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손을 빼내고 담담하게 그를 쳐다보았다.“내가 신경 쓰이는 건 선배가 여자를 만났다는 게 아니라 날 속였다는 사실이에요.”그녀의 전남편도 거짓말을 밥 먹듯이 했었고 위장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다만 이번에 만난 이 사람은 강은우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었다. 낯선 사람이 그녀에게 이런 사진과 녹음을 보내주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아직도 심형진이 깨끗하다고 믿고 있었을 것이다.이젠 주제 파악이 제대로 된 듯하다. 남자 보는 눈이 없고 머리도 안 좋아서 자꾸만 남자의 겉모습에 쉽게 속는 사람인 것 같았다. 다행인 건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알고 나면 과감히 정리한다는 것이다. “선배, 전 여자 친구가 선배의 아이까지 낳았어요. 무슨 일이었어도 그 여자를 책임져야죠. 그리고 선배의 어머니도 나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시고요. 어린 시절 날 갖지 못한 거에 대해 아쉬움이 남아있는 건 날 정말 좋아해서가 아니에요. 우리 여기까지만 해요.”그녀는 그의 체면을 살려주었다. 모진 말도 하지 않았고 강은우와 소송했던 그때처럼 발악하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말을 마친 후 그를 밀어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챙겨 뒤돌아섰다.엘리베이터에 다가가 버튼을 누르려고 손을 뻗는데 갑자기 그가 달려와서 뒤에서 그녀를 덥석 껴안았다. “가혜야, 이러지 마. 스칼렛한테는 원하는 만큼 양육비를 주고 완전히 정리할게. 우리 부모님이 우리 두 사람 사이의 일에 끼어드는 일도 없게 할게. 결혼하면 국내에서 살자. 나랑 같이 해외로 가자는 말도 하지 않을게. 네가 걱정하는 문제들 내가 다 해결할게. 그러니까 제발 나 떠나지 마.”심형진은 역시 대단했다. 단순한 여자였다면 그가 내놓은 해결책에 마음이 움직였을 것이다.그러나 그가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알게 된 그녀는 그가 잔인하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자신을 위해 묵묵히 아이까지 낳은 여자와 깨끗하게 정리하겠다니. 아이한테 양육비만 주고 더 이상 연락하지 않겠다니... 그의 모습은 그녀를 버린 그녀의 부모님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려 어두운 곳에 있는 그를 쳐다보았고 눈 밑의 흐려진 시선 때문에 그의 안색을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었다.“선배...”술도 마시지 않고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 왜 심형진이 잘 보이지 않는 걸까?시선이 갈수록 흐려질 뿐만 아니라 그녀의 몸은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했다.처음에는 여름이니 밖의 날씨가 더워서 그런 줄 알았다.아래쪽이 점점 뜨거워지는 걸 느낀 그녀는 이게 단순히 날씨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는 걸 눈치챘다.그녀는 여전히 심형진을 의심하기 싫었지만 이를 악물고 그에게 따져 물었다.“선배,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괴로워하는 그녀에게 다가와 그녀를 얼른 품에 꼭 안았다.“겁먹지 마. 약을 아주 조금 탄 것뿐이니까.”약이라니...그녀는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그러니까 방금 그 디퓨저의 향에...“왜 그런 거예요?”그의 과거와 그가 했던 행동들이 충격적이었다면 지금의 그는 그녀를 두렵게 만들었다. 두려움에 가득 찬 그녀를 보고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그녀를 다독였다 .“오늘 우리 100일이잖아. 그래서 내가 특별히 준비했어. 이젠 자연스럽게 잘 때도 됐잖아 .”그러니까 오늘 밤 그의 목적은 그녀의 생일을 축하해주는 것도 아니었고 100일 기념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그녀와 잠자리를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사실 나도 쓸지 말지 고민했었는데 네가 헤어지자고 하니까 마음을 독하게 먹은 거야.”말을 마친 그가 그녀를 벽에 밀치고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미안해.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았어. 근데 나 정말 너 안고 싶어.”나쁜 짓을 하면서까지도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미안하다는 말을 신사적으로 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그녀는 그에 대해 완전히 실망했고 깨끗이 마음이 정리되었고 연민조차 없어졌다. “당장 나 놔주면 고소하지 않을게요. 하지만 선배가 강제로 뭘 한다면 그땐 반드시 소송 걸 거예요.”그가 입꼬리를 잡아당기며 은은한
그의 손이 얼굴에 닿자 그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 놔줘요. 선배가 무슨 조건을 제시해도 다 들어줄게요.”말을 하면서 그녀는 핸드폰을 잡고 미친 듯이 지문을 눌렀다.비상경보를 켜거나 화면을 열어 숫자 1을 입력하려고 했다.바로 서유한테 전화가 가기 때문에 1만 누르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심형진이 그녀의 생각을 눈치채고는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고 핸드폰을 빼앗았다. “이연석한테 전화라도 하게?”그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정가혜, 그 사람은 이미 너 포기했어. 널 구하러 오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헛된 꿈 버려.”그가 그녀의 핸드폰을 집어 옆에 있는 아이스박스에 던져버렸다.그 아이스박스에는 술도 있고 얼음도 있고 물도 있었다. 핸드폰은 그 안으로 떨어지자마자 이내 화면이 어두워졌다.어두워진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며 그녀는 마지막 희망을 잃었고 눈빛이 어두워졌다. “이연석 씨를 찾을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어요. 이 모든 건 선배의 열등감 때문에 생긴 착각이에요.”스스로 이연석을 이길 수 없다는 열등감에 계속해서 이연석을 언급한 것이다.“마음대로 생각해. 결국 그 인간의 여자가 지금 내 아래 누워있으니까.”말을 마친 그가 도망치려고 발버둥 치는 그녀를 덥석 잡았다.“착하지, 말 들어. 움직이지 마...”그는 몸이 나른한 그녀를 밑에 깔고는 다시 손을 뻗어 그녀의 옷을 풀어 주었다.온몬이 뜨거워지고 정신이 흐릿해진 그녀는 이성을 끝까지 붙잡고 있지 않았다면 아마 눈앞의 사람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힘으로는 그를 밀어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있다고 해도 그녀한테는 그럴 힘이 없었다. 그녀는 흐릿한 눈동자를 굴리며 방안의 환경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정원의 중심에 있는 유리방이었고 창문도 없고 전체가 밀폐되어 있는 곳이었으며 밖에서는 안을 볼 수가 없었다.이곳에서 탈출하려면 정문으로 나가야 하지만 그가 있는 이상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그녀는 아이스박스를 한 번 쳐다본 후 시선을 다시 심형진에게
“너...”그가 한마디 내뱉자마자 그녀가 손에 닿은 술병을 들어 그의 이마를 내리쳤다.유리가 깨지는 순간 그의 얼굴에 술이 쏟아졌고 술병을 든 그녀의 손등에도 상처가 났다. 붉은 피가 흘러내려 그의 이마에 방울방울 떨어졌고 그의 피와 섞여서 침대로 굴러떨어졌다. 새빨간 피가 새하얀 침대 시트를 붉게 물들였고 그의 눈도 점차 빨갛게 변해버렸다.정가혜가 가녀린 여자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사나운 면이 있을 줄은 몰랐다.“정가혜, 그동안 어떻게 참았어?”“말했잖아요. 사람은 여러 가지 면이 있는 거라고. 선배가 본 건 내 모습의 일부일 뿐이에요.”말을 마친 그녀는 침대 시트의 술병 조각을 주워 그의 목덜미에 가져다 댔다.그런 그녀의 행동에 놀란 그는 그녀를 밀쳐내려고 했지만 머리가 빙빙 돌고 시선이 흐려졌다.술병에 머리를 맞아 움직일 수 없었던 그는 이를 악문 채 자신의 위에 앉아 있는 그녀를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날 죽이려는 거야?”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우리 사이가 끝났다는 걸 말해주고 싶을 뿐이에요. 만약 선배가 또다시 나한테 못된 짓을 한다면 내 손에 있는 유리 조각이 선배의 목을 찌르게 될 거예요.”그녀가 그의 목숨을 걸고 협박할 줄은 몰랐다. 이때, 그녀가 몸을 숙이더니 새빨간 눈으로 그를 빤히 노려보았다.“난 고아예요.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어서 죽으면 그만이에요. 두려울 게 없다는 뜻이죠.”그가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그녀는 독설을 내뱉고 침대에서 일어나 아이스박스에 있던 핸드폰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핸드폰을 쥐고 간신히 몸을 겨누며 유리방을 나와 엘리베이터로 향하는데 심형진이 머리를 감싼 채 뒤쫓아왔다. “정가혜, 나랑 있는 100일 동안 넌 나한테 한 번도 설렜던 적 없어?”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미친 듯이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심형진은 벽을 짚고 몇 발짝 걸어오다가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자세를 바로잡고 그녀를 쫓아오려는 순간 엘리베
한편, 배하린이 허리를 감싸자 이연석의 표정이 갑자기 차갑게 변하였다.그가 있는 힘껏 그녀를 밀어내며 입을 열었다.“분명히 얘기했지. 다시는 나 찾아 오지 말라고.”어렵게 그를 만나게 되었는데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있나? 그녀가 그의 손을 잡아당기며 어리광을 부렸다.“너무 그러지 마. 어찌 됐든 내가 너 첫사랑이고 네 목숨까지 구해줬는데. 그 나이 많은 여자 때문에 날 이렇게 버리는 거야?”그가 그녀의 손길을 뿌리쳤다.“배하린, 네가 날 구해준 건 고마워. 하지만 그 고마움에 대한 보답은 이미 충분히 했어. 너한테 더 이상 빚진 거 없다고. 그리고 첫사랑이라는 거...”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혐오가 가득 찬 눈빛을 보이며 입을 열었다.“그 당시 네가 우리 둘째 형한테 꼬리 친 거 나 다 알고 있어.”그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오래전의 일을 이연석이 알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이 그녀는 얼굴이 굳어져 버렸다. 그는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든 전혀 상관하지 않았고 그랜드 호텔의 꼭대기 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바닥에 누워 의식을 잃은 심형진의 모습만 보였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던 그가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단이수에게 전화를 걸었다.“어떻게 됐어? 심형진이 가혜 씨한테 무슨 짓이라도 한 거야?”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단이수가 먼저 물었다.그 녹음 파일과 사진들은 모두 단이수가 보낸 것이었다. 정가혜의 성격으로는 분명 그것들을 보고 심형진과 헤어질 것이라고 짐작했다.다만 심형진의 말이 마음에 걸렸던 그는 정가혜한테 나쁜 일이라도 벌어질까 봐 걱정되었다. 그 생각에 그는 바로 자신이 한 일을 이연석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고 얼른 위치를 파악해서 정가혜를 구하러 가라고 했다. 엘리베이터로 다시 들어온 이연석이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단이수를 나무랐다.“내가 몇 번을 말해. 전남편이 바람을 피워서 이혼한 여자라 이런 사진들 보면 받아들일 수 없을 거라고 했잖아. 끝내 내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어렴풋이 가시덤불이 움푹 패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 가시덤불에 다가가 허리를 굽히고 떨리는 손으로 푸른 풀이 무성한 가시덤불을 헤집었다.남루한 옷차림에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있는 그녀를 발견한 순간 그는 멍해졌다.지금껏 두려운 게 없었던 그는 그 순간, 온몸의 피까지 차가워질 정도로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깊은 골짜기에 떨어진 것처럼 아파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뭔가 말을 하려다가 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저 떨리는 손을 내밀어 그녀의 차가운 얼굴을 만졌다.누군가 자신을 만지는 것을 느낀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고 움직이려 하였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눈물이 핏물과 함께 섞여 천천히 흘러내렸다. “제발, 다치지 말아요. 부탁이에요.”자존심이 강한 그녀가 이렇게 애원하는 것을 보고 그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가혜 씨, 나예요.”그녀는 메마른 눈동자를 굴리며 천천히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피가 눈 앞을 가려 희미하고 잘 보이지 않았고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할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당신이 누구든 나 건드리지 말아요. 부탁이에요.”애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그는 눈시울이 붉어졌다.“나예요. 이연석.”당신인 거 알아요. 그래서 이런 내 모습을 더 보여주기 싫은 거예요.그녀는 낭패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렸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그녀의 몸에는 피를 제외하고도 가시덤불에 베인 상처가 곳곳에 있었다. 상처를 살펴보던 그는 가슴이 아파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는 그녀를 안아 올렸고 목덜미에 흐르는 핏물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묻었다. “가혜 씨, 겁먹지 말아요. 우리 이제 집에 가요.”그가 한쪽 무릎을 꿇고 조심스럽게 그녀를 끌어안는데 전에는 볼 수 없었던 다정하고 애틋한 모습이었다. 이런 자신의 모습을 그한테 보여주기 싫었지만 이미 기진맥진한 그녀는 몸부림칠 힘이 없었다.그녀는 꽉 쥐고 있던 돌멩이
자신을 믿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그녀는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한편, 이연석은 자신이 왜 대답을 안 했는지 모르겠다. 그녀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화가 나기도 했다. 심형진을 믿는 그녀한테 화가 났고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는 그녀에게 화가 났고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그녀의 말에 화가 났다. 그런 복잡한 마음을 가진 채 그녀를 안고 응급실로 뛰쳐 갔다.“얼른 이 여자 좀 구해줘요.”의사들은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급히 간호사들을 배치하여 그녀를 진료실로 보냈다.진료실의 문이 닫히는 순간 이연석은 피곤한 얼굴을 한 채 벽에 기대었다. 손에 가득 찬 피를 보면서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렸다. 어디를 다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온전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지금까지 여자 때문에 이렇게 아파해본 적이 없다. 그녀가 처음이었다. 이런 자신의 모습이 싫었지만 그녀를 차마 놓을 수가 없었다. 한편,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온 주서희가 그에게 어찌 된 일이냐고 물어보려는 찰나,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의 모습에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를 지나쳐 진료실로 바로 들어갔고 의사가 해독제를 사용하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양이 많은 건가요?”여의사는 고개조차 들지 않고 대답했다.“아니요. 다만 시간이 좀 오래돼서 독소를 제거하기가 쉽지 않네요. 외상이 많은 걸 보니 누군가와 몸싸움을 벌인 것 같아요.”정가혜는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얼굴에 묻은 핏물이 간호사에 의해 깨끗하게 처리되자 뺨을 여러 대 맞은 것 같은 부은 얼굴이 드러냈다.얼굴 양쪽이 다 부어있었고 손가락 자국이 선명하게 보였으며 가느다란 목덜미에도 자국이 있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그녀의 목을 심하게 조른 것 같았다. 그 상처들을 보고 주서희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앞으로 다가가 정가혜의 몸을 감싼 외투를 벗겼다. 안의 옷은 찢길 대로 찢어져 맨살이 훤히 드러
병원으로 가는 길에 서유는 이승하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심형진이 정가혜에게 약을 먹였고, 정가혜가 도망쳐 나온 뒤에는 술에 취한 중년 남자가 그녀를 끌고 가 폭행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필사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다면 이미 강간당했을 거라고 했다.이 말을 들은 서유는 화가 나서 눈이 붉어졌다. “심형진이 어떻게 그런 사람일 수가 있어?”그녀는 심형진이 정가혜의 선배로, 최소한 정직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강은우처럼 정가혜를 속이지는 않을 거라 여겼는데, 알고 보니 강은우보다 더 나쁜 사람이었던 것이다.한 손으로 턱을 괸 이승하의 차가운 눈빛 속에 살의가 어렸지만, 그는 서유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그녀의 손을 토닥이며 안심시켰다.차가 병원 앞에 멈추자 서유는 재빨리 차 문을 열고 응급실로 달려갔다...서서히 정신을 차린 정가혜는 몸이 그렇게 무겁고 답답하지 않다는 걸 느끼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힘겹게 눈을 돌려 병상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깊고 어두운 붉은 눈동자와 마주쳤다.그녀는 불편한 듯 시선을 돌렸지만, 자신의 손이 그에게 꽉 잡혀있는 것을 발견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있는 걸 보니 오랫동안 잡고 있었던 것 같았다.정가혜는 잠시 망설이다 손을 빼려 했지만, 이연석이 그녀의 손을 더 꽉 잡았다. 정가혜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자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요?”정가혜는 고개를 저었고, 시선은 다시 이연석의 손으로 향했다.“만지지 말아 주겠어요?”지금의 그녀는 조금 더러우니까...이연석은 그녀를 몇 초간 바라보다 손을 놓았다.정가혜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연석도 그녀를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둘이 침묵하고 있을 때 서유가 뛰어 들어왔다.“가혜야!”서유의 목소리를 듣자 정가혜의 생기 없던 눈동자에 비로소 생기가 돌았다.“서유야...”정가혜의 얼굴은 부어 있고 목에는 손자국이 있으며 이마는 깨져 있고 손에는 붕대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