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승현은 애초부터 구승훈을 못마땅하게 여겼었다. 이 몇 년 동안 구승현은 구씨 가문에서 매우 부지런하고 착실하게 살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구씨 가문 어르신은 항상 구승훈만 중시했다. 구승현이 아무리 노력해도 그 영감탱이는 구승훈에게 눈이 멀기라도 한 듯, 그를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구승현은 몇 번이고 구승훈을 도발했다. 구승훈은 전에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이번에는 갑자기 마음을 모질게 먹고 구승현의 사업을 전부 부숴버렸다.비서 실장은 강하리의 귀에 대고 속닥속닥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한편 강하리는 무관심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구승훈이 구승현에게 불같이 화를 낸 이유가 그녀 때문일 거라 착각하여 김칫국부터 마시는 터무니 없는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속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이때 구승현이 욕설을 퍼붓는 소리가 최상층 전체에 울려 퍼졌다.“구승훈 이 개같은 자식아. 네가 한 짓이 나보다 깨끗하면 얼마나 깨끗하다고, 정말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언젠가는 네 놈을 내 앞에 무릎 꿇리고 빌게 할 거야. 두고 봐!”강하리는 무심한 표정으로 손에 들린 계약서를 들여다봤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사납고 서늘한 눈길이 그녀의 몸에 끈적하게 와닿는 걸 느꼈다.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쳐들었지만, 굳게 닫힌 엘리베이터 문만 눈에 들어왔다.“제가 보기에 대표님은 정말 무정한 분이신 것 같아요. 자기 친형제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건 너무 지나치지 않아요?”비서 실장은 보다 못해 강하리의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하지만 강하리는 입술을 감쳐물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때 사무실에서 구승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어와,강하리.”손에 들려 있던 계약서를 비서 실장에게 건넨 강하리는 구승훈의 사무실 문을 밀고 안으로 걸어갔다. 구승훈은 물티슈로 손을 닦고 있었다. 강하리가 들어 온 것을 본 구승훈은 물티슈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그녀에게 손짓했다.“이리 와 봐.”강하리가
구승훈이 말하는 동시에 셔츠 단추를 풀었다.그에 시선을 빼앗긴 강하리가 그제야 구승훈의 셔츠에 핏자국이 가득한 것을 발견했다.당황한 강하리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구승훈이 벗은 셔츠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바로 욕실에 들어가 버렸다.구승훈이 사라진 뒤에도 강하리의 시선은 여전히 쓰레기통 속의 셔츠에 가 있었다. 그와 동시에 방 안에 피 냄새가 진동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구승훈이 모범 시민상은커녕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적당히 착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진즉 알고 있었다. 그가 하고 다니는 짓도 떳떳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는데... 직접적으로 그 모습을 볼 일은 없다 보니 매번 이렇게 당황했다.저번에 로열 클럽에서 본 꼬마까지 한다면 이번이 두 번째인 셈이었는데 오늘은 이유를 몰랐다.구승훈은 얼마 지나지 않아 샤워를 끝내고 나왔다.강하리가 식은 반찬들을 간단하게 데워 식탁에 놓고 나서야 말을 꺼냈다."용무 없으시다면 먼저 가 볼게요.""같이 먹자."구승훈이 강하리의 손목을 잡아채자 강하리가 잠시 침묵했다."배 안 고파요."구승훈이 공기를 짓누르는 듯한 눈빛으로 쳐다보니 살짝 숨을 내쉰 강하리가 맞은편에 앉았다.식사 도중 그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고 입맛 없던 강하리가 젓가락질 몇 번 하고는 식탁에 내려놓을 뿐이었다.반면, 구승훈은 꽤 입맛이 돌았는데 강하리가 한 밥이 오랜만이라 그런가 어쩐지 맛있다는 감상이 들 정도였다.식사를 끝내고 티테이블에 앉아 차를 우리고 나서야 물었다."생각은 끝냈어?"뭘 묻는 건지는 강하리도 잘 알고 있었다."대표님은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강하리의 몸이 살짝 굳은 채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다시 들어와."구승훈은 고민 따위는 사치인 듯 말했다."됐어요."강하리가 창밖의 야경을 봤다.눈살을 살짝 찌푸린 구승훈은 더 이상 강하리를 궁지에 몰 생각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계속 지금처럼 밖에 두고 지켜보기만 할 생각도 없었다."하리야, 알아서 들어올래, 내가 들어오게 할까."강
강하리가 아파트를 빠져나왔을 때는 눈이 가득 흩날리고 있었지만 강하리의 시야에는 아까 전 자신의 말에 어두워진 구승훈의 표정만이 있었다.그런 말을 하면 기분을 잡치게 할 거란 건 짐작하고 있었지만, 결국 입 밖으로 꺼내고 말았다.만약 이게 언젠가 사라질 감정이라면 더 이상 추호의 기대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깊게 숨을 들이쉰 강하리가 숨을 내쉬어 머릿속의 잡념을 지우고는 불이 켜져 있는 아파트를 보고 쓰게 웃으며 돌아갔다.그 시각, 구승훈은 아직 차가움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픽 웃은 구승훈의 머릿속에는 강하리의 말이 아직 맴돌고 있었다.자신과의 만남이 강하리에게는 그저 상사에게 맞춰 주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구승훈이 잡념을 쉬이 떨치지 못했다.‘계약이 끝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나 보지?’평소였다면 이런 상황에서도 이성을 유지하는 강하리에게 감탄했을 텐데, 지금은 그 이성이 너무나도 성가셨다.꼭 구승훈과의 만남이 강하리가 행복과 멀어지게 하는 것 같았다.하지만 구승훈이 강하리를 붙잡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강하리의 말대로 구승훈이 굳이 강하리를 고집할 이유는 없었다. 그가 원한다면 여자가 줄을 설 테니.강하리는 매번 자신이 정한 한계선을 비웃듯 넘었다.이 관계는 서로 원해서 유지되는 줄 알았는데, 강하리에게는 통하지 않으니 매번 강요만 하게 됐다.피식 웃고 담배 한 대를 태운 구승훈은 지금 이런 통제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극도로 싫어했다. 특히 고작 애인 때문에 이러는 것은 구승훈의 상식 한참 밖의 일이었다.결국 구승훈은 해탈의 경지에 올라 강하리가 다른 남자를 함부로 만나지 않고 본인 몸과 마음만 잘 챙긴다면 다른 건 딱히 상관없었다.담배를 다 피우고 옷을 갈아입은 구승훈도 아파트를 벗어났다....다음 날, 강하리는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을 기다린 듯한 모양새의 구승재를 마주쳤다.강하리를 본 구승재가 재빠르게 달려왔다."강 부장님, 어제 형이 김주한 씨 반 죽여놓은
강하리가 아파트를 빠져나왔을 때는 눈이 가득 흩날리고 있었지만 강하리의 시야에는 아까 전 자신의 말에 어두워진 구승훈의 표정만이 있었다.그런 말을 하면 기분을 잡치게 할 거란 건 짐작하고 있었지만, 결국 입 밖으로 꺼내고 말았다.만약 이게 언젠가 사라질 감정이라면 더 이상 기대는 추호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깊게 숨을 들이쉰 강하리가 숨을 내쉬어 머릿속의 잡념을 지우고는 불이 켜져 있는 아파트를 보고 쓰게 웃으며 돌아갔다.그 시각, 구승훈은 아직 차가움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픽 웃은 구승훈의 머릿속에는 강하리의 말이 아직 맴돌고 있었다.자신과의 만남이 강하리에게는 그저 상사에게 맞춰 주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구승훈이 잡념을 쉬이 떨치지 못했다.‘계약이 끝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나 보지?’평소였다면 이런 상황에서도 이성을 유지하는 강하리에게 감탄했을 텐데, 지금은 그 이성이 너무나도 성가셨다.꼭 구승훈과의 만남이 강하리가 행복과 멀어지게 하는 것 같았다.하지만 구승훈이 강하리를 붙잡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강하리의 말대로 구승훈이 굳이 강하리를 고집할 이유는 없었다. 그가 원한다면 여자가 줄을 설 테니.강하리는 매번 자신이 정한 한계선을 비웃듯 넘었다.이 관계는 서로 원해서 유지되는 줄 알았는데, 강하리에게는 통하지 않으니 매번 강요만 하게 됐다.피식 웃고 담배 한 대를 태운 구승훈은 지금 이런 통제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극도로 싫어했다. 특히 고작 애인 때문에 이러는 것은 구승훈의 상식 한참 밖의 일이었다.결국 구승훈은 해탈의 경지에 올라 강하리가 다른 남자를 함부로 만나지 않고 본인 몸과 마음만 잘 챙긴다면 다른 건 딱히 상관없었다.담배를 다 피우고 옷을 갈아입은 구승훈도 아파트를 벗어났다....다음 날, 강하리는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을 기다린 듯한 모양새의 구승재를 마주쳤다.강하리를 본 구승재가 재빠르게 달려왔다."강 부장님, 어제 형이 김주한 씨 반 죽여놓은
나가는 구승훈의 뒷모습을 보던 송유라가 표정을 굳혔고 그와 함께 안현우가 혀를 차자 구승재가 웃었다."왜요? 이번에는 또 강 부장님의 뭘 헐뜯으시려고요?"그에 안현우도 마주 웃었다."승재 씨, 대체 그 사람이 뭘 해 줬길래 이렇게 싸고돌아요?""뭘 해 준 건 아니고, 제 형수님이 되어야 할 사람이니까요."구승재의 말에 송유라의 표정이 한없이 구겨졌다."승재 씨,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 신분으로 승재 씨 가문이라니요~""유라 씨, 형 결혼은 절대 남이 관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그 왜, 저번에 약혼식도 바로 취소해 버린 거 기억 안 나세요?"저번 일을 떠올린 송유라가 이를 부득부득 갈았지만 구승재는 멈추지 않았다."게다가 누구한테 분명 저희 형은 원하지 않으면 절대 선택을 번복할 사람이 아니라고 당부했는데도 떠났으면서 그 누구는 이제 와서 또 붙잡네요."송유라의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송유라가 어디 가서 이런 말을 들을 사람은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나온 송유라가 구승재를 노려본 후에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샤워를 마친 강하리가 어지러움을 느꼈다. 이유는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밖에 너무 오래 서 있어서 감기에 걸린 것일 것이다.유산한 뒤로부터 몸이 허약해진 게 느껴질 때마다 강하리는 그저 쓴웃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따뜻한 물 한 잔을 마시고 누우려던 참에 핸드폰이 울려 발신인을 확인한 강하리가 잠시 고민하더니 결국 받았다."대표님."가볍게 대답한 구승훈이 한참을 침묵하더니 겨우 한 마디 내뱉었다."강주시야?"창문을 가득 채운 시린 빗방울 너머 폭죽을 보며 천천히 대답했다."연지가 고른 장소예요.""올 때 전화해. 데리러 갈 테니까."핸드폰을 쥔 손에 힘을 준 강하리가 김주한의 일에 대해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입을 열지 못한 사이, 송유라의 소리가 들렸다."오빠, 저 사람들이 저 괴롭혀요..."그에 감사 인사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다시 들어갔다."
강하리가 놀라 굳은 몸으로 구승훈을 바라봤다."어떻게 여기에..."미간을 살짝 좁힌 구승훈이 강하리의 이마에 손을 올려 온도를 가늠했다."아직 열나네. 옷 갈아입어, 병원 가게."강하리의 가슴속에 또 알 수 없는 감정이 피어오르자 눈을 맞추지 못하고 살짝 웃어 보였다."약 몇 번만 더 먹으면 나을 거예요.""강하리, 말 좀 듣고 얼른 옷 갈아입어. 아니면 내가 갈아입혀 줘?"강하리의 손목을 낚아챈 채 말했다.그러자 강하리가 손아귀를 벗어나려 발버둥 치면서 코끝이 찡한 느낌을 애써 모르는 척했다."승훈 씨, 여긴 왜 오셨어요?"강하리 본인도 자기가 왜 이러는지 몰랐지만 아마 아플 때 곁에 아무도 없어서 서러운 듯했다. 구승훈을 보고 어쩐지 눈물이 차오를 것 같았으니.하지만 더 의문인 건 며칠 전 그 일을 겪고도 한달음에 달려온 구승훈의 행동이었다.그 생각을 고스란히 얼굴에 띄운 강하리를 보던 구승훈이 웃었다."왜. 여긴 네 구역이니까 난 들어오면 안 되나? 그렇다고 여기서 죽게 둘 순 없잖아."강하리가 조금 젖은 눈을 살짝 문지르더니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진짜 괜찮아요."들은 체도 안 한 구승훈이 캐리어에서 옷을 꺼내 건넸다."빨리 입어. 병원 가는 게 무슨 대수라고."남은 손으로는 강하리의 붉어진 눈꼬리를 문지른 채였다."말 좀 들어."강하리가 깊게 심호흡하며 벅차오르는 감정을 제어하고 갈아입으러 자리를 피했다.택시를 잡아 병원에 도착한 뒤 진찰에 링거까지 맞으니 어느덧 점심이었다."아침에 밥은 먹었어?"강하리가 고개를 젓자 뒷목을 살짝 꼬집었다."나 안 왔으면 호텔에서 죽어 갈 생각이었지, 아주."찍소리 못하는 강하리에 구승훈이 다시 입을 열었다."뭐 먹을래."강하리가 눈을 내리깔았다."팥죽이요."잠시 멈칫한 구승훈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팥죽을 사 와서는 오른손에 링거를 꽂은 강하리를 대신해 숟가락을 들고 죽을 먹여 줬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하리가 별말 없이 죽을 받아먹었다."강 부장, 이래
자세히 말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안 강하리가 더 이상 묻지 않고 눈을 감자 구승훈이 강하리의 턱을 잡아 입 맞췄다.질척하게 이어지는 키스는 전과 많이 달랐다. 훨씬 더 다정한...당황한 강하리가 어떻게 해 보기도 전에 구승훈이 강하리의 위로 올라탔다."승훈 씨, 저...""쉿. 더 움직이면 여기서 안 끝나."어느새 갈라진 목소리가 강하리의 귀를 파고들며 맞닿은 아래가 여실히 느껴졌다.반사적으로 몸을 굳힌 강하리를 보고 구승훈이 웃었다."그렇게 하기 싫어?""전 환자잖아요."구승훈이 밤에 얼마나 끈질긴지는 강하리가 잘 알았다. 그러니 이 상태로는 절대 받아낼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물론 구승훈도 제아무리 짐승 같다 해도 환자를 상대로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몇 번 더 이어진 키스를 끝내고 나서 구승훈은 화장실로 들어가 반 시간이 지나서야 시원한 공기와 함께 나왔다.그러고는 이불 속으로 들어가 몸을 충분히 데운 다음 강하리를 다시 안았다....다음날 아침, 둘은 함께 연성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라탔다.착륙 후, 구승훈이 강하리에게 물었다."어디로 갈 거야?"잠시 고민한 강하리가 답했다."월세방이요."무어라 한 소리 할 줄 알았던 구승훈이 조용하니 강하리가 당황한 채로 월세방 앞에 도착해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내리려던 순간이었다.구승훈이 힐끗 쳐다보고는 강하리의 캐리어를 들고 강하리보다 먼저 내렸는데 반대 손에는 자신의 캐리어도 들려 있었다.입을 다물지 못하고 무슨 말을 꺼내려던 순간 구승훈이 한발 빨랐다."강 부장 몸도 안 좋은데 괜히 오라 가라 하면 안 되잖아."미세하게 씰룩이는 입꼬리와 함께 하려던 말도 억누르고 구승훈의 보폭에 맞췄다.함께 집에 발을 들인 순간, 구승훈의 벨소리가 퍼졌다.그 익숙한 벨소리는 무슨 저주라도 걸린 듯 따뜻했던 분위기를 한순간에 지워냈다.구승훈을 슬쩍 쳐다본 강하리가 캐리어를 끌고 안방으로 들어가 딱히 정리는 하지 않고 멍만 때리고 있었는데 문밖에서 구승훈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강하리는 전화를 바로 끊어버렸다.그러고는 간단하게 정리하고 집을 나섰다.병원에 도착하니 간병인이 반갑게 인사했다.“하리 씨, 새해 복 많이 받아요~”강하리도 웃음으로 인사했다. 그러더니 오는 길에 산 과일을 간병인에게 건네주었다.“아주머니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지난 한 해 수고 많으셨어요.”간병인은 과일을 받더니 매우 기뻐했다.“수고는 무슨, 돈을 받았으니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죠.”그러더니 아직 침대에 누워있는 정서원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렇게 또 한해가 지나갔다. 이미 4년째다.이런 나날이 언제 끝날지 아직 모른다. 사실 제일 힘든 건 강하리일 것이다.간병인은 말없이 주전자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강하리에게 자리를 남겨준 것이다.강하리는 침대맡으로 걸어가 정서원의 근육을 한참 안마해 주었다.안마를 해주고 나서야 강하리는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엄마, 새해 복 많이 받아요.”정서원은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기만 할 뿐 아무 반응이 없었다.강하리는 웃으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침대맡에 앉아 곁을 지키다가 나왔다.의외인 건 병원 입구에서 송동혁을 만난 것이었다.3년을 못 봤는데도 단번에 그를 알아본 것도 대단하다고 생각되었다.하지만 떠오른 장면이라곤 3년 전 그녀가 별장 앞에 무릎을 꿇고 있을 때 매정한 남자의 모습뿐이었다.사실 정서원이 그때 기억을 잃긴 했어도 몸에 값비싼 액세서리를 많이 착용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액세서리는 결국 송동혁이 전부 채갔다.결혼하려면 집도 필요하고 돈도 써야 한다는 말에 정서원은 액세서리를 전부 송동혁에게 준 것이었다.3년 전 강하리가 송씨 집안에 찾아갔을 때도 송동혁이 따로 그녀에게 돈을 줄 거라는 기대는 전혀 한 적이 없었다.그냥 송동혁이 정서원에게서 앗아간 액세서리로 바꾼 돈을 돌려받기 위해서였다.그때 송동혁이 이렇게 말했다.“정서원 목숨은 내가 구한 거야. 그 액세서리는 목숨값이고.”“애 지우라는 말 안 들었을 때 이미 죽었어야 할 목숨인데
여초연이 얼마나 치밀하게 움직이는 사람인지 구승훈이 제일 잘 안다.정말 여초연이 연정이를 데려갔다면 그렇게 쉽게 꼬리를 드러내지 않았을 테고 초조했던 그는 계속해서 그녀가 먼저 빈틈을 보이길 기다릴 수가 없었다.그래서 소란을 일으킨 뒤 그녀의 움직임을 주시할 생각이었다.그녀의 수단으로 봤을 때 누군가 자기를 지켜보는 걸 모를 리 없었다.그런데도 오늘 대놓고 이곳으로 왔다는 건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그를 유인한 걸까?그렇다면 연정이에게 일어난 일이 그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더 분명해지지 않나?어쨌든 구승훈은 연정이를 먼저 생각해야 했다.연정이가 정말 그녀의 손에 있고 막다른 길에 이른 그녀가 무슨 짓을 할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조심할 수밖에 없다.그 시각 목란정원에서 여초연은 복도에서 누군가와 휴대폰을 들고 영상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상대는 여자아이를 안고 있었다. 이쪽의 깊은 밤과 달리 저쪽은 태양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강하리는 다음 날 주해찬과 함께 B시로 갔다.비행기에서 막 내린 두 사람은 입국 게이트에서 정주현이 신나게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았다.“강하리 씨, 드디어 왔네요!”강하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주해찬을 흘깃 쳐다보았다.주해찬은 무기력하게 어깨를 으쓱했다.“어쩔 수 없었어. 계속 물어보니까 시간을 알려줄 수밖에.”정주현은 곧바로 불만을 터뜨렸다. “강하리 씨, B시로 오면 알려준다면서 이러는 건 아니죠!”강하리는 힘없이 웃었다.“가요.”그러던 중 정주현은 강하리와 함께 일하고 싶다는 걸 다시 한번 언급했지만 강하리는 여전히 부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정주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강하리를 바라보았다. “하리 씨, 그래도 우리 같이 일한 적이 있는데 이러면 대양그룹에 불만이 있는 것 같잖아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정 회장님이 절 찾아오라고 시켰어요?”정주현은 부인하지 않았다.“영감탱이한테 불만 있는 건 아니죠? 지난번에 구정우 도와줘서 그래요?”강하리는 침묵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정주현은 그
구승훈의 주변에 우중충한 공기가 감돌았고 차가운 시선은 올곧게 주해찬에게 향했다.가까이 다가온 주해찬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구승훈은 조금도 피할 생각 없이 그대로 얻어맞은 뒤 이윽고 주해찬의 손목에 주먹을 내리쳤다.그 손이 조금 전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 구승훈은 그의 뼈를 부러뜨릴 기세로 달려들었다.주해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눈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구승훈, 하리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알아? 병원에서 그 며칠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아? 네가 뭔데 계속해서 걔한테 상처를 줘, 네가 뭐라고 걔한테 그런 식으로 강요해!”강하리가 병원에서 지냈던 걸 언급하자 구승훈의 표정이 굳어졌다.당연히 그는 그녀가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고 있었다.매일 의사가 진정제를 놓아야 겨우 잠을 잘 수 있었다.심한 우울증이었다.노민준이 그날 했던 말을 그는 여태 기억하고 있었다.“이러면 언제든 극단적인 선택을 할 위험이 있어. 이젠 살아갈 의욕을 완전히 잃었어.”구승훈의 몸이 경직되었지만 꿋꿋하게 받아쳤다.“주해찬 당신이 뭔데 나랑 하리 사이에 끼어들어?”주해찬은 입가에 무심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아무리 그냥 선배라도 걔가 너한테 괴롭힘당하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정말 그냥 선배가 되고 싶은 거야? 주해찬, 네 개수작을 모를 것 같아? 이 기회를 이용하려는 거잖아.”잠시 멈칫하던 주해찬은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내가 아무리 이용하는 거라고 해도 억지로 강요하는 너보다 나아. 구승훈, 사람 존중하는 방법부터 배우고 다시 하리 앞에 나타나. 그전까지 넌 자격 없으니까.”주해찬은 말을 마치고 곧장 차 쪽으로 몸을 돌렸다.비를 맞으며 서 있던 구승훈은 한참이 지나서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자격이 없다고...맞는 말이긴 한데 그럼 주해찬은 자격이 있다는 말인가?그는 입가를 가볍게 문지르며 위쪽을 올려다보았다.강하리는 주방에 약을 먹으러 가다가 비속에 서 있는 구승훈을 보게 될 줄은 몰랐
가서 팔찌를 가지고 백아영의 생일을 보낸 후 출국할 생각이었고 그 외 일은 지금 당장 처리할 기분이 아니었다.구승훈이 무슨 말을 하려는데 손연지의 집 밑에 우산을 쓴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주해찬이었다.비 오는 밤, 가로등에 반사된 남자의 모습은 약간 서늘한 기운을 풍겼다.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무척 적극적이네.”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렬한 불빛이 주해찬에게 비추자 뒤를 돌아본 그가 구승훈의 차에서 내려 걸어오는 강하리를 발견했다.구승훈은 보지 못한 듯 강하리를 향해 걸어가는 그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검은 우산이 머리 위로 드리워지며 주해찬의 낮은 톤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걱정돼서 보러 왔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다.“난 괜찮아요. 걱정시켜서 미안해요.”그때 주해찬이 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하리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구 대표님.”구승훈은 고개를 숙이고 담배에 불을 붙인 뒤 가벼운 웃음을 내뱉으며 주해찬을 향해 시선을 들어 올렸다.“주해찬 씨가 뭐라고 저한테 감사 인사를 하는 거죠?”주해찬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하리의 선배로서요.”그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려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시간도 늦었는데 일찍 집에 가서 쉬어.”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해찬이 우산을 들고 건물 쪽으로 따라나섰다.구승훈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얼굴에 서리가 낀 것 같은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헤드라이트가 두 사람의 실루엣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비를 맞으며 우산 아래서 두 사람의 어깨는 단단히 맞닿은 것 같았다.건물 입구에 다다랐을 때야 강하리가 나지막이 말했다.“선배, 나 혼자 올라가면 돼요.”주해찬의 시선이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입술이 어딘가 부딪힌 것처럼 살이 갈라져 있었다.갈 때는 괜찮았는데 돌아올 땐 입술이 찢어진 채로 왔다.구승훈에 대한 강하리의 쌀쌀맞은 태도는 다 지켜보고 있었다.“구승훈이 강요했어?”주해찬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강하리는 몸이 굳어지더
한편 여초연은 거실 소파에 앉아있고 도우미가 옆에서 옷을 걸쳐주었다.“사모님, 시간이 늦었는데 일찍 쉬세요.”여초연은 밖의 하늘을 바라보다가 옷을 두른 채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승훈이는 요즘 어떻게 지내요?”도우미는 얼굴을 찡그렸다.“잘 지내지 못해요. 강하리라는 여자가 우리 집안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보세요. 어르신까지 들여보냈는데 큰 도련님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여자한테 홀딱 넘어간 게 틀림없어요.”여초연은 밖에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면서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앞으로 그런 말 하지 마요. 승훈이가 좋아하는 사람이고 내 며느리니까.”도우미가 입술을 달싹였다.“그래도 구씨 집안이 그 여자 때문에 이 모양이 됐잖아요!”SH그룹이 합병되면서 구씨 집안은 뿌리 없는 나무처럼 흔들리고 있었다.도우미들의 일자리도 위협받는 상황에서 정작 여초연은 조금의 초조함도 보이지 않았다.“게다가 큰 도련님도 그 여자 때문에 사모님께 화를 냈잖아요.”여초연은 부드럽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우산을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따라오지 마요.”그녀가 속삭이자 도우미는 즉시 발걸음을 멈췄다.비 내리는 어느 날 밤, 검은색 승용차가 구씨 집안 저택에서 시내 반대편 목란정원을 향해 유유히 달렸다.목란정원은 여초연이 소유한 정원인데 그녀는 때때로 며칠씩 이곳에 오곤 했다.구승재는 그녀를 따라 목란정원 입구까지 갔다가 차를 멈췄다.그는 목란정원의 출입구를 바라보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그동안 형의 지시로 구씨 저택에 머물면서 집안사람들을 돌보고 있었지만 사실은 여초연을 감시하는 것이었다.여초연의 차가 목란정원에 들어가는 것을 본 구승재는 휴대폰을 꺼내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다.고요한 밤, 구승훈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강하리의 몸이 굳어졌고 구승훈의 입술은 그녀의 귀에 닿은 상태였다.“전화 좀 받고 올게.”구승훈이 떠난 후 강하리 휴대폰도 울렸다.주해찬의 전화였다.“하리야, 비행기표 샀으니까 내일 데리러 갈게.”“그래요.
구승훈은 상처받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웃었다.“하리야, 넌 늘 그렇듯 매정하네.”강하리가 뒤돌아 휴대폰으로 택시를 부르려는데 구승훈이 그녀의 휴대폰을 움켜잡았다.“딱 하룻밤만. 너 안 건드릴게, 응?”강하리의 몸이 굳어졌고 구승훈은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하리야, 내 소원 들어주는 거라고 생각해. 네가 이 집에서 아이와 함께 지내는 모습을 몇 번이나 상상했는지 몰라. 여기가 우리 집이야.”강하리의 코끝이 시큰거렸지만 그래도 결국 구승훈의 손을 뿌리쳤다.너무도 분명한 그녀의 거절에 구승훈은 답답한 가슴에 고통이 밀려왔고 쓴웃음을 짓던 그는 더 그녀에게 강요하지 않았다.“샤워하고 나오면 다시 데려다줄게.”말을 마친 그는 돌아서서 화장실로 들어갔다.구승훈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데 강하리는 통화 중이었다.발걸음이 멈칫한 그는 통화 상대가 주해찬이란 것을 알아차렸다.“선배, 전 괜찮아요.”“알았어, 항공편 예약해. 나도 같이 갈게.”강하리가 전화를 끊는데 구승훈이 갑자기 다가와 그녀를 껴안고 고개를 숙여 입 맞추었다.“구승훈!” 강하리는 그의 키스에 깜짝 놀라 그를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구승훈은 점점 더 꽉 그녀를 붙잡았다.그는 강하리의 턱을 잡고 깊숙이 파고들며 조금의 부드러움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하게, 마치 화풀이나 비난하듯 키스를 퍼부었다.강하리는 벽에 단단히 밀려서 몸부림을 치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그녀가 다리를 들어 그의 아랫도리를 가격하려는데 구승훈이 먼저 그녀의 다리를 붙들었다.강하리가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구승훈의 키스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힘의 격차로 인해 그녀는 반격할 방법이 없었다.강하리는 화가 나서 얼굴마저 하얗게 질렸고 구승훈은 실컷 헤집어놓은 뒤에야 그녀를 놓아주었다.강하리가 그의 뺨을 때렸고 이내 구승훈의 얼굴엔 손자국이 생겨났다.그러나 그의 손가락은 키스로 인해 부어오른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하리야, 나 생각이 바뀌었어.”강하리가 멈칫했다.“무
그리고는 강하리를 곧장 차에 밀어 넣었다.차는 빗속을 뚫고 달려 나갔다.구승훈의 차는 굉장히 빨랐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시내를 벗어나 한 별장 앞에 멈춰 섰다.구승훈은 주차가 끝나자마자 차에서 내려 강하리를 빌라 안으로 끌어당겼다.빌라는 강하리가 선호하는 스타일로 안팎을 의도적으로 꾸몄다.안으로 들어선 강하리는 몸이 굳어버렸다.“여긴 내가 준비한 신혼집이야.”구승훈이 문득 등 뒤에서 이렇게 말했다.“결혼하면 여기서 지내려고 했어. 하리야, 정말 이대로 날 버릴 거야?”강하리는 꾸며진 방을 둘러보며 마음이 씁쓸했지만 애써 두 눈에 담기는 감정을 감추었다.“구승훈, 내가 그렇게 고통받는 걸 어떻게 지켜보기만 했어?”말문이 막힌 구승훈은 갑자기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미안해.” 남자의 목소리는 죄책감으로 가득했다.“다 내 잘못이야.”강하리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애쓰며 낮은 웃음을 지었다.너무 지쳤다.한때 열정적이었던 사랑이 이제는 고문처럼 느껴졌다.그날 구승훈이 아직도 자기를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강하리는 답을 알 수 없었다.어쩌면 오랫동안 사랑했던 남자일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미워하는 마음이 더 컸다.강하리는 구승훈이 진심으로 미웠다.그의 무자비함과 강압적인 성격이 싫었다.둘 사이에서 그는 항상 그녀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행동했고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입장이었다.그래, 어쩌면 그는 그녀를 위해, 아이를 위해 그랬을 수도 있다.하지만 자신이 해준 것들이 그녀가 진정 원하는 것인지 물어본 적은 없었다.강하리가 발버둥쳤지만 구승훈은 더 꽉 끌어안았다.“구승훈, 그만하자.”구승훈의 목소리가 잠겼다.“그만하자니, 무슨 말이야? 하리야, 우리 사이가 이대로 끝날 것 같아? 문씨 집안도, 구씨 집안도 망했고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다 사라졌는데 이제 와서 그만하자고?”“우리 아이가 죽었잖아!”뒤돌아선 강하리의 눈엔 온통 고통만이 가득한 채로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구
“어떻게 알았어?”구승훈은 웃으며 눈을 내리깔고 테이블 아래 두 사람이 잡고 있는 손을 바라보았다.“이상해?”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구승훈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하리야, 내가 포기하지 않겠다고 했잖아. 당연히 네 일에 대해선 다 알고 있지.”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손을 빼냈다.“그럴 필요 없어.”유난히 침착한 그 말이 구승훈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필요한지 아닌지는 네가 결정하는 게 아니야. 강하리, 내가 뭘 하든 그건 내 일이야.”강하리가 비웃었다.“하지만 난 이제 당신이랑 더 엮이고 싶지 않아.”구승훈의 목울대가 꿈틀거리며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몇 마디 말로 두 사람 사이는 또다시 교착 상태에 빠졌고 일어나서 밖으로 나온 강하리는 그제야 휴대폰을 꺼내 안예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그녀는 최소한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는 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구승훈이 옆에 앉아있자 마치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던 치유할 수 없는 상처, 두 사람의 목숨이 다시금 떠오르는 듯했다.그녀의 어머니와 아이...강하리가 가정에서 나오는데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멍하니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데 문득 연정이가 사고를 당한 날 밤도 비 오는 밤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그날 밤이 어땠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연정이가 이렇게 비 오는 밤에 춥고 무서워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강하리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비를 바라보다가 눈가에 차오르는 시큰함을 꾹 참고 빗속으로 걸어가는 순간 머리 위로 드리워진 우산이 그녀를 덮었다.고개를 들자 미소를 머금은 주해찬의 눈동자와 마주쳤다.“그렇게 비속우로 달려가면 감기 걸리잖아.”강하리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우산 챙기는 걸 깜빡해서.”“왜 전화 안 했어?”주해찬의 우산은 완전히 그녀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내가 마침 저녁을 먹으러 오지 않았으면 이대로 비를 맞으며 돌아가려고 했어?”주해찬의 눈에는 나무람과 관심이 가득했고 강하리는 웃으며 시선을 다른 곳
B시 대양그룹.정양철이 사무실로 들어가니 이미 비서가 대기하고 있었다.“강하리 검색어는 어떻게 된 거야?”비서는 잠시 머뭇거렸다.“사모님께서 대양그룹 명의로 매수한 것인데 아마도 회장님을 시험하려는 의도 같습니다.”정 회장이 강하리를 아낀다면 이 일을 거론할 것이고 신경 쓰지 않는다면 하든 말든 넘어가겠지.정양철의 얼굴에 알 수 없는 표정이 스쳤고 그가 말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주현이 통해 강하리에게 연락해서 대양그룹이 JM과 함께 일하고 싶다는 말을 전하라고 해.”말을 마친 그가 멈칫했다.“집사람이 물어보면 강하리에 대한 보상이라고 하고.”비서의 눈이 번뜩이더니 대답을 마치고 자리를 떠났다.강하리는 정주현의 전화를 받고 깜짝 놀랐다.지난번 구승훈과 함께 대양그룹 입찰을 뺏은 이후 정양철 측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하지만 이번에는 정양철이 무슨 꿍꿍이로 합작을 원하는 건지 모르겠다.지금은 정양철을 상대로 놀아줄 기분이 아니었다.“정주현 씨, 대양그룹에서 마음만 먹으면 파트너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겠죠?”정주현은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듣고는 다소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강하리 씨, 우리랑 같이 일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강하리가 함께 일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려던 찰나, 정주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B시에 언제 와요? 얼굴 보고 얘기할까요? 협업 안 해도 오랜만에 얼굴 한번 봐요. 우리 안 본 지 오래됐잖아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알았어요, 그럼 가면 연락할게요.”정주현이 전화를 끊자 사무실 앞에 서 있는 연미숙의 모습이 보였다.“엄마, 여기서 뭐 해?”연미숙이 웃었다.“우리가 강하리랑 같이 일해?”정주현은 고개를 끄덕였다.“아빠가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구씨 집안에 매달리는 게 아니라 밖으로 사업을 넓히려는 것 같아.”연미숙은 인상을 찌푸렸다. “꼭 강하리여야만 대외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거야?”정주현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강하리가 왜?”연미숙은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
구승훈은 차갑게 웃으며 자신도 모르게 핸들을 꽉 움켜쥐었다.그는 차에서 내리지 않고 두 사람이 차 안에서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모르겠지만 강하리의 얼굴에 번진 미소가 전혀 억지스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화사한 아침 햇살 같은 그 미소가 구승훈은 왠지 모르게 눈에 거슬렸다.강하리는 차에서 내려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된 구승훈의 차가 보였다.그녀는 발걸음을 잠시 멈추었지만 시선을 돌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강하리가 안으로 들어간 후 주해찬은 차에서 내려 구승훈의 차 쪽으로 걸어갔다.그가 창문을 살며시 두드리자 구승훈이 창문을 내렸다.“구 대표님 시간 있으세요? 얘기 좀 할까요?”구승훈은 가볍게 웃었다.“주해찬 씨는 남의 연애에 참견하는 걸 좋아하나 봐요?”구승훈의 가시 돋친 말에도 주해찬은 계속 웃기만 했다.“구승훈 씨, 당신과 하리가 잘 지낸다면 나도 굳이 끼어들고 싶진 않은데 당신은 하리를 행복하게 해준 적이 있긴 한가요?”그의 말에 구승훈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그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들이마신 후 말을 시작했다.“주해찬 씨, 행복하든 아니든 그건 다 나와 강하리 사이의 일이지 당신이랑은 아무 상관이 없잖아요.”주해찬은 조롱 섞인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웃었다. “구승훈 씨, 내가 하리 데려간다고 했죠. 이번엔 말한 대로 합니다.”말을 마친 그는 돌아서서 다시 차로 향했다.구승훈의 얼굴에서 미소가 조금씩 완전히 사라진 채 떠나는 차를 바라보았다.그는 한참 동안 손에 쥔 휴대폰을 내려다보면서 결국 강하리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싶은 마음을 참지 못했다.[그 자식이랑 떠날 거야?]강하리가 위층으로 올라가는데 전화벨이 울렸고 그녀는 한참 동안 들여다보다가 그냥 대화창을 닫아버렸다.구승훈은 전송된 메시지에 답장이 오지 않자 가벼운 웃음을 터뜨리며 입안의 쓴맛을 삼키고 휴대폰을 치우려던 찰나, 구승재의 전화가 걸려 왔다.“형, 큰어머니가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