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려 어두운 곳에 있는 그를 쳐다보았고 눈 밑의 흐려진 시선 때문에 그의 안색을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었다.“선배...”술도 마시지 않고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 왜 심형진이 잘 보이지 않는 걸까?시선이 갈수록 흐려질 뿐만 아니라 그녀의 몸은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했다.처음에는 여름이니 밖의 날씨가 더워서 그런 줄 알았다.아래쪽이 점점 뜨거워지는 걸 느낀 그녀는 이게 단순히 날씨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는 걸 눈치챘다.그녀는 여전히 심형진을 의심하기 싫었지만 이를 악물고 그에게 따져 물었다.“선배,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괴로워하는 그녀에게 다가와 그녀를 얼른 품에 꼭 안았다.“겁먹지 마. 약을 아주 조금 탄 것뿐이니까.”약이라니...그녀는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그러니까 방금 그 디퓨저의 향에...“왜 그런 거예요?”그의 과거와 그가 했던 행동들이 충격적이었다면 지금의 그는 그녀를 두렵게 만들었다. 두려움에 가득 찬 그녀를 보고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그녀를 다독였다 .“오늘 우리 100일이잖아. 그래서 내가 특별히 준비했어. 이젠 자연스럽게 잘 때도 됐잖아 .”그러니까 오늘 밤 그의 목적은 그녀의 생일을 축하해주는 것도 아니었고 100일 기념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그녀와 잠자리를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사실 나도 쓸지 말지 고민했었는데 네가 헤어지자고 하니까 마음을 독하게 먹은 거야.”말을 마친 그가 그녀를 벽에 밀치고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미안해.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았어. 근데 나 정말 너 안고 싶어.”나쁜 짓을 하면서까지도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미안하다는 말을 신사적으로 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그녀는 그에 대해 완전히 실망했고 깨끗이 마음이 정리되었고 연민조차 없어졌다. “당장 나 놔주면 고소하지 않을게요. 하지만 선배가 강제로 뭘 한다면 그땐 반드시 소송 걸 거예요.”그가 입꼬리를 잡아당기며 은은한
그의 손이 얼굴에 닿자 그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 놔줘요. 선배가 무슨 조건을 제시해도 다 들어줄게요.”말을 하면서 그녀는 핸드폰을 잡고 미친 듯이 지문을 눌렀다.비상경보를 켜거나 화면을 열어 숫자 1을 입력하려고 했다.바로 서유한테 전화가 가기 때문에 1만 누르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심형진이 그녀의 생각을 눈치채고는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고 핸드폰을 빼앗았다. “이연석한테 전화라도 하게?”그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정가혜, 그 사람은 이미 너 포기했어. 널 구하러 오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헛된 꿈 버려.”그가 그녀의 핸드폰을 집어 옆에 있는 아이스박스에 던져버렸다.그 아이스박스에는 술도 있고 얼음도 있고 물도 있었다. 핸드폰은 그 안으로 떨어지자마자 이내 화면이 어두워졌다.어두워진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며 그녀는 마지막 희망을 잃었고 눈빛이 어두워졌다. “이연석 씨를 찾을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어요. 이 모든 건 선배의 열등감 때문에 생긴 착각이에요.”스스로 이연석을 이길 수 없다는 열등감에 계속해서 이연석을 언급한 것이다.“마음대로 생각해. 결국 그 인간의 여자가 지금 내 아래 누워있으니까.”말을 마친 그가 도망치려고 발버둥 치는 그녀를 덥석 잡았다.“착하지, 말 들어. 움직이지 마...”그는 몸이 나른한 그녀를 밑에 깔고는 다시 손을 뻗어 그녀의 옷을 풀어 주었다.온몬이 뜨거워지고 정신이 흐릿해진 그녀는 이성을 끝까지 붙잡고 있지 않았다면 아마 눈앞의 사람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힘으로는 그를 밀어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있다고 해도 그녀한테는 그럴 힘이 없었다. 그녀는 흐릿한 눈동자를 굴리며 방안의 환경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정원의 중심에 있는 유리방이었고 창문도 없고 전체가 밀폐되어 있는 곳이었으며 밖에서는 안을 볼 수가 없었다.이곳에서 탈출하려면 정문으로 나가야 하지만 그가 있는 이상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그녀는 아이스박스를 한 번 쳐다본 후 시선을 다시 심형진에게
“너...”그가 한마디 내뱉자마자 그녀가 손에 닿은 술병을 들어 그의 이마를 내리쳤다.유리가 깨지는 순간 그의 얼굴에 술이 쏟아졌고 술병을 든 그녀의 손등에도 상처가 났다. 붉은 피가 흘러내려 그의 이마에 방울방울 떨어졌고 그의 피와 섞여서 침대로 굴러떨어졌다. 새빨간 피가 새하얀 침대 시트를 붉게 물들였고 그의 눈도 점차 빨갛게 변해버렸다.정가혜가 가녀린 여자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사나운 면이 있을 줄은 몰랐다.“정가혜, 그동안 어떻게 참았어?”“말했잖아요. 사람은 여러 가지 면이 있는 거라고. 선배가 본 건 내 모습의 일부일 뿐이에요.”말을 마친 그녀는 침대 시트의 술병 조각을 주워 그의 목덜미에 가져다 댔다.그런 그녀의 행동에 놀란 그는 그녀를 밀쳐내려고 했지만 머리가 빙빙 돌고 시선이 흐려졌다.술병에 머리를 맞아 움직일 수 없었던 그는 이를 악문 채 자신의 위에 앉아 있는 그녀를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날 죽이려는 거야?”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우리 사이가 끝났다는 걸 말해주고 싶을 뿐이에요. 만약 선배가 또다시 나한테 못된 짓을 한다면 내 손에 있는 유리 조각이 선배의 목을 찌르게 될 거예요.”그녀가 그의 목숨을 걸고 협박할 줄은 몰랐다. 이때, 그녀가 몸을 숙이더니 새빨간 눈으로 그를 빤히 노려보았다.“난 고아예요.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어서 죽으면 그만이에요. 두려울 게 없다는 뜻이죠.”그가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그녀는 독설을 내뱉고 침대에서 일어나 아이스박스에 있던 핸드폰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핸드폰을 쥐고 간신히 몸을 겨누며 유리방을 나와 엘리베이터로 향하는데 심형진이 머리를 감싼 채 뒤쫓아왔다. “정가혜, 나랑 있는 100일 동안 넌 나한테 한 번도 설렜던 적 없어?”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미친 듯이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심형진은 벽을 짚고 몇 발짝 걸어오다가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자세를 바로잡고 그녀를 쫓아오려는 순간 엘리베
한편, 배하린이 허리를 감싸자 이연석의 표정이 갑자기 차갑게 변하였다.그가 있는 힘껏 그녀를 밀어내며 입을 열었다.“분명히 얘기했지. 다시는 나 찾아 오지 말라고.”어렵게 그를 만나게 되었는데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있나? 그녀가 그의 손을 잡아당기며 어리광을 부렸다.“너무 그러지 마. 어찌 됐든 내가 너 첫사랑이고 네 목숨까지 구해줬는데. 그 나이 많은 여자 때문에 날 이렇게 버리는 거야?”그가 그녀의 손길을 뿌리쳤다.“배하린, 네가 날 구해준 건 고마워. 하지만 그 고마움에 대한 보답은 이미 충분히 했어. 너한테 더 이상 빚진 거 없다고. 그리고 첫사랑이라는 거...”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혐오가 가득 찬 눈빛을 보이며 입을 열었다.“그 당시 네가 우리 둘째 형한테 꼬리 친 거 나 다 알고 있어.”그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오래전의 일을 이연석이 알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이 그녀는 얼굴이 굳어져 버렸다. 그는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든 전혀 상관하지 않았고 그랜드 호텔의 꼭대기 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바닥에 누워 의식을 잃은 심형진의 모습만 보였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던 그가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단이수에게 전화를 걸었다.“어떻게 됐어? 심형진이 가혜 씨한테 무슨 짓이라도 한 거야?”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단이수가 먼저 물었다.그 녹음 파일과 사진들은 모두 단이수가 보낸 것이었다. 정가혜의 성격으로는 분명 그것들을 보고 심형진과 헤어질 것이라고 짐작했다.다만 심형진의 말이 마음에 걸렸던 그는 정가혜한테 나쁜 일이라도 벌어질까 봐 걱정되었다. 그 생각에 그는 바로 자신이 한 일을 이연석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고 얼른 위치를 파악해서 정가혜를 구하러 가라고 했다. 엘리베이터로 다시 들어온 이연석이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단이수를 나무랐다.“내가 몇 번을 말해. 전남편이 바람을 피워서 이혼한 여자라 이런 사진들 보면 받아들일 수 없을 거라고 했잖아. 끝내 내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어렴풋이 가시덤불이 움푹 패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 가시덤불에 다가가 허리를 굽히고 떨리는 손으로 푸른 풀이 무성한 가시덤불을 헤집었다.남루한 옷차림에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있는 그녀를 발견한 순간 그는 멍해졌다.지금껏 두려운 게 없었던 그는 그 순간, 온몸의 피까지 차가워질 정도로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깊은 골짜기에 떨어진 것처럼 아파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뭔가 말을 하려다가 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저 떨리는 손을 내밀어 그녀의 차가운 얼굴을 만졌다.누군가 자신을 만지는 것을 느낀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고 움직이려 하였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눈물이 핏물과 함께 섞여 천천히 흘러내렸다. “제발, 다치지 말아요. 부탁이에요.”자존심이 강한 그녀가 이렇게 애원하는 것을 보고 그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가혜 씨, 나예요.”그녀는 메마른 눈동자를 굴리며 천천히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피가 눈 앞을 가려 희미하고 잘 보이지 않았고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할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당신이 누구든 나 건드리지 말아요. 부탁이에요.”애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그는 눈시울이 붉어졌다.“나예요. 이연석.”당신인 거 알아요. 그래서 이런 내 모습을 더 보여주기 싫은 거예요.그녀는 낭패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렸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그녀의 몸에는 피를 제외하고도 가시덤불에 베인 상처가 곳곳에 있었다. 상처를 살펴보던 그는 가슴이 아파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는 그녀를 안아 올렸고 목덜미에 흐르는 핏물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묻었다. “가혜 씨, 겁먹지 말아요. 우리 이제 집에 가요.”그가 한쪽 무릎을 꿇고 조심스럽게 그녀를 끌어안는데 전에는 볼 수 없었던 다정하고 애틋한 모습이었다. 이런 자신의 모습을 그한테 보여주기 싫었지만 이미 기진맥진한 그녀는 몸부림칠 힘이 없었다.그녀는 꽉 쥐고 있던 돌멩이
자신을 믿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그녀는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한편, 이연석은 자신이 왜 대답을 안 했는지 모르겠다. 그녀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화가 나기도 했다. 심형진을 믿는 그녀한테 화가 났고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는 그녀에게 화가 났고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그녀의 말에 화가 났다. 그런 복잡한 마음을 가진 채 그녀를 안고 응급실로 뛰쳐 갔다.“얼른 이 여자 좀 구해줘요.”의사들은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급히 간호사들을 배치하여 그녀를 진료실로 보냈다.진료실의 문이 닫히는 순간 이연석은 피곤한 얼굴을 한 채 벽에 기대었다. 손에 가득 찬 피를 보면서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렸다. 어디를 다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온전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지금까지 여자 때문에 이렇게 아파해본 적이 없다. 그녀가 처음이었다. 이런 자신의 모습이 싫었지만 그녀를 차마 놓을 수가 없었다. 한편,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온 주서희가 그에게 어찌 된 일이냐고 물어보려는 찰나,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의 모습에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를 지나쳐 진료실로 바로 들어갔고 의사가 해독제를 사용하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양이 많은 건가요?”여의사는 고개조차 들지 않고 대답했다.“아니요. 다만 시간이 좀 오래돼서 독소를 제거하기가 쉽지 않네요. 외상이 많은 걸 보니 누군가와 몸싸움을 벌인 것 같아요.”정가혜는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얼굴에 묻은 핏물이 간호사에 의해 깨끗하게 처리되자 뺨을 여러 대 맞은 것 같은 부은 얼굴이 드러냈다.얼굴 양쪽이 다 부어있었고 손가락 자국이 선명하게 보였으며 가느다란 목덜미에도 자국이 있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그녀의 목을 심하게 조른 것 같았다. 그 상처들을 보고 주서희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앞으로 다가가 정가혜의 몸을 감싼 외투를 벗겼다. 안의 옷은 찢길 대로 찢어져 맨살이 훤히 드러
병원으로 가는 길에 서유는 이승하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심형진이 정가혜에게 약을 먹였고, 정가혜가 도망쳐 나온 뒤에는 술에 취한 중년 남자가 그녀를 끌고 가 폭행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필사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다면 이미 강간당했을 거라고 했다.이 말을 들은 서유는 화가 나서 눈이 붉어졌다. “심형진이 어떻게 그런 사람일 수가 있어?”그녀는 심형진이 정가혜의 선배로, 최소한 정직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강은우처럼 정가혜를 속이지는 않을 거라 여겼는데, 알고 보니 강은우보다 더 나쁜 사람이었던 것이다.한 손으로 턱을 괸 이승하의 차가운 눈빛 속에 살의가 어렸지만, 그는 서유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그녀의 손을 토닥이며 안심시켰다.차가 병원 앞에 멈추자 서유는 재빨리 차 문을 열고 응급실로 달려갔다...서서히 정신을 차린 정가혜는 몸이 그렇게 무겁고 답답하지 않다는 걸 느끼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힘겹게 눈을 돌려 병상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깊고 어두운 붉은 눈동자와 마주쳤다.그녀는 불편한 듯 시선을 돌렸지만, 자신의 손이 그에게 꽉 잡혀있는 것을 발견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있는 걸 보니 오랫동안 잡고 있었던 것 같았다.정가혜는 잠시 망설이다 손을 빼려 했지만, 이연석이 그녀의 손을 더 꽉 잡았다. 정가혜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자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요?”정가혜는 고개를 저었고, 시선은 다시 이연석의 손으로 향했다.“만지지 말아 주겠어요?”지금의 그녀는 조금 더러우니까...이연석은 그녀를 몇 초간 바라보다 손을 놓았다.정가혜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연석도 그녀를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둘이 침묵하고 있을 때 서유가 뛰어 들어왔다.“가혜야!”서유의 목소리를 듣자 정가혜의 생기 없던 눈동자에 비로소 생기가 돌았다.“서유야...”정가혜의 얼굴은 부어 있고 목에는 손자국이 있으며 이마는 깨져 있고 손에는 붕대
정가혜는 겨우 서른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미 온갖 고난을 겪었다. 고생이라면 서유도 고생했지만 그래도 정가혜보다는 조금 더 운이 좋았다. 적어도 그녀는 자신의 언니를 찾았고 어머니의 영상도 봤으며 그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가혜는 부모가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상태였다...이 모든 세월 동안 정가혜가 겪어온 일들을 생각하니 서유는 더욱 마음이 아팠다. 그녀를 꼭 안으며 말했다.“가혜야, 내가 잘못했어. 널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어.”심형진이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 즉시 그들을 말리지 않아 정가혜가 이런 일을 당하게 된 것 같아 자책했다.이미 울고 난 정가혜는 붕대를 감은 손을 들어 서유의 등에 닿은 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그녀를 위로했다.“난 괜찮아. 너무 걱정하지 마. 네 잘못도 아니야.”이건 서유와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저 자신이 연애에 있어서 늘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했을 뿐이다. 벽에 부딪혀 보고 나서야, 모든 것을 걸고 난 후에야 비로소 모든 걸 깨닫게 되는 것이다.솔직히 말해서, 그녀 같은 사람은 결혼 같은 걸 해서는 안 됐다. 그저 홀로 늙어가는 게 나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평온하게 일생을 보낼 수 있었을 텐데.이런 생각이 들자 정가혜는 여전히 병상 앞에 앉아있는 이연석을 바라보았다. 가슴 속에서 올라오는 쓰라림에 다시 한번 눈시울이 붉어졌다.“연석 씨, 날 구해줘서 고마워요.”그녀의 어조에 담긴 평온함은 마치 이 한 마디 감사 인사로 그와의 모든 관계를 정리하려는 듯했다.이연석의 굵은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뭔가 말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이 악몽에서 벗어나길 기다렸다가 다시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잘 쉬어요. 나는 좀 처리할 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요.”이연석은 이 말을 남기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러다 병실 밖에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이승하를 보았다.“어디 가?”이연석은 주먹을 꽉 쥐었고, 근육질의 팔뚝에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심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