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짝 저릿한 느낌이 전해지는 입술 아래로 구승훈의 목젖이 두어 번 오르내리더니 그는 강하리의 목덜미를 거칠게 잡았다. 그리고 입에서 건조하고 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강 부장은 고작 가벼운 입맞춤 따위로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계속 해.”그녀의 목을 문지르며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에 강하리의 미간이 구겨졌다.“대표님, 저희 저녁 연회에 참석해야 하는데요.”구승훈은 눈썹을 치켜뜨고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그럼 일단 빚진 거로 하든가.”말을 마친 그는 숄을 꺼내와 강하리의 어깨에 걸쳐주었다.“가자.”저녁 연회는 한 채의 별장에서 진행 중이었고 아마도 사적인 연회 같았다. 구승훈이 강하리를 데리고 별장에 들어섰을 때 삼십 대 초반의 한 남자가 맞이하러 나왔다.“구승훈, 너 지각이야!”남자가 다가와 웃으며 말하자 그의 목소리에 모두의 이목이 그들에게로 쏠렸다. 구승훈이라는 이름 세글자는 어디를 가나 항상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강하리는 그의 팔짱을 낀 채 저에게로 쏟아지는 수많은 시선의 세례를 감내해야만 했다.약삭빠른 사람들은 벌써 와서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구승훈은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보려고 다가오는 이들을 두세 마디 말로 돌려보냈고 제일 처음 말을 걸어온 남자만 남게 되었다. 남자의 눈길이 강하리에게 닿으며 의미심장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승훈아, 누군지 소개 안 해줄 거야?”“회사 동료, 강하리 부장이야.”구승훈이 강하리를 흘긋 보며 말하자 그 남자는 싱긋 웃었다.“아, 동료였어. 난 또 여자 친구인 줄 알았잖아!”구승훈은 대꾸하지 않고 강하리를 보며 이어서 소개했다.“이쪽은 법무법인 정세, 대표 변호사 심준호야.”강하리는 TV에서 이 남자를 본 적이 있다. 법무법인 정세는 국내 최대 대형로펌이다. 전문적으로는 공정거래 분쟁과 재산 분할 및 재벌 이혼 소송 분야의 법률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정세의 대표는 도무지 속을 알 수가 없고 매우 무자비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구승훈의 미간이 살짝 좁혀지고 심준호는 쓴 미소를 지었다.“내 위에 누나가 한 명 있는데 나보다 족히 20살이 많아. 그런데 어릴 때 실종되고 나서 지금까지 찾지 못해서 부모님께서 수년 동안 늘 안타까워하셨어. 특히 엄마는 누나 얘기만 나오면 눈물을 글썽이시고.”심준호는 휴대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 사진 속의 여인은 무척 아름답고 옅은 미소는 부드러움을 담고 있었다. 눈썹이 살짝 좁혀든 구승훈은 왠지 모르게 사진 속 사람이 낯설지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회상해 보아도 어디서 봤는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실종된 지는 몇 년 됐어?”“아마 28년은 됐을 거야.”만약 사진이 없었다면 심준호는 이미 자기 누나의 외모를 까맣게 잊어버렸을 것이다. 구승훈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사람을 시켜 계속 알아보라고 할게.”“고마워.”심준호는 구승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애피타이저를 두세 입 먹은 강하리는 더는 음식이 들어가지 않았다. 연회장이 조금 답답해진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발코니로 걸어갔다. 찬 바람이 불어와 으슬으슬한 한기를 느낀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숄로 몸을 감쌌다. 이때 한 사람이 옆으로 다가와 그녀에게 술잔을 건넸다. 고개를 돌려보니 대양그룹 총수의 아들 정주현이 옆에 서있었다. 대양그룹, 바로 그들의 이번 협력 파트너였다. 강하리는 지체하지 않고 고개를 살며시 숙이며 인사했다.“안녕하세요, 정주현 씨.”“이제야 강 부장님을 실제로 뵙는군요. 동영상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예쁘시네요.”정주현은 인사를 하며 다시 손에 들린 술잔을 강하리 앞으로 건넸다. 하지만 그녀는 받지 않고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미안해요, 주현 씨. 전 술을 못 마셔요.”“에이, 거짓말하지 마요. 강 부장님, 술을 아주 잘 마신다고 들었어요.”정주현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강하리는 여전히 거절하는 태도로 일관했다.“요즘 약을 먹고 있어서 진짜 못 마셔요.”그 말에 정주현도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그럼 조금 있다가 저랑
강하리의 입꼬리가 뻣뻣하게 굳었다.“대표님은 상상력이 참 풍부하시네요.”그녀는 확실히 정주현이 그녀와 잠자리를 갖고 싶어 하는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다. 기껏해야 작업을 걸어오는 정도였다.대답이 없는 구승훈은 표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지만, 어찌 됐든 3년이란 시간 동안 함께 해왔기에 강하리는 한눈에 그의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다.그 뒤로 연회장에 있는 내내 구승훈은 계속 강하리를 옆에 끼고 있었다. 그는 신분이 고귀하여 이런 장소에 있을 때면 그에게 아첨하며 술을 권하러 오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구승훈은 그저 따분할 따름이다. 앞에 건네진 술잔을 보며 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강 부장이 나 대신 마셔줘.”아직 생리 중이어서 술을 마시고 싶지 않은 강하리가 미간을 심하게 구겼다.“대표님, 저 마시고 싶지 않아요.”하지만 구승훈은 아무 말도 없이 그저 가만히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를 보며 쓴웃음을 흘린 강하리는 이 남자가 분명 화가 나 있음을 알고는 결국 자기 고집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눈 딱 감고 앞으로 건네 온 술잔을 받아 들었다. 한 잔이 있으면 두 잔이 있기 마련이고 그렇게 세 잔...연속 몇 잔 마셨는지도 까맣게 잊어버린 강하리가 다시 술잔을 받아 들려고 할 때 구승훈이 돌연 술잔을 뺏어갔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단숨에 술을 쭉 들이켠 구승준은 그길로 강하리를 데리고 심준호와 작별 인사를 했다.“일이 있어서 오늘은 이만 가 봐야겠어.”일찌감치 구승훈이 지루해하는 모습을 본 심준호도 만류하지 않았다.“그래 그럼, 다음에 다시 연락 할게.”고개를 끄덕인 구승훈은 강하리를 끌고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강하리는 이 남자가 또 왜 이러는지 그 저의를 알 수 없었지만, 술을 더 이상 마시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했다.돌아가는 내내 구승훈은 말없이 그저 강하리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어찌나 세게 끌어안았는지 그녀를 자기 몸속에 구겨 넣을 기세였다. 강하리는 불편했지만, 꾹 참고
“혼자 걸을 수 있어요!”강하리의 몸부림에도 구승훈은 아무 말 없이 꿋꿋이 그녀를 안고 방으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강하리는 바로 욕실로 들어갔다.욕실에서 나오자 구승훈이 룸서비스를 시켰다. 강하리는 눈앞에 놓인 음식을 봐도 아무런 식욕이 돌지 않았다. 미동도 없는 그녀를 보고 구승훈은 눈썹을 치켜떴다.“왜, 먹기 싫어?”“네, 입맛이 없어요.”고개를 끄덕인 구승훈은 다시 카운터에 전화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호텔 직원이 영양죽 한 그릇과 찐빵 두 개를 가져왔다.“저녁이니까, 단 거 많이 먹지 마.”뭔가 걱정하듯 말하는 구승훈의 말에 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고마워요.”식사를 마친 강하리는 눕자마자 바로 곯아떨어졌다. 아마도 술을 마신 탓인지 그대로 깊게 잠들었다. 다음 날 그녀는 비몽사몽간에 구승훈이 자기 입에 입맞추는 것을 느꼈다.“내가 올 때까지 호텔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구승훈이 서명식에 저를 보내지 않으려고 하는 걸 알고 강하리는 눈을 번쩍 뜨고 그와 시선을 맞췄다.“전 밖에 나가서 돌아다니고 싶어요.”구승훈이 미간을 살짝 구겼다.“어디 갈 건데?”사실 강하리는 마침 보경시에 있는 손연지가 말했던 요양원에 가보고 싶었다.“그냥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구경이나 하려고요.”여기저기 돌아다니겠다는 강하리의 말에 구승훈은 불현듯 노민우가 전에 찍어 보내온 놀랄 만큼 아름다웠던 그 사진이 떠올라 날카로운 눈매가 가늘어졌다.“강 부장, 싸돌아다니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 오후에 돌아와서 같이 승마하러 가.”남자는 그녀의 입에 다시 입맞추고 나서야 돌아서서 나갔다. 옅은 한숨을 토해낸 강하리는 그가 떠나자 기어이 밖으로 나와 요양원으로 갔다.설령 아직 의료비를 마련할 수 없을지라도 한 번 알아봐서 나쁠 게 없다고 생각했다. 요양원의 환경은 물론 의료시설 또한 국내 최고라고 할 수 있었다.궁금한 점들을 일일이 물어 본 후에야 강하리는 돌아갈 채비를 서둘렀다. 하지만 예상 밖으로 요양원의 입구에서 심준호와 마주쳤다. 그녀를
순간 강하리의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그녀는 구승훈을 바라보며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엄마를 위해 고급 요양원에 대해 알아보고 있었어요.”그녀의 표정에서 뭔가 수상한 낌새라도 찾아내려는 듯 구승훈은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강하리는 집요하게 달라붙는 그의 날카로운 시선을 떨쳐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구승훈은 의심이 아주 많았기에 그녀가 불안한 기색 없이 평정을 유지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그제야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강 부장 앞으로 보경에 와서 살 생각이야?”잠시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그 요양원이 심씨 가문 소유라는 사실을 알게 된 강하리는 일찌감치 포기할 심산이었다. 그녀는 구승훈을 떠난 후에는 두 번 다시 그의 앞에 나타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아마도요.”“보경이 좋아?”“그건 아닌데 그냥 보경이 수도잖아요. 그렇다 보니 의료 시설이 다른 곳에 비해 좋지 않겠어요.”강하리가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구승훈은 가타부타 내색을 하지 않았다.“그렇지만 여기 의료비도 다른 곳에 비해 아주 비쌀 거야. 강 부장, 연성도 의료시설이 괜찮아.”입매가 굳어진 강하리는 대답을 이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구승훈도 더는 그 문제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준비해. 나가서 밥 먹자.”“나가서 먹자고요?”두 사람은 3년 동안 같이 있었지만, 외식은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강하리가 의아해하는 것도 당연지사였다. 접대 자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강하리가 집에서 밥을 했다. 정확히 짚어 말하면 두 사람의 사이는 떳떳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데이트나 외식과 같은 커플들끼리나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에게는 크나큰 사치였다. “그래, 먹고 나서 승마하러 가자.”“좋아요.”옷을 갈아입은 강하리는 구승훈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갔다. 남자의 커다란 손에서 따뜻한 온기가 전해져 왔다. 강하리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쳐들어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구승훈은 정말 잘생겼다. TV에 나오는 아이돌과는 떡잎부터 달랐다. 그에
두 사람을 본 심준호가 손을 흔들었다.“승훈아. 하리 씨, 또 만나네요.”강하리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인사했다. 심준호는 자신의 뒤에 있던 여자를 앞으로 끌어왔다.“이분은 제 약혼녀, 심예진이에요. 포토그래퍼로 활동하고 있어요.”“예진아, 이분이 바로 구승훈 대표님이야.”잠시 멈칫하던 심준호는 구승훈을 흘긋 쳐다보고 이어서 말했다.“그리고 이분은 구 대표님의 회사 동료, 강하리 씨야.”구승훈의 눈동자가 언뜻 번뜩였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예진은 두 사람과 가볍게 인사만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반대편에 서 있던 고이선이 입을 열었다.“난 또 누구시라고. 이제 보니 불륜녀가 되기를 즐기시는 강하리 씨였네.”무례하고 까칠한 발언에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얼굴이 한순간에 굳어 버렸다. 구승훈의 눈썹이 슬며시 위로 올라가며 눈동자에는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사실 구승훈은 처음으로 바로 앞에서 강하리를 불륜녀라고 욕하는 소리를 들었다. 전에 회사에서 떠도는 소문이든 인터넷에 올라온 시시껄렁한 언론을 보고도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하지만 직접 듣고 나니 마음에 불쾌감이 마구 치솟았다. 어찌 됐든 강하리는 그의 여자였고 다른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보면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 냉소를 흘리며 눈썹을 매섭게 치켜 올린 구승훈이 물었다.“준호야, 이분은 누구야?”“사촌 누나네 딸이야. 너무 오냐오냐 키워서 애가 버릇이 없어. 미안해.”어두운 표정으로 말한 심준호는 고개를 돌려 고이선을 쏘아보며 다그쳤다.“고이선, 빨리 와서 사과드려!”“싫어요. 삼촌이 몰라서 그렇지 저 여자가 바로 송유라와 구 대표님 사이에 끼어들어 이간질했다고요. 절대 반반한 외모에 속으면 안 돼요. 저 여자는 그냥 불여우란 말이에요!” “고이선!”표정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심준호의 우아한 기품은 어느새 냉혹하고 매섭게 변해 있었다. 순간 고이선은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여전히 도끼눈을 뜨고 강하리를 노려보았다. 싸늘한 웃음을 흘린 강하리가 입을 열었
구승훈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강 부장이 뺏은 거 아니야?”“당신 솔로 아니셨나요?”남자의 눈을 마주한 강하리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구승훈에게 이어서 말했다.“솔로이신데 송유라 씨 남자를 뺏었다는 말은 대체 어디서 나온 말일까요?”“강 부장, 앞으로도 영원히 지금처럼 떳떳하길 바라.”코웃음을 치며 말하는 구승훈의 말에 강하리는 대꾸하지 않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사실 자신이 하나도 떳떳하지 못하다는 건 오직 그녀만 알고 있을 것이다. 비록 구승훈이 솔로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했지만, 그의 마음은 송유라를 향해 있었다. 구승훈은 강하리를 데리고 마구간을 한 바퀴 돌며 몹시 사나워 보이는 말 한 마리를 골랐다.“진짜 안 탈 거야?”구승훈의 물음에 강하리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 그녀는 승마를 배운 적이 있었다. 구승훈은 그녀에게 승마, 펜싱, 골프 모든 것을 가르쳐줬었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 말을 타고 싶지 않았다.“내가 태워줄게.”눈썹을 찌푸린 강하리가 미처 거절할 새도 없이 구승훈이 안아서 말 위에 앉혀 놨다. 말에 올라탄 구승훈이 미끈한 다리를 구르자 말이 맹렬히 질주했다.“승훈 씨!”겁에 질린 강하리가 비명을 질렀다. 아무리 승마를 배왔다고는 하지만 너무나 빠른 속도를 감당할 수 없었다. 팔을 그녀의 허리에 두른 구승훈이 옅은 웃음을 터뜨리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뭐가 무서워? 날 꽉 잡아.”강하리가 남자의 손을 꼭 잡자, 남자는 자기 손을 빼서 그녀의 손을 감쌌다. 구승훈은 그녀를 데리고 승마장 두 바퀴를 돌고 나서야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언덕 앞에 이르자 그는 마침내 말을 멈춰 세웠다. 저 멀리 석양이 이미 하얀 구름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강하리는 넋 놓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그와 함께 시원한 밤바람을 맞으며 저녁노을을 바라보는, 이런 장면을 그녀는 수없이 상상해 본 적이 있다. 더 이상 기회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이런 상황에서 실현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강하리.”구승
강하리가 나오는 모습을 본 구승훈은 이쪽으로 걸어왔다.“힘들어?”“괜찮아요.”“그럼 조금 있다 같이 밥 먹으러 가.”흠칫 놀란 강하리는 몸이 금세 굳어버렸다.“대표님, 전 심 대표님이랑 돌아가면 돼요.”“강하리, 내 차에 앉기 싫어?”구승훈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하자 강하리는 씁쓸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송유라 씨를 만나러 가는 거 아니었어요?”“그냥 밥만 먹을 거야. 같이 먹고 돌아가자.”“그렇지만 전 송유라 씨와 함께 있는 게 싫은데요. 대표님도 아실 거 아니에요? 송유라 씨도 사실 저를 몹시 미워한다는 걸.”강하리가 떨떠름한 기색을 내비치자 구승훈이 냉소를 흘렸다.“그럼 강 부장이 다른 남자 차에 타는 걸 내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겠네.”“시내에 도착하면 내려줘요. 전 택시를 타고 돌아갈게요.”구승훈은 더는 말이 없었다. 동의한 건지 아닌지도 모른 채 강하리는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심준호가 다가와서 작별 인사를 하며 겸사겸사 물었다.“언제 연성으로 돌아갈 계획이야?”사실 이번 출장에서 해야 할 일은 이미 다 마무리한 상태였다. 하지만 구승훈은 강하리를 힐끗 쳐다보고는 말했다.“두 날 더 있을 거야. 강 부장이랑 좀 더 놀다 갈 거야.”“그럼 내일 점심에 우리 집에 와서 밥 먹을래? 부모님이 너를 많이 보고 싶어 하시거든. 하리 씨도 같이 와요.”강하리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진심이 가득 담긴 심준호의 눈을 보고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몇 마디를 주고받고 헤어졌다. 강하리와 구승훈이 가고 나서 계속 말이 없던 심예진이 갑자기 한마디를 내뱉었다.“오빠, 이 사진 봐. 사진 속 하리 씨 분위기 미현 언니랑 정말 닮았어.”심준호가 다가가서 사진을 보니, 바람을 맞으며 저녁노을 아래에 서 있는 사진 속 강하리는 훨씬 부드럽고 온화해 보였다. 사진 속의 심미현이랑 분명 어딘가 닮아 있었다. 한참을 보던 심준호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왠지 강하리가 낯익다 했더니 심미현과 조금 닮아서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진태형은 뒤에 있는 저택을 돌아보았다.“내가 알아낼 방법을 찾아볼 테니까 하리 잘 부탁해.”눈을 뜬 강하리는 아직 정신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고 몸을 살짝만 움직였는데도 곳곳에 불편함이 느껴졌다.순식간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가워지는 걸 느끼며 얼굴의 핏기도 사라졌다.일이 벌어지기 전의 상황이 머릿속에 번뜩이자 이불을 걷어 올린 강하리는 자기 몸의 흔적을 내려다보며 이불을 꽉 움켜잡았다.지금 자신이 구승훈의 저택에 있다는 건 알지만 누가 자기 몸에 흔적을 남겼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벌떡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찢어질 것 같은 통증에 다시 주저앉았다.마음속 불안감은 점점 더 커졌다.설마 구승훈이 그녀를 이렇게 다치게 했을까.그녀는 고통을 참으며 이불을 걷어내고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무심코 옷 한 벌을 몸에 걸친 뒤 비틀거리며 계단을 내려갔다.구승훈이 막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창백한 얼굴로 계단을 내려오는 강하리가 보였다.“일어났어?” 웃음기 섞인 구승훈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강하리는 온몸을 감싸고 있던 차가운 기운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응, 일어났어. 어디 갔었어?”구승훈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가득했다.“일이 좀 있어서. 왜, 나 보고 싶었어?”강하리는 눈앞에 있는 남자의 장난기 어린 표정을 보고 불안했던 마음을 내려놓았지만 그래도 그에게 물었다.“구승훈, 당신 짓이야?”구승훈은 강하리를 바라보다가 그녀가 약에 취한 뒤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괜스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녀가 기억하지 못해서 다행이었다.구승훈은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가 발그레해진 눈가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내가 아니면 누구이길 바라는데?”강하리는 그의 어깨를 잡더니 갑자기 그의 턱을 콱 깨물었다.“미친 거야? 너무 아프잖아!”구승훈의 몸이 굳어졌다가 이윽고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널 안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어. 많이 아파? 가자, 내가 확인해 볼게.”강하리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줄곧 거실에 있던 구승재가 헛기침을
진시연은 진태형의 시선에 순간 마음에 찔렸지만 이내 다시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진태형의 곁으로 걸어갔다.“아빠, 화내지 마. 하리 씨 문제는 제대로 밝혀질 거야.”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석연란을 화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방금 내 동생에 대해 모함하는 말 전부 똑똑히 들었어요. 앞으로 다시 또 그런 말이 내 귀에 들리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석연란은 깜짝 놀랐다.“내가 한 말은 전부 사실이야. 스폰 받은 것 맞잖아!”“그 입 다물어요. 내 동생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정말 그랬다고 해도 사모님께서 하실 말씀은 아니죠.”진시연의 말은 마치 강하리가 정말로 그런 짓을 했다는 걸 인정하는 것처럼 들렸다.사람들은 눈을 번뜩이며 어느 정도 추측에 확신을 더하는 모습이었다.진태형이 고개를 돌려 진시연을 바라보니 그녀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아빠, 걱정하지 마. 하리 씨 일은 우리 진씨 가문 일이잖아.”진태형은 그녀를 바라보다 돌아섰다.“이번 일은 철저히 조사해서 관련된 그 누구도 그냥 두지 않을 겁니다.”진시연은 저도 모르게 양옆으로 늘어뜨린 손으로 주먹을 꽉 말아쥐면서도 이내 다시 진태형을 따라갔다.“아빠, 나 하리 씨 보러 갈래.”“그럴 필요 없어. 승훈이가 잘 돌봐줄 거야.”말을 마친 진태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진시연의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했지만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저택에서 나와 곧장 경찰서로 향했고 주해찬은 이미 진술을 마치고 유치장에 구금되어 있었다.소란스러운 소리에 고개를 든 그는 상대가 구승훈이라는 것을 확인한 후 다시 시선을 바닥으로 보냈다.구승훈이 다가와 휠체어에 앉은 주해찬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공범이 누구야?”주해찬은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맞췄다.“구승훈, 아직도 모르겠어? 넌 하리를 제대로 지켜주지 못해. 네 곁에만 있으면 빈번하게 일이 생기잖아!”구승훈은 차갑게 웃었다.“난 제대로 지켜주지 못하지만 너처럼 해치지는 않아!”주
석연란의 말에 사람들이 표정이 확 바뀌었다.아무도 이런 가십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심씨 가문의 손녀, 진태형의 딸이 스폰을 받았다고?심씨 가문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사람들은 믿지 못해도 저마다 좋지 않은 추측을 할 수밖에 없었다.다들 봤다시피 강하리의 외모는 아름다웠고 누군가 돈을 주고 취하고 싶어 하는 것도 당연했다.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무의식적으로 약간의 경멸이 그들의 눈에 보였다.돈 많은 사람일수록 원래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고 든다.예전 같았으면 이 사람들이 강하리처럼 배경도 없고 뒷배도 없는 여자에게 눈길조차 주지도 않았겠지만 갑자기 심씨 가문의 조카이자 진태형의 딸이 되니 당연히 수많은 사람의 질투를 불러왔다.이제 석연란의 말까지 더해지자 순식간에 사람들은 싸늘하게 조롱하기 시작했다.“심씨 가문의 손녀라고 해서 얼마나 고귀한가 했더니, 그런 물건이었어? 같은 하늘 아래 숨을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 역겹네.”“어떻게 스폰까지 받지? 그러면 돈만 주면 아무 남자와 잔다는 말이잖아?”“모르지. 그러니까 이런 곳에서도 구 대표 몰래 남자를 찾은 거 아니겠어?”히죽거리는 사람들의 말 속엔 조롱만이 가득했고 석연란은 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하는 말에 의기양양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심씨 가문이 지켜준다고 해서 정말 머리 꼭대기에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강하리를 철저히 망가뜨리겠다고 다짐했으니 반드시 해내리라.그때 누군가 석연란을 툭 쳤다.“또 어떤 정보가 있어요? 재밌는 일 있으면 공유 좀 하죠.”석연란이 콧방귀를 뀌며 말하려는 순간 뒤돌아보니 진태형의 무표정하고 차가운 얼굴이 보였다.순간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곧 다시 차갑게 웃었다. 어차피 다 사실만을 얘기했는데 무서울 게 뭐가 있나.“태형 씨, 방금 안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강하리랑 우리 해찬이가 무슨 짓을 했길래 구 대표가 그렇게 가요?”적나라한 의도가 담긴 말이었다. 강하리가 주해찬과 낯 뜨거운 짓을 해서 구승훈이 화가 났다는 뜻이다.사람들
강하리는 구승훈에게 안긴 채 올라가 샤워를 한 뒤 깊은 잠에 빠졌다.구승훈은 조용히 잠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그의 눈에는 복잡하게 억눌린 감정이 가득했다.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약을 챙겨 그녀의 몸에 난 잇자국에 조금씩 발라주었다.하는 내내 구승훈의 움직임은 부드러웠지만 이마에 툭 튀어나온 핏줄이 그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약을 다 바른 뒤 그는 침대 옆 탁자 서랍에서 벨벳 상자를 꺼냈다.상자 안에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들어 있었다.사실 지난번에 강하리를 데려왔을 때 준비했던 반지인데 한번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니 이젠 감히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구승훈은 반지를 꺼내 강하리의 왼손 약지에 끼워주고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손가락에 입맞춤하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미안해.”그러고는 일어나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서둘러 도착한 구승재가 노민준에게 받은 진정 효과가 있는 주사를 구승훈에게 건넸고 구승훈은 망설임 없이 주사를 자기 팔에 꽂았다.구승재는 순간 마음이 아팠다.“형...”구승훈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구승재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형, 우리 해외로 가자. 해외 연구소에 가자, 응?”입꼬리를 올리는 구승훈의 눈에 조금의 온기도 없었다.“그럴 필요 없어. 민준이 형도 어쩔 수 없다면 해외로 가도 마찬가지야.”약을 다 밀어 넣은 그는 조심스레 주사기를 종이로 감쌋다.“여기서 잘 지켜보고 있다가 강하리가 깨어나면 같이 말동무나 해줘. 근데 해서는 안 될 말은 하지 마, 알았지?”그렇게 말한 뒤 그는 밖으로 나가서 주사기를 쓰레기통에 버렸다.진씨 가문의 생일 파티에서 강하리와 함께 떠나는 구승훈을 많은 사람이 목격했고 석미란의 날카로운 목소리는 더욱 시선을 끌었다.구승훈에게 맞은 주해찬은 얼굴과 입술에 시퍼렇게 멍이 들었고 모든 과정을 보진 못했지만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진태형은 사람을 시켜 현장을 정리하고 지켜보던 사람들을 모두 내보낸 뒤 방으로 들어갔다.무거운
걸음을 멈춘 구승훈이 뒤돌아 주해찬에게 주먹을 날렸고 참을 수 없다는 듯 주해찬에게 주먹을 연달아 내리꽂았다.그때 갑자기 방문이 열리면서 석미란이 비명을 지르며 뛰어 들어왔다.“구승훈! 뭐 하는 거야! 감히 해찬이를 때려? 경찰 부를 거야, 신고할 거야!”구승훈이 비아냥거렸다.“그래요, 신고하세요.”그렇게 말한 뒤 그는 곧장 강하리를 안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방을 나갔다.석미란이 화가 나서 뭐라고 말하려는데 주해찬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그는 휠체어에 멍하니 앉아 강하리를 안고 떠나는 구승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사실 그는 오늘 강하리에게 무슨 짓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한 번만 기회를 얻고 싶었다.주먹질에 맞아도 싸다.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하리에게 빚을 졌다.이정숙에게 잡혀 발을 뺄 수 없었던 진태형이 서둘러 도착했을 땐 구승훈이 강하리를 안고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두 눈에 감출 수 없는 살기에 진태형이 구승훈의 팔을 붙잡았다.이대로 강하리를 해칠까 봐 두려웠는데 걸음을 멈춘 구승훈이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어두운 눈빛으로 말했다.“아버님, 저 하리 다치게 하지 않아요.”진태형은 잠시 구승훈을 바라보다가 손을 놓았고 구승훈의 차는 빠르게 달려 거의 순식간에 별장으로 돌아왔다.강하리는 조수석에서 이미 잠들어 있었고 구승훈은 차를 세우고 문을 쾅 닫은 뒤 조수석에서 강하리를 안고 내려왔다.그녀를 안는 힘이 너무 셌던 탓인지 강하리가 갑자기 몸부림을 쳤고 구승훈은 참지 못하고 그녀를 차 위로 밀어붙인 채 키스를 했다.거칠고 난폭했다.키스라고 하기엔 물고 뜯는다는 표현이 더 적절했다.깊은 욕망과 살기가 뒤섞인 눈빛은 당장이라도 여자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 같았다.그가 아프게 깨물자 강하리는 밀어내기 시작했고 구승훈은 그녀의 손을 포박한 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나 말고 주해찬이랑 키스하려고?”남자의 목소리가 싸늘했고 흐릿한 눈을 뜬 강하리는 구승훈의 분노로 가
화장실 문 앞에 도착한 구승훈은 강하리가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 옆 벽에 기대어 기다렸다.하지만 10분이 지나도 강하리가 인기척을 보이지 않자 심장이 철렁하며 휴대폰을 꺼내 강하리에게 전화를 걸었다.상대의 휴대폰이 꺼졌다는 음성에 남자의 얼굴이 단번에 굳어지며 곧장 발을 뻗어 화장실 문을 발로 차서 열었다.안에선 강하리의 모습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강하리는 머릿속이 어지럽고 몸에서 주체할 수 없이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누군가 자신을 안는 느낌이 들었지만 뿌리칠 수 없었고 곧바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힘겹게 눈을 뜨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구승훈의 얼굴이 보였다.“구승훈...”강하리가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만지려 했지만 갑자기 눈물로 인해 시야가 흐려졌다.“왜 나랑 결혼하지 않는 거야? 나랑 결혼한다고 했잖아, 연정이한테 온전한 가정을 만들어 준다고 했잖아. 구승훈, 한 달의 시간을 줄게. 나랑 결혼해 줘, 알았지?”그녀의 첫마디를 듣자마자 주해찬의 눈이 번쩍 뜨였지만 강하리의 입에서 구승훈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는 차가운 얼음 동굴에 빠진 것 같았다.그랬구나.진시연은 강하리가 기꺼이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게 할 방법이 있다고 했다.그게 그를 구승훈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일 줄이야.그는 쓴웃음을 내뱉으며 휠체어 팔걸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하리야, 넌 내가 그렇게 싫어?”강하리는 눈가에 눈물을 머금었지만 입가엔 웃음이 흘러나왔다.“내가 충분히 보여주지 않았어? 구승훈, 얼마나 좋아해야 날 전적으로 믿어줄 거야?”웃는 그녀의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난 사실 당신이 항상 날 믿지 않는 게 무척 괴로워.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 둘이 같이 짊어지고 싶은데 항상 날 빼놓잖아. 구승훈, 어떻게 해야 나한테 온전히 마음을 열어줄 건데?”주해찬의 손가락이 살짝 떨리며 앞으로 다가가 강하리의 손을 잡았다.“하리야, 구승훈 사랑하지 마, 응?”강하리는 웃으며 그를 밀쳐냈다.그녀도 더 이상 구승훈을 사랑하고 싶지
그런데 갑자기 진태형에게 친딸이 하나 더 생기고 그게 심씨 가문의 손녀일 줄 누가 알았겠나.이제 진시연의 처지가 어색해진 건 당연했고 사람들은 진시연을 보고 웃으며 인사를 나눈 뒤 곧바로 흩어졌다.진시연은 짙은 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샴페인 잔을 손에 들고 있었다.그녀는 사람들의 의미심장한 시선을 못 본 척 걸음을 옮겨 구승훈에게 다가갔다.“구승훈 씨, 오랜만이네요.”구승훈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무심하게 와인 잔을 들고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셨다.대답하지도 않았고 그녀와 대화를 나눌 생각도 없어 보이자 진시연은 그의 옆에 서서 우울한 표정으로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구승훈 씨, 내가 F 대륙에서 야생동물에게 공격당했을 때 날 구해주고 밤새 업고 병원으로 가 치료받게 해준 거 기억나요?”구승훈이 피식 웃었다.“그땐 개나 소나 다 구해줬을 겁니다.”진시연의 얼굴이 다소 일그러졌다.그녀는 오랜 세월 기억하고 있던 것이 구승훈의 입에서 개나 소나가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우울한 눈빛을 감춘 채 말을 이어갔다.“그래도 저한텐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에요. 구승훈 씨, 우리 앞으로 잘 지내봐요, 네? 전 정말 그쪽이랑 잘 지내고 싶어요.”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진시연 씨, 진심으로 살려줘서 고마우면 나한테서 멀리 떨어져요. 내 아내가 날 오해하는 건 싫으니까.”진시연은 당황했다.“아내요? 두 사람 결혼해요?”구승훈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진시연 씨, 멀리하라고요. 못 알아들어요?”구승훈이 그렇게 말한 뒤 걸음을 옮겨 강하리에게 다가가는데 진시연이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그의 뒤에서 소리쳤다.“구승훈 씨, 강하리가 정말 좋은 여자라고 생각해요? 그쪽 잡고 놓아주지 않으면서 주해찬이랑 알콩달콩 지내는데 정말 하나도 신경 안 쓰여요?”구승훈은 걸음을 멈추고 얼음같이 싸늘한 얼굴로 돌아보았다.“진시연 씨, 멀쩡히 진씨 가문에 남고 싶으면 얌전히 있어요. 아니면 심씨 가문도, 나도 그쪽 무사히 B시에 남겨두지 않을 테니까.”진시연의 얼
강하리는 결국 구승훈이 보내준 드레스를 입었다.파란 드레스에 네크라인과 치맛단에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혀있어 여성스러우면서도 고상하고 품위 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오픈 숄더는 쇄골을 모두 드러냈고 새하얀 쇄골에는 투명한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달려 있었다.강하리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진태형의 딸, 심씨 가문의 손녀라는 대단한 신분을 가진 사람이 B시에 몇이나 되겠나.게다가...허리를 굽혀 강하리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리는 구승훈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구씨 가문이 어떤 배경을 가졌는지 모두가 안다.비록 구승훈이 구씨 가문을 처참히 무너뜨렸지만 그의 손에는 구씨 가문의 재산 90%와 B시 문씨 가문의 모든 재산이 있으니 기존 구씨 가문보다 그 세력이 더 대단했다.모두의 시선이 여기로 쏠렸지만 구승훈의 눈에는 눈앞에 있는 여자만 보였다.몸을 살짝 굽혀 강하리에게 손을 내밀자 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에 자기 손을 얹었다.심준호가 선물한 드레스를 아무 말 없이 찢어버린 구승훈에게 조금 화가 났지만 개자식의 소유욕이 발동한 게 하루 이틀도 아니었다.오히려 그런 그의 반응에 다시 예전 구승훈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그동안 그녀의 마음을 가로막고 있던 장벽이 옅어지는 느낌이었다.구승훈의 눈가에 미소가 번지며 강하리가 밖으로 나오자마자 팔을 뻗었다.강하리는 그의 팔짱을 낀 채 사람들의 시선 아래 진씨 가문 저택으로 따라 들어갔다.“이게 우리 결혼식이면 얼마나 좋을까. 왠지 정말 결혼식 같지 않아?”구승훈이 강하리의 귀에 속삭이자 강하리는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바라보았다.“나도 이게 우리 결혼식이었으면 좋겠어.”구승훈이 걸음을 멈칫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서두르지 마, 결혼식 할 거니까.”강하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진태형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강하리를 보자 눈을 반짝이며 이쪽으로 걸어왔다.“아빠.”강하리가 낮은 소리로 부르고 곧이어 구승훈도 그를
“언제 왔어?” 강하리가 구승훈을 바라보며 그의 빨갛게 충혈된 눈동자에 시선이 향했다.지난 며칠 동안 구승훈은 이곳에 머물지 않았다.회사를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요 며칠 구승훈은 많이 바빴고 모임이 끊이질 않아 근처에 미리 준비해 둔 별장으로 갔다.강하리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봤다.“지난 며칠 동안 잠은 잤어?”구승훈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품에 안았다.“잠을 못 자. 강 대표님이 와서 재워주면 안 돼?”강하리가 웃었다.“그래, 오늘 짐 챙겨서 그쪽으로 갈게.”구승훈은 멈칫하다가 이내 입꼬리를 피식 올렸다.쉽게 승낙하니 다소 허탈한 느낌이 들었다.원래 상처들은 거의 다 나았지만 그가 요즘 매일 복싱장으로 가서 속에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풀었기에 몸에 새로운 상처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강하리가 정말 오면 그는 괴롭기만 할 거다.아내가 옆에 있는 데도 안지 못하는 그 기분을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정말 올 거야?”강하리가 웃었다.“왜, 내가 가는 게 싫어? 아니면 다른 여자가 있는 거야?”구승훈은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그럴 배짱이 있는 것 같아?”강하리는 그의 넥타이를 잡고 끌어당겨 허리를 굽히게 한 뒤 시선을 마주 보았다.“그러면 방 청소나 하고 나랑 연정이가 갈 테니까 기다려.”말을 마친 그녀는 구승훈의 넥타이를 놓아주고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구승훈은 문에 기댄 채 웃음을 터뜨리며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강하리를 거절할 수가 없다는 걸 인정했다.잠시 후 드레스룸에서 나온 강하리는 심플한 드레스를 입었는데도 유난히 아름다워 보였다.하지만 구승훈은 그녀가 나오는 순간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내가 보낸 드레스는 어딨어?”강하리는 머리를 뒤로 넘기며 무심하게 대꾸했다.“너무 더워서 시원한 걸로 바꿨어.”구승훈은 강하리의 등 뒤로 훤히 뚫린 구멍을 바라봤다.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위로 끌어올리자 뒤쪽의 아름다운 나비 모양의 뼈가 드러났다.허리까지 훤히 뚫린 디자인의 옷을 바라보는 구승훈의 눈빛이 어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