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성재가 주먹을 꽉 쥐며 이를 갈았다.“다들 이연석 얘기만 하니까 정말 짜증 나네.”“내가 이연석을 용서해 달라고 했잖아요. 다른 건 안 되겠어요?”짜증 가득한 표정이었던 육성재의 눈빛이 이 말에 조금 누그러졌다.“진짜로 날 돌봐주겠다는 거야?”서유가 대답하기 전에 이지민이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새언니, 오빠 때문에 희생하지 마요.”“괜찮아요.”서유가 이지민의 손을 토닥이며 안심시켰다.“당신 어머니도 김씨 집안 분이셨고, 저도 김씨 집안에서 자랐으니 우리 사이엔 인연이 있는 셈이죠. 그래서 저도 당신을 오빠이라고 부르고 싶어요. 동생이 오빠를 돌보는 건 당연한 거니까요. 다만...”서유가 잠시 머뭇거리다 미소 지었다.“제가 오빠의 동생이고, 이연석은 제 남편의 동생이니까 간접적으로 오빠랑 인척관계인 셈이에요. 이 관계를 생각해서라도 도련님을 용서해 주셨으면 해요.”육성재가 멀리 있는 서유를 흘깃 보더니 입꼬리를 올렸다.“그럼 간접적으로 이연석이 내 동생이 되는 거네?”이승하가 육성재의 사촌 형이니 이연석도 그의 동생이나 마찬가지였다.서유는 천진한 표정을 지으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죠. 오빠, 그러니까 도련님을 용서해 줘요. 제가 오빠를 돌볼게요.”부드럽고 맑은 목소리에 육성재의 분노가 점차 가라앉는 듯했다.그는 고개를 들어 서유를 바라보았다.신기하게도 이승하의 아내가 꽤 예뻐보였다. 이 생각이 들자마자 육성재는 깜짝 놀랐다.‘머리가 어떻게 망가진 게 아니야?’“돌봐주기 싫다면서? 나랑 어떻게 해보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 아냐.”“아니에요. 오빠가 저한테 돌봐달라고 했으니, 이 기회에 더 가깝게 지냈으면 좋겠어요.”잠시 침묵하던 육성재가 다시 입을 열었다.“그러니까 내 말은 이연석 때문에 그러지 말라고.”“하지만 사실은 확실히...”“내가 이것 때문에 이연석을 봐줄 거라고 생각해?”정말이지, 육성재는 성격이 참 안 좋았다. 그녀가 판 덫을 돌아서 지나가다니.“그래요, 내가 돌봐줄게요. 근데 사촌오빠,
육성재가 남주혁을 노려보더니 시선을 돌려 서유를 향해 손짓했다.“너, 와봐.”잠깐 망설이던 서유가 그 앞으로 다가갔다.육성재가 깁스를 한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너무 오래 감싸고 있어서 피부가 좀 가려워. 좀 긁어줘.”서유가 그를 꾸짖었다. “저한테 멀리 떨어지라고 하지 않으셨나요?”육성재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그때 이야기고, 이제는 네가 날 돌봐준다고 했잖아. 어떻게 멀리할 수 있겠어?”정말 머리는 안 좋은데 참 예쁘게 생겼다.이런 사람을 이승하가 선택했다니 그 안목이 의심스러웠다.서유는 그의 눈빛에서 명백한 경멸감을 느꼈지만 상관하지 않고 적당한 거리의 소파에 앉았다.“여기, 손을 내주세요.”이지민이 육성재의 표정 변화를 살펴보더니 그가 서유에게 어떤 의도를 품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혹시 그녀에 대한 마음이라도 생길까 봐 걱정되었다. 하지만 곧 그의 행동을 보고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아챘다.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만약 그가 그런 생각을 했다면 새언니를 싫어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돌봐달라고 한 것은 아마도 오빠를 모욕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게다가 육성재의 성적 취향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아직 모르는 일이니, 마음을 놓고 조용히 옆에 있기로 했다. 그녀가 있는 한 아무도 새언니에 대해 험담하지 못할 테니까.서유는 육성재를 몇 초간 쳐다본 후 눈동자를 살짝 굴리더니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위치를 골라 육성재 옆 소파에 앉았다.“성재 씨, 오른손 좀 주세요.”육성재는 이승하의 아내가 자신의 말을 순순히 따르는 것을 보고 매우 기분이 좋아져 석고를 한 팔을 서둘러 그녀에게 내밀었다.따뜻한 손끝이 석고 위의 소매를 만졌을 때, 육성재의 몸이 점점 굳어지고 심장이 제어할 수 없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그는 놀라 깊은 눈동자를 들어 서유를 바라보았다...흠 하나 없이 깨끗한 얼굴, 우유처럼 부드러운 피부, 눈썹과 눈이 휘어진 얼굴, 정교하고 귀여운 이목구비.얼굴 전체의 모든 부분, 모든 곳, 하나하
서유와 이지민은 육성재의 성향에 대해 잠깐 이야기한 뒤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유나희 쪽에서는 이지민이 돌아가자마자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유나희는 감사의 표시로 선물을 들고 다시 블루리도로 갔다. 서유는 거절하기 어려워 선물을 받았고, 답례로 직원을 보내 유나희 집에 선물을 보냈다. 이렇게 왕래하면서 서유와 이연석 부모의 관계도 가까워졌다.다만 이승하는 약간 불편한 모양이었다. 서재 소파에 앉아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그가 핸드폰도 보지 않고 책도 보지 않고 그냥 자신만 쳐다보고 있자 서유는 물었다.“뭐가 그렇게 마음에 걸려요?”이승하가 긴 다리를 꼬며 말했다. “무슨 생각이야?”그의 정장 차림에 다리를 꼬고 소파에 기대앉은 모습이 대단한 대인배 같았다.서유가 턱을 괴며 그의 잘생긴 얼굴을 감상했다. “오늘 있었던 일 때문에 화난 것 같네요.”이승하가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흘겨봤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다고?”‘아, 이제 비꼬기 시작했네.’서유가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모르겠다니 그냥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죠.”이승하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서유 앞으로 다가와 책상 위에 손을 짚으며 몸을 숙였다.“내 아내가 괴롭힘을 당했다고 생각하면 화가 나.”서유가 맑은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 왜 내가 괴롭힘을 당했다고 생각했어요?”이승하가 그녀의 말에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가 책상을 돌아 서유 쪽으로 다가와 그녀를 안았다.“그럼 욕실에 가서 교훈을 주겠어.”당연히 도망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던 서유는 순순히 따랐다.“욕실에 가서 누가 누구를 교훈 줄지 모르겠어요.”이승하가 걸음을 멈추고 입꼬리를 올렸다.“그럼 당신 말대로 하죠.서유가 교만하게 턱을 치켜세웠다. “기분 좋은 대로 하시죠.”이승하가 웃음을 터뜨리며 서유를 안고 욕실로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음 소리가 욕실에서 들려왔고, 이는 10시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아침 무렵 이승하의 차
소수빈과 허 의사의 결혼식이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심형진에 대한 조사도 급박한 상황이었다. 이승하의 특별 보좌관이 결혼한다니 규모가 제법 컸다. 해천 호텔 정문엔 고급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A시의 유력 인사들뿐만 아니라 수도에서 이씨와 거래하는 이들까지 모두 찾아왔다. 소수빈은 호텔 전체를 대관했고, 청첩장 유무와 상관없이 모든 하객들이 자리할 수 있게 했다.소수빈은 소준섭의 계모가 낳은 아들이었다. 소씨 가문에서도 사람이 왔는데, 바로 소준섭이었다. 그는 호텔에 들어서자마자 주서희를 발견하고 복도 끝으로 몰아갔다. 검은 정장 차림의 그는 고고한 자태와 냉담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굳게 다문 입술에선 냉혹함이 묻어났다.“법원 소환장을 받았어. 꽤나 대담하군. 감히 나를 고소하다니.”그의 하얀 손가락이 주서희의 뺨을 스치자 그녀는 차갑게 피했다.“고소하려는 참에 성희롱까지 하시겠다고요? 죄목 하나 더 추가되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시나 봐요.”소준섭은 웃었는데, 그의 우아하고 자신감 넘치는 미소는 마치 밝은 조명 같았다. 눈부시면서도 사람을 찌르는 듯했다.“주서희, 우리 사이를 생각하면 너희가 이길 수 없어. 내가 기분이 좋을 때 소송을 취하해. 그렇지 않으면...”소준섭은 주서희을 벽으로 밀어붙이고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 위를 짚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깊이 입을 맞췄다. 처음엔 살짝 스치는 정도였지만, 그녀의 맛을 보자 소준섭은 마음을 바꿨다. 그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꼭 껴안았다.“주서희, 너무 보고 싶었어.”그가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 주서희은 그를 밀쳐냈다. “꺼져요!”하지만 소준섭은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손목에 가져다 댔다. “만져봐. 여기 상처들, 다 너 때문에 생긴 거야.”주서희는 손목에 가득한 상처들을 만졌다. 일부는 아물었고, 일부는 아직 아물지 않았다. 정맥과 동맥 주변으로 얽혀 있었다.의사인 주서희는 이게 자해로 인한 상처임을 알았다. 하지만 그녀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녀는 얼굴을
서유는 이승하의 팔짱을 끼고 결혼식장에 들어서다 안에서 나오는 소준섭과 마주쳤다. 양측 모두 발걸음을 멈추었고, 소준섭은 두 사람을 바라보며 비웃음을 터뜨렸다.“서유 씨, 오랜만이군요.”그는 이승하를 완전히 무시한 채 서유에게만 인사를 건넸다. 그의 눈빛에는 경멸과 멸시가 가득했다.서유는 대답하지 않고 이승하를 끌고 돌아가려 했지만, 소준섭이 두 사람이 움직이려는 순간 갑자기 조롱의 웃음을 터뜨렸다.“서유 씨, 지난번에 뵈었을 때보다 훨씬 혈색이 좋아 보이네요. 결혼 생활이 꽤나 행복한 모양이군요.”이런 말까지 들으면서 무시하기엔 너무 참는 것 같았다.“제가 행복한지 아닌지는 소 선생님과는 상관없는 일이에요.”소준섭은 입꼬리를 올리며 경멸적인 미소를 지었다.“그렇죠, 저와는 상관없죠. 다만 우연히 알게 된 건데, 당신의 행복은 어떤 이가 목숨을 걸고 포기한 덕분이라는 거죠.”서유가 잡고 있던 이승하의 손등이 갑자기 굳어졌고, 그녀의 안색도 불편해졌다.팔짱을 끼고 있던 남자는 이를 눈치채고 잠시 망설이다 곧바로 몸을 돌려 차갑게 소준섭을 노려보았다.“이런 말들을 송사월이 하라고 한 건가요?”“흥.”소준섭이 냉소를 지었다.“사월인 당신들의 행복을 빌기로 했는데, 어떻게 이런 말을 하라고 하겠습니까?”검은 양복 차림의 이승하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깊고 차가운 눈빛 속에는 신성불가침의 기세가 숨겨져 있었다.“그 사람이 말하라고 하지 않았다면, 당신이 그의 이름을 빌려 이런 말을 하는 건 그를 위해 억울함을 풀어주려는 건가요, 아니면 그 사람 마음이 좁다고 선전하려는 건가요?”차분한 반문에 소준섭은 순간 당황했다. 자신의 행동이 그들을 자극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품격 있는 친구의 명성을 손상시키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소준섭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난 그저 김시후가 살아도 죽은 것만 같아 보여서 참을 수 없었을 뿐이에요. 그래서 몇 마디 비꼬았을 뿐, 김시후와는 관계없어요.”이승하가 짙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그가 이 말을 하는 순간, 옆을 지나가던 사람이 뭔가 들은 듯 두 사람을 이상한 눈으로 훑어보았다. 서유의 동그란 볼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제발 입 좀 다물어요...”그녀는 그의 얇은 입술을 가리며 소리쳤다. “예전엔 말도 별로 안 하더니, 왜 이렇게 수다스러워진 거예요?”이승하가 입을 열어 대답하려 하자 그녀가 다시 막아섰다. “그만 좀 말해요. 입 다물어요!”두 부부가 장난치며 떠들고 있을 때, 소수빈이 신부를 맞이해 호텔에 도착했고 하객들도 자리에 앉았다.사회자가 단상에 올라 축하 인사를 전한 뒤 본격적으로 신랑 신부를 무대로 초대했다.조명이 신부에게 비춰지자 부드러운 빛이 퍼져 허 의사가 마치 선녀가 내려온 듯 아름다워 보였다.그녀는 레드 카펫 끝에 서서 미소 띤 눈으로 단정하고 우아하게 잘생기고 멋진 신랑이 그녀를 맞이하기를 기다렸다...장미를 든 소수빈은 검은 연미복을 입고 머리를 뒤로 넘겨 맑고 넓은 이마를 드러냈다. 그는 활기차게 허 의사에게 다가갔다.그는 꽃을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건넨 뒤 그녀의 손을 잡고 부드럽고 장중한 결혼 행진곡에 맞춰 한 걸음 한 걸음 레드 카펫을 지나 무대로 향했다.무수한 화려한 조명이 하객들을 비추다 이 신랑 신부에게 집중되었고, 그들이 반지를 교환하고 서약하고 키스하고 샴페인을 따르는 모습을 따라다녔다.곧이어 소수빈의 친구들이 무대에 올라와 신부의 친구들을 놀렸다.그중에서 택이와 소지섭이 가장 신나게 떠들었다...둘은 신이 나서 무대 아래로 내려와 이승하를 무대로 끌어올려 공연하게 하려 했다.이승하가 차갑고 서늘한 눈빛으로 한 번 쓱 보내자 두 사람은 화들짝 놀라 그만두었다.서유 옆에 앉아 있던 심이준은 무대 위를 보고 흥분한 듯 억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올라갈까요...”심이준이 소수빈을 몇 번 골탕먹인 적이 있다는 걸 아는 소지섭이 말했다. “당신이 올라가면 소수빈이 주먹으로 한 방에 무대에서 떨어뜨릴 텐데 무섭지 않아요?”심이준은 억지로 친절해 보이려는 미소를 지
정가혜가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원형 테이블에 앉아 있던 심형진이 그녀를 보고 즉시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가혜야, 여기야.”위풍당당한 그의 모습을 보자 정가혜는 약간 겁이 났고 도망가고 싶었지만, 이미 들어왔으니 어쨌든 용기를 내야 했다.그녀는 손바닥을 꽉 쥐고 심형진에게 다가갔다. 그제야 안쪽에 앉아 있는 중년 부부가 보였다.남자는 단정한 정장에 검은 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당당한 체구와 훌륭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심형진과 닮은 점이 있었다.여자는 우아하고 단아한 자태에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있었으며, 품위 있고 친절해 보였다.두 사람은 그녀가 오는 것을 보고 서둘러 미소를 지으며 맞이했다. “가혜 양, 어서 들어와 앉으세요.”그들은 꽤 친절했다. 정가혜에게 자리를 권하고 무엇을 먹고 싶은지 물으며 직접 주문하라고 했다. 심형진은 바쁘게 서빙 직원을 불렀다.세 사람의 친절한 태도에 정가혜의 긴장된 마음이 서서히 풀어졌다. 그녀는 음료를 주문하고 더 이상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심형진의 아버지는 말이 많지 않았고, 주로 심형진의 어머니인 정선월이 질문을 많이 했다. “가혜 양, 우리 형진이랑 얼마나 사귀었나요?”정가혜는 정성스럽게 스테이크를 자르고 있는 심형진을 힐끗 보며 대답했다. “따져보면 두 달 조금 넘었네요. 그리 오래 사귄 건 아니에요...”정선월은 우아하고 온화한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오래 사귀진 않았지만, 형진이 말로는 고등학교 때부터 좋아했다더군요. 학창 시절의 사랑은 꽤 로맨틱하죠...”심형진이 스테이크를 다 자르고 정가혜의 접시에 올려주자 정가혜는 ‘고마워요’라고 말한 뒤 입꼬리를 올리며 정선월에게 대답했다. “그 일은 저도 두 달 전 선 자리에서 선배를 만나고 나서야 알았어요. 학교 다닐 때는 전혀 몰랐거든요.”정선월의 우아한 표정이 살짝 변하자 심형진이 급히 말을 이었다.“그건 제가 혼자 좋아한 거예요. 가혜는 그때 아마 저같은 사람이 있는지도 몰랐을 거예요.”정선월이 웃으며 말했다. “
그녀의 말은 꽤 완곡했다. 다른 젊은 여자라면 그 의미를 알아채지 못했을 테지만, 정가혜는 달랐다. “특별한 사정은 없어요. 그저 A시에 정착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이렇게 땅값이 비싼 곳에서 자리 잡으려면 돈이 필요하죠. 저는 권력과 성을 거래하지 않았기에 손님들과 술을 마시며 돈을 모아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었어요. 처음엔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죠. 하지만 나중에 돈 많고 힘 있는 사람들에게 억압당하면서 안정된 직장만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정가혜의 이 말에 정선월은 그녀가 몸을 팔아 출세했다는 의혹을 떨쳐버렸다.“이해가 가네요. 가혜 양 경험이 저와 좀 비슷해요. 다만 저는 공부를 잘해서 시험을 거쳐 해외 명문대에 진학했고, 그래서 확실히 자리잡을 수 있었죠. 여자로 살아가기란 정말 쉽지 않아요. 가혜 양 마음이 이해가네요.”정선월은 특별히 거부감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말 속에 우월감이 배어 있어 정가혜는 마음이 불편했다. 다시 심형진을 바라보니, 그는 어머니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듯 그녀를 위해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음식만 집어주고 있었다...정가혜는 칼과 포크로 접시의 음식을 뒤적였지만 먹지 않았다. 심형진이 이를 알아채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왜? 입맛에 안 맞아?”정가혜가 고개를 젓자 정선월이 둘을 힐끗 보고는 서둘러 서빙 직원을 불러 메뉴판을 가져와 정가혜에게 건넸다. “가혜 양, 입맛에 안 맞는 음식은 먹지 마요. 입맛에 맞는 걸로 몇 가지 더 주문해요. 형진이 아빠다 해외에서 돈을 좀 벌어서 이 정도는 충분히 먹을 수 있어요. 걱정하지 마요.”정가혜는 이 말을 들은 후 귀부인을 보고, 다시 레드와인을 마시며 말없이 있는 중년 남자를 보았다. 마지막으로 심형진을 바라보니 그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가혜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 몇 가지 더 주문할게요.”중간 가격대의 요리 두 가지를 고르자 정선월은 너무 싸다고 생각해 시그니처 요리 몇 가지를 더 주문하고 라피트 와인도 한 병 주문했다. 서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