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안 하면 안 돼요?”구승훈은 잠시 멈칫했다. “강 부장, 내가 너한테 그 많은 돈을 들인 이유가 나한테 반항하라는 게 아니라는 걸 잊지 마!”그 말을 들은 강하리는 심장이 쿵 했다.그렇다, 그녀는 구승훈이 욕망을 분출하기 위해 찾은 존재였다. 어떻게 그걸 잊고 있었을까?그녀는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그의 요구에 협조했다.구승훈은 그녀를 처벌하듯 아주 잔인하고 격렬하게 움직였다. 마치 그녀를 산 채로 잡아먹고 싶은 것 같았다.강하리는 그에게 협조하면서도 너무 세게 하지 않도록 부탁했다.새벽 두 시까지 뒤척이고 나서야 구승훈은 마침내 멈췄고, 강하리는 지쳐서 얼굴에 흐르는 땀이 쇄골에 떨어졌는데 약간 아파서 보니 거기에는 구승훈이 남긴 이빨 자국이 있었다.김주한이 남긴 붉은 자국은 모두 이빨 자국으로 덮여 있었다.뜨거운 샤워 물을 틀어놓은 구승훈에게서 조금의 온화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그는 그 이빨 자국을 내려다보며 강하리에게 물었다.“안 아파?”강하리가 고개를 젓자 구승훈은 큰 손으로 그 부위를 꽉 눌렀다.“이제 아파?”강하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변했지만 구승훈은 조금도 손을 놓을 생각이 없었다.“그래, 그렇게 아파야지. 강 부장, 네 주제를 파악하고 오늘처럼 다시는 자신을 더럽히지 마.”강하리는 자신을 위해 해명하고 싶었다.“난 더럽지 않아요!”구승훈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내가 조금만 늦었으면 더럽혀지지 않을 거라고 감히 말할 수 있어?”그 말에 강하리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그의 말대로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런 상황에서 구승훈이 오지 않았더라면 곤경에 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김주한은 손에 다 넣은 고기를 놓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원래는 야외 자리로 예약했는데 그 사람이 장소를 안으로 바꿀 줄은 몰랐어요.”“그래서?”구승훈의 표정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해명이 아니었다.“앞으로는 그런 일 없을 겁니다.”강하리는 겨우 말을 꺼냈다.그제야 구승훈은 만족한 표정으로
강하리는 자기가 이른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어젯밤에 자신의 입으로 구승훈에게 송유라가 잘 협조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김주한을 찾아간 거라고 말했기 때문이다.그런데 구승훈이 진짜로 송유라에게 경고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송유라는 그의 첫사랑이고, 구승훈은 한 번도 그녀에게 심한 말을 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아마도 일을 빨리 진행해야 해서 그렇게 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강하리의 마음은 살짝 흔들렸다.심장이 벌렁벌렁해서 침착할 수가 없었다.그런데 생각해 보니 스스로 너무 불쌍해 보였다. 구승훈이 조금만 잘해줘도 그녀는 남몰래 한참 동안 기뻐했기 때문이다.강하리는 장 매니저와 더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쓸데없는 생각을 멈추고 촬영 준비를 했다.사진작가와 얘기를 마친 뒤 또 현장 스태프와도 의논했다.모든 준비를 마치자 송유라도 메이크업을 끝냈다.송유라는 강하리의 앞으로 와서 웃으며 말했다.“승훈 오빠가 나를 위해 환영회를 열어준다고 했으니 너도 와서 같이 놀아.”강하리는 단칼에 거절했다.“싫어. 내가 가면 다들 불편할 텐데.”말을 마친 뒤 그녀는 돌아서서 옆으로 걸어갔다.“하지만 송유라는 기뻐서 활짝 웃었다.“겁나? 아니면 승훈 오빠가 나한테 너무 잘해줄까 봐 질투 나?”강하리는 가슴이 저릿저릿했다.확실히 구승훈과 송유라가 같이 있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강하리는 아주 오랫동안 노력해야 어쩌다 한번 구승훈이 그녀에게 잘해주는데, 송유라는 언제든지 그의 마음속에서 중요한 자리를 잡고 있는 듯했다.구승훈은 마음을 아끼지도 않고 숨기지 않으며 송유라에게 잘해주었다.그것에 비하면 강하리는 자신이 너무 불쌍해 보였다.강하리는 송유라를 바라보며 말했다.“유라 씨, 곧 촬영 들어가요.”송유라는 그녀를 조롱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떴다.촬영은 잘 진행되지 않았다.기획안 자체는 육가현을 겨냥한 것이었지만 송유라는 육가현과 스타일이 매우 달랐다.사진작가가 불만족스러워하자 강하리는 그 자리에서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강하리는 이런 점에서 송유라에게 감탄했다. 그녀를 괴롭히기 위해서라면 별의별 짓도 할 수 있었다.만약 오늘 가지 않는다면 송유라와 대립한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될지도 모른다.그녀는 마음속의 번뇌를 억누르고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갈게요.”송유라는 순간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강 부장님, 너무 좋아요.”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안예서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으며 송유라가 떠나자, 강하리의 귀가에 대고 한마디 속삭였다.“우리 대표님 눈이 멀었나 봐요. 어떻게 이딴 걸 좋아할 수 있어요!”강하리는 웃었다. 그렇다. 그녀 또한 이해할 수 없었다.구승훈의 주변에는 온갖 종류의 여자들이 차고 넘쳐났는데 그중에는 청순한 여자, 섹시한 여자, 화사한 여자, 대범한 여자, 어떤 여자든 있었지만 왜 하필 송유라에게 반했을까?그녀가 송유라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얼굴만 빼면 봐줄 만한 데가 정말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도 구승훈은 송유라가 좋다는데 무슨 방법이 있을까?“사람마다 취향이 다른 걸 어쩌겠어.”안예서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그들은 함께 차를 타고 히비스커스로 향했다. 송유라가 입구에서부터 구승훈의 이름을 대자 모든 사람의 부러움을 샀다.강하리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척 묵묵히 뒤따랐다....구승훈은 마침내 와서 송유라의 체면을 크게 살려줬다.강하리는 구석진 곳에 앉아 조용히 식사하며 상석에 앉은 송유라가 다른 사람들과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니 물 만난 고기처럼 즐거워하고 있었다.구승훈은 옆에서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지켜보며 가끔 그녀 때문에 웃음을 터트리곤 했다.이때 강하리는 문득 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다. 생활이 어려워 정서원을 따라 여기저기 전전하며 살았지만, 정서원은 그녀를 끔찍이 아꼈다. 정서원은 예전의 기억을 잃었지만, 본능적으로 노래와 춤에 소질을 보였고 강하리는 어릴 때부터 그런 정서원을 따라 춤을 배웠다. 비록 시골이지만 어린 공주님처럼 살았다.나중에 강하리는 구승훈을 만
송유라는 손에 술 두 잔을 들고 강하리에게 다가왔다.강하리는 그녀가 술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무엇을 할지 예상이 가서 순간 머리가 아파 났다.과연 곧바로 송유라는 술 한 잔을 강하리에게 들이밀며 말했다.“강 부장님, 죄송해요. 저 때문에 일이 계속 밀렸죠. 그리고 또 저 때문에 불필요한 오해도 받고요. 지금 사과할게요.”강하리는 눈앞에 있는 술을 보고 고개를 들어 송유라와 눈을 마주쳤다.“사과는 안 해도 돼요. 같이 일하는데 당연히 안 맞는 부분도 있을 수 있죠. 그건 대화를 통해 잘 풀면 되고요. 술도 사양할게요. 제가 요즘에 몸이 좀 안 좋아서.”강하리는 송유라가 건네는 술을 받지 않고 말을 마친 후 바로 밖으로 걸어 나갔다.그런데 그때 송유라가 그녀의 앞으로 가로막았다.“강 부장님, 설마 절 용서 안 하겠다는 말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왜 술을 안 마시는 거예요?”강하리는 웃어 보이며 말했다.“송유라 씨,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우리는 같이 일하다가 안 맞는 부분을 발견한 거니까 용서하고 안 하고 할 게 없어요. 그리고 저 정말 몸이 안 좋다니까요.”하지만 송유라는 계속 고집을 부렸다.“얼마 안 되는데도요? 제가 듣기론 강 부장님 예전에 술 잘 마셨다고 하던데요.”강하리는 예전에 확실히 주량이 강했다.회사에 금방 들어와서 구승훈의 비서로 일했는데, 그때는 회사가 설립된 지 얼마 안 되어 구승훈과 함께 밖에서 계약을 많이 따내야 했다. 그래서 주저하지도 않고 술을 거침없이 마셨었다.하지만 지금은 예전과 다르다.어제 삼킨 소량의 술 때문에 이미 마음속에 죄책감이 가득했던 터라 오늘은 절대 마시면 안 된다.“송유라 씨, 정말 미안한데 이제 제가 몸이 좋아지면 단둘이 술자리를 가져도 될까요?”송유라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그 말은 확실히 날 용서하지 않겠다는 뜻이군요.”강하리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미안해요. 그냥 정말 술을 마시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지금 몸 상태가 허락 안 해요.”“어디가 아픈데요? 보기엔 멀쩡한데요?
송유라는 여전히 불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다른 뜻은 없어요. 강 부장님, 화내지 마세요.”“송유라 씨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네요.”강하리는 그렇게 말하고는 곧장 몸을 돌려 룸을 나갔다.룸 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는 구승훈이 휴지 한 장을 송유라에게 건네는 것을 보았다.송유라가 안 받자 그는 할 수 없이 휴지를 들고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나이가 몇인데 자꾸 울어?”“나도 이러고 싶지 않아요.”“못생겼네.”못생겼다고 하면서도 그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시지 않았다.강하리는 룸의 문고리를 꽉 잡아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렸다.바로 어제, 구승훈은 그녀에게 매우 모질게 말했다. 울어봐야 소용없다고. 우는 것으로 그의 마음이 약해지기를 기대하지 말라고.강하리는 늘 이 남자의 마음이 돌로 만든 것이라고 생각했다.요 몇 년 동안 그녀 앞에서 그는 확실히 돌같이 냉정하고 무정했다고 할 수 있다.구승훈은 그녀의 눈물 때문에 마음이 약해지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녀의 간청에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송유라 앞에 있는 구승훈은 다른 사람들 앞에 있는 구승훈과 꼭 서로 다른 두 사람 같았다.그리고 그는 다른 사람의 것이다.진작 알았어도 마음이 좀 아팠다.가슴에 찔린 듯이 그녀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손가락을 약간 떨면서 문고리를 놓았다.문을 닫는 순간 그녀는 주체할 수 없이 구역질이 나기 시작했다.화장실로 뛰어들어가서 아까 마신 술과 오늘 저녁 먹은 것까지 다 토해냈다.모든 걸 다 토하고 나서 그녀는 거울을 보며 낭패해 보이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정리했다.그리고는 억지로 몸을 가누며 레스토랑을 나섰다.택시를 잡지 않았다. 근처에 크기가 어중간한 야시장이 있었는데, 그녀는 그렇게 인파를 따라 야시장에 들어섰다.야시장의 길거리에서 양말 두 켤레를 사고 앞의 포장마차에 가서 물만두 한 그릇을 먹었다.배불리 먹고 나서 위가 그다지 불편하지 않자 그녀는 비로소 마음도 좀 편해진 것을 느꼈다.마침내 그녀는 버스킹하는 가수 앞에 앉아 한
강하리는 가방을 옷걸이에 걸어놓고 신발을 갈아신었다.“전통시장에 다녀왔어요.”“누구랑?”강하리는 멈칫하긴 했지만, 굳이 숨기지 않으려고 했다.구승훈은 이미 무언가 알고 있는 듯싶었다.“혼자요. 오는 길에 우연히 정원 씨를 만나 정원 씨가 집까지 데려다줬어요.”구승훈은 소파에 앉아 그녀를 쳐다보았다.“우연히?”“네. 우연히요.”“이런 우연이.”구승훈은 피식 웃더니 옆자리를 두드렸다.“자, 와서 앉아서 말해. 어떻게 우연히 만나게 되었는지.”강하리는 느껴지는 그의 분노에 등골이 오싹해 나더니 우물쭈물하면서 말했다.“길가에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 정원 씨가 지나가면서 저를 발견하고 집까지 데려다줬어요. 대표님, 저는 누구한테 전화하면 바로 달려올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인 사람이 아니에요.”구승훈은 어두운 표정으로 피식 웃더니 말했다.“강 부장, 내가 전에 했던 말을 기억해 두고 있는 것이 좋을 거야. 다른 남자들이랑 그만 어울려. 몸을 더럽혔다간 가치 없는 사람이 되는 거야.”이 말이 가슴에 비수가 꽂힌 듯 아팠지만, 그의 앞에서 굳이 내색하지 않으려고 웃으면서 말했다.“기억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표님.”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물었다.“전통시장에서 뭐 샀어?”강하리는 매번 전통시장에서 산 자잘한 물건들을 그에게 보여주곤 했지만,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구승훈처럼 자신의 감정에 솔직할 수가 없었다.“아무것도 안 사고 그냥 돌아다녔어요.”구승훈은 딱딱한 그녀의 말투에 만족스럽지 않은지 그저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하리는 멈칫하더니 결국 두 쌍의 양말을 꺼냈다.“양말을 좀 샀어요.”구승훈의 것 한 쌍, 강하리의 것 한 쌍, 총 두 쌍이었다.구승훈은 이 두 쌍의 양말을 보더니 표정이 풀리기 시작했다.“씻어.”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욕실로 향했다.그녀가 욕실에 들어가기 전, 구승훈이 물었다.“밥은 먹었어? 전에 먹었던 거 다 토했다며.”강하리는 그대로 제자리에 굳어버리고 말았
구승훈은 그녀의 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강하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키스로 인해 온몸이 나른해졌다.그녀는 본능적으로 입을 열어 그의 혀를 맞이했다.어둠 속에서 그렇게 이 둘은 여느 커플과도 같이 가까이 붙어있었다.구승훈은 어젯밤보다도 더 거칠었다.벌칙인지 불만을 털어놓는 것인지 몰랐지만, 유독 사랑의 감정만은 느껴지지 않았다.늘 강압적으로 다른 사람을 리드하기 좋아하던 그는 이 방면에서도 그랬지만, 오늘 저녁은 그녀의 허리를 잡더니 자신의 몸에 올라타게 했다.그녀의 허리를 쓰다듬더니 몸을 일으켜 그녀의 귓불을 깨물었다.강하리도 무의식적으로 그를 꽉 끌어안았다.이때, 강하리의 핸드폰이 울렸다.강하리가 아직 정신을 차리지 않은 틈을 타 구승훈이 대신 전화를 받아 스피커를 켰다.전화기 너머에서는 임정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하리 씨, 내일 시간 있으세요? 자료 좀 부탁하고 싶은데.”나른해져 있던 강하리는 마치 몸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바로 정신을 차리더니 표정이 창백해졌다.구승훈은 억지로 핸드폰을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자기야, 전화 받아.”강하리는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끊고 싶었지만 구승훈이 그러지 못하게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구승훈은 그녀의 목에 키스를 퍼붓더니 말했다.“받아. 임 변호사님 난처해지는 꼴을 보고 싶어?”강하리는 난처함을 무릅쓰고 결국 전화를 받았다.“죄송해요... 변호사님... 저... 내일 시간 없어요.”강하리는 최대한 호흡을 가다듬고 대답하더니 바로 전화를 끊었다.구승훈은 막무가내로 또 그녀에게 키스했다.갑작스러운 키스에 강하리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비겁한 자식.’구승훈은 그녀의 처지가 얼마나 난처한지는 생각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그대로 그녀를 안고 욕실로 들어가 욕조에 앉혔다.그렇게 달아올랐던 욕정이 식어버리고, 강하리는 구승훈을 바라보면서 설명을 시도했다.“대표님, 임 변호사님이 이번에 국제 사건을 맡았는데 제가 번역해 드리기를 원하세요.”
강하리는 생각을 거두고 몸에 묻은 물기를 닦은 후 방으로 들어갔다.이때 구승훈의 핸드폰이 울렸다.띵동띵동.누군가가 계속 메시지를 보내왔다.구승훈은 인내심 없는 표정으로 힐끔 보더니 그 상대방에게 전화했다.“네가 데려다줘.”전화기 너머에서 안현우가 이상한 말투로 말했다.“승훈아, 유라 씨 취하셔서 계속 너의 이름만 불러. 네가 자기를 안 좋아한다나 뭐라나. 혹시 싸웠어?”구승훈은 담배 한 모금 빨더니 말했다.“아니.”송유라는 워낙 제멋대로 하는 성격이라 구승훈이 달래주기를 원하면서 가끔 오늘처럼 이렇게 행패를 부릴 때가 있었다.송유라는 오늘 구승훈이 집에 돌아가겠다고 했을 때 말렸지만 그는 결국 제멋대로 집으로 돌아갔던 것이다.“빨리 와서 데려가.”구승훈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했다.“네가 데려다주기 싫으면 유라 집에 전화해서 기사님더러 데려가라고 해.”안현우가 말했다.“승훈아, 넌 뭐 때문에 바쁜데? 유라 씨도 나 몰라라 하기로 한 거야?”안현우는 멈칫하더니 질문했다.“지금 강 부장이랑 같이 있는 건 아니지? 승훈아, 어떻게 강 부장 때문에 유라 씨를 내버려둘 수 있어?”구승훈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누구랑 함께 있든 나의 일이야. 네가 유라를 집까지 데려다줘.”구승훈은 말을 끝내자마자 전화를 끊더니 고개 돌려 강하리를 쳐다보았다.“내일 임 변호사님한테 말해. 만약 정말 번역관이 필요하다면 밖에서 찾아보라고. 그 돈마저 아까우면 변호사 사무실 때려치우라고.”강하리는 침묵을 지키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이 아르바이트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돈 때문인 것도 있고 입 밖에 내지 않았던 사심 때문인 것도 있었다.언젠가 자신의 꿈을 되찾고 싶었고 진정한 자신으로 거듭나기를 원했다.구승훈이 바라는 강 부장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승훈의 노리개가 아닌 진정한 자신 말이다.“저는 하고 싶어요. 저희 계약서에 제가 아르바이트하면 안 된다는 사항은 없었잖아요.”구승훈이 피식 웃었다.“강 부장, 지금
구승훈은 상처받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웃었다.“하리야, 넌 늘 그렇듯 매정하네.”강하리가 뒤돌아 휴대폰으로 택시를 부르려는데 구승훈이 그녀의 휴대폰을 움켜잡았다.“딱 하룻밤만. 너 안 건드릴게, 응?”강하리의 몸이 굳어졌고 구승훈은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하리야, 내 소원 들어주는 거라고 생각해. 네가 이 집에서 아이와 함께 지내는 모습을 몇 번이나 상상했는지 몰라. 여기가 우리 집이야.”강하리의 코끝이 시큰거렸지만 그래도 결국 구승훈의 손을 뿌리쳤다.너무도 분명한 그녀의 거절에 구승훈은 답답한 가슴에 고통이 밀려왔고 쓴웃음을 짓던 그는 더 그녀에게 강요하지 않았다.“샤워하고 나오면 다시 데려다줄게.”말을 마친 그는 돌아서서 화장실로 들어갔다.구승훈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데 강하리는 통화 중이었다.발걸음이 멈칫한 그는 통화 상대가 주해찬이란 것을 알아차렸다.“선배, 전 괜찮아요.”“알았어, 항공편 예약해. 나도 같이 갈게.”강하리가 전화를 끊는데 구승훈이 갑자기 다가와 그녀를 껴안고 고개를 숙여 입 맞추었다.“구승훈!” 강하리는 그의 키스에 깜짝 놀라 그를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구승훈은 점점 더 꽉 그녀를 붙잡았다.그는 강하리의 턱을 잡고 깊숙이 파고들며 조금의 부드러움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하게, 마치 화풀이나 비난하듯 키스를 퍼부었다.강하리는 벽에 단단히 밀려서 몸부림을 치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그녀가 다리를 들어 그의 아랫도리를 가격하려는데 구승훈이 먼저 그녀의 다리를 붙들었다.강하리가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구승훈의 키스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힘의 격차로 인해 그녀는 반격할 방법이 없었다.강하리는 화가 나서 얼굴마저 하얗게 질렸고 구승훈은 실컷 헤집어놓은 뒤에야 그녀를 놓아주었다.강하리가 그의 뺨을 때렸고 이내 구승훈의 얼굴엔 손자국이 생겨났다.그러나 그의 손가락은 키스로 인해 부어오른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하리야, 나 생각이 바뀌었어.”강하리가 멈칫했다.“무
그리고는 강하리를 곧장 차에 밀어 넣었다.차는 빗속을 뚫고 달려 나갔다.구승훈의 차는 굉장히 빨랐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시내를 벗어나 한 별장 앞에 멈춰 섰다.구승훈은 주차가 끝나자마자 차에서 내려 강하리를 빌라 안으로 끌어당겼다.빌라는 강하리가 선호하는 스타일로 안팎을 의도적으로 꾸몄다.안으로 들어선 강하리는 몸이 굳어버렸다.“여긴 내가 준비한 신혼집이야.”구승훈이 문득 등 뒤에서 이렇게 말했다.“결혼하면 여기서 지내려고 했어. 하리야, 정말 이대로 날 버릴 거야?”강하리는 꾸며진 방을 둘러보며 마음이 씁쓸했지만 애써 두 눈에 담기는 감정을 감추었다.“구승훈, 내가 그렇게 고통받는 걸 어떻게 지켜보기만 했어?”말문이 막힌 구승훈은 갑자기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미안해.” 남자의 목소리는 죄책감으로 가득했다.“다 내 잘못이야.”강하리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애쓰며 낮은 웃음을 지었다.너무 지쳤다.한때 열정적이었던 사랑이 이제는 고문처럼 느껴졌다.그날 구승훈이 아직도 자기를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강하리는 답을 알 수 없었다.어쩌면 오랫동안 사랑했던 남자일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미워하는 마음이 더 컸다.강하리는 구승훈이 진심으로 미웠다.그의 무자비함과 강압적인 성격이 싫었다.둘 사이에서 그는 항상 그녀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행동했고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입장이었다.그래, 어쩌면 그는 그녀를 위해, 아이를 위해 그랬을 수도 있다.하지만 자신이 해준 것들이 그녀가 진정 원하는 것인지 물어본 적은 없었다.강하리가 발버둥쳤지만 구승훈은 더 꽉 끌어안았다.“구승훈, 그만하자.”구승훈의 목소리가 잠겼다.“그만하자니, 무슨 말이야? 하리야, 우리 사이가 이대로 끝날 것 같아? 문씨 집안도, 구씨 집안도 망했고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다 사라졌는데 이제 와서 그만하자고?”“우리 아이가 죽었잖아!”뒤돌아선 강하리의 눈엔 온통 고통만이 가득한 채로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구
“어떻게 알았어?”구승훈은 웃으며 눈을 내리깔고 테이블 아래 두 사람이 잡고 있는 손을 바라보았다.“이상해?”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구승훈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하리야, 내가 포기하지 않겠다고 했잖아. 당연히 네 일에 대해선 다 알고 있지.”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손을 빼냈다.“그럴 필요 없어.”유난히 침착한 그 말이 구승훈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필요한지 아닌지는 네가 결정하는 게 아니야. 강하리, 내가 뭘 하든 그건 내 일이야.”강하리가 비웃었다.“하지만 난 이제 당신이랑 더 엮이고 싶지 않아.”구승훈의 목울대가 꿈틀거리며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몇 마디 말로 두 사람 사이는 또다시 교착 상태에 빠졌고 일어나서 밖으로 나온 강하리는 그제야 휴대폰을 꺼내 안예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그녀는 최소한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는 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구승훈이 옆에 앉아있자 마치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던 치유할 수 없는 상처, 두 사람의 목숨이 다시금 떠오르는 듯했다.그녀의 어머니와 아이...강하리가 가정에서 나오는데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멍하니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데 문득 연정이가 사고를 당한 날 밤도 비 오는 밤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그날 밤이 어땠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연정이가 이렇게 비 오는 밤에 춥고 무서워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강하리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비를 바라보다가 눈가에 차오르는 시큰함을 꾹 참고 빗속으로 걸어가는 순간 머리 위로 드리워진 우산이 그녀를 덮었다.고개를 들자 미소를 머금은 주해찬의 눈동자와 마주쳤다.“그렇게 비속우로 달려가면 감기 걸리잖아.”강하리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우산 챙기는 걸 깜빡해서.”“왜 전화 안 했어?”주해찬의 우산은 완전히 그녀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내가 마침 저녁을 먹으러 오지 않았으면 이대로 비를 맞으며 돌아가려고 했어?”주해찬의 눈에는 나무람과 관심이 가득했고 강하리는 웃으며 시선을 다른 곳
B시 대양그룹.정양철이 사무실로 들어가니 이미 비서가 대기하고 있었다.“강하리 검색어는 어떻게 된 거야?”비서는 잠시 머뭇거렸다.“사모님께서 대양그룹 명의로 매수한 것인데 아마도 회장님을 시험하려는 의도 같습니다.”정 회장이 강하리를 아낀다면 이 일을 거론할 것이고 신경 쓰지 않는다면 하든 말든 넘어가겠지.정양철의 얼굴에 알 수 없는 표정이 스쳤고 그가 말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주현이 통해 강하리에게 연락해서 대양그룹이 JM과 함께 일하고 싶다는 말을 전하라고 해.”말을 마친 그가 멈칫했다.“집사람이 물어보면 강하리에 대한 보상이라고 하고.”비서의 눈이 번뜩이더니 대답을 마치고 자리를 떠났다.강하리는 정주현의 전화를 받고 깜짝 놀랐다.지난번 구승훈과 함께 대양그룹 입찰을 뺏은 이후 정양철 측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하지만 이번에는 정양철이 무슨 꿍꿍이로 합작을 원하는 건지 모르겠다.지금은 정양철을 상대로 놀아줄 기분이 아니었다.“정주현 씨, 대양그룹에서 마음만 먹으면 파트너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겠죠?”정주현은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듣고는 다소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강하리 씨, 우리랑 같이 일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강하리가 함께 일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려던 찰나, 정주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B시에 언제 와요? 얼굴 보고 얘기할까요? 협업 안 해도 오랜만에 얼굴 한번 봐요. 우리 안 본 지 오래됐잖아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알았어요, 그럼 가면 연락할게요.”정주현이 전화를 끊자 사무실 앞에 서 있는 연미숙의 모습이 보였다.“엄마, 여기서 뭐 해?”연미숙이 웃었다.“우리가 강하리랑 같이 일해?”정주현은 고개를 끄덕였다.“아빠가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구씨 집안에 매달리는 게 아니라 밖으로 사업을 넓히려는 것 같아.”연미숙은 인상을 찌푸렸다. “꼭 강하리여야만 대외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거야?”정주현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강하리가 왜?”연미숙은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
구승훈은 차갑게 웃으며 자신도 모르게 핸들을 꽉 움켜쥐었다.그는 차에서 내리지 않고 두 사람이 차 안에서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모르겠지만 강하리의 얼굴에 번진 미소가 전혀 억지스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화사한 아침 햇살 같은 그 미소가 구승훈은 왠지 모르게 눈에 거슬렸다.강하리는 차에서 내려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된 구승훈의 차가 보였다.그녀는 발걸음을 잠시 멈추었지만 시선을 돌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강하리가 안으로 들어간 후 주해찬은 차에서 내려 구승훈의 차 쪽으로 걸어갔다.그가 창문을 살며시 두드리자 구승훈이 창문을 내렸다.“구 대표님 시간 있으세요? 얘기 좀 할까요?”구승훈은 가볍게 웃었다.“주해찬 씨는 남의 연애에 참견하는 걸 좋아하나 봐요?”구승훈의 가시 돋친 말에도 주해찬은 계속 웃기만 했다.“구승훈 씨, 당신과 하리가 잘 지낸다면 나도 굳이 끼어들고 싶진 않은데 당신은 하리를 행복하게 해준 적이 있긴 한가요?”그의 말에 구승훈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그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들이마신 후 말을 시작했다.“주해찬 씨, 행복하든 아니든 그건 다 나와 강하리 사이의 일이지 당신이랑은 아무 상관이 없잖아요.”주해찬은 조롱 섞인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웃었다. “구승훈 씨, 내가 하리 데려간다고 했죠. 이번엔 말한 대로 합니다.”말을 마친 그는 돌아서서 다시 차로 향했다.구승훈의 얼굴에서 미소가 조금씩 완전히 사라진 채 떠나는 차를 바라보았다.그는 한참 동안 손에 쥔 휴대폰을 내려다보면서 결국 강하리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싶은 마음을 참지 못했다.[그 자식이랑 떠날 거야?]강하리가 위층으로 올라가는데 전화벨이 울렸고 그녀는 한참 동안 들여다보다가 그냥 대화창을 닫아버렸다.구승훈은 전송된 메시지에 답장이 오지 않자 가벼운 웃음을 터뜨리며 입안의 쓴맛을 삼키고 휴대폰을 치우려던 찰나, 구승재의 전화가 걸려 왔다.“형, 큰어머니가 그
“죽기 전엔 안 해.”심준호는 인상을 찌푸렸다. “극단적인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구승훈의 손가락이 한참을 굳어 있다가 말을 꺼냈다.“안 해.”하고 싶었지만 그게 그녀를 더 멀리 밀어낼까 봐 더 두려웠다.심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사이 문제의 핵심은 아이였기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곧바로 아이 문제로 말을 돌렸다.“아이는 어떻게 된 거야? 문연진이 어떻게 아이의 존재를 안 거야?”구승훈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구승재가 통화하는 걸 들었어.”심준호는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정말 문연진이 아니야?”구승훈은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그 여자가 아니야.”문연진은 이미 연정이를 죽였다고 인정했는데 굳이 연정이를 차로 치어 산에서 떨어뜨렸다고 말할 필요는 없었다.그녀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단 한 가지, 도중에 가정부가 연정이와 함께 차에서 내린 사실을 모른다는 것.“그럼 문연진 말고 또 아는 사람이 있어?”구승훈은 잠시 침묵했다.“여초연, 문연진 말로는 그날 밤 그 말을 들었을 때 마침 여초연이 그 자리에 있었다고 했어.”멈칫한 심준호의 눈에서 차가움이 번뜩였다.여초연이란 사람은 솔직히 줄곧 속내를 알 수 없었다.전에는 여러 번이나 구승훈을 죽이려고 했다가 지금은 무척 다정하게 굴었다.그 여자는 지금까지도 끔찍한 존재로 느껴졌다.“설마 그 사람이?”심준호는 문득 구승훈이 안타까웠다.정말 여초연이라면 구승훈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구승훈은 잠시 침묵했다.“아직 확인하고 있어.”심준호는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내 도움이 필요하면 말만 해.”구승훈은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심준호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고 이 문제가 해결되었기에 그도 떠났다.심준호를 배웅하고 차로 돌아온 구승훈의 휴대폰이 울렸다.“형, 어제 강하리 씨 인기 검색어가 대양그룹과 관련이 있어.”구승훈의 눈에 냉기가 감돌았다.“최근 정양철 측에서 어떤 움직임이 있었어?”“아니, 이 검색어 말고는 그동안 잠잠했
강하리의 입꼬리가 굳어지며 다시 말하기까지 한참이 걸렸다.“고맙다고 전해주세요.” 심준호는 인상을 찌푸리며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 한 대의 자동차가 도로변에 멈춰 서는 것을 목격했다.주해찬이 차에서 내려 이쪽으로 걸어왔다.심준호는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이렇게 말했다.“직접 만나서 고맙다고 말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말을 마친 그는 강하리에게 눈썹을 치켜세웠고 강하리는 길 건너편에 주차된 너무나도 낯익은 차를 보았다.검은색 마이바흐 창문은 반쯤 내려져 있고 차에 탄 남자는 담배를 손에 쥐고 있었다. 멀리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구승훈이 이쪽을 보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그쪽을 힐끗 쳐다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그러면 나중에 메시지 보낼게요.”심준호는 웃으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주해찬을 바라보기만 했다.“그러면 그동안 잘 돌봐주세요.”주해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말을 마친 그가 강하리를 이끌고 나가려는 순간 갑자기 강하리의 손목이 잡혔다.어느 틈엔가 구승훈이 길을 건너 이쪽으로 걸어왔고 주해찬이 얼굴을 찡그리며 막으려는데 심준호가 옆에서 말렸다.강하리의 손가락이 살짝 조여졌다.“구승훈 씨, 이거 놔요.”구승훈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웃었다.“하리야, 이제 고맙다는 말도 안 할 거야?”강하리의 몸이 굳어지고 입꼬리가 몇 번 움직이다가 말을 꺼냈다.“고마워요.”말을 마친 그녀는 구승훈을 바라보았다.“이제 놔줄래요?”구승훈은 그녀의 손을 놓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나한테 꼭 이래야겠어?”강하리가 시선을 피했다.“구승훈 씨,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잖아요.”그가 원망스러웠다.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그를 보면 연정이가 생각난다는 사실이었다.숨도 쉴 수 없을 것만 같은 고통은 더 이상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구승훈은 차갑게 웃었다.“나도 놔주지 않겠다고 했잖아. 하리야, 얘기 좀 하자.”강하리의 눈이 빨개지며 입을 열자 목소리까지 떨리고 있었다
강하리가 유치장 벤치에 기대어 홀로 앉아 있었다.머릿속에는 구승훈이 차를 막았을 때와 이곳을 떠날 때의 모습만이 가득했다.강하리는 눈을 지그시 감고 그 모든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밀어내려 했지만 그 남자의 움직임은 점점 더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그가 이름을 불러줄 때, 그 다급하면서도 부드러운 어투가.강하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점점 더 가슴이 아파져 오는 것을 느꼈다.노민우의 말이 틀린 게 없다는 건 안다.구승훈의 의도는 좋지만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생각만 해도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밤새 달려온 심준호의 시야에 들어온 건 여자가 벤치에 홀로 앉아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가녀린 어깨를 떨고 있는 모습이었다.그는 부드럽게 한숨을 쉬며 음식을 들고 들어왔다.강하리는 고개를 들어 앞에 서 있는 심준호를 보았다.“심 변호사님.” 낮게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엔 어딘가 억울함이 담겨 있었다.심준호는 다가가 그녀의 머리를 살살 어루만지며 나지막이 말했다.“겁내지 마요. 내가 아무 일도 없게 할 테니까.”강하리는 눈가에 맺힌 시큰한 감각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심준호는 손에 든 음식을 그녀에게 건넸다.“아직 밥 안 먹었죠?”강하리는 고개를 저었다. “배 안 고파요.”심준호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배 안 고프면 안 먹을 거예요?” 그는 곧바로 음식을 열고 숟가락을 그녀의 손에 밀어 넣었다.“마침 나도 안 먹었는데 같이 먹어요.”강하리는 거절하지 못했지만 그 음식들을 보자마자 그녀의 움직임은 멈췄고 자신도 모르게 숟가락을 꽉 움켜쥐었다.“왜요, 입맛에 안 맞아요?”심준호는 눈썹을 치켜뜬 채 그녀를 바라보았고 강하리는 음식을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안 맞는 게 아니라 너무 입맛에 맞아서 문제다.그녀의 취향에 딱 맞는 요리를 주문했다.심준호가 웃었다.“좋아하면 많이 먹어요. 그동안 야윈 것 좀 봐요.”강하리가 그를 슬쩍 쳐다봤다.“구승훈 씨가 주문한 거예요?”심준호는 새우를 그녀의 그릇에 넣어주었다
구승훈이 떠난 후 강하리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하리야...”손연지는 어쩔 줄 몰라 했다.하지만 막상 부르고 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는 노민우를 노려보았다.노민우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미 대략 알고 있었기에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을 꺼냈다.“강하리 씨, 이번 일은 승훈이 잘못이 아니란 걸 누구보다 잘 알 거예요. 승훈이도 아이를 지키기 위한 의도였어요. 아이의 상황이 그렇게 위험하지 않았다면 절대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 거예요. 지금까지 힘들게 버텨왔는데 그래도 하리 씨가 조금만 더 너그럽게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요...”“됐어, 입 다물어!”손연지가 끼어들었다.“하리가 얼마나 더 너그럽게 봐줘야 해? 심지어... 아주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하리는 더 원망하지 않았어. 그 사람은 뭔데? 그래, 정말 아이를 지키려고 그랬을지 몰라도 하리를 고통스럽게 한 건 사실이잖아. 한번 또 한 번 하리가 그 사람 때문에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는지 알아? 하리는 이해해 줬는데 그 사람은 하리를 이해해 준 적 있어? 하리가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고통까지 겪어야 해?”손연지의 이어지는 반박에 노민우는 할 말을 잃었다.“난 그냥 강하리 씨에게 좋은 말을 해주려고 그런 건데.”손연지는 강하리를 바라보았다.“하리야, 무슨 일이 있어도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 남자든 아이든 너만큼 중요하지 않아, 알겠지?”강하리는 눈가에 담긴 씁쓸함을 감추기 위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알아. 고마워, 연지야.”손연지가 부드럽게 토닥이며 주해찬에게 고개를 돌렸다.“더 달래봐요.”주해찬은 고개를 끄덕였고 손연지는 노민우를 밖으로 끌어냈다.주해찬은 몸을 숙인 채 강하리를 같은 높이에서 바라봤고 강하리는 그의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선배, 난 괜찮아요.”주해찬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지만 거절당할 것을 생각하며 결국 참았다.그는 말을 하기 전까지 한참 동안 침묵했다.“하리야, 이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