교과서는 정말 내가 가져오지 않았어. 아마도 애들이 가져간 것 같은데 내일 학교에 가면 돌려주라고 할게.”연이도 하준이와 마찬가지로 학교에서는 짱이었다. 친구를 괴롭히는 일은 없었지만 너무 인기가 많아서 여자아이들이 그녀를 짱으로 받들고 남자아이들도 하루 종일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꼬리를 흔들었다.반면, 심우주는 착실히 공부만 했고 가끔 연이의 괴롭힘에 그는 반격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였기 때문에 심우주는 그런 그녀가 얄미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가 제멋대로 하는 걸 사랑스럽게 지켜보았았다. 다들 오냐오냐하니까 연이는 학교에서도 늘 제멋대로였다. 그러나 그 당시 자신의 마음을 잘 몰랐던 심우주는 연이의 그런 모습에 조금 짜증이 나기도 했다. 잠시 후, 어른들에게 차례로 작별 인사를 마친 이하준이 차에 올라탔다. 늘 차갑기만 하던 아이가 한동안 머뭇거리더니 차에서 내려와 서유를 덥석 끌어안았다.“엄마, 몸 잘 챙겨요.”갑작스러운 아이의 행동에 서유는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하준아, 엄마 아빠는 집에서 우리 하준이 기다리고 있을게.”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있는 힘껏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손을 풀고 옆에 있던 이승하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아빠, 제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아빠도 절 이길 수 없을 거예요.”입꼬리를 살짝 올리던 그가 손을 뻗어 아이의 어깨를 토닥였다.“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남의 칼에 찔리기 쉬운 법이야. 자세를 낮추는 법을 배우거라.”아빠의 충고를 아이는 가슴 깊이 새겼다.“네, 그렇게 할게요.”이내 그가 허리춤에서 ‘S'라고 새겨진 금빛 칼을 꺼내 아이한테 건네주었다. “돌잡이 때 네가 잡은 칼이야. 이제는 네가 갖고 있어.”전에 소지섭한테서 아빠의 이야기를 들은
서유는 어쩔 수 없이 의사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문밖을 지키고 있던 소지섭은 의사가 떠나는 것을 보고 급히 물었다.“방금 연이랑 하준이가 와서 묻더라고요. 대표님한테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냐고...”서유가 입을 열기도 전에 안에서 이승하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감기라고 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고개를 끄덕이던 소지섭은 자리를 떴고 그녀 혼자 덩그러니 문밖에 서 있었다. 그가 얼마나 더 그녀와 함께 할 수 있을지...어느 순간 갑자기 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가 옆에 있어도 그녀는 여전히 불안한 마음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하준이 유학길에 오른 그날, 이씨 가문과 상씨 가문 사람들이 그를 배웅하러 왔다. 마치 하준이의 돌잡이 때처럼 정원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어른들의 모습이 이미 많이 변했고 아이들도 훌쩍 자란 상태였다. 서유와 이승하의 우월한 유전자만 이어받은 이하준은 10살밖에 안 된 나이지만 정교한 이목구비에 곧은 몸매를 가지고 있어 보기만 해도 귀티가 철철 흘러넘쳤다. 게다가 180 가까이 되는 아이큐를 가지고 있어 누가 봐도 엄친아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특히 이연석은 흰색 스웨터 차림에 한 손은 주머니에 넣고 한 손에 가방을 든 채로 계단을 내려오는 이하준의 모습을 보고 숨이 턱 막힐 것만 같았다. 그는 옆에서 초등학생 교복을 입은 채 케이크를 뺏어 먹고 있는 오뚝이와 깡순이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똑같은 10살인데 이게 뭐냐? 누구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명문 학교에 입학하고 누구는 아직도 초등학교나 다니고 있으니.”그 말에 정가혜가 그를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나는 거죠. 내가 몇 번을 말해요. 자꾸만 애들 다그치지 말라고 했죠.”이를 갈던 그가 두 아이 앞으로 다가가 케이크를 낚아채 입에 쑤셔 넣었다.“너희들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로 일찍 진학 못 하면 아빠 진짜 가만 안 둬.”두 아이는
“승하 씨...”깜짝 놀란 그녀는 미친 듯이 핸드폰을 찾았지만 온몸에 힘이 빠져 일어서지도 못하였다. 어떻게 의사를 찾아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애틋한 그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긴장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녹아내렸고 바닥을 짚고 있던 손에도 덩달아 힘이 풀렸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고 입술이 파르르 떨려 말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당신... 왜... 그래요?”지난 10년 동안, 이승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지내온 그녀는 거의 울어본 적이 없다. 잠깐 정신을 잃은 모습에도 이렇게 펑펑 우는 것을 보니 그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 애써 두통을 참으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던 그가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녀를 품에 안고 소파에 쓰러지더니 세월조차 비껴간 잘생긴 얼굴을 살짝 치켜들었다.“깊게 잠이 든 것뿐이야. 왜 이렇게 겁을 먹어?”말을 하면서 손을 뻗어 눈물로 뒤덮인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부러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당신 요즘 살이 좀 오른 것 같은데.”화제를 돌리려고 했지만 그녀는 눈물이 글썽한 두 눈을 들어 그의 창백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도 그렇죠. 어떻게 사람이 깨우는데 아무 반응이 없어요?”맑고 깨끗한 그녀의 눈을 그는 차마 마주칠 수가 없었다.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떼어 그녀의 등을 눌러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얹었다. “바보,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거야. 피곤할 때는 꿈을 꾸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거든.”그 말을 그녀는 당연히 믿지 못하였다.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어서 그의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왜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졌는지 그녀는 짐작할 수 있었다.단단한 가슴 위에 얹혀있던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미안해요. 당신 머릿속에 있는 칩을 꺼낼 의사를 찾아야 하는데...”겁이 났다. 이승하를 잃을까 봐 두려웠다. 자신을 목숨보다 더
지난주, 토론 대회에 나간다고 말하는 연이를 향해 이하준은 엄청 비꼬았다. 그 모습에 화가 난 연이는 씩씩거리며 이하준과 내기를 했고 뜻밖에도 그녀가 이기게 될 줄은 몰랐다.눈꺼풀을 내리깔던 하준이가 손을 힐끗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평소에 그렇게 재잘재잘하더니 실력 한번 제대로 발휘했네. 축하해.”진심으로 축하하는 것 같지 않고 그가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아무튼 이번에는 네가 졌어. 그러니까 잊지 말고 돈 입금해.”이하준은 천천히 냅킨을 깔면서 담담하게 말했다.“밥 먹고 나서 줄게. 근데 누나...”그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기세등등하게 연이를 쳐다보았다.“누나 올해 열일곱이지? 아직까지 고등학교에 다니고. 수시 자격도 따내지 못했으니 수능 봐서 어떤 대학에 합격할 수 있을지 정말 걱정이다.”그 말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너... 명문대에 합격했다고 잘난 척하지 마. 내년에 나도 그 학교에 합격할지 모르니까.”이하준은 칼과 포크를 집어 들고 스테이크를 썰어서 입에 넣었다.“그럼 내 후배가 되는 건가?”화가 난 연이가 반격할 겨를도 없이 그가 또 빈정거렸다.“내년에 학교에서 만나. 만나면 나한테 선배라고 부르는 거 잊지 말고.”“아악. 열받아 죽겠네.”연이가 가슴을 내리치더니 옆에 있던 의자를 끌어당겨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서유의 팔짱을 끼고 어깨에 기댄 채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이모, 하준이 쟤 정말 얄미워죽겠어요. 빨리 학교에 보내버려요.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요.”서유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막상 가고 나면 또 보고 싶을걸?”“아니요. 그럴 일은 절대 없어요.”입을 삐죽거리면서 시선은 이하준의 얼굴로 향해 있었다. 솔직히 이 녀석과 10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많이 싸우기도 했지만 정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얄미운 동생인 건 사실이다. “빨리 갔으면 좋겠어요.”웃음을 짓던 서유가 포크로 과일을 집어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연이는 과일을 받아먹으면서 이하준을 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