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사월이 중증 우울증에 걸렸다.정가혜가 알고 있었다.이승하도 알고 있었다...서유의 얼굴에서 홍조가 서서히 사라지고, 하얀 손이 무력하게 벽을 짚었다.“서유 씨, 중증 우울증은 사람을 죽일 수 있어요. 송사월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나요?”그녀 눈에 비친 충격과 놀라움을 심형진은 놓치지 않았다.그는 당시 정가혜가 자신을 송사월에게 데려갔던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승하에 대항할 기회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심형진은 원래 말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승하가 그를 이렇게 대하고 괴롭혔는데, 왜 이승하만 편안해야 하는가?그는 서유와 이승하 사이에 간극을 만들어 그들을 갈라놓고 싶었다. 이승하가 송사월처럼 우울증에 걸려 죽게 만들고 싶었다!이런 생각에 심형진은 냉소를 지으며 한 걸음 다가섰다.“서유 씨, 송사월은 당신을 그리워하다 병이 들어 우울증에 걸린 겁니다.”“하지만 당신은 그를 버리고 이승하와 함께하고 있어요. 송사월이 살아도 사는 게 아닐 거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나요?”심형진의 말은 심장을 내리쳤고, 먼지 속에 숨겨져 있던 인영이 한 줄기 빛처럼 갑자기 솟아올랐다.그녀는 송사월이 그녀의 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공사장에서 벽돌을 나르던 모습을 떠올렸다...그때 그의 나이 겨우 열여섯.등을 구부정하게 하고, 뜨거운 여름 날씨도 아랑곳하지 않고 땀을 뻘뻘 흘리며 고개를 숙이고 힘을 다해 고된 일을 했다.그녀가 발견했을 때 송사월은 웃으며 말했다. “서유야, 나는 몸을 단련하려고 하는 거야. 돈 때문이 아니야.”그의 손바닥에 갈라진 피부와 생긴 굳은살은 모두 그녀를 위한 것이었다...송사월의 전반생은 모두 그녀를 위한 것이었다...서유가 벽을 짚고 있던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고 심형진은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서유 씨, 송사월은 두 다리를 잃어 영원히 일어설 수 없고, 중증 우울증까지 걸렸어요. 그는 죽을 거예요...”그는 죽을 거예요...서유는 창백해진 작은 얼굴을 들어
서유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뭔가 말하려는 찰나, 검은 그림자가 갑자기 달려와 심형진을 한 발로 걷어차 땅바닥에 쓰러뜨렸다. 그 검은 그림자는 곧바로 심형진의 몸 위에 올라타 주먹을 높이 들어올리더니 온 힘을 다해 심형진의 얼굴을 내리쳤다.“가혜 씨를 괴롭히고 내 형수님 앞에서 헛소문을 퍼뜨리다니,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이연석은 한 번도 누군가를 이토록 증오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거의 여지를 남기지 않고 온몸의 힘을 주먹에 실어 심형진을 향해 마구 내리꽂았다. 심형진은 이미 칼에 찔린 상처가 있는 데다 환자 가족에게 맞기까지 했으니 기량천의 이런 폭행을 어떻게 막아낼 수 있겠는가. 순식간에 그의 얼굴은 시퍼렇게 멍들었고 입가는 찢어졌다. 몇 대 맞지도 않아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아마도 그가 사람을 때려죽일까 봐 두려웠던 모양이다. 정가혜와 서유는 서둘러 앞으로 나가 분노에 차 있는 기량천을 말렸다.마침 그때 주서희가 경비원들을 이끌고 달려왔고, 경비원 몇 명이 앞으로 나서서 수갑을 꺼내 심형진의 손목에 채웠다.심형진이 경비원들에 의해 순식간에 제압되는 것을 보고 나서야 주서희는 몸을 돌려 정가혜와 서유를 붙잡고 위아래로 꼼꼼히 살펴보았다.“괜찮아요? 둘 다 다친 데는 없어요?”서유는 고개를 저은 뒤 주서희에게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경찰이 개입했다고 하지 않았냐며, 어째서 심형진이 입원실까지 올 수 있었는지 물었다.주서희는 심형진을 경찰에 인계한 후 심형진이 경찰에게 사무실에 임 선생을 해치려 한 증거가 있는데 자신이 숨겨뒀다고 말했다고 설명했다. 경비원들이 그를 데리고 가서 찾으려 했는데, 심형진이 그 틈을 타 경비원을 따돌리고 병원 구조에 익숙한 점을 이용해 직원 통로로 달아났다고 했다. 경비원들이 병원을 한 바퀴 뒤졌고, 주서희는 이 사실을 듣자마자 심형진이 틀림없이 입원실로 정가혜를 찾아갔을 거라고 짐작하고 경비원들과 함께 급히 달려왔다고 했다.심형진은 살인을 저질렀고 강간미수 죄까지 범했으니 평생 감옥에 갇힐 만했다
이승하는 회사 일을 일찌감치 블루리도로 돌아왔다. 들어오니 서유가 거실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겨있었다. 외투를 벗어 하인에게 건네주고는 한 손으로 넥타이를 풀면서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오늘은 일 안 했어?”평소 이 시간에 돌아오면 그녀는 늘 서재에서 일을 하고 있었지만 오늘은 어찌 된 일인지 거실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다정한 그의 목소리에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손이 조금 아파서요.”그 말에 그가 넥타이도 풀지 않고 그녀의 손을 잡고는 세심하게 손목을 문질렀다. “당신 언니가 생전에 남긴 프로젝트만 아니었다면 절대 이렇게 당신 힘들게 하지 않았을 거야.”그녀에게 최고의 삶을 주고 싶었고 평생 걱정 없이 살게 해주고 싶었다. 자신의 손을 주무르는 그를 쳐다보며 한동안 생각에 잠겼던 그녀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사월이가 우울증에 걸린 사실을 당신은 알고 있었어요?”손목을 주무르던 그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그가 짙은 속눈썹을 들어 올리고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그녀는 어느새 눈 밑이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그녀가 이미 알게 되었으니 그는 계속 망설이고 생각할 기회를 잃고 말았다. “알고 있었어.”이미 답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직접 인정하는 순간 그녀는 마음이 아팠다.“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요?”그가 그녀의 손을 천천히 놓아주고는 한쪽 소파에 기대어 앉아 약간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당신이 난처해하고 죄책감을 느낄까 봐...”“그래서 일부러 날 속인 거예요?”검고 짙은 그의 눈썹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지금 송사월 때문에 나한테 따지는 거야?”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그의 얼굴을 본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게 아니라 나한테 제때 알려줬어야죠.”“알려주면 뭐가 달라지는데? 병이 하루아침에 낫기라도 한대?”그 말에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을 멈추고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그래서 나한테 얘기 안 했던 거예요? 당신이 그런 생각을 할 줄은 몰랐어요.”조금 화가
그녀가 화가 나서 한 말인 줄 알면서도 주체할 수 없이 마음이 아팠다. 신발을 갈아 신고 옷을 가지러 갈 때까지도 그는 다가오지 않았고 그녀는 이를 악문 채 집을 나섰다.문이 닫히는 순간, 그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고 두통이 몰려와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고개를 돌려 정원 밖을 쳐다보니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왠지 모르게 잔뜩 풀이 죽은 것 같았다.한편, 블루리도를 나선 그녀는 아무 데도 가지 않고 나무 아래에 앉아 마음을 가라앉혔다. 잠시 후, 이승하의 차가 눈앞을 빠르게 지나가는 것을 보고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차는 수백 미터 앞으로 달려가더니 갑자기 멈추고 후진했다.차가 멈추기도 전에 뒷좌석의 문이 열렸고 그가 차에서 내려와 그녀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그녀를 보니 마음이 아팠다. 그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손을 뻗어 이마의 땀을 닦아주었다.“이러다가 더위 먹겠어. 일단 집으로 가자. 싸우더라도 집에 가서 싸워.”분명 그도 화가 났을 텐데 화를 참으며 자신을 달래러 온 그 모습에 그녀는 마음이 풀렸다.“누가 싸운대요?”마음이 풀린 건지 말투가 한결 누그러들었다.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앞에 내밀었다. “알았어. 그만 싸우고 집에 가자.”그늘 아래 앉아 있던 여자는 남자의 손을 한 번 쳐다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집에 차가운 녹두 수프 있어요?”하얗게 질렸던 그의 얼굴은 점차 희미한 웃음으로 물들었다.“글쎄. 집에 가서 주 집사님한테 물어봐.”“그래요.”그녀는 땀이 뚝뚝 떨어지는 손을 그의 손바닥에 넣고 일부러 손을 문질렀다. 이 남자 때문에 화가 나서 뛰쳐나와 더워죽는 줄 알았으니까. 결벽증이 있는 남자는 조금도 꺼리지 않고 그녀의 손을 꼭 잡은 채 차에 올라타 물티슈로 그녀의 손을 닦아주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그녀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미안해요. 왜 나한테 일부러 속인 거냐고 당신한테 따지는 게 아니었어요.”그 말 때문에 이승하가 오해를 한 것이
“당신이 가면...”송사월이 이승하를 보면 병이 더 악화될까 봐 망설여졌다. “당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난 꼭 같이 가야겠어.”그녀를 안고 있는 남자의 차가운 눈동자에 약간의 질투가 서려 있었다.“송사월은 만나지 않으면 될 거 아니야.”가슴이 따뜻해진 그녀는 손을 뻗어 잘생긴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승하 씨 진짜 좋은 사람이에요.”그녀의 남편은 겉으로는 강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녀를 위해 무엇이든 양보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 사랑이 가득한 것을 보고 그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든든해졌다. 그가 손을 뻗어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는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송사월을 돌봐주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어. 하지만...”그가 그녀의 턱을 치켜올리며 포악한 얼굴을 드러냈다.“밤에는 꼭 나한테 돌아와야 해.”낮에는 송사월을 돌보는 걸 받아들일 수 있지만 밤에는 절대 안 되는 일이었다. 병을 앓고 있는 송사월을 만나면 그녀가 측은지심이 생길 게 뻔한 일이었다. 두 사람이 오랫동안 함께 지내다가 20여 년의 감정이 되살아날까 봐 걱정되었다.그녀를 믿지 못하는 게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원래 통제되지 않는 것이니까.그도 그랬었다. 한때는 서유를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주체할 수 없이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가 낮에 흔들리기라도 하면 밤에 그녀의 몸과 마음을 다시 붙잡을 생각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곁에 있기만 한다면 그녀의 마음을 죽을 때까지 붙잡고 있을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빼앗길 생각이 없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는 걸 전혀 모르고 있던 서유는 고개를 숙이고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일단 가서 상황 보고 결정해요.”현재 송사월의 상황이 어떠한지 먼저 알아보고 결정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같이 가겠다는 제안을 그녀가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그가 그제야 질투가 가득 찬 눈빛을 거두고는 운전석에 앉아 있는 기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잠깐 나가 있어.”백미러를 통해 눈빛이 이
한편, 정가혜의 부상은 주로 외상이었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퇴원할 수 있었다.퇴원하는 날, 주서희는 병실에 와서 그녀의 짐을 챙겨주었다. 심형진의 일 때문에 그녀는 매번 정가혜를 볼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두 사람을 소개시켜준 사람이 그녀였고 심형진의 인품에 대해 높이 평가를 했던 사람도 그녀였다. 근데 이런 일이 발생하여 정가혜가 이렇게 상처를 입게 된 걸 보니 그녀는 너무 미안했다.그러나 정가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고 그녀한테 마음에 두지 말라고 그녀를 다독였다.어릴 때부터 별의별 일들을 다 겪은 사람이라 이 정도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형진 선배도 벌을 받게 되었잖아요.”이승하는 심형진이 송사월을 빌미로 그와 서유를 이간질했다는 걸 알고는 이 사건을 맡은 사람에게 압력을 가하였고 결국 심형진은 빠르게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연석도 그 일에 힘을 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심형진의 부모가 데려온 변호사는 법정에서 단이수의 몇 마디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심형진이 무기징역을 선고받는 건 이미 정해진 일이었다. 강간미수가 아니라 고의적으로 환자를 음해한 일 때문이었다. 그 환자의 가족들과 학생들은 모두 세계적으로 일정한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절대 심형진을 놓아줄 리가 없었다. 전에 이승하가 심형진을 바로 처리하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병원 환자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마땅히 환자의 가족들에게 심형진을 맡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들을 주서희는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심형진 때문에 송사월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고 그 일로 인해 서유와 이승하의 사이가 틀어지게 될까 봐 걱정이 되었다. “심각한 우울증은 불치병이라 고치기 어려워요. 서유 씨가 송사월 씨를 만나러 가면 어떤 일이 생기게 될지...”옷을 갈아입고 있던 정가혜는 절망에 가득 차 있지만 겉으로는 내색조차 하지 않는 송사월의 모습이 떠올라 미간을 찌푸렸다.“사실 사월이는 서유를 마음에서 내
사실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 그의 자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다만 이젠 더 이상 남자를 믿지 못하였고 자신은 더 이상 결혼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주서희가 대답하기도 전에 정가혜는 바로 커튼을 열었고 멍하니 서 있는 이연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창밖으로 들어온 빛이 그를 비추었고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그의 눈을 마주칠 용기가 없어서 그녀는 재빨리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이연석이 입을 열었다.“짐은 다 챙겼어요?”고개를 끄덕이고 옆에 놓인 상자를 들려고 하는 데 그가 한발 앞서 손을 뻗었다.“가요. 집에 데려다줄게요.”그는 고현서에 대해 설명하지도 않았고 정가혜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도 묻지 않은 채 짐만 챙겨 병실을 나섰다. 훤칠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화를 참으면서 그녀와 말다툼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조금은... 성숙해진 것 같았다. 이때, 옆에 있던 주서희가 한마디 거들었다.“젊었을 때 자유분방하던 사람도 점차 좋은 남자가 될 수 있는 거예요”그 도리를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그녀는 그저 주서희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 얘기는 그만해요. 참. 윤주원 선생도 이젠 누명을 벗었으니 두 사람 함께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주서희의 안색이 점차 어두워졌다.“소준섭 씨와의 재판에서 이기면요. 그땐 평생 윤 선생과 함께할 거예요.”그녀는 이지민과 성격이 비슷했다. 자신이 뭘 원하는지 하고 싶은 게 뭔지 똑똑히 알고 있었고 한번 결정한 일은 뒤돌아보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성격이었다. 다만 현재는 소송의 승패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윤주원과 함께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그를 보호하기 위해서였고 그의 집안에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부산에서 재판이 진행되죠? 마침 나랑 서유도 부산에 사월이 보러 갈 예정이거든요. 우리랑 같이 가요.”주서희는 미소를 지으며 거절했다.“아니에요. 재판 하루 전에 부산에 갈 거예요. 서유 씨한테는 송사월 씨의
두 사람은 모두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절망에 빠졌었고 지옥에서 발버둥 치다가 빠져나올 수가 없어서 우울증에 걸리게 된 것이다.이지민과 김시후는 비슷한 경험을 했고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전부를 다 걸고 사랑했지만 결국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된 자들이었다. 다만 이지민은 이제 그 아픔에서 벗어났고 최선을 다해 사랑했던 그 사람도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알게 되어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진 상태였다. 그러나 김시후는...그도 어쩔 수 없이 놓아주긴 했지만 더 잔인했던 건 그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만큼 사랑했던 사람이 그가 기억을 되찾게 되자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지민이 겪은 아픔보다 김시후가 겪은 아픔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더 큰 것이었다. 10년을 넘게 사랑한 여자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그의 절망적인 고통을 이지민은 공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소식을 듣고 바로 짐을 챙겨 이리 달려온 것이었다. 다른 이유 같은 건 없었다. 그저 그 당시 우울한 마음에 자살하고 싶었을 때 누군가 와서 자신을 도와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던 터라 그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김시후가 여태껏 어떻게 어떤 신념으로 버텨왔는지 모르겠다. 그저 이런 병에 걸린 사람을 죽을 때까지 무기력하게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이지민이 온 것을 보고 서유는 깜짝 놀랐다. 그녀가 우울증을 앓았던 일은 서유도 조금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쩌면 그녀가 정말 송사월을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귀찮지 않다면 같이 가요.”이지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유를 향해 단아한 미소를 지었다.“남을 돕는 일인데 귀찮을 리가요?”그녀는 봉사활동도 많이 하면서 절망에 빠진 많은 사람들을 도왔었다. 이 일도 그녀에게는 그저 남을 도와주는 좋은 일에 불과했다. 성격이 온화한 그녀는 부잣집 아가씨티가 조금도 없었고 오히려 붙임성이 좋아서 서유는 그녀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안주인이 허락했으니 이승하도 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