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철수는 잠시 멍하니 서유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엔 깊은 증오가 담겨 있었고, 문득 서유의 얼굴에서 과거의 정여희가 떠올랐다. 당시의 정여희도 이토록 강하고 단호했었다. 상철수는 아마도 정여희의 기억 때문에 마음속의 분노를 억누르고, 서유의 대담함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지나갔다. “연훈아, 네 동생을 데리고 메인 통제실로 돌아가 쉬게 해라.” 상연훈은 상철수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서유에게도 손찌검을 할 거라 예상했지만, 그저 조용히 돌아가라고 한 말에 순간 당혹스러웠다. 상철수에게도 약간의 죄책감이 있는 걸까? 상철수의 진의를 파악할 수 없었던 상연훈은 서유의 손을 잡아 메인 통제실로 향했다. 서유는 상연훈을 대신해 한마디 해주려 했지만, 상연훈은 여기서 쓸데없는 다툼을 벌이기보다 이곳을 벗어날 방법을 찾는 것이 급선무라며 그녀를 진정시켰다. 상연훈의 신호를 알아챈 서유는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풀고 상연훈과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두 사람이 문턱을 나서자마자 상철수의 차가운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서유야, 네가 이곳에 오기 전 앞으로 영원히 상씨 집안에 남겠다고 약속했던 거, 기억하니?” 서유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가 마치 생사마저 쥐락펴락하는 듯한 상철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 약속은 당신이 저를 속이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이루어진 것이었어요. 본인이 저를 속여놓고 어떻게 그 약속을 지키라 하세요?” 그녀가 약속을 깨겠다고 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상철수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 약속은 무효다. 이제부터는 네가 이승하를 대신해 영원히 이곳에 남아 있어야 한다.” 서유의 눈동자가 어두워졌고, 상철수는 그녀를 지나쳐 상연훈을 바라보며 말했다. “넌 감금실에 들어가 있어라. 내가 이승하를 처리하고 나면, 그때 풀어주마.” 상철수가 이승하를 처리하겠다는 말에 서유의 억눌렀던 분노가 불길처럼 치솟았다. “당신이 복수하려는 대상은 S 조직이고, 승하 씨는 그것과 아무 관련도
김해 삼역 외곽, 헬리콥터가 잔디밭에 조용히 착륙했다. 조종석의 정장을 입은 남자는 뒤돌아 눈을 감고 있는 남자를 향해 말했다. “어르신, 하차하시고 환승 준비하시죠.” 언제나처럼 짙고 길게 내려온 속눈썹이 서서히 올라가며, 차가운 살기가 눈동자에서 번져 나오자 정장 남자는 목덜미가 서늘해지더니 곧바로 시야가 흐려지며 조종대에 고꾸라졌다. 이승하는 무표정하게 손을 거둔 뒤, 셔츠 위쪽에 매고 있던 넥타이를 풀어 손가락에 감으며 헬리콥터에서 천천히 내렸다. 그를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비행사들이 그가 정장 남자를 제압한 모습을 보고 일제히 그를 둘러쌌다. 이승하는 손가락에 감아놓은 넥타이를 풀고 주먹을 꽉 쥔 뒤,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다가오는 이들을 향해 맹렬히 주먹을 날렸다. 그는 다쳤음에도 불구하고 루드웰에서 나온 이들을 순식간에 제압하며 단 한 순간도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쓰러진 비행사를 발로 밀어낸 그는 얼음같이 차가운 눈빛으로 주변을 스캔하며, 손에 감겨 있던 넥타이를 풀고 다시 헬리콥터를 향해 걸어갔다. 그는 조종간을 잡아 일련의 동작으로 헬리콥터를 공중으로 띄우며 김해 삼역을 빠져나갔다. 떠오르는 헬리콥터에서 낡은 검은 넥타이가 한 줄기 바람을 타고 떨어졌다. 그 넥타이를 바라보던 쓰러진 비행사들은 반쯤 정신을 차리며, 핸드폰을 들어 모니터링실로 전화를 걸었다. “보스, 이승하가 도망쳤습니다.” 통제실에 있던 이들은 그 소식을 듣고 모두 잠시 시선을 상철수에게 돌렸다. 그러나 그가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 “도망가게 놔둬.” 그는 호랑이를 산으로 돌려보내야 일망타진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나씩 처리하는 것은 너무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들 뿐이었으니까. 이승하는 헬리콥터를 조종해 김해 삼역을 벗어나면서도, 뇌에 심어진 칩이 반응하지 않는 걸 느끼며 상철수가 일부러 자신을 풀어줬음을 직감했다. 그는 상철수가 능수능란한 계략가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서 있는 이승하를 본 소수빈과 소지섭은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동시에 차 문을 열고 이승하를 향해 달려갔다. “대표님!” “대표님!” 두 남자가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 이승하는 살짝 감동했지만, 다리가 저절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이승하의 후퇴에 당황한 소수빈과 소지섭은 동시에 발걸음을 멈췄지만, 여전히 눈물을 머금고 빛 속에 서 있는 이승하를 바라봤다. “대표님,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정말 너무 잘 됐습니다. 저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릅니다!” 이승하는 두 사람을 몇 초간 바라보다가, 길게 뻗은 손가락으로 소수빈과 소지섭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미안해. 걱정시켜서.” 늘 변함없는 차분한 목소리와 어깨 위에 닿은 손길이 이상하게도 소수빈과 소지섭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그가 돌아온 이상, 어떤 문제라도 해결될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사람이 많은 공공장소라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기 어려웠던 두 사람은 이승하를 안내해 검은 차량으로 데려가 문을 열었다. 이승하가 타자 그들은 각각 운전석과 조수석에 탑승해 빠르게 차량을 출발시켰다. 차 안에서 소수빈과 소지섭은 반년 동안 이승하를 찾지 못해 애태웠던 심정을 차례로 토로하며, 누가 더 그를 걱정했는지를 두고 다투기 시작했다. “분명 내가 대표님을 더 걱정했어!” “무슨 소리야! 대표님을 제일 걱정한 건 나라고!” 뒷좌석에서 두 사람의 말다툼을 듣던 이승하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비로소 그가 살아 돌아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 미소도 잠시, 그의 마음속에서 메아리치는 한마디가 마음속에 깊이 파고들었다. 이번엔 정말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서유의 말이 그의 기쁨을 순식간에 어두운 심연으로 끌어내렸다. 그녀를 잃고 얻은 생존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이 생각에 마음이 쓰라리고, 허벅지 위에 얹어 놓았던 손가락이 저절로 꽉 쥐어졌다. 백미러를 통해 그의 변한 표정을 엿본
반년 만에 살아 돌아온 이승하를 본 주태현은 나이 든 얼굴에 감격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도련님,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저는 도련님께서...” “저는 괜찮아요.” 이승하는 손바닥을 들어 주태현의 어깨를 두드리며 간단히 그를 안심시킨 후, 곧바로 서재로 들어갔다. 이승하가 바쁜 듯 보이자 주태현은 더 이상 방해하지 않고, 마음을 다잡은 뒤 주방에 요리를 준비해 달라 부탁하고는 학교에 있는 연이를 데리러 나갔다. 이승하와 서유가 집을 떠난 후, 연이는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꺼냈다. 어른들이 겪은 일은 위험했지만 주태현은 아이가 걱정할까 봐 출장을 갔다고 둘러댔다. 그러나 연이는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똑똑해서, 출장 간 사람들이 전화나 영상 통화조차 할 수 없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더 이상 감출 수 없던 차에 이승하가 돌아와 주태현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연이도 안심시킬 수 있게 됐다. 이승하는 머릿속의 칩에 대한 문제를 소수빈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그런데 소수빈이 뒤따라 서재에 들어오자 그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소 비서, 난 이미 무사히 돌아왔으니 가족 곁으로 가서 아내와 아이를 돌봐.” 이승하가 떠난 동안, 소수빈은 아버지가 되었고 갓 태어난 아이와 산후의 아내에게는 남편의 보살핌이 필요했다. 하지만 소수빈은 떠나려 하지 않았다. “대표님, S 멤버들을 이끌고 복수를 하려면 많은 준비가 필요하실 겁니다. 저도 일을 나눠 맡게 해 주십시오.” 이승하는 잠시 고민하다가 책상 앞에 걸음을 옮겼다. 종이에 S 조직 전 소속인 ‘darkness’와 정여희의 이름을 적은 뒤, 이를 찢어 소수빈에게 건넸다. “이 조직이 왜 정여희를 죽이려 했는지 자세히 조사해.” “네!” 임무를 받은 소수빈은 즉시 메모를 받아들고 서재를 나갔다. 소수빈이 사라지자 이승하는 자신의 큰 체구를 소파에 기대며, 반년 동안 팽팽하게 긴장했던 신경이 조금씩 풀려나가는 걸 느꼈다. 하지만 잠시의 여유도 가질 새 없이, 그는 곧바로
가늘고 긴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빠르게 움직이며, 화면 속 코드가 처음의 암호화를 하나씩 돌파해 나갔다. 그러나...프로그래밍 작업 도중, 이연석은 칩 프로그램이 하나에서 둘로 나뉘는 것을 보고 직감적으로 이승하를 쳐다보았다. “형, 이건 해커 목록에서 본 적 있어. 사람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 사용된다고 하던데, 이걸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옆에서 손을 모아 차분히 앉아 있던 이승하는 살짝 눈길을 돌려 의문에 찬 이연석을 바라보았다. “내 머릿속에 있어.” 그 한마디에 이연석은 심장이 멎을 듯했고, 마치 독사에 발목을 물린 듯, 차가운 공포가 온몸을 타고 올라왔다. “형, 이건 치명적인 살인 무기라던데. 어떻게 형 머릿속에 이런 게 들어가 있을 수가 있어!”이연석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반면, 이승하는 의연하고 차분한 얼굴로 그저 사실을 전달할 뿐이었다. “이미 들어와 있는 걸 어쩌겠어. 네가 할 일은 이 시스템들을 멈출 수 있는지 말해주는 것뿐이야.” 이승하는 스스로 큰 고통을 겪으면서도, 언제나 무심한 듯 모든 것을 감내해 왔다. 이러한 성격 탓에 사람들은 그가 무적이라고 생각하고 그의 고통을 헤아리려 하지 않았다. 그런 이승하를 이해하는 사람은 오직 이연석뿐이었다. 그는 타이핑하던 손을 멈추고 조심스레 이승하의 머리 위로 손을 얹었다. 비록 상처가 보이지 않았지만, 이연석은 머릿속에 칩을 삽입하는 고통이 얼마나 클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마치 형을 위해 울 것 같은 눈빛으로 이승하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형, 많이 아프지?” 이승하는 다른 사람의 손이 머리를 만지는 것을 꺼렸지만, 이번만큼은 이연석의 진심 어린 위로에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의 손길을 잠깐 허락한 뒤, 곧 손을 멈추게 했다. “난 여전히 S를 이끌고 루드웰로 돌아가야 해. 그러니 내 머릿속의 감시, 위치 추적, 폭발 시스템을 최대한 빨리 해제해줘.”통제에서 벗어나야만 상철수와의 이 싸움에서 S를 이끌고 완전한
이연석은 충격에 빠진 채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러니까 칩이 형 머릿속에 들어온 순간부터 이미 죽음이 예정된 거라는 겁니까?” 그의 분노에 찬 질문에 의사들은 침묵했다. 그러나 이연석은 갑작스럽게 폭발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신들은 우리 집안에서 돈을 써가며 지원해 준 최고급 의사들이잖아요! 어떻게든 칩을 제거해서 형을 치료해 줘야 할 거 아닙니까!” 의사들은 그의 분노가 이해가 되지만, 고개를 숙여 수석 자리에 앉아 말없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이승하를 바라보았다. “대표님, 저희 실력으로는 칩 제거 수술이 가능하긴 하지만 생명에 큰 위험이 따르기에 정말 추천 드리지 않습니다.” 의사의 말을 잠시 응시하던 이승하는 몇 초간 침묵 후,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늘 있었던 일은 누구도 입 밖에 내지 마세요.” 이연석은 형의 이러한 체념에 가까운 반응에 얼굴을 찌푸렸다. “형, 이 의사들로 안 되면 다른 의사들한테 부탁해 봐. 수술할 수 있는 의사가...” 이승하는 냉정한 목소리로 그의 말을 끊었다. “칩에 바이러스가 있다는 걸 발견한 것만 봐도 이 사람들이 최고의 의사라는 건 분명해. 더 이상 이 사람들을 곤란하게 하지 마.” 이승하는 고개를 들어 의사들에게 손짓했다. “이제 그만 나가 보세요.” 명령을 받은 의사들은 서류와 스캔 결과물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 앞에 다다른 수석 의사는 문을 열기 직전 잠시 멈춰 섰다. 그리고 이승하를 돌아보며 신중하게 당부했다. “대표님, 일상생활에서 특히 두뇌 휴식에 신경 써주시고, 절대 머리에 충격을 주지 않도록 주의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뇌종양이 재발할 우려가 큽니다. 만약 재발하게 된다면 단순 뇌종양이 아니라 뇌암으로 발전할 확률이 매우 큽니다. 꼭 조심하세요.” 그 말을 듣자 이연석은 책상을 내리치며 외쳤다. “어서 나가요! 제대로 치료도 못 하면서 형을 저주하기나 하고!” 의사들은 그의 마음을 이해하며 더 이상
김종수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루드웰의 신호가 차단돼 있어서 지금은 안에 있는 사람과 연락이 닿지 않네.”이승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가 돌파구를 찾는 동안 상철수도 그에 맞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현재는 누가 먼저 공략할지가 관건이었다. 서유를 미리 구할 수 없다면 폭파 시스템부터 해결해야 한다. 상철수가 그의 생명을 통제할 수 없게 되면 분명 서유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을 마친 그가 전화를 끊고 이연석을 쳐다보았다.“폭파 시스템을 정지시킬 수 없다면 폭파 시간을 늦춰봐.”시뮬레이션하고 있던 이연석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로 입을 열었다.“조금만 시간을 더 줘요.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프로그램 정지시킬 테니까.”프로그램을 정지시키는 것은 물론 도청 시스템이나 위치추적 시스템처럼 폐쇄한 뒤 다시는 작동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코드를 두드리면서 그는 생각에 잠긴 듯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앉아 있는 이승하를 훑어보았다. 둘째 형한테 형수가 K국으로 가서 가족을 만났던 사실을 얘기할 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둘째 형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루드웰에서 형수를 만났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형이 전화 통화를 하는 걸 듣지 않았다면 그는 아직도 루드웰의 보스가 둘째 형수의 외할아버지라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고 둘째 형수가 루드웰에 갇혔다는 사실은 더더욱 몰랐을 것이다.서유의 상황을 생각하면 이연석도 많이 걱정되었다. 그러나 상철수가 형수의 외할아버지이니 가족을 해치지는 않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이런저런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이승하의 담담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내 머리 안에 칩이 있다는 사실을 가혜 씨한테 얘기하지 마.”흠칫하던 그는 모니터 너머로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승하를 쳐다보았다.“가혜 씨가 알면 형수한테 얘기할까 봐 그래요?”대답이 없는 걸 보니 맞는 것 같았다. 그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형, 형수가 알면 형 생각을 얼마나 하겠어요? 아는 게 좋은 거 아닌
상철수의 그 말에 조종자들은 한껏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그렇게 빨리요?”그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도청도 안 되고 위치추적도 안 된다고 폭파 위험도 사라졌으니 나 같아도 당장 복수하러 달려올 것이다.”게다가 서유가 이곳에 있는데. 서유를 위해서라도 이승하는 당장 움직일 것이다.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은 이승하 쪽의 해커가 폭파 시스템을 수정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상철수는 프로그래머 중 한 명을 밀어내고 직접 자리에 앉아 상대방이 설치한 까다로운 암호 시스템을 손쉽게 해제하고 빠른 속도로 폭파 시간을 단축시켰다. 한편, 컴퓨터 앞에 앉아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이연석은 여렵게 연장한 시스템 폭파 시간이 또다시 변하는 것을 보고 불같이 화를 내며 코드를 연속 두드렸다. 얼마 지나서 않아 폭파 시간이 또 연장되었고 상철수는 다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 녀석 참 대단하네. 여기 있는 자네들보다 훨씬 나아.”조종자들은 해커의 실력이 뛰어난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저 그들이 무사히 물러날 수 있을지에만 신경 쓰고 있다.“형님, 이승하가 내일 쳐들어온다면 저희도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외곽에만 폭탄을 설치해서 되겠습니까?”그들은 내부에서 S 조직의 헬기가 언제 오는지 확인한 다음 폭탄 작동 키를 누를 수 있었고 그와 동시에 그들은 그곳에서 대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정도의 폭탄으로는 S 조직의 사람들을 모조리 죽일 수는 없을 것이다.불안해하는 조종자들과 달리 상철수는 담담한 모습이었다.“다섯째, 신호를 보내 김종수한테 알리거라. 사람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 있다가 폭탄이 터진 후 S 조직을 사살하라고.”평소 김종수와 친하게 지냈던 다섯째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형님, 우리만 철수하고 김종수를 남겨두고 S 조직과 싸우게 하는 게 김종수한테는 죽으라는 것과 다름없습니다.”상철수는 다섯째 어르신을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보았다.“잊었는가? 김종수가 돕지 않았다면 이승하는 그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