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리가 아파트를 빠져나왔을 때는 눈이 가득 흩날리고 있었지만 강하리의 시야에는 아까 전 자신의 말에 어두워진 구승훈의 표정만이 있었다.그런 말을 하면 기분을 잡치게 할 거란 건 짐작하고 있었지만, 결국 입 밖으로 꺼내고 말았다.만약 이게 언젠가 사라질 감정이라면 더 이상 추호의 기대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깊게 숨을 들이쉰 강하리가 숨을 내쉬어 머릿속의 잡념을 지우고는 불이 켜져 있는 아파트를 보고 쓰게 웃으며 돌아갔다.그 시각, 구승훈은 아직 차가움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픽 웃은 구승훈의 머릿속에는 강하리의 말이 아직 맴돌고 있었다.자신과의 만남이 강하리에게는 그저 상사에게 맞춰 주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구승훈이 잡념을 쉬이 떨치지 못했다.‘계약이 끝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나 보지?’평소였다면 이런 상황에서도 이성을 유지하는 강하리에게 감탄했을 텐데, 지금은 그 이성이 너무나도 성가셨다.꼭 구승훈과의 만남이 강하리가 행복과 멀어지게 하는 것 같았다.하지만 구승훈이 강하리를 붙잡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강하리의 말대로 구승훈이 굳이 강하리를 고집할 이유는 없었다. 그가 원한다면 여자가 줄을 설 테니.강하리는 매번 자신이 정한 한계선을 비웃듯 넘었다.이 관계는 서로 원해서 유지되는 줄 알았는데, 강하리에게는 통하지 않으니 매번 강요만 하게 됐다.피식 웃고 담배 한 대를 태운 구승훈은 지금 이런 통제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극도로 싫어했다. 특히 고작 애인 때문에 이러는 것은 구승훈의 상식 한참 밖의 일이었다.결국 구승훈은 해탈의 경지에 올라 강하리가 다른 남자를 함부로 만나지 않고 본인 몸과 마음만 잘 챙긴다면 다른 건 딱히 상관없었다.담배를 다 피우고 옷을 갈아입은 구승훈도 아파트를 벗어났다....다음 날, 강하리는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을 기다린 듯한 모양새의 구승재를 마주쳤다.강하리를 본 구승재가 재빠르게 달려왔다."강 부장님, 어제 형이 김주한 씨 반 죽여놓은
강하리가 아파트를 빠져나왔을 때는 눈이 가득 흩날리고 있었지만 강하리의 시야에는 아까 전 자신의 말에 어두워진 구승훈의 표정만이 있었다.그런 말을 하면 기분을 잡치게 할 거란 건 짐작하고 있었지만, 결국 입 밖으로 꺼내고 말았다.만약 이게 언젠가 사라질 감정이라면 더 이상 기대는 추호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깊게 숨을 들이쉰 강하리가 숨을 내쉬어 머릿속의 잡념을 지우고는 불이 켜져 있는 아파트를 보고 쓰게 웃으며 돌아갔다.그 시각, 구승훈은 아직 차가움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픽 웃은 구승훈의 머릿속에는 강하리의 말이 아직 맴돌고 있었다.자신과의 만남이 강하리에게는 그저 상사에게 맞춰 주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구승훈이 잡념을 쉬이 떨치지 못했다.‘계약이 끝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나 보지?’평소였다면 이런 상황에서도 이성을 유지하는 강하리에게 감탄했을 텐데, 지금은 그 이성이 너무나도 성가셨다.꼭 구승훈과의 만남이 강하리가 행복과 멀어지게 하는 것 같았다.하지만 구승훈이 강하리를 붙잡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강하리의 말대로 구승훈이 굳이 강하리를 고집할 이유는 없었다. 그가 원한다면 여자가 줄을 설 테니.강하리는 매번 자신이 정한 한계선을 비웃듯 넘었다.이 관계는 서로 원해서 유지되는 줄 알았는데, 강하리에게는 통하지 않으니 매번 강요만 하게 됐다.피식 웃고 담배 한 대를 태운 구승훈은 지금 이런 통제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극도로 싫어했다. 특히 고작 애인 때문에 이러는 것은 구승훈의 상식 한참 밖의 일이었다.결국 구승훈은 해탈의 경지에 올라 강하리가 다른 남자를 함부로 만나지 않고 본인 몸과 마음만 잘 챙긴다면 다른 건 딱히 상관없었다.담배를 다 피우고 옷을 갈아입은 구승훈도 아파트를 벗어났다....다음 날, 강하리는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을 기다린 듯한 모양새의 구승재를 마주쳤다.강하리를 본 구승재가 재빠르게 달려왔다."강 부장님, 어제 형이 김주한 씨 반 죽여놓은
나가는 구승훈의 뒷모습을 보던 송유라가 표정을 굳혔고 그와 함께 안현우가 혀를 차자 구승재가 웃었다."왜요? 이번에는 또 강 부장님의 뭘 헐뜯으시려고요?"그에 안현우도 마주 웃었다."승재 씨, 대체 그 사람이 뭘 해 줬길래 이렇게 싸고돌아요?""뭘 해 준 건 아니고, 제 형수님이 되어야 할 사람이니까요."구승재의 말에 송유라의 표정이 한없이 구겨졌다."승재 씨,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 신분으로 승재 씨 가문이라니요~""유라 씨, 형 결혼은 절대 남이 관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그 왜, 저번에 약혼식도 바로 취소해 버린 거 기억 안 나세요?"저번 일을 떠올린 송유라가 이를 부득부득 갈았지만 구승재는 멈추지 않았다."게다가 누구한테 분명 저희 형은 원하지 않으면 절대 선택을 번복할 사람이 아니라고 당부했는데도 떠났으면서 그 누구는 이제 와서 또 붙잡네요."송유라의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송유라가 어디 가서 이런 말을 들을 사람은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나온 송유라가 구승재를 노려본 후에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샤워를 마친 강하리가 어지러움을 느꼈다. 이유는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밖에 너무 오래 서 있어서 감기에 걸린 것일 것이다.유산한 뒤로부터 몸이 허약해진 게 느껴질 때마다 강하리는 그저 쓴웃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따뜻한 물 한 잔을 마시고 누우려던 참에 핸드폰이 울려 발신인을 확인한 강하리가 잠시 고민하더니 결국 받았다."대표님."가볍게 대답한 구승훈이 한참을 침묵하더니 겨우 한 마디 내뱉었다."강주시야?"창문을 가득 채운 시린 빗방울 너머 폭죽을 보며 천천히 대답했다."연지가 고른 장소예요.""올 때 전화해. 데리러 갈 테니까."핸드폰을 쥔 손에 힘을 준 강하리가 김주한의 일에 대해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입을 열지 못한 사이, 송유라의 소리가 들렸다."오빠, 저 사람들이 저 괴롭혀요..."그에 감사 인사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다시 들어갔다."
강하리가 놀라 굳은 몸으로 구승훈을 바라봤다."어떻게 여기에..."미간을 살짝 좁힌 구승훈이 강하리의 이마에 손을 올려 온도를 가늠했다."아직 열나네. 옷 갈아입어, 병원 가게."강하리의 가슴속에 또 알 수 없는 감정이 피어오르자 눈을 맞추지 못하고 살짝 웃어 보였다."약 몇 번만 더 먹으면 나을 거예요.""강하리, 말 좀 듣고 얼른 옷 갈아입어. 아니면 내가 갈아입혀 줘?"강하리의 손목을 낚아챈 채 말했다.그러자 강하리가 손아귀를 벗어나려 발버둥 치면서 코끝이 찡한 느낌을 애써 모르는 척했다."승훈 씨, 여긴 왜 오셨어요?"강하리 본인도 자기가 왜 이러는지 몰랐지만 아마 아플 때 곁에 아무도 없어서 서러운 듯했다. 구승훈을 보고 어쩐지 눈물이 차오를 것 같았으니.하지만 더 의문인 건 며칠 전 그 일을 겪고도 한달음에 달려온 구승훈의 행동이었다.그 생각을 고스란히 얼굴에 띄운 강하리를 보던 구승훈이 웃었다."왜. 여긴 네 구역이니까 난 들어오면 안 되나? 그렇다고 여기서 죽게 둘 순 없잖아."강하리가 조금 젖은 눈을 살짝 문지르더니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진짜 괜찮아요."들은 체도 안 한 구승훈이 캐리어에서 옷을 꺼내 건넸다."빨리 입어. 병원 가는 게 무슨 대수라고."남은 손으로는 강하리의 붉어진 눈꼬리를 문지른 채였다."말 좀 들어."강하리가 깊게 심호흡하며 벅차오르는 감정을 제어하고 갈아입으러 자리를 피했다.택시를 잡아 병원에 도착한 뒤 진찰에 링거까지 맞으니 어느덧 점심이었다."아침에 밥은 먹었어?"강하리가 고개를 젓자 뒷목을 살짝 꼬집었다."나 안 왔으면 호텔에서 죽어 갈 생각이었지, 아주."찍소리 못하는 강하리에 구승훈이 다시 입을 열었다."뭐 먹을래."강하리가 눈을 내리깔았다."팥죽이요."잠시 멈칫한 구승훈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팥죽을 사 와서는 오른손에 링거를 꽂은 강하리를 대신해 숟가락을 들고 죽을 먹여 줬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하리가 별말 없이 죽을 받아먹었다."강 부장, 이래
자세히 말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안 강하리가 더 이상 묻지 않고 눈을 감자 구승훈이 강하리의 턱을 잡아 입 맞췄다.질척하게 이어지는 키스는 전과 많이 달랐다. 훨씬 더 다정한...당황한 강하리가 어떻게 해 보기도 전에 구승훈이 강하리의 위로 올라탔다."승훈 씨, 저...""쉿. 더 움직이면 여기서 안 끝나."어느새 갈라진 목소리가 강하리의 귀를 파고들며 맞닿은 아래가 여실히 느껴졌다.반사적으로 몸을 굳힌 강하리를 보고 구승훈이 웃었다."그렇게 하기 싫어?""전 환자잖아요."구승훈이 밤에 얼마나 끈질긴지는 강하리가 잘 알았다. 그러니 이 상태로는 절대 받아낼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물론 구승훈도 제아무리 짐승 같다 해도 환자를 상대로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몇 번 더 이어진 키스를 끝내고 나서 구승훈은 화장실로 들어가 반 시간이 지나서야 시원한 공기와 함께 나왔다.그러고는 이불 속으로 들어가 몸을 충분히 데운 다음 강하리를 다시 안았다....다음날 아침, 둘은 함께 연성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라탔다.착륙 후, 구승훈이 강하리에게 물었다."어디로 갈 거야?"잠시 고민한 강하리가 답했다."월세방이요."무어라 한 소리 할 줄 알았던 구승훈이 조용하니 강하리가 당황한 채로 월세방 앞에 도착해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내리려던 순간이었다.구승훈이 힐끗 쳐다보고는 강하리의 캐리어를 들고 강하리보다 먼저 내렸는데 반대 손에는 자신의 캐리어도 들려 있었다.입을 다물지 못하고 무슨 말을 꺼내려던 순간 구승훈이 한발 빨랐다."강 부장 몸도 안 좋은데 괜히 오라 가라 하면 안 되잖아."미세하게 씰룩이는 입꼬리와 함께 하려던 말도 억누르고 구승훈의 보폭에 맞췄다.함께 집에 발을 들인 순간, 구승훈의 벨소리가 퍼졌다.그 익숙한 벨소리는 무슨 저주라도 걸린 듯 따뜻했던 분위기를 한순간에 지워냈다.구승훈을 슬쩍 쳐다본 강하리가 캐리어를 끌고 안방으로 들어가 딱히 정리는 하지 않고 멍만 때리고 있었는데 문밖에서 구승훈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강하리는 전화를 바로 끊어버렸다.그러고는 간단하게 정리하고 집을 나섰다.병원에 도착하니 간병인이 반갑게 인사했다.“하리 씨, 새해 복 많이 받아요~”강하리도 웃음으로 인사했다. 그러더니 오는 길에 산 과일을 간병인에게 건네주었다.“아주머니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지난 한 해 수고 많으셨어요.”간병인은 과일을 받더니 매우 기뻐했다.“수고는 무슨, 돈을 받았으니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죠.”그러더니 아직 침대에 누워있는 정서원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렇게 또 한해가 지나갔다. 이미 4년째다.이런 나날이 언제 끝날지 아직 모른다. 사실 제일 힘든 건 강하리일 것이다.간병인은 말없이 주전자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강하리에게 자리를 남겨준 것이다.강하리는 침대맡으로 걸어가 정서원의 근육을 한참 안마해 주었다.안마를 해주고 나서야 강하리는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엄마, 새해 복 많이 받아요.”정서원은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기만 할 뿐 아무 반응이 없었다.강하리는 웃으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침대맡에 앉아 곁을 지키다가 나왔다.의외인 건 병원 입구에서 송동혁을 만난 것이었다.3년을 못 봤는데도 단번에 그를 알아본 것도 대단하다고 생각되었다.하지만 떠오른 장면이라곤 3년 전 그녀가 별장 앞에 무릎을 꿇고 있을 때 매정한 남자의 모습뿐이었다.사실 정서원이 그때 기억을 잃긴 했어도 몸에 값비싼 액세서리를 많이 착용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액세서리는 결국 송동혁이 전부 채갔다.결혼하려면 집도 필요하고 돈도 써야 한다는 말에 정서원은 액세서리를 전부 송동혁에게 준 것이었다.3년 전 강하리가 송씨 집안에 찾아갔을 때도 송동혁이 따로 그녀에게 돈을 줄 거라는 기대는 전혀 한 적이 없었다.그냥 송동혁이 정서원에게서 앗아간 액세서리로 바꾼 돈을 돌려받기 위해서였다.그때 송동혁이 이렇게 말했다.“정서원 목숨은 내가 구한 거야. 그 액세서리는 목숨값이고.”“애 지우라는 말 안 들었을 때 이미 죽었어야 할 목숨인데
송동혁은 오래전부터 구씨 가문과 관계를 맺고 싶어 안달 나 있었다.10년 전, 그가 송유라에게 강하리를 가장해 구승훈과 만나게 했을 때부터 모든 걸 계획은 시작된 것이다.하지만 그는 송유라가 그렇게 제멋대로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구승훈의 몸을 얻는 거로는 모자라 구승훈의 마음까지 얻으려 했다.소탐대실이라고 결국 강하리가 어부지리를 보게 된 것이다.강하리가 웃음을 터트렸다.“대표님이 정말 송유라와 결혼하고 싶어 한다면 내가 훼방을 놓는다 해도 밀고 나갔겠죠.”허를 찌르는 강하리의 말에 송동혁은 말문이 막혔다.그는 송유라가 돌아오기만 하면 구승훈이 바로 송유라를 다시 받아줄 것이라고 생각했다.송유라가 돌아오자마자 구승훈이 에비뉴 주얼리의 광고를 준 것이 제일 확실한 증거였다.하여 송씨 집안은 구씨 집안과 약혼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구승훈은 약혼은커녕 송유라와 화해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송동혁이 콧방귀를 뀌었다.“구승훈이 우리 유라랑 결혼하는 건 시간 문제야. 하리야, 눈치 깠으면 얼른 구승훈을 떠나. 아니면 위에 누워있는 여자든 너든 좋게 끝나지는 않을 거야.”송동혁은 이렇게 말하더니 더는 입씨름을 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강하리는 그 자리에 선 채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손톱이 살을 뚫고 들어갔다.그녀가 제일 미워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송동혁일 것이다.바닥에서 치고 올라오기 위해, 자기의 이속을 채우기 위해 송동혁은 자기 처와 자식을 버린 거나 마찬가지였다.정서원은 마음씨가 착해 별로 원망하지 않을지 몰라도 강하리는 자기 신분을 안 그날부터 송동혁을 미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이 남자가 모든 불행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다.강하리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고 길가로 걸어갔다.막차가 아직 끊기기 전이었다.강하리는 버스 정류장에서 서서 사색에 빠졌다.그러다 갑자기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뒤에는 행인들만 보였다.강하리는 입을 앙다문 채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차에서 내리자 주해찬이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선배,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어요?”주해찬은 사실 그녀에게 전화할 때부터 이미 여기에 있었다.“마침 근처에 처리할 일이 있어서.”그러더니 강하리에게 따듯한 밀크티 한잔을 건넸다.“이 밀크티 좋아하는 것 같아서 샀어.”강하리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고마워요.”주해찬의 미소가 더 부드러워졌다.“취향이 변했을까 봐 걱정했는데.”강하리가 웃으며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신정에 본가에 안 내려간 거예요?”“갔지. 오늘 올라온 거야.”사실 이번 회의에 그가 참석할 필요는 없었다.이번에 온 사람은 외교부 수장이었다. 주해찬은 외교부에서 떠오르는 샛별이긴 했지만 이런 회의에 참석하기엔 경력이 부족했다.하지만 저번에 강하리가 돌아설 때 그녀의 기분이 계속 좋지 않아 보였던 게 생각났다.주해찬은 돌아가자마자 알아봤다.그리고 곧 구승훈이 대외로 강하리가 여자 친구라고 인정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것도 모자라 구승준 옆엔 아직 관계를 깨끗이 정리하지 않은 첫사랑도 있었다.이 소식을 들은 주해찬은 걷잡을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렇게 좋은 여자를 왜 아껴주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12월 31일 그날 그녀에게 전화를 하고 싶었지만 혹시 부담스러워할까 봐 내려놓았다. 그러다 마침 오늘 이 핑계를 빌어 다시 그녀를 찾아온 것이었다.솔직히 말해서 그냥 그녀를 만나고 싶어서였다.주해찬은 자료를 강하리에게 건네주었다.강하리는 자료를 받더니 가로등 불빛을 빌어 확인했다.주해찬은 가로등 아래에 선 강하리를 조용히 바라봤다.불빛이 깔끔하고 예쁘장한 얼굴을 비췄고 그 모습이 너무 부드러워 보였다.주해찬은 순간 학창 시절에도 가로등 아래에 선 그녀의 모습을 이렇게 몰래 훔쳐봤던 기억이 떠올랐다.그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한참 침묵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하리야, 구승훈을 떠날 생각은 없어?”자료를 보던 강하리는 뜬금없이 들어온 주해찬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