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고 할 필요 없어.”강하리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호흡을 가다듬었다.“구승훈, 송유라한테 갔을 때도 당신은 내가 한 말을 잊은 게 아니야. 다만 원하는 대로 선택한 것뿐이지.”“하리야, 다 알면서 왜 그래. 내가...”“난 몰라. 내가 아는 건 내가 필요할 때 당신이 송유라에게 갔다는 것뿐이야. 구승훈, 그때 엄마가 그렇게 됐을 때 내가 얼마나 무기력했는지 알아? 얼마나 당신이 곁에 있어 주길 바랐는지 알아? 근데 당신은 없었어. 당신은 두 번이나 그렇게 날 버렸어. 난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아...”구승훈은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저릿한 통증이 밀려왔다.“미안해, 앞으로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하리야, 약속할게.”그는 그녀에게 부드럽게 입맞춤하며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말했다.“하리야, 나한테 속죄할 기회를 줘, 응? 난 너를 지키고 우리 아이도 돌보고 둘에게 온전한 집을 주고 싶어.”강하리의 가슴이 아플 정도로 답답해 났다.집이라...간절히 원했지만 헛된 꿈에 불과하다는 걸 알았던 그녀는 곧바로 그를 밀어붙였다.“모든 잘못에 속죄할 기회가 주어지진 않아.”구승훈의 심장이 철렁하며 곧 그의 시선이 그녀의 작은 배로 향했다.“하리야, 그냥 우리 아이에게 기회를 준다고 생각하면 안 될까?”그의 큰 손이 그녀의 배에 내려앉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그 모습이 정말 아이의 탄생을 고대하고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의 모습처럼 보였지만 강하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이 남자는 결코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그가 정말 송유라와 선을 그으려고 노력하는 걸지도 모른다.하지만 그 경계는 너무나도 약하고 허무했다.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다가 한참 후 그의 손을 밀어냈다.그런데 그 순간 구승훈이 갑자기 그녀의 손을 잡았다.“하리야, 이제부터 내가 너와 아이를 지켜줄게.”강하리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고 창밖을 바라보기만 했다.하지만 그녀의 눈가는 살짝 붉어져 있었다.간병인 아주머니는 강하리의 모습에
가방 안에는 간병인 아줌마가 말한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열쇠와 책, 그리고 상자.강하리는 열쇠를 집어 들었을 때 다소 놀란 눈빛이었다. 은행 금고 열쇠라니.그리고 그 책은 정서원의 일기장이었다.그 상자는... 강하리는 상자를 열어보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놀랍게도 깨진 분홍색 크리스털 목걸이였는데 애초에 강찬수에 의해 산산조각 났던 목걸이를 정서원이 어떻게든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서진 조각들을 다시 조립해 놓은 것이다.강하리는 울음을 참지 못했다.정서원이 조용히 이런 일을 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그녀가 갑자기 흐느끼자 구승훈은 약간 당황한 듯 그녀를 품에 안았다.“왜 그래, 아주머니가 너한테 뭐 남겼어?”하지만 강하리는 그냥 그렇게 울기만 했다.강하리는 한참을 울고 나서야 서서히 진정했고 구승훈은 그녀를 안은 채 마음이 아파 큰 손으로 강하리를 토닥거렸다.강하리는 눈물을 닦으며 구승훈에게 말했다.“고마워요.”구승훈은 그녀의 허리를 잡았다.“옷이 눈물 콧물 범벅이 됐는데 그냥 고맙다는 말로 때우려고?”강하리는 그를 밀어내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구승훈의 시선이 상자로 향했고 상자 안에 금이 간 목걸이를 본 순간 머리끝까지 서늘한 기운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핸들을 잡은 손의 핏줄마저 튀어나왔다.목걸이는 완벽하게 조립된 것이 아니었고 온통 금이 간 데다가 가장자리와 모서리가 많이 떨어져 있었다.하지만 그는 강하리의 목걸이와 송유라의 목걸이가 똑같다고 확신했다.“이거 아주머니가 준 거야?”강하리는 시선을 바닥으로 내린 채 그에게 묻고 싶었다. 정말 하나도 기억이 안 나냐고.하지만 입가에 차오른 말을 그녀는 다시 삼켰다.이미 두 사람이 이렇게 된 마당에 기억하든 안 하든 무슨 상관이 있을까.강하리가 나지막이 말했다.“나 다시 데려다줘요.”구승훈은 다소 무심하게 물었다.“뭐 먹고 싶어, 일단 뭐 좀 먹고 돌아갈까?”강하리는 물건을 넣은 뒤 밖을 내다보다가 대꾸했다.“아뇨, 입맛이 없어요.”구승훈은
그리고 같은 시각, 다른 쪽에서 문연진은 강하리가 떠나지 않고 구승훈까지 찾아왔다는 소식에 집에서 또 한 번 성질을 부렸고 문원진은 눈살을 찌푸렸다.“됐어, 투정을 부려서 뭐 해?”문연진은 화가 났다.그녀는 이번엔 정말 둘이 헤어질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놀랍게도 이 모든 일이 있고 난 뒤에도 둘은 여전히 붙어 있을 줄이야.“저 강하리는 왜 어딜 가나 있어! 저 여자가 있는 한 승훈 오빠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을 거야.”문원진이 콧방귀를 뀌었다.“뭘 서둘러? 강하리는 조만간 누가 처리할 거야. 송유라한테 무슨 일이 생겼는데 송씨 가문에서 전부 걔한테 뒤집어씌웠어. 구씨 집안에서도 저런 식으로 계속 구승훈 곁에 있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을 거야.”문연진은 얼굴을 찡그렸다.“할아버지, 송유라 일 할아버지가 그랬어요?”문원진이 콧방귀를 뀌었다.“쓰레기 같은 것 남겨둬서 뭐 하겠어. 쓸모가 있으면 써먹어야지.”문연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근데 송씨 가문은 하나같이 다 쓰레기인데 쓸모가 있을까요?”문원진이 웃었다.“증오의 힘은 무시할 수 없지.”...강하리가 화장실에서 나오자 구승훈이 얼굴을 찡그리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모습이 보였다.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로 식탁에 앉았고 정신을 차린 구승훈은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뭐 먹고 싶어?”강하리는 그의 손을 피했다.“아무거나.”애초에 식욕이 별로 없었고 방금 장진영까지 보고 온 탓에 더더욱 입맛이 없었다.구승훈은 그녀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더 묻는 대신 평소 그녀가 좋아하던 음식 몇 가지를 주문했다.밥을 다 먹고 나서야 그가 물었다.“이따가 아파트로 돌아갈 거야?”“연지네 집으로 가.”강하리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고 구승훈은 그저 웃을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 한 잔을 따라주었다.“또 위가 아파?”강하리는 시선을 내렸다.“괜찮아.”이번 임신은 지난번처럼 고통스럽지는 않았다.“아주머니한테 손연지 씨 집으로 가서 밥해주라고 할까? 식사
강하리가 얼굴을 찡그렸고 구승훈의 눈빛도 어두워졌다.정주현이 포기하란 말이 거슬린 게 아니었다.“정 회장이 강하리 만나는 걸 반대했다고?”정주현은 어깨를 으쓱했다.“안 그러면 내가 왜 포기했겠어?”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나랑 싸워서 이길 자신이 없었던 건 아니고?”정주현은 콧방귀를 뀌었다.“당신 같은 쓰레기는 주위에 송유라, 문연진까지 있는데 내가 왜 못 이겨? 못 이겨도 주해찬을 못 이기지 당신은 아니야!”구승훈은 괜히 마음에 찔려서 강하리를 슬쩍 바라봤지만 강하리는 무슨 생각에 잠긴 듯 미간을 찌푸렸다.그의 시선도 덩달아 무겁게 가라앉았다.“그럼 정 회장이 왜 당신한테 하리 만나지 못하게 한 건데?”정주현은 입을 삐죽거렸다.“내가 당신 눈에 거슬리는 게 싫었겠지. 당신은 개자식이라 누가 마음에 안들면 바로 물어버리니까.”순간 구승훈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지만 정주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강하리에게 몇 마디 말을 더 건넨 다음 자리를 떠났다.그가 떠난 뒤에야 구승훈은 강하리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인 채 물었다.“방금 무슨 생각 했어?”“별거 아니야.”구승훈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그녀를 다시 차에 태웠다.차에 도착한 후에야 그는 물었다.“정양철 생각하는 거지.”강하리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구승훈이라는 생각에 쓴 웃음을 내뱉었다.“맞아, 처음 대양그룹에 들어갔을 때 말을 꺼낸 건 정주현 씨였지만 나중엔 회장님의 권유로 들어갔어. 그땐 왜 날 그렇게까지 대양그룹에 오라고 하는지 의아했는데 나중에 퇴사할 때 들으니까 내가 자신이 짝사랑하던 여자와 닮았다고 하더라.”구승훈은 웃었다.“그 말을 믿어? 그게 다였다면 정주현이 널 쫓아다니는 걸 막지 않았을 거야. 게다가 정말 내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두려웠다면 애초에 내가 원하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널 데려가지 않았을 거야.”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렸다.“정 회장이 어딘가 수상해. 엄마가 납치됐을 때도 마침 병원에 있었고 엄마한테 사고가
강하리는 휴대폰을 들고 멍한 표정으로 문에 기대어 있었다.가슴에 씁쓸함이 밀려왔다.믿어?내가 어떻게 믿어.두 사람 사이에 굳어 있던 모든 신뢰가 그의 손에 무너져 내렸다.기지개를 켜며 방에서 나온 손연지는 그녀를 보고 깜짝 놀랐다.“하리야, 왜 돌아왔어?”손연지가 이쪽으로 걸어오면서 말했다.“왜 그래, 왜 표정이 안 좋아?”강하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바닥으로 보내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해외 파견이 미뤄졌어.”하지만 손연지는 그녀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그것만으로 이런 표정일 리가 없는데, 무슨 일 있었어?”강하리가 웃었다. “구승훈이 어디서 들었는지 내가 임신한 걸 알았어.”손연지의 가슴이 철렁했다.“그래서, 또 매달리든?”강하리는 씁쓸한 눈빛으로 웃었다.“나랑 아기에게 온전한 집을 주고 싶대.”손연지가 순간 비웃었다.“집을 준다고? 말은 쉽지, 근데 구씨 집안은 어떡하고? 그 집에선 동의한대? 자기 주변 쓰레기는 정리하지 않고 너한테만 매달려서 무슨 소용이 있는데? 네가 이렇게까지 힘들어하는 걸로 부족하대?”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럼 이제 어쩌려고? 어떻게 할 건데?”구승훈은 개자식이라 한 번 꽂히면 좀처럼 떨쳐내지 못한다.애초에 놓아줄 생각도 없었겠지만 강하리가 임신한 걸 알았으니 더더욱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았다.강하리는 배에 손을 얹고 한참이 지난 후 웃었다.“아무것도 안 해.”아이로 모험하지는 않을 거다. 게다가 엄마가 없을 때 송유라를 만나러 가느라 연락이 되지 않았던 그를 잊을 수가 없었다.그는 속죄할 기회를 달라고 했지만 때론 속죄할 수조차 없는 죄가 있다.그날 그녀가 잃은 건 엄마만이 아니었다.누군가를 사랑할 용기마저 잃었다.더는 사랑에 용기를 낼 수 없었다.손연지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이제부터 그 자식 피해.”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밤이 되자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강하리는 정서원이 남긴
이윽고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 구승훈이 전에 보내준 강찬수의 계좌 거래 명세를 열어보았다.자료를 넘기면서 왠지 모르게 심장이 빨리 뛰었다.그 날짜로 넘기자 그녀의 손끝이 얼어붙었다.그녀는 다이어리에 적힌 날짜와 강찬수의 거래 날짜를 확인했다.공교롭게도 목걸이가 부러진 날 강찬수는 4천만원을 받았고 정서원의 사고 당일에 받았던 금액과 똑같았다.강하리의 심장이 쿵쾅거렸다.만약 정서원의 교통사고로 받은 돈이 누군가 강찬수를 매수한 돈이라면 목걸이가 부서진 날은 뭐였을까?강찬수가 정서원을 미는 걸로 돈을 받았다면 이해가 된다.장진영과 송동혁 같은 인간들이 정서원을 가만히 둘 리가 없었으니까그런데 자신의 목걸이는 어떻게 된 걸까, 누군가의 이익에 걸림돌이 되는 것도 아닌데?강하리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워지며 순간적으로 송유라의 목걸이가 떠올랐지만 잠깐 머리를 굴리다가 이내 잊기로 했다.송유라의 목걸이는 분명 구승훈이 직접 준 것이라고 인정했다.그녀는 심호흡하고 생각했다. 괜한 생각인 걸까?어쩌면 그 돈은 그냥 평범하게 주고받은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하지만 세상에 정말 그런 우연이 있을 수 있나?손연지가 우유 한 잔을 들고 들어왔다.“쉬라고 했잖아!”강하리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혼란스러운 생각을 뒤로했다....구승훈은 강하리의 곁을 떠난 뒤 곧장 아파트로 돌아갔고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가정부가 저녁을 차려놓은 뒤였다.그녀는 잠시 멈칫했다.“하리 씨 안 왔어요?”구승훈은 짧게 대답하고 침실로 향하는데 가정부가 뒤에서 따라왔다.“또 싸웠어요?”구승훈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하리 짐 챙겨서 보내주면서 그 집에서 돌봐줄 핑계를 찾아봐요.”가정부는 당황했다.“하리 씨 이제 안 와요?”구승훈의 발이 멈칫했다.“다시 올 거예요.”가정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짐을 싸러 돌아섰다.구승훈은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나오더니 서재로 들어가 서랍에서 분홍색 크리스털 목걸이를 꺼냈다.목걸이를 바라보는 그의 목울대가 일렁거렸다.잠시 후
강하리가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손연지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누구야!”다가가 문을 연 그녀는 거친 말을 뱉었다.“누구야?”강하리가 물었다.“개자식이 여자까지 데리고... 왔어.”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리고 곧장 걸어가더니 문 앞에 다다랐을 때 그대로 굳어버렸다.구승훈은 물에 홀딱 젖은 채 검은 셔츠가 몸에 단단히 달라붙어 완벽한 몸매의 윤곽을 모두 드러내고 있었고 가정부는 전혀 젖지 않은 상태였다.순간 강하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여긴 왜 왔어?”구승훈이 말하기도 전에 가정부가 먼저 입을 열었다.“대표님이 음식 좀 갖다주라고 하셔서요.”가정부는 그렇게 말하며 안으로 들어갔고 강하리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이미 들어와 있었다.가정부가 들어가자 구승훈도 따라 들어가려고 했지만 강하리가 그대로 문을 닫아버렸고 구승훈은 간신히 문을 버티고 서 있었다.“나 몸이 다 젖어서 들어가서 옷 좀 갈아입을게.”강하리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여기 당신 옷 없어.”구승훈은 여전히 뻔뻔하게 말했다.“그럼 들어가서 물기 닦는 건 괜찮지?”“차에 수건 없어?” 강하리가 그렇게 말하며 문을 닫으려는데 가정부가 다시 입을 열었다.“하리 씨, 대표님께서 방금 하리 씨 옷 젖을까 봐 저한테 우산 씌워주느라 비 맞은 거니까 닦게 해주세요.말하며 그대로 구승훈을 안으로 끌고 갔다.“오늘 차를 바꿔서 차에 수건을 준비하지 않았어. 못 믿겠으면 아주머니한테 물어봐.”구승훈이 들어오면서 낮게 말하자 아주머니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강하리는 가정부와 구승훈을 번갈아 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뒤돌아 화장실로 들어가더니 수건을 꺼내 그에게 던져주었다.“빨리 닦고 꺼져!”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수건을 받아 들고 천천히 닦기 시작했다.손연지는 속으로 뻔뻔한 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나였으면 대걸레로 직격탄을 날렸을 텐데, 저 개자식이 착한 우리 하리만 괴롭히지!’가정부는 손에 보온병까
손연지는 너무 화가 나서 구승훈을 노려보며 욕했다.“하여튼 남자들은 다 똑같아.”그러고는 뒤돌아 방으로 들어가더니 쾅 소리가 나게 문을 닫았다.강하리는 구승훈을 돌아보았다.“구승훈 씨, 우리 둘 사이의 일에 연지까지 엮을 필요 없잖아.”구승훈은 얼굴을 찡그렸다.“내가 손연지 연수를 망쳤다고 생각하는 거야?”구승훈은 웃었다.“하리야, 너한테 난 그 정도로 나쁜 놈이야? 내가 아무리 그래도 네 친구는 건드리지 않아.”특히 지금은 강하리가 그를 무시하기 바쁜데 미쳤다고 손연지를 건드리겠나.강하리는 입술을 다물며 그를 흘깃 보았다.“아니면 됐고. 늦었어, 난 쉬고 싶으니까 이만 돌아가.”하지만 구승훈이 말을 꺼냈다.“가정부 아주머니는 남게 해. 내가 곁에 없어도 최소한 돌봐줄 사람이 곁에 있으면 안심이 될 것 같아.”강하리가 멈칫했다.“연지가 잘 챙겨줘.”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가정부 아주머니를 똑바로 바라보았다.“아주머니, 감사하지만 이만 돌아가 보세요.”아주머니는 난감한 표정으로 구승훈과 강하리를 번갈아 바라봤다.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네가 곁에 안 두면 해고할 수밖에.”강하리는 어이가 없었다.“구승훈 씨, 전에 내가 한 말 못 알아들었어?”하지만 구승훈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문질렀다.“하리야, 넌 내 여자야. 네 뱃속에는 내 아이가 있고 나도 네 곁에 있으면서 우리 아이 태어나는 것도 보고 평생을 너와 함께하고 싶어. 그게 잘못됐어?”강하리는 웃었지만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그게 가능할 것 같아? 당신들 구씨 가문은 나를 허락하지 않고 이 아이도 더더욱 받아주지 않겠지. 그리고 당신은 내가 필요할 때 곁에 있어 주지도 않았는데 내가 그런 당신이랑 평생을 같이 살 것 같아?”구승훈이 그녀를 바라봤다. “앞으로는 안 그래, 하리야. 앞으로는 절대 안 그래.”강하리가 비웃었다.“그래서 뭐? 구승훈 씨, 그런다고 지나간 일이 없던 게 돼? 그냥 가, 일이 다 벌어진 뒤에 늘어놓는 변명 따위 필요 없어, 그 거짓된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
천아름은 눈을 깜빡이며 말없이 웃었고 그 반응만으로도 이미 모든 걸 인정한 셈이었다.하지만 곧 그녀는 덧붙였다.“먼저 말해두지만 나도 미리 알았던 건 아니야. 그 사진들은 우리가 올라온 직후에 구승훈이 보낸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천아름을 바라봤다.그 시선에 살짝 기가 죽으려던 찰나 강하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왜 미리 말 안 했어?”천아름은 입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말했으면... 네가 그 사진들을 제대로 썼을까?”강하리는 천천히 창밖을 바라봤다.이 각도에서 에비뉴와 정안 타워를 잇는 공중 회랑을 보는 건 그녀도 처음이었다.다섯 개의 회랑은 같은 위치에 놓인 게 아니라 높낮이와 간격이 제각각이었고 그 불규칙한 배치가 위에서 보면 iw라는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이미 회랑에 심어졌던 꽃들은 시들어 있었지만 강하리는 그곳에 자란 꽃들이 전부 리시안셔스였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강하리는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이젠 더 이상 구승훈과 어떤 연결고리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로의 감정이 남아 있는 듯 없는 듯 얽히고설킨 관계... 그녀는 그런 관계를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말을 마친 그녀는 조용히 휠체어를 돌려 자료를 보러 이동했다.천아름은 커피잔을 들고 그녀 옆으로 와 책상에 걸터앉았고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솔직히 너희 둘 일에 내가 뭐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번 일은 구승훈 잘못이 맞고... 난 내 친구가 또 상처받는 꼴 못 보니까 절대 너한테 구승훈의 편을 들 생각 없어. 근데 말이야...”그녀는 말을 잠시 멈췄다.“이번처럼 구승훈이 뭔가 너한테 건넸다면... 넌 받을 건 받아. 그건 걔가 너한테 진짜로 빚진 거니까.”강하리는 작게 웃었다.“그 사람 도움 없이도 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왜 굳이 기대야 해?”이야기를 끝낸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근데 이것 말고도 있지? 송지은이 회의에서 그렇게 된 것도... 구승훈이 일부러 남겨둔 거지? 내가 송지은을 이용해서 회사에서 위신을 올
에비뉴 그룹이 결국 강하리 손에 들어가자 송지은의 속엔 쌓여 있던 불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그는 몇몇 임원들과 은밀히 손을 잡고 이번 회의 자리에서 강하리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다.강하리는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봤다.“송 부장님, 진심으로 의견을 내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직권 남용하고 싶은 건가요?”그러자 송지은의 얼굴이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강 대표님, 지금 무슨 뜻이죠?”강하리는 옆에 앉아 있던 비서실장에게 눈빛을 보냈다.비서실장은 곧바로 자료를 띄웠고 화면에 나타난 건 한 프라이빗 레스토랑에서 찍힌 사진이었다.송지은이 막 추천했다던 신인 여배우와 다정하게 식사하고 있는 장면이었다.그 여배우는 거의 그의 무릎 위에 앉을 듯 그에게 바짝 기대 있었다.송지은은 이마에 핏대가 서며 말했다.“업무 미팅하면서 밥 한 끼 먹는 게 무슨 문제죠?”강하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다음 사진이 화면에 떠오르자 회의실 분위기가 미묘하게 흔들렸다.사진 속 송지은은 그 신인 여배우의 허리를 감싸안고 호텔로 들어가고 있었다.“식사 후엔 호텔 코스로 이어지셨군요. 송 부장님?”강하리의 그 한마디에 누군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천아름은 다리를 꼬고 앉아 회의실 전면을 향해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그 웃음소리가 송지은에게 더없이 굴욕적이었다.강하리는 더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회의실 안의 다른 인물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여유로웠지만 시선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또 누구였죠? 추천한 연예인들 리스트... 누구 누구있었죠”말이 떨어지자 회의실 안 사람들 사이로 묘한 침묵이 흘렀고 서로 눈치를 보던 그들은 이내 입을 닫았다.오늘 강하리는 확실히 준비하고 왔다.이번 판에서 잘 되면 본때 보여주는 걸로 끝이지만 잘못 건드리면 누군가는 직장을 잃게 될 게 뻔했다.방금 송지은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모두가 생생히 봤으니 더 이상 나설 사람은 없었다.회의실은 고요했다.강하리는 시선을 천천히 회의실을 훑다
강하리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후에야 구승훈은 다시 엘리베이터에 들어섰다.하지만 엘리베이터에 들어선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익살스러운 미소가 남아 있지 않았다.“여진 쪽은 어떻게 됐어?”그가 낮은 목소리로 묻자 준봉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출시일이 확정됐습니다. 에비뉴보다 하루 빠릅니다.”구승훈은 손에 불경스러운 듯 염주를 굴리며 냉소를 지었다.“승재와 천아름 쪽에 협조 잘하라고 전해.”“네.”준봉이 재빨리 대답했고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대표님, 사실 이 일은 사모님께도 일부 알려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구승훈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다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조용히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준봉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구승훈은 항상 그랬다. 강하리를 도와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겉으로는 무심한 척했다.‘정말 답답해.’여진 주얼리는 지난 몇 년간 에비뉴와 계속해서 대립해 왔다.겉보기에는 구씨 가문이나 강하리와 아무 관련 없는 작은 회사처럼 보이지만 이런 작은 회사들이 대형 브랜드의 모조품을 내놓는 건 흔한 일이었다.하지만 여진 주얼리는 단순한 모조품에 만족하지 않았다.작년에 해외에서 에비뉴 주얼리의 표절 사건이 터졌을 때 그 배후에는 여진 주얼리가 있었다.그 사건으로 여진 주얼리는 큰 이득을 봤고 에비뉴는 큰 타격을 입었다.그 후 여진 주얼리는 더욱 탐욕스러워졌다.사람이란 달콤한 맛을 보면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마련이다.여진 주얼리는 에비뉴에게 항상 위험 요소였다.구승훈은 에비뉴를 강하리에게 넘긴 이상 그녀에게 어떤 위험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대표님, 상대방의 배후 세력도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대놓고 에비뉴를 도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구승훈은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그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서 뭐? 지금 내가 잃을 게 뭐가 있다고?”준봉은 놀라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고 한참 후에야 조심스럽게 말했다.“대표님,
강하리가 때린 따귀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날아들었고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이 강렬했다.그러자 구승훈의 뺨에는 순식간에 선명한 손자국이 남았다.천아름은 그대로 얼어붙었지만 이내 강하리를 향해 천천히 엄지를 들어 올려 보였다. ‘잘했어. 이런 쓰레기 같은 놈은 맞아야 해. 제대로 한 대쯤은 맞아 봐야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알지. 이제라도 자기 잘못을 좀 깨달아야 해.’천아름은 속으로 휘파람을 불며 통쾌해했다.한편 구승훈은 손등으로 뺨을 한 번 스치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천히 강하리 앞에 무릎을 꿇었다.그의 눈엔 고통이 어리어 있었다.“몸이 안 좋은 거야? 아니면...” 그는 목울대를 두 번 삼킨 뒤에야 겨우 말을 이었다. “아니면... 나를 봐서... 토한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눈이 빨갛게 충혈돼 있었지만 더는 이 남자 앞에서 눈물 흘리고 싶지 않아 애써 참고 있었다.“다신 제 앞에 나타나지 마요.” 강하리의 차디찬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런데 구승훈의 눈에는 오히려 그 말이 묘하게 따뜻하게 비쳤다.지금 이 순간 그는 마음속에... 이상하게도 만족감이 들었다.‘적어도 하리 마음속에 아직 내가 있긴 한 거잖아. 미움이든 혐오든... 감정이 있는 한 아직 끝은 아니겠지.’그는 수트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조심스레 강하리의 입가를 닦아주었고 긴 손가락이 그녀의 입가를 스치고는 가볍게 떠났다.구승훈은 고개를 숙인 채 쓸쓸하게 웃었다.“불쾌하게 해서 미안해. 하지만... 하리야, 미안하지만 다신 안 나타날 수는 없을 거 같아. 난 그건 못 해.”그 말과 함께 그는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내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천천히 화장실을 나갔다.순간, 화장실 안은 적막 속에 잠겼다.강하리는 다시금 구역질했고 천아름은 재빨리 그녀의 등을 다독였다.밖에서 구승훈은 그녀의 헛구역질 소리를 들으며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왔다.얼마 후, 급히 달려온 준봉의 목소리에 그가 정신을 차렸다.“대표님, 무슨 일 있었습니까?”
두 채의 30층이 넘는 오피스 빌딩 사이에는 다섯 층마다 하나씩 연결하는 공중 회랑이 있었다.회랑 위에는 각종 카페와 음식점이 입점해 있었고 그 주변에는 다양한 꽃들이 화사하게 장식되어 있었다.강하리는 사실 정안 타워에 자주 오지는 않았다.심지어 구승훈과 결혼을 앞두고 있던 그 시절에도 여기에는 발걸음을 거의 하지 않았다.솔직히 말해서 그녀보다 임희주가 더 자주 왔을지도 몰랐다.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그녀는 입꼬리를 삐죽이며 말했다.“구승훈이야 뭐 인간쓰레기지만 그래도 통 큰 건 인정해야겠네. 이렇게 큰 회사를 그냥 덜컥 넘겨주다니. 에비뉴 주얼리잖아? 보석 업계에선 꽤 이름 있는 브랜드인데. 이렇게 보면... 그 인간은 그렇게 나쁘진 않았던 것 같기도 하네. 그렇지?”강하리는 눈을 내리깔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불과 한 달 남짓한 그 짧은 시간 사이에 구승훈이라는 존재가 자신에게서 너무도 멀어진 것만 같았다.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입을 열었다.“오늘은 꼭 광고 모델 확정해야 해. 원래 계약하려던 사람이 며칠 전에 갑자기 마음을 바꿨어. 이유 알아봤어?”그러자 천아름은 짜증 섞인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이유야 뻔하지. 뺏긴 거지 뭐. 거의 계약 직전까지 갔는데... 갑자기 말을 바꾸더라.”“누가 뺏어갔는데?”강하리가 조용히 물었다.천아름이 막 입을 열려는 찰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며칠 만에 마주친 구승훈이었다. 깔끔한 수트를 입고 있었지만 여전히 전해지는 그 특유의 냉기가 몸 전체에 감돌고 있었다.강하리는 구승훈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피했다.구승훈 역시 이 순간에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던지 평소 차가운 눈빛은 놀랍게도 순식간에 사라졌다.그의 시선은 곧장 강하리에게 꽂혀 그 자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휠체어에 앉아 있는 그녀는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지만 얼굴빛은 생각보다 좋았다.홍조가 돌아 있었고 얼굴도 약간 도톰해진 듯했다.그는 기뻐해
항구에서 보경시로 돌아오자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구승훈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누군가의 사무실로 들어섰다.“어떻게 됐어?”그 말에 노진우는 고개도 들지 않고 리모컨부터 눌렀다. 그러자 벽에 걸려있던 TV가 켜지더니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화면 속에는 온몸에 상처투성이인 여초천이 이성을 잃은 채 날뛰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안의 가구를 부수며 바닥에서 뒹굴기 시작하더니 그럼에도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는지 그는 벽에 머리를 쾅쾅 들이박았다.여초연의 이마는 이미 피범벅이 된 상태였다.그 모습을 본 구승훈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됐어. 그만해.”노진우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이렇게 끝내시겠다고요? 대표님께서 발작 났을 땐 이것보다 훨씬 심했어요. 제가 만든 약은 효과가 얼마 못 가거든요. 급하게 만든 거니까요. 하지만 대표님은 온 하루 동안 고통스러워하셨잖아요.”“게다가 대표님은 이 약 때문에 하리 씨 곁을 떠나야 했잖아요. 하리 씨가 그렇게 크게 다친 것도 다 이 약 때문인데 이제 와서 마음이 약해졌다고요?”구승훈은 고개를 푹 숙이더니 담배를 꺼내 거기에 불을 붙였다.“마음이 약해진 게 아니야. 저런 꼴을 보고 있으니까 그냥... 그때 내 모습이 떠올라서...”“생각할 때마다 너무 후회돼. 하리를 혼자 예식장에 두고 떠났던 거 말이야. 내가 어떻게 잡았는데 또다시 놓쳐버리다니...”“그런데 또 여초연이 저러고 있는 걸 보니까 한편으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때 내가 하리를 밀어내지 않았더라면 하리가 내 저런 모습을 봐야 했을 수도 있잖아.”노진우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사실 제 책임도 좀 있어요. 제 대학 동기인 데다가 능력도 괜찮아 보여서 추천했었는데 배경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으니까요.”구승훈은 씁쓸하게 웃었다.“임희주가 아니었어도 이렇게 되었을 거야. 여초연이 날 가만 내버려뒀을 리 없으니까.”노진우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하리 씨 쪽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