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화가 나서 한 말인 줄 알면서도 주체할 수 없이 마음이 아팠다. 신발을 갈아 신고 옷을 가지러 갈 때까지도 그는 다가오지 않았고 그녀는 이를 악문 채 집을 나섰다.문이 닫히는 순간, 그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고 두통이 몰려와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고개를 돌려 정원 밖을 쳐다보니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왠지 모르게 잔뜩 풀이 죽은 것 같았다.한편, 블루리도를 나선 그녀는 아무 데도 가지 않고 나무 아래에 앉아 마음을 가라앉혔다. 잠시 후, 이승하의 차가 눈앞을 빠르게 지나가는 것을 보고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차는 수백 미터 앞으로 달려가더니 갑자기 멈추고 후진했다.차가 멈추기도 전에 뒷좌석의 문이 열렸고 그가 차에서 내려와 그녀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그녀를 보니 마음이 아팠다. 그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손을 뻗어 이마의 땀을 닦아주었다.“이러다가 더위 먹겠어. 일단 집으로 가자. 싸우더라도 집에 가서 싸워.”분명 그도 화가 났을 텐데 화를 참으며 자신을 달래러 온 그 모습에 그녀는 마음이 풀렸다.“누가 싸운대요?”마음이 풀린 건지 말투가 한결 누그러들었다.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앞에 내밀었다. “알았어. 그만 싸우고 집에 가자.”그늘 아래 앉아 있던 여자는 남자의 손을 한 번 쳐다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집에 차가운 녹두 수프 있어요?”하얗게 질렸던 그의 얼굴은 점차 희미한 웃음으로 물들었다.“글쎄. 집에 가서 주 집사님한테 물어봐.”“그래요.”그녀는 땀이 뚝뚝 떨어지는 손을 그의 손바닥에 넣고 일부러 손을 문질렀다. 이 남자 때문에 화가 나서 뛰쳐나와 더워죽는 줄 알았으니까. 결벽증이 있는 남자는 조금도 꺼리지 않고 그녀의 손을 꼭 잡은 채 차에 올라타 물티슈로 그녀의 손을 닦아주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그녀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미안해요. 왜 나한테 일부러 속인 거냐고 당신한테 따지는 게 아니었어요.”그 말 때문에 이승하가 오해를 한 것이
“당신이 가면...”송사월이 이승하를 보면 병이 더 악화될까 봐 망설여졌다. “당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난 꼭 같이 가야겠어.”그녀를 안고 있는 남자의 차가운 눈동자에 약간의 질투가 서려 있었다.“송사월은 만나지 않으면 될 거 아니야.”가슴이 따뜻해진 그녀는 손을 뻗어 잘생긴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승하 씨 진짜 좋은 사람이에요.”그녀의 남편은 겉으로는 강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녀를 위해 무엇이든 양보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 사랑이 가득한 것을 보고 그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든든해졌다. 그가 손을 뻗어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는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송사월을 돌봐주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어. 하지만...”그가 그녀의 턱을 치켜올리며 포악한 얼굴을 드러냈다.“밤에는 꼭 나한테 돌아와야 해.”낮에는 송사월을 돌보는 걸 받아들일 수 있지만 밤에는 절대 안 되는 일이었다. 병을 앓고 있는 송사월을 만나면 그녀가 측은지심이 생길 게 뻔한 일이었다. 두 사람이 오랫동안 함께 지내다가 20여 년의 감정이 되살아날까 봐 걱정되었다.그녀를 믿지 못하는 게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원래 통제되지 않는 것이니까.그도 그랬었다. 한때는 서유를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주체할 수 없이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가 낮에 흔들리기라도 하면 밤에 그녀의 몸과 마음을 다시 붙잡을 생각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곁에 있기만 한다면 그녀의 마음을 죽을 때까지 붙잡고 있을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빼앗길 생각이 없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는 걸 전혀 모르고 있던 서유는 고개를 숙이고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일단 가서 상황 보고 결정해요.”현재 송사월의 상황이 어떠한지 먼저 알아보고 결정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같이 가겠다는 제안을 그녀가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그가 그제야 질투가 가득 찬 눈빛을 거두고는 운전석에 앉아 있는 기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잠깐 나가 있어.”백미러를 통해 눈빛이 이
한편, 정가혜의 부상은 주로 외상이었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퇴원할 수 있었다.퇴원하는 날, 주서희는 병실에 와서 그녀의 짐을 챙겨주었다. 심형진의 일 때문에 그녀는 매번 정가혜를 볼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두 사람을 소개시켜준 사람이 그녀였고 심형진의 인품에 대해 높이 평가를 했던 사람도 그녀였다. 근데 이런 일이 발생하여 정가혜가 이렇게 상처를 입게 된 걸 보니 그녀는 너무 미안했다.그러나 정가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고 그녀한테 마음에 두지 말라고 그녀를 다독였다.어릴 때부터 별의별 일들을 다 겪은 사람이라 이 정도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형진 선배도 벌을 받게 되었잖아요.”이승하는 심형진이 송사월을 빌미로 그와 서유를 이간질했다는 걸 알고는 이 사건을 맡은 사람에게 압력을 가하였고 결국 심형진은 빠르게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연석도 그 일에 힘을 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심형진의 부모가 데려온 변호사는 법정에서 단이수의 몇 마디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심형진이 무기징역을 선고받는 건 이미 정해진 일이었다. 강간미수가 아니라 고의적으로 환자를 음해한 일 때문이었다. 그 환자의 가족들과 학생들은 모두 세계적으로 일정한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절대 심형진을 놓아줄 리가 없었다. 전에 이승하가 심형진을 바로 처리하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병원 환자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마땅히 환자의 가족들에게 심형진을 맡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들을 주서희는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심형진 때문에 송사월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고 그 일로 인해 서유와 이승하의 사이가 틀어지게 될까 봐 걱정이 되었다. “심각한 우울증은 불치병이라 고치기 어려워요. 서유 씨가 송사월 씨를 만나러 가면 어떤 일이 생기게 될지...”옷을 갈아입고 있던 정가혜는 절망에 가득 차 있지만 겉으로는 내색조차 하지 않는 송사월의 모습이 떠올라 미간을 찌푸렸다.“사실 사월이는 서유를 마음에서 내
사실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 그의 자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다만 이젠 더 이상 남자를 믿지 못하였고 자신은 더 이상 결혼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주서희가 대답하기도 전에 정가혜는 바로 커튼을 열었고 멍하니 서 있는 이연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창밖으로 들어온 빛이 그를 비추었고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그의 눈을 마주칠 용기가 없어서 그녀는 재빨리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이연석이 입을 열었다.“짐은 다 챙겼어요?”고개를 끄덕이고 옆에 놓인 상자를 들려고 하는 데 그가 한발 앞서 손을 뻗었다.“가요. 집에 데려다줄게요.”그는 고현서에 대해 설명하지도 않았고 정가혜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도 묻지 않은 채 짐만 챙겨 병실을 나섰다. 훤칠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화를 참으면서 그녀와 말다툼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조금은... 성숙해진 것 같았다. 이때, 옆에 있던 주서희가 한마디 거들었다.“젊었을 때 자유분방하던 사람도 점차 좋은 남자가 될 수 있는 거예요”그 도리를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그녀는 그저 주서희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 얘기는 그만해요. 참. 윤주원 선생도 이젠 누명을 벗었으니 두 사람 함께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주서희의 안색이 점차 어두워졌다.“소준섭 씨와의 재판에서 이기면요. 그땐 평생 윤 선생과 함께할 거예요.”그녀는 이지민과 성격이 비슷했다. 자신이 뭘 원하는지 하고 싶은 게 뭔지 똑똑히 알고 있었고 한번 결정한 일은 뒤돌아보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성격이었다. 다만 현재는 소송의 승패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윤주원과 함께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그를 보호하기 위해서였고 그의 집안에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부산에서 재판이 진행되죠? 마침 나랑 서유도 부산에 사월이 보러 갈 예정이거든요. 우리랑 같이 가요.”주서희는 미소를 지으며 거절했다.“아니에요. 재판 하루 전에 부산에 갈 거예요. 서유 씨한테는 송사월 씨의
두 사람은 모두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절망에 빠졌었고 지옥에서 발버둥 치다가 빠져나올 수가 없어서 우울증에 걸리게 된 것이다.이지민과 김시후는 비슷한 경험을 했고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전부를 다 걸고 사랑했지만 결국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된 자들이었다. 다만 이지민은 이제 그 아픔에서 벗어났고 최선을 다해 사랑했던 그 사람도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알게 되어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진 상태였다. 그러나 김시후는...그도 어쩔 수 없이 놓아주긴 했지만 더 잔인했던 건 그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만큼 사랑했던 사람이 그가 기억을 되찾게 되자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지민이 겪은 아픔보다 김시후가 겪은 아픔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더 큰 것이었다. 10년을 넘게 사랑한 여자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그의 절망적인 고통을 이지민은 공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소식을 듣고 바로 짐을 챙겨 이리 달려온 것이었다. 다른 이유 같은 건 없었다. 그저 그 당시 우울한 마음에 자살하고 싶었을 때 누군가 와서 자신을 도와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던 터라 그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김시후가 여태껏 어떻게 어떤 신념으로 버텨왔는지 모르겠다. 그저 이런 병에 걸린 사람을 죽을 때까지 무기력하게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이지민이 온 것을 보고 서유는 깜짝 놀랐다. 그녀가 우울증을 앓았던 일은 서유도 조금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쩌면 그녀가 정말 송사월을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귀찮지 않다면 같이 가요.”이지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유를 향해 단아한 미소를 지었다.“남을 돕는 일인데 귀찮을 리가요?”그녀는 봉사활동도 많이 하면서 절망에 빠진 많은 사람들을 도왔었다. 이 일도 그녀에게는 그저 남을 도와주는 좋은 일에 불과했다. 성격이 온화한 그녀는 부잣집 아가씨티가 조금도 없었고 오히려 붙임성이 좋아서 서유는 그녀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안주인이 허락했으니 이승하도 당
그녀의 제안을 즉시 받아들인 정가혜는 술 몇 잔을 마셔도 쓰러지기는커녕 얼굴색 하나 안 바뀌고 자신을 향해 웃는 그녀의 모습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온유한 외모 아래 강한 면이 있는 이지민을 보며 정가혜는 황급히 술잔을 거두었다. “그만 마셔요. 내가 졌어요...”이지민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잡아당겼다.“졌으니까 속마음 털어놓아요.”...차라리 서유의 집에 남아있을 걸 그랬다. 이승하를 마주하며 멀뚱멀뚱 소파에 앉아 있기보다 못하였다. “무슨 얘기가 듣고 싶은 건데요?”이지민은 술잔을 쥐고 바에 등을 기댄 채 차들이 분주히 오고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우리 오빠 얘기 좀 해줘요.”그 말에 정가혜는 고개를 떨구었다. “지금 내 꼴을 봐봐요. 연석 씨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을까요?”이지민은 고개를 돌리고 자신을 비하하는 그녀를 쳐다보았다.“가혜 씨만 원한다면 자격이라는 건 별거 아니에요.”무심한 그녀의 말투에 정가혜는 자신보다 그녀가 더 성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그렇게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픈 사랑을 겪고 우울증도 겪었으니 성숙하지 않을 리가 있나?다만 그녀의 문제에 정가혜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손에 든 와인잔을 쳐다보며 한참 동안 침묵했다.“다시는 결혼 같은 거 안 해요.”이연석의 얘기는 꺼내지 않고 한 마디로 답을 줬다.하지만 이지민은 잘 알고 있었다. 보통 여자들은 그 남자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을 때 그녀처럼 분명하게 말을 한다.정가혜는 분명하지가 않았다. 다시는 결혼하지 않겠다는 건 자신을 단속하는 것일 뿐 이연석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었다. 오빠한테 아직은 기회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기회를 어떻게 잡을지는 오빠한테 달린 것이다. “지민 씨는요?”정가혜가 고개를 돌리고 바에 기대어 있는 이지민을 쳐다보았다. 넓은 집안에는 바에 있는 작은 등만 켜져 있었다. 눈에 거슬리지 않는 조명 몇 개가 두 사람의 머리 위를 비추며 따뜻한 빛을 발했다.“이수 오빠 말이에요? 아니면
한편, 서유는 침대가 바뀌어서 그런 건지 이리저리 뒤척거리며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그녀는 아예 눈을 뜨고 옆에 누워있는 이승하를 바라보았고 눈을 질끈 감고 있는 남자는 잠이 든듯했다.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긴 속눈썹에 가져다 댔다. 바로 이때, 그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더니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송사월 때문에 잠 못 자면 벌 줄 거야.”질투가 섞인 차가운 그의 목소리가 전해지자 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월이 생각 한 거 아니에요.”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무슨 생각 하고 있었어?”“달이 왜 이렇게 동그랗게 떠 있나 그 생각 하고 있었어요. 달빛에 잠이 안 와요.”그가 그녀의 시선을 따라 창밖의 달을 흘끗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침대에서 일어나 커튼을 치고 무드 등을 껐다.“이젠 아무것도 안 보여. 얼른 자. 내일 송사월 만나러 가야 하잖아.”그의 말투는 불쾌해 보였다. 송사월이라는 이름을 말하며 그가 이를 악물었다.깜깜해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 틈을 타 그녀가 몰래 그를 노려봤다. 그런데 이때 그가 단단한 팔을 뻗었고 그녀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남자가 시력이 그렇게 좋은 건가 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그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팔베개 해줄게.”잠이 오지 않을 때면 늘 그의 팔을 베고 그의 품에 안겨 다리를 그의 허리에 올려놓았다.매번 그 자세를 취할 때마다 그녀는 곧 편안히 잠들 수가 있었다. 그녀의 잠버릇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늘 그녀에게 맞춰주었다. 가끔은 팔이 저려도 여전히 꼼짝하지 않았었다. 그녀는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가 그의 품에 안겼다. 은은한 그의 향기를 맡으며 그녀는 점점 잠에 빠져들었다. 그녀를 안은 채 그는 한참 동안 조용히 그녀의 숨소리를 들었다. 예전처럼 그녀의 입에서 송사월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자 그제야 마음이 안정되었다. 사실 지금까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8년 동안 그를 사랑했다고 하면서도 그녀가 왜 잠결에 송사월이라는 이름을 그리 많이 불렀던
차는 곧 이지민의 아파트 아래층에 멈춰 섰고 기다리고 있던 정가혜는 차가 오자 얼른 앞으로 다가가 차 문을 당겼다.운전자석에 앉아 있는 이승화와 중년 여성 스타일의 서유를 보고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침을 삼켰다.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뒷좌석에 올라탔다.“지민 씨는?”“지금은 좀 조심스러우니까 일단 우리가 가서 상황을 파악한 뒤 오겠다고 했어.”짧게 해명한 뒤 그녀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아내가 첫사랑을 만나러 가는데 남편이 직접 데려다준다고?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는가?그래도 가는 내내 차 안의 분위기는 나름 화기애애했고 갈등은 없었다.김씨 가문의 별장에 도착하자 서유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졌다. 그 모습에 정가혜는 예전에 서유가 이 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자신을 버리지 말라고 송사월에게 애원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낯익은 기억이 머릿속에 떠올라 서유는 가슴이 아팠고 한참이 지나서야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있었다. 한편, 이승하는 그녀가 송사월을 만나는 일 때문에 긴장하고 무서워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줄 알았다.핸들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두 시간 줄 테니까 병문안만 하고 얼른 나와.”시간까지 정해놓다니...추억에 젖어있던 서유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이 남자 정말 이제 와서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거야? 분명히 낮에는 사월이를 돌봐줘도 된다고 했잖아? 저녁에만 돌아오면 된다고 하더니 왜 시간을 재고 있어?뒷좌석에 앉아 있던 정가혜는 시무룩해진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고는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 그 순간, 운전자석에서 차갑고 고급스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적당한 거리 유지하기.”깜짝 놀란 정가혜는 손을 움츠리더니 바로 얌전히 앉아 있었다.서유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는 그를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또 있어요?”요구를 한 번에 다 말하라고 한 줄 알고 그는 눈을 내리깐 채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요. 나랑 같이 가서 옆에서 수시로 날 감시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