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어떤 일인데요?”주서희가 갑자기 냉소를 지었다.“고모가 사람들을 시켜 나를 집단 강간한 게 작은 일이라도 돼요?”송문아는 주서희의 태도를 보고 얼굴을 굳혔다. “내가 이미 말했잖아. 그때는 정신이 없어서 그랬지 고의가 아니었다고.”‘고의가 아니었다고? 정말 날 바보 취급하는군.’주서희는 송문아에 대한 마지막 남은 정도 완전히 사라졌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송문아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살인을 안 했다고 하셨죠. 그럼 최우진은 어떻게 죽은 거예요?”송문아의 얼굴색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옆에 조용히 앉아 있는 소찬우를 노려보았다.‘이 망할 놈이 아니었다면 서희가 이 일을 알아차릴 리가 없었을 텐데.’“우진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송문아는 절대 인정하지 않을 것이고 주서희도 딱히 상관없었다.“제가 알아낼 거예요.”송문아는 이 말을 듣고는 더 이상 숨기지 않고 냉소를 지었다.“알아냈다고 치자.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니?”“알아내면...” 주서희는 붉어진 눈을 가늘게 뜨고 밖의 뜨거운 태양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직접 당신을 감옥에 보내겠어요.”송문아는 주서희에게 그런 능력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고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그래, 알아내 봐. 네가 알아낼 수 있다면 말이야.”최우진은 뇌졸중으로 쓰러진 거고 그녀는 단지 산소 호흡기를 뽑았을 뿐이었다. 아무도 보지 못했는데 주서희가 어디서 알아낸단 말인가. 죽은 사람이 말하지 않는 한, 그녀가 알아낼 수 있을 리 없었다.주서희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가방을 들고 나가려 했지만 송문아가 가로막았다.“서희야, 이왕 왔으니 식사라도 하고 가렴. 고모가 그동안 너한테 잘해준 건 진심이었어...”그녀는 여전히 시간을 벌려고 했다. 주서희가 이미 그녀를 증오하고 용서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붙잡으려 한 것은, 이 기회에 자신이 했던 일들의 흔적을 지우려는 속셈이었을 것이다.주서희는 절대 남아있지 않으려 했다. 가방을 꽉 쥐고 자신 앞을 막고 선 송문아
송문아는 소준섭이 주서희를 찾지 못해 미친 듯이 자신에게 와서 주서희를 어디로 보냈냐고 따져 묻던 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송문아는 모른다고 했다. 당시에 그녀도 정말 주서희가 누구에 의해 구출되었는지 몰랐다. 소준섭은 그녀가 거짓말하는 것 같지 않아 보이자, 주서희가 스스로 떠난 것이라고 생각했다.소준섭이 건달들을 시켜 주서희를 위협하고, 그녀가 집단 강간을 당하고, 임신하고, 감염되고, 낙태하는 등 온갖 고통을 겪게 했으니, 주서희가 그를 다시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도 이해할 만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소준섭은 더 이상 주서희를 찾아다니지 않았다. 아마도 주서희가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면 새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둘이 다시 만난 건 10년 후였다. 그 10년 동안 소준섭도 많이 성장했고 아마도 주서희를 생각해서인지 그녀에게 더 이상 냉담하게 대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때 소찬우가 태어났고, 소찬우의 상속권을 위해 송문아는 메시지를 보내 소준섭에 대한 주서희의 증오심을 키울 수밖에 없었다. 주서희 역시 소준섭에 대한 미움을 잊지 않았고 심지어 소준섭을 유혹해 사랑에 빠지게 한 뒤 복수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이런 마음을 품은 주서희가 소준섭에게 해명의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았기에, 송문아는 안심했다. 어차피 둘이 서로 다툴 때 자신이 어부지리를 얻으면 그만이었으니까그래서 그녀는 둘이 싸우도록 내버려두었고 가끔 둘의 관계를 부추기기도 했다. 윤주원과 주서희 사이의 일에 대해서도 과장해서 소준섭에게 전했다.그때의 소준섭은 한편으로는 그녀의 자극을 받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서희에게 압박을 받아 상당한 스트레스에 시달렸지만 그래도 여전히 주서희와 결혼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하지만 소정의가 집안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을 허락할 리가 없었다. 생각할 것도 없이 소정의는 소준섭을 감금해 버렸다...그때의 소준섭은 방에 갇혀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면서 그녀의 거짓말까지 견뎌야 했다. 그는 겉으로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소수빈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는 한 손으로 눈앞을 가로막은 송문아를 밀쳐냈다. 그의 힘이 워낙 세서 연약한 송문아는 그 힘에 밀려 바닥으로 넘어져 쿵 소리를 냈다.송문아는 아픔에 얼굴을 찌푸리며 일어나려 했다. 그때 소수빈의 검은 구두가 갑자기 그녀의 흐트러진 원피스를 밟았다. 구두를 따라 시선을 올리자 마주친 것은 악귀 같은 얼굴이었다.소수빈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듯 송문아를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 “먼저 유언이나 준비해 두세요. 돌아와서 다시 얘기하죠.”그는 이 말을 남기고 주서희의 손을 잡아 빠르게 소씨 집안을 떠났다. 저택엔 바닥에 엎드린 채 두 사람이 떠나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는 송문아만이 남았다...잠시 후 송문아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한 명은 그녀가 온갖 방법으로 지켜주려 했던 아들이었고 한 명은 그녀가 직접 키운 조카였다.그런데 감히 이렇게 자신을 대하다니.소수빈은 주서희를 차에 태운 후 그녀를 한 번 쳐다보았다. 얼굴은 창백했고 이마에 식은땀이 맺혀 있었으며 온몸을 떨고 있는 그녀를 보자 소수빈은 가슴이 아팠다.“서희야, 괜찮아?”항상 차분하고 침착했던 주서희는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설마 송문아에게 괴롭힘을 당한 걸까?소수빈이 주서희를 병원에 데려가 검진을 받게 하려는 찰나, 주서희가 떨리는 손으로 가방을 열어 녹음기를 꺼내 소수빈에게 건넸다.“오빠, 부탁인데 이 안의 녹음을 소씨 집안 사람들에게 들려줘요...”그녀는 송문아의 행적을 폭로하고 소준섭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싶었다. 또한 소씨 집안 사람들에게 송문아가 소준섭이 어렸을 때부터 그를 제거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이것만으로도 송문아는 그 집안에 있을 수 없을 것이다...그녀는 송문아가 자업자득으로 구렁텅이에 빠지기를 바랐다. 그리고...“송문아가 최우진을 죽였어요. 오빠가 증거를 찾아 경찰에 넘겨주면 좋겠어요.”이미 녹음을 듣고 있던 소수빈은 주서희의 말에 잠시 놀랐다가 곧 눈 속 깊은 곳에 혐오감이 더욱 짙어졌다
송문아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 개자식 주서희가 가방에 녹음기를 숨겨놓고는 자기가 한 말을 교묘하게 편집해서 언론에 퍼뜨린 것이다. 아들의 상속권을 차지하려고 원래의 상속인을 악랄한 수단으로 괴롭혔다는 내용이었다. 수년간 수도권 상류층에서 쌓아온 그녀의 이미지가 이 한 번의 녹음으로 산산조각이 났다. 귀부인들은 물론이고 온라인에서도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미쳐 날뛰는 악마라고 욕하며 죽으라고, 소준섭을 돌려내라고 소리쳤다.집에 숨어 밖에도 나가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는데 설상가상으로 소정의는 단 한 마디 설명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체면을 구겼다며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녀를 때리기만 했다.송문아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소정의가 자신의 남편이라는 생각에 몇 마디 달콤한 말과 사과만 하면 어떻게든 용서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소정의가 울음을 터뜨렸다.“당신은 알기나 해? 당신이 들어오기 전에 준섭이가 얼마나 착하고 똑똑했는지. 의학적 재능은 물론이고 한번 보면 외우는 능력까지 있었어. 그렇게 어린 나이에 내 컴퓨터 화면의 데이터를 한 번만 봐도 문제가 어디 있는지 알아냈다고. 그런 좋은 아이를 당신이 망쳐버렸어...”소정의는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꼈다.“그때 당신이 건넨 그 술잔을 마시지 말았어야 했어!”그 비즈니스 자리에서의 한 잔의 술이 그를 타락시켰다. 아내와 아이까지 버리고 송문아를 위해 모든 걸 포기할 만큼. 이제 와서 이런 결과를 맞이하니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했다.소정의는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세게 때리고는 등을 돌려 걸어갔다.송문아는 단호하게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바닥을 기어가 그의 바지 끝자락을 잡았다.“여보, 내 잘못이 아니에요. 준섭이를 죽인 건 주서희지 내가 아니라고요!”소정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송문아를 실망스럽게 바라보았다.“서희는 당신 칼이었어.”그 말은 곧 누가 직접 손을 댔든 모두 같다는 의미였다.소정의에게 발로 차여 나뒹군 송문아는 소준섭의
언론을 통제하려 했지만 이씨 집안을 당해내지 못하자, 소정의는 자신을 빼내고 모든 것을 송문아에게 떠넘겼다...순식간에 송문아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는 쥐새끼가 되었고 소씨 가문 사람들도 이 기회를 틈타 소정의에게 송문아를 내쫓으라고 압박했다.소정의는 아직 정을 못 버려 망설이고 있었다. 하지만 경찰이 들이닥쳐 송문아를 체포해 갈 때야 비로소 그는 충격에 빠졌다. 송문아가 자신의 사촌 오빠를 죽였다니!송문아는 끌려가면서 소정의의 발 앞에 무릎 꿇고 그의 바지를 움켜쥐며 울부짖었다. “여보, 살려주세요. 난 사람을 죽이지 않았어요. 빨리 저들을 막아주세요...”놀란 마음을 가라앉힌 소정의는 눈을 내리깔고 울며 일그러진 얼굴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온화한 외모 아래 이토록 독한 심장이 숨어있었다는 걸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저 쉽게 얻을 수 있었던 상속권을 위해 친 사촌을 죽이고 소준섭까지 해치다니...그는 마치 처음 송문아를 제대로 보는 것 같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몸을 굽혀 바지를 꼭 잡고 놓지 않으려는 그녀의 손을 하나하나 떼어냈다. 그리고는 경찰이 그녀를 데려가는 것을 그대로 지켜보았다.송문아는 소정의가 자신을 구해주지 않자 욕설을 퍼부었다. 소정의를 무능하다고, 자기 아내도 지키지 못한다고, 전 부인이 투신한 것도 당연하고 아들이 죽은 것도 당연하다며 입에 담기 힘든 말들을 쏟아냈다. 심지어 소정의의 부모까지 모욕했다...욕설을 퍼붓다 마지막에 송문아는 또 다른 이를 끌어들이려 했다. “저만 잡아가지 말고 그 계집애 주서희도 잡아가세요. 소준섭을 죽인 건 그 애예요. 왜 저만 잡아가고 그 애는 안 잡아가는 거예요!”경찰은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그대로 차에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경찰차가 소씨 가문의 대문을 지나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이로써 송문아라는 바람은 수도의 구석구석을 휩쓸고 지나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웃음거리가 되었다...다만 소씨 가문의 첩 얘기가 나오면 으레 장남 얘기도 따라 나왔다. 그때
소준섭은 세상을 떠났다.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그의 유골도 재로 변해 바람에 날려 흔적조차 사라졌다. 그는 마치 가벼운 바람처럼 이 세상을 잠깐 스쳐 갔을 뿐,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고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은 채 사라져 버렸다.주서희는 그의 유골이 어느 나라 어느 바다에 뿌려졌는지 묻지 않았다. 그저 사진 한 장 없는 묘비만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한참 동안 그렇게 서 있다가 제국 도시에 내린 빗물이 그녀를 적시고, 소수빈이 우산을 씌워주었을 때에야 주서희는 천천히 정신을 차리고는 소수빈에게 말했다. “가요.”그녀는 다시 A시로 돌아와 이전과 같은 바쁜 일상으로 돌아갔다. 병을 치료하고 사람을 구하며, 가끔 소아과에 가서 아이들을 돌보기도 하고 때때로 윤주원을 챙기기도 했다. 그녀는 겉으로는 예전과 다를 바 없이 지냈지만 밤이 깊어지면 약을 먹어야 잠들 수 있었다. 꿈속에서도 소준섭은 나타나지 않았다.주서희가 꿈에서 보는 것은 언제나 자신이 총을 쏘는 장면이었다. 매번 총을 쏠 때마다 꿈에서 깨어났고 깨어난 후엔 자신의 두 손을 멍하니 바라보며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그녀는 약물의 양을 늘렸고 결국 더 이상 꿈을 꾸지 않게 되었다.그러던 어느 날 긴급 환자를 진료하던 중, 주서희는 갑자기 구급차에서 내리는 우아한 모습의 소준섭을 보았다. 그는 생전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까맣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뒤로 빗어 넘긴 채 깨끗하고 단정한 이마가 드러나 있었다. 그의 이목구비는 마치 그림처럼 완벽했고 그 아래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가 있었다.그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는 순간 주서희의 심장은 멈춘 듯했다. 그녀는 경직된 몸으로 그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준섭 씨...” 소준섭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자신보다 한참 작은 주서희를 바라보았다.“나 여기 있어.”그는 그 말을 하며 미소를 지었고 눈웃음이 번져졌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주서희의 눈은 어느새 붉어져 있었다. 그
주서희는 그 광경을 보고 겁에 질려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내지 못한 채 황급히 돌아서서 화장실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엘리베이터도 타지 않고 계단을 뛰어올라 원장실까지 도망쳤다.원장실에 도착해 조금이나마 휴식을 취하고 싶었지만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흰색 정장을 입은 소준섭을 발견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 서 있었고 주서희가 오는 것을 보자 고개를 살짝 돌리며 턱을 들어 그녀에게 신호를 보냈다.“주 원장, 10년 만에 만나는데 여전히 매력적이네...”그 말을 듣는 순간 주서희는 갑작스럽게 무너졌다.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두 팔로 자신을 꽉 끌어안았고 눈물은 마치 끊어진 실처럼 끝없이 쏟아져 내렸다.‘누가 나 좀 구해줘...’하지만 아무도 그녀를 구하러 오지 않았다. 주서희는 그저 자신을 스스로 구해야 했다. 약을 먹고 또 먹는 것이 그녀의 자구책이었다.주서희는 자신이 의사이니, 이것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금만 더 견디면 괜찮아질 거라 믿었다. 그러면 소준섭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것이고 모든 것이 지나갈 거라 생각했다.그러나 그녀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결코 지나가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평생을 이렇게 살게 될 것이고 소준섭은 언제 어디서든 나타나 마치 그림자처럼 그녀 곁을 맴돌았다. 그는 그녀의 일상 속 어디에나 존재했으며 그녀는 한편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듯 일에 집중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환상 속의 소준섭과 나름대로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었다. 가끔은 그 환영과 말다툼을 하기도 했다.그럴 때마다 주서희는 생각했다. ‘만약 소준섭이 살아있었다면 이렇게 평화롭게 서로를 대하지 않았을까?’그러나 안타깝게도 ‘만약’이란 없었다.주서희는 자신이 잘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날 밤 그녀는 소준섭이 침대 머리맡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았다.막 목욕을 마치고 나온 주서희는 그것이 환상일지 아닐지 상관하지 않았다. 그녀
숨이 막혀오는 순간 문밖에서 급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연이어 울리는 쿵쿵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주서희는 대꾸하고 싶지 않았지만 희미하게나마 서유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서희 씨, 문 열어요!”서유와 정가혜는 송문아의 일이 있은 후 여러 차례 주서희를 찾아왔지만 그녀는 늘 괜찮다는 핑계로 그들을 돌려보냈다. 주서희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매일 정상적으로 일하고, 제때 집으로 돌아가 쉬는 등 예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두 사람은 주서희가 이겨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하지만 그날 밤 서유는 아무리 애써도 잠이 오지 않았다. 마음속에 계속 불안함이 스며들어 주서희의 지난 일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주서희가 겪은 것이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어릴 적부터 가까운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고, 커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자기 손으로 죽인 일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이런 일을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서유는 주서희가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모든 고통을 삼키며 결국 무너지게 되어 어리석은 선택을 할까 걱정했다. 그래서 침대에서 급히 몸을 일으켜 대충 옷을 걸치고 주서희를 찾아왔다.이승하도 함께였다. 그는 차 안에서 몸을 기댄 채 서유가 문을 두드리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유가 한참을 두드렸지만 문이 열리지 않자 그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은근한 불안감이 스며들었다.그는 긴 손가락을 들어 차 문을 열려고 하는 순간 문이 열렸다. 주서희가 몸에 수건을 두른 채로 나타났다. 그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물에 젖어 있었고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마치 생사를 넘나드는 싸움을 방금 막 끝낸 사람처럼 병약해 보였다.주서희는 수건을 두른 채로 나왔고 이승하는 의문이 들었으나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시선을 피하며 차 앞쪽만 응시했다.서유는 마침내 주서희가 문을 열자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다급하게 물었다. “서희 씨, 얼굴이 너무 창백해요. 어디 아픈 거예요?”주서희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대로 죽어버리자고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