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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4화

그녀는 손을 빼내고 담담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내가 신경 쓰이는 건 선배가 여자를 만났다는 게 아니라 날 속였다는 사실이에요.”

그녀의 전남편도 거짓말을 밥 먹듯이 했었고 위장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다만 이번에 만난 이 사람은 강은우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었다.

낯선 사람이 그녀에게 이런 사진과 녹음을 보내주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아직도 심형진이 깨끗하다고 믿고 있었을 것이다.

이젠 주제 파악이 제대로 된 듯하다. 남자 보는 눈이 없고 머리도 안 좋아서 자꾸만 남자의 겉모습에 쉽게 속는 사람인 것 같았다. 다행인 건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알고 나면 과감히 정리한다는 것이다.

“선배, 전 여자 친구가 선배의 아이까지 낳았어요. 무슨 일이었어도 그 여자를 책임져야죠. 그리고 선배의 어머니도 나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시고요. 어린 시절 날 갖지 못한 거에 대해 아쉬움이 남아있는 건 날 정말 좋아해서가 아니에요. 우리 여기까지만 해요.”

그녀는 그의 체면을 살려주었다. 모진 말도 하지 않았고 강은우와 소송했던 그때처럼 발악하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말을 마친 후 그를 밀어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챙겨 뒤돌아섰다.

엘리베이터에 다가가 버튼을 누르려고 손을 뻗는데 갑자기 그가 달려와서 뒤에서 그녀를 덥석 껴안았다.

“가혜야, 이러지 마. 스칼렛한테는 원하는 만큼 양육비를 주고 완전히 정리할게. 우리 부모님이 우리 두 사람 사이의 일에 끼어드는 일도 없게 할게. 결혼하면 국내에서 살자. 나랑 같이 해외로 가자는 말도 하지 않을게. 네가 걱정하는 문제들 내가 다 해결할게. 그러니까 제발 나 떠나지 마.”

심형진은 역시 대단했다. 단순한 여자였다면 그가 내놓은 해결책에 마음이 움직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알게 된 그녀는 그가 잔인하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자신을 위해 묵묵히 아이까지 낳은 여자와 깨끗하게 정리하겠다니. 아이한테 양육비만 주고 더 이상 연락하지 않겠다니... 그의 모습은 그녀를 버린 그녀의 부모님과 다를 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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