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리는 자기가 이른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어젯밤에 자신의 입으로 구승훈에게 송유라가 잘 협조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김주한을 찾아간 거라고 말했기 때문이다.그런데 구승훈이 진짜로 송유라에게 경고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송유라는 그의 첫사랑이고, 구승훈은 한 번도 그녀에게 심한 말을 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아마도 일을 빨리 진행해야 해서 그렇게 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강하리의 마음은 살짝 흔들렸다.심장이 벌렁벌렁해서 침착할 수가 없었다.그런데 생각해 보니 스스로 너무 불쌍해 보였다. 구승훈이 조금만 잘해줘도 그녀는 남몰래 한참 동안 기뻐했기 때문이다.강하리는 장 매니저와 더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쓸데없는 생각을 멈추고 촬영 준비를 했다.사진작가와 얘기를 마친 뒤 또 현장 스태프와도 의논했다.모든 준비를 마치자 송유라도 메이크업을 끝냈다.송유라는 강하리의 앞으로 와서 웃으며 말했다.“승훈 오빠가 나를 위해 환영회를 열어준다고 했으니 너도 와서 같이 놀아.”강하리는 단칼에 거절했다.“싫어. 내가 가면 다들 불편할 텐데.”말을 마친 뒤 그녀는 돌아서서 옆으로 걸어갔다.“하지만 송유라는 기뻐서 활짝 웃었다.“겁나? 아니면 승훈 오빠가 나한테 너무 잘해줄까 봐 질투 나?”강하리는 가슴이 저릿저릿했다.확실히 구승훈과 송유라가 같이 있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강하리는 아주 오랫동안 노력해야 어쩌다 한번 구승훈이 그녀에게 잘해주는데, 송유라는 언제든지 그의 마음속에서 중요한 자리를 잡고 있는 듯했다.구승훈은 마음을 아끼지도 않고 숨기지 않으며 송유라에게 잘해주었다.그것에 비하면 강하리는 자신이 너무 불쌍해 보였다.강하리는 송유라를 바라보며 말했다.“유라 씨, 곧 촬영 들어가요.”송유라는 그녀를 조롱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떴다.촬영은 잘 진행되지 않았다.기획안 자체는 육가현을 겨냥한 것이었지만 송유라는 육가현과 스타일이 매우 달랐다.사진작가가 불만족스러워하자 강하리는 그 자리에서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강하리는 이런 점에서 송유라에게 감탄했다. 그녀를 괴롭히기 위해서라면 별의별 짓도 할 수 있었다.만약 오늘 가지 않는다면 송유라와 대립한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될지도 모른다.그녀는 마음속의 번뇌를 억누르고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갈게요.”송유라는 순간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강 부장님, 너무 좋아요.”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안예서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으며 송유라가 떠나자, 강하리의 귀가에 대고 한마디 속삭였다.“우리 대표님 눈이 멀었나 봐요. 어떻게 이딴 걸 좋아할 수 있어요!”강하리는 웃었다. 그렇다. 그녀 또한 이해할 수 없었다.구승훈의 주변에는 온갖 종류의 여자들이 차고 넘쳐났는데 그중에는 청순한 여자, 섹시한 여자, 화사한 여자, 대범한 여자, 어떤 여자든 있었지만 왜 하필 송유라에게 반했을까?그녀가 송유라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얼굴만 빼면 봐줄 만한 데가 정말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도 구승훈은 송유라가 좋다는데 무슨 방법이 있을까?“사람마다 취향이 다른 걸 어쩌겠어.”안예서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그들은 함께 차를 타고 히비스커스로 향했다. 송유라가 입구에서부터 구승훈의 이름을 대자 모든 사람의 부러움을 샀다.강하리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척 묵묵히 뒤따랐다....구승훈은 마침내 와서 송유라의 체면을 크게 살려줬다.강하리는 구석진 곳에 앉아 조용히 식사하며 상석에 앉은 송유라가 다른 사람들과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니 물 만난 고기처럼 즐거워하고 있었다.구승훈은 옆에서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지켜보며 가끔 그녀 때문에 웃음을 터트리곤 했다.이때 강하리는 문득 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다. 생활이 어려워 정서원을 따라 여기저기 전전하며 살았지만, 정서원은 그녀를 끔찍이 아꼈다. 정서원은 예전의 기억을 잃었지만, 본능적으로 노래와 춤에 소질을 보였고 강하리는 어릴 때부터 그런 정서원을 따라 춤을 배웠다. 비록 시골이지만 어린 공주님처럼 살았다.나중에 강하리는 구승훈을 만
송유라는 손에 술 두 잔을 들고 강하리에게 다가왔다.강하리는 그녀가 술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무엇을 할지 예상이 가서 순간 머리가 아파 났다.과연 곧바로 송유라는 술 한 잔을 강하리에게 들이밀며 말했다.“강 부장님, 죄송해요. 저 때문에 일이 계속 밀렸죠. 그리고 또 저 때문에 불필요한 오해도 받고요. 지금 사과할게요.”강하리는 눈앞에 있는 술을 보고 고개를 들어 송유라와 눈을 마주쳤다.“사과는 안 해도 돼요. 같이 일하는데 당연히 안 맞는 부분도 있을 수 있죠. 그건 대화를 통해 잘 풀면 되고요. 술도 사양할게요. 제가 요즘에 몸이 좀 안 좋아서.”강하리는 송유라가 건네는 술을 받지 않고 말을 마친 후 바로 밖으로 걸어 나갔다.그런데 그때 송유라가 그녀의 앞으로 가로막았다.“강 부장님, 설마 절 용서 안 하겠다는 말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왜 술을 안 마시는 거예요?”강하리는 웃어 보이며 말했다.“송유라 씨,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우리는 같이 일하다가 안 맞는 부분을 발견한 거니까 용서하고 안 하고 할 게 없어요. 그리고 저 정말 몸이 안 좋다니까요.”하지만 송유라는 계속 고집을 부렸다.“얼마 안 되는데도요? 제가 듣기론 강 부장님 예전에 술 잘 마셨다고 하던데요.”강하리는 예전에 확실히 주량이 강했다.회사에 금방 들어와서 구승훈의 비서로 일했는데, 그때는 회사가 설립된 지 얼마 안 되어 구승훈과 함께 밖에서 계약을 많이 따내야 했다. 그래서 주저하지도 않고 술을 거침없이 마셨었다.하지만 지금은 예전과 다르다.어제 삼킨 소량의 술 때문에 이미 마음속에 죄책감이 가득했던 터라 오늘은 절대 마시면 안 된다.“송유라 씨, 정말 미안한데 이제 제가 몸이 좋아지면 단둘이 술자리를 가져도 될까요?”송유라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그 말은 확실히 날 용서하지 않겠다는 뜻이군요.”강하리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미안해요. 그냥 정말 술을 마시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지금 몸 상태가 허락 안 해요.”“어디가 아픈데요? 보기엔 멀쩡한데요?
송유라는 여전히 불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다른 뜻은 없어요. 강 부장님, 화내지 마세요.”“송유라 씨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네요.”강하리는 그렇게 말하고는 곧장 몸을 돌려 룸을 나갔다.룸 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는 구승훈이 휴지 한 장을 송유라에게 건네는 것을 보았다.송유라가 안 받자 그는 할 수 없이 휴지를 들고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나이가 몇인데 자꾸 울어?”“나도 이러고 싶지 않아요.”“못생겼네.”못생겼다고 하면서도 그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시지 않았다.강하리는 룸의 문고리를 꽉 잡아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렸다.바로 어제, 구승훈은 그녀에게 매우 모질게 말했다. 울어봐야 소용없다고. 우는 것으로 그의 마음이 약해지기를 기대하지 말라고.강하리는 늘 이 남자의 마음이 돌로 만든 것이라고 생각했다.요 몇 년 동안 그녀 앞에서 그는 확실히 돌같이 냉정하고 무정했다고 할 수 있다.구승훈은 그녀의 눈물 때문에 마음이 약해지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녀의 간청에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송유라 앞에 있는 구승훈은 다른 사람들 앞에 있는 구승훈과 꼭 서로 다른 두 사람 같았다.그리고 그는 다른 사람의 것이다.진작 알았어도 마음이 좀 아팠다.가슴에 찔린 듯이 그녀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손가락을 약간 떨면서 문고리를 놓았다.문을 닫는 순간 그녀는 주체할 수 없이 구역질이 나기 시작했다.화장실로 뛰어들어가서 아까 마신 술과 오늘 저녁 먹은 것까지 다 토해냈다.모든 걸 다 토하고 나서 그녀는 거울을 보며 낭패해 보이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정리했다.그리고는 억지로 몸을 가누며 레스토랑을 나섰다.택시를 잡지 않았다. 근처에 크기가 어중간한 야시장이 있었는데, 그녀는 그렇게 인파를 따라 야시장에 들어섰다.야시장의 길거리에서 양말 두 켤레를 사고 앞의 포장마차에 가서 물만두 한 그릇을 먹었다.배불리 먹고 나서 위가 그다지 불편하지 않자 그녀는 비로소 마음도 좀 편해진 것을 느꼈다.마침내 그녀는 버스킹하는 가수 앞에 앉아 한
강하리는 가방을 옷걸이에 걸어놓고 신발을 갈아신었다.“전통시장에 다녀왔어요.”“누구랑?”강하리는 멈칫하긴 했지만, 굳이 숨기지 않으려고 했다.구승훈은 이미 무언가 알고 있는 듯싶었다.“혼자요. 오는 길에 우연히 정원 씨를 만나 정원 씨가 집까지 데려다줬어요.”구승훈은 소파에 앉아 그녀를 쳐다보았다.“우연히?”“네. 우연히요.”“이런 우연이.”구승훈은 피식 웃더니 옆자리를 두드렸다.“자, 와서 앉아서 말해. 어떻게 우연히 만나게 되었는지.”강하리는 느껴지는 그의 분노에 등골이 오싹해 나더니 우물쭈물하면서 말했다.“길가에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 정원 씨가 지나가면서 저를 발견하고 집까지 데려다줬어요. 대표님, 저는 누구한테 전화하면 바로 달려올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인 사람이 아니에요.”구승훈은 어두운 표정으로 피식 웃더니 말했다.“강 부장, 내가 전에 했던 말을 기억해 두고 있는 것이 좋을 거야. 다른 남자들이랑 그만 어울려. 몸을 더럽혔다간 가치 없는 사람이 되는 거야.”이 말이 가슴에 비수가 꽂힌 듯 아팠지만, 그의 앞에서 굳이 내색하지 않으려고 웃으면서 말했다.“기억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표님.”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물었다.“전통시장에서 뭐 샀어?”강하리는 매번 전통시장에서 산 자잘한 물건들을 그에게 보여주곤 했지만,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구승훈처럼 자신의 감정에 솔직할 수가 없었다.“아무것도 안 사고 그냥 돌아다녔어요.”구승훈은 딱딱한 그녀의 말투에 만족스럽지 않은지 그저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하리는 멈칫하더니 결국 두 쌍의 양말을 꺼냈다.“양말을 좀 샀어요.”구승훈의 것 한 쌍, 강하리의 것 한 쌍, 총 두 쌍이었다.구승훈은 이 두 쌍의 양말을 보더니 표정이 풀리기 시작했다.“씻어.”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욕실로 향했다.그녀가 욕실에 들어가기 전, 구승훈이 물었다.“밥은 먹었어? 전에 먹었던 거 다 토했다며.”강하리는 그대로 제자리에 굳어버리고 말았
구승훈은 그녀의 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강하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키스로 인해 온몸이 나른해졌다.그녀는 본능적으로 입을 열어 그의 혀를 맞이했다.어둠 속에서 그렇게 이 둘은 여느 커플과도 같이 가까이 붙어있었다.구승훈은 어젯밤보다도 더 거칠었다.벌칙인지 불만을 털어놓는 것인지 몰랐지만, 유독 사랑의 감정만은 느껴지지 않았다.늘 강압적으로 다른 사람을 리드하기 좋아하던 그는 이 방면에서도 그랬지만, 오늘 저녁은 그녀의 허리를 잡더니 자신의 몸에 올라타게 했다.그녀의 허리를 쓰다듬더니 몸을 일으켜 그녀의 귓불을 깨물었다.강하리도 무의식적으로 그를 꽉 끌어안았다.이때, 강하리의 핸드폰이 울렸다.강하리가 아직 정신을 차리지 않은 틈을 타 구승훈이 대신 전화를 받아 스피커를 켰다.전화기 너머에서는 임정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하리 씨, 내일 시간 있으세요? 자료 좀 부탁하고 싶은데.”나른해져 있던 강하리는 마치 몸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바로 정신을 차리더니 표정이 창백해졌다.구승훈은 억지로 핸드폰을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자기야, 전화 받아.”강하리는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끊고 싶었지만 구승훈이 그러지 못하게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구승훈은 그녀의 목에 키스를 퍼붓더니 말했다.“받아. 임 변호사님 난처해지는 꼴을 보고 싶어?”강하리는 난처함을 무릅쓰고 결국 전화를 받았다.“죄송해요... 변호사님... 저... 내일 시간 없어요.”강하리는 최대한 호흡을 가다듬고 대답하더니 바로 전화를 끊었다.구승훈은 막무가내로 또 그녀에게 키스했다.갑작스러운 키스에 강하리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비겁한 자식.’구승훈은 그녀의 처지가 얼마나 난처한지는 생각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그대로 그녀를 안고 욕실로 들어가 욕조에 앉혔다.그렇게 달아올랐던 욕정이 식어버리고, 강하리는 구승훈을 바라보면서 설명을 시도했다.“대표님, 임 변호사님이 이번에 국제 사건을 맡았는데 제가 번역해 드리기를 원하세요.”
강하리는 생각을 거두고 몸에 묻은 물기를 닦은 후 방으로 들어갔다.이때 구승훈의 핸드폰이 울렸다.띵동띵동.누군가가 계속 메시지를 보내왔다.구승훈은 인내심 없는 표정으로 힐끔 보더니 그 상대방에게 전화했다.“네가 데려다줘.”전화기 너머에서 안현우가 이상한 말투로 말했다.“승훈아, 유라 씨 취하셔서 계속 너의 이름만 불러. 네가 자기를 안 좋아한다나 뭐라나. 혹시 싸웠어?”구승훈은 담배 한 모금 빨더니 말했다.“아니.”송유라는 워낙 제멋대로 하는 성격이라 구승훈이 달래주기를 원하면서 가끔 오늘처럼 이렇게 행패를 부릴 때가 있었다.송유라는 오늘 구승훈이 집에 돌아가겠다고 했을 때 말렸지만 그는 결국 제멋대로 집으로 돌아갔던 것이다.“빨리 와서 데려가.”구승훈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했다.“네가 데려다주기 싫으면 유라 집에 전화해서 기사님더러 데려가라고 해.”안현우가 말했다.“승훈아, 넌 뭐 때문에 바쁜데? 유라 씨도 나 몰라라 하기로 한 거야?”안현우는 멈칫하더니 질문했다.“지금 강 부장이랑 같이 있는 건 아니지? 승훈아, 어떻게 강 부장 때문에 유라 씨를 내버려둘 수 있어?”구승훈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누구랑 함께 있든 나의 일이야. 네가 유라를 집까지 데려다줘.”구승훈은 말을 끝내자마자 전화를 끊더니 고개 돌려 강하리를 쳐다보았다.“내일 임 변호사님한테 말해. 만약 정말 번역관이 필요하다면 밖에서 찾아보라고. 그 돈마저 아까우면 변호사 사무실 때려치우라고.”강하리는 침묵을 지키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이 아르바이트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돈 때문인 것도 있고 입 밖에 내지 않았던 사심 때문인 것도 있었다.언젠가 자신의 꿈을 되찾고 싶었고 진정한 자신으로 거듭나기를 원했다.구승훈이 바라는 강 부장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승훈의 노리개가 아닌 진정한 자신 말이다.“저는 하고 싶어요. 저희 계약서에 제가 아르바이트하면 안 된다는 사항은 없었잖아요.”구승훈이 피식 웃었다.“강 부장, 지금
결국, 고개를 숙이고 강하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마음대로 하라지 뭐.’강하리가 계약 기간 동안 자신을 더럽히지만 않으면 상관없다고 생각했다.담배 하나를 쥐고 있던 구승훈은 담배에 불을 붙이지도 않고 무표정으로 안현우와 송유라를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룸 안에서 이들은 그저 서로를 쳐다만 볼 뿐이었다.안현우가 속으로 생각했다.‘싸웠네, 싸웠어.’송유라는 이번에 정말 상심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안현우는 그런 그녀를 잡아당기더니 구승훈의 옆에 앉혔다.송유라는 많이 슬픈 모양이었다.“내가 하리 언니한테 술 먹여서 화났어요?”구승훈은 고개를 들어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더니 말했다.“내가 화낼 줄 알았으면서. 이제부터는 그런 짓 하지 마.”송유라는 입을 삐쭉 내밀었다.“다른 뜻은 없었어요. 그냥 저 때문에 일에 지장이 갔을까 봐 사과하고 싶을 뿐이에요.”“그래.”구승훈은 강하리 때문에 송유리와 화를 낼 수가 없어 그저 알겠다고 대답하더니 이렇게 말했다.“시간도 늦었는데 집까지 데려다주라고 할게. 여자애가 저녁 늦게까지 밖에 있으면 안 돼.”여느 때처럼 부드러운 말투에 송유라는 그제야 미소를 되찾았다.“알았어요.”송유라가 떠나고, 안현우는 구승훈의 옆에 앉더니 말했다.“승훈아, 무슨 생각이야? 유라 씨도 돌아왔는데 왜 화해하지 않았어?”구승훈은 고개 숙여 담배에 불을 붙였다.“너나 잘하세요.”안현우는 머쓱하게 웃더니 말했다.“걱정되어서 그러는 거잖아.”그러더니 잠깐 멈칫하면서 말했다.“설마 강 부장 포기하지 못해서 그래?”구승훈은 담배만 피울 뿐 대답하지 않았다.하지만 안현우는 그가 무언의 긍정을 했다고 생각했다.“승훈아, 정신 차려. 강 부장 같은 여자랑은 잠깐 놀 수는 있지만,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돼. 그런 여자를 만나면 평생 불행할 거야. 그 여자는 돈밖에 모르거든.”구승훈은 담배를 한 모금 빨더니 피식 웃었다.“잘 알고 있나 본데?”안현우는 혀를 차더니 말했다.
하지만 몸은 탈진한 듯 힘이 빠졌다.그저 질렸을 뿐이라니.강하리는 웃으며 눈가의 씁쓸함을 애써 삼켰다.“강 대표님, 제가 모셔다드릴까요?”임명우가 그녀의 등 뒤에서 조심스레 물었다.“괜찮아요.”강하리는 짧게 대답하고 자신의 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그녀는 대리운전을 불러 차를 맡긴 뒤,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 집으로 향했다.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쳤고 길을 지나치는 사람들은 모두 바삐 걸음을 재촉했다.그러나 강하리는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하이힐을 손에 들고 맨발로 차가운 아스팔트를 밟으며 걸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그녀의 그림자는 길게 늘어졌다가 짧아졌다.강하리는 슬퍼하지 말아야 한다고 자신을 다독였지만 애초에 도박을 건 것은 자신이 아닌가?이제 패배를 인정할 때였다.하지만 가슴 한편이 텅 빈 듯 아팠고 숨을 쉴 때마다 폐 깊숙이 스며드는 통증이 뼛속까지 얼어붙었다.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자 눈가에 맺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잠시 후, 차가운 공기 속에서 눈물은 투명한 이슬로 변했다.한편, 구승훈은 핸들을 부술 듯이 꽉 쥐고 천천히 움직였다.검은색 마이바흐는 그렇게 너무 가까이도 너무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 강하리의 뒤를 따라갔다.한참 뒤, 그는 결국 휴대폰을 들어 ‘강하리’라는 이름 위에서 머뭇거리다 이내 다른 번호를 눌렀다.“구승훈 씨, 전화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손연지는 전화를 받자마자 화가 난 듯 소리쳤고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구승훈은 눈앞에서 홀로 걷고 있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제가 잘못했어요.”“미안했다고 하면 다예요?”손연지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정말 결혼하기 싫었으면 왜 미리 말하지 않았어요? 하리를 결혼식장에 혼자 남겨두고, 사람들이 어떻게 수군거리는지 알기나 해요?”구승훈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꾸짖음을 묵묵히 받아들였다.한참을 쏟아내던 손연지가 한숨을 내쉬고 조용해진 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리 데리러 와줘요.”손연지는 곧장 강하리에게 달려갔
강하리가 떠난 후, 복도는 다시 고요해졌다.구승훈은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창가에 서 있었고 손에 든 은은한 불꽃이 계속 깜박거리고 있었다.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그가 불쑥 입을 열었다.“다 봤어요?”임명우가 빙긋 웃으며 방에서 걸어 나왔다.“참 우연이네요, 구 대표님.”구승훈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가볍게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었다.“임 대표님의 취미가 남의 사생활 엿듣기였나?”임명우는 옆으로 다가와 낮게 웃으며 아래층 불빛을 바라보았다.“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하죠. 저는 단지 강 대표님과 구 대표님 사이의 일에 관심이 많을 뿐인데요.”그는 한 박자 쉬고 덧붙였다.“아, 맞다. 구 대표님도 아시겠지만 저는 오래전부터 강 대표님께 관심이 있었어요. 하지만 항상 구 대표님만 바라보았고 저는 다가갈 틈조차 없었죠. 한때는 포기했어요. 강 대표님이 저를 싫어할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기회를 주시다니, 이거 고맙다고 해야 하나요?”그의 말투에는 노골적인 도발이 스며 있었다.하지만 구승훈은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그저 묵묵히 담배를 피우며 어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임명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속삭이듯 말했다.“설마 구 대표님, 정말로 강 대표님을 포기하시려는 건 아니죠? 저는 혹시나 연기하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그렇다면 이제 저는 당당하게 강 대표님에게 다가가도 되겠네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구승훈이 번개처럼 손을 뻗었다.날렵한 팔이 순식간에 움직였고 힘줄이 선명하게 돋아난 손가락이 임명우의 얼굴을 거칠게 움켜쥐었다.쾅!순간, 둔탁한 충격음과 함께 임명우의 머리가 강화 유리에 부딪혔다.유리는 거미줄처럼 촘촘한 금이 번지며 위태롭게 흔들렸고 구승훈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붉어진 얼굴의 임명우를 바라보았다.표정은 여전히 평온했지만 깊은 눈동자에는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무슨 수작을 부리든 상관없어. 하지만 강하리에게 손끝 하나라도 대면, 넌 살아 있는 지옥을 맛보게 될 거야.”임명우는
강하리는 비웃으며 시선을 돌렸다.“임 대표님, 사회적 거리 두기, 모르세요?”임명우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아무 반응도 없네요?”“장난에 굳이 반응할 필요가 있나요?”강하리는 무심하게 답했고 임명우는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그런데 구승훈은 어떻게 생각할까요?”강하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구승훈이 무슨 생각을 하든 이제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지금 그녀에게 중요한 건 진실을 밝히는 것이지, 이미 끝난 관계에 미련을 두는 게 아니었다.그가 그녀를 결혼식장에 혼자 남겨두고 떠난 그 순간부터, 모든 건 끝났으니까.“혹시 나중에 찾아와서 주먹이라도 날릴까요?”임명우가 농담처럼 던진 말에 강하리는 조용히 시선을 그에게 고정한 채 말했다.“임 대표님, 계속 장난칠 생각이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임명우는 다소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더 이상 가벼운 농담을 던지지는 않았다. 그는 곧장 태도를 바꿔 다음 회의 내용을 진지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강하리는 조용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지만 레스토랑 저편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계속 신경에 거슬렸고 손에 쥔 젓가락을 무의식적으로 움켜쥐었다.“죄송하지만, 술 좀 주세요.”강하리는 갑자기 임명우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임명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웃음을 지었다.“어이구, 강 대표님이 술 마시고 싶었나 봐요?”강하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 시선에서 무언가를 읽었는지, 임명우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거두고 가볍게 손을 흔들며 종업원을 불렀다.곧 레드 와인 한 병이 테이블에 놓였고 강하리는 잔을 들어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마셨다.그러나 와인 한 잔은 금세 다 비워졌고 술이 들어가자 강하리의 마음도 조금 가라앉는 듯했다.멀리서 들려오던 웃음소리도 더 이상 신경 쓰이지 않게 되었고 눈앞의 세상은 희미하게 번져갔다.구승훈은 자주 강하리를 냉정하다고 말했었다.하지만 이 세상에서 구승훈보다 더 냉정한 사람이 있을까?구승훈은 지금도 저쪽에
임명우가 강하리와 약속한 장소는 펠리스 빌딩 꼭대기 층에 있는 레스토랑이었다.강하리는 임명우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려던 순간, 닫히려던 문이 다시 열렸다.“잠깐만요! 구승훈 씨, 빨리요!”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강하리는 순간적으로 몸이 굳어버렸다.바로 그때, 임희주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왔다.강하리를 예상하지 못했던 듯,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강 대표님, 우연이네요.”강하리는 차가운 눈빛을 던지며 가볍게 웃었다.“결혼 증명서 받기 전까지는 저, 아직 구 대표님 아내예요.”짧은 한마디에 임희주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이내 구승훈도 엘리베이터에 올라탔고 강하리의 굳은 표정과 달리 구승훈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자연스러웠다.구승훈은 강하리를 힐끗 보고는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엘리베이터 문은 좁은 공간은 순식간에 무겁고 숨 막히는 공기로 가득 찼다.임희주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가볍게 웃었다.“구 대표님, 아내분께 인사 안 하세요?”강하리가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구승훈이 입을 열었다.“필요 없어.”단 네 글자. 그 짧은 말이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이미 상처 난 마음을 다시 한번 깊숙이 베어냈다.강하리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결혼식도 제멋대로 취소하고 오지 않은 사람이 인사조차 하지 않는 건 대수로울 것도 없었다.엘리베이터 안은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1층에서 68층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2분 남짓이었지만 강하리에게는 두 시간처럼 길고도 고통스러웠다.마침내 도착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강하리는 주저 없이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다.임명우는 미소를 머금고 구승훈을 힐끗 바라보고는 이내 강하리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우리도 나가요.”임희주는 구승훈을 바라보며 말했다.구승훈의 표정은 아무 변화도 없었고 시선은 여전히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한참 후에야 짧게 입을 열었다.“가요.”임희주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구 대표님, 정말 병
구승훈은 여전히 아파트 건물 아래에 서 있었다.연성시의 겨울은 눈조차 내리지 않았지만 매서운 바람이 온몸을 얼어붙게 했다.그는 잔뜩 움츠린 채 목을 움직이며 대답했다.“알았어. 최대한 빨리 간다고 전해줘.”짧게 말을 마친 그는 전화를 끊었다.준봉은 끊긴 휴대폰 화면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창가에 앉아 있는 강하리에게 조용히 입을 열었다.“강하리 씨.”강하리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멍하니 있는 건지, 깊은 생각에 잠긴 건지 알 수 없었다.방 안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적막했다. 한참 뒤, 강하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준봉을 바라보았다.“부탁드려요. 주식 양도는 이미 공증을 마쳤고 그가 줬던 옷과 장신구도 모두 정리해서 보냈어요. 구씨 가문 할아버지가 주신 재산도 돌려드릴 거예요. 그리고 연정이 양육권은 제가 가질 겁니다.”마치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다는 듯, 강하리는 짧게 말을 끝맺고 방을 나섰다.준봉은 그녀를 불러 세우려 했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방을 나선 강하리는 문 앞에서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뒤돌아서 주택을 한동안 바라보았다.구승훈의 목소리가 방 안에서 들려오는 듯했다.또한, 연정이가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달려오는 모습이 아련하게 떠올랐다.강하리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애써 참았다.강하리가 결혼 증명서를 바꾸자고 했을 때, 적어도 잠시라도 망설일 줄 알았다.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처음부터 끝까지 차분하고 냉정했다. 이성적인 태도 뒤에 감춰진 무심함이 오히려 그녀를 조롱하는 듯했다.강하리는 시들어버린 정원을 바라보았다.강하리는 결국 포기할 수 없었다.이렇게 오랜 시간 노력하며 그녀가 원했던 건 단지 구성훈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다.그러나 그 단순한 바람조차 아무런 설명도, 아무런 미안함도 없이 이뤄지지 않는 꿈이 되어 버렸다.크게 숨을 들이쉰 그녀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차고 쪽에서 연정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심준호는 연정이를 안고 땅에 떨어진 참
강하리는 자신이 어떻게 호텔을 빠져나왔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모두의 만류를 뿌리치고 차를 몰고 나온 순간부터 도로를 질주하는 동안까지, 모든 것이 흐릿했다.그저 추웠다.차 안의 에어컨을 최대로 올렸지만 차가운 공기는 심장 속까지 스며드는 듯했다.창밖에는 녹지 않은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고 휴대폰 화면은 여전히 ‘통화 중’ 상태를 반복하고 있었다.그러다 문득, 강하리는 핸들을 틀어 차를 길가에 세웠다.그 순간, 애써 참았던 눈물이 한없이 흘러내렸다.현실을 부정하려고 애썼지만 이제는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구승훈은 포기했다.그에게 어떤 이유와 사정이 있었든, 결국 그는 그런 선택을 한 것이다.그동안 자신이 쏟아부었던 모든 노력이 한낱 웃음거리로 전락했음을 깨닫고 강하리는 눈물을 머금은 채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뒤따라오던 심준호와 손연지도 급히 차를 세우고 달려왔다. 그리고 그들이 본 것은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맨발로 차에서 내리는 강하리였다.운전하려고 하이힐을 벗어 던진 듯했지만 차가운 눈밭 위에서도 그녀는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그녀의 모습은 마치 시들어 버린 꽃잎처럼 초라하고 쓸쓸해 보였다.더 이상 가고 싶지 않았다.구승훈을 찾아가고 싶지도 않았다.이제 그녀도 포기했다.그토록 오랫동안 얽매였던 남자를, 이제는 놓아주기로 했다.너무 지쳤고 더는 버틸 힘이 남아 있지 않았으며 그가 어떤 이유에서 그녀를 떠난 건지 이제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어차피 아무리 노력해도 남는 건 결국 상처뿐이었다.심준호는 다급히 코트를 벗어 강하리의 어깨에 덮어주었다.“걱정하지 마. 삼촌이 너를 위해 꼭 복수해 줄게.”그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올린 강하리의 눈에서는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삼촌, 너무 힘들어.”심준호는 말없이 그녀를 품에 안았다.“괜찮아. 삼촌이 있잖아. 울고 싶으면 울어.”하지만 강하리는 더 이상 울지 않았고 그저 심준호의 품에 기대어 쓰러질 듯 몸을 맡겼다.“하리야!”의식을 잃기 전, 그녀가 들
구승훈은 천천히 정신을 가다듬고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구승재는 초조한 얼굴로 다급하게 외쳤다.“형, 왜 옷을 안 갈아입었어?”그러나 구승훈은 대답 대신 담배에 불을 붙이고 창밖의 정원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꽃이 다 시들었네. 그렇지?”구승재의 가슴에 순간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형, 오늘...”그러나 말을 끝맺기도 전에, 구승훈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그는 씁쓸한 미소를 띠며 나직이 말했다.“오늘 내가 어떻다는 건데?”그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담배를 깊게 들이마셨다. 희뿌연 연기 속에서 드러난 눈빛에는 깊은 허무함이 서려 있었다.구승재는 불안한 기색으로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형! 결혼 안 할 거야?”그 순간, 구승훈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더니 잠시 침묵이 흘렀다.“결혼해서 뭐 해?”그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언제 또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서 하리와 아이를 다치게 할지 모르는데.”구승재는 입술을 깨물었다.“하지만 형이 얼마나 힘들게 다시 강하리 씨를 만났는데, 형...”구승훈은 뻑뻑해진 눈가를 문질렀고 한참 후에야 마침내 짧게 입을 열었다.“내가 미안하지.”그 한마디에 구승재는 그동안 참고 있던 감정을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었다.“형, 그러지 마. 제발...”곁에서 지켜보던 노민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일단 검사부터 해 봐. 그 후에 이야기하자.”그는 캐리어를 내려놓고 가방에서 검사 장비를 꺼내며 말했다.“준봉 씨랑 노진우 씨는 어때? 이쪽으로 데려와서 검사받게 해.”구승훈은 시선을 거두며 대답했다.“병원으로 보냈어.”두 사람은 구승훈보다 더 심하게 다쳤다.그 순간, 구승훈은 문득 헛웃음을 지었다.오늘 아침, 방 안에 남겨진 피 묻은 흔적과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던 준봉을 발견했을 때, 구승훈의 마음이 얼마나 불안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어제 곁에 있었던 사람이 강하리와 연정이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활기로 가득했던 바 안에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하리야, 괜찮아?”손연지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강하리는 정신을 가다듬고 고개를 저었다.“괜찮아.”방금 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다.손연지는 그녀의 얼굴빛이 좋지 않자 조용히 일어나 따뜻한 물을 가져왔다.“몸이 안 좋아?”강하리는 물컵을 받았지만 입을 대지 않고 바닥에 깨진 술잔을 내려다보았다.한참 뒤, 강하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잠깐 전화 좀 해도 될까?”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말리지 않았고 강하리는 휴대폰을 들고 방을 나와 조용한 곳을 찾아 전화를 걸었다.신호가 몇 번 울린 뒤, 전화가 연결되었다.여전히 느긋한 구승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배경음악은 시끄러웠지만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벌써 파티 끝났어?”강하리는 아마도 과거의 경험 때문에 자신이 너무 예민한 건 아닐까 싶었다.모든 것이 순조롭다고 생각하기만 하면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지곤 했었다.강하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최대한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아직이야. 그냥... 너무 늦지 말라고.”“걱정 마. 늦지 않을게.”구승훈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럽고 다정했다.전화를 끊은 강하리는 다시 심씨 가문에 전화를 걸어 연정이의 안부를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더 이상 파티에 있을 기분은 아니었다.그녀의 분위기가 달라진 걸 눈치챈 친구들은 자연스레 자리를 정리했다.강하리가 심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는 밤 11시에 가까웠다.집 안은 여전히 분주했고 거실에는 장식들로 가득했다. 심지어 대문에도 큼직한 축하 문구가 붙어 있었다.하얀 눈밭 위에서 더욱 선명하게 빛나는 문구가 묘하게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즐거운 웃음소리 속에서 그녀의 마음도 차츰 차분해졌다.백아영이 그녀를 보자마자 다가와 말했다.“빨리 씻고 쉬어.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잖아.”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침실로 향했다.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휴대폰에 메시지가 와 있었다.[자기야,
구승훈은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았고 누구도 감히 그를 방해하지 않았다.그는 축 처진 채 소파에 기대어 손에 든 술잔을 느릿하게 굴렸다.그때, 문이 열리며 몇 명의 여성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구승재는 그녀들의 의도를 알고 있었지만 내켜 하지 않으면서도 별다른 제지는 하지 않았다.그때 누군가가 구승훈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구승훈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자 그의 서늘한 시선에 겁먹은 여자가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설마, 이제 와서 몸 깨끗이 지키겠다는 거야?”구승훈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넘기며 대꾸했다.“집에서 아내가 엄하게 관리하거든.”그 말이 끝나자마자 방 안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구석에 앉아 있던 안현우가 구승훈 앞에 서 있는 여자에게 슬쩍 눈짓을 보냈다.그녀는 눈치 빠르게 술잔을 들고 다시 구승훈에게 다가갔다.그러더니 휘청거리며 일부러 손에 들고 있던 술을 그의 옷 위로 쏟았다.순간 얼어붙은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구 대표님, 죄송해요. 정말 실수였어요.”구승훈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짧게 내뱉었다.“꺼져.”그 말 한마디에 여자는 눈물을 글썽이며 황급히 방을 뛰쳐나갔다.구승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안현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안현우는 피하지 않고 오히려 도발적인 시선으로 맞섰다.“화장실 가서 닦아.”그러나 구승훈은 그 말을 무시한 채 옆에 놓인 외투를 집어 들고 일어섰다.“다들 즐겁게 놀아. 오늘은 내가 계산할게.”그가 나가려 하자 구승재는 안현우를 매섭게 흘겨보더니 이내 형을 따라갔다.“형, 화내지 마. 그런 놈들 때문에 기분 망칠 필요 없어. 오늘은 형이랑 형수님의 좋은 날이잖아. 즐겁게 보내야지.”그 말에 걸음을 멈춘 구승훈은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방 안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가식 떠는 꼴 좀 봐. 마치 여자 안 만나는 사람처럼. 그리고 그 강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