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를 보낸 후 그녀는 침대에 누웠고 그대로 잠에 들었다.다음날 깨어나 보니 핸드폰에는 아무런 연락도 없이 깨끗했고 당연히 구승훈에게서 온 답장도 없었다. 강하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가슴 한구석은 조금 아쉬웠다. 그녀도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꼭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회사에 도착했을 때 강하리는 회사 사람들이 조용히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구 대표님 여자 친구 있으시대요.”“근데 송유라가 아니라면서요.”“다들 구 대표님 목하고 귀 뒤에 긁힌 자국 보셨어요? 정말 자극적이지 않아요?”“어머 어머. 난 갑자기 그 여자가 너무 부러워졌어요. 구 대표님 같은 남자 친구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강하리는 몇 마디 들은 뒤 더 듣지 않았다.“강 부장님, 들으셨어요? 저희 구 대표님 여자 친구 있으시대요. 그런데 송유라가 아니래요.”강하리가 웃으며 말했다.“예서 씨 소문은 믿지도 말고 퍼뜨리지도 마. 구 대표님이 여자 친구가 있다면 송유라 뿐일 거야.”안예서가 미간을 찌푸렸다.“하지만 다들 소문을 퍼뜨리고 있어요. 아무래도 가짜가 아닌 것 같은데요?”강하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더 말하지 않았고 안예서도 눈치를 살피더니 더 말하지 않았다.그러다 갑자기 입을 열었다.“맞다! 강 부장님, 저희 팀 오늘 저녁에 회식인데 괜찮으시죠?”강하리는 그제야 이 일이 떠올랐다.“예서 씨가 주소 문자로 보내줘.”“알겠습니다.”안예서는 대답했다.안예서가 떠난 후 강하리는 살짝 생각에 잠겼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녀는 정신을 차린 뒤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같은 시각 꼭대기 층 대표님 사무실.구승재가 마침 구승훈의 사무실에 앉아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구승훈을 바라보고 있었다.“형, 어제저녁에 그 여자가 정말 형 여자 친구야?”구승훈은 어두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승재는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설마 또 싸운 건 아니지? 형 뭔가 실연당한 사람 같아 보여.”구승훈은 퍽 하
강하리는 입술을 꽉 다문 채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그녀는 구승재가 전에 했던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구승현이 구승훈에게 혼난 건 손을 대지 말아야 할 사업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그래서 그녀는 지금 무의식적으로 이 남자를 피하려고 했다.“죄송하지만 제가 일정이 있어서요.”말을 마친 뒤 그녀는 구승현을 피해 룸으로 걸어갔다.구승현도 더 이상 그녀를 잡지 않았지만 그녀가 룸에 들어갈 때까지 지켜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시선을 거둠과 동시에 살짝 사나운 얼굴에 비웃음이 스쳐 지나갔다.“가서 방금 그 아가씨한테 여기서 가장 잘생긴 엠디를 보내 오늘 밤 반드시 저 여자를 잘 케어하라고 해.”그의 옆에 있던 사람은 순간 깜짝 놀랐다.“사장님, 저분은 누구죠?”구승현은 차가운 비소를 지으며 말했다.“우리 맏형의 여자야. 난 저 여자가 바람피우면 형이 어떻게 변하는지 꼭 지켜봐야겠어.”말을 마친 그의 눈빛이 음흉하게 빛났다. 그리고 그는 자기 형이 정말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는 무적인지 확인하고 싶었다.강하리가 룸에 들어서자마자 한 무리의 부하들이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려왔다.안예서는 평소 회사에서는 생각이 없어 보이더니 오늘 밤은 화끈하게 차려입고 왔다. 그녀는 강하리가 들어오는 것을 발견하고 가장 먼저 달려왔다.“부장님, 드디어 오셨습니까?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강하리가 웃었다.“모두 너무 빨리 온 거 아니야? 평소 일할 때 이렇게 적극적이면 내가 매달 보너스 줄 텐데.”안예서는 강하리를 향해 메롱 하며 혀를 내밀더니 그녀의 뒤를 힐끔거렸다.“부장님, 정말 혼자 오셨어요?”강하리는 대답하지 않고 바로 룸 안으로 들어갔다.안예서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저희 오늘 밤에 모두 가족을 데려왔어요. 부장님만 혼자 오셔서 저희가 죄송하네요. 아니면 제가 전화해서 제 친구라도 부를까요? 마침 부장님한테 소개도 해드리고요.”강하리가 웃으며 말했다.“예서 씨 농담하지 마. 난 잠깐 있다가 갈 거야. 다들 재밌게 놀아.
“누나, 내가 잘못한 거라도 있어요? 왜 이렇게 차가워요? 말해주면 내가 고칠게요.”강하리는 머리가 아팠다. 안예서는 옆에서 그녀를 향해 윙크를 날렸다.“부장님, 그러지 마시고 옆에 그냥 두세요. 어차피 부장님 파트너도 없으시잖아요.”강하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어린 남자도 그녀를 따라 일어났다.“누나 가지 마요. 누나가 이러면 나 서운해요.”강하리는 발걸음을 멈출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그녀가 문을 열고 룸을 나서며 고개를 드는 순간 너무나 익숙한 한 쌍의 눈을 마주쳤다.남자는 복도 반대편에서 온몸에 여유롭고 고귀한 분위기를 풍기며 서 있었다. 그의 옆에는 한 여자가 함께 있었다. 그 여자도 20대 정도로 보였고 아주 귀여운 스타일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여자는 순수한 재스민처럼 남자의 옆에 자리 잡고 있었다.강하리는 구승훈이 이곳에 와 있을 줄은 몰랐다.그녀의 인상 속에서 일반적으로 구승훈은 놀 때면 대부분 킹스 클럽으로 향했다.이 클럽은 비록 구씨 가문의 것이었지만 구씨 가문의 둘째가 경영하는 것이었기에 구승훈은 자주 오지 않았다.그런데 하필 오늘 그가 이곳에 왔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우연히 이런 장면을 마주치게 되었다. 구승훈의 눈빛은 조용히 이쪽을 보고 있었다.검은 눈동자가 강하리의 얼굴에 잠시 머물더니 그녀의 옆에 서 있는 어린 남자에게로 옮겨갔다.안현우가 옆에서 비웃음을 날렸다.“강 부장님, 정말 우연이네요.”강하리는 시선을 돌리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계속 발걸음을 옮겨 안내데스크로 향했다.안현우는 웃으며 말했다.“설마 강 부장 이렇게 급하게 남자를 데리고 호텔 룸이라도 잡으려는 거야?”강하리의 등이 굳어졌다.“안현우 씨, 말도 안 되는 소리 할 거면 좀 닥쳐요.”안현우는 순간 흥미를 느꼈다.“그냥 노는 건데 말도 못 하게 하는 거예요? 아니면 승훈이가 당신 같은 여자가 얼마나 추한지 알게 되는 게 두려운 건가요?”구승훈은 고개를 숙이고서는 담배에
강하리는 말 없이 그 자리에 서서 시선을 구승훈 옆에 앉아 있는 어린 여자에게 옮겼다.이보다 더 명백할 수는 없었다.‘당신도 결국 그렇게 놀려고 나온 거 아닌가?’이때 어린 여자는 적대적인 눈빛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구 대표님, 이분은 누구예요?”구승훈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날카롭고 차가운 눈빛으로 강하리를 계속 바라보았다.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그는 옆에 앉아 있는 어린 여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나가.”그의 말이 끝나자 어린 여자는 순간 멍하니 앉아 있었다.“구 대표님, 무슨 말이에요? 저는...”“꺼지라고! 못 알아들어?”얼굴이 창백해진 어린 여자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그 여자가 떠나자 구승훈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이리 와.”강하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진심으로 그의 옆에 다가가 앉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다행히 구승훈도 더 강요하지 않았다.그는 비웃음을 날리더니 몸을 일으켜 강하리의 앞에 다가왔다. 그런 다음 강하리의 옆에 서 있는 어린 남자에게 시선을 옮겼다.“강 부장, 이런 스타일 좋아해?”눈앞에 이 남자는 흰 피부에 깔끔하고 청량한 느낌의 꽤 괜찮은 외모였다. 구승훈의 주위에서 점점 차가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강하리는 입술을 움찔거리더니 2초 동안 아무 말도 안 하다가 입을 열었다.“안 좋아해요.”구승훈은 싸늘한 눈썹을 치켜올리며 표정을 조금 부드럽게 푸는 듯싶더니 다음 순간 더욱 일그러졌다. 그는 강하리의 목덜미를 잡으며 그녀의 고개를 강제로 들어 올렸다.“그렇게 급하게 이사를 한 이유가 이것 때문이야?”강하리는 그에게 잡혀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녀는 촉촉하게 젖어 드는 눈으로 앞에 있는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구승훈 씨, 이 남자는 당신 동생이 일부러 나한테 붙여놓은 사람이에요.”구승훈은 그녀를 바라보더니 차가운 비웃음을 날렸다.“넌 언제 또 구승현하고 엮인 거야? 구승재 한 명으로는 부족해서 또 구승현을 꼬신 거야?”“그런 거 아니에요.”
안현우는 사라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마음이 답답해져 한숨을 쉬었다. 그는 앞으로 다가가 어린 남자를 한 번 더 발로 찼다. 그제야 기분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강하리를 찾아가 일을 만들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의 마음속에서 악마처럼 자라났다.아무리 노력해도 막을 수가 없었고 안현우를 끔찍하게 괴롭혔다. 그리고 더욱더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그는 강하리와 구승훈의 갈등에 대해 어느 정도 들었다. 원래 그는 강하리가 구승훈을 떠나면 그녀를 자기 손에 넣을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호스트바 선수를 만나면 만났지 그를 찾지 않았다.안현우는 너무 화가 나서 어린 남자를 또다시 발로 찼다.빌어먹을 년!구승훈은 강하리를 데리고 바로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녀를 차에 태운 후 그는 비웃음을 날렸다.“강 부장은 언제나 나를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어.”강하리는 침묵을 지키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늘 밤 일어난 일에 대해 그녀는 자기가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구승훈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하리는 알고 있었다.“왜 로열 클럽으로 온 거야?”“우리 부서 연말 회식이었어요.”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고 구승훈은 또 차가운 웃음을 터트렸다.“그럼 너희 부서는 평소 회식을 이렇게 해?”강하리는 입술을 움찔거렸지만 더 말하지 않았고, 구승훈도 그녀를 바라보다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집에 돌아오자마자 구승훈은 강하리를 침대 위로 밀었다.“강 부장, 내가 널 만족 시키지 못했나?”강하리는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다.“승훈 씨, 오늘 밤 일어난 일은 내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잖아요.”구승훈은 차갑게 웃었다.“정말 네 탓이 아니야? 그럼 왜 구승현이 다른 사람한테는 남자를 붙여주지 않은 건데?”강하리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지는 느낌이 들었다.“승훈 씨, 난 당신의 애인일 뿐이지 와이프가 아니에요. 당신이 뭔데 내 주위에 이성이 하나도 없길 요구하
구승훈은 그녀의 허리를 잡고서는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보기 드문 부드러움이 담겨 있었다.강하리는 그의 얼굴에 나타난 부드러움을 보고 순간 멍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린 그녀는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며 웃었다.“대표님, 설마 후회하는 거예요?”구승훈은 그녀를 바라본 뒤 놓아주고서는 그녀의 옆에 기대어 담배에 불을 붙였다.“강하리 지금 내가 너 자존심 상하지 않게 양보하는 거야. 정말로 돌아오지 않을 거야?”“네.”그녀는 말을 마친 뒤 문을 열고 바로 집을 떠났다. 구승훈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잠시 후 그는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오늘 밤 구승현 이름으로 된 모든 재산을 회수해.”전화를 끊은 뒤 구승훈은 창가에 서서 이미 아래로 내려간 강하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밤거리를 걸어 점점 시야에서 사라졌고, 구승훈은 그제야 담배를 피웠다.그는 원래 강하리를 밖에서 며칠 동안 쉬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오늘 밤 일 때문에 그는 강하리를 밖에서 지내게 한 것을 후회했다. 카나리아는 카나리아다워야 한다.구승훈은 눈살을 찌푸리고서는 야경을 바라보다가 잠시 후 다시 전화를 걸었다.강하리는 돌아온 뒤 씻고 바로 잠에 들었다.다음날 그녀는 핸드폰 벨소리에 의해 잠에서 깨어났다. 비몽사몽 핸드폰을 확인한 강하리는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정서원의 주치의 전화였다.순식간에 졸음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바로 침대에서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선생님, 무슨 일 있나요? 혹시 저희 엄마한테...”“아니요.”의사의 대답에 강하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그럼 무슨 일이죠?”“그게 강하리 씨 어머니께서 사용하는 약은 사실 가격이 엄청 높은 것입니다. 전에는 구 대표님 때문에 약들을 전부 할인해 드렸는데 지금 구 대표님의 뜻은 앞으로 약들을 강하리 씨에게 할인해 드릴 필요가 없다고 하셔서요.”강하리는 순간 깜짝 놀라 전화기를 잡은
강하리는 더 이상 구승훈과 송유라의 사이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강하리는 정서원의 손을 잡고서는 어쩔 수 없이 눈시울이 붉어졌다.“엄마, 빨리 일어나 봐요. 네? 나... 조금 힘들어요.”강하리는 말을 한 후 눈물을 흘렸다. 손을 올려 눈물을 닦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그래도 다행이에요. 사실 3년 동안 쭉 한 사람이 도와줬어요. 그 사람 이름이 구승훈인데 엄마도 기억나요? 어렸을 때 우리 어촌마을에서 살았잖아요. 그때 울보였던 남자애예요. 근데 지금은 엄청 대단한 사람이 됐어요. 엄마 깨어나면 그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근데... 그 사람은 우리를 기억하지 못해요.”그녀는 웃으며 정서원의 손을 쓰다듬었다.“어차피 무슨 일이 있어도 엄마는 꼭 일어나야 해요. 늦어도 상관없어요. 그냥 날 혼자 버려두지 마세요...”정서원의 병실에서 나온 뒤 강하리는 의사에게 가서 병원비 청구서를 받은 뒤 수납하러 갔다. 자기 카드 안에 있는 모든 돈을 다 병원비로 냈고 모든 일을 끝마친 그녀는 그제야 병원을 나섰다.병원 입구까지 걸어왔을 때 우연히 심준호를 만났다.“하리 씨.”심준호의 불음에 강하리는 깜짝 놀랐다.“심 대표님, 여기는 무슨 일로 오셨어요?”심준호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그녀에게 물었다.“울었어요?”강하리는 다급하게 눈을 피했다.“아니요. 방금 바람이 너무 강하게 불어서요.”심준호는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하리 씨, 이런 상황에서 갑작스럽긴 하지만 날 친구라고 생각해요. 아니면 인생 선배라고 생각해도 좋고요. 안 좋은 일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도 돼요.”강하리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방금 엄마를 보고 와서 조금 기분이 안 좋았던 것뿐이에요.”심준호는 당황했다.“그렇군요. 어머님이 이 병원에 입원해 계세요?’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려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확인해 보니 손연지의 전화였다. 그녀는 조금 미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심 대표님, 죄송하지만 제가 일이 좀 있어서
강하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구승훈이 이 문제로 꼬투리를 잡을 것이라는 걸 예상했었다.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이 남자는 진심으로 그녀에게 조금의 퇴로도 남겨주지 않을 작정이었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내가 말했지만, 대표님이 동의하지 않았잖아요.”구승훈은 눈썹을 살짝 치켜떴다.“강 부장, 애초에 별장을 원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진실을 알아봐달라고 한 거 아닌가? 이제 진실도 알았으니 별장을 갖고 싶은 거야? 그건 좀 아니지 않아?”그는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빛에는 아무런 온도도 없었다.“승훈 씨.”강하리는 가슴속에서 전해져 오는 고통을 참으며 눈앞에 남자를 바라보았다.“그 별장은 내가 내 아이의 목숨으로 바꿔온 거예요.”그 순간 구승훈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강하리를 바라보다가 시간이 조금 흐른 뒤 입을 열었다.“강하리, 나하고 이런 감성팔이 할 필요 없어. 나는 그 아이 신경도 안 쓰니까.”강하리는 그를 바라보다가 잠시 후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그렇다면 나도 더는 승훈 씨의 소유가 아니겠네요. 어차피 이 세상에 돈 많은 사람은 많아요. 승훈 씨 당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부자가 아니라고요. 내가 마음먹고 열심히 찾아보면 언젠가는 날 기꺼이 도와줄 사람을 찾을 수 있겠죠.”구승훈의 얼굴이 바로 어두워졌다.그의 차가운 시선이 강하리에게 향했고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강하리, 다시 말해 봐.”강하리는 고개를 들어 구승훈의 싸늘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런 말들이 분명 이 남자를 화나게 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또한 그녀가 그의 앞에서 얼마나 나약한지도 알고 있었다. 그가 그녀를 조금 흔들기라도 하면 그녀는 최선을 다해 버텨야 했다.하지만...“사람은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 해요. 승훈 씨, 나도 그냥 잘 살아가고 싶을 뿐이에요.”그녀는 더 이상 이 남자에게서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결과가 없는 이 감정의 늪에 빠져들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진시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뭐라고요?”구승훈이 비웃었다.“진시연, 계속 그런 식으로 해. 빈털터리로 만들어 줄 테니까.”말을 마친 구승훈은 뒤돌아 떠났고 다시 JM 건물로 왔지만 휴대폰을 손에 쥔 채 강하리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휴대폰에는 강하리가 보낸 답장이 와 있었다.[알았어, 기다릴게.]구승훈은 피식 웃으며 갑자기 주먹으로 차를 내리쳤고 차의 경보음이 순식간에 도심 전체로 울려 퍼졌다.구승재는 정안 그룹 건물에서 황급히 내려와 구승훈의 곁에 다가간 뒤 그의 손에 주사를 건넸고 차에 돌아와 주사를 놓으며 구승훈은 미간을 꾹 눌렀다.“형수님이랑 혼인신고 하러 간다며? 왜 안 갔어?”구승훈은 묵묵부답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우선 영상을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찾아낸 다음 마음 놓고 강하리와 혼인신고를 할 수 있었다.그 영상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았다.당시 강하리는 제정신이 아니었고 설령 그녀가 주해찬을 정말 사랑한다고 해도 그는 그녀를 곁에 두고 싶었다.하지만 강하리의 평판은 고려해야 했기에 남자의 눈이 섬뜩하게 번뜩였다.잠시 후 그는 나문빈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휴대폰 해킹 좀 해줘요.”강하리는 온라인에서 구승훈의 프러포즈를 본 순간부터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고 회사 직원들도 그녀를 보고 농담을 건네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던 중 구승훈이 보낸 메시지를 받고 나서야 입가에 번지던 미소가 조금 옅어졌다.강하리는 한참 동안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구승훈에게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기다리겠다고 했지만 문득 그를 기다릴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적어도 오늘은 아니었다.강하리는 휴대폰을 옆에 내려놓고 고개를 숙여 일을 처리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녀는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어 도대체 혼인신고보다 더 중요한 일이 무엇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끝내 전화를 걸지는 못했다.아래층에 있는 남자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고 강하리는 씁쓸한 웃음을 터뜨리며 가슴이 답답했다.남자는 아래층에 있으면서 그녀
구승훈의 프러포즈는 온라인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소란스러운 동시에 또 다른 사건이 터졌다.돌아간 기자가 JM 건물 아래에서 찍은 영상을 전부 인터넷에 올렸고 동시에 주해찬으로부터 받은 진시연과의 채팅 기록과 진시연이 주해찬을 찾아와 손을 잡자고 제안하는 녹취록도 있었다.영상과 채팅 기록이 공개되자마자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고 여자에게 약을 먹이는 나쁜 행위에 원래도 치를 떨던 네티즌들은 진씨 가문 양딸이 친딸에게 그러한 짓을 했다는 것에 분노했다.진시연은 머리 검은 짐승이라며 양심이 없다고 욕하는 댓글을 보며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대체 왜?대체 왜 강하리는 프러포즈로 화제가 되는데 그녀는 욕이나 먹고 있는 걸까.대체 왜!진시연의 눈가에 잘 숨겨져 있던 증오가 터져 나왔다.구승훈이 정말 강하리와 주해찬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을 리가 없었다....가을바람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고 리시안셔스도 바람과 함께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바스락거리는 단풍잎 사이로 한 남자가 꽃다발을 손에 들고 시선을 내린 채 길거리에 서 있었다.그가 강하리에게 전화를 걸려고 하는데 갑자기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했고 여전히 가상 번호였다.구승훈의 얼굴에 가득했던 미소는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내용을 클릭하니 안에는 강하리가 주해찬에게 나도 사랑한다고 말하는 장면이 담긴 영상이 있었다.그 아래에는 한 마디가 덧붙여져 있었다.[이 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오는 걸 원하지 않는다면 강하리와 결혼하지 마.]휴대폰을 쥔 구승훈의 손 마디가 하얗게 질렸고 짙고 검은 눈동자에는 무거운 분노와... 살기가 일렁거렸다.그는 나문빈에게 번호를 보낸 뒤 강하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일이 생겨서 혼인신고는 다음에 하자.]그렇게 말한 뒤 그는 포장된 꽃을 차에 던지고 시동을 걸어 진씨 가문을 향해 차를 몰았다.구승훈이 찾아오자 진시연의 눈에 놀랍고도 기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구승훈 씨, 무슨 일이에요?”구승훈은 굳은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와 목을 움켜쥐었다.“진시연,
“말도 안 돼. 우리 시연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해? 시연이는...”“주해찬 씨로부터 이미 충분한 증거를 확보했습니다.”말을 마친 기자는 두 어르신을 향해 입술을 삐죽이며 자리를 떠났고 노부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무슨 말이야? 당신들 이 영상을 어디에 내보내려는 거야? 당신들...”이정숙이 기자를 따라잡기도 전에 기자와 카메라맨은 함께 차를 몰고 떠났다.이정숙은 화가 나서 발을 굴렀다. 만약 이 일이 알려지거나 인터넷에 영상이 공개되면 이시연이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겠나.“태형이한테 전화해. 이 일이 알려지면 태형이도 망신당할 거야.”진강석이 서둘러 말하자 이정숙은 망설이지 않고 서둘러 진태형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진태형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전화를 받은 강하리가 서둘러 회사로 달려가는데 그녀가 도착하기도 전에 기자들이 먼저 와 있었고 기자 앞에서 말문이 막힌 진강석 내외를 보며 한참 후 그녀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번졌다.누가 시킨 건지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다.구승훈 말고는 이렇게 할 사람이 있을까.강하리는 문득 이제 정말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는 걸 느꼈다.여전히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그녀의 모든 안정감은 이 남자로부터 온다는 것을.마치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 앞에 굳건히 버티고 서 있어 줄 것 같았고 두 사람이 함께 있는 한 어떤 고통과 어려움이 닥쳐도 이겨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강하리는 운전대를 꽉 움켜쥐고 알 수 없는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휴대폰을 꺼내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다.“강 대표님, 시키실 일이라도 있나?”시선을 떨군 강하리가 결심한 듯 말했다.“구승훈, 혼인신고 하러 가자.”전화기 너머 구승훈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그래.”그가 웃으며 답했다.“내가 데리러 갈 테니 기다려.”강하리는 구승훈과 통화를 마치고 사무실로 들어갔는데 문에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하리야, SNS 봐!”강하리의 발걸음이 멈칫했다.“왜 그래? 또 무
JM회사 아래층에서 늘 정교하게 치장하던 석미란은 지금 전혀 화장하지 않은 상태였다.창백한 안색에 피곤함을 감추기 어려웠지만 눈빛에는 증오가 가득했다.불과 며칠 만에 아들은 유치장에 들어갔고 남편은 해당 부문에서 조사받고 있다.멀쩡하던 가정이 여자 하나 때문에 파괴되었는데 이젠 그 여자에게 사과까지 해야 한다.석미란은 내키지 않았고 여전히 강하리가 미웠다.어디선가 튀어나온 잡종이 어느새 그녀의 머리 위로 기어오르고 있었다.석미란의 뒤에 서 있던 석연란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석미란과 석연란 외에도 진씨 가문 어르신 내외가 경호원 몇 명까지 대동하고 찾아와 열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함께 JM회사 입구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왜 아직도 안 와?”이정숙이 다소 짜증스럽게 물었다.원래는 곧장 심씨 가문으로 가서 강하리를 만나고 싶었지만 놀랍게도 강하리가 심씨 가문에 없어서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회사까지 찾아왔다.하지만 한 시간 넘게 기다렸지만 여전히 강하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이정숙의 말애 석씨 자매의 표정도 한층 더 일그러졌다.누가 봐도 강하리가 일부러 나타나지 않는 게 분명했다.“누구 앞에서 텃세를 부리는 거야!”이정숙의 얼굴이 차가워지면서 당장이라도 화를 낼 기세였고 진강석이 막 말을 하려는 순간 앞에 차 한 대가 멈춰 섰다.다들 강하리가 오는 줄 알았지만 차에서 내린 사람이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고 다가올 줄이야.그들의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기자가 일행의 앞으로 다가왔다.“여러분들은 인터넷에서 강하리 씨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사과하기 위해 여기 계신 건가요?”그 말에 석미란의 표정이 확 바뀌었고 그녀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기자가 다시 물었다.“게다가 얼마 전에 강하리 씨 출신에 대한 루머를 퍼뜨려서 고소당해 법원까지 갔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석미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무, 무슨 헛소리에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 망할...”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석연란이 옆에서 끌어당겼고 석미란
다시 입을 연 구승훈의 목소리가 살짝 갈라져 있었다.“자기야, 한 번만 더 불러봐. 응?”강하리의 표정이 어색함으로 물들었다.조금 전에는 몰랐는데 이제야 얼굴에 열기가 치솟는 게 느껴졌다.“내 남편이라고.”그녀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했고 구승훈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네 남편은 나잖아?”강하리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를 바라보았다.“누가 나랑 결혼하면 그 사람이 내 남편이지.”구승훈은 홧김에 그녀를 콱 끌어안았다.“우리 강 대표님이 주방에서 하고 싶나 봐?”남자가 말하며 그녀의 옷 속으로 손을 뻗자 놀란 강하리가 순간적으로 몸부림을 쳤다.두 사람은 부엌을 난장판으로 만들었고 손연지가 내려와서 그 광경을 목격했다.그녀는 부엌에 있는 두 사람을 조용히 바라보며 말로 표현 못할 감정을 느꼈다.부러움?아마도 부러운 거겠지.하지만 사실 그녀는 강하리의 결단이 더 부러웠다.구승훈을 떠나기로 마음먹었을 때도 강하리는 망설임이 없었다.매번 노민우와 깨끗이 손절하려고 마음먹었어도 몇 번이나 다시 엮이고 타협하는 자신과 달리.그래서 이런 결과가 나온 거다.손연지는 마음이 답답했다. 사실 누구도 탓할 수가 없었고 탓하려면 결단력이 부족했던 자신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심호흡한 뒤 마음을 추스르며 아래로 내려갔고 강하리는 손연지가 내려오는 것을 보고 황급히 구승훈에게서 떨어졌다.“연지야, 아침 뭐 먹을래?”손연지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애정 행각에 이미 배가 불러.”강하리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밥 먹고 연정이 데리러 갈 거야.”손연지의 눈빛이 순식간에 밝아졌다.“좋아. 내가 연정이 선물도 챙겨왔어.”하지만 그다음 순간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그녀의 얼굴에 머금은 미소엔 씁쓸함이 섞여 있었다.강하리는 그걸 분명히 알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때론 본인 스스로 이겨내야 하는 것들이 있다.지금 손연지를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손연지를 돌봐주는 것뿐이고 손연지가 몸을 추스르고 나면 일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이었다.
구승훈은 강하리가 보낸 메시지를 보며 세 식구라는 단어를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다가 피식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좋아.]그의 의견을 묻다니, 어떻게 감히 싫다고 하겠나.답장을 마친 구승훈은 욕실로 들어갔고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휴대폰이 울리고 있었다.쉬지 않고 울리는 휴대폰을 바라보던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전화가 끊어지려고 할 때쯤 통화 버튼을 눌렀다.전화기 너머에서 구동근의 연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정안그룹과 에비뉴를 강하리한테 다 넘겼어?”구승훈은 비웃었다.“네, 왜요? 불만 있으세요, 어르신?”구동근은 그의 말에 피를 토하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났다.“구승훈, 그건 다 우리 구씨 가문 재산이야! 네가 뭔데 그 여자한테 줘!”강하리가 심씨 가문 출신이라는 사실을 안 후 구동근은 더 이상 구승훈과 강하리의 만남을 반대하지 않았고 심지어 몸을 굽혀 심씨 가문에게 사죄할 수도 있었지만 구씨 가문의 재산이 그렇게 쉽게 넘어갔다는 사실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게 다 구씨 가문의 재산이었는데!이 망할 자식이 그렇게 쉽게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다니!구승훈은 여전히 나른한 목소리로 가볍게 웃었다.“왜요? 벌써 잊으셨어요? 구씨 가문 재산은 어르신 귀한 손주가 다 망쳐버렸어요.”“너!” 말을 꺼내지 않으면 모를까, 그 말을 하자 구동근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차갑고 냉정한 손자가 한 여자 때문에 자기 가족을 내팽개칠 줄은 상상도 못 했다.구승훈은 웃음을 터뜨리며 목소리가 점점 더 차가워졌다.“다시는 나랑 강하리 사이 방해하지 마세요. 저한테도 할아버지가 꼭 필요한 건 아니니까요.”구승훈이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자 저쪽에서 구동근은 너무 화가 나서 전화기를 부술 뻔했다.전화를 끊자 옆에 서 있던 구씨 가문의 둘째가 다소 불안한 듯 물었다.“아버지, 어떻게 됐어요? 정말 그 두 회사를 강하리한테 다 줬대요?”구씨 가문의 둘째는 노인의 표정을 보고 순간적으로 불안해졌다.“그놈이 무슨 권리로 두 회사를 망할 년에게 넘겨줘요? 거기
거칠게 원하던 구승훈이 마침내 움직임을 멈춘 순간 강하리는 비틀거렸고 구승훈이 단숨에 그녀를 품에 낚아챘다.“너무 좋아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겠어?”강하리는 너무 화가 나서 그를 발로 차버리고 싶었다.“좋기는 개뿔!”구승훈은 웃으며 강하리를 안고 화장실로 들어갔다.“응, 나도 좋았어.”“...”개자식과 더 실랑이를 벌일 기운도 없었다. 뻔뻔한 걸로는 절대 그를 이길 수 없었다.구승훈은 강하리를 씻겨주고 그녀를 안아 침대로 돌아왔다.강하리는 손가락을 들 수 없을 정도로 피곤했지만 그래도 꿋꿋이 옷을 끌어당겨 입었고 구승훈은 그녀의 움직임을 보며 눈썹을 치켜들었다.“어디 가?”“연지 보러 갈 거야. 오늘 밤엔 연지랑 잘 거야.”구승훈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강하리, 넌 내 아내야.”강하리가 그를 슬쩍 보았다.“아직 결혼 안 했잖아.”구승훈이 그녀를 껴안았다.“그러면 내일 혼인신고 하러 갈래?”강하리의 몸이 경직되며 문득 지난번에 구승훈이 혼인신고 하자는 말을 했던 게 떠올랐다.그러다 그녀에게 돌아온 건 심미현의 죽음과 오지 않는 구승훈이었다.강하리의 몸이 눈에 띄게 굳어지자 구승훈은 무거운 마음으로 그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지난번 같은 일은 없어.”강하리가 그를 돌아보았다.“만약 또 그런 일이 생기면...”구승훈의 짙고 검은 눈동자에 밝은 빛이 비쳤다.“또 그런 일이 생기면 난 고자가 될 테지만 걱정하지 마, 강 대표님. 내가 손으로도 잘 모실 수 있으니까.”“... 닥쳐!”말을 마친 그녀가 잠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가다가 두 걸음도 못 가서 갑자기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바라보았다.“또 콘돔 안 썼어?”강하리는 말하며 지난번에도 구승훈이 콘돔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구승훈, 미쳤어? 난 지금...”구승훈이 그녀의 턱을 그러쥐었다.“걱정하지 마, 임신 안 해.”강하리는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는 눈빛으로 구승훈을 바라봤고 구승훈은 손으로 강하리의 턱을 어루만지기만 했다.“나 묶었어.”
손연지는 식사를 마치고 잠을 청하기 위해 방으로 돌아갔다.아직 몸조리가 필요한 그녀는 도저히 찾아갈 데가 없어 결국 강하리를 찾으러 B시까지 왔다.강하리는 구승재에게 전화를 걸었다.손연지는 자신이 겪은 일을 몇 마디로 설명했지만 강하리는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구승재도 별말 없이 바로 손연지에 대해 알아본 사실을 강하리에게 전했고 대충 손연지가 말한 내용과 거의 같았지만 몇 가지 세부적인 내용이 빠져 있었다.손연지가 병원에서 손가락질받고 있었다는 것, 노민우의 약혼녀라는 사람이 손연지를 머물 곳도 없게 궁지로 내몰았다는 것 등등...손연지는 노민우를 그냥 두지 않았다고 했지만 사실은 노민우의 어머니가 노민우 몰래 손연지를 노씨 가문으로 데려와 심한 모욕을 준 것뿐이었다.그래도 손연지가 고분고분 말을 듣는 성격은 아니라 노씨 가문에서 한바탕 소란을 피웠고 상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손연지에게 수표를 던지며 연성을 떠나라고 했다.손연지는 자신이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했고 노민우의 결혼을 파탄 낼 생각도 없었기에 처음엔 연성을 떠나지 않았지만 놀랍게도 노민우의 어머니가 그녀의 부모님까지 찾아갔다.강하리는 죄책감으로 가득 찬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손연지에게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는데도 그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구승훈이 강하리를 뒤에서 껴안았다.“나를 이렇게 걱정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강하리는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어떻게 같아?”구승훈은 납득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뭐가 다른데?”강하리는 시선을 떨구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많은 일을 겪었지만 그녀를 정말로 기쁘게 만드는 건 별로 없었다.어릴 적 강찬수의 가정 폭력부터 나중에 구승훈에게 받은 상처까지,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손연지가 곁에 있었고 그녀에게 손연지는 가족이었다.강하리는 대답이 없었고 구승훈도 더 묻지 않아 거실은 무척 조용했다.하지만 조용한 시간은 얼마 가지 않았고 구승훈이 귓불을 깨물며 그녀의 몸을 달구기 시작했다.강하리는 조금 긴장한
구승훈은 강하리를 다소 시무룩한 표정으로 바라보면서도 결국 순순히 입을 다물었고 손연지는 구승훈을 보고 웃었다.구승훈은 굳어진 표정으로 두 사람을 따라 계단을 내려가다가 모퉁이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강하리를 한 손으로 잡아당긴 뒤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오늘 밤에 보상해 줄 거야?”강하리는 순간 조금 전 당황스러운 장면이 떠올랐고 손연지가 지금 슬픈 상황에서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싶지 않았다.“가만히 있어.”구승훈의 입술이 그녀의 귀에 닿았다.“그러면 손으로만 하는 건?”남자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가로질러 그녀가 승낙할 때까지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이 꽉 감싸자 강하리는 결국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이따가 내려가선 얌전히 있어.”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아내 말은 들어야지.”손연지는 식사 내내 먹는 둥 마는 둥 했고 식사가 끝날 무렵 강하리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노민우였다.강하리는 손연지를 바라보며 바로 전화를 끊었고 손연지는 못 본 척했지만 표정이 한층 어두워졌다.하지만 잠시 후 구승훈의 휴대폰도 울렸고 그는 눈썹을 치켜들며 전화를 집어 든 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갔다.바깥에 도착하고 나서야 구승훈은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노민우가 아닌 노민준의 전화였고 그는 뒤를 돌아보고는 전화를 받았다.“그 주사 효과가 어때?”구승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괜찮아. 지난 이틀 동안 상태가 전보다 훨씬 안정됐어.”거짓말이 아니었다. 구승훈은 노민준이 건넨 주사를 맞고 나서부터 지난 이틀 동안 단 한 번의 이상도 느끼지 못했고 그것이 그가 오늘 유난히 기분이 좋았던 이유였다.노민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포기하지 말라고 했잖아.”짧게 대꾸한 구승훈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말을 마친 노민준이 잠시 멈칫했다.“참, 내 동생이 할 말이 있대.”곧이어 저쪽에서 노민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승훈아, 손연지는 지금 어때?”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네 여자를 왜 나한테 물어봐?”“승훈아, 나도 네가 강하리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