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은 아직도 흐리멍덩하지만 몸의 감각은 자연히 느낄 수 있었다. 귓가에서 전해진 그의 뜨거운 숨결을 느끼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머릿속이 하얘졌다. 열기는 식었지만 남자의 품에 안겨 있는 몸이 가볍게 떨렸고 얼굴빛의 홍조는 사그라지지 않았으며 눈빛은 여전히 흐리멍덩하였다. 그녀의 모습을 보고 그는 그 감정을 느낄 수가 있었지만 모른 척했다. 다시 그녀의 허리를 꼭 껴안고는 그녀를 자신의 몸 위에 엎드리게 하였다. “제대로 못 느낀 거 같은데. 다시 한번 해요.”섹스할 때 그녀가 위에 있는 자세가 좋았다. 그러나 지금 술에 취한 그녀한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그녀의 허리를 잡고 키스를 퍼부었고 잠시 후 욕조에 누워있던 그녀를 끌어올려 수건으로 마구 감싼 뒤 그녀를 끌어안고 욕실을 나섰다. 푹신한 침대에 그녀를 눕히고 혈기 왕성한 그가 그녀의 볼을 잡고는 똑바로 눈을 떠보라고 했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요?”그녀는 눈을 들어 눈앞의 남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알아봤다는 말도 알아보지 못했다는 말도 없이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한 손을 그녀의 머리 위로 올리고는 익숙하게 그녀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기억해요. 나 이연석이에요.”말을 마치자마자 그가 머리를 숙이고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마치 맹수가 사냥감을 약탈하는 것처럼 미친 듯이 압박해 왔고 물러설 수 없었던 그녀는 온전히 그를 받아들였다. 이런 쪽으로는 참 능숙한 사람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또다시 온몸이 뜨거워졌고 그의 아래에 깔린 몸은 떨림을 멈출 수가 없었다.그녀는 그의 목덜미를 감싼 채 상처 입은 토끼처럼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듯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그가 세게 몰아붙이면 자신을 구렁텅이에서 끌어낼 수 있을 것 같았고 조금만 망설이면 죽을 만큼 괴로운 것 같았다. 미친 듯이 그를 원했고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그는 연을 날리듯 그녀를 묶은 줄을 잡고는 힘껏 조였다가 부드럽게 풀어주었고 그녀가 먼
새벽에 되어서야 잠이 든 두 사람,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 질 무렵이었다.술기운이 가신 그녀는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을 참으며 노현정을 부르려다가 실수로 입술이 남자의 딱딱한 가슴에 닿았다. 따뜻한 감촉에 놀라 그녀는 고개를 번쩍 들었고 희미한 시선 속에 잘생긴 얼굴이 나타났다. 누구인지 똑똑히 확인해 보던 그녀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이때, 창밖으로 저녁노을이 들어와 그의 매끄럽고 하얀 피부에 내려앉았다. 옅은 붉은빛이 그를 비추자 눈을 감고 있는 그의 모습은 천사 같아 보였고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 얼굴을 따라 아래로 시선을 돌리니 선명한 복근과 우뚝 솟은 남자의 그것 그리고 늘씬한 허벅지가 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은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고 있었고 남자의 큰 손은 그녀의 허리에 얹혀 있었고 남자의 그것은 그녀의 두 다리 사이에 끼어있었다. 그녀는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눈을 가린 뒤 다른 한 손으로 허리에 놓여있는 그의 손을 떼고는 날렵하게 이불을 들추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 순간 옆에 놓인 타월을 집어 들어 재빨리 몸을 감싼 뒤 다시 고개를 돌려 단잠에 빠져있는 그를 쳐다보았다. 어젯밤은 꿈이 아니었다. 정말 그와 잠자리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그게 몇 번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아랫배와 다리에서 엄청난 통증이 몰려왔다. 미친 듯이 서로를 탐했던 모습들을 떠올리며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붉혔다. 욕실로 뛰어 들어가 수도꼭지를 틀고는 머리를 물속에 파묻었다.찬물의 온도를 빌려 자신을 진정시킨 후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때렸다.그러게 술은 왜 마셨어? 이제 어떡할 거야? 결국은 사고를 치고 말았잖아.물방울이 잔뜩 묻은 얼굴을 들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온몸에 울긋불긋한 흔적들로 가득했고 목덜미 아래로는 온전한 곳이 없었다. 어젯밤 두 사람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알 수 있었다. 비록 몸은 온통 붉게 묻들었지만 얼굴은 광채가 났다. 역시 남
거울을 통해 그가 하반신을 가리는 것을 보고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자신을 향해 그가 걸어오는 모습에 그녀는 엄청 당황스러웠다.어젯밤의 일이 없었더라면 예전처럼 그를 태연하게 대할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느낌이 이상했고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숨을 죽이고 그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봤다. 그의 큰 손이 그녀의 가는 허리를 감싸며 등 뒤에서 그녀를 꼭 껴안았다.그녀는 몸이 굳어졌지만 그는 자연스럽게 턱을 그녀의 어깨에 얹었다.“어젯밤에는 당신이 먼저 날 건드린 거예요. 당신이 먼저 유혹한 거니까 당신이 책임져요.”뭐? 내가 먼저 유혹했다고? 정말 내가 먼저 유혹한 걸까?얼굴이 붉어진 그녀가 입을 열었다.“술에 취해서 기억이 없어요...”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으니까 자신에게 책임을 묻지 말라는 뜻이었다.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더니 그녀의 봉긋한 가슴을 덥석 움켜쥐었다. 그녀는 점차 몸이 나른해졌고 힘을 잃어갔다. “기억이 안 나면 다시 기억나게 해줄게요”긴장된 탓인지 침을 삼키던 그녀가 거침없이 자신을 탐하고 있는 손을 덥석 잡았다.“그럴 필요 없어요.”그녀는 그가 함부로 만지지 못하게 그의 손을 꽉 잡고는 그를 돌아보았다. “말해요. 어떻게 책임질까요?”그녀의 말에 그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나랑 결혼해요.”결혼?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결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이연석과의 결혼은 더더욱 싫었다. 그녀는 싫은 표정이었다. 조금은 슬펐지만 모른 척하면서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잡고 눈을 마주 보았다. “가혜 씨, 어젯밤에 나랑 결혼하겠다고 약속한 거 잊었어요? 왜요? 이제 와서 번복하고 싶어요?”내가 약속을 했다고?내가 이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약속을 했다고?그녀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줄 알고 그가 일부러 헛소리한 것이 틀림없다. “술김에 한 말이니까 믿지 말아요.”술에 잔뜩 취한 사람이 한 허튼소리니까 믿을 수 있나?그러나 이연석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계속해서 그녀를
그는 행복해서 죽을 것 같은데 정가혜의 쪽은 상황이 전혀 반대였다. 그녀가 얼굴을 가린 채 안방 문을 열었다.“아주머니, 어젯밤에 나 좀 깨우지 그랬어요...”나이가 든 노현정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떠올랐다.“저기 그게... 어떻게 부르겠어요?”어젯밤 소리를 듣고 이연석이 그녀를 괴롭히는 줄 알고 급히 안방으로 달려갔다. 근데 문손잡이에 손을 대자마자 안에서 정가혜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나이가 들었지만 노현정은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민망해졌다. 두 사람 사이가 좋아졌다는 생각에 더 이상 방해하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 이렇게 부끄러워하는 정가혜를 보니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아직 이연석 씨를 좋아하고 있잖아요. 두 사람 잘 지내요.”그 말에 정가혜는 노현정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돌려 욕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마음속에 아직 그가 있었기 때문에 어젯밤, 상대가 그 사람인 것을 알고 거절하지 않았던 걸까?초반에는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취했었지만 토하고 나니 확실히 정신이 좀 들었고 눈앞의 사람이 이연석이라는 알아봤다. 그래서 무방비 상태였던 걸까? 그가 다가오는 걸 내버려둔 것일까? 다른 사람이었다면 아마 가까이 오지 못했 것이다. 한참을 생각하던 그녀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람이 이연석이기 때문에 그녀가 받아들인 것이었다. 다만... 결혼을 하겠다고 한 말이 과연 진심일까?“가혜야.”서유의 목소리가 그녀의 엉뚱한 생각을 멈추게 했다. 그녀는 재빨리 몸을 돌려 계단을 향하고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얼른, 얼른 옷 좀 가져다줘요.”노현정은 서둘러 드레스룸으로 들어갔고 급한 마음에 겨울 코트를 꺼내왔다.가뜩이나 이상한 데 이런 코트까지 입으니 더 수상해 보였다. 서유는 그녀에게 몇 번이나 전화를 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고 주서희의 일을 겪으면서 트라우마가 생긴 서유는 이곳으로 헐레벌떡 달려왔다. 요즘 계속 술에 취해 있는 정가혜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근데 위층으로
이연석에게서 전화가 걸려 오자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통화 거절 버튼을 눌렀다.전화를 무시당한 이연석은 또다시 전화를 걸었다. 안색이 어두워진 그가 전화를 받았고 상대방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가 호통쳤다.“꺼져.”그의 호통에 이연석은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져 버렸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다시 핸드폰을 집어 이승하에게 문자를 보냈다.[형, 나 지금 가혜 씨 집인데 입을 옷이 없어요. 한 벌만 보내줄래요?]그 말인즉, 뜨거운 밤을 보내서 옷까지 찢어졌다는 뜻이었다. 핸드폰 액정을 힐끗 쳐다보던 이승하는 참지 못하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한편, 이연석은 몇 분 동안 기다렸지만 여전히 답장이 없었다.그는 또다시 핸드폰을 들어 가족 단톡방을 열어 이승하를 태그했다. [형, 얼른 내 문자 좀 읽어요.]이승하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대답이 없자 이연석은 단톡방의 모든 사람을 태그했다.[형들, 둘째 형 좀 불러줘요. 형한테 급한 볼일이 있단 말이에요.]넷째 이동하가 물었다.[무슨 일인데?]누군가 답장을 보내자 이연석은 급히 또 문자를 보냈다.[나 결혼해요.]...결혼을 하는데 둘째 형과 무슨 상관인 거야?이동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승하는 잘 알고 있었다. 이놈이 자랑을 하고 싶은 것이라는 걸.형들의 문자 세례를 기대하고 있었건만 이때 이승하가 문자 하나를 보내왔다.[차단해.]단톡방 개설자였던 이승연은 이승하가 어이없어하는 걸 눈치챈 것인지 이내 이연석을 차단해 버렸다. 단톡방에서 쫓겨난 이연석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셀카를 찍은 후 모멘트에 올려 형들을 태그했다.[형들, 나 결혼해요. 프러포즈 기획안 보내줘요.]이연석이 없는 단톡방에 셋째 이윤재가 문자를 보내왔다. [연석이 왜 저래?]넷째 이동하: [약 잘못 먹은 거 아니야?]아프리카에 있는 다섯째 이연준: [약 잘못 먹은 게 분명해. 누가 쟤한테 시집을 오겠어?]거의 문자를 하지 않던 여섯째 이동준마저도 문자를 보내왔다.[연석이가 결혼
이승하는 서유의 말을 듣고 서유는 정가혜의 말을 듣는다. 그가 정가혜를 설득하면 모든 발언권을 얻는 셈이니 두려울 게 없었다.이런 논리로 생각을 정리한 이연석은 용기를 내어 전화를 끊고 몸을 돌렸다.이연석이 돌아서는 순간 민첩한 이승하가 재빨리 차 문을 열었다.침실 문이 열리는 찰나, 서유가 고개를 돌렸다. 누가 나오는지 제대로 보기도 전에 커다란 손이 그녀의 눈을 가렸고 이어서 귓가에 차갑고 멋진 목소리가 들렸다.“보지 마. 눈이 멀 수도 있거든.”“...”눈이 가려진 서유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옷을 제대로 입지 않은 이연석을 보는 게 싫은 모양이었다.‘하지만... 한 번 보고 눈이 멀 정도라면 가혜는...’갑자기 뛰쳐나온 이연석을 본 정가혜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물들었다. 그녀는 이연석을 방으로 밀어넣으며 투덜거렸다. “안에 있으라고 했잖아요, 왜 나왔어요?”이연석은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뭐 눈을 오염시키는 물건도 아니고, 왜 나오면 안 돼요? 게다가...”말을 마치기도 전에 힘을 꽉 준 정가혜에게 세게 밀려 방으로 들어갔다.그를 가두고 문고리를 잡은 정가혜는 돌아서서 서유와 이승하를 바라보았다.“어젯밤에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이에요!”이승하는 무표정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그 시선에 온몸이 오싹해진 정가혜는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서유야, 응접실에서 좀 앉아 있을래?”서유는 이 말을 듣자마자 이승하의 손바닥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그래.”어색한 분위기를 풀려고 한 말이었는데, 서유가 대답할 줄은 몰랐다. 어쩔 수 없이 정가혜는 얼굴을 가리고 아래층으로 향했다. “따라와...”도망치듯 내려가는 정가혜의 뒷모습을 보며 서유는 ‘푸핫’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여보, 난 가혜랑 잠깐 얘기하고 갈게요. 당신은 차에서 기다려요...”이승하의 차갑고 담담한 눈동자가 침실 문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당신은 가봐. 난 여기서 연석이가 나오길 기다릴 거야.”문 안에서 몰래 엿듣고 있던 이연석은 이 섬뜩
정가혜는 서유의 맑은 눈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 꽉 쥐었던 손을 천천히 펴며 말했다. “만약 연석 씨가 정말로 프러포즈한다면 아마 받아들일 것 같아...”그녀는 거의 강간당할 뻔했으니 이런 일에 트라우마가 있어야 했는데, 어젯밤에는 그 장면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고 오히려 이연석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흔히 말하듯 몸이 마음의 변화를 가장 잘 반영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녀의 몸이 이연석을 좋아한다는 건 그녀의 마음속에서도 이연석을 놓지 않았다는 뜻이었다...여전히 좋아한다면 한 번 더 빠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지도 모른다.왜 ‘빠진다’고 표현했는지는 정가혜 스스로도 잘 몰랐다. 이연석과 함께하면 그다지 안전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결혼한 뒤 그가 싫증을 내고 그녀를 내치면 어쩌나, 두 번째로 버림받은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지... 그런 두려움이 있었다.정가혜의 마음 속 깊은 곳엔 두려움이 있었지만 주서희가 남긴 유언도 이연석에게 한 번 기회를 주라는 것 같았다.주서희는 절대 그녀를 속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정가혜가 이연석의 청혼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서유는 살짝 미소 지었다. “그럼 도련님의 좋은 소식을 기다려봐야겠어.”두 사람이 막 화해했으니 좀 더 시간을 보내야 할 거라고 생각한 서유는 더 이상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도련님이 승하 씨 때문에 겁먹어서 나오지 못하고 있어. 우리가 가면 두 사람이 좀 더 이야기 나눌 수 있겠네...”“무슨 할 얘기가 있다고...”정가혜는 입으로는 그렇게 투덜거렸지만 입 꼬리에는 그녀 자신도 모르는 희미한 미소가 서려 있었다...서유는 그 모습을 보고도 아무 말 없이 돌아서서 2층으로 향했고, 이승하를 데리고 나왔다.차에 탄 이승하는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듯했다. “결혼식 끝나면 저 녀석을 Y국으로 보내야겠어...”서유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겨우 사랑을 얻었는데 좀 자랑하게 해줘요. 너무 앙심 품지 말고...”이승하는 그녀의 안전벨트를 매주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정가혜는 코니세그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본 후 다시 침실로 돌아왔다.안에 있던 이연석은 마치 모델처럼 통유리창 앞에 서서 꼼짝도 않고 아래층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떠나는 차를 바라보고 있었다...정가혜는 그 모습을 보고 가볍게 기침을 했다. “이미 갔어요. 연석 씨는 언제 갈 거예요?”승리를 거둔 것처럼 눈부시게 웃고 있던 이연석은 목소리를 듣자마자 황급히 웃음을 거두고 정가혜를 향해 돌아섰다.그녀가 옷을 단정히 차려입은 것을 보고 살짝 눈을 찡그렸다. “입을 옷이 없는데, 하룻밤 더 묵게 해주면 안 돼요?”눈빛에 어떤 감정이 서려 있는지 명확하진 않았지만 정가혜는 그의 말 속 의도를 알아차렸다.그녀는 못 본 척하고 돌아서서 침실 옷장을 열고 남성용 옷 한 벌을 꺼내 이연석에게 건넸다.그녀 방에 다른 남자의 옷이 있는 것을 본 이연석은 얼굴색이 어두워졌지만 지금 자신에게 따질 자격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어 이를 악물고 거절했다.“조금 있다 비서에게 옷을 가져오라고 할게요.”다른 말로 하면, 다른 남자의 옷은 입지 않겠다는 뜻이었다.정가혜는 그를 흘깃 보고는 셔츠를 펼쳐 칼라를 들추고는 이연석의 눈앞에 들이밀었다.브랜드를 보자 이연석은 속으로 기뻐하며 재빨리 손을 뻗어 받았다. “내 옷을 아직도 갖고 있었어요?”정가혜가 이연석에게 모든 걸 돌려준 날 뭐에 홀렸는지 옷 한 벌을 남겼다. 아마도 기념품으로 남기고 싶었나 보다. 하지만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다. 그녀는 이연석의 옷을 몰래 간직했다는 사실은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아주머니가 포장하는 걸 깜빡하셔서 한 벌만 남았어요.”이연석은 정가혜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녀가 피하지 않자 그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그는 그저 손을 뻗어 옷과 함께 그녀를 품에 안았다.두어 번 몸부림쳤지만 이연석의 힘이 너무 세서 빠져나올 수 없었던 정가혜는 그가 몸을 숙이고 자신의 귓가에 다가오는 것을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가혜 씨가 날 잊지 못해서 남긴 옷이라고 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