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가혜의 일에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나서는 거야?”심형진은 손목을 감싸쥐고 고개를 들어 붉게 충혈된 눈으로 이승하를 노려보며 소리쳤다.그가 저지른 일을 녹음해 임 선생의 가족과 의대생들에게 보냈다. 이는 그의 퇴로를 막은 것과 다름없었다. 본국으로 돌려보내준다 해도 이들의 비난을 피할 수 없을 터였다.이승하가 이미 충분히 잔인하게 굴었는데 이제 와서 정가혜의 일까지 나서다니,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무슨 자격이냐고?”남자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더니 하얀 장갑을 낀 손을 펴 심형진을 붙잡고 있는 경호원들에게 손짓했다.두 경호원은 즉시 그 뜻을 알아차리고 심형진의 양팔을 잡아 이승하 앞으로 끌고 왔다. 심형진이 일어나기도 전에 갑자기 하늘에서 손바닥이 내리꽂혔다.엄청난 힘에 얼굴이 흔들리더니 바람이 지나간 뒤 살을 찢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반쯤 꿇어앉은 심형진의 왼쪽 뺨이 순식간에 부어올랐고, 입가에서 흘러나온 피가 손등 위로 떨어졌다. 그는 놀란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당신...”이승하는 심형진을 때린 장갑을 벗어 옆의 쓰레기통에 버리고 소수빈이 건넨 물수건으로 손을 닦은 뒤에야 바닥에 꿇어앉은 사람을 내려다보았다.“가혜 씨는 내 아내의 친구, 즉 내 친구나 마찬가지지. 친구를 건드린 건 곧 나를 건드린 거나 다름없어. 그 계산을 내가 해야 하지 않겠나?”심형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승하를 멍하니 바라보다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정가혜를 친구처럼 여긴다 해도 날 때릴 자격은 없어!”그는 여태껏 한 번도 뺨을 맞아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남자한테 맞다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계산할 게 있다면 법정에 고소하든가. 법의 심판을 받게 하지, 왜 날 때리는 거야?”“조급해하지 마.”심형진의 격분과 달리 이승하는 느긋하게 대꾸했다.“법정에 서게 될 거야.”“그럼 왜 날 때린 거야?”손목을 베었을 때보다 이 뺨 때림이 더 분노를 자아냈다.이승하는 무덤덤하게 그를 힐끗 보았다.“내 아내를 대신해 때린 거야.”그녀의 친구를
심형진은 손목의 상처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서희의 바지 끝자락을 붙잡고 고개를 들어 절박하게 물었다.“어서 말해 보세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주서희는 이제 심형진이 너무나 혐오스러워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났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발로 그를 걷어찼다!“당신 덕분에 오늘 밤 길가에서 죽을 뻔했어요!”심형진은 주서희가 거짓말을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속에 가득 찬 분노를 보고 거짓말 같지는 않다고 느꼈다.“가혜는 괜찮아요?”그는 여전히 정가혜를 좋아했다. 다만 자신의 욕망이 그녀에 대한 애정보다 컸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말에 여전히 걱정이 되었다.“괜찮은지 아닌지가 이제 당신과 무슨 상관이죠.”주서희의 무표정한 얼굴에 심형진은 깊게 눈썹을 찌푸렸다.“주 원장님, 당신...”“날 부르지 마세요. 당신이 역겨워요.”시의를 모함하고 정가혜를 괴롭히는 등 심형진은 할 수 있는 나쁜 짓은 다 했다.“오늘부터 병원에 당신이란 사람은 없어요.”그의 직위를 박탈한 후 주서희는 몸을 돌려 이승하를 향했다.“이 대표님, 저는 먼저 가서 가혜 씨를 보고 오겠습니다.”이승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주서희는 자리를 떠났다. 그가 떠나고 나서야 이승하는 천천히 일어섰다.우뚝 선 남자의 모습은 심형진 앞에 태산이 내려앉은 듯했다. 바닥에 웅크린 심형진은 그를 보며 숨이 막히는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당신... 더 뭘 하려는 거죠?”정가혜에 대한 조그마한 걱정보다 지금 이 순간 이승하가 자신에게 다시 손을 댈까 봐 더 두려웠다.그는 이승하 같은 권세 있는 사람들이 명성을 중요하게 여겨 그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승하는 상식을 벗어나 오히려 권력을 이용해 제멋대로 행동했다. 정말 체면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심형진은 결심했다. 여기서 빠져나가면 이승하의 오늘 행동들을 폭로해 그를 여론의 뭇매를 맞게 할 것이다! 모든 언론과 인터넷을 총동원해 이승하를 함께
그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심형진이 입을 열자마자 벼락을 맞은 듯 온몸이 굳어버렸다.“중증 우울증에 걸렸어요. 당신 아내를 그리워하다 병이 든 거죠...”심형진은 꼼짝도 않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눈썹을 치켜 올리고 거침없이 큰 소리로 웃었다.“이 대표님, 당신이 가혜를 대신해 나를 심판하려 하는데, 누가 송사월을 대신해 당신을 심판할까요?”“당신은 그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빼앗고도 떳떳하게 살고 있지만, 송사월은 영원히 지옥 속에서 살고 있어요!”심형진의 음침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자 이승하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아마도 소수빈이 더는 듣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가 돌아서서 빠르게 심형진에게 다가가 옷깃을 잡아 올리고는 주먹으로 그를 때려 기절시켰다! 닭 던지듯 기절한 심형진을 바닥에 내팽개친 후, 소수빈은 이승하 곁으로 돌아와 무척 침착하게 그를 달랬다.“대표님, 심형진의 말은 믿을 수 없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대표님은 송사월에게 빚진 게 없었다. 기껏해야 같은 여자를 사랑했을 뿐이다. 오해나 갈등이 있었다면 서유와 헤어진 그 해의 일이겠지.하지만 그때 서유와 송사월은 연인 사이도 아니었고, 그때 대표님이 서유를 찾아갔다고 해서 끼어든 것도 아니니 빼앗았다고 할 수 없었다.그 후에 송사월이 따라 자살을 시도했을 때 대표님이 그를 구해줬고, 인력과 물자, 재력을 들여 그를 보호하고 살아가도록 격려하셨다.서유가 돌아왔을 때도 대표님은 성의를 다하셨고, 그의 부모 원수를 갚아주고 심지어 구씨 집안도 되찾아 주셨다. 송사월에게 빚졌다 해도 이미 다 갚으신 거나 다름 없었다.소수빈은 세 사람 사이의 모든 은원과 갈등을 지켜본 사람으로, 대표님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굳이 잘못을 찾자면 대표님이 처음에 서 양에게 그렇게 냉담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것뿐이다.그렇지 않았다면 송사월이 기억을 되찾고 돌아왔어도 별 문제가 없었을 테니까.하지만 분명 이승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서유의 마음속에 송사월이 차지하
입원실, 7층 병실.서유는 면봉에 약을 묻혀 정가혜의 팔에 발랐다. 힘이 좀 세었는지 정가혜가 아프다고 소리를 내자 서유의 손이 멈칫했다. “미안해.”정가혜가 괜찮다고 하려는 찰나, 옆에 앉아있던 이연석이 갑자기 서유의 손에서 면봉을 가져갔다. “내가 할게요.”서유와 정가혜는 잠시 놀랐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면봉을 들고 정성스레 약을 발랐다.그의 손길이 무척 부드러워 아프지 않게 하려 조심하는 게 보였다. 이런 이연석의 모습에 정가혜는 잠시 망설이다 담담히 말을 꺼냈다.“연석 씨, 서유가 여기 있으니 먼저 돌아가세요.”정가혜는 이미 여러 번 이런 말을 했지만 이연석은 가지 않고 아무 말 없이 옆에 앉아 있기만 했다.“형수님 몸이 좋지 않으니 먼저 가서 쉬세요.”꼼꼼히 약을 바르던 남자가 말을 마치고 고개를 들어 옆에 서 있는 서유를 바라보았다.“형수님, 제가 있으니 걱정 마세요.”이 말뜻을 서유가 못 알아들었다면 좀 둔한 사람일 것이다.“가혜야, 연이가 혼자 집에 있어서 걱정되네. 내일 다시 올게.”정가혜 입을 열기도 전에 서유는 테이블 위의 휴대폰을 집어 들고 돌아섰다.다만 문 앞에 이르러 다시 발걸음을 멈추고 이연석을 돌아보았다.“도련님, 잠깐 나와 봐요. 할 말이 있어요.”그제야 이연석이 손에 든 면봉을 내려놓았다.“잠깐만 기다려요.”정가혜는 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른 채 두꺼운 유리 너머로 복도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서유는 하얗고 깨끗한 얼굴을 들어 자신보다 훨씬 키가 큰 이연석을 보며 눈썹을 찌푸리고 말을 꺼냈다.“연석 씨, 지금 가혜에 대한 마음이 어떤 거예요?”좋아하는 건지, 사랑하는 건지, 아니면 아직 장난이 덜 끝난 건지?이연석은 눈꺼풀을 살짝 들어 올려 약간 피곤해 보이는 눈을 드러냈다.“형수님, 저는 가혜 씨를 사랑합니다.”이것은 그가 처음으로 서유 앞에서 정가혜를 사랑한다고 직접 인정한 것이었다. 전혀 숨기지 않았다.진지한 표정과 태도로 말하는 이연석을 보며 서유는
“꼭 당신을 믿지 않는 게 아니에요. 그저 두려울 뿐이죠. 만약 결혼 후에 절대 바람피우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다면, 시간을 좀 두고 나중에 가혜에게 말해 보세요. 지금은 몰아붙이지 마시고요.”이 말을 듣고 이연석은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형수님, 저를 불러내신 건 가혜 씨에게 다가가지 말라고 말리려는 게 아니었나요?”서유의 온화한 얼굴에 고요하고 우아한 미소가 번졌다.“내 말은 여전히 같아요. 모든 건 도련님 마음에 달렸어요. 도련님께서 진심으로 가혜를 대하고, 가혜도 당신과 함께하길 원한다면, 나는 당연히 막지 않을 거예요.”이연석은 서유가 이렇게 이해해줄 줄은 몰랐다. 굳게 다문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갔다.“고마워요, 형수님.”서유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들어가서 함께 있어요. 난 승하 씨 좀 찾아볼게요.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네요.”그녀가 말을 마치고 돌아서려는데, 이연석이 다시 그녀를 불러세웠다.“형수님, 방금 가혜 씨의 마음에 제가 있다고 하신 말씀... 정말인가요?”서유는 고개를 돌려 의아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스스로 느끼지 못하나요?”이연석은 정가혜를 안고 병원에 왔을 때 그녀가 했던 설명을 떠올렸다.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어서, 그가 자신을 깨끗하지 않다고 생각할까 봐 설명한 것일까?정가혜의 마음에도 자신을 향한 약간의 호감이 있다는 생각에 이연석의 눈썹이 천천히 펴졌다.“그럼 형수님, 어서 돌아가세요.”자신에게 손을 흔드는 이연석을 보며 서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이게 전형적인 쓰고 버리기 아닌가?이연석은 급히 병실로 들어가 정가혜가 혼자 면봉으로 약을 바르고 있는 것을 보고 서둘러 다가가 면봉을 받아들었다.“누워 있어요. 내가 할게요.”정가혜는 그를 한번 쳐다보았다. 그의 단정한 얼굴에 밝은 미소가 어려 있는 것을 보고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서유가 뭐라고 하지 않았어요?”약을 정성스레 바르던 이연석의 동작이 점점 느려졌다.그는 칠흑 같은 눈동자를 들어 창백한 얼굴의 정가혜를
소지섭은 서유에게 이승하가 볼일을 처리하러 갔으니 잠시 병원에서 기다리라고 전했다.서유는 구석 자리를 골라 앉았다. 휴대폰을 보지 않고 그저 조용히 앉아 있었다.이승하가 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 멀리서 그를 기다리는 아름다운 그림자를 발견하고 천천히 걸음을 멈췄다.서유는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끼고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멀리 서 있는 이승하를 보았다.그녀는 서둘러 일어나 이승하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가보니 그의 안색이 좋지 않아 보였다.“여보, 무슨 일 있어요?”그 맑은 눈동자를 응시하던 이승하는 순간 그녀와 눈을 마주치기가 두려워 시선을 돌렸다.그의 어색한 표정을 느낀 서유는 발끝을 들어 그 아름다운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다.“왜 그래요? 누가 당신을 화나게 했나요?”결혼 후 서유의 눈에는 오직 그의 모습만 담겨 있었고, 다른 사람은 더 이상 들어올 자리가 없었다.이승하는 그녀가 지금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이며, 송사월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더 이상 송사월을 위해 자신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동시에 그는 그녀가 송사월에 대해 여전히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걸을 수 없는 그의 다리에 대한 죄책감...만약 그녀가 송사월이 그녀를 그리워하다 우울증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더욱 죄책감을 느끼고 괴로워할 것이다.송사월의 우울증은 중증이었다. 그를 우울증에 빠지게 한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그를 구할 수 없었다.그리고 그를 우울증에 빠지게 한 사람은 20여 년의 어린 시절 우정을 나눈 사이였다. 사랑은 사라졌을지 모르지만 가족 같은 애정은 여전했다.게다가 어린 시절 송사월은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이런 은혜에, 정가혜가 알게 되면 분명 송사월을 돕고자 할 것이다.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얻지 못해서 병이 된 것이다.오직 얻어야만 그를 도울 수 있다.이승하는 머릿속으로 너무나 명확히 알고 있었다. 너무 잘 알기에 그는 골치가 아팠다.그가 대답 없이 자신을 바
그녀가 보온 도시락을 들고 병원에 도착했을 때, 문 앞에 환자 가족들이 몰려있는 것을 보았다.병원 관계자들이 가족들을 진정시키려 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현수막을 들고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었다.“양심 없는 의사, 목숨으로 갚아라!”“양심 없는 의사, 목숨으로 갚아라!”서유는 처음에 다른 의료사고인 줄 알았다. 하지만 현수막에 붙은 사진이 심형진의 것임을 보고서야 이 가족들이 심형진을 겨냥한 것임을 알았다.그녀는 놀랐다. 심형진이 어젯밤 정가혜를 괴롭힌 후 빌딩 옥상에 버려졌는데,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는데 갑자기 의료사고가 났다니?“사모님, 빨리 뉴스를 보세요.”서유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 소수빈이 휴대폰을 건넸다.그녀는 받아 뉴스를 열어보았다. 앵커의 말을 듣고서야 심형진이 노벨 의학상을 위해 윤주원을 함정에 빠뜨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녀는 심형진이 믿을 만한 남자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좋은 의사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집착과 불만이 여자에게만 향한 게 아니었다니 놀라웠다.“심형진을 내놔라!”“그래, 그를 내놔! 아니면 우리는 절대 물러나지 않을 거야!”가족들의 소란이 극에 달했을 때, 주서희가 손짓하며 경호원들에게 심형진을 병원 밖으로 데리고 나가게 했다.심형진이 나오자마자 임 선생의 가족들이 달려들어 그를 때리기 시작했고, 경비원들도 막지 못했다.심형진은 가족들에게 심하게 맞았고, 한참 후에야 경호원들이 나서서 형식적으로 그를 막아주었다...“그만 때리세요. 심 선생님이 의도적으로 환자를 해치고 윤주원 의사를 모함한 건에 대해 경찰이 이미 개입했습니다. 여러분은 돌아가서 경찰 조사 결과를 기다려주세요.”경호원들 뒤로 물러난 심형진은 자신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어 하는 가족들을 바라보며 점점 음흉한 표정을 지었다.그는 주먹을 꽉 쥐고 분노에 찬 눈으로 자신을 욕하는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멀리 서 있는 서유를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서유는 잠시 머물렀다가 사람들이 조금 흩어지자 발걸음을 옮겨 소수빈과 함께
송사월이 중증 우울증에 걸렸다.정가혜가 알고 있었다.이승하도 알고 있었다...서유의 얼굴에서 홍조가 서서히 사라지고, 하얀 손이 무력하게 벽을 짚었다.“서유 씨, 중증 우울증은 사람을 죽일 수 있어요. 송사월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나요?”그녀 눈에 비친 충격과 놀라움을 심형진은 놓치지 않았다.그는 당시 정가혜가 자신을 송사월에게 데려갔던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승하에 대항할 기회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심형진은 원래 말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승하가 그를 이렇게 대하고 괴롭혔는데, 왜 이승하만 편안해야 하는가?그는 서유와 이승하 사이에 간극을 만들어 그들을 갈라놓고 싶었다. 이승하가 송사월처럼 우울증에 걸려 죽게 만들고 싶었다!이런 생각에 심형진은 냉소를 지으며 한 걸음 다가섰다.“서유 씨, 송사월은 당신을 그리워하다 병이 들어 우울증에 걸린 겁니다.”“하지만 당신은 그를 버리고 이승하와 함께하고 있어요. 송사월이 살아도 사는 게 아닐 거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나요?”심형진의 말은 심장을 내리쳤고, 먼지 속에 숨겨져 있던 인영이 한 줄기 빛처럼 갑자기 솟아올랐다.그녀는 송사월이 그녀의 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공사장에서 벽돌을 나르던 모습을 떠올렸다...그때 그의 나이 겨우 열여섯.등을 구부정하게 하고, 뜨거운 여름 날씨도 아랑곳하지 않고 땀을 뻘뻘 흘리며 고개를 숙이고 힘을 다해 고된 일을 했다.그녀가 발견했을 때 송사월은 웃으며 말했다. “서유야, 나는 몸을 단련하려고 하는 거야. 돈 때문이 아니야.”그의 손바닥에 갈라진 피부와 생긴 굳은살은 모두 그녀를 위한 것이었다...송사월의 전반생은 모두 그녀를 위한 것이었다...서유가 벽을 짚고 있던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고 심형진은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서유 씨, 송사월은 두 다리를 잃어 영원히 일어설 수 없고, 중증 우울증까지 걸렸어요. 그는 죽을 거예요...”그는 죽을 거예요...서유는 창백해진 작은 얼굴을 들어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