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이지민은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헤어질 수 없다는 생각에, 그녀는 그를 끊임없이 찾아가고, 그를 몰아붙이며 물었다. “아직도 나를 사랑해?”단이수는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이지민은 믿지 않았다. 그녀는 또다시 손목을 그었지만, 이번에는 그가 울지도 않았고, 그녀를 구하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짐을 챙겨 떠나버렸다.단이수는 그들이 함께 살았던 집을 떠나 외딴곳으로 이사했다. 이지민은 그를 찾아내기 위해 오랜 시간을 보냈지만, 결국 그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목격하고 말았다.그런데도 이지민은 포기하지 않았다. 마치 바보처럼 거실에 앉아 그들이 끝나기를 기다린 후, 방을 치워주곤 했다. 그녀는 침대 위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옷을 주우며 스스로를 달랬다. 방을 깨끗이 치우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거라고.“이수 오빠는 다른 여자들과 지내다 질리면, 내 좋은 점을 다시 떠올리고 내게 돌아올 거야.”이지민은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여러 번 그런 상황을 견뎌냈다.마지막으로, 단이수가 그녀에게 소리쳤다. “이제 그만 그렇게 비참하게 굴지 마!”그제야 이지민은 다른 여자의 옷을 품에 안고, 천천히 침대 옆에 웅크렸다.그녀는 그 순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물었다. “정말 사랑하지 않아?”그녀가 사랑하지 않는다는 답을 들었을 때,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사람의 마음이 변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이후 그녀는 스스로를 방에 가둬놓고, 한편으로는 마음을 놓으려 노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자신을 찾아와주길 바랐다. 결국 그런 날들이 반복되면서 그녀는 점차 우울증에 걸리게 되었다.그럼 그녀는 어떻게 그 시간을 견뎌냈을까? 환상에 의지하고, 스스로를 구원하며, 부모님의 곁에서 시간을 보낸 것이다.그 길은 너무나도 길고 고통스러웠다. 이지민은 그 시간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무겁게 아팠다. 그녀는 다시는 그런 고통을 겪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다행히도 시간이 흐르면서, 그 고통이 서서히 사
단이수의 버림, 상처, 배신이 이지민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면, 그녀의 가장 가까운 가족들은 아무도 모르게 그녀를 깊숙이 상처입힌 사람들이었다.이지민은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녀는 단이수의 옷깃을 놓고, 얼굴을 감싸며 천천히 주저앉았다.단이수도 그녀의 옆에 무릎을 꿇으며 위로했다. “바보야, 널 되돌리고 싶어서 일부러 거짓말한 거야. 네가 그걸 믿다니.”이지민은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오빠 외할머니가 우리 가족 때문에 간접적으로 돌아가셨던 거잖아……”그녀가 그렇게 울자, 단이수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아니야, 그런 일 없었어. 내가 거짓말한 거잖아. 넌 내가 하는 말 중에 진실이 하나도 없다는 걸 알잖아. 그러니까 울지 마.”이지민은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그 여자들은...?”단이수는 손을 뻗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려 했지만, 그녀는 그 손을 피했다.그녀의 피하는 모습을 보며, 단이수는 사랑하는 그녀, 그가 죽을 만큼 사랑했던 이지민이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그는 손을 거두고 이지민을 바라보며 가볍게 웃었다. “다 잤어.”거짓말이었다. 사실 그는 그 여자들과 아무 일도 없었다. 그녀를 떠나게 하기 위해 한 거짓말이었을 뿐이다.단이수의 눈가가 붉어졌고, 그는 눈물을 억누르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뒤돌아섰다.땅에 웅크린 채로 단이수의 넓은 등을 올려다보던 이지민은 뭔가를 깨달은 듯 일어나, 그를 뒤에서 끌어안았다.오랜 시간이 지나, 이지민이 그를 먼저 안았다. 단이수의 고통으로 떨리던 마음이 조금은 진정되었다.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손등을 부드럽게 만지다가, 힘을 줘 그녀의 팔을 떼어내고 몸을 돌려 이지민을 단단히 껴안았다. “이지민, 그동안 내가 널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너무나도,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단이수의 품에 안긴 이지민은 차가운 눈물이 목덜미로 떨어져 피부에 닿는 것을 느끼며, 그도 함께 울기 시작했다.“이수 오빠, 미안해. 이제
차창 너머로 아래층에서 뒤돌아서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상연훈은 손에 든 술잔을 흔들며 입을 열었다.“결국은 헤어졌네요.”그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보던 이승하의 눈빛이 약간 흔들렸지만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표정이었다.“지민이는 늘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고 원하지 않는 건 물건이든 감정이든 과감하게 포기하는 사람이었다. 술잔을 들고 있던 상연훈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이걸 저한테 보여준 의도가 뭡니까?”현재 이지민과 서로 혼담이 오가고 있는 상황에서는 그한테 여동생의 과거를 숨겨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당신을 속일 수 없을 테니까요. 남들의 입을 통해 이 사실을 아는 것보다는 차라리 솔직하게 털어놓는 게 좋을 것 같았습니다.”말을 하면서 이승하는 문을 열고 차에 올라타는 그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이 사실을 알고 나서도 지민이와 계속 결혼할지 말지는 당신 스스로 결정해요.”상연훈의 입가에 웃음이 더 깊어졌다. “제 결정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대표님의 여동생에게 달렸지요.”말을 마치고 그가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으며 이승하를 쳐다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이 대표님의 성격이 꽤 마음에 듭니다. 아쉽게도 대표님은 남자라서...”이승하가 짙은 눈썹을 찡그리며 혐오의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자 그가 크게 웃음을 지었다. “농담입니다. 저 성적 취향은 정상이에요.”차가운 얼굴의 이승하가 손에 든 컵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대답했다.“성적 취향이 정상이라고 했던 누군가가 내 아내를 좋아하게 됐습니다.”“네?”상연훈은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으며 다리를 내려놓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누구예요? 감히 겁도 없이 대표님의 여자를...”소파에 등을 기댄 남자는 그를 차갑게 쳐다보면서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상연훈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아내분이 너무 아름다워서 숨겨두신 건가 봐요. 저한테는 소개도 안 해주시고.”그의
한편, 이지민의 어머니 유나희와 아버지 이진철은 식사를 마치고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유나희는 미용사를 집으로 불러 피부 관리를 받고 있었고 이진철은 고개를 숙인 채 경제 신문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으리으리한 저택 안에는 하인들이 제 몫을 다하느라 분주하게 돌아쳤다. 밤에 비가 조금 온 바람에 처마에서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조용한 저택에 생기를 더했다. 빗소리와 함께 들려온 문 두드리는 소리에 식탁을 닦고 있던 하인은 서둘러 걸레를 내려놓고 커튼을 걷었다. 커튼이 걷히자 비에 흠뻑 젖은 이지민이 문밖에 서서 새빨간 두 눈으로 유나희를 쳐다보고 있었다. 자식들이 커서 독립한 후, 저택에는 유나희와 이진철만 살고 있었고 가끔 밥 먹으러 본가에 들릴 때면 미리 연락을 했었다. 이 늦은 시간에 이렇게 낭패한 모습으로 문밖에 나타나자 유나희와 이진철은 깜짝 놀랐고 얼른 문을 열라고 했다.“지민아, 왜 그래?”유나희와 이진철은 급히 다가가 이지민의 손을 잡았다. 온몸을 떨고 있는 딸의 모습에 두 사람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슨 일이야?”유나희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자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흠칫하던 유나희는 바로 눈치를 챘고 눈물이 고인 딸의 눈을 보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지민은 두 사람의 손을 뿌리치고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새빨간 눈으로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왜 그랬어요? 왜 저한테 그런 거예요? 왜 이수 오빠한테 그랬어요?”두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 시절 꽃 같은 나이에 그녀가 그렇게 힘든 일도 겪지 않았을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그녀를 애지중지 키워온 부모가 그녀를 나락으로 빠뜨려버렸고 죽을 만큼 힘들게 했다. 단이수가 그렇게 매정하게 떠난 이유가 자신의 부모님 때문이라는 걸 그녀는 믿을 수가 없었다. 착하고 사리가 밝은 부모님이셨는데...“그거 알아요? 이수 오빠의 외할머니, 그 일 때문에 자살하셨어요...”주먹을 불끈 쥔 그녀
이진철과 유나희는 단이수의 과거를 뒤늦게 안듯 충격에 휩싸인 표정을 지으며 이지민을 바라보았다.“우린... 몰랐어.”“그래요. 두 분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저한테 묻지도 않고 저 대신 결정을 하신 거예요.”“두 분 때문에 전 절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되었어요.”눈물범벅이 된 딸의 모습에 유나희는 가슴이 아팠다.“지민아, 미안해. 다 엄마가 잘못했어. 엄마가 미안하다...”그녀는 떨고 있는 이지민의 차가운 손을 붙잡고는 손을 비비며 변명했다. “엄마가 단이수를 오해했어. 너희 두 사람이 사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떻게 해서든 두 사람을 갈라놓아야 하겠다고 생각했어. 근데 몇 번 만나보니 괜찮은 사람이더라. 그래서 어쩌면 내가 오해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더 이상 크게 관여하지 않았던 거고. 근데...”“그러면 이수 오빠랑 제가 다시 잘 될 줄 알았어요? 우리 두 사람이 다시 사귀면 엄마가 한 일은 다 없던 일이 되는 건가요? 더 이상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될 것 같았어요?”점점 몰아붙이는 이지민을 향해 유나희는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말해봐요. 이수 오빠가 변호사로 성공한 걸 보고 이젠 저랑 어울릴 것 같아서 허락하신 거예요? 아니면 오빠의 외할머니가 자살한 소식을 듣고 마음이 바뀌신 거예요?”첫 번째 이유라면 유나희는 가문과 배경을 너무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다.만약 두 번째 이유라면 유나희가 자신을 그렇게 사랑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소한 그녀가 보여준 것처럼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지민, 네가 어떻게 너희 엄마를 의심할 수 있어?”이때, 이진철이 또다시 아내의 편을 들었다. “그 당시 너와 단이수를 반대했던 건 사실이야. 하지만 단이수가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바뀌었어.”이지민은 이진철의 말을 무시한 채 새빨간 두 눈으로 유나희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 집안에서 서열 1순위는 이진철이 아니라 유나희였으니까. 이태석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이진철은 형들의 보살핌 속에서 자랐
미쳐가는 딸을 보며 두려움이 몰려온 유나희는 그녀를 얼른 품에 안고 등을 토닥이며 다독였다.“엄마가 잘못했어. 제발 이러지 좀 마.”어깨에 기댄 이지민은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제 인생을 엄마가 망쳐놓았어요. 앞으로는 제 일에 더 이상 상관하지 마세요.”그녀는 힘없이 유나희를 밀어내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간신히 몸을 이끌고 계단을 내려갔다. 둥근 아치형 문에는 검은 그림자가 우뚝 서 있었고 눈을 붉힌 채 그녀를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다.그와 시선을 마주친 이지민은 코끝이 찡해졌고 억울함이 밀려왔지만 꾹 참고 더 이상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오빠, 오빠는 나처럼 이러지 마.”잘생긴 그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가 비를 맞으며 그녀의 앞으로 걸어갔다.“지민아, 너랑 이수 아직 끝난 거 아니야. 이수는 아직도 너 많이 사랑하고 있어.”그녀가 환하게 웃고 있지만 얼굴에 고통과 슬픔이 훤히 드러났다.“오빠, 나 이제 그 사람 사랑 안 해.”누군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한 사람을 너무 사랑하고 상처를 많이 받으면 더 이상 사랑할 힘조차 없어진다고...시간이 지나면 사랑했던 사람도 점점 잊혀지는 거라고...단이수를 잊어버리려고 자신을 강요했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이제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없어진 것 같다. 환하게 웃으며 이연석을 바라보던 그녀는 발걸음을 돌렸고 더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녀는 단호한 눈빛을 보이며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단이수 때문에 어머니와의 사이가 틀어져서 더 단호하게 떠난 것이다. 그러나 가족이라는 게 어찌 그리 쉽게 끊어질 인연이라는 말인가?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랑은 끊어낼 수 있는 것이었다. 단이수를 위해 어머니와 사이가 틀어졌지만 그녀는 끝내 그를 위해 뒤돌아서지 않았다. 오랜 시간 힘들어하면서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을 완전히 내려놓은 것이다.그 순간, 이연석은 시간이 지나면 사랑하는 사람도 잊혀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그 당시 단이수를 때리고 욕하던 모습이 떠올라 그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그가 복수라도 할까 봐 두려웠던 사람처럼 문밖에 서서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사과하려고 왔어.”그녀는 들고 있던 귀중품을 단이수에게 건네주었다.“자네 외할머니가 나 때문에 돌아가신 걸 이제 알게 됐어. 정말 미안하네.”단이수는 그녀가 건네주는 물건을 받지 않고 그저 담담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그녀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물건을 현관 앞에 내려놓았다. 다시 몸을 곧게 펴고 그를 올려다보며 긴장하고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어제 지민이랑 다퉜어. 아직도 자네에 대해 마음이 있는 것 같던데. 두 사람 다시...”“사모님.”단이수가 그녀의 말을 끊어버렸다. “지민이가 그런 건 저희 외할머니 때문일 겁니다. 저한테 아직까지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에요. 저와 지민이는...”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붉게 부어오른 눈에 가슴이 찢어질 듯한 아픔이 훤히 드러났다.“함께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이지민은 사랑하면 열정적으로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사랑하지 않으면 깨끗이 물러나는 사람이었다. 아니, 그녀는 스스로 물러난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강요에 의해 떠난 것이었다. 그녀를 떠난 보낸 방법이 너무 잔인해서 그녀가 다시 돌아오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유나희는 두 사람이 결국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분명히 이미 동의했는데 왜 다시 함께할 수 없는 건지?단이수는 그녀에게 답을 주지 않았고 그저 허리를 굽혀 현관에 있던 물건을 들어 다시 그녀에게 건네주었다.“사과 필요 없습니다. 어머니로서 딸이 행복해지길 바란 마음에서 그런 것이니 전 이해합니다.”“저희 외할머니는 저한테 미안한 마음에 자살하신 겁니다. 이게 다 제가 못난 탓이죠.”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젊은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며 그녀는 믿기지가 않았다. 자신이 단이수한테 편견이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 편견이 딸을 해쳤고 남의 귀한 집 손자까지...“
사진 속, 한 외국 여자가 아이를 안고 있었고 아이는 한 살쯤 되어 보였다. 사진들을 보면서 누가 잘못 보낸 줄 알았다. 그녀는 모르는 사람이었으니까.아래의 사진 속에 심형진의 모습이 나타나자 그녀는 그 자리에서 완전히 굳어져 버렸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미간을 찌푸리며 상대방에게 문자를 보내려는 찰나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심형진의 전 여자 친구 스칼렛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이가 하나 있고요.]심형진한테 전 여자 친구도 있고 아이도 있다고?충격에 빠져 있을 때 상대방이 녹음 파일을 하나 보내왔다. 그녀는 녹음 파일을 몇 초 동안 바라보다가 떨리는 손가락으로 파일을 클릭했다.이내 심형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가혜가 깨끗하지 않다면 어머니의 눈을 속이지도 못했겠죠. 뭘 의심하세요?”이내 정선월의 경멸적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 “얼굴이나 몸매 좀 봐봐. 걸음걸이까지 여성스럽고 섹시해. 저런 매력적인 여자가 깨끗하다고 한다면 난 죽어도 안 믿어.”심형진의 아버지인 심범태의 목소리도 들려왔다.“남자를 홀리게 생겼더구나. 웬만한 남자도 넘어갈 것 같은데 하물며 유흥업소에 드나드는 남자들이라면 더 그렇겠지. 권력이 있고 힘이 있는 남자라면 얼마든지 굴복시킬 수 있을 것 같은데. 거짓말을 하는 게 분명하다.”대화 중에 색소폰 배경 음악이 들리는 걸 보면 그날 심형진을 부모님을 만나러 간 식당 안인 것 같았다. 아마도 그녀가 화장실을 간 뒤 가족들끼리 그녀에 대해 평가를 한 것 같다. 사실 심형진의 부모가 뭐라 하든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심형진의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내 여자로 만들지 못한다면 자존심이 상할 것 같아요.”“어머니, 가혜한테 이것저것 물어보실 때 제가 가만있었던 건 어머니를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머니한테 가혜 앞에서 위엄을 떨칠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죠.”점점 어두워지는 핸드폰 화면을 응시하며 멍때리고 있을 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꼭대기 층의 야외 정원이 눈앞에 펼쳐졌다.부드러운 붉은 카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