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강하리가 눈을 떴을 때 구승훈은 옷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채로 침대 옆에 서서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피곤하면 하루 쉬어도 돼.”어젯밤 구승훈은 강하리를 거칠게 몰아붙였고 그녀는 새벽이 되어서야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강하리는 고개를 저으며 바로 일어나 앉았다. 회사에 처리해야 할 업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 쉴 수가 없었다.구승훈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그럼 나랑 같이 갈래?”그러나 강하리는 재차 거절했다.“괜찮아요. 전 버스 타고 갈게요.”하지만 구승훈은 그녀의 말을 전혀 듣지 못한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문 옆에 기대서서 그녀를 기다렸다.그를 흘끗 쳐다본 강하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으려던 찰나 무언가 떠오른 듯 손가락을 움찔하더니 서랍에서 작은 박스 하나를 꺼냈다.그 안에는 얼마 전 그녀가 안전을 지켜달라고 기원하며 받았던 염주가 들어 있었다.사실 구승훈의 생일 선물로 주려고 했지만, 어제 그가 물을 때 갑자기 그 슈트가 생각나더니 이내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구승훈에게 또다시 마음을 주었다가 무참히 짓밟히는 짓은 더는 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그에게 이런 선물 따위는 필요하지도 않을 테니 말이다. 강하리는 고개를 떨구고 그 박스를 다시 서랍 속 깊숙이 집어넣었다.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구승훈은 여전히 문 앞에 서있었다. 강하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물었다.“대표님, 그 일은 어떻게 됐어요?”눈빛이 급격히 어두워진 구승훈은 잠시 침묵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강 부장은 진실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야?”강하리는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적어도 저한테는 아주 중요해요.”구승훈은 어두운 안색으로 한참을 있다가 다시 말했다.“그 일은 확실히 누군가 계획적으로 한 게 맞아.”입술을 굳게 다문 강하리는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몸 옆에 떨어뜨린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입술을 바르르 떨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송유라예요?”구승훈은 강하리를 바
“유라 한동안 좀 쉬라고 해.”...안예서는 회사로 출근한 강하리를 보자마자 이상한 점을 감지하였다.“부장님, 무슨... 일 있어요?”강하리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별거 아니야, 저녁에 잠을 잘 못 잤나 봐. 연말 실적 보고서 준비는 잘 돼가?”“네, 거의 다 완성됐어요.”여전히 시름이 놓이질 않는지 안예서는 강하리를 계속 살피며 얘기했다.“부장님,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저한테라도 말씀 해주세요. 뭐 제가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그래도 혼자 끙끙 앓는 것보다 누가 옆에서 아이디어라도 내주면 좋잖아요.”안예서의 마음 씀씀이가 너무 기특하여 강하리는 저도 몰래 웃음이 새어 나왔다.“고마워, 예서 씨.”“에이, 그런 말씀 마세요.”안예서는 갑자기 가까이 다가서며 목소리를 낮춰 다른 얘기를 꺼냈다.“근데 부장님, 혹시 들으셨어요? 어제 대표님이 약혼을 안 했대요.”강하리는 고개만 살짝 끄덕일 뿐 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다.사실 지금 제일 듣기 싫은 얘기가 바로 구승훈과 송유라에 관한 소문이었지만, 조잘대는 안예서를 그냥 내버려두었다.흥, 콧방귀를 뀌며 안예서가 말을 이었다.“그렇게 잘난 척하더니 결국 이런 날이 온다니깐요. 부장님은 모르시겠지만 저번에 송유라가 대표님과 약혼식 올린다고 SNS에서 자랑질을 얼마나 해댔는데요. 하, 이번에 코가 제대로 납작해지겠네요. 난 또 우리 대표님이 송유라를 얼마나 좋아한다고... 뭐 결국은 별거 아닌 거였네요.”강하리는 한번 웃어 보이고는 업무 모드로 표정을 바꾸며 말했다.“됐어, 이제 그만하고 업무보고서나 가져와 봐.”혀를 살짝 내두르며 안예서는 서둘러 강하리의 지시대로 보고서를 챙기러 가버렸다.끝내 조용해졌다.강하리는 책상 위에 놓인 서류철을 보며 넋을 잃었다.어젯밤에 구승훈이 송유라와 약혼식을 올리지 않았다고 했을 때, 솔직히 말해 그녀는 매우 기뻤다. 그 둘이 약혼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그것이 그녀의 사심에서 비롯된 것이든 송유라와의 원한 관계에서였든, 이유는 중
강하리는 무어라 답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구승재도 그녀를 생각해서 하는 말인 줄 아니 삐딱하게 들리진 않았다. 구승훈이 수호신처럼 송유라를 감싸고 도는데 내려놓지 않으면 또 어떡하겠나.하지만 마음속으로 달갑지는 않았다. 서류봉투의 끄트머리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그러고는 그 대화를 이어나가지 않았다.식사만 간단히 하고 다시 회사로 돌아왔는데, 때를 맞춰 휴대폰이 울렸다.“올라와.”구승훈의 서늘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휴대폰에서 흘러나왔다.제자리에서 몇 초 못 박혔다가 돌아서서 올라가는 계단을 탔다.대표 사무실에 들어가니 구승훈은 창가에 서서 창밖을 보고 있었다.저런 뒷모습이면 얼굴색은 보나 마나 가라앉아 있겠지.강하리는 그가 기분이 안 좋음을 감지했다.“대표님, 부르셨어요.”구승훈은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짙은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봤다.“식사 끝났어?”“네.”담담한 표정으로 그는 강하리의 앞으로 걸어와 얇은 입술을 열었다.“그럼 얘기해 봐. 밥 먹는 것 외에 또 뭘 했는지.”강하리는 눈살을 찌푸렸다.“죄송한데, 무슨 말씀 하시는지 모르겠어요.”구승재랑 밥만 먹었는데 뭐가 더 있어야 하는가. “진짜 모르겠어? 그럼 이거, 설명해 봐.”구승훈은 서류 몇 장을 그녀한테 툭 던졌다.살펴보니 무슨 카톡 대화 기록을 캡처한 것이었는데 그녀의 프로필 사진과 아이디로 누가 파파라치한테 송유라가 그녀를 유산하게끔 만들었다는 과정을 폭로한 제보 내용이었다.아주 잠깐 어리둥절하였다가 금세 머리가 지끈지끈해지는 것만 같았다.한참 후에야 눈을 들어 구승훈을 바라보며 강하리는 물었다.“그럼 대표님은 이게 제가 한 짓이라는 거죠?”“강 부장 아니야?”매우 당연하다는 듯 그는 되물었다.눈앞에 남자를 조금 넋이 간 채로 쳐다봤다. 그리고 잠시 뒤엔 픽 웃음이 터져 나왔다.“맞아요, 내가 한 거. 이렇게 하고 싶어서 근질근질했어요. 송유라가 내 배 속의 아이를 해쳤는데 난 그 여자가 한 짓 폭로하면 안 돼요? 왜 안되는데요?”“강하
송유라가 나간 것을 보고 뒤이어 들어온 안예서가 강하리의 모습을 보고 얼른 물 한 잔 따라 주었다.“부장님, 괜찮으세요?”강하리는 아무 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마음속은 답답하기만 하였다.송유라의 말대로 자신은 그녀와 게임이 안 되는 거였다. 구승훈이 그녀를 아주 감싸고 도는 점에서만 봐도 이미 진 싸움이었다.씁쓸한 웃음이 터져 나왔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강하리는 패배를 인정하기로 했다. 철두철미한 패배였다.그리고 더는 이 일에 얽매이고 싶지 않았다. 구승훈과 송유라의 일에 더는 자신을 끼워 넣고 싶지 않았다. 그 일 말고도 할 일이 이토록 많은데 굳이 진 싸움에 시간과 정서를 쏟아부을 일 있는가.그 남자는 어린 시절의 꿈이었다. 하나 그 꿈을 찢어버린 사람도 그 남자였다.아마 꿈속의 그 남자는 17살 때 이미 그 해변에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바보 같이 그녀만 놓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꿈에서 깨어나 현실을 마주하니 잔인하게도 현실은 그저 눈물자국으로 얼룩진 고통뿐이었다....강하리는 눈을 깜빡이며 다시 정신을 차려 그 자질구레한 일들은 인제 그만 생각에서 제외하기로 맘 먹었다.퇴근 후, 강하리는 물건을 정리하고 회사를 나와 글로벌 투자 유치회가 진행되는 장소로 향했다.산업통상자원부와 외교부에서 공동 개최한 투자 유치회는 마침 연성시에서 열리게 되었고 강하리는 이번 행사에서 통역을 맡게 되었다. 얼마 전에 임정원한테 추천한 그 선배는 그녀가 연성시에 있다는 걸 알고 이번 회의에 나와주기를 요청하였다. 처음엔 거절했지만 결국에는 승낙했다.투자 유치회 진행 장소인 국제컨벤션센터에 도착하니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차에서 내리는데 누가 그녀를 불렀다.“강하리!”소리를 따라가 보니 한 남자가 멀지 않은 곳에서 계단 위에 서 있었다.주해찬. 현 외교부 내에서 인기가 대단하고 촉망받는 샛별.강하리는 그를 향해 걸어갔다. 주해찬도 계단에서 내려오며 몇 발 성큼성큼 걸어와 강하리 앞에 멈춰 섰다.“오랜만이야,
강하리의 웃음기가 얼어붙었다.오늘 밤 일은 구승훈한테 알리지도 않았고, 알렸으면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구승훈은 감정적으로는 자신한테 신경을 안 쓰면서 이상하게 소유욕과 통제욕은 유난히 넘쳤다. 그 남자가 대체 무슨 생각인지 머리를 한번 뜯어보고 싶어질 지경이다.그 머릿속에 송유라만 들어찼을 것이 분명한데 왜 또 하필 그녀를 곁에 묶어 두려고 하는지.사색이 또 그 둘한테로 흐르니 짜증이 뻗칠까 하였다. 애써 신경을 안 쓰려고는 했지만 답답한 속은 그리 쉽게 풀리지 않았다.얼굴색이 어두워지는 강하리를 보고 심준호는 미간이 자연스럽게 모아졌다.“다퉜어요?”그 말에 상념에서 깨어나며 강하리는 고개를 저었다.“아뇨.”심준호도 굳이 눈치 없게 캐묻지는 않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도움 필요하면 말해요. 난 친분보다 도리가 있는 편에 서는 타입이라.”강하리의 입가에 미소가 새어나오며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주해찬이 돌아왔다.심준호는 강하리를 보며 말했다.“이따 행사 끝나면 다시 얘기해요.”강하리는 알겠다고 답했다.심준호를 보내고 나서 강하리는 주해찬과 같이 통역실로 향했다.“떨려?”주해찬은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강하리는 슬쩍 웃으며 대답했다.“안 떨린다면 거짓말이겠죠.”동시통역을 해본 지도 3년이 넘는데 첫 단추를 이렇게 큰 규모의 회의로 꿰게 생겼으니 실수하게 될까 봐 속은 엄청 긴장했다.하지만 주해찬은 그저 웃기만 하며 말했다.“난 널 믿어.”그를 힐긋 보고는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미 승낙한 이상 잘 해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그녀도 전쟁을 앞두고 꼬리 빼는 성격은 아니었다.통역실에는 이미 몇 명의 통역사들이 들어와 있었다. 그들은 한창 낮은 소리로 이번 행사 주제와 내용에 관해 토론하고 있었고, 주해찬이 강하리를 데리고 들어오자 일제히 그들 쪽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높은 급의 경력이 화려한 동시통역사들끼리는 보통 다 아는 사이거나 각종 회의에서 얼굴 정도는 본 적이 있었지만, 강하리
주해찬은 감개무량했다."진작에 돌아왔어야 했어.”강하리는 입술을 오므리고 웃었다. 그녀도 돌아가고 싶었다. 그런데... 아마 이렇게 쉽지는 않을 것이었다.구승훈의 고비를 넘기는 것조차 곤란했다.두 사람은 안에서 나오자마자 심준호를 보았다.그는 이미 물건을 챙기고 컨벤션센터 입구에 서 있었다.강하리를 보자마자 그는 입을 열었다."하리씨, 데려다줄까요?”주해찬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원래 강하리를 데려다주려고 했으니 말이다.심준호는 그의 생각을 꿰뚫어 본 것 같았다."아직 할 일이 많으시죠?”주해찬은 마지못해 웃었다. 할 일이 많은 건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회의는 끝났지만 외빈들이 있으므로 접대를 해야 했다.하지만 그도 급하지 않았다. 강하리와 연락이 닿은 이상 다시는 그녀를 사라지게 하지 않을 것이었다.그는 강하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그럼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요.”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해찬과 작별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심준호와 함께 떠났다.밖에 나가서야 강하리가 입을 열었다."심 대표님,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심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지난번에 어머니가 계속 혼수상태에 빠졌다고 하셨는데, 지금은요? 좀 나아졌나요?"심준호도 그가 왜 이러는지 몰랐다. 스스로도 웃기지만 지난번에 강하리에게서 어머니께서 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 그는 줄곧 이 일을 걱정하고 있었다.강하리의 어머니가 자신의 누나일 리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정서원의 얘기를 꺼내면 강하리는 마음이 아파 났다."그래도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의하면 깨어날 기회가 있다고 합니다.”심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앞으로 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말씀하세요.”강하리가 웃으며 알겠다고 했다.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주차장 입구에서 눈에 익은 컬리넌이 보였다.구승훈은 검은 코트를 입고 있었다. 추운 겨울밤의 어둠 속에 서 있었는데 구승훈이 이 날씨보다 더 차가운 것
구승훈은 그녀가 하는 말을 제대로 못 들은 듯 눈살을 찌푸렸다."뭐라고?"그는 냉정한 눈빛으로 강하리를 응시하고 있었다.그녀는 그의 시선을 맞추며 대답했다."나가서 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구승훈은 순간 안색이 굳어졌다."강하리, 내가 한 말을 잊었어? 우리의 관계는 내가 끝내지 않는 이상 끝낼 수 없어!”강하리가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잊지 않았습니다. 알고 있어요. 우리의 이 관계에서 저는 영원히 발언권이 없다는걸요.”그래서 그녀는 끝낸다고 말하지 않았다. 말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앞으로 대표님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전화 주세요. 바로 달려가겠습니다.”구승훈의 짙은 눈매는 마치 불꽃을 가득 담은 것 같았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강하리를 보고 있었다.방 안의 분위기는 너무 억압되어 있었다.그러나 강하리는 물러설 기색이 없었다.한참 후에야 구승훈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강 부장 대단한데, 부르면 바로 온다니.”이 한마디는 너무 모욕적이었다. 각오하고 있었는데도 난감했다.그녀는 가슴에서 끓어오르는 답답함을 꾹 참고 자신을 억지로 웃으며 대답했다."물론 대표님께서 돈을 헛되이 쓰게 할 수는 없죠.”구승훈은 얼굴에 냉소를 머금고 강하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목소리에는 냉기가 가득했다."오늘 밤 내가 주해찬과의 관계를 물어서 그래? 아니면 낮에 있었던 일 때문에?”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그 일은 이미 조사했어. 누군가가 널 사칭한 것이 확실해.”강하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아, 그래요? 그럼 대표님께서 제 결백을 밝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구승훈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다가 얼마 후에야 입을 열었다."강하리, 네가 마음대로 승재를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오늘 같은 일은 없었을 거야. 이제 조사할 것은 다 조사했으니 더 욕심부리지 마.”강하리의 마음은 순식간에 아파졌다. 그녀는 예전에 확실히 자신을 너무 대단하게 여겼던 것 같았다. 그래서 자꾸 주제넘게 탐색하고 쟁취하려고
구승훈이 갑자기 머리를 숙이고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전에는 보지 못했던 자상함이었다.입술부터 뺨까지, 그리고 새하얀 목덜미까지. 마치 맛있는 음식을 맛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옷을 힘껏 찢었다. 옷이 터지는 소리가 방 안에서 울렸다. 강하리는 갑작스러운 추위에 온몸을 떨었다. 하지만 구승훈이 갑자기 그녀를 놓아버렸다. 그리고는 옆으로 가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씻고 와. 다른 남자랑 데이트하고 왔으니까. 더러운 건 딱 질색이거든."다른 사람에게 모욕을 주는 것만으로 말하자면, 아마 구승훈을 이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남자가 평소에 얼마나 점잖고 우아하든 상관없었다. 그는 뼛속까지 잔인하고 포악했다. 그는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녀를 장난감으로 보았다.강하리는 치욕을 참으며 욕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고집이 센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구승훈의 얼굴이 더 안 좋아졌다. 그는 강하리에게만 줄곧 양보했고 인내했다.한 여자를 위해 이렇게 많은 양보를 한 적이 처음이었다.하지만 하필이면 그녀는 만족할 줄 몰랐다.결국, 한 사람의 연인에 불과했다.그는 여자 때문에 통제 불능이 되는 이런 느낌을 정말 싫어했다. 그는 차라리 내보내고 마지막에 결국 돌아와서 울면서 빌기를 바랬다.구승훈은 문 옆에 기대어 담배를 피웠다. 강하리가 목욕을 마치고 나온 후에야 그는 고개를 살짝 들었다."강하리, 한 번 더 기회를 줄 테니 이사하지 않으면 안 돼 꼭 해야 해?""네."이사해서 집을 나간다고 이 관계를 벗어날 수는 없다는 걸 다 안다고 하더라도 강하리는 여전히 같은 생각이었다.하지만 적어도 이 남자로부터 멀리할 수 있어서 좋았다. 이 관계로부터 깨끗하게 나 자신을 선택할 수 있을 때까지.구승훈이 갑자기 웃더니 말했다."좋아, 강 부장. 떠나고 싶다면 당신을 돕겠지만 계약이 끝나지 않는 한, 당신은 여전히 내 여자라는 것을 기억해야 해!"강하리가 입술을 깨물었다.구승훈이 턱을 추어올리며 말했다. "이리 와."그녀가 걸어왔다.
진시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뭐라고요?”구승훈이 비웃었다.“진시연, 계속 그런 식으로 해. 빈털터리로 만들어 줄 테니까.”말을 마친 구승훈은 뒤돌아 떠났고 다시 JM 건물로 왔지만 휴대폰을 손에 쥔 채 강하리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휴대폰에는 강하리가 보낸 답장이 와 있었다.[알았어, 기다릴게.]구승훈은 피식 웃으며 갑자기 주먹으로 차를 내리쳤고 차의 경보음이 순식간에 도심 전체로 울려 퍼졌다.구승재는 정안 그룹 건물에서 황급히 내려와 구승훈의 곁에 다가간 뒤 그의 손에 주사를 건넸고 차에 돌아와 주사를 놓으며 구승훈은 미간을 꾹 눌렀다.“형수님이랑 혼인신고 하러 간다며? 왜 안 갔어?”구승훈은 묵묵부답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우선 영상을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찾아낸 다음 마음 놓고 강하리와 혼인신고를 할 수 있었다.그 영상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았다.당시 강하리는 제정신이 아니었고 설령 그녀가 주해찬을 정말 사랑한다고 해도 그는 그녀를 곁에 두고 싶었다.하지만 강하리의 평판은 고려해야 했기에 남자의 눈이 섬뜩하게 번뜩였다.잠시 후 그는 나문빈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휴대폰 해킹 좀 해줘요.”강하리는 온라인에서 구승훈의 프러포즈를 본 순간부터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고 회사 직원들도 그녀를 보고 농담을 건네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던 중 구승훈이 보낸 메시지를 받고 나서야 입가에 번지던 미소가 조금 옅어졌다.강하리는 한참 동안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구승훈에게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기다리겠다고 했지만 문득 그를 기다릴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적어도 오늘은 아니었다.강하리는 휴대폰을 옆에 내려놓고 고개를 숙여 일을 처리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녀는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어 도대체 혼인신고보다 더 중요한 일이 무엇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끝내 전화를 걸지는 못했다.아래층에 있는 남자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고 강하리는 씁쓸한 웃음을 터뜨리며 가슴이 답답했다.남자는 아래층에 있으면서 그녀
구승훈의 프러포즈는 온라인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소란스러운 동시에 또 다른 사건이 터졌다.돌아간 기자가 JM 건물 아래에서 찍은 영상을 전부 인터넷에 올렸고 동시에 주해찬으로부터 받은 진시연과의 채팅 기록과 진시연이 주해찬을 찾아와 손을 잡자고 제안하는 녹취록도 있었다.영상과 채팅 기록이 공개되자마자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고 여자에게 약을 먹이는 나쁜 행위에 원래도 치를 떨던 네티즌들은 진씨 가문 양딸이 친딸에게 그러한 짓을 했다는 것에 분노했다.진시연은 머리 검은 짐승이라며 양심이 없다고 욕하는 댓글을 보며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대체 왜?대체 왜 강하리는 프러포즈로 화제가 되는데 그녀는 욕이나 먹고 있는 걸까.대체 왜!진시연의 눈가에 잘 숨겨져 있던 증오가 터져 나왔다.구승훈이 정말 강하리와 주해찬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을 리가 없었다....가을바람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고 리시안셔스도 바람과 함께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바스락거리는 단풍잎 사이로 한 남자가 꽃다발을 손에 들고 시선을 내린 채 길거리에 서 있었다.그가 강하리에게 전화를 걸려고 하는데 갑자기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했고 여전히 가상 번호였다.구승훈의 얼굴에 가득했던 미소는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내용을 클릭하니 안에는 강하리가 주해찬에게 나도 사랑한다고 말하는 장면이 담긴 영상이 있었다.그 아래에는 한 마디가 덧붙여져 있었다.[이 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오는 걸 원하지 않는다면 강하리와 결혼하지 마.]휴대폰을 쥔 구승훈의 손 마디가 하얗게 질렸고 짙고 검은 눈동자에는 무거운 분노와... 살기가 일렁거렸다.그는 나문빈에게 번호를 보낸 뒤 강하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일이 생겨서 혼인신고는 다음에 하자.]그렇게 말한 뒤 그는 포장된 꽃을 차에 던지고 시동을 걸어 진씨 가문을 향해 차를 몰았다.구승훈이 찾아오자 진시연의 눈에 놀랍고도 기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구승훈 씨, 무슨 일이에요?”구승훈은 굳은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와 목을 움켜쥐었다.“진시연,
“말도 안 돼. 우리 시연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해? 시연이는...”“주해찬 씨로부터 이미 충분한 증거를 확보했습니다.”말을 마친 기자는 두 어르신을 향해 입술을 삐죽이며 자리를 떠났고 노부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무슨 말이야? 당신들 이 영상을 어디에 내보내려는 거야? 당신들...”이정숙이 기자를 따라잡기도 전에 기자와 카메라맨은 함께 차를 몰고 떠났다.이정숙은 화가 나서 발을 굴렀다. 만약 이 일이 알려지거나 인터넷에 영상이 공개되면 이시연이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겠나.“태형이한테 전화해. 이 일이 알려지면 태형이도 망신당할 거야.”진강석이 서둘러 말하자 이정숙은 망설이지 않고 서둘러 진태형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진태형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전화를 받은 강하리가 서둘러 회사로 달려가는데 그녀가 도착하기도 전에 기자들이 먼저 와 있었고 기자 앞에서 말문이 막힌 진강석 내외를 보며 한참 후 그녀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번졌다.누가 시킨 건지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다.구승훈 말고는 이렇게 할 사람이 있을까.강하리는 문득 이제 정말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는 걸 느꼈다.여전히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그녀의 모든 안정감은 이 남자로부터 온다는 것을.마치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 앞에 굳건히 버티고 서 있어 줄 것 같았고 두 사람이 함께 있는 한 어떤 고통과 어려움이 닥쳐도 이겨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강하리는 운전대를 꽉 움켜쥐고 알 수 없는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휴대폰을 꺼내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다.“강 대표님, 시키실 일이라도 있나?”시선을 떨군 강하리가 결심한 듯 말했다.“구승훈, 혼인신고 하러 가자.”전화기 너머 구승훈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그래.”그가 웃으며 답했다.“내가 데리러 갈 테니 기다려.”강하리는 구승훈과 통화를 마치고 사무실로 들어갔는데 문에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하리야, SNS 봐!”강하리의 발걸음이 멈칫했다.“왜 그래? 또 무
JM회사 아래층에서 늘 정교하게 치장하던 석미란은 지금 전혀 화장하지 않은 상태였다.창백한 안색에 피곤함을 감추기 어려웠지만 눈빛에는 증오가 가득했다.불과 며칠 만에 아들은 유치장에 들어갔고 남편은 해당 부문에서 조사받고 있다.멀쩡하던 가정이 여자 하나 때문에 파괴되었는데 이젠 그 여자에게 사과까지 해야 한다.석미란은 내키지 않았고 여전히 강하리가 미웠다.어디선가 튀어나온 잡종이 어느새 그녀의 머리 위로 기어오르고 있었다.석미란의 뒤에 서 있던 석연란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석미란과 석연란 외에도 진씨 가문 어르신 내외가 경호원 몇 명까지 대동하고 찾아와 열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함께 JM회사 입구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왜 아직도 안 와?”이정숙이 다소 짜증스럽게 물었다.원래는 곧장 심씨 가문으로 가서 강하리를 만나고 싶었지만 놀랍게도 강하리가 심씨 가문에 없어서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회사까지 찾아왔다.하지만 한 시간 넘게 기다렸지만 여전히 강하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이정숙의 말애 석씨 자매의 표정도 한층 더 일그러졌다.누가 봐도 강하리가 일부러 나타나지 않는 게 분명했다.“누구 앞에서 텃세를 부리는 거야!”이정숙의 얼굴이 차가워지면서 당장이라도 화를 낼 기세였고 진강석이 막 말을 하려는 순간 앞에 차 한 대가 멈춰 섰다.다들 강하리가 오는 줄 알았지만 차에서 내린 사람이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고 다가올 줄이야.그들의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기자가 일행의 앞으로 다가왔다.“여러분들은 인터넷에서 강하리 씨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사과하기 위해 여기 계신 건가요?”그 말에 석미란의 표정이 확 바뀌었고 그녀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기자가 다시 물었다.“게다가 얼마 전에 강하리 씨 출신에 대한 루머를 퍼뜨려서 고소당해 법원까지 갔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석미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무, 무슨 헛소리에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 망할...”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석연란이 옆에서 끌어당겼고 석미란
다시 입을 연 구승훈의 목소리가 살짝 갈라져 있었다.“자기야, 한 번만 더 불러봐. 응?”강하리의 표정이 어색함으로 물들었다.조금 전에는 몰랐는데 이제야 얼굴에 열기가 치솟는 게 느껴졌다.“내 남편이라고.”그녀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했고 구승훈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네 남편은 나잖아?”강하리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를 바라보았다.“누가 나랑 결혼하면 그 사람이 내 남편이지.”구승훈은 홧김에 그녀를 콱 끌어안았다.“우리 강 대표님이 주방에서 하고 싶나 봐?”남자가 말하며 그녀의 옷 속으로 손을 뻗자 놀란 강하리가 순간적으로 몸부림을 쳤다.두 사람은 부엌을 난장판으로 만들었고 손연지가 내려와서 그 광경을 목격했다.그녀는 부엌에 있는 두 사람을 조용히 바라보며 말로 표현 못할 감정을 느꼈다.부러움?아마도 부러운 거겠지.하지만 사실 그녀는 강하리의 결단이 더 부러웠다.구승훈을 떠나기로 마음먹었을 때도 강하리는 망설임이 없었다.매번 노민우와 깨끗이 손절하려고 마음먹었어도 몇 번이나 다시 엮이고 타협하는 자신과 달리.그래서 이런 결과가 나온 거다.손연지는 마음이 답답했다. 사실 누구도 탓할 수가 없었고 탓하려면 결단력이 부족했던 자신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심호흡한 뒤 마음을 추스르며 아래로 내려갔고 강하리는 손연지가 내려오는 것을 보고 황급히 구승훈에게서 떨어졌다.“연지야, 아침 뭐 먹을래?”손연지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애정 행각에 이미 배가 불러.”강하리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밥 먹고 연정이 데리러 갈 거야.”손연지의 눈빛이 순식간에 밝아졌다.“좋아. 내가 연정이 선물도 챙겨왔어.”하지만 그다음 순간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그녀의 얼굴에 머금은 미소엔 씁쓸함이 섞여 있었다.강하리는 그걸 분명히 알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때론 본인 스스로 이겨내야 하는 것들이 있다.지금 손연지를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손연지를 돌봐주는 것뿐이고 손연지가 몸을 추스르고 나면 일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이었다.
구승훈은 강하리가 보낸 메시지를 보며 세 식구라는 단어를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다가 피식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좋아.]그의 의견을 묻다니, 어떻게 감히 싫다고 하겠나.답장을 마친 구승훈은 욕실로 들어갔고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휴대폰이 울리고 있었다.쉬지 않고 울리는 휴대폰을 바라보던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전화가 끊어지려고 할 때쯤 통화 버튼을 눌렀다.전화기 너머에서 구동근의 연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정안그룹과 에비뉴를 강하리한테 다 넘겼어?”구승훈은 비웃었다.“네, 왜요? 불만 있으세요, 어르신?”구동근은 그의 말에 피를 토하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났다.“구승훈, 그건 다 우리 구씨 가문 재산이야! 네가 뭔데 그 여자한테 줘!”강하리가 심씨 가문 출신이라는 사실을 안 후 구동근은 더 이상 구승훈과 강하리의 만남을 반대하지 않았고 심지어 몸을 굽혀 심씨 가문에게 사죄할 수도 있었지만 구씨 가문의 재산이 그렇게 쉽게 넘어갔다는 사실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게 다 구씨 가문의 재산이었는데!이 망할 자식이 그렇게 쉽게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다니!구승훈은 여전히 나른한 목소리로 가볍게 웃었다.“왜요? 벌써 잊으셨어요? 구씨 가문 재산은 어르신 귀한 손주가 다 망쳐버렸어요.”“너!” 말을 꺼내지 않으면 모를까, 그 말을 하자 구동근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차갑고 냉정한 손자가 한 여자 때문에 자기 가족을 내팽개칠 줄은 상상도 못 했다.구승훈은 웃음을 터뜨리며 목소리가 점점 더 차가워졌다.“다시는 나랑 강하리 사이 방해하지 마세요. 저한테도 할아버지가 꼭 필요한 건 아니니까요.”구승훈이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자 저쪽에서 구동근은 너무 화가 나서 전화기를 부술 뻔했다.전화를 끊자 옆에 서 있던 구씨 가문의 둘째가 다소 불안한 듯 물었다.“아버지, 어떻게 됐어요? 정말 그 두 회사를 강하리한테 다 줬대요?”구씨 가문의 둘째는 노인의 표정을 보고 순간적으로 불안해졌다.“그놈이 무슨 권리로 두 회사를 망할 년에게 넘겨줘요? 거기
거칠게 원하던 구승훈이 마침내 움직임을 멈춘 순간 강하리는 비틀거렸고 구승훈이 단숨에 그녀를 품에 낚아챘다.“너무 좋아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겠어?”강하리는 너무 화가 나서 그를 발로 차버리고 싶었다.“좋기는 개뿔!”구승훈은 웃으며 강하리를 안고 화장실로 들어갔다.“응, 나도 좋았어.”“...”개자식과 더 실랑이를 벌일 기운도 없었다. 뻔뻔한 걸로는 절대 그를 이길 수 없었다.구승훈은 강하리를 씻겨주고 그녀를 안아 침대로 돌아왔다.강하리는 손가락을 들 수 없을 정도로 피곤했지만 그래도 꿋꿋이 옷을 끌어당겨 입었고 구승훈은 그녀의 움직임을 보며 눈썹을 치켜들었다.“어디 가?”“연지 보러 갈 거야. 오늘 밤엔 연지랑 잘 거야.”구승훈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강하리, 넌 내 아내야.”강하리가 그를 슬쩍 보았다.“아직 결혼 안 했잖아.”구승훈이 그녀를 껴안았다.“그러면 내일 혼인신고 하러 갈래?”강하리의 몸이 경직되며 문득 지난번에 구승훈이 혼인신고 하자는 말을 했던 게 떠올랐다.그러다 그녀에게 돌아온 건 심미현의 죽음과 오지 않는 구승훈이었다.강하리의 몸이 눈에 띄게 굳어지자 구승훈은 무거운 마음으로 그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지난번 같은 일은 없어.”강하리가 그를 돌아보았다.“만약 또 그런 일이 생기면...”구승훈의 짙고 검은 눈동자에 밝은 빛이 비쳤다.“또 그런 일이 생기면 난 고자가 될 테지만 걱정하지 마, 강 대표님. 내가 손으로도 잘 모실 수 있으니까.”“... 닥쳐!”말을 마친 그녀가 잠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가다가 두 걸음도 못 가서 갑자기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바라보았다.“또 콘돔 안 썼어?”강하리는 말하며 지난번에도 구승훈이 콘돔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구승훈, 미쳤어? 난 지금...”구승훈이 그녀의 턱을 그러쥐었다.“걱정하지 마, 임신 안 해.”강하리는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는 눈빛으로 구승훈을 바라봤고 구승훈은 손으로 강하리의 턱을 어루만지기만 했다.“나 묶었어.”
손연지는 식사를 마치고 잠을 청하기 위해 방으로 돌아갔다.아직 몸조리가 필요한 그녀는 도저히 찾아갈 데가 없어 결국 강하리를 찾으러 B시까지 왔다.강하리는 구승재에게 전화를 걸었다.손연지는 자신이 겪은 일을 몇 마디로 설명했지만 강하리는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구승재도 별말 없이 바로 손연지에 대해 알아본 사실을 강하리에게 전했고 대충 손연지가 말한 내용과 거의 같았지만 몇 가지 세부적인 내용이 빠져 있었다.손연지가 병원에서 손가락질받고 있었다는 것, 노민우의 약혼녀라는 사람이 손연지를 머물 곳도 없게 궁지로 내몰았다는 것 등등...손연지는 노민우를 그냥 두지 않았다고 했지만 사실은 노민우의 어머니가 노민우 몰래 손연지를 노씨 가문으로 데려와 심한 모욕을 준 것뿐이었다.그래도 손연지가 고분고분 말을 듣는 성격은 아니라 노씨 가문에서 한바탕 소란을 피웠고 상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손연지에게 수표를 던지며 연성을 떠나라고 했다.손연지는 자신이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했고 노민우의 결혼을 파탄 낼 생각도 없었기에 처음엔 연성을 떠나지 않았지만 놀랍게도 노민우의 어머니가 그녀의 부모님까지 찾아갔다.강하리는 죄책감으로 가득 찬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손연지에게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는데도 그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구승훈이 강하리를 뒤에서 껴안았다.“나를 이렇게 걱정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강하리는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어떻게 같아?”구승훈은 납득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뭐가 다른데?”강하리는 시선을 떨구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많은 일을 겪었지만 그녀를 정말로 기쁘게 만드는 건 별로 없었다.어릴 적 강찬수의 가정 폭력부터 나중에 구승훈에게 받은 상처까지,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손연지가 곁에 있었고 그녀에게 손연지는 가족이었다.강하리는 대답이 없었고 구승훈도 더 묻지 않아 거실은 무척 조용했다.하지만 조용한 시간은 얼마 가지 않았고 구승훈이 귓불을 깨물며 그녀의 몸을 달구기 시작했다.강하리는 조금 긴장한
구승훈은 강하리를 다소 시무룩한 표정으로 바라보면서도 결국 순순히 입을 다물었고 손연지는 구승훈을 보고 웃었다.구승훈은 굳어진 표정으로 두 사람을 따라 계단을 내려가다가 모퉁이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강하리를 한 손으로 잡아당긴 뒤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오늘 밤에 보상해 줄 거야?”강하리는 순간 조금 전 당황스러운 장면이 떠올랐고 손연지가 지금 슬픈 상황에서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싶지 않았다.“가만히 있어.”구승훈의 입술이 그녀의 귀에 닿았다.“그러면 손으로만 하는 건?”남자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가로질러 그녀가 승낙할 때까지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이 꽉 감싸자 강하리는 결국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이따가 내려가선 얌전히 있어.”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아내 말은 들어야지.”손연지는 식사 내내 먹는 둥 마는 둥 했고 식사가 끝날 무렵 강하리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노민우였다.강하리는 손연지를 바라보며 바로 전화를 끊었고 손연지는 못 본 척했지만 표정이 한층 어두워졌다.하지만 잠시 후 구승훈의 휴대폰도 울렸고 그는 눈썹을 치켜들며 전화를 집어 든 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갔다.바깥에 도착하고 나서야 구승훈은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노민우가 아닌 노민준의 전화였고 그는 뒤를 돌아보고는 전화를 받았다.“그 주사 효과가 어때?”구승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괜찮아. 지난 이틀 동안 상태가 전보다 훨씬 안정됐어.”거짓말이 아니었다. 구승훈은 노민준이 건넨 주사를 맞고 나서부터 지난 이틀 동안 단 한 번의 이상도 느끼지 못했고 그것이 그가 오늘 유난히 기분이 좋았던 이유였다.노민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포기하지 말라고 했잖아.”짧게 대꾸한 구승훈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말을 마친 노민준이 잠시 멈칫했다.“참, 내 동생이 할 말이 있대.”곧이어 저쪽에서 노민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승훈아, 손연지는 지금 어때?”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네 여자를 왜 나한테 물어봐?”“승훈아, 나도 네가 강하리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