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리는 전화를 바로 끊어버렸다.그러고는 간단하게 정리하고 집을 나섰다.병원에 도착하니 간병인이 반갑게 인사했다.“하리 씨, 새해 복 많이 받아요~”강하리도 웃음으로 인사했다. 그러더니 오는 길에 산 과일을 간병인에게 건네주었다.“아주머니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지난 한 해 수고 많으셨어요.”간병인은 과일을 받더니 매우 기뻐했다.“수고는 무슨, 돈을 받았으니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죠.”그러더니 아직 침대에 누워있는 정서원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렇게 또 한해가 지나갔다. 이미 4년째다.이런 나날이 언제 끝날지 아직 모른다. 사실 제일 힘든 건 강하리일 것이다.간병인은 말없이 주전자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강하리에게 자리를 남겨준 것이다.강하리는 침대맡으로 걸어가 정서원의 근육을 한참 안마해 주었다.안마를 해주고 나서야 강하리는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엄마, 새해 복 많이 받아요.”정서원은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기만 할 뿐 아무 반응이 없었다.강하리는 웃으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침대맡에 앉아 곁을 지키다가 나왔다.의외인 건 병원 입구에서 송동혁을 만난 것이었다.3년을 못 봤는데도 단번에 그를 알아본 것도 대단하다고 생각되었다.하지만 떠오른 장면이라곤 3년 전 그녀가 별장 앞에 무릎을 꿇고 있을 때 매정한 남자의 모습뿐이었다.사실 정서원이 그때 기억을 잃긴 했어도 몸에 값비싼 액세서리를 많이 착용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액세서리는 결국 송동혁이 전부 채갔다.결혼하려면 집도 필요하고 돈도 써야 한다는 말에 정서원은 액세서리를 전부 송동혁에게 준 것이었다.3년 전 강하리가 송씨 집안에 찾아갔을 때도 송동혁이 따로 그녀에게 돈을 줄 거라는 기대는 전혀 한 적이 없었다.그냥 송동혁이 정서원에게서 앗아간 액세서리로 바꾼 돈을 돌려받기 위해서였다.그때 송동혁이 이렇게 말했다.“정서원 목숨은 내가 구한 거야. 그 액세서리는 목숨값이고.”“애 지우라는 말 안 들었을 때 이미 죽었어야 할 목숨인데
송동혁은 오래전부터 구씨 가문과 관계를 맺고 싶어 안달 나 있었다.10년 전, 그가 송유라에게 강하리를 가장해 구승훈과 만나게 했을 때부터 모든 걸 계획은 시작된 것이다.하지만 그는 송유라가 그렇게 제멋대로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구승훈의 몸을 얻는 거로는 모자라 구승훈의 마음까지 얻으려 했다.소탐대실이라고 결국 강하리가 어부지리를 보게 된 것이다.강하리가 웃음을 터트렸다.“대표님이 정말 송유라와 결혼하고 싶어 한다면 내가 훼방을 놓는다 해도 밀고 나갔겠죠.”허를 찌르는 강하리의 말에 송동혁은 말문이 막혔다.그는 송유라가 돌아오기만 하면 구승훈이 바로 송유라를 다시 받아줄 것이라고 생각했다.송유라가 돌아오자마자 구승훈이 에비뉴 주얼리의 광고를 준 것이 제일 확실한 증거였다.하여 송씨 집안은 구씨 집안과 약혼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구승훈은 약혼은커녕 송유라와 화해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송동혁이 콧방귀를 뀌었다.“구승훈이 우리 유라랑 결혼하는 건 시간 문제야. 하리야, 눈치 깠으면 얼른 구승훈을 떠나. 아니면 위에 누워있는 여자든 너든 좋게 끝나지는 않을 거야.”송동혁은 이렇게 말하더니 더는 입씨름을 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강하리는 그 자리에 선 채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손톱이 살을 뚫고 들어갔다.그녀가 제일 미워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송동혁일 것이다.바닥에서 치고 올라오기 위해, 자기의 이속을 채우기 위해 송동혁은 자기 처와 자식을 버린 거나 마찬가지였다.정서원은 마음씨가 착해 별로 원망하지 않을지 몰라도 강하리는 자기 신분을 안 그날부터 송동혁을 미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이 남자가 모든 불행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다.강하리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고 길가로 걸어갔다.막차가 아직 끊기기 전이었다.강하리는 버스 정류장에서 서서 사색에 빠졌다.그러다 갑자기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뒤에는 행인들만 보였다.강하리는 입을 앙다문 채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차에서 내리자 주해찬이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선배,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어요?”주해찬은 사실 그녀에게 전화할 때부터 이미 여기에 있었다.“마침 근처에 처리할 일이 있어서.”그러더니 강하리에게 따듯한 밀크티 한잔을 건넸다.“이 밀크티 좋아하는 것 같아서 샀어.”강하리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고마워요.”주해찬의 미소가 더 부드러워졌다.“취향이 변했을까 봐 걱정했는데.”강하리가 웃으며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신정에 본가에 안 내려간 거예요?”“갔지. 오늘 올라온 거야.”사실 이번 회의에 그가 참석할 필요는 없었다.이번에 온 사람은 외교부 수장이었다. 주해찬은 외교부에서 떠오르는 샛별이긴 했지만 이런 회의에 참석하기엔 경력이 부족했다.하지만 저번에 강하리가 돌아설 때 그녀의 기분이 계속 좋지 않아 보였던 게 생각났다.주해찬은 돌아가자마자 알아봤다.그리고 곧 구승훈이 대외로 강하리가 여자 친구라고 인정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것도 모자라 구승준 옆엔 아직 관계를 깨끗이 정리하지 않은 첫사랑도 있었다.이 소식을 들은 주해찬은 걷잡을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렇게 좋은 여자를 왜 아껴주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12월 31일 그날 그녀에게 전화를 하고 싶었지만 혹시 부담스러워할까 봐 내려놓았다. 그러다 마침 오늘 이 핑계를 빌어 다시 그녀를 찾아온 것이었다.솔직히 말해서 그냥 그녀를 만나고 싶어서였다.주해찬은 자료를 강하리에게 건네주었다.강하리는 자료를 받더니 가로등 불빛을 빌어 확인했다.주해찬은 가로등 아래에 선 강하리를 조용히 바라봤다.불빛이 깔끔하고 예쁘장한 얼굴을 비췄고 그 모습이 너무 부드러워 보였다.주해찬은 순간 학창 시절에도 가로등 아래에 선 그녀의 모습을 이렇게 몰래 훔쳐봤던 기억이 떠올랐다.그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한참 침묵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하리야, 구승훈을 떠날 생각은 없어?”자료를 보던 강하리는 뜬금없이 들어온 주해찬의
강하리가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하지만 이내 그 남자는 강하리의 입을 틀어막았다.곧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소리는 왜 질러?”순간 강하리는 온몸에 힘이 풀렸다.그녀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노려봤다.“승훈 씨, 미쳤어요? 늦었는데 안에 들어가지 않고 여기서 뭐 해요?”구승훈이 콧방귀를 끼더니 그녀의 허리를 힘껏 꼬집었다.“내가 들어가기 싫어서 이러는 줄 알아? 어떻게 들어가? 문 따고 들어갈까?”강하리가 멈칫했다. 구승훈에게 열쇠를 주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미안해요. 깜빡했네요.”구승훈은 그녀를 힐끔 쳐다보더니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불을 켜자 구승훈의 눈에 들어온 건 강하리의 손에 들린 밀크티였다. 구승훈의 안색이 순간 어두워졌다.강하리는 심드렁해서 고개를 숙인 채 슬리퍼를 갈아신었다.슬리퍼로 바꿔 신으면서도 강하리는 밀크티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구승훈은 허리를 숙이더니 그녀의 손에 들린 밀크티를 빼앗아 바로 쓰레기통에 던졌다.“뭐 하는 거예요?”강하리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구승훈은 차가워진 눈빛으로 물었다.“감기 다 나은 거야? 이렇게 추운 날 밖에서 데이트나 하고?”강하리가 입을 오므렸다. 주해찬과 있는 걸 본 게 틀림없었다.“선배는 그냥 자료 가져다주러 온 거예요. 내일 오전에 회의 있거든요.”구승훈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더니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선배는 무슨. 호칭이 스윗한데? 그 사람은 이름 없어?”강하리는 구승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구 대표님, 나랑 선배는 진짜 눈곱만치도 이상해할 거 없는 그냥 친구예요.”구승훈은 실눈을 뜨고는 콧방귀를 꼈다.“그래야 할 거야. 강하리, 다른 남자한테 선을 긋는 건 네 의무야. 내가 이렇게 경고하기 전에 잘해.”강하리는 원래도 좋지 않던 기분이 송동혁을 보자 바닥을 쳤다. 게다가 아까 크게 놀라기까지 하니 뭘 하든 심드렁했다.하여 지금 이 남자와 이렇게 사소한 일로 다툴 힘이 전혀 없었다.“구 대표님, 나한테 순수하지 못한
강하리는 씁쓸하게 웃더니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테이블에 마주 앉은 채 자료를 준비하기 시작했다.구승훈은 송유라 꿈을 이루는 걸 당연히 막을 리 없었다.막지 않을뿐더러 온 힘을 다해 도울 것이다.그게 아니면 송유라가 귀국하자마자 바로 에비뉴 주얼리 광고를 줄 리가 없었다.결국 구승훈에게 강하리는 송유라와 비길 수 없는 존재였다.그녀 말이 맞을 수도 있다. 구승훈에게 강하리는 꿈도 가질 수 없는 사람이다.구승훈의 안색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강하리의 말에 그도 마음이 착잡해졌기 때문이다.사실 그는 그녀가 도대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다.구승훈은 자신의 여인이 얌전하게 그의 옆에 붙어있기를 바랐다.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구승훈이 강하리에게 많이 잘못한 것처럼 보였다.방 안은 무서우리만큼 조용했다. 강하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자료에 몰두했다.구승훈은 자지도 않았고 떠날 생각도 없어 보였다.그는 침대에 앉아 담배를 문 채 강하리를 뚫어져라 쳐다봤다.분명 이렇게 여려 보이는데 왜 이렇게 고집이 센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하지만 우스운 건 요즘 구승훈도 이 여자를 딱히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오늘 주해찬 옆에서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고도 그냥 혼자서 조금 화가 났을 뿐이다.그는 담배를 한 모금 빨더니 천천히 연기를 뱉어냈다.그러더니 담요를 가져와 강하리 옆에 던져줬다.“써. 병들면 힘든 건 너야.”강하리가 하던 동작을 멈추더니 시선을 아래로 늘어트리고는 말했다.“고마워요.”한참 후 그녀는 고개를 들어 구승훈을 쳐다봤다.“구 대표님, 혹시 나 좀 도와줄래요?”구승훈은 눈썹을 추켜세우며 말했다.“강 부장, 내 원칙은 잘 알고 있잖아. 도움을 받으려면 자세가 나와야지.”강하리는 당연히 그가 뭘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그녀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구승훈은 바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더니 더 맹렬하게 키스했다.키스가 끝나서야 구승훈
회의는 3시간 동안 지속되었다.강하리가 통역실에서 나오자 주해찬이 그쪽으로 다가갔다.“내가 그랬잖아. 너는 문제 없을 거라고. 박 교수님도 오전 내내 칭찬하셨어.”강하리가 웃으며 말했다.“사실 하는 내내 손에 진땀이 나더라고요. 무슨 문제 생기면 어떡하나 걱정했어요.”“그냥 오래 쉬어서 그래. 그 대단한 실력이 묻힌 거지.”강하리가 시선을 아래로 늘어트리며 웃었다.“오래 쉰 건 맞아요. 다행히 지금 다시 시작했잖아요. 시작만 하면 어느 때든 늦지 않아요.”주해찬이 눈썹을 추켜세우더니 말했다.“그래, 맞아. 실력이 있으니까 언제 시작해도 늦은 건 아니야.”둘은 나란히 밖으로 향했다.대회장 입구에 도착하자 마침 회의를 끝내고 나오는 사람들과 마주쳤다.강하리는 예의상 옆으로 물러섰다. 그때 누군가 그녀 앞에 멈춰 섰다.강하리가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었고 날카로운 눈동자와 마주했다.얼마 전 새로 부임한 외교부 장관 진태형이었다.강하리가 우러러보는 사람이기도 했다.진태형은 날카롭지만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강하리를 바라봤다. 강하리는 그런 눈빛이 어딘가 부담스러웠다.주해찬이 나서서 소개했다.“장관님, 이분이 앞서 제가 말씀드린 강하리 씨입니다.”진태형은 강하리를 아래위로 훑었다.하지만 그 눈은 마치 그녀를 통해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눈빛은 그리움으로 가득했다.“강하리 씨, 안녕하세요. 실례지만 혹시 심미현 씨를 아시나요?”강하리는 이 물음에 잠깐 멍해졌다.그러더니 고개를 흔들었다.“죄송합니다. 처음 듣는 분입니다.”진태형은 왠지 어딘가 실망한 듯한 눈빛이었다.하지만 이내 다시 표정을 정리하고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주해찬 씨 말로는 언어에 천재적인 재능이 있다고 하던데요?”강하리가 웃으며 말했다.“그냥 좋아할 뿐입니다.”진태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하리의 얼굴을 쳐다보는 눈빛에서 여전히 그리움이 느껴졌다.“앞으로 주해찬 씨를 따라 외교부에 와서 자주 관람해도 됩니다.”강하리가 고개를
구승훈의 미간이 순간 구겨졌다.“확실해?”강하리의 안색은 아직도 조금 창백했다.“네, 확실해요.”앞서 두 번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오늘은 진짜 착각이 아니었다.“언제부터야?”“요 며칠요.”구승훈이 실눈을 뜨고는 긴 손가락으로 강하리의 턱을 들어 올렸다.“전에 어머니와 원수 진 사람 아니야?”강하리가 머뭇거리더니 대답했다.“그런가 봐요.”사실 그녀도 확정할 수는 없었다.하지만 송동혁과 장진영을 빼고 딱히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다.“노진우 붙여줄게.”노진우는 구승훈의 곁을 지키는 수행 보디가드였다.강하리는 입을 오므리고 고개를 끄덕였다.구승훈의 강하리의 볼을 꼬집더니 말했다.“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강하리는 아직도 마음이 불안하긴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구승훈과 강하리가 가고 까만 세단 한 대가 길가에 멈춰 섰다.운전자는 진용철, 얼굴에 칼을 맞은 흉터가 나 있는 자였다. 구승현은 누구에게 맞은 듯 얼굴이 찢어져 있었다. 뒷좌석에 앉은 사람은 송유라였다.송유라는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다.“내가 빨리 움직이라고 했죠. 뭉그적거리더니 이제 어떡할 거예요? 병신같이 납치하기도 전에 들켜요?”진용철이 험악하게 말했다.“말은 쉽게 하시는데, 벌건 대낮에 사람 납치하는 게 어디 쉬운 줄 알아요? 그렇게 쉬우면 직접 하시든지요.”송유라가 오만하게 말했다.“어디서 언성을 높여요?”송유라는 망나니 주제에 자기 앞에 나타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구승현이 혀를 끌끌 차더니 말했다.“유라 씨, 그만해요. 이 일은 유라 씨가 먼저 우리를 찾아와 도모한 거잖아요. 직접 나섰다가 승훈이 형한테는 들킬까 봐 무서우면서 우리는 말 잘 듣는 개가 되어줬으면 하고, 그게 어떻게 가능해요? 우리를 찾아왔으면 어떻게 하는지는 우리가 결정해요. 저 여자가 죽기를 바란다면서요. 제가 어떻게든 성공하면 되죠.”송유라는 구승현을 노려보며 말했다.“약속 꼭 지켜야 할 거예요.”이렇게 말하더니 선글라스를 끼고 차에서 내렸다.송유라가
그때 구승훈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무슨 일이야?”“엄마가 위급하대요.”강하리는 말투는 차분했지만 목소리가 떨렸다.구승훈의 안색도 따라서 굳어졌다.“데려다줄게.”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병원에서 도착해보니 정서원은 아직도 응급 처치 중이었다. 의사는 그녀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말하며 서류를 건네주었다.강하리는 서류에 사인하는데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구승훈이 옆에서 손을 잡아줘서야 그녀는 간신히 이름 석 자를 적었다.서류를 다시 의사에게 건네주고 강하리는 붉어진 눈시울로 옆에 앉아 있었다.구승훈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걱정하지 마. 아무 일 없을 거야.”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머릿속이 하얬다.그때 구승훈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익숙한 벨소리에 강하리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구승훈은 그런 그녀를 힐끔 쳐다보더니 한쪽으로 걸어가 전화를 받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구승훈은 어두운 표정으로 걸어왔다.“유라가 사생팬 때문에 다쳤대. 가봐야 할 것 같아.”강하리는 주먹을 꼭 쥐었지만 눈물이 차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애써 흐르지 않게 참으며 물었다.“꼭 가야 해요?”구승훈의 미간이 순간 구겨졌다.“진우한테 지금 바로 오라고 할게. 얌전히 있어.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그는 이렇게 말하더니 아무 미련 없이 밖으로 걸어갔다.강하리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목구멍에 뭐가 걸린 듯 숨을 쉴 수가 없었다.얼마나 지났을까, 그녀는 가슴을 가득 메운 씁쓸함을 겨우 삼키며 눈길을 돌려 그가 사라진 쪽을 외면했다.그 뒤로 한 시간, 그녀는 이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른다.많은 생각을 한 것 같지만 또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불러서야 그녀는 정서원이 생명에는 지장이 없고 중환자실로 옮겨갔다는 걸 알게 되었다.강하리는 힘이 쏙 빠진 몸을 이끌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몸을 가누지 못해 살짝 비틀거리는데 누군가 옆에서 잡아줬다.그녀는 그제야 노진우가 어느새 도착했음을 알았다.“
구승훈은 휴대폰 메시지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밤에 보상해 줄래?]손연지가 왔다며 허튼수작 부리지 말라고 답장하려던 찰나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고 안예서의 초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큰일 났어요.”강하리는 잠시 멈칫했다.“뭔데, 천천히 얘기해 봐.”“오늘 아침 일찍 우리 회사 홍보 사이트가 해킹됐는데 사이트에 온통 대표님이 스폰 받았다는 이상한 댓글이 가득해요.”안예서는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고 강하리는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알겠어.”전화를 끊고 회사 사이트에 들어가니 그녀의 눈에 온통 적나라한 욕설들이 가득 들어왔다.스폰을 받았다는 사람도 있고 몸을 대주고 높은 자리로 올라갔다는 말도 있었다.심지어 구승훈과 송유라 관계를 그녀가 망쳤다는 사람도 있었다.송유라가 세상을 떠난 지 거의 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녀의 팬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고 지금 JM의 사이트에도 그들이 가득했다.[내연녀는 내연녀지. 뭐라 해도 해명하지 못해.][그냥 내연녀도 아니고 몸 팔아서 JM 파트너 자리를 꿰찼는데 역겹지도 않아?][JM은 유엔 산하의 번역 회사인데 저런 사람이 대표야?][허, 어떻게 그 자리로 올라갔는지 누가 알겠어. 또 유엔에 어느 높으신 분을 모셨겠지.]강하리는 댓글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휴대폰을 쥐고 있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해버렸다.심호흡하고 안으로 들어가 손연지에게 설명한 뒤 회사로 차를 몰고 가기까지 얼마나 걸렸는지 모르겠다.차 안에서 핸들을 잡은 강하리는 문득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이번에도 누가 자신을 노린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어제의 사건은 이미 지나간 일이고 나머지는 진태형의 해명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보아하니 상대는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둘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회사에 도착하자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느꼈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곧장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꼭대기 층에 도착하자 안예서가 반갑게 맞이했다.“대표님, 괜찮으세요?”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하리는 차 안에서 잠든 손연지를 바라보다가 노민우의 전화를 받았고 노민우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불안함이 묻어났다.“강하리 씨, 손연지한테 연락이 왔어요?”“나랑 같이 있는데 무슨 일 있어요?”노민우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지금은 나랑 얘기하고 싶지 않을 테니까 같이 있어 줘요.”강하리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결국 어쩔 수 없이 말을 꺼냈다.“노민우 씨, 연지는 잘 우는 사람이 아닌데 내가 공항에 데리러 갔을 때 밤새 운 것 같았어요. 그쪽이 무슨 사정이 있든 연지를 이렇게 울렸으면 납득할 만한 이유를 설명해야 할 거예요.”노민우가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않으면 연성으로 찾아갈 기세로 강하리는 유난히 단호하게 말했다.노민우는 다소 억울했지만 그래도 순순히 답했다.“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손연지한테 다 설명할게요.”강하리는 손연지를 데리고 그녀와 구승훈의 저택으로 향했고 비몽사몽 눈을 뜬 손연지는 눈앞에 가득 찬 리시안셔스와 정원 뒤편에 있는 성처럼 생긴 저택 건물을 보았다.“세상에, 하리야. 여기가 너 사는 곳이야?”강하리는 그녀의 모습에 비로소 살짝 안도했다.“그런 셈이지.”손연지는 차 문을 열고 곧장 저택으로 향했다.위층과 아래층을 몇 번이나 돌아보더니 갑자기 나와서 강하리를 껴안았다.“자기, 날 먹여 살려줘. 마침 나도 일자리 잃었는데.”강하리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옅어졌다.“일자리를 잃었다니 무슨 말이야?”손연지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들떴던 마음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우울한 한숨을 내쉬었다. “직업도 없고 일자리도 잃었어. 부모님도 나 때문에 창피당했고.”강하리는 미간을 찌푸렸고 손연지가 자세히 말하지 않았지만 대충 짐작할 수 있었기에 다가가 그녀를 안아주었다.“괜찮아, 내가 복수해 줄게.”손연지는 코끝이 시큰거렸다.“하리야, 역시 너밖에 없어. 개자식들은 하나같이 나쁜 놈들이야!”강하리는 손연지를 껴안고 위로하듯 속삭였다.더 이상 구체적인 질문은 하지 않은 채 객실로 데려가 샤워할 수 있도록 욕조
구승훈은 잠든 강하리의 얼굴을 보며 참지 못하고 다가가 입술에 뽀뽀했다.“자기야, 미안해.”강하리의 속눈썹이 두 번 파르르 떨리더니 굳게 감고 있던 그녀의 눈가가 시큰거렸다.구승훈은 오늘도 잠 못 이루는 밤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강하리를 껴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들 줄이야.겨우 반쯤 잠이 들었을 때 문득 강하리의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구승훈, 나도 당신을 지켜주고 싶어.”구승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그대로 꿈속으로 빠져들어 갔다.다음 날 아침, 강하리가 잠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손연지였다.슬쩍 확인한 강하리가 서둘러 전화기를 집어 들자 저쪽에서 손연지의 코 막힌 소리가 들려왔다.“하리야, 이틀만 거기로 놀러 가도 돼?”강하리는 당황했다.“당연하지. 언제 오는데? 내가 데리러 갈게.”“나 지금 B시에 있어.”강하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구승훈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고통스러운 얼굴로 몸을 움츠렸다.“자기야, 방금 남은 인생의 행복을 자기 손으로 망칠 뻔한 거 알아?”강하리의 얼굴이 순간 빨개졌다.“구승훈, 괜찮아?”구승훈이 그녀의 턱을 잡고 입술을 깨물었다.“안 괜찮아. 강 대표님이 호 불어줘.”농담하는 걸 보니 괜찮나 보다.“그러게 누가 함부로 뻗으래.”구승훈은 웃으며 그녀의 귀로 다가갔다.“오늘 밤 다리로 해볼까?”강하리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좀 진지하게 굴 수는 없어?”구승훈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당당하게 말했다.“망가졌는지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어?”강하리는 손연지 때문에 그와 더 실랑이를 벌이기 싫어 침대에서 일어나 발코니로 향했다.“손연지, 너 지금 어디 있어?”“아침부터 내 앞에서 애정행각 벌이는 건 좀 아니지 않니?”농담이었지만 손연지의 기분은 여전히 좋지 않았기에 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렸다.“어디야, 내가 데리러 갈게.” 손연지가 강하리에게 위치를 보냈고 강하리는 서둘러 샤워를 마친 뒤 문을 나섰다.구승훈이 그녀와 동행하려는데 구승재가 갑자기 회사
구승훈의 목울대가 몇 번이나 꿈틀거리다가 겨우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 강하리의 손가락을 잡은 채 다소 씁쓸하게 웃었다.“온실 속 화초가 아니야.”소중한 보물이다.이미 자신 때문에 너무 많은 고생을 한 그녀였기에 더는 그녀가 걱정하지 않기를 바랐고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도 더더욱 원치 않았다.그저 그녀가 밝게만 지내길 바랐다. 여초연도, 구동근도, 자신의 몸도 더는 그녀의 마음을 다치게 할 순 없었다.“자기야, 날 믿는다면 조금만 더 기다려줘. 잠깐만 기다리면 결과가 어떻게 되든 내가 전부 다 솔직하게 말할게. 알았지?”조금만 더 시간을 줘서 정상으로 돌아가거나 완전히 포기하게 됐을 때 모든 걸 이 여자에게 말할 거라고 다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미소를 지었다.“알았어.”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옆으로 걸어갔고 구승훈은 다소 우울한 미소를 지었다.그는 강하리가 여전히 속상해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구승훈은 안도하는 동시에 마음이 점점 더 씁쓸해졌다.여초연이 대체 얼마나 자신을 미워하는지 모르겠다.어쩌면 그녀의 말처럼 자신이 여초연의 인생을 망쳤으니 본인도 똑같게 망가뜨리겠다고 생각하는 걸지도.하지만 구승훈은 애초에 원하지도 않았고 이대로 그녀의 손에 망가질 생각도 없었다.그녀가 그를 낳은 이상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다.시선을 내린 구승훈이 노민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치료하는 데 협조할게.]노민준은 곧장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이 발코니로 가서 전화를 받으니 그의 무기력한 웃음소리가 들렸다.“잘 생각했어. 희망이 없는 건 아니야.”구승훈은 무심하게 대꾸했고 노민준은 약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였다.웬일로 구승훈이 가만히 듣고만 있으니 전화를 끊기 전 노민준이 갑자기 물었다.“왜 갑자기 생각이 바뀐 거야?”구승훈은 방에서 침대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입꼬리가 무의식적으로 올라갔다.“힘들게 얻은 지금의 일상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겠지.”전화를 끊고 구
아직 해결되지 않은 갈등이 남아 있어도 기꺼이 노력해 보고 싶었다.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강하리의 말에 심문석은 한심하다는 말만 되풀이했지만 저도 모르게 얼굴엔 웃음이 번졌고 벌써 결혼식 장소까지 고심하고 있었다.“너희 둘이 또 아이를 낳으면 그땐 할아버지가 키우마.”강하리의 표정이 잠깐 굳어졌다가 아무렇지 않은 듯 무심하게 대꾸하며 넘어갔다.식사를 마치고 떠나려는 구승훈을 보며 강하리가 물었다.“여기 안 있을 거야?”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나 보내기 싫어?”입술을 달싹이며 빤히 상대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그의 눈빛에서 그동안 줄곧 그가 회피하던 답을 찾으려는 듯했다.비록 구승훈은 회사를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빠서 그런 거라고 했지만 강하리는 이 남자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아무리 바빠도 이렇게까지 욕구를 참는 사람이 아니었고 관계를 갖지 않아도 늘 그녀를 탐하는 사람이었다.하지만 요 며칠 그녀가 약에 취했을 때를 제외하고 말만 능글맞게 할 뿐이었다.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구승훈을 바라보다가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나랑 연정이가 같이 가도 돼?”멈칫한 구승훈이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더 원하는 거야?”강하리가 웃었다.“응.”구승훈의 미소가 잠시 굳어졌고 그가 거절하기도 전에 강하리의 말이 다시 들렸다.“방금 그런 일을 겪고 나니까 좀 무서워. 구승훈, 여기 남던지 내가 따라갈게.”강하리가 말을 마치며 허리를 감싸자 구승훈의 목울대가 꿈틀거리며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이걸 어떻게 거절하나.구승훈은 결국 남기로 했고 그가 이곳에 머물자 백아영은 연정이를 자신의 방으로 곧장 데리고 갔다.구승훈이 나가서 노민준에게 연락하고 돌아왔을 때 강하리는 이미 샤워를 끝낸 뒤였다.얇은 잠옷만 입고 있는 몸에는 구승훈이 새긴 흔적이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있었다.구승훈은 문 앞에 서서 가슴에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몸이 견딜 수 있겠어?”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화장대 거울로 가서
구승훈은 걸음을 멈칫하며 뒤돌아 밖을 내다보았다.밖에서는 여전히 이정숙이 진시연의 눈물을 닦아주며 화가 잔뜩 난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구승훈은 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으로 나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피어오르는 연기 속에 그는 고개를 숙여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았다.가상의 번호로 전송된 사진은 다름 아닌 강하리와 주해찬이 방에서 포옹하는 모습을 찍은 것이었다.사진 한 장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구승훈은 콧방귀를 뀌며 전화를 걸었다.“나문빈 씨, 가상 번호 위치 좀 확인해 줘요.”나문빈은 혀를 찼다.“둘이 날 노예처럼 부려 먹기로 작정한 겁니까?”얼마 전 임명우와의 계약 때문에 화가 난 강하리는 그를 남미로 발령 보내 시장 개척에 앞장서도록 했고 며칠 동안 그는 바빠서 피를 토할 지경인데 이젠 구승훈까지 못살게 굴고 있었다.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내 아내를 화나게 했습니까?”나문빈은 즉시 입을 다물었다. 임명우가 특별히 강하리와 만나야한다는 조건을 걸었으니 분명 딴마음이 있다는 건데 이걸 구승훈이 알게 되면 그에게 어떤 날벼락이 떨어질지 모른다.“흠, 그 번호 보내요. 이런 작은 일은 구 대표님께서 직접 연락할 필요 없이 앞으로 비서 통해서 연락해 주시면 됩니다.”그렇게 말한 뒤 나문빈은 서둘러 전화를 끊었고 구승훈은 나문빈과의 통화를 마친 뒤 고개를 들어 진시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마침 고개를 돌린 진시연의 두 눈엔 억울함이 가득 차 있었고 구승훈의 눈빛은 점점 더 싸늘해졌다.진시연이 시선을 거두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얼굴에 남아있던 서글픈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졌다.누구나 소유욕이 있다.특히 구승훈 같은 남자는 자기 여자가 다른 남자와 껴안고 있는 걸 용납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지금은 드러내지 않더라도 이 일은 그의 마음속 가시로 박히게 될 것이고 진시연은 이 가시가 뿌리를 내리고 썩기만을 기다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진씨 가문 생일 잔치에서 벌어진 소동은 B시 전역에 퍼졌다.심씨 가문 사람들도 자연
“여사님, 못 때린 걸 다행으로 생각하세요. 아니면 지금쯤 구급차 부르셔야 했을 거예요. 제 주먹 맛보고 싶지는 않으시겠죠?”이정숙은 너무 화가 나서 눈이 뒤집혔다.“구승훈, 언제부터 네가 우리 진씨 가문 일에 참견했어?”구승훈은 혀를 차며 강하리의 손을 잡아당겨 이정숙 앞에 내밀었다.“보셨죠? 결혼반지. 강하리는 이제부터 제 약혼녀입니다.”구승훈의 말에 이정숙이 당황했고 옆에 있던 진시연은 우는 것도 잊은 채 얼굴이 하얗게 변해갔다.이정숙은 구승훈에게 말이 통하지 않자 다시 강하리를 돌아보았다.“강하리, 난 네 할머니야!”강하리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나한테 약이나 먹이는 할머니 따위 둔 적 없어요.”이정숙은 깜짝 놀라며 진시연을 흘끗 쳐다보았고 진시연이 달려와서 이정숙의 앞을 막았다.“하리 씨, 어떻게 할머니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어요?”강하리가 비웃었다.“진시연 씨 대신 죄도 뒤집어쓰는데 나는 말도 한 마디 못 하나요?”진시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하리 씨, 지금 나 의심하는 거예요?”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피식 웃었다.“아빠도 날 의심하고 하리 씨도 날 의심하네요. 두 사람은 진짜 부녀 사이고 전 그저 사랑하고 돌봐줄 사람이 없는 고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요. 그냥 나를 진씨 가문에서 쫓아내고 싶은 거죠? 내가 나갈게요.”이정숙은 그 말에 서둘러 진시연을 껴안았다.“시연아, 그런 말 하지 마.”강하리는 눈꼴신 광경을 보고 싶지 않아 두 사람을 지나쳐 곧장 저택으로 향했다.“누구든 가만 안 둬요.”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진시연을 돌아보았다.“그리고 진시연 씨, 앞으로 내 남자한테서 떨어져요. 매번 남의 약혼자한테 들러붙는데 내연녀라도 되고 싶은 거예요?”진시연의 얼굴이 창백했다.“하리 씨, 아니에요. 난 그저 F대륙에서 힘든 시기를 같이 보낸 사람이라 구승훈 씨한테 고마울 뿐이에요. 하리 씨는 이 정도 일도 이해 못 해주는 건가요?”강하리가 피식 웃었다.“미안한데 난
경찰서에서 나온 강하리는 구승훈이 차 옆에 서서 통화하는 모습을 보았다.남자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고 차갑고 무거운 기운이 그를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강하리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원래는 구승훈이 통화를 끝낼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가가려고 했는데 구승훈은 그녀의 시선을 감지한 듯 발걸음이 멈춤과 동시에 이쪽을 바라보았다.남자의 몸에서 느껴지던 차갑고 무거운 기운이 녹아내리는 듯했고 입가에 살짝 미소가 번졌다.그는 상대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네고 전화를 끊은 뒤 이쪽으로 걸어왔다.“어떻게 됐어?”입술을 달싹이던 강하리는 구승훈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남자의 질문에 입가에 차오른 말을 다시 삼켰다.“별것 없었어. 일단 돌아가자.”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아직도 마음이 불편해?”강하리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처음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정말 괜찮았다.이젠 더 이상 주해찬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고 이 사건 이후로 그에게 빚진 건 사라졌다고 생각했다.사실 이건 좋은 일이었다.적어도 더 이상 구승훈에게 미안할 행동은 하지 않아도 되니까.구승훈이 손가락으로 살며시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그럼 앞으로 다른 남자 생각 그만해. 네 남편 질투해.”강하리는 고개를 들어 그를 노려보았다.“앞으로 다른 여자 좀 그만 끌어들일래?”구승훈은 살짝 멈칫하다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질투해?”강하리는 손을 내밀어 문을 열고 차에 탔다.구승훈은 시선을 내린 채 웃다가 휴대폰의 통화 기록을 흘끗 훑어보고는 노민준의 이름을 삭제한 뒤 강하리를 따라 차에 탔다.그대로 차를 몰고 심씨 가문으로 돌아가는데 들어가기 직전 누군가에 의해 앞이 가로막혔다.화려한 옷을 갈아입지 않은 이정숙이 굳어진 얼굴과 분노에 가득 찬 눈빛으로 심씨 가문 입구에 서 있었고 그 옆에는 진시연이 있었다.진시연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이정숙은 눈물을 계속 닦아주었다.두 사람을 본 구승훈의 표정도 굳어지며 위로하듯 강하리의 손을 꽉 잡
사실 그동안 주해찬이 달라졌다는 건 느끼고 있었다.온화하고 따뜻했던 남자가 근래 왠지 모르게 강압적인 집착을 보였다.구승훈을 좋아하지 말라던 말도, 자기가 낫지 않으면 곁에 계속 있어 줄 거냐고 물었던 것도...다만 강하리는 그를 나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기에 다리를 다쳐서 마음이 불안한 것이라고 여겼다.강하리는 손을 꽉 말아쥐었다.“무슨 오해가 있었던 건 아닐까?”피식 웃은 구승훈이 씁쓸함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나쁜 놈이란 걸 인정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그렇게 말한 후 그는 강하리를 밖으로 끌어당겼다.“어디 가?”“그 자식 만나러.”강하리가 걸음을 멈칫했지만 구승훈은 그녀를 안고 차에 태웠다.“가서 네 선배가 어떤 사람인지 만나봐.”강하리는 심호흡하고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언젠간 주해찬을 만나러 가야 했으니까.가는 길에 강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구승훈은 마음이 괴로웠다.고작 주해찬 때문에 이렇게 괴로워할 가치가 있는 걸까.차가 경찰서 앞에 멈춰 선 뒤 구승훈이 갑자기 강하리를 끌어당기자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다.“왜 그래?”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가락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이따가 꼭 왼손 보여줘.”“...”주해찬은 강하리만 기다린 것처럼 보였고 강하리는 유치장 문 앞에 서서 낮게 불렀다.“선배.”주해찬은 강하리를 바라보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하리야, 그래도 날 보러 와줘서 기쁘네.”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주해찬을 바라보았고 가뜩이나 조용했던 공간에 적막이 감돌았다.문득 주해찬의 시선이 강하리의 손으로 향했다.구승훈의 말처럼 한심하게 일부러 왼손을 보여주려던 건 아니지만 손가락에 낀 반지는 여전히 주해찬의 눈에 들어왔다.그가 피식 웃었다.“그 사람이랑 결혼해?”강하리는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이렇게 되물었다.“왜 그랬어요?”주해찬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면서도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그가 대답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을 때 주해찬이 쓴웃음을 지으며 갑자기 입을 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