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 안에는 간병인 아줌마가 말한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열쇠와 책, 그리고 상자.강하리는 열쇠를 집어 들었을 때 다소 놀란 눈빛이었다. 은행 금고 열쇠라니.그리고 그 책은 정서원의 일기장이었다.그 상자는... 강하리는 상자를 열어보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놀랍게도 깨진 분홍색 크리스털 목걸이였는데 애초에 강찬수에 의해 산산조각 났던 목걸이를 정서원이 어떻게든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서진 조각들을 다시 조립해 놓은 것이다.강하리는 울음을 참지 못했다.정서원이 조용히 이런 일을 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그녀가 갑자기 흐느끼자 구승훈은 약간 당황한 듯 그녀를 품에 안았다.“왜 그래, 아주머니가 너한테 뭐 남겼어?”하지만 강하리는 그냥 그렇게 울기만 했다.강하리는 한참을 울고 나서야 서서히 진정했고 구승훈은 그녀를 안은 채 마음이 아파 큰 손으로 강하리를 토닥거렸다.강하리는 눈물을 닦으며 구승훈에게 말했다.“고마워요.”구승훈은 그녀의 허리를 잡았다.“옷이 눈물 콧물 범벅이 됐는데 그냥 고맙다는 말로 때우려고?”강하리는 그를 밀어내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구승훈의 시선이 상자로 향했고 상자 안에 금이 간 목걸이를 본 순간 머리끝까지 서늘한 기운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핸들을 잡은 손의 핏줄마저 튀어나왔다.목걸이는 완벽하게 조립된 것이 아니었고 온통 금이 간 데다가 가장자리와 모서리가 많이 떨어져 있었다.하지만 그는 강하리의 목걸이와 송유라의 목걸이가 똑같다고 확신했다.“이거 아주머니가 준 거야?”강하리는 시선을 바닥으로 내린 채 그에게 묻고 싶었다. 정말 하나도 기억이 안 나냐고.하지만 입가에 차오른 말을 그녀는 다시 삼켰다.이미 두 사람이 이렇게 된 마당에 기억하든 안 하든 무슨 상관이 있을까.강하리가 나지막이 말했다.“나 다시 데려다줘요.”구승훈은 다소 무심하게 물었다.“뭐 먹고 싶어, 일단 뭐 좀 먹고 돌아갈까?”강하리는 물건을 넣은 뒤 밖을 내다보다가 대꾸했다.“아뇨, 입맛이 없어요.”구승훈은
그리고 같은 시각, 다른 쪽에서 문연진은 강하리가 떠나지 않고 구승훈까지 찾아왔다는 소식에 집에서 또 한 번 성질을 부렸고 문원진은 눈살을 찌푸렸다.“됐어, 투정을 부려서 뭐 해?”문연진은 화가 났다.그녀는 이번엔 정말 둘이 헤어질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놀랍게도 이 모든 일이 있고 난 뒤에도 둘은 여전히 붙어 있을 줄이야.“저 강하리는 왜 어딜 가나 있어! 저 여자가 있는 한 승훈 오빠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을 거야.”문원진이 콧방귀를 뀌었다.“뭘 서둘러? 강하리는 조만간 누가 처리할 거야. 송유라한테 무슨 일이 생겼는데 송씨 가문에서 전부 걔한테 뒤집어씌웠어. 구씨 집안에서도 저런 식으로 계속 구승훈 곁에 있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을 거야.”문연진은 얼굴을 찡그렸다.“할아버지, 송유라 일 할아버지가 그랬어요?”문원진이 콧방귀를 뀌었다.“쓰레기 같은 것 남겨둬서 뭐 하겠어. 쓸모가 있으면 써먹어야지.”문연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근데 송씨 가문은 하나같이 다 쓰레기인데 쓸모가 있을까요?”문원진이 웃었다.“증오의 힘은 무시할 수 없지.”...강하리가 화장실에서 나오자 구승훈이 얼굴을 찡그리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모습이 보였다.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로 식탁에 앉았고 정신을 차린 구승훈은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뭐 먹고 싶어?”강하리는 그의 손을 피했다.“아무거나.”애초에 식욕이 별로 없었고 방금 장진영까지 보고 온 탓에 더더욱 입맛이 없었다.구승훈은 그녀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더 묻는 대신 평소 그녀가 좋아하던 음식 몇 가지를 주문했다.밥을 다 먹고 나서야 그가 물었다.“이따가 아파트로 돌아갈 거야?”“연지네 집으로 가.”강하리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고 구승훈은 그저 웃을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 한 잔을 따라주었다.“또 위가 아파?”강하리는 시선을 내렸다.“괜찮아.”이번 임신은 지난번처럼 고통스럽지는 않았다.“아주머니한테 손연지 씨 집으로 가서 밥해주라고 할까? 식사
강하리가 얼굴을 찡그렸고 구승훈의 눈빛도 어두워졌다.정주현이 포기하란 말이 거슬린 게 아니었다.“정 회장이 강하리 만나는 걸 반대했다고?”정주현은 어깨를 으쓱했다.“안 그러면 내가 왜 포기했겠어?”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나랑 싸워서 이길 자신이 없었던 건 아니고?”정주현은 콧방귀를 뀌었다.“당신 같은 쓰레기는 주위에 송유라, 문연진까지 있는데 내가 왜 못 이겨? 못 이겨도 주해찬을 못 이기지 당신은 아니야!”구승훈은 괜히 마음에 찔려서 강하리를 슬쩍 바라봤지만 강하리는 무슨 생각에 잠긴 듯 미간을 찌푸렸다.그의 시선도 덩달아 무겁게 가라앉았다.“그럼 정 회장이 왜 당신한테 하리 만나지 못하게 한 건데?”정주현은 입을 삐죽거렸다.“내가 당신 눈에 거슬리는 게 싫었겠지. 당신은 개자식이라 누가 마음에 안들면 바로 물어버리니까.”순간 구승훈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지만 정주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강하리에게 몇 마디 말을 더 건넨 다음 자리를 떠났다.그가 떠난 뒤에야 구승훈은 강하리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인 채 물었다.“방금 무슨 생각 했어?”“별거 아니야.”구승훈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그녀를 다시 차에 태웠다.차에 도착한 후에야 그는 물었다.“정양철 생각하는 거지.”강하리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구승훈이라는 생각에 쓴 웃음을 내뱉었다.“맞아, 처음 대양그룹에 들어갔을 때 말을 꺼낸 건 정주현 씨였지만 나중엔 회장님의 권유로 들어갔어. 그땐 왜 날 그렇게까지 대양그룹에 오라고 하는지 의아했는데 나중에 퇴사할 때 들으니까 내가 자신이 짝사랑하던 여자와 닮았다고 하더라.”구승훈은 웃었다.“그 말을 믿어? 그게 다였다면 정주현이 널 쫓아다니는 걸 막지 않았을 거야. 게다가 정말 내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두려웠다면 애초에 내가 원하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널 데려가지 않았을 거야.”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렸다.“정 회장이 어딘가 수상해. 엄마가 납치됐을 때도 마침 병원에 있었고 엄마한테 사고가
강하리는 휴대폰을 들고 멍한 표정으로 문에 기대어 있었다.가슴에 씁쓸함이 밀려왔다.믿어?내가 어떻게 믿어.두 사람 사이에 굳어 있던 모든 신뢰가 그의 손에 무너져 내렸다.기지개를 켜며 방에서 나온 손연지는 그녀를 보고 깜짝 놀랐다.“하리야, 왜 돌아왔어?”손연지가 이쪽으로 걸어오면서 말했다.“왜 그래, 왜 표정이 안 좋아?”강하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바닥으로 보내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해외 파견이 미뤄졌어.”하지만 손연지는 그녀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그것만으로 이런 표정일 리가 없는데, 무슨 일 있었어?”강하리가 웃었다. “구승훈이 어디서 들었는지 내가 임신한 걸 알았어.”손연지의 가슴이 철렁했다.“그래서, 또 매달리든?”강하리는 씁쓸한 눈빛으로 웃었다.“나랑 아기에게 온전한 집을 주고 싶대.”손연지가 순간 비웃었다.“집을 준다고? 말은 쉽지, 근데 구씨 집안은 어떡하고? 그 집에선 동의한대? 자기 주변 쓰레기는 정리하지 않고 너한테만 매달려서 무슨 소용이 있는데? 네가 이렇게까지 힘들어하는 걸로 부족하대?”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럼 이제 어쩌려고? 어떻게 할 건데?”구승훈은 개자식이라 한 번 꽂히면 좀처럼 떨쳐내지 못한다.애초에 놓아줄 생각도 없었겠지만 강하리가 임신한 걸 알았으니 더더욱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았다.강하리는 배에 손을 얹고 한참이 지난 후 웃었다.“아무것도 안 해.”아이로 모험하지는 않을 거다. 게다가 엄마가 없을 때 송유라를 만나러 가느라 연락이 되지 않았던 그를 잊을 수가 없었다.그는 속죄할 기회를 달라고 했지만 때론 속죄할 수조차 없는 죄가 있다.그날 그녀가 잃은 건 엄마만이 아니었다.누군가를 사랑할 용기마저 잃었다.더는 사랑에 용기를 낼 수 없었다.손연지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이제부터 그 자식 피해.”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밤이 되자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강하리는 정서원이 남긴
이윽고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 구승훈이 전에 보내준 강찬수의 계좌 거래 명세를 열어보았다.자료를 넘기면서 왠지 모르게 심장이 빨리 뛰었다.그 날짜로 넘기자 그녀의 손끝이 얼어붙었다.그녀는 다이어리에 적힌 날짜와 강찬수의 거래 날짜를 확인했다.공교롭게도 목걸이가 부러진 날 강찬수는 4천만원을 받았고 정서원의 사고 당일에 받았던 금액과 똑같았다.강하리의 심장이 쿵쾅거렸다.만약 정서원의 교통사고로 받은 돈이 누군가 강찬수를 매수한 돈이라면 목걸이가 부서진 날은 뭐였을까?강찬수가 정서원을 미는 걸로 돈을 받았다면 이해가 된다.장진영과 송동혁 같은 인간들이 정서원을 가만히 둘 리가 없었으니까그런데 자신의 목걸이는 어떻게 된 걸까, 누군가의 이익에 걸림돌이 되는 것도 아닌데?강하리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워지며 순간적으로 송유라의 목걸이가 떠올랐지만 잠깐 머리를 굴리다가 이내 잊기로 했다.송유라의 목걸이는 분명 구승훈이 직접 준 것이라고 인정했다.그녀는 심호흡하고 생각했다. 괜한 생각인 걸까?어쩌면 그 돈은 그냥 평범하게 주고받은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하지만 세상에 정말 그런 우연이 있을 수 있나?손연지가 우유 한 잔을 들고 들어왔다.“쉬라고 했잖아!”강하리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혼란스러운 생각을 뒤로했다....구승훈은 강하리의 곁을 떠난 뒤 곧장 아파트로 돌아갔고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가정부가 저녁을 차려놓은 뒤였다.그녀는 잠시 멈칫했다.“하리 씨 안 왔어요?”구승훈은 짧게 대답하고 침실로 향하는데 가정부가 뒤에서 따라왔다.“또 싸웠어요?”구승훈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하리 짐 챙겨서 보내주면서 그 집에서 돌봐줄 핑계를 찾아봐요.”가정부는 당황했다.“하리 씨 이제 안 와요?”구승훈의 발이 멈칫했다.“다시 올 거예요.”가정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짐을 싸러 돌아섰다.구승훈은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나오더니 서재로 들어가 서랍에서 분홍색 크리스털 목걸이를 꺼냈다.목걸이를 바라보는 그의 목울대가 일렁거렸다.잠시 후
강하리가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손연지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누구야!”다가가 문을 연 그녀는 거친 말을 뱉었다.“누구야?”강하리가 물었다.“개자식이 여자까지 데리고... 왔어.”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리고 곧장 걸어가더니 문 앞에 다다랐을 때 그대로 굳어버렸다.구승훈은 물에 홀딱 젖은 채 검은 셔츠가 몸에 단단히 달라붙어 완벽한 몸매의 윤곽을 모두 드러내고 있었고 가정부는 전혀 젖지 않은 상태였다.순간 강하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여긴 왜 왔어?”구승훈이 말하기도 전에 가정부가 먼저 입을 열었다.“대표님이 음식 좀 갖다주라고 하셔서요.”가정부는 그렇게 말하며 안으로 들어갔고 강하리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이미 들어와 있었다.가정부가 들어가자 구승훈도 따라 들어가려고 했지만 강하리가 그대로 문을 닫아버렸고 구승훈은 간신히 문을 버티고 서 있었다.“나 몸이 다 젖어서 들어가서 옷 좀 갈아입을게.”강하리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여기 당신 옷 없어.”구승훈은 여전히 뻔뻔하게 말했다.“그럼 들어가서 물기 닦는 건 괜찮지?”“차에 수건 없어?” 강하리가 그렇게 말하며 문을 닫으려는데 가정부가 다시 입을 열었다.“하리 씨, 대표님께서 방금 하리 씨 옷 젖을까 봐 저한테 우산 씌워주느라 비 맞은 거니까 닦게 해주세요.말하며 그대로 구승훈을 안으로 끌고 갔다.“오늘 차를 바꿔서 차에 수건을 준비하지 않았어. 못 믿겠으면 아주머니한테 물어봐.”구승훈이 들어오면서 낮게 말하자 아주머니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강하리는 가정부와 구승훈을 번갈아 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뒤돌아 화장실로 들어가더니 수건을 꺼내 그에게 던져주었다.“빨리 닦고 꺼져!”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수건을 받아 들고 천천히 닦기 시작했다.손연지는 속으로 뻔뻔한 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나였으면 대걸레로 직격탄을 날렸을 텐데, 저 개자식이 착한 우리 하리만 괴롭히지!’가정부는 손에 보온병까
손연지는 너무 화가 나서 구승훈을 노려보며 욕했다.“하여튼 남자들은 다 똑같아.”그러고는 뒤돌아 방으로 들어가더니 쾅 소리가 나게 문을 닫았다.강하리는 구승훈을 돌아보았다.“구승훈 씨, 우리 둘 사이의 일에 연지까지 엮을 필요 없잖아.”구승훈은 얼굴을 찡그렸다.“내가 손연지 연수를 망쳤다고 생각하는 거야?”구승훈은 웃었다.“하리야, 너한테 난 그 정도로 나쁜 놈이야? 내가 아무리 그래도 네 친구는 건드리지 않아.”특히 지금은 강하리가 그를 무시하기 바쁜데 미쳤다고 손연지를 건드리겠나.강하리는 입술을 다물며 그를 흘깃 보았다.“아니면 됐고. 늦었어, 난 쉬고 싶으니까 이만 돌아가.”하지만 구승훈이 말을 꺼냈다.“가정부 아주머니는 남게 해. 내가 곁에 없어도 최소한 돌봐줄 사람이 곁에 있으면 안심이 될 것 같아.”강하리가 멈칫했다.“연지가 잘 챙겨줘.”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가정부 아주머니를 똑바로 바라보았다.“아주머니, 감사하지만 이만 돌아가 보세요.”아주머니는 난감한 표정으로 구승훈과 강하리를 번갈아 바라봤다.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네가 곁에 안 두면 해고할 수밖에.”강하리는 어이가 없었다.“구승훈 씨, 전에 내가 한 말 못 알아들었어?”하지만 구승훈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문질렀다.“하리야, 넌 내 여자야. 네 뱃속에는 내 아이가 있고 나도 네 곁에 있으면서 우리 아이 태어나는 것도 보고 평생을 너와 함께하고 싶어. 그게 잘못됐어?”강하리는 웃었지만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그게 가능할 것 같아? 당신들 구씨 가문은 나를 허락하지 않고 이 아이도 더더욱 받아주지 않겠지. 그리고 당신은 내가 필요할 때 곁에 있어 주지도 않았는데 내가 그런 당신이랑 평생을 같이 살 것 같아?”구승훈이 그녀를 바라봤다. “앞으로는 안 그래, 하리야. 앞으로는 절대 안 그래.”강하리가 비웃었다.“그래서 뭐? 구승훈 씨, 그런다고 지나간 일이 없던 게 돼? 그냥 가, 일이 다 벌어진 뒤에 늘어놓는 변명 따위 필요 없어, 그 거짓된
구승훈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구승재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물건 좀 준비해 줘.”구승훈은 가라앉은 눈빛으로 말을 마친 후 구승재에게 몇 마디 당부했고 구승재는 얼굴을 찡그렸다.“형, 무슨 일이야?”구승훈은 한껏 어두운 눈빛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마음의 위안이 될까 해서.”그렇게 말한 뒤 그는 곧장 들어갔다.구승훈을 보자마자 송동혁의 눈빛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구승훈이 자신을 구하러 왔다고 생각했다.“구 대표, 난 정말 결백해. 누가 날 속인 거야. 난 정말 구 대표를 노릴 생각 없었어. 난...”구승훈은 옆 의자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한 모금 들이마신 뒤 비웃었다. “송동혁, 내가 아니라면 누굴 건드릴 생각이었지?”송동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순간 그는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은 구승훈의 표정에 심장이 툭 떨어졌다.“구 대표, 난 누구도 건드릴 생각 없었어. 그놈들한테 이용당했을 뿐이야. 구 대표, 제발 날 좀 내보내 줘! 유라를 생각해서라도 제발. 유라는...”“송동혁.”구승훈은 살기를 품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훑어보았다.“아직도 감히 내 앞에서 송유라 얘기를 해?”송동혁의 얼굴이 굳어졌다.“구 대표, 무슨 말이야?”“송씨 가문은 정말 날 멍청이로 보는 건가?”송동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순식간에 그의 머릿속에는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들킨 건가? 그 일이 다 드러난 걸까?’하지만 이내 다시 감정을 진정시켰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당황하면 안 된다.“구, 구 대표, 무슨 말인지 정말 모르겠어, 우리 송씨 가문은 한 번도 자네한테 미안한 짓 한 적 없어. 유라가 떼를 쓰긴 해도 자네한테는 줄곧 진심이었는데 지금 뭔가 오해하는 것 같은데?”구승훈은 차가운 눈빛으로 송동혁을 바라보았다.“송동혁, 이 박사 알지?”송동혁의 표정이 한껏 어두워졌다.“구 대표, 어느 이 박사를 말하는 거야? 알다시피 우리 송씨 가문은 의학계에 종사해서 아는 의사들이
구승훈의 눈에서 어두운 기운이 번뜩였다.연미숙, 연미숙...구승훈은 문득 지난번 입찰회에서 들이부었던 뜨거운 물이 떠올랐다.진작 연미숙의 수상함을 눈치챘어야 했는데.구승훈의 얼굴이 한층 싸늘하게 굳어졌다.그가 차갑게 웃었다.“구승재한테 가서 문연진이 어떻게 지내는지 가서 보라고 해.”준봉은 바로 알아들었다.준봉이 나간 뒤 병동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정양철과 정주현이 문 앞에 서 있었다.“강하리 씨 보러 왔어요.”정주현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고 정양철은 여전히 태연한 표정이었다.구승훈이 웃으며 말했다.“정 회장님께서 신경을 많이 써주시네요.”정양철이 웃었다.“그래도 제가 아끼는 후배라서요.”구승훈은 더 말이 없었고 방 안의 분위기는 묘하게 긴장감이 감돌았다.정주현은 얼굴을 찡그렸다.“왜 그래요?”정양철이 웃었다.“아무것도 아니야. 하리 양이 자고 있다니 우리도 여기 있을 필요가 없지.”그렇게 말한 뒤 정양철은 정주현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엘리베이터에 들어가기 직전, 그의 발걸음이 갑자기 멈추더니 뒤를 돌아 병동 입구에 서 있는 구승훈을 다시 바라보았다.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서 있는 그의 표정은 웃는 듯 마는 듯했다.오늘 억울한 누명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차갑고 무관심했다.정양철은 미간을 살짝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아버지? 요즘 왜 그러세요?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요?” 정주현이 불쑥 묻자 정신을 차린 정양철이 답했다.“대체 어딜 봐서 내가 걱정이 있어 보여?”정주현이 혀를 찼다.“걱정이 없어요? 요즘 자주 잠도 못 주무시고 발코니에서 담배 피우시는 거 봤어요.”정양철이 멈칫하다가 물었다.“주현아, 내가 회사를 네 손에 맡기면 잘 해낼 수 있겠어?”정주현은 얼굴을 찡그렸다. “아버지, 건강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니죠?” 정양철은 그를 노려보며 엉덩이를 걷어찼다. “그러길 바라는 거냐?”정주현은 웃으며 피했지만 왠지 아버지가 어딘가 모르게 이상하게 느껴졌다.구승훈은
강하리는 잠시 구승훈의 시선을 마주했다가 고개를 돌렸다.그녀는 시선을 내리며 그 안에 담긴 상처와 아픔을 숨겼다.더는 이 남자에게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정말 정양철 짓이라면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한참을 침묵하던 그녀가 말했다. “구승훈, 도와줘.”강하리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구승훈은 애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그녀가 자신에게 의지하길 바랐는데 주해찬을 위해 부탁하는 그녀를 보니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그는 손을 뻗어 강하리를 끌어안았다.“하리야, 너를 위해서야, 주해찬을 위해서야?”“구승훈!”강하리는 붉어진 눈으로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당신이 하기 싫다면 심 변호사님한테 부탁할 거야.”허리를 감싼 구승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내 앞에서 부탁해 놓고 또 다른 사람을 찾아간다고?”그렇게 말한 뒤 그는 다소 무기력한 한숨을 내쉬었다.“강하리, 넌 대체 날 뭐로 보는 거야? 내가 정말 너 혼자서 정양철과 맞서게 놔둘 것 같아?”강하리는 시선을 돌렸다.구승훈이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지만 자신이 원해서 그러길 바랐다.강하리도 다쳐서 이미 체력적으로 지쳐 있었고 상처를 입어 얼굴에 핏기 하나 없었다.구승훈은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좀 쉬어.”“잠이 안 와.”강하리는 침대에 기대어 잠을 청했고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휴대전화에는 사고 당시의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주해찬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차에서 구조될 때 심장이 심하게 뛰었고 안 그래도 창백했던 얼굴은 한층 더 하얗게 변했다.구승훈은 다가가 그녀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낸 뒤 손가락으로 턱을 살살 문질렀다.“내가 다 알아낼 테니까 날 믿어.”강하리가 고개를 들어 쓴웃음을 터뜨렸다.“구승훈, 나 때문에 계속 이런 일이 생기는 것 같아.”구승훈의 심장이 저렸다.“강하리!”강하리가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나 좀 잘게.”말을 마친 그녀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구승훈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구승훈은 강하리를 바라보기만 했다.“내가 진짜 주해찬을 건드렸다면 어떻게 할래?”강하리가 그를 마주 보았다.“살인은 대가를 치러야 해. 구승훈 당신은 나한테 특별할 게 없어.”구승훈의 마음속이 온통 씁쓸함으로 물들었다.그는 쓴웃음을 내뱉었지만 그래도 말을 이어갔다.“아직 몰라. 의사가 그럴 수도 있다고 했어.”하지만 강하리의 마음은 다소 무겁게 가라앉았다.그때 정서원이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도 의사가 그렇게 말했었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선배 좀 보고 올게.”구승훈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지만 결국 막지 않았다.그녀를 보내주지 않으면 그녀가 계속 불안해할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구승훈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따라 나갔다.중환자실 밖에서 여전히 울고 있는 석미란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강하리의 몸이 굳어졌다.그녀는 손가락에 힘을 주고 저쪽으로 걸어갔다.다만 아직 중환자실 앞으로 가기도 전에 걸음이 뚝 멈췄다.정양철과 정주현이 거기 있을 줄이야.그녀가 정양철을 힐끗 쳐다보자 정양철은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강하리는 문득 정서원이 납치되었을 때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는 게 떠오르며 손가락을 말아쥐었다.정서원에게 일이 생겼을 때 정양철이 병원에 나타났다.그녀가 다시는 깨어나지 못하는지 확인하러 온 듯이.구승훈은 강하리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하고 정양철을 힐끗 쳐다보더니 큰 손으로 강하리의 뒤 허리를 살며시 그러잡았다.강하리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거두었다.정주현은 강하리를 보자마자 서둘러 이쪽으로 다가왔다.“강하리 씨, 좀 어때요?”강하리가 고개를 저었다.“난 괜찮아요.”말을 마친 그녀가 중환자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두꺼운 유리 벽 너머로 드디어 주해찬이 보였다.항상 온화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있던 그는 현재 침대에 누워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몸에 여러 개의 튜브를 삽입하고 누워 있었다.강하리의 마음이 아팠다.밀려오는 죄책감이 그녀를 익사시킬 것만 같았
강하리의 머릿속이 하얘졌다.“뭐라고요?”석미란은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해찬이가 식물인간이 됐다고, 이제 만족해?”강하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손끝까지 떨리고 있었다.“가볼래요.”그녀는 이불을 걷어 올리고 밖으로 나가려고 일어났지만 구승훈이 그녀를 붙잡았다.“지금 가도 소용없어. 중환자실에 있어서 못 만나.”그때 석미란이 갑자기 강하리를 붙잡았다.“망할 년, 네가 무슨 자격으로 해찬이를 보러 가! 해찬이가 정말로 못 깨어나면 내가 네 목숨을 가져갈 거야!”석미란이 말하며 강하리의 목을 조르려고 달려들자 구승훈이 그녀의 손을 잡고 내동댕이쳤다.“여사님, 말 가려서 하세요. 대체 누가 누구 때문에 힘들다는 겁니까? 지금 전부 하리 탓으로 돌리는데 만약 주해찬 때문에 하리가 피해를 본 거면 저도 하리 복수를 위해 중환자실로 가서 주해찬을 죽여도 됩니까?”석미란은 눈이 빨개진 채 구승훈을 노려보았다.주해찬이 깨어나지 못할 위험에 처해있는데 죽여버리겠다고?“구승훈, 이 살인자 새끼야,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을 것 같아? 너랑 강하리, 너네 둘 다 살인자야! 내가 죗값 치르게 해줄 테니까 기다려. 망할 네년은 해찬이 목숨값 내놔!”석미란의 울부짖는 소리가 병동 전체에 울려 퍼졌고 준봉은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여사님, 방금 경찰에서 그 차가 구 대표님 번호판을 덧씌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대표님은 누명을 쓴 겁니다.”석미란은 여전히 증오에 가득 찬 눈빛으로 구승훈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구승훈이 진짜 아들을 죽인 범인이라는 듯이.“경찰을 매수하면 그만인 줄 알아? 구승훈, 내가 죗값을 치르게 할 거야!”강하리는 준봉의 말을 듣고 순간 몸이 굳어졌다.구승훈은 출입구를 지키고 있는 준봉을 바라보았다.“여사님 나가시라고 해.”준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석미란을 막기 위해 앞으로 달려갔다.“여사님, 이만 나가 주세요.”석미란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주해찬의 아버지에게 제지당했다.주해찬을 닮은 외모에 겉과 속이 모두 반듯한
주해찬의 표정이 확 바뀌며 핸들을 꺾었지만 그래도 피할 수 없었다.그는 무의식적으로 강하리를 보호했고 강하리의 시선은 다가오는 차에 고정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구승훈의 차다.차 번호판도 똑같았다.구승훈이 B시에 올 때마다 몰던 차였다.순식간에 강하리의 얼굴은 창백해지고 곧 눈앞이 핑글 돌았다....강하리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침대 옆에 앉아 있는 구승훈이 보였다.“좀 어때?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강하리는 멍한 표정으로 옆에 앉은 남자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구승훈, 당신이야?”구승훈의 시선이 무겁게 가라앉았고 의심을 받은 그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었다.“하리야, 너 정말 나라고 의심하는 거야?”입술을 달싹이며 그를 바라보는 강하리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의심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 차는 분명 구승훈의 것이었다.하지만 구승훈이 아니라고 말할 때 오히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서늘한 구승훈의 시선을 피하며 나지막이 물었다.“선배는?”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네가 신경 쓰는 건 주해찬밖에 없지?”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날 구해준 사람이야.”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던 구승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내가 널 구해준 적은 없어? 하리야, 너 정말 사람 마음 아프게 한다.”강하리는 그의 손에서 손을 빼냈다.지금은 그와 이런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주해찬이 그녀의 몸을 감쌌기에 그는 꽤 심하게 다쳤을 거다.처음부터 주해찬에겐 미안한 것투성이였다.오랜 시간 동안 그의 헌신적인 모습을 보면서도 그에게 해줄 대답이 없었다.게다가 구승훈의 차로 교통사고까지 났으니 마음속에는 죄책감이 커져만 갔다.“선배는 어떻게 됐어?”여전히 똑같은 말에 구승훈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주해찬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목숨은 건졌지만 그가 깨어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였다.지금 강하리의 태도로 볼 때, 주해찬이 자신을 구하려다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녀가 어떻게 행동할지 정말 알 수 없
주해찬의 표정이 잠시 번뜩이다가 미소를 지으며 정양철에게로 향했다.“아저씨, 오랜만이네요.”정양철의 얼굴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가 이내 평소 모습으로 돌아왔다.“해찬아, 여긴 무슨 일이야?”주해찬이 미소를 지었다.“친구 데려다주고 나오는데 여기서 아저씨랑 만났네요.”정양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더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그럼 가서 일 봐. 난 아직 할 일이 남아서.”“알았어요.”주해찬은 그 말을 하고 돌아서서 문을 나섰다.정양철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전화기를 꽉 쥐었다.한편 주해찬은 안에서 나오기 바쁘게 훅 안도하듯 한숨을 내쉬었다.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한참 동안 멍한 표정으로 길가에 서 있었다.방금 정양철이 한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강하리나 구승훈과 무슨 일이 있는 걸까?손을 댔다고 했는데, 무슨 짓을 한 걸까.정주현에게 선을 긋던 강아리의 모습과 연관 짓자 주해찬은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다.그는 다소 창백한 얼굴로 휴대전화를 바라보며 한참을 망설이다가 강하리에게 전화를 걸었다.강하리가 샤워하러 가려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선배?”하지만 강하리가 전화를 받을 때 주해찬은 갑자기 마음을 바꿨다.적어도 제대로 알아보고 강하리에게 알려줘야지 무턱대고 말하는 건 무책임한 행동이었다.“아니야, 그냥 내일 나랑 같이 팔찌 가지러 가자고.”“선배, 나 혼자 갈 수 있어요.” 강하리가 여전히 거절하려는데 주해찬이 말을 막았다.“그렇게 하는 걸로 하고 오늘 밤엔 일찍 쉬어.”주해찬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다음 날 이른 아침, 준봉은 구승훈의 전화를 받고 강하리에게 아침을 가져다주었다.그런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는 순간, 강하리 방 앞에 두 사람이 수상하게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은 그를 보자마자 뒤돌아 복도 쪽으로 달려갔고 준봉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그들을 쫓아갔다.일직 강하리가 묵고 있는 호텔 아래층에 도착한 주해찬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어젯밤 정양철의 그 말 때문에 거의 밤을 새
준봉이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다.“대표님께서 마실 것 가져다드리래요.”말을 마친 준봉은 강하리에게 밀크티 한 잔을 건넸고 강하리는 눈앞에 놓인 밀크티를 보고 화를 내며 다시 한번 문을 닫았다.주해찬은 방에 앉아서 쓴웃음을 지었다.“내가 안 가면 조금 있다가 또 올걸.”주해찬은 말을 마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다.“오늘 밤 모임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였다.“죄송해요, 선배.”구승훈이 이러면 주해찬뿐만 아니라 강하리도 난처했다.주해찬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문득 어젯밤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났던 모습이 떠올라 결국 포기했다.준봉은 강하리의 방에서 나오는 주해찬을 바라보며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렇지 않았다면 다음에 문을 두드리러 갈 때 또 어떤 핑계를 대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주해찬이 나오며 준봉을 보고 웃었다.“구 대표님한테 그럴 필요 없다고 전해요. 하리가 원하면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소용없고 하리가 원하지 않는다면 나도 절대 함부로 하지 않는다고요.”준봉은 주해찬을 바라보기만 했다.“안녕히 가세요, 주해찬 씨.”주해찬은 강하리를 힐끗 쳐다보며 작별 인사를 속삭인 뒤 곧장 돌아섰다.주해찬이 떠난 뒤에야 준봉은 다시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은 짧게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차는 경찰서를 향해 빠르게 달렸고 통화를 마친 그는 앞에서 운전하고 있는 구승재를 바라보았다.“목란정원 쪽 상황은 어때요?”“우리 쪽 사람들이 들어갔는데 안에 연정이가 없었대. 그리고 사람들이 들어갈 때 꼭 큰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순조롭게 들어갔대.”시선을 내려 염주를 만지작거리던 구승훈이 차갑게 웃었다.“역시.”구승재가 얼굴을 찡그렸다.“역시 뭐?”구승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빛만 더욱 짙어질 뿐이었다.어젯밤에 그녀는 일부러 그를 그곳으로 유인한 거다.연정이 사건은 여초연이 한 짓이다.염주를 만지작거리던 구승훈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뒤틀렸다.하지만 잠시 후 그는
정주현은 다소 시무룩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강하리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본인이 말하지 않으니 더 물어볼 수도 없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방금 강하리 씨 데려다줬어. 웬일로 아들이 보고 싶어서 그래?”연미숙이 잠시 멈칫했다.“이 자식, 누가 보면 내가 평소에 너한테 관심 없는 줄 알겠다.”정주현은 연미숙 앞에서 늘 장난기 가득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그래, 관심 많은 거 알겠으니까 무슨 일인데 그래?”연미숙은 잠시 침묵했다.“강하리한테 같이 밥 먹자고 해.”차라리 말하지 않으면 좋았을걸. 그 말을 꺼내니 정주현은 더 우울해졌다.“엄마, 강하리 씨 바빠. 그렇게 할 일이 없으면 친구들이나 만나지 강하리는 왜?”연미숙이 웃었다.“우리 아들이 입이 닳도록 칭찬하는 여자를 내가 좀 만나면 안 돼?”정주현이 입을 삐죽거렸다.“영감탱이가 엄마처럼 정신 차렸으면 강하리가 며느리 됐을 텐데.”연미숙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루 종일 밖에 돌아다니지 말고 빨리 돌아와.”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은 후, 그녀의 눈에는 악의에 찬 눈빛만이 번쩍였다.강하리는 정주현을 배웅하고 창가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주해찬은 그녀의 뒤에 서서 물었다. “일부러 주현 씨랑 거리를 두는 거야? 무슨 문제라도 있어?”정신을 차린 강하리는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선배, 난 신경 쓰지 말고 가서 일 봐요.”주해찬은 그녀가 말하지 않으려는 것을 보며 다소 무력하고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만약 이 순간 그녀의 곁에 있던 사람이 구승훈이었다면 그녀는 바로 말하지 않았을까?아니면 구승훈은 굳이 묻지 않아도 그녀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고 있었을까?질투가 안 난다면 거짓말이다. 분명 그가 구승훈보다 먼저 강하리를 좋아했는데.“하리야, 가능하면 나도 네가 기댈 곳이 되어주고 싶어.”강하리의 표정은 굳어졌고 말투에는 분명하게 선을 긋고 거리를 두는 게 느껴졌다.“선배, 정말 고맙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여초연이 얼마나 치밀하게 움직이는 사람인지 구승훈이 제일 잘 안다.정말 여초연이 연정이를 데려갔다면 그렇게 쉽게 꼬리를 드러내지 않았을 테고 초조했던 그는 계속해서 그녀가 먼저 빈틈을 보이길 기다릴 수가 없었다.그래서 소란을 일으킨 뒤 그녀의 움직임을 주시할 생각이었다.그녀의 수단으로 봤을 때 누군가 자기를 지켜보는 걸 모를 리 없었다.그런데도 오늘 대놓고 이곳으로 왔다는 건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그를 유인한 걸까?그렇다면 연정이에게 일어난 일이 그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더 분명해지지 않나?어쨌든 구승훈은 연정이를 먼저 생각해야 했다.연정이가 정말 그녀의 손에 있고 막다른 길에 이른 그녀가 무슨 짓을 할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조심할 수밖에 없다.그 시각 목란정원에서 여초연은 복도에서 누군가와 휴대폰을 들고 영상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상대는 여자아이를 안고 있었다. 이쪽의 깊은 밤과 달리 저쪽은 태양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강하리는 다음 날 주해찬과 함께 B시로 갔다.비행기에서 막 내린 두 사람은 입국 게이트에서 정주현이 신나게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았다.“강하리 씨, 드디어 왔네요!”강하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주해찬을 흘깃 쳐다보았다.주해찬은 무기력하게 어깨를 으쓱했다.“어쩔 수 없었어. 계속 물어보니까 시간을 알려줄 수밖에.”정주현은 곧바로 불만을 터뜨렸다. “강하리 씨, B시로 오면 알려준다면서 이러는 건 아니죠!”강하리는 힘없이 웃었다.“가요.”그러던 중 정주현은 강하리와 함께 일하고 싶다는 걸 다시 한번 언급했지만 강하리는 여전히 부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정주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강하리를 바라보았다. “하리 씨, 그래도 우리 같이 일한 적이 있는데 이러면 대양그룹에 불만이 있는 것 같잖아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정 회장님이 절 찾아오라고 시켰어요?”정주현은 부인하지 않았다.“영감탱이한테 불만 있는 건 아니죠? 지난번에 구정우 도와줘서 그래요?”강하리는 침묵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정주현은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