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삼역 외곽, 헬리콥터가 잔디밭에 조용히 착륙했다. 조종석의 정장을 입은 남자는 뒤돌아 눈을 감고 있는 남자를 향해 말했다. “어르신, 하차하시고 환승 준비하시죠.” 언제나처럼 짙고 길게 내려온 속눈썹이 서서히 올라가며, 차가운 살기가 눈동자에서 번져 나오자 정장 남자는 목덜미가 서늘해지더니 곧바로 시야가 흐려지며 조종대에 고꾸라졌다. 이승하는 무표정하게 손을 거둔 뒤, 셔츠 위쪽에 매고 있던 넥타이를 풀어 손가락에 감으며 헬리콥터에서 천천히 내렸다. 그를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비행사들이 그가 정장 남자를 제압한 모습을 보고 일제히 그를 둘러쌌다. 이승하는 손가락에 감아놓은 넥타이를 풀고 주먹을 꽉 쥔 뒤,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다가오는 이들을 향해 맹렬히 주먹을 날렸다. 그는 다쳤음에도 불구하고 루드웰에서 나온 이들을 순식간에 제압하며 단 한 순간도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쓰러진 비행사를 발로 밀어낸 그는 얼음같이 차가운 눈빛으로 주변을 스캔하며, 손에 감겨 있던 넥타이를 풀고 다시 헬리콥터를 향해 걸어갔다. 그는 조종간을 잡아 일련의 동작으로 헬리콥터를 공중으로 띄우며 김해 삼역을 빠져나갔다. 떠오르는 헬리콥터에서 낡은 검은 넥타이가 한 줄기 바람을 타고 떨어졌다. 그 넥타이를 바라보던 쓰러진 비행사들은 반쯤 정신을 차리며, 핸드폰을 들어 모니터링실로 전화를 걸었다. “보스, 이승하가 도망쳤습니다.” 통제실에 있던 이들은 그 소식을 듣고 모두 잠시 시선을 상철수에게 돌렸다. 그러나 그가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 “도망가게 놔둬.” 그는 호랑이를 산으로 돌려보내야 일망타진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나씩 처리하는 것은 너무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들 뿐이었으니까. 이승하는 헬리콥터를 조종해 김해 삼역을 벗어나면서도, 뇌에 심어진 칩이 반응하지 않는 걸 느끼며 상철수가 일부러 자신을 풀어줬음을 직감했다. 그는 상철수가 능수능란한 계략가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서 있는 이승하를 본 소수빈과 소지섭은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동시에 차 문을 열고 이승하를 향해 달려갔다. “대표님!” “대표님!” 두 남자가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 이승하는 살짝 감동했지만, 다리가 저절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이승하의 후퇴에 당황한 소수빈과 소지섭은 동시에 발걸음을 멈췄지만, 여전히 눈물을 머금고 빛 속에 서 있는 이승하를 바라봤다. “대표님,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정말 너무 잘 됐습니다. 저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릅니다!” 이승하는 두 사람을 몇 초간 바라보다가, 길게 뻗은 손가락으로 소수빈과 소지섭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미안해. 걱정시켜서.” 늘 변함없는 차분한 목소리와 어깨 위에 닿은 손길이 이상하게도 소수빈과 소지섭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그가 돌아온 이상, 어떤 문제라도 해결될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사람이 많은 공공장소라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기 어려웠던 두 사람은 이승하를 안내해 검은 차량으로 데려가 문을 열었다. 이승하가 타자 그들은 각각 운전석과 조수석에 탑승해 빠르게 차량을 출발시켰다. 차 안에서 소수빈과 소지섭은 반년 동안 이승하를 찾지 못해 애태웠던 심정을 차례로 토로하며, 누가 더 그를 걱정했는지를 두고 다투기 시작했다. “분명 내가 대표님을 더 걱정했어!” “무슨 소리야! 대표님을 제일 걱정한 건 나라고!” 뒷좌석에서 두 사람의 말다툼을 듣던 이승하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비로소 그가 살아 돌아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 미소도 잠시, 그의 마음속에서 메아리치는 한마디가 마음속에 깊이 파고들었다. 이번엔 정말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서유의 말이 그의 기쁨을 순식간에 어두운 심연으로 끌어내렸다. 그녀를 잃고 얻은 생존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이 생각에 마음이 쓰라리고, 허벅지 위에 얹어 놓았던 손가락이 저절로 꽉 쥐어졌다. 백미러를 통해 그의 변한 표정을 엿본
반년 만에 살아 돌아온 이승하를 본 주태현은 나이 든 얼굴에 감격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도련님,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저는 도련님께서...” “저는 괜찮아요.” 이승하는 손바닥을 들어 주태현의 어깨를 두드리며 간단히 그를 안심시킨 후, 곧바로 서재로 들어갔다. 이승하가 바쁜 듯 보이자 주태현은 더 이상 방해하지 않고, 마음을 다잡은 뒤 주방에 요리를 준비해 달라 부탁하고는 학교에 있는 연이를 데리러 나갔다. 이승하와 서유가 집을 떠난 후, 연이는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꺼냈다. 어른들이 겪은 일은 위험했지만 주태현은 아이가 걱정할까 봐 출장을 갔다고 둘러댔다. 그러나 연이는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똑똑해서, 출장 간 사람들이 전화나 영상 통화조차 할 수 없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더 이상 감출 수 없던 차에 이승하가 돌아와 주태현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연이도 안심시킬 수 있게 됐다. 이승하는 머릿속의 칩에 대한 문제를 소수빈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그런데 소수빈이 뒤따라 서재에 들어오자 그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소 비서, 난 이미 무사히 돌아왔으니 가족 곁으로 가서 아내와 아이를 돌봐.” 이승하가 떠난 동안, 소수빈은 아버지가 되었고 갓 태어난 아이와 산후의 아내에게는 남편의 보살핌이 필요했다. 하지만 소수빈은 떠나려 하지 않았다. “대표님, S 멤버들을 이끌고 복수를 하려면 많은 준비가 필요하실 겁니다. 저도 일을 나눠 맡게 해 주십시오.” 이승하는 잠시 고민하다가 책상 앞에 걸음을 옮겼다. 종이에 S 조직 전 소속인 ‘darkness’와 정여희의 이름을 적은 뒤, 이를 찢어 소수빈에게 건넸다. “이 조직이 왜 정여희를 죽이려 했는지 자세히 조사해.” “네!” 임무를 받은 소수빈은 즉시 메모를 받아들고 서재를 나갔다. 소수빈이 사라지자 이승하는 자신의 큰 체구를 소파에 기대며, 반년 동안 팽팽하게 긴장했던 신경이 조금씩 풀려나가는 걸 느꼈다. 하지만 잠시의 여유도 가질 새 없이, 그는 곧바로
가늘고 긴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빠르게 움직이며, 화면 속 코드가 처음의 암호화를 하나씩 돌파해 나갔다. 그러나...프로그래밍 작업 도중, 이연석은 칩 프로그램이 하나에서 둘로 나뉘는 것을 보고 직감적으로 이승하를 쳐다보았다. “형, 이건 해커 목록에서 본 적 있어. 사람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 사용된다고 하던데, 이걸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옆에서 손을 모아 차분히 앉아 있던 이승하는 살짝 눈길을 돌려 의문에 찬 이연석을 바라보았다. “내 머릿속에 있어.” 그 한마디에 이연석은 심장이 멎을 듯했고, 마치 독사에 발목을 물린 듯, 차가운 공포가 온몸을 타고 올라왔다. “형, 이건 치명적인 살인 무기라던데. 어떻게 형 머릿속에 이런 게 들어가 있을 수가 있어!”이연석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반면, 이승하는 의연하고 차분한 얼굴로 그저 사실을 전달할 뿐이었다. “이미 들어와 있는 걸 어쩌겠어. 네가 할 일은 이 시스템들을 멈출 수 있는지 말해주는 것뿐이야.” 이승하는 스스로 큰 고통을 겪으면서도, 언제나 무심한 듯 모든 것을 감내해 왔다. 이러한 성격 탓에 사람들은 그가 무적이라고 생각하고 그의 고통을 헤아리려 하지 않았다. 그런 이승하를 이해하는 사람은 오직 이연석뿐이었다. 그는 타이핑하던 손을 멈추고 조심스레 이승하의 머리 위로 손을 얹었다. 비록 상처가 보이지 않았지만, 이연석은 머릿속에 칩을 삽입하는 고통이 얼마나 클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마치 형을 위해 울 것 같은 눈빛으로 이승하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형, 많이 아프지?” 이승하는 다른 사람의 손이 머리를 만지는 것을 꺼렸지만, 이번만큼은 이연석의 진심 어린 위로에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의 손길을 잠깐 허락한 뒤, 곧 손을 멈추게 했다. “난 여전히 S를 이끌고 루드웰로 돌아가야 해. 그러니 내 머릿속의 감시, 위치 추적, 폭발 시스템을 최대한 빨리 해제해줘.”통제에서 벗어나야만 상철수와의 이 싸움에서 S를 이끌고 완전한
이연석은 충격에 빠진 채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러니까 칩이 형 머릿속에 들어온 순간부터 이미 죽음이 예정된 거라는 겁니까?” 그의 분노에 찬 질문에 의사들은 침묵했다. 그러나 이연석은 갑작스럽게 폭발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신들은 우리 집안에서 돈을 써가며 지원해 준 최고급 의사들이잖아요! 어떻게든 칩을 제거해서 형을 치료해 줘야 할 거 아닙니까!” 의사들은 그의 분노가 이해가 되지만, 고개를 숙여 수석 자리에 앉아 말없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이승하를 바라보았다. “대표님, 저희 실력으로는 칩 제거 수술이 가능하긴 하지만 생명에 큰 위험이 따르기에 정말 추천 드리지 않습니다.” 의사의 말을 잠시 응시하던 이승하는 몇 초간 침묵 후,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늘 있었던 일은 누구도 입 밖에 내지 마세요.” 이연석은 형의 이러한 체념에 가까운 반응에 얼굴을 찌푸렸다. “형, 이 의사들로 안 되면 다른 의사들한테 부탁해 봐. 수술할 수 있는 의사가...” 이승하는 냉정한 목소리로 그의 말을 끊었다. “칩에 바이러스가 있다는 걸 발견한 것만 봐도 이 사람들이 최고의 의사라는 건 분명해. 더 이상 이 사람들을 곤란하게 하지 마.” 이승하는 고개를 들어 의사들에게 손짓했다. “이제 그만 나가 보세요.” 명령을 받은 의사들은 서류와 스캔 결과물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 앞에 다다른 수석 의사는 문을 열기 직전 잠시 멈춰 섰다. 그리고 이승하를 돌아보며 신중하게 당부했다. “대표님, 일상생활에서 특히 두뇌 휴식에 신경 써주시고, 절대 머리에 충격을 주지 않도록 주의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뇌종양이 재발할 우려가 큽니다. 만약 재발하게 된다면 단순 뇌종양이 아니라 뇌암으로 발전할 확률이 매우 큽니다. 꼭 조심하세요.” 그 말을 듣자 이연석은 책상을 내리치며 외쳤다. “어서 나가요! 제대로 치료도 못 하면서 형을 저주하기나 하고!” 의사들은 그의 마음을 이해하며 더 이상
김종수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루드웰의 신호가 차단돼 있어서 지금은 안에 있는 사람과 연락이 닿지 않네.”이승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가 돌파구를 찾는 동안 상철수도 그에 맞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현재는 누가 먼저 공략할지가 관건이었다. 서유를 미리 구할 수 없다면 폭파 시스템부터 해결해야 한다. 상철수가 그의 생명을 통제할 수 없게 되면 분명 서유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을 마친 그가 전화를 끊고 이연석을 쳐다보았다.“폭파 시스템을 정지시킬 수 없다면 폭파 시간을 늦춰봐.”시뮬레이션하고 있던 이연석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로 입을 열었다.“조금만 시간을 더 줘요.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프로그램 정지시킬 테니까.”프로그램을 정지시키는 것은 물론 도청 시스템이나 위치추적 시스템처럼 폐쇄한 뒤 다시는 작동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코드를 두드리면서 그는 생각에 잠긴 듯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앉아 있는 이승하를 훑어보았다. 둘째 형한테 형수가 K국으로 가서 가족을 만났던 사실을 얘기할 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둘째 형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루드웰에서 형수를 만났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형이 전화 통화를 하는 걸 듣지 않았다면 그는 아직도 루드웰의 보스가 둘째 형수의 외할아버지라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고 둘째 형수가 루드웰에 갇혔다는 사실은 더더욱 몰랐을 것이다.서유의 상황을 생각하면 이연석도 많이 걱정되었다. 그러나 상철수가 형수의 외할아버지이니 가족을 해치지는 않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이런저런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이승하의 담담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내 머리 안에 칩이 있다는 사실을 가혜 씨한테 얘기하지 마.”흠칫하던 그는 모니터 너머로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승하를 쳐다보았다.“가혜 씨가 알면 형수한테 얘기할까 봐 그래요?”대답이 없는 걸 보니 맞는 것 같았다. 그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형, 형수가 알면 형 생각을 얼마나 하겠어요? 아는 게 좋은 거 아닌
상철수의 그 말에 조종자들은 한껏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그렇게 빨리요?”그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도청도 안 되고 위치추적도 안 된다고 폭파 위험도 사라졌으니 나 같아도 당장 복수하러 달려올 것이다.”게다가 서유가 이곳에 있는데. 서유를 위해서라도 이승하는 당장 움직일 것이다.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은 이승하 쪽의 해커가 폭파 시스템을 수정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상철수는 프로그래머 중 한 명을 밀어내고 직접 자리에 앉아 상대방이 설치한 까다로운 암호 시스템을 손쉽게 해제하고 빠른 속도로 폭파 시간을 단축시켰다. 한편, 컴퓨터 앞에 앉아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이연석은 여렵게 연장한 시스템 폭파 시간이 또다시 변하는 것을 보고 불같이 화를 내며 코드를 연속 두드렸다. 얼마 지나서 않아 폭파 시간이 또 연장되었고 상철수는 다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 녀석 참 대단하네. 여기 있는 자네들보다 훨씬 나아.”조종자들은 해커의 실력이 뛰어난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저 그들이 무사히 물러날 수 있을지에만 신경 쓰고 있다.“형님, 이승하가 내일 쳐들어온다면 저희도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외곽에만 폭탄을 설치해서 되겠습니까?”그들은 내부에서 S 조직의 헬기가 언제 오는지 확인한 다음 폭탄 작동 키를 누를 수 있었고 그와 동시에 그들은 그곳에서 대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정도의 폭탄으로는 S 조직의 사람들을 모조리 죽일 수는 없을 것이다.불안해하는 조종자들과 달리 상철수는 담담한 모습이었다.“다섯째, 신호를 보내 김종수한테 알리거라. 사람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 있다가 폭탄이 터진 후 S 조직을 사살하라고.”평소 김종수와 친하게 지냈던 다섯째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형님, 우리만 철수하고 김종수를 남겨두고 S 조직과 싸우게 하는 게 김종수한테는 죽으라는 것과 다름없습니다.”상철수는 다섯째 어르신을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보았다.“잊었는가? 김종수가 돕지 않았다면 이승하는 그
핸드폰을 손에 쥔 채 차창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던 김종수는 끝내 이승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네한테 미리 말은 해야 할 것 같아서. 상철수가 날 밖으로 내보냈어. 아마도 내가 자네의 적이 되겠지.”이승하는 이미 상철수의 이런 생각을 예상한 듯 담담한 표정이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루드웰을 나오기로 결정하신다면 강 건너 불구경도 가능한 일이지요.”그 소리에 김종수는 호탕한 웃음을 지었다.“난 1-4로 루드웰에 처음으로 가입한 조종자일세. 어찌 강 건너 불구경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자네한테는 손을 대지 않을 것이네.”루드웰 안에는 상철수 외에도 많은 형제들이 있었다. 그 형제들을 위해 함께 세운 루드웰을 위해서라도 그는 명을 받들어 임무를 완수해야 했다.“다만 승하야... 자네한테는 손을 대지 않더라도 S 조직의 사람들은 내 가족을 죽였어. 그러니 S 조직의 사람들을 몇 명 죽일지도 모르겠다.”다정한 그의 부름에 이승하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졌다. 순간 자신을 아끼는 어른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내일 봅시다.”각자 입장이라는 게 있으니 김종수는 쉽게 조직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그걸 알고 있는 이승하는 더 이상 그를 설득하지 않았다.“외삼촌.”이전에도 이승하가 그한테 외삼촌이라고 불렀던 적이 있어서 그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왠지 모르게 다르게 느껴졌다. 이승하가 진짜 그의 조카라도 된 것처럼.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데 이승하가 먼저 전화를 끊어버렸다. 핸드폰 화면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겨있을 때 침실 방문이 열리더니 육성재가 팔짱을 낀 채 문밖에 서 있었다. “삼촌이 1-4 맞아요?”덜미를 잡힌 김종수는 깜짝 놀랐지만 이내 담담한 척하며 그를 지나쳐 침실을 나섰다. “제가 루드웰에 꼭 가야 한다는 걸 알고 황금잎을 보내준 겁니까? 바보라는 코드명도 지어주고 주제넘은 짓이라고 놀리기도 하다가 제가 위험에 처하니까 절 구해준 거잖아요.”김종수는 그를 무시한 채 와인 셀러에서 와인을 꺼
그가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입을 열었다.“난 죽는 게 두려운 사람이 아니었어. 그런데 당신을 만난 후부터 죽는 게 그렇게 겁이 나더라.”죽는 게 두려웠기 때문에 전 서계를 돌아다니며 의사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원하는 결과는 끝내 얻지 못하였고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기만 했다. 겁이 난 서유는 그를 꼭 껴안았다. 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당신한테는 내가 있고 우리 하준이가 있어요. 그러니까 절대 죽으면 안 돼요. 당신이 죽으면 우리는 어떡하라고요?”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미 5년을 버텨온 그는 점점 더 통증이 심해졌고 하느님이 조금씩 조금씩 그의 목숨을 빼앗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통이 전해지는 횟수가 갈수록 늘어나고 통증은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칩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것 같았다. 다만 떠나기 전에 모든 일을 다 마치고 가야 하는데...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품 안에 있는 여인이 가장 걱정되었다. 소리 없이 흐느끼는 그녀의 모습에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깊이 파고들었다.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릴 만큼 뜨겁고 짜릿한 느낌, 슬픈 마음을 녹일 수 있을 것 같아 두 사람은 뜨겁게 몸을 섞으며 하나가 되었다. 그녀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할 때쯤, 두 사람의 아찔한 행위가 끝이 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고 소중한 물건을 끌어안듯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유람선 안으로 들어온 희미한 달빛을 빌려 그가 세월의 흔적도 없는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다음 생에도 당신이 내 여자였으면 좋겠는데. 당신의 다음 생은 송사월한테 주기로 약속했었나?”아직 잠들지 않은 서유가 그의 가슴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번 생에 당신이 나보다 먼저 가면 나 절대 당신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다음 생에 당신 안 만날 거라고요.”그가 슬픈 표정을
그 당시 풋풋한 어린 소녀였던 연이는 심우주가 자신과 같은 학교에 간다는 말을 듣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교과서는 정말 내가 가져오지 않았어. 아마도 애들이 가져간 것 같은데 내일 학교에 가면 돌려주라고 할게.”연이도 하준이와 마찬가지로 학교에서는 짱이었다. 친구를 괴롭히는 일은 없었지만 너무 인기가 많아서 여자아이들이 그녀를 짱으로 받들고 남자아이들도 하루 종일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꼬리를 흔들었다.반면, 심우주는 착실히 공부만 했고 가끔 연이의 괴롭힘에 그는 반격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였기 때문에 심우주는 그런 그녀가 얄미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가 제멋대로 하는 걸 사랑스럽게 지켜보았았다. 다들 오냐오냐하니까 연이는 학교에서도 늘 제멋대로였다. 그러나 그 당시 자신의 마음을 잘 몰랐던 심우주는 연이의 그런 모습에 조금 짜증이 나기도 했다. 잠시 후, 어른들에게 차례로 작별 인사를 마친 이하준이 차에 올라탔다. 늘 차갑기만 하던 아이가 한동안 머뭇거리더니 차에서 내려와 서유를 덥석 끌어안았다.“엄마, 몸 잘 챙겨요.”갑작스러운 아이의 행동에 서유는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하준아, 엄마 아빠는 집에서 우리 하준이 기다리고 있을게.”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있는 힘껏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손을 풀고 옆에 있던 이승하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아빠, 제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아빠도 절 이길 수 없을 거예요.”입꼬리를 살짝 올리던 그가 손을 뻗어 아이의 어깨를 토닥였다.“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남의 칼에 찔리기 쉬운 법이야. 자세를 낮추는 법을 배우거라.”아빠의 충고를 아이는 가슴 깊이 새겼다.“네, 그렇게 할게요.”이내 그가 허리춤에서 ‘S'라고 새겨진 금빛 칼을 꺼내 아이한테 건네주었다. “돌잡이 때 네가 잡은 칼이야. 이제는 네가 갖고 있어.”전에 소지섭한테서 아빠의 이야기를 들은
서유는 어쩔 수 없이 의사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문밖을 지키고 있던 소지섭은 의사가 떠나는 것을 보고 급히 물었다.“방금 연이랑 하준이가 와서 묻더라고요. 대표님한테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냐고...”서유가 입을 열기도 전에 안에서 이승하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감기라고 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고개를 끄덕이던 소지섭은 자리를 떴고 그녀 혼자 덩그러니 문밖에 서 있었다. 그가 얼마나 더 그녀와 함께 할 수 있을지...어느 순간 갑자기 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가 옆에 있어도 그녀는 여전히 불안한 마음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하준이 유학길에 오른 그날, 이씨 가문과 상씨 가문 사람들이 그를 배웅하러 왔다. 마치 하준이의 돌잡이 때처럼 정원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어른들의 모습이 이미 많이 변했고 아이들도 훌쩍 자란 상태였다. 서유와 이승하의 우월한 유전자만 이어받은 이하준은 10살밖에 안 된 나이지만 정교한 이목구비에 곧은 몸매를 가지고 있어 보기만 해도 귀티가 철철 흘러넘쳤다. 게다가 180 가까이 되는 아이큐를 가지고 있어 누가 봐도 엄친아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특히 이연석은 흰색 스웨터 차림에 한 손은 주머니에 넣고 한 손에 가방을 든 채로 계단을 내려오는 이하준의 모습을 보고 숨이 턱 막힐 것만 같았다. 그는 옆에서 초등학생 교복을 입은 채 케이크를 뺏어 먹고 있는 오뚝이와 깡순이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똑같은 10살인데 이게 뭐냐? 누구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명문 학교에 입학하고 누구는 아직도 초등학교나 다니고 있으니.”그 말에 정가혜가 그를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나는 거죠. 내가 몇 번을 말해요. 자꾸만 애들 다그치지 말라고 했죠.”이를 갈던 그가 두 아이 앞으로 다가가 케이크를 낚아채 입에 쑤셔 넣었다.“너희들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로 일찍 진학 못 하면 아빠 진짜 가만 안 둬.”두 아이는
“승하 씨...”깜짝 놀란 그녀는 미친 듯이 핸드폰을 찾았지만 온몸에 힘이 빠져 일어서지도 못하였다. 어떻게 의사를 찾아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애틋한 그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긴장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녹아내렸고 바닥을 짚고 있던 손에도 덩달아 힘이 풀렸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고 입술이 파르르 떨려 말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당신... 왜... 그래요?”지난 10년 동안, 이승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지내온 그녀는 거의 울어본 적이 없다. 잠깐 정신을 잃은 모습에도 이렇게 펑펑 우는 것을 보니 그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 애써 두통을 참으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던 그가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녀를 품에 안고 소파에 쓰러지더니 세월조차 비껴간 잘생긴 얼굴을 살짝 치켜들었다.“깊게 잠이 든 것뿐이야. 왜 이렇게 겁을 먹어?”말을 하면서 손을 뻗어 눈물로 뒤덮인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부러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당신 요즘 살이 좀 오른 것 같은데.”화제를 돌리려고 했지만 그녀는 눈물이 글썽한 두 눈을 들어 그의 창백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도 그렇죠. 어떻게 사람이 깨우는데 아무 반응이 없어요?”맑고 깨끗한 그녀의 눈을 그는 차마 마주칠 수가 없었다.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떼어 그녀의 등을 눌러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얹었다. “바보,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거야. 피곤할 때는 꿈을 꾸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거든.”그 말을 그녀는 당연히 믿지 못하였다.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어서 그의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왜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졌는지 그녀는 짐작할 수 있었다.단단한 가슴 위에 얹혀있던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미안해요. 당신 머릿속에 있는 칩을 꺼낼 의사를 찾아야 하는데...”겁이 났다. 이승하를 잃을까 봐 두려웠다. 자신을 목숨보다 더
지난주, 토론 대회에 나간다고 말하는 연이를 향해 이하준은 엄청 비꼬았다. 그 모습에 화가 난 연이는 씩씩거리며 이하준과 내기를 했고 뜻밖에도 그녀가 이기게 될 줄은 몰랐다.눈꺼풀을 내리깔던 하준이가 손을 힐끗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평소에 그렇게 재잘재잘하더니 실력 한번 제대로 발휘했네. 축하해.”진심으로 축하하는 것 같지 않고 그가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아무튼 이번에는 네가 졌어. 그러니까 잊지 말고 돈 입금해.”이하준은 천천히 냅킨을 깔면서 담담하게 말했다.“밥 먹고 나서 줄게. 근데 누나...”그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기세등등하게 연이를 쳐다보았다.“누나 올해 열일곱이지? 아직까지 고등학교에 다니고. 수시 자격도 따내지 못했으니 수능 봐서 어떤 대학에 합격할 수 있을지 정말 걱정이다.”그 말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너... 명문대에 합격했다고 잘난 척하지 마. 내년에 나도 그 학교에 합격할지 모르니까.”이하준은 칼과 포크를 집어 들고 스테이크를 썰어서 입에 넣었다.“그럼 내 후배가 되는 건가?”화가 난 연이가 반격할 겨를도 없이 그가 또 빈정거렸다.“내년에 학교에서 만나. 만나면 나한테 선배라고 부르는 거 잊지 말고.”“아악. 열받아 죽겠네.”연이가 가슴을 내리치더니 옆에 있던 의자를 끌어당겨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서유의 팔짱을 끼고 어깨에 기댄 채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이모, 하준이 쟤 정말 얄미워죽겠어요. 빨리 학교에 보내버려요.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요.”서유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막상 가고 나면 또 보고 싶을걸?”“아니요. 그럴 일은 절대 없어요.”입을 삐죽거리면서 시선은 이하준의 얼굴로 향해 있었다. 솔직히 이 녀석과 10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많이 싸우기도 했지만 정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얄미운 동생인 건 사실이다. “빨리 갔으면 좋겠어요.”웃음을 짓던 서유가 포크로 과일을 집어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연이는 과일을 받아먹으면서 이하준을 향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 회사에서 돌아온 서유는 정원에서 칼자루를 쥔 채 아이한테 칼을 다스리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다가가 말을 건네려고 했지만 아름다운 광경에 발걸음을 멈추고는 문 옆에 살짝 기대어 잔디밭의 크고 작은 그림자를 멀리서 바라보았다. 아이한테 관심이 없었던 남자는 아이를 뛰어난 인재로 키우기 위해 온갖 정성을 쏟았다. 시간이 흘러 아이는 아빠를 존경했고 아빠를 많이 따랐다. 이승하는 좋은 남편이자 좋은 아빠였다. 그가 있었기 때문에 이 집이 따뜻하고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좋은 남자가 그녀와 아이의 옆에서 평생을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랐다. 잠시 후,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날카롭던 시선도 이젠 나이가 드니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조각같이 잘생긴 얼굴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고 세월마저 그의 얼굴을 그냥 스쳐 지나간 듯 그는 처음 봤을 때와 큰 차이가 없었다. 검은색 셔츠와 긴 바지 사이에 흰색 허리띠를 두르고 있는 그의 몸이 석양 아래에 우뚝 서 있었고 그가 양쪽 허리춤에 손을 얹고 있었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머리 뒤로 잘 빗겨져 있었고 약간 고개를 돌리니 머리카락이 왼쪽으로 살짝 흔들렸다. 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서유한테 가까이 오라고 했다. 옅은 미소를 짓던 그녀는 그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소지섭을 지나치다가 손에 있던 손수건을 챙겨 앞으로 다가갔다. “여보, 허리 숙여요.”그가 허리를 약간 숙이자 서유는 발끝은 세우고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주었다.“저녁에 뭐 먹고 싶어요?”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잡자 가녀린 그녀가 그의 품에 쏙 들어왔다. “우리 서 대표님이 직접 요리를 하실 건가?”그의 장난에도 그녀는 화를 내지 않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그렇게 좀 부르지 말아요.”지난 5년 동안 서유도 많이 바삐 보냈고 자신의 건축 사무소까지 차렸다. 그러나 프로젝트를 많이 맡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남편과 아이를 돌봤다. 하지만 이승하는
그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칼, 총, 레이싱카, 배, 비행기 이것들 중에서 뭐부터 배우고 싶어?”하준이가 초롱초롱한 눈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아빠, 저한테 가르쳐주시려고요?”소파에 등을 기대고 있던 남자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이론 지식은 이미 거의 다 배웠으니 이제부터는 호신술을 가르쳐 줄 생각이야. 나중에 날 대신해 네가 엄마를 지켜줘야 하니까.”아이는 머리를 살짝 기울인 채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아빠가 옆에 있는데 왜 제가 엄마를 지켜줘야 해요?”벌써 두통 증상이 심해진 그는 머릿속에 있는 칩에 대해 아이한테 얘기하지 않았다.“당분간은 로봇 프로젝트 때문에 많이 바쁠 거야. 자주 자리를 비우게 될 테니까 내가 없는 동안에는 네가 엄마를 지켜줘야 해.”요즘 아빠가 로봇 개발 중인 걸 알고 있던 이하준은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세요. 열심히 배워서 엄마를 지켜줄 거예요.”아이의 약속을 듣고 이승하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일단 총 쏘는 법부터 가르쳐줄게.”하준이도 냉큼 그의 뒤를 따라 일어섰다.“세 살 때, 총을 가지고 놀다가 아빠한테 호되게 맞았던 적이 있었는데. 다시는 총을 못 잡게 할 줄 알았어요.”아이가 그 어릴 때의 일까지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때는 네가 너무 어렸으니까 총을 가지고 놀지 못하게 한 거야.”“저 이제 겨우 10살인데요. 지금은 총 가지고 노는 거 안심하세요?”발걸음을 멈추던 그가 뒤돌아서 어느새 허리 높이까지 키가 훌쩍 큰 아이를 바라보았다.“이제 곧 공부하러 해외로 가잖아. 돌아와서 배우면 그땐 이미 늦었어.”천재가 맞는 건지 하준이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학교의 입학 통지서를 받게 되었고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이국땅에서 다른 천재 아이들과 함께 공부를 하게 되었다. 서재로 들어간 그는 10년 동안 사용하지 않은 총을 꺼내 하준이를 데리고 정원으로 향했다.한편, 이승하가 아이에게 사격을 가르치려 한다는 걸 진작부터 알고
이연석은 급히 손을 흔들며 말했다.“아닙니다. 그냥 기부하려던 거예요.”하지만 전문가는 그런 돈을 받을 수 없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그의 고지식한 태도에 이연석은 화가 나서 책상을 치며 일어섰다.“그러니까 머리카락 한 올 없이 다 빠졌지! 다 선생님 고지식함이 다 빨아먹은 거예요!”전문가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는 같은 책상을 치며 맞섰다.“도련님, 제 지능을 모욕하는 건 참겠는데, 머리카락을 모욕하는 건 안 됩니다!”“그래요? 그럼 선생님 머리카락을 모욕하죠!”두 사람이 거의 싸울 뻔한 순간, 이하율 남매가 배를 움켜쥐며 말했다.“아빠, 우리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너무 배고파요...”이연석은 남매에게 화살을 돌리며 소리쳤다.“하루 종일 먹을 것만 찾고! 하준이처럼 간식 줄이고 책 좀 보란 말이야!”이하율 남매는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아빠, 우린 아직 글도 다 못 읽어요. 책 보는 것도 재미없어요. 우리에겐 간식이 제일 재미있어요.”옆에 있던 전문가는 그 말을 듣고 자신감이 생겼다.“보세요. 이 두 아이가 어디 130과 148의 IQ를 가진 것처럼 보이시나요?”이연석은 할 말을 잃었다. 화가 난 그는 두 아이를 번쩍 들어 올리며 외쳤다.“이 고집불통 대머리야! 이런 허접한 기관은 확 망해버려!”전문가는 속으로 생각했다.‘지금까지 수많은 IQ 테스트를 해봤지만, 이런 사람은 처음이야. 이럴 수가!’A시로 돌아가기 전, 이연석은 테스트 결과를 컴퓨터로 수정하고 새로 출력한 뒤 두 아이를 데리고 이승하를 찾아갔다.“형, 봐봐. 우리 애들도 IQ가 엄청 높아! 특히 내 아들, 148이야! 나중에 mensa에 들어갈 수도 있다고!”그 말을 듣던 이승하는 고개도 들지 않고 키보드를 두드리며 이하율에게 물었다.“오뚝아, 68 곱하기 42는 얼마야?”감자칩을 먹으며 손에 기름이 잔뜩 묻은 이하율은 손가락을 세며 계산하기 시작했다.3분 뒤, 그는 대답했다.“110!”순간 이연석은 참지 못하고 이하율을 향해 발길질을 하
흐트러진 커튼 너머로 달빛이 스며드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서유는 무의식적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해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크게 외쳤다.“여보, 성재 씨의 보디가드가 그러던데 그 사람이 망원경으로 우리 집을 자주 훔쳐본대요. 제발 여기선 그러지 마요.”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던 이승하는 짙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는 맞은편 별장을 한 번 흘겨보더니, 아무렇지 않은 척 리모컨을 집어 들고 불을 꺼버렸다.“걱정 마, 안 보여.”“하지만...”서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의자 팔걸이에 손을 짚은 이승하가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그리고 늑대처럼 그녀의 혀끝을 휘감아 그녀가 하려던 말을 그대로 삼켜버렸다.처음에는 저항하던 서유도 이승하가 한쪽 무릎을 꿇는 순간, 온몸이 떨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두 손톱으로 의자 등받이를 필사적으로 긁을 뿐이었다.예전에는 체력에만 의지하던 이승하가 오늘은 어쩐 일인지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가 꺼낸 물건들은 서유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제발 그런 거 쓰지 마요!”서유가 간절히 부탁했지만, 남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낮고 매혹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여보, 참지 말고 소리 내봐.”서유는 도저히 소리를 낼 수가 없어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런 그녀를 본 이승하는 도구와 체력을 총동원해 강도를 높였다.“난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만약 방음이 되지 않았다면, 그리고 커튼이 창문을 가리지 않았다면, 서유는 지금 부끄러움에 혀를 깨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더욱 끔찍한 것은 그녀가 꼼짝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저 이승하에게 온전히 ‘당하기’만 했다.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두 번, 세 번...기진맥진한 서유는 뒤돌아 닫혀 있는 방문을 바라보며 간절히 바랐다.‘제발, 하준이가 문을 두드리며 배가 아프다고, 병원에 같이 가달라고 했으면...’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이하준은 수많은 문제 속에 갇혀 있었다.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