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준섭은 이 메시지를 보고 차가운 웃음을 띠며 바보 같은 놈이라고 말했다. 그의 아버지가 어머니를 배신했는데 그가 아버지의 안위를 신경 쓰겠는가? 그의 아버지를 가지고 협박하다니 정말로 어이없을 뿐이었다! 소준섭은 휴대폰을 던져버리고 컵 안의 우유를 저은 후에 주서희의 입술 옆으로 내밀었다. “여기 먹을 건 없고 유제품밖에 없으니까 먼저 이것이라도 마시고 배를 좀 채워.” 법원에서 나오고 나서 그를 따라 멀리까지 온 주서희는 계속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마치 엄청난 억울함을 당한 듯 눈에는 빛이 전혀 없었다. 주서희는 입에 넣은 우유는 전부 뱉어내고 말도 하지 않았으며 그를 보지도 않았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새장 안에 앉아 있었다. 그녀에게 힘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나 진정제를 맞았기 때문에 눈을 뜨자마자 거대한 금실 새장 안에 묶여 있었다. 손에는 수갑이 채워져 있었고 발에도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새장 난간 옆에 고정되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소준섭은 그녀가 마시지 않자 화를 내지 않고 그녀의 턱을 잡아 컵 안의 우유를 전부 쏟아 부었고 그러자 주서희는 연달아 기침을 했다. 소준섭은 그저 차가운 눈으로 지켜보다가 그녀가 더 이상 기침을 하지 않자 그제야 손수건을 가져와 젖은 손등을 천천히 닦아냈다. “주서희, 너와 윤주원이 힘을 합쳐 나를 대적하고 강간죄로 나를 감옥에 보내려고 했지. 감옥에 가면 너와 윤주원이 둘이서 함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소준섭은 손을 닦은 후 천천히 그의 커다란 몸을 웅크리고 주서희의 머리카락을 확 잡아 그의 눈앞으로 끌어당겼으며 주서희는 고통에 순간 식은땀이 났다. “내가 말하는데 내가 감옥에 가도 너와 윤주원이 함께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마치 미친 사람처럼 고개를 숙여 주서희의 입술을 물었고 힘이 워낙 세서 단 몇 초 만에 피부가 찢어지고 말았다. 피가 터져 나오자 소준섭은 혀끝으로 그 위를 핥
주서희는 소준섭이 자기를 고통스럽게 하려는 것은 이해했지만 이렇게 복수하는 방식이 결국 자기를 해치게 될 줄은 몰랐다. 지금 그녀가 겪고 있는 일들은 모두 자초한 것이었지만 윤주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데 소준섭은 왜 윤주원에게 그렇게 잔인하게 굴었던 걸까?!윤주원이 맞아서 기절했던 모습이 떠오르자 주서희의 마음이 떨렸다. “소준섭 씨, 이건 당신과 나 사이의 문제예요. 윤주원은 상관하지 말고 그를 좀 봐주면 안 되겠어요?”소준섭은 미친놈이니 뭐든 할 수 있다. 만약 윤주원을 정말 여기로 끌고 온다면 소준섭이 윤주원 앞에서 자신을 모욕할까 봐 걱정되었고 차라리 여기에 갇혀 끝없이 고통 받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그녀의 허리를 꽉 잡은 남자는 그녀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의 귀에 대고 물었다. “나랑 하는 게 좋아, 아니면 그 놈이랑 하는 게 좋아?”주서희는 이 순간 소준섭에게 반항하면 더 미친 복수가 돌아올 걸 잘 알고 있어 속눈썹을 내리깔고 이를 악물고 말했다. “윤주원은 나를 건드린 적 없어요.”사실이기도 했다. 주서희를 건드린 남자는 소준섭밖에 없었으나 소준섭은 믿지 않았고 주서희가 윤주원을 연루시키지 않으려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너 그놈이랑 그렇게 오래 사귀었는데도 한 번도 침대에 올라가지 않았다고? 내가 세 살짜리 애로 보이냐?”주서희는 그의 말을 듣고 더 이상 그를 달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믿든 말든 당신 마음대로 해요그녀는 눈을 다시 감고 그를 무시했고 소준섭은 화가 나서 그녀를 뒤집어 땅에 무릎을 꿇린 채 더 강하게 밀어붙였다.수치스러운 자세로 반쯤 무릎을 꿇고 있는 주서희는 새장 난간을 움켜쥐고 이를 악물며 그가 주는 고통을 견뎌냈다...한때 그녀는 소준섭 오빠가 자신을 사랑해 주길 꿈꿨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와 이런 일을 하는 것이 너무나도 혐오스러웠고 마치 자신이 개처럼 그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고 그의 통제에 의해 완전히 저항할 힘조차 없는 존재가 된 것 같았다.그녀는 이런 자신이
소준섭에게 주서희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다시 그의 곁으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했을 때 세상은 온통 어둠뿐이었다. 차라리 그녀 손에 의해 감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두 사람의 감정을 끝내는 것이 낫다. 그래야 자신도 고통에서 벗어나고 그녀도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어떻게 끝내겠다는 건데요?” 주서희는 고개를 들어 차갑게 소준섭을 응시했다. 끝낼 수만 있다면야 좋겠지만 소준섭은 쉽게 그녀를 놓아줄 리 없었고 끝내기 전에 그녀를 괴롭힐 것이 분명했다. 소준섭은 발을 내디디며 새장으로 천천히 다가갔고 그의 큰 몸이 쭈그려 앉을 때는 마치 조련사처럼 그림자를 드리워 주서희를 무겁고 억압되게 만들었다. 한 사람은 앉아 있고 한 사람은 쭈그리고 앉아 있었으며 두 깊은 눈빛이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셀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정과 애정이 주서희의 분노 어린 표정 속에서 하나도 가치 없어 보였다. 소준섭은 긴 속눈썹을 내리깔고 오랜 고민 끝에 담담히 입을 열었다. “예전처럼 나와 한 달만 같이 지내줘. 끝나면 널 보내줄게.” 보내준다고? 주서희가 감옥에 보낼 소준섭인데 그녀가 그를 믿을 리가 없었다. “나를 여기까지 데려오려고 그렇게 애썼으면서 어떻게 날 보내줄 리가 있겠어요?” 소준섭 같은 사람이라면 그녀를 이 황량한 섬에 영원히 가두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하지만 주서희를 잃은 소준섭은 매일 밤잠을 이루지 못했고 꿈속에서도 약을 삼켜야만 덜 비참할 정도로 너무 지쳤다. 그는 아무런 호언장담도 하지 않고 허리춤에서 총을 꺼내 주서희의 손바닥에 놓아주었다. “한 달 후에 내가 너를 보내주지 않으면 이 총으로 날 쏴도 돼.” 총을 손에 쥔 주서희는 몇 초 동안 총을 응시하다가 갑자기 총을 들어 소준섭의 이마를 겨누고 아무런 망설임 없이 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빈총이었다. 안에는 총알이 없었다. 소준섭은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다... “넌 정말로 내가 죽기를 바라는구나.” 그의 깊고 음산한 눈빛에서 드러난 실망감이 주
소준섭은 주서희를 식탁 의자에 앉힌 후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부드럽게 물었다. “뭐 먹고 싶어?”아직 마음이 정리되지 않은 주서희는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대답했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요.”소준섭의 손이 잠시 멈췄다가 그녀의 머리 뒤에서부터 천천히 손길을 따라 입술 쪽으로 옮겨갔다. “예전처럼 나를 대해주기로 했잖아, 좀 더 나에게 다정하게 굴어봐.”예전에는 그를 어떻게 대했었지?웃으며 맞이하고 다정하게 대해주고 하루 종일 사랑 한다고 말하고 밤마다 달콤하게 얽혀 잠들지 않았었나? 지금도 그때처럼 그를 대해야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주서희의 눈빛에는 약간의 증오가 묻어났지만 얼굴에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치즈 빵, 소고기, 오렌지 주스...”그제야 소준섭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다시 한 번 주서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래, 얼마나 좋아.”그가 혼자 부엌으로 갈 줄 알았는데 그가 그녀를 부엌으로 안아 데려가더니 깨끗하게 정돈된 조리대 위에 그녀를 앉히고 부엌문을 닫은 후 두 사람이 밀폐된 공간에 있게 되자 그제야 천천히 소매를 걷어 올리고 음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아마도 그녀가 칼 같은 것을 빼앗아 그를 해치려 할까 봐 매우 짧고 작은 도구들만 사용했는데 그것들로는 치명상을 입히기 어려웠다.주서희도 그렇게 작은 도구로 소준섭처럼 체격이 크고 힘이 강한 남자와 싸우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그런다고 해서 전혀 승산이 없기 때문이다.주서희는 속으로만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소준섭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스테이크를 굽자마자 첫 번째로 한 조각을 잘라 주서희의 입가에 가져갔다.“한번 먹어봐, 맛이 어떤지 봐줄래?”주서희가 그를 속이던 몇 년 동안에도 이렇게 지낸 적이 있었지만 그때의 주서희 눈에는 증오가 없었고 지금의 주서희는 마지못해 입을 열고 천천히 씹으며 아무 말 없이 그가 주는 대로 먹었다.소준섭은 화를 내지 않고 마치 장난꾸러기
주서희는 휴대전화를 쥐고 몇 초간 망설이다가 서유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서유의 번호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유는 그 불치병을 앓고 있던 소녀가 그녀에게 고마워서 향수를 사러 가던 길에 맞아 죽은 특별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거실에 앉아 한밤중 동안 한숨도 못 잔 서유는 갑작스러운 낯선 전화에 놀라 심장이 쿵쾅거렸고 주서희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비로소 깊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서희 씨, 당신 어디에요? 괜찮아요? 소준섭이 당신한테 해코지한 거 아니죠?!” 연이은 걱정과 안부가 주서희의 마음을 따뜻하게 했고 그녀는 별일 없다고 말한 후 소준섭을 올려다보았으며 그의 신호에 따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서유 씨, 당신들... 더 이상 나를 찾지 마요. 나 소준섭과 섬에 한 달 정도 있다가 돌아갈 거예요. 지금은 마침 봄이고 풍경이 아름다워서 여행하기 좋아요...” 그녀는 이곳이 어느 나라의 섬인지도 어떤 섬인지도 알지 못했다. 말할 수 있는 정보는 단지 섬이란 것과 온도를 보고 계절이 봄임을 추측한 것뿐이었다.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서유와 이연석은 잠시 멍해졌고 둘 다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옆에 있던 이승하는 빠르게 반응하며 전화를 받아 차갑게 말했다. “소준섭, 그 사람을 풀어줘라. 내가 널 찾아내면 감옥살이로 끝나지 않을 거야.” 소준섭은 입 꼬리를 올리며 차갑게 웃었다. “이승하, 이것은 나와 주서희 사이의 일이야. 너는 참견하지 마.” 말을 마친 후 이승하는 “탁”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겨우 전화로 위치를 추적하려던 이연석이 아직 추적이 끝나기도 전에 화면에 갑자기 붉은색 표식이 나타났다. “이 자식, 꽤 빠른데.” 이연석은 욕설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서유의 휴대전화를 보고 화면에 표시된 번호가 알 수 없는 번호인 것을 확인했다. 이승하는 이연석에게 이 번호로 계속 추적하라고 지시한 뒤 소수빈에게 차갑게 명령했다. “국내는 지금 여름이야. 봄에 해당하는 나라는 브라질, 아르
그는 매우 들떠서 주서희를 안고 바닷가로 나와 모래사장으로 가지 않고 그녀를 근처의 잔디밭에 내려놓았다. 주서희가 도망칠까 봐 걱정이 되었는지 주서희가 땅에 앉자마자 수갑을 꺼내 그녀의 오른손목에 채우고 다른 쪽은 자신의 왼손목에 채웠다. 주서희는 이를 보고 비웃으며 말했다. “예전처럼 지내자 더니 왜 아직도 이런 식으로 나를 경계하는 거죠?”소준섭은 개의치 않는 듯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하는 게 오히려 서로의 감정을 더 끈끈하게 해주지 않아?” 주서희는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속으로는 혹시 밤에 잘 때도 이렇게 수갑을 채워 두어 자신이 총을 못 가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대책을 생각하고 있을 때 소준섭이 갑자기 그녀를 아래로 눌렀다. “이 섬에는 아무도 없어, 너와 나만 있어. 한번 하자.” 주서희가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소준섭, 난 원하지 않아요!”남자는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며 키스했고 그녀의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전에 네가 그랬잖아, 여자가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건 사실 원한다는 거라고. 난 그 말을 항상 기억하고 있어.” 주서희는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고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밀어냈지만 그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고 옷이 벗겨질 때 뒤에 있던 잡초들이 피부에 박혀서 아플 정도였다. 그가 그녀가 아파하는 걸 알아차렸는지 그녀를 안아 뒤집어 그의 위에 엎드리게 했다. 손목이 그의 손목에 수갑으로 묶여 있어서 도망갈 수도 없었고 허리는 그의 한 손으로 단단히 눌려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것뿐이었다. 주서희는 가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분명 소준섭을 그렇게 미워하는데 왜 그가 그녀를 만질 때마다 반응을 보이는 걸까? 그녀는 눈을 감고 이러한 감정적인 반응을 전혀 드러내고 싶지 않았지만 소준섭은 그녀의 미세한 표정에서 그녀가 사실 반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의 어두운 눈동자에 주서희를 바라볼 때 느껴지는 사
주서희는 그 음산한 목소리에 깜짝 놀라 몸을 돌리자 소준섭이 회전 계단 옆에 서서 그녀를 차갑게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 순간, 태양은 사라지고 어둑한 달빛만이 건물의 꼭대기 층 유리를 통해 반사되어 소준섭의 얼굴에 어른거렸다. 마치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보였다.그런 소준섭을 본 주서희는 몸을 떨며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섰고 그녀의 등은 새장 방의 문에 닿았다. 그 순간, 소준섭이 한 걸음 내딛으며 손목에 감겨 있던 흰 천을 풀면서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가 그녀 앞에 도착했을 때 흰 천은 마침내 풀려 있었고 주서희는 그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을 보고 폭력을 휘두를 것이라고 생각해 겁에 질려 도망치려 했으나 힘이 엄청난 그에게 잡혀 끌려왔다. 그는 흰 천으로 그녀의 두 손을 묶은 뒤 그것을 그녀의 머리 위로 들어 올렸고 그의 차가운 손가락이 그녀의 얼굴에서 가슴까지 쓸어내렸으며 남자는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며 물었다. “한 달 후에 너한테 총을 준다고 하지 않았나? 뭐가 그렇게 급해?”주서희는 굴욕을 참으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소준섭, 난 당신이랑 한 달 동안 같이 있고 싶지 않아요.”소준섭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세게 물었다. “하지만, 난 그러고 싶어.”따뜻한 혀끝이 피부를 핥을 때 마치 독사에 쏘인 듯 고통스러우면서도 떨림을 일으켰고 주서희는 물린 고통을 참으며 그의 속박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다리는 그에게 잡히고 몸은 문에 눌려 꼼짝할 수 없었다.소준섭은 일부러 그녀를 물면서 귀에 대고 말했다. “너 혹시 SM 같은 거 해본 적 없어? 벌로 한 번 해보는 게 어때?”그 단어가 나오자마자 주서희의 얼굴이 순간 창백해졌다. “소준섭, 제발 함부로 하지 마요!”그녀를 집단으로 강간했던 사람들은 모두 그녀에게 성적인 학대를 가했고 그 배후에 있던 소준섭이 이것을 벌로 삼으려 하다니, 그의 마음속은 대체 얼마나 어두운 걸까?소준섭은 그녀의 뺨에 키스를 하며 마치 연인에게 말하듯 매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
윤주원이 당사자지만 이승하가 그들을 위해 많은 인력과 자금을 투자해 주서희를 찾아주려고 애쓰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폐를 끼쳤다. 더 이상 폐를 끼치는 것은 미안했다.윤주원의 부모는 그가 직접 주서희를 찾으러 가겠다고 하자 쇠약해진 몸이 덜덜 떨리며 말했다. “윤주원, 네 이런 상태로 어떻게 주서희를 찾으러 가겠다는 거니...?”그들은 윤주원과 주서희가 함께 있는 것을 반대하진 않았지만 주서희라는 아이가 그런 변태 같은 사람에게 찍힌 상황이니 윤주원은 모든 것을 두려워하지 않더라도 윤주원의 부모로서는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그들은 유일한 아이를 두고 있지 않은가.부모의 눈물을 보며 윤주원의 눈썹이 축 늘어졌고 약간 죄책감을 느끼며 어머니의 손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소준섭이 아무리 나쁜 놈이라도 사람을 죽일 용기는 없어요...”윤주원의 부모는 고집스러운 윤주원을 보며 고통스러워했지만 결국 그의 생각을 존중하며 말로 그를 강요하지 않았고 대신 그들은 이승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비록 학문적인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결국엔 평범한 사람들이었고 권력을 가진 이씨 가문의 유권자와는 비교할 수 없는 처지였으며 그들은 오직 그에게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다.이승하는 두 노인의 기대 어린 시선을 받아들이며 천천히 짙은 속눈썹을 깜빡였고 곧 윤주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너는 푹 쉬고 사람을 찾는 건 나에게 맡겨.”이 말을 마치고 이승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유의 손을 잡고 병실 밖으로 나갔다.맞은편 병실에 있던 이연석은 형이 떠나는 것을 보고 급히 단이수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에게 잘 회복하라고 당부한 후 자신도 따라 나섰다.이승하가 차에 타자마자 팀을 세 개로 나누어 소수빈 팀, 이연석 팀, 그리고 자신의 팀으로 나누어 각각 다른 나라로 사람을 찾으러 갔다.그들이 떠난 후 윤주원은 지도를 들고 소준섭이 해외에서 섬을 구입한 자료를 한참 동안 뒤적였고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소준섭의 전용기는 세 개의 나라에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