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리의 입꼬리가 뻣뻣하게 굳었다.“대표님은 상상력이 참 풍부하시네요.”그녀는 확실히 정주현이 그녀와 잠자리를 갖고 싶어 하는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다. 기껏해야 작업을 걸어오는 정도였다.대답이 없는 구승훈은 표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지만, 어찌 됐든 3년이란 시간 동안 함께 해왔기에 강하리는 한눈에 그의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다.그 뒤로 연회장에 있는 내내 구승훈은 계속 강하리를 옆에 끼고 있었다. 그는 신분이 고귀하여 이런 장소에 있을 때면 그에게 아첨하며 술을 권하러 오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구승훈은 그저 따분할 따름이다. 앞에 건네진 술잔을 보며 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강 부장이 나 대신 마셔줘.”아직 생리 중이어서 술을 마시고 싶지 않은 강하리가 미간을 심하게 구겼다.“대표님, 저 마시고 싶지 않아요.”하지만 구승훈은 아무 말도 없이 그저 가만히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를 보며 쓴웃음을 흘린 강하리는 이 남자가 분명 화가 나 있음을 알고는 결국 자기 고집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눈 딱 감고 앞으로 건네 온 술잔을 받아 들었다. 한 잔이 있으면 두 잔이 있기 마련이고 그렇게 세 잔...연속 몇 잔 마셨는지도 까맣게 잊어버린 강하리가 다시 술잔을 받아 들려고 할 때 구승훈이 돌연 술잔을 뺏어갔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단숨에 술을 쭉 들이켠 구승준은 그길로 강하리를 데리고 심준호와 작별 인사를 했다.“일이 있어서 오늘은 이만 가 봐야겠어.”일찌감치 구승훈이 지루해하는 모습을 본 심준호도 만류하지 않았다.“그래 그럼, 다음에 다시 연락 할게.”고개를 끄덕인 구승훈은 강하리를 끌고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강하리는 이 남자가 또 왜 이러는지 그 저의를 알 수 없었지만, 술을 더 이상 마시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했다.돌아가는 내내 구승훈은 말없이 그저 강하리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어찌나 세게 끌어안았는지 그녀를 자기 몸속에 구겨 넣을 기세였다. 강하리는 불편했지만, 꾹 참고
“혼자 걸을 수 있어요!”강하리의 몸부림에도 구승훈은 아무 말 없이 꿋꿋이 그녀를 안고 방으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강하리는 바로 욕실로 들어갔다.욕실에서 나오자 구승훈이 룸서비스를 시켰다. 강하리는 눈앞에 놓인 음식을 봐도 아무런 식욕이 돌지 않았다. 미동도 없는 그녀를 보고 구승훈은 눈썹을 치켜떴다.“왜, 먹기 싫어?”“네, 입맛이 없어요.”고개를 끄덕인 구승훈은 다시 카운터에 전화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호텔 직원이 영양죽 한 그릇과 찐빵 두 개를 가져왔다.“저녁이니까, 단 거 많이 먹지 마.”뭔가 걱정하듯 말하는 구승훈의 말에 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고마워요.”식사를 마친 강하리는 눕자마자 바로 곯아떨어졌다. 아마도 술을 마신 탓인지 그대로 깊게 잠들었다. 다음 날 그녀는 비몽사몽간에 구승훈이 자기 입에 입맞추는 것을 느꼈다.“내가 올 때까지 호텔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구승훈이 서명식에 저를 보내지 않으려고 하는 걸 알고 강하리는 눈을 번쩍 뜨고 그와 시선을 맞췄다.“전 밖에 나가서 돌아다니고 싶어요.”구승훈이 미간을 살짝 구겼다.“어디 갈 건데?”사실 강하리는 마침 보경시에 있는 손연지가 말했던 요양원에 가보고 싶었다.“그냥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구경이나 하려고요.”여기저기 돌아다니겠다는 강하리의 말에 구승훈은 불현듯 노민우가 전에 찍어 보내온 놀랄 만큼 아름다웠던 그 사진이 떠올라 날카로운 눈매가 가늘어졌다.“강 부장, 싸돌아다니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 오후에 돌아와서 같이 승마하러 가.”남자는 그녀의 입에 다시 입맞추고 나서야 돌아서서 나갔다. 옅은 한숨을 토해낸 강하리는 그가 떠나자 기어이 밖으로 나와 요양원으로 갔다.설령 아직 의료비를 마련할 수 없을지라도 한 번 알아봐서 나쁠 게 없다고 생각했다. 요양원의 환경은 물론 의료시설 또한 국내 최고라고 할 수 있었다.궁금한 점들을 일일이 물어 본 후에야 강하리는 돌아갈 채비를 서둘렀다. 하지만 예상 밖으로 요양원의 입구에서 심준호와 마주쳤다. 그녀를
순간 강하리의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그녀는 구승훈을 바라보며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엄마를 위해 고급 요양원에 대해 알아보고 있었어요.”그녀의 표정에서 뭔가 수상한 낌새라도 찾아내려는 듯 구승훈은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강하리는 집요하게 달라붙는 그의 날카로운 시선을 떨쳐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구승훈은 의심이 아주 많았기에 그녀가 불안한 기색 없이 평정을 유지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그제야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강 부장 앞으로 보경에 와서 살 생각이야?”잠시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그 요양원이 심씨 가문 소유라는 사실을 알게 된 강하리는 일찌감치 포기할 심산이었다. 그녀는 구승훈을 떠난 후에는 두 번 다시 그의 앞에 나타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아마도요.”“보경이 좋아?”“그건 아닌데 그냥 보경이 수도잖아요. 그렇다 보니 의료 시설이 다른 곳에 비해 좋지 않겠어요.”강하리가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구승훈은 가타부타 내색을 하지 않았다.“그렇지만 여기 의료비도 다른 곳에 비해 아주 비쌀 거야. 강 부장, 연성도 의료시설이 괜찮아.”입매가 굳어진 강하리는 대답을 이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구승훈도 더는 그 문제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준비해. 나가서 밥 먹자.”“나가서 먹자고요?”두 사람은 3년 동안 같이 있었지만, 외식은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강하리가 의아해하는 것도 당연지사였다. 접대 자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강하리가 집에서 밥을 했다. 정확히 짚어 말하면 두 사람의 사이는 떳떳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데이트나 외식과 같은 커플들끼리나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에게는 크나큰 사치였다. “그래, 먹고 나서 승마하러 가자.”“좋아요.”옷을 갈아입은 강하리는 구승훈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갔다. 남자의 커다란 손에서 따뜻한 온기가 전해져 왔다. 강하리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쳐들어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구승훈은 정말 잘생겼다. TV에 나오는 아이돌과는 떡잎부터 달랐다. 그에
두 사람을 본 심준호가 손을 흔들었다.“승훈아. 하리 씨, 또 만나네요.”강하리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인사했다. 심준호는 자신의 뒤에 있던 여자를 앞으로 끌어왔다.“이분은 제 약혼녀, 심예진이에요. 포토그래퍼로 활동하고 있어요.”“예진아, 이분이 바로 구승훈 대표님이야.”잠시 멈칫하던 심준호는 구승훈을 흘긋 쳐다보고 이어서 말했다.“그리고 이분은 구 대표님의 회사 동료, 강하리 씨야.”구승훈의 눈동자가 언뜻 번뜩였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예진은 두 사람과 가볍게 인사만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반대편에 서 있던 고이선이 입을 열었다.“난 또 누구시라고. 이제 보니 불륜녀가 되기를 즐기시는 강하리 씨였네.”무례하고 까칠한 발언에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얼굴이 한순간에 굳어 버렸다. 구승훈의 눈썹이 슬며시 위로 올라가며 눈동자에는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사실 구승훈은 처음으로 바로 앞에서 강하리를 불륜녀라고 욕하는 소리를 들었다. 전에 회사에서 떠도는 소문이든 인터넷에 올라온 시시껄렁한 언론을 보고도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하지만 직접 듣고 나니 마음에 불쾌감이 마구 치솟았다. 어찌 됐든 강하리는 그의 여자였고 다른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보면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 냉소를 흘리며 눈썹을 매섭게 치켜 올린 구승훈이 물었다.“준호야, 이분은 누구야?”“사촌 누나네 딸이야. 너무 오냐오냐 키워서 애가 버릇이 없어. 미안해.”어두운 표정으로 말한 심준호는 고개를 돌려 고이선을 쏘아보며 다그쳤다.“고이선, 빨리 와서 사과드려!”“싫어요. 삼촌이 몰라서 그렇지 저 여자가 바로 송유라와 구 대표님 사이에 끼어들어 이간질했다고요. 절대 반반한 외모에 속으면 안 돼요. 저 여자는 그냥 불여우란 말이에요!” “고이선!”표정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심준호의 우아한 기품은 어느새 냉혹하고 매섭게 변해 있었다. 순간 고이선은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여전히 도끼눈을 뜨고 강하리를 노려보았다. 싸늘한 웃음을 흘린 강하리가 입을 열었
구승훈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강 부장이 뺏은 거 아니야?”“당신 솔로 아니셨나요?”남자의 눈을 마주한 강하리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구승훈에게 이어서 말했다.“솔로이신데 송유라 씨 남자를 뺏었다는 말은 대체 어디서 나온 말일까요?”“강 부장, 앞으로도 영원히 지금처럼 떳떳하길 바라.”코웃음을 치며 말하는 구승훈의 말에 강하리는 대꾸하지 않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사실 자신이 하나도 떳떳하지 못하다는 건 오직 그녀만 알고 있을 것이다. 비록 구승훈이 솔로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했지만, 그의 마음은 송유라를 향해 있었다. 구승훈은 강하리를 데리고 마구간을 한 바퀴 돌며 몹시 사나워 보이는 말 한 마리를 골랐다.“진짜 안 탈 거야?”구승훈의 물음에 강하리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 그녀는 승마를 배운 적이 있었다. 구승훈은 그녀에게 승마, 펜싱, 골프 모든 것을 가르쳐줬었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 말을 타고 싶지 않았다.“내가 태워줄게.”눈썹을 찌푸린 강하리가 미처 거절할 새도 없이 구승훈이 안아서 말 위에 앉혀 놨다. 말에 올라탄 구승훈이 미끈한 다리를 구르자 말이 맹렬히 질주했다.“승훈 씨!”겁에 질린 강하리가 비명을 질렀다. 아무리 승마를 배왔다고는 하지만 너무나 빠른 속도를 감당할 수 없었다. 팔을 그녀의 허리에 두른 구승훈이 옅은 웃음을 터뜨리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뭐가 무서워? 날 꽉 잡아.”강하리가 남자의 손을 꼭 잡자, 남자는 자기 손을 빼서 그녀의 손을 감쌌다. 구승훈은 그녀를 데리고 승마장 두 바퀴를 돌고 나서야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언덕 앞에 이르자 그는 마침내 말을 멈춰 세웠다. 저 멀리 석양이 이미 하얀 구름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강하리는 넋 놓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그와 함께 시원한 밤바람을 맞으며 저녁노을을 바라보는, 이런 장면을 그녀는 수없이 상상해 본 적이 있다. 더 이상 기회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이런 상황에서 실현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강하리.”구승
강하리가 나오는 모습을 본 구승훈은 이쪽으로 걸어왔다.“힘들어?”“괜찮아요.”“그럼 조금 있다 같이 밥 먹으러 가.”흠칫 놀란 강하리는 몸이 금세 굳어버렸다.“대표님, 전 심 대표님이랑 돌아가면 돼요.”“강하리, 내 차에 앉기 싫어?”구승훈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하자 강하리는 씁쓸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송유라 씨를 만나러 가는 거 아니었어요?”“그냥 밥만 먹을 거야. 같이 먹고 돌아가자.”“그렇지만 전 송유라 씨와 함께 있는 게 싫은데요. 대표님도 아실 거 아니에요? 송유라 씨도 사실 저를 몹시 미워한다는 걸.”강하리가 떨떠름한 기색을 내비치자 구승훈이 냉소를 흘렸다.“그럼 강 부장이 다른 남자 차에 타는 걸 내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겠네.”“시내에 도착하면 내려줘요. 전 택시를 타고 돌아갈게요.”구승훈은 더는 말이 없었다. 동의한 건지 아닌지도 모른 채 강하리는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심준호가 다가와서 작별 인사를 하며 겸사겸사 물었다.“언제 연성으로 돌아갈 계획이야?”사실 이번 출장에서 해야 할 일은 이미 다 마무리한 상태였다. 하지만 구승훈은 강하리를 힐끗 쳐다보고는 말했다.“두 날 더 있을 거야. 강 부장이랑 좀 더 놀다 갈 거야.”“그럼 내일 점심에 우리 집에 와서 밥 먹을래? 부모님이 너를 많이 보고 싶어 하시거든. 하리 씨도 같이 와요.”강하리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진심이 가득 담긴 심준호의 눈을 보고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몇 마디를 주고받고 헤어졌다. 강하리와 구승훈이 가고 나서 계속 말이 없던 심예진이 갑자기 한마디를 내뱉었다.“오빠, 이 사진 봐. 사진 속 하리 씨 분위기 미현 언니랑 정말 닮았어.”심준호가 다가가서 사진을 보니, 바람을 맞으며 저녁노을 아래에 서 있는 사진 속 강하리는 훨씬 부드럽고 온화해 보였다. 사진 속의 심미현이랑 분명 어딘가 닮아 있었다. 한참을 보던 심준호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왠지 강하리가 낯익다 했더니 심미현과 조금 닮아서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안현우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세 사람 모두 뻔히 알고 있었다. 구승훈의 얼굴은 살얼음이라도 낀 것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사실 예전에는 안현우의 이런 모욕적인 발언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근본이 저열한 인간이니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을 볼 때면 마음이 근질거리고 열등감에 사로잡혀 시샘하고 질투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구승훈은 지금 꾹 참고 있는 강하리의 작은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음에 불쾌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안 대표, 만약 한가해서 할 일이 없는 거라면 내가 다시 일거리를 만들어 줘?”간신히 표정 관리를 한 안현우는 한참이 지나서야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승훈아, 고작 이런 년 때문에 친구와 사이가 틀어질 필요는 없잖아?”“있고 말고는 내가 판단할 일이야. 안 대표가 그래도 여전히 시도해 보고 싶다면 내가 제대로 상대해 주지.”흥, 콧방귀를 낀 안현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구승훈에게 시달릴 때의 그 고통을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구승훈이 가볍게 던진 한마디로 안현우는 피를 토할 것 같은 고통에 몸부림쳐야 했다. 이 남자는 그들 무리에서도 속내를 알 수 없고 무자비하기로 명성이 자자했다. 하지만 그가 강하리를 좋아한다고 말한다면 안현우는 여전히 믿지 못했다. 구승훈, 이 남자는 쉽게 마음이 흔들릴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송유라도 있는데 그가 어떻게 강하리를 좋아할 수나 있을까? 그를 적대한 이유는 아마도 남자의 소유욕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물건을 본인은 싫어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이 염두에 두는 것이 못마땅할 뿐이다.“그냥 해본 말이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 승훈아.”구승훈은 그를 흘끗 쳐다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송유라는 구승훈의 옆에 앉아 있는 강하리를 보고 미소를 머금었던 얼굴이 금세 굳어 버렸다.“강 부장님도 왔네요?”그녀의 말에 강하리는 대꾸하지 않았다. 송유라는 입술을 삐죽였다.“오빠, 왜 강 부장이 온다고 말해주지 않았어요?”기분이 별로인 구승훈은 송유라를
구승훈은 그녀의 손목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어디 불편해?”“불편하면 먼저 가라고 할 거예요?”확실히 불편하기는 했지만 그저 마음만 있을 뿐 그녀는 그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약 가져다 달라고 할 테니까 밥 먹고 가.”강하리는 웃는 얼굴로 그의 손을 뿌리치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구승훈이 왜 굳이 그녀에게 이 식사 자리에 남으라고 하는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불편해하는 모습을 보려고? 아니면 송유라와 자신이 얼마나 사이가 좋은지 보여주기 위해서?’밖으로 나온 그녀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룸 안, 구승훈은 송유라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왜 자꾸 저 여자 괴롭히는 거야? 재미있어?”그 말에 송유라는 펄쩍 뛰었다.“괴롭히긴 누가 괴롭혀요? 난 분명 좋게 좋게 얘기했다고요. 언짢은 얼굴로 퉁명스럽게 말한 사람은 강하리예요.”“그냥 못 본 척하면 될 거 아니야?”그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그럼, 오빠는 저 여자 왜 데리고 온 거예요? 왜 나한테 이러냐고요? 나 좋아한다고 했었잖아요.”“송유라, 말은 똑바로 해야지. 애초에 먼저 헤어지자고 한 사람은 너였어.”“아직도 나한테 화난 거예요?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해서?”송유라는 눈시울을 붉히며 물었다. “아니.”사실 그 일에 대해 화난 건 아니었다. 감정이라는 건 원래 그 사람의 자유니까. 송유라가 떠나기를 원한다면 그는 굳이 붙잡을 생각이 없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갔다.“잠깐 나갔다 올게."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녀는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봤죠? 구 대표가 점점 강하리에 대해 신경 쓰고 있는 거.”옆에 있던 안현우는 불난 집에 부채질이라도 하듯 한마디 내뱉었고 그의 말에 송유라의 안색은 더더욱 어두워졌다. 사실 그가 말하지 않아도 그녀는 눈치챌 수 있었다. 구승훈이 강하리에 대해 점점 더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최근 들어서는 그가 강하리를 좋아하고 있다는
여초연이 얼마나 치밀하게 움직이는 사람인지 구승훈이 제일 잘 안다.정말 여초연이 연정이를 데려갔다면 그렇게 쉽게 꼬리를 드러내지 않았을 테고 초조했던 그는 계속해서 그녀가 먼저 빈틈을 보이길 기다릴 수가 없었다.그래서 소란을 일으킨 뒤 그녀의 움직임을 주시할 생각이었다.그녀의 수단으로 봤을 때 누군가 자기를 지켜보는 걸 모를 리 없었다.그런데도 오늘 대놓고 이곳으로 왔다는 건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그를 유인한 걸까?그렇다면 연정이에게 일어난 일이 그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더 분명해지지 않나?어쨌든 구승훈은 연정이를 먼저 생각해야 했다.연정이가 정말 그녀의 손에 있고 막다른 길에 이른 그녀가 무슨 짓을 할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조심할 수밖에 없다.그 시각 목란정원에서 여초연은 복도에서 누군가와 휴대폰을 들고 영상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상대는 여자아이를 안고 있었다. 이쪽의 깊은 밤과 달리 저쪽은 태양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강하리는 다음 날 주해찬과 함께 B시로 갔다.비행기에서 막 내린 두 사람은 입국 게이트에서 정주현이 신나게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았다.“강하리 씨, 드디어 왔네요!”강하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주해찬을 흘깃 쳐다보았다.주해찬은 무기력하게 어깨를 으쓱했다.“어쩔 수 없었어. 계속 물어보니까 시간을 알려줄 수밖에.”정주현은 곧바로 불만을 터뜨렸다. “강하리 씨, B시로 오면 알려준다면서 이러는 건 아니죠!”강하리는 힘없이 웃었다.“가요.”그러던 중 정주현은 강하리와 함께 일하고 싶다는 걸 다시 한번 언급했지만 강하리는 여전히 부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정주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강하리를 바라보았다. “하리 씨, 그래도 우리 같이 일한 적이 있는데 이러면 대양그룹에 불만이 있는 것 같잖아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정 회장님이 절 찾아오라고 시켰어요?”정주현은 부인하지 않았다.“영감탱이한테 불만 있는 건 아니죠? 지난번에 구정우 도와줘서 그래요?”강하리는 침묵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정주현은 그
구승훈의 주변에 우중충한 공기가 감돌았고 차가운 시선은 올곧게 주해찬에게 향했다.가까이 다가온 주해찬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구승훈은 조금도 피할 생각 없이 그대로 얻어맞은 뒤 이윽고 주해찬의 손목에 주먹을 내리쳤다.그 손이 조금 전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 구승훈은 그의 뼈를 부러뜨릴 기세로 달려들었다.주해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눈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구승훈, 하리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알아? 병원에서 그 며칠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아? 네가 뭔데 계속해서 걔한테 상처를 줘, 네가 뭐라고 걔한테 그런 식으로 강요해!”강하리가 병원에서 지냈던 걸 언급하자 구승훈의 표정이 굳어졌다.당연히 그는 그녀가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고 있었다.매일 의사가 진정제를 놓아야 겨우 잠을 잘 수 있었다.심한 우울증이었다.노민준이 그날 했던 말을 그는 여태 기억하고 있었다.“이러면 언제든 극단적인 선택을 할 위험이 있어. 이젠 살아갈 의욕을 완전히 잃었어.”구승훈의 몸이 경직되었지만 꿋꿋하게 받아쳤다.“주해찬 당신이 뭔데 나랑 하리 사이에 끼어들어?”주해찬은 입가에 무심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아무리 그냥 선배라도 걔가 너한테 괴롭힘당하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정말 그냥 선배가 되고 싶은 거야? 주해찬, 네 개수작을 모를 것 같아? 이 기회를 이용하려는 거잖아.”잠시 멈칫하던 주해찬은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내가 아무리 이용하는 거라고 해도 억지로 강요하는 너보다 나아. 구승훈, 사람 존중하는 방법부터 배우고 다시 하리 앞에 나타나. 그전까지 넌 자격 없으니까.”주해찬은 말을 마치고 곧장 차 쪽으로 몸을 돌렸다.비를 맞으며 서 있던 구승훈은 한참이 지나서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자격이 없다고...맞는 말이긴 한데 그럼 주해찬은 자격이 있다는 말인가?그는 입가를 가볍게 문지르며 위쪽을 올려다보았다.강하리는 주방에 약을 먹으러 가다가 비속에 서 있는 구승훈을 보게 될 줄은 몰랐
가서 팔찌를 가지고 백아영의 생일을 보낸 후 출국할 생각이었고 그 외 일은 지금 당장 처리할 기분이 아니었다.구승훈이 무슨 말을 하려는데 손연지의 집 밑에 우산을 쓴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주해찬이었다.비 오는 밤, 가로등에 반사된 남자의 모습은 약간 서늘한 기운을 풍겼다.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무척 적극적이네.”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렬한 불빛이 주해찬에게 비추자 뒤를 돌아본 그가 구승훈의 차에서 내려 걸어오는 강하리를 발견했다.구승훈은 보지 못한 듯 강하리를 향해 걸어가는 그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검은 우산이 머리 위로 드리워지며 주해찬의 낮은 톤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걱정돼서 보러 왔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다.“난 괜찮아요. 걱정시켜서 미안해요.”그때 주해찬이 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하리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구 대표님.”구승훈은 고개를 숙이고 담배에 불을 붙인 뒤 가벼운 웃음을 내뱉으며 주해찬을 향해 시선을 들어 올렸다.“주해찬 씨가 뭐라고 저한테 감사 인사를 하는 거죠?”주해찬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하리의 선배로서요.”그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려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시간도 늦었는데 일찍 집에 가서 쉬어.”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해찬이 우산을 들고 건물 쪽으로 따라나섰다.구승훈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얼굴에 서리가 낀 것 같은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헤드라이트가 두 사람의 실루엣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비를 맞으며 우산 아래서 두 사람의 어깨는 단단히 맞닿은 것 같았다.건물 입구에 다다랐을 때야 강하리가 나지막이 말했다.“선배, 나 혼자 올라가면 돼요.”주해찬의 시선이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입술이 어딘가 부딪힌 것처럼 살이 갈라져 있었다.갈 때는 괜찮았는데 돌아올 땐 입술이 찢어진 채로 왔다.구승훈에 대한 강하리의 쌀쌀맞은 태도는 다 지켜보고 있었다.“구승훈이 강요했어?”주해찬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강하리는 몸이 굳어지더
한편 여초연은 거실 소파에 앉아있고 도우미가 옆에서 옷을 걸쳐주었다.“사모님, 시간이 늦었는데 일찍 쉬세요.”여초연은 밖의 하늘을 바라보다가 옷을 두른 채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승훈이는 요즘 어떻게 지내요?”도우미는 얼굴을 찡그렸다.“잘 지내지 못해요. 강하리라는 여자가 우리 집안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보세요. 어르신까지 들여보냈는데 큰 도련님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여자한테 홀딱 넘어간 게 틀림없어요.”여초연은 밖에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면서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앞으로 그런 말 하지 마요. 승훈이가 좋아하는 사람이고 내 며느리니까.”도우미가 입술을 달싹였다.“그래도 구씨 집안이 그 여자 때문에 이 모양이 됐잖아요!”SH그룹이 합병되면서 구씨 집안은 뿌리 없는 나무처럼 흔들리고 있었다.도우미들의 일자리도 위협받는 상황에서 정작 여초연은 조금의 초조함도 보이지 않았다.“게다가 큰 도련님도 그 여자 때문에 사모님께 화를 냈잖아요.”여초연은 부드럽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우산을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따라오지 마요.”그녀가 속삭이자 도우미는 즉시 발걸음을 멈췄다.비 내리는 어느 날 밤, 검은색 승용차가 구씨 집안 저택에서 시내 반대편 목란정원을 향해 유유히 달렸다.목란정원은 여초연이 소유한 정원인데 그녀는 때때로 며칠씩 이곳에 오곤 했다.구승재는 그녀를 따라 목란정원 입구까지 갔다가 차를 멈췄다.그는 목란정원의 출입구를 바라보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그동안 형의 지시로 구씨 저택에 머물면서 집안사람들을 돌보고 있었지만 사실은 여초연을 감시하는 것이었다.여초연의 차가 목란정원에 들어가는 것을 본 구승재는 휴대폰을 꺼내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다.고요한 밤, 구승훈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강하리의 몸이 굳어졌고 구승훈의 입술은 그녀의 귀에 닿은 상태였다.“전화 좀 받고 올게.”구승훈이 떠난 후 강하리 휴대폰도 울렸다.주해찬의 전화였다.“하리야, 비행기표 샀으니까 내일 데리러 갈게.”“그래요.
구승훈은 상처받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웃었다.“하리야, 넌 늘 그렇듯 매정하네.”강하리가 뒤돌아 휴대폰으로 택시를 부르려는데 구승훈이 그녀의 휴대폰을 움켜잡았다.“딱 하룻밤만. 너 안 건드릴게, 응?”강하리의 몸이 굳어졌고 구승훈은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하리야, 내 소원 들어주는 거라고 생각해. 네가 이 집에서 아이와 함께 지내는 모습을 몇 번이나 상상했는지 몰라. 여기가 우리 집이야.”강하리의 코끝이 시큰거렸지만 그래도 결국 구승훈의 손을 뿌리쳤다.너무도 분명한 그녀의 거절에 구승훈은 답답한 가슴에 고통이 밀려왔고 쓴웃음을 짓던 그는 더 그녀에게 강요하지 않았다.“샤워하고 나오면 다시 데려다줄게.”말을 마친 그는 돌아서서 화장실로 들어갔다.구승훈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데 강하리는 통화 중이었다.발걸음이 멈칫한 그는 통화 상대가 주해찬이란 것을 알아차렸다.“선배, 전 괜찮아요.”“알았어, 항공편 예약해. 나도 같이 갈게.”강하리가 전화를 끊는데 구승훈이 갑자기 다가와 그녀를 껴안고 고개를 숙여 입 맞추었다.“구승훈!” 강하리는 그의 키스에 깜짝 놀라 그를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구승훈은 점점 더 꽉 그녀를 붙잡았다.그는 강하리의 턱을 잡고 깊숙이 파고들며 조금의 부드러움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하게, 마치 화풀이나 비난하듯 키스를 퍼부었다.강하리는 벽에 단단히 밀려서 몸부림을 치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그녀가 다리를 들어 그의 아랫도리를 가격하려는데 구승훈이 먼저 그녀의 다리를 붙들었다.강하리가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구승훈의 키스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힘의 격차로 인해 그녀는 반격할 방법이 없었다.강하리는 화가 나서 얼굴마저 하얗게 질렸고 구승훈은 실컷 헤집어놓은 뒤에야 그녀를 놓아주었다.강하리가 그의 뺨을 때렸고 이내 구승훈의 얼굴엔 손자국이 생겨났다.그러나 그의 손가락은 키스로 인해 부어오른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하리야, 나 생각이 바뀌었어.”강하리가 멈칫했다.“무
그리고는 강하리를 곧장 차에 밀어 넣었다.차는 빗속을 뚫고 달려 나갔다.구승훈의 차는 굉장히 빨랐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시내를 벗어나 한 별장 앞에 멈춰 섰다.구승훈은 주차가 끝나자마자 차에서 내려 강하리를 빌라 안으로 끌어당겼다.빌라는 강하리가 선호하는 스타일로 안팎을 의도적으로 꾸몄다.안으로 들어선 강하리는 몸이 굳어버렸다.“여긴 내가 준비한 신혼집이야.”구승훈이 문득 등 뒤에서 이렇게 말했다.“결혼하면 여기서 지내려고 했어. 하리야, 정말 이대로 날 버릴 거야?”강하리는 꾸며진 방을 둘러보며 마음이 씁쓸했지만 애써 두 눈에 담기는 감정을 감추었다.“구승훈, 내가 그렇게 고통받는 걸 어떻게 지켜보기만 했어?”말문이 막힌 구승훈은 갑자기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미안해.” 남자의 목소리는 죄책감으로 가득했다.“다 내 잘못이야.”강하리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애쓰며 낮은 웃음을 지었다.너무 지쳤다.한때 열정적이었던 사랑이 이제는 고문처럼 느껴졌다.그날 구승훈이 아직도 자기를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강하리는 답을 알 수 없었다.어쩌면 오랫동안 사랑했던 남자일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미워하는 마음이 더 컸다.강하리는 구승훈이 진심으로 미웠다.그의 무자비함과 강압적인 성격이 싫었다.둘 사이에서 그는 항상 그녀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행동했고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입장이었다.그래, 어쩌면 그는 그녀를 위해, 아이를 위해 그랬을 수도 있다.하지만 자신이 해준 것들이 그녀가 진정 원하는 것인지 물어본 적은 없었다.강하리가 발버둥쳤지만 구승훈은 더 꽉 끌어안았다.“구승훈, 그만하자.”구승훈의 목소리가 잠겼다.“그만하자니, 무슨 말이야? 하리야, 우리 사이가 이대로 끝날 것 같아? 문씨 집안도, 구씨 집안도 망했고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다 사라졌는데 이제 와서 그만하자고?”“우리 아이가 죽었잖아!”뒤돌아선 강하리의 눈엔 온통 고통만이 가득한 채로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구
“어떻게 알았어?”구승훈은 웃으며 눈을 내리깔고 테이블 아래 두 사람이 잡고 있는 손을 바라보았다.“이상해?”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구승훈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하리야, 내가 포기하지 않겠다고 했잖아. 당연히 네 일에 대해선 다 알고 있지.”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손을 빼냈다.“그럴 필요 없어.”유난히 침착한 그 말이 구승훈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필요한지 아닌지는 네가 결정하는 게 아니야. 강하리, 내가 뭘 하든 그건 내 일이야.”강하리가 비웃었다.“하지만 난 이제 당신이랑 더 엮이고 싶지 않아.”구승훈의 목울대가 꿈틀거리며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몇 마디 말로 두 사람 사이는 또다시 교착 상태에 빠졌고 일어나서 밖으로 나온 강하리는 그제야 휴대폰을 꺼내 안예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그녀는 최소한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는 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구승훈이 옆에 앉아있자 마치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던 치유할 수 없는 상처, 두 사람의 목숨이 다시금 떠오르는 듯했다.그녀의 어머니와 아이...강하리가 가정에서 나오는데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멍하니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데 문득 연정이가 사고를 당한 날 밤도 비 오는 밤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그날 밤이 어땠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연정이가 이렇게 비 오는 밤에 춥고 무서워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강하리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비를 바라보다가 눈가에 차오르는 시큰함을 꾹 참고 빗속으로 걸어가는 순간 머리 위로 드리워진 우산이 그녀를 덮었다.고개를 들자 미소를 머금은 주해찬의 눈동자와 마주쳤다.“그렇게 비속우로 달려가면 감기 걸리잖아.”강하리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우산 챙기는 걸 깜빡해서.”“왜 전화 안 했어?”주해찬의 우산은 완전히 그녀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내가 마침 저녁을 먹으러 오지 않았으면 이대로 비를 맞으며 돌아가려고 했어?”주해찬의 눈에는 나무람과 관심이 가득했고 강하리는 웃으며 시선을 다른 곳
B시 대양그룹.정양철이 사무실로 들어가니 이미 비서가 대기하고 있었다.“강하리 검색어는 어떻게 된 거야?”비서는 잠시 머뭇거렸다.“사모님께서 대양그룹 명의로 매수한 것인데 아마도 회장님을 시험하려는 의도 같습니다.”정 회장이 강하리를 아낀다면 이 일을 거론할 것이고 신경 쓰지 않는다면 하든 말든 넘어가겠지.정양철의 얼굴에 알 수 없는 표정이 스쳤고 그가 말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주현이 통해 강하리에게 연락해서 대양그룹이 JM과 함께 일하고 싶다는 말을 전하라고 해.”말을 마친 그가 멈칫했다.“집사람이 물어보면 강하리에 대한 보상이라고 하고.”비서의 눈이 번뜩이더니 대답을 마치고 자리를 떠났다.강하리는 정주현의 전화를 받고 깜짝 놀랐다.지난번 구승훈과 함께 대양그룹 입찰을 뺏은 이후 정양철 측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하지만 이번에는 정양철이 무슨 꿍꿍이로 합작을 원하는 건지 모르겠다.지금은 정양철을 상대로 놀아줄 기분이 아니었다.“정주현 씨, 대양그룹에서 마음만 먹으면 파트너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겠죠?”정주현은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듣고는 다소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강하리 씨, 우리랑 같이 일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강하리가 함께 일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려던 찰나, 정주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B시에 언제 와요? 얼굴 보고 얘기할까요? 협업 안 해도 오랜만에 얼굴 한번 봐요. 우리 안 본 지 오래됐잖아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알았어요, 그럼 가면 연락할게요.”정주현이 전화를 끊자 사무실 앞에 서 있는 연미숙의 모습이 보였다.“엄마, 여기서 뭐 해?”연미숙이 웃었다.“우리가 강하리랑 같이 일해?”정주현은 고개를 끄덕였다.“아빠가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구씨 집안에 매달리는 게 아니라 밖으로 사업을 넓히려는 것 같아.”연미숙은 인상을 찌푸렸다. “꼭 강하리여야만 대외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거야?”정주현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강하리가 왜?”연미숙은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
구승훈은 차갑게 웃으며 자신도 모르게 핸들을 꽉 움켜쥐었다.그는 차에서 내리지 않고 두 사람이 차 안에서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모르겠지만 강하리의 얼굴에 번진 미소가 전혀 억지스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화사한 아침 햇살 같은 그 미소가 구승훈은 왠지 모르게 눈에 거슬렸다.강하리는 차에서 내려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된 구승훈의 차가 보였다.그녀는 발걸음을 잠시 멈추었지만 시선을 돌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강하리가 안으로 들어간 후 주해찬은 차에서 내려 구승훈의 차 쪽으로 걸어갔다.그가 창문을 살며시 두드리자 구승훈이 창문을 내렸다.“구 대표님 시간 있으세요? 얘기 좀 할까요?”구승훈은 가볍게 웃었다.“주해찬 씨는 남의 연애에 참견하는 걸 좋아하나 봐요?”구승훈의 가시 돋친 말에도 주해찬은 계속 웃기만 했다.“구승훈 씨, 당신과 하리가 잘 지낸다면 나도 굳이 끼어들고 싶진 않은데 당신은 하리를 행복하게 해준 적이 있긴 한가요?”그의 말에 구승훈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그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들이마신 후 말을 시작했다.“주해찬 씨, 행복하든 아니든 그건 다 나와 강하리 사이의 일이지 당신이랑은 아무 상관이 없잖아요.”주해찬은 조롱 섞인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웃었다. “구승훈 씨, 내가 하리 데려간다고 했죠. 이번엔 말한 대로 합니다.”말을 마친 그는 돌아서서 다시 차로 향했다.구승훈의 얼굴에서 미소가 조금씩 완전히 사라진 채 떠나는 차를 바라보았다.그는 한참 동안 손에 쥔 휴대폰을 내려다보면서 결국 강하리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싶은 마음을 참지 못했다.[그 자식이랑 떠날 거야?]강하리가 위층으로 올라가는데 전화벨이 울렸고 그녀는 한참 동안 들여다보다가 그냥 대화창을 닫아버렸다.구승훈은 전송된 메시지에 답장이 오지 않자 가벼운 웃음을 터뜨리며 입안의 쓴맛을 삼키고 휴대폰을 치우려던 찰나, 구승재의 전화가 걸려 왔다.“형, 큰어머니가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