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사월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비용은 얼마나 들까요?”이지민은 원래 무료로 도와주겠다고 할 생각이었지만, 그가 거절할 것 같아 말을 바꿨다. “200억 원이요. 김 대표님께서 감당할 수 있겠죠?”다른 재활치료사들은 기껏해야 20억 원 정도 받는데, 이지민은 일부러 비용을 높게 불렀다. 송사월이 더 쉽게 마음 편히 그녀의 도움을 받아들이게 하려는 의도였다.이지민의 의도를 모르는 송사월은 오히려 일억 원이라는 숫자가 몹시 비꼬는 듯해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얼굴이 창백해졌다. “감당할 수 있습니다.”지금의 그로서는 당연히 감당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이지민은 그가 동의하자 곧바로 돌아섰다.송사월은 잠시 그 자리에 머물다 휠체어를 돌려 거실로 돌아왔다. 아마도 그와 인사를 나누려고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인지 서유는 아직 가지 않고 있었다.“사월아, 우리는 오늘 먼저 돌아가볼게. 다음에 또 보러 올게.”송사월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서유야, 나는 앞으로 해외로 수술하러 갈 거야. 몇 달 동안 수도에 없을 테니 날 보러 오려고 신경 쓰지 마.”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태진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송사월을 바라보았다. 전문가들은 국내에서도 수술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가 해외로 간다니, 이게 무슨 뜻일까?“전문가가 다리 수술은 해외에서 해야 한다고 했어?”“그래.”송사월은 다리 위에 올려둔 손가락을 살짝 오그리며 손바닥을 꽉 쥐었다.“국내 의료 장비가 그리 선진적이지 않아서 전문가가 해외에서 수술하라고 권했어.”말을 마친 뒤 그는 옆에 서 있는 이지민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내가 수술을 마치고 돌아오면 지민 씨에게 재활치료를 부탁드릴게요.”이지민은 송사월의 속내를 꿰뚫어 본 듯 서유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제가 김 대표님과 이야기를 나눴어요. 수술을 마치고 돌아오면 제가 도와드리기로 했어요.”서유의 시선이 잠시 송사월의 다리에 머물다 떠났다.“어느 나라에서 수술하는 거야? 가혜랑 같이 가서 문병할게.”송
정가혜는 핸드폰을 들고 확인한 후 방 번호를 확인하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 안은 깜깜했고, 불이 꺼져 있을 뿐만 아니라 커튼도 닫혀 있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코를 찌를 정도로 강한 술 냄새만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정가혜의 뒤를 따르던 직원이 불을 켜주며 말했다. “정가혜 씨, 이 도련님께서 안에서 잠들어 있습니다. 저희 직원들이 아무리 깨우려 해도 일어나지 않아서, 정가혜 씨께서 모시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직원은 말을 마치고 소비 내역서를 정가혜에게 건넸다. “총액은 천만 원입니다. 먼저 결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정가혜는 코를 막으며 소비 내역서를 받아들고 한번 훑어본 뒤, 가방에서 카드를 꺼내 직원에게 건넸다. 그런 다음, 하이힐을 신고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소파에 누워 있는 한 남자의 날씬한 실루엣이 보였다. 그는 정장 재킷을 배 위에 걸치고, 흰 셔츠의 깃을 약간 풀어 놓아 섹시하게 드러난 목젖과 뚜렷한 쇄골이 보였다. 조명이 비치자, 잘생기고 뚜렷한 얼굴에 옅은 홍조가 감돌았고, 본래 희고 고운 피부가 더욱 빛나 보였다.그 시각의 이연석은 이미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긴 속눈썹이 내려앉아 낮은 조명 아래에서 부채 모양의 그림자를 드리우며 마치 휴식 중인 나비처럼 보였다. 짙은 머리카락이 뒤로 잘 정리되어 이마가 드러나 있었고, 아마 잠자는 중에 이리저리 움직였던 듯, 이마 양옆으로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흩어져 내려와 있었다.그런 이연석을 바라보며 정가혜는 문득 과거의 자신이 왜 그에게 심쿵했는지를 다시금 떠올렸다.그는 잠시 그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낮추고 그의 팔을 살짝 흔들었다. “이연석 씨, 일어나요. 집에 데려가려고 왔어요.”여러 병의 와인을 마신 이연석은 정가혜의 목소리가 시끄럽게 느껴졌는지 짜증을 내며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소파 안쪽을 향하고 그 상태로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쿠션 하나를 더듬어 끌어안았다.깊이 잠든 그는 쿠션을 꼭 끌어안고 몸을 웅크리고 있었는
“연석 씨 둘째 형이 데리러 오라고 해서 왔어요.”정가혜는 그렇게 말하며 허리를 숙여 손에 든 물을 이연석의 입술 가까이 가져갔다. “해장국은 없으니, 일단 물이라도 좀 마셔요.”멍하니 있던 이연석은 정가혜를 바라보더니, 그녀가 건네준 물을 보고는 약간 놀라면서도 기쁜 표정으로 입술을 열어 천천히 물을 마셨다.이상하게도, 평소에는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던 생수가 그 순간에는 달콤하게 느껴졌다. 혹시 여기 물이 A시의 물보다 더 좋은 걸까?이연석이 물을 다 마시자 정가혜는 비로소 컵을 내려놓고 그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이제 가요, 집에 데려다줄게요.”그녀의 부드러운 손가락이 그의 팔을 감싸자 이연석의 심장이 한 번 쿵 하고 뛰었고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전신이 저릿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자신보다 한참 작은 정가혜가 억지로 힘을 내어 자신을 부축하는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고마워요...”정가혜는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차는 어디에 세워뒀어요?”머리가 너무 아픈 이연석은 잠시 생각하다가 자신의 외투를 보고는 그 안에 있는 차 키를 꺼내려 허리를 굽혔다. 하지만 중심을 잡지 못해 소파로 넘어지고 말았고, 그와 함께 정가혜도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마침 이연석은 등을 대고 누웠고, 정가혜는 그의 위에 엎어진 채로 넘어졌다. 그 순간, 두 사람의 입술이 스치듯 닿았다.순간적인 스침이었지만 그 작은 접촉만으로도 두 사람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정가혜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는 그의 위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이연석이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가혜 씨...”그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말을 잇지 못했고, 그 대신 눈에는 명백한 욕망이 드러났다. 그가 그녀를 원한 지 벌써 2년이 되었지만, 한 번도 그 욕망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그 욕망을 마음속 깊이 억눌러 두었다.오랜 시간 동안 쌓였던 갈망 때문인지 아니면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인지 이연석은 통제 불능 상태가 되어 정가혜의 뒷머리를 잡고 살짝 고개를 들어 그녀에게 입을 맞
정가혜는 이연석을 부축해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그녀는 조수석 문을 열고 그를 조심스럽게 태운 뒤, 안전벨트를 매 주었다. 그런 다음, 차 앞쪽으로 돌아가 운전석에 앉았다. 시동을 걸기 전에 정가혜는 머리를 짚고 고통스러워하는 이연석을 바라보며 물었다. “집 주소가 어디에요?”이연석은 개인 별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함께 있을 때 그는 한 번도 정가혜를 그곳으로 데려간 적이 없었다. 그러니 정가혜는 그 주소를 몰랐다.눈을 감은 채로 이연석은 휴대폰을 건네며 말했다. “내비게이션을 켜 봐요. 주소가 거기에 있을 거예요.”그는 잠시 후에 덧붙였다. “비밀번호는 가혜 씨 생일이에요.”휴대폰을 받은 정가혜의 손이 살짝 떨렸다. 연애할 때, 정가혜는 때때로 투정을 부리며 이연석에게 자신의 생일을 휴대폰 비밀번호로 설정하라고 요구하곤 했다. 이연석은 그녀와 반대로 행동하는 걸 좋아하는지 절대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헤어진 지 2년이 지난 후에야 그녀의 생일을 비밀번호로 설정해 두었다.정가혜는 미간을 찌푸리며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내비게이션을 열어 주소를 확인한 뒤 이연석의 별장으로 향했다.한 손으로 이마를 받친 채 이연석은 그녀를 바라볼 용기가 없었고, 대신 이따금씩 후사경을 통해 그녀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수십 번을 그렇게 바라본 후, 그는 갑자기 글로브박스를 열고 안에서 블랙 카드를 꺼내 정가혜에게 건넸다.“이 카드는 원래 당신 거였어요.”이연석은 그녀에게 무한한 한도를 가진 블랙 카드를 준 적이 있었다. 그러나 헤어지고 나서 정가혜는 그 카드를 돌려주었고, 이제 다시 그녀에게 건네는 것은 아마도 방금 전에 사용한 돈을 갚기 위함일 것이다.“필요 없어요. 나 돈 많아요.”정가혜는 지금 돈이 가장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었다.이연석은 그녀가 돈이 부족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몸을 돌려 블랙 카드를 그녀의 가방 안에 억지로 넣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사실 정가혜는 그와 함께 오랫동
이연석은 전화를 끊고 머리가 깨질 듯 한 통증을 참아가며 별장에서 뛰쳐나갔고 도로변에서 아직 택시를 잡고 있는 가혜를 보고서야 그녀가 차를 타고 오지 않았다는 걸 기억해냈다. 자신이 너무 세심하지 못했음을 자책하며 그녀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가혜 씨, 주서희에게 무슨 일이 생겼어요.”지금 막 콜택시 경로를 보고 있던 가혜는 주서희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말을 듣고 급히 고개를 들어 이연석을 바라봤다.“무슨 일이예요?”“일단 차에 타요.”이연석은 차 열쇠를 가혜에게 건네주고는 그녀의 손을 잡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두 사람이 차에 탄 후, 가혜는 오늘 주서희와 소준섭의 재판이 있었다는 것과 첫재판이 끝난 후 소준섭이 가혜를 데리고 가려 했지만 윤주원이 막아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소준섭은 말도 없이 윤주원을 때렸고 단이수가 싸움을 말리려다 소준섭이 데려온 경호원에게 부상당했다.여기는 부산이었고 김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사람들의 구역이었기 때문에 소준섭은 더욱 횡포를 부리며 주서희를 차에 태웠다. 단이수가 보낸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헬리콥터를 타고 부산을 떠나 사라졌고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이연석은 상황을 설명한 후 전화를 걸어 사람들을 불러 모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대의 고급차가 병원 입구에 멈춰 섰다.이연석은 손발이 차가워진 가혜의 손을 잡고 병실로 들어섰다. 잘생긴 단이수의 얼굴에는 상처가 가득했고 입술은 찢어져 눈썹도 시퍼렇게 부어있는 것을 본 이연석은 본능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법정에 갈 때 경호원을 데리고 다니지 않는 거야?”단이수는 경호원에게 발로 차인 통증을 참으며 가슴을 부여잡고 들어오는 두 사람과 제국 수도의 재벌 도련님들을 바라봤다.“나는 그런 왕자병 따위는 없어.”단씨 가문은 그의 존재를 인정하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를 단이수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에게 체면을 세워주기 위한 것뿐이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그저 변호사일 뿐이고 변호사라면 법정에 가는 것뿐이었다. 경호원을 왜 데리고 가겠는가?
주서희는 이승하와 서유에게 걱정 끼치지 않으려고 자신이 소준섭과 소송 중인 일을 그들에게 알리지 않았고 두 부부도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단이수와 윤주원이 맞아서 다치고 주서희가 소준섭에게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유는 놀라고 불안해져서 급히 일어섰다. 이승하도 따라서 일어설 때 아직 소파에 앉아 머뭇거리고 있는 이지민을 보며 말했다. “가고 싶으면 따라와.”이지민은 원래 서유를 집에 데려다준 후 떠나려 했으나 서유가 집에 들어와 커피 한 잔을 마시자고 초대해서 자신이 형수 집에 온 김에 담소나 나누자 싶어 들어왔는데 단이수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이승하의 뜻은 이지민이 단이수를 보러 가길 바라는 것이라는 것을 그녀는 이해했다. 그러나 지금 그녀와 단이수의 관계로 봐서는 같이 가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자신의 부모님이 단이수를 그렇게 대하고 또 그의 할머니에게까지 해를 끼친 것을 생각하니... 이지민은 몇 초간 망설였지만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세 사람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마침 가혜가 병실 문 앞에 서 있었고 서유는 급히 다가가 가혜의 손을 잡고 상황을 알아보고 나서야 윤주원을 보러 갔다.심형진의 비방으로 인해 이미 몸이 말라버린 윤주원이 피투성이가 된 모습을 보자 서유의 마음도 함께 아파왔다.당시 주서희가 이런 윤주원을 보고 얼마나 가슴이 찢어졌을지 생각도 못하겠고 소준섭이라는 나쁜 놈이 정말로 너무나도 심한 짓을 했다. 단이수도...단이수를 떠올리며 서유는 그제야 맞은편 병실로 걸어갔고 침대 머리맡에 기대앉아 있는 단이수도 얼굴이 멍들고 부어 있는 모습을 보자 그녀는 참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렸다.“걱정하지 마세요. 윤주원 선생과 단이수 변호사 모두 외상만 입었을 뿐 내부 장기는 손상되지 않았어요...”주서희가 서유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그녀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주서희 쪽도 걱정하지 마세요. 연석 씨가 이미 사람을 보내 그녀를 찾고 있어요. 이제 당신
그녀는 마음이 복잡했고 주서희의 위치를 찾기 위해 사람을 보낸 이승하는 전화를 끊고서 분노에 찬 소수빈을 바라보며 말했다. “직접 찾아볼 건가?”주먹을 꽉 쥔 소수빈은 고개를 저었다. “대표님, 저는 소씨 가문에 한 번 다녀오겠습니다.”어떤 원한은 반드시 끝을 맺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와 사촌 여동생은 평생 수가 사람들로부터 방해를 받게 될 것이다!이승하는 몇 초 동안 눈을 감고 깊이 생각한 후 경호팀을 보내 소수빈에게 붙여주고 그가 사람들을 데리고 소씨 가문에 가서 묵은 감정을 정리하게 했다.소수빈이 떠난 후 이승하도 병원에 오래 머물 생각은 없었고 서유의 손을 잡고 떠나기 전에 병상에 앉아 있는 이연석을 흘깃 바라보며 말했다. “사람을 찾으면 당신들에게 알려줄게요.”계속해서 단이수의 부상을 걱정하던 이연석은 형이 가려는 것을 보고 그제야 고개를 들었는데 마침 문가에 서서 가방을 들고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이지민을 보았다.그는 마치 이제야 무언가를 깨달은 듯이 서둘러 일어나며 말했다. “맞다, 나도 처리해야 할 급한 일이 있어. 지민아, 네가 단이수를 좀 돌봐줘.”말을 마치자마자 이지민이 동의하는지 안 하는지는 상관하지 않고 바로 외투를 집어 들고 이승하를 따라 나갔다.아래층에 도착해서는 가혜를 붙잡고 말했다. “나 술 마셔서 아직 깨지 않았어요. 당신이 운전해서 날 데려다줘요.”가혜는 이미 차에 타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서유를 한 번 보고는 말했다. “경호원한테 데려다 달라고 해요. 나는 서유이랑 먼저 돌아가서 주서희 소식을 기다릴게요...”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이연석은 약간 실망했지만 이런 중요한 시점에서 억지를 부리지는 않았고 경호원을 불러 차에 태운 후 창문을 닫았다.차가 스쳐 지나갈 때 가혜는 속눈썹을 아래로 내렸고 서유는 이를 알아차리고 그녀의 손을 꼭 잡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친구로서 상대방에게도 마음의 공간을 주는 것이 필요하고 모든 일에 대해 너무 많이 캐묻는 것은 좋지
한편 소수빈이 한 발로 소씨 가문의 대문을 걷어차고 들어가자 식탁에서 밥을 먹고 있던 소정의와 송문아는 들이닥친 사람이 소수빈임을 보고 깜짝 놀랐다.송문아는 소수빈의 생모로 두 사람이 헤어진 후 거의 만날 일이 없었고 소수빈이 어릴 적에는 송문아가 가끔 서울로 몰래 찾아가기도 했지만 소수빈에게 들킨 적이 한 번 있은 후로는 다시는 감히 가지 못했다.그때, 소수빈은 그녀에게 다른 사람의 첩이 되어 그 집 아이의 어머니를 죽게 하고 자신에게 사생자의 누명을 씌웠다고 욕하며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천한 여자라 칭했다. 그리고는 평생 자신을 다시는 찾지 말라고 했다.당시 송문아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울면서 돌아왔고 그녀는 자신이 첩이 된 것이 친아들의 증오를 살줄은 전혀 몰랐다. 그저 재벌가로 시집을 가서 아이에게 최상의 생활을 제공하면 그것이 아이에게 커다란 은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들이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질 줄은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심지어 그녀가 소씨 가문의 상속권을 걸고 소수빈에게 소준섭을 대적하라고 했을 때도 소수빈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소씨와 얽히는 것을 유독 꺼리는 듯했고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다른 사람의 밑에서 일하는 것을 택했지 자신이 소씨 가문의 둘째 도련님이라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송문아는 이런 아들은 길들이기 힘들다고 생각했고 그때부터는 다시는 소수빈을 만나러 가지 않았다. 주서희가 서울에 돌아와 정착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후로 그녀는 주서희를 통해 소수빈의 몇몇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심지어 소수빈이 결혼했을 때도 그녀는 차 안에 숨어 멀리서 신랑과 신부를 잠시 볼 뿐 감히 가까이 다가갈 엄두도 못 냈다.지금 소수빈이 느닷없이 소씨 가문에 돌아온 것을 보자 송문아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수... 수빈아... 네가 왜 돌아왔니...”소수빈은 군화를 신고 몇 명을 이끌고 한 걸음 한 걸음 송문아 앞으로 다가가더니 신발에서 칼을 꺼내어 딱 하고 나무 식탁에 꽂았다.그 칼은 그렇게 번쩍이며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