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우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세 사람 모두 뻔히 알고 있었다. 구승훈의 얼굴은 살얼음이라도 낀 것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사실 예전에는 안현우의 이런 모욕적인 발언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근본이 저열한 인간이니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을 볼 때면 마음이 근질거리고 열등감에 사로잡혀 시샘하고 질투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구승훈은 지금 꾹 참고 있는 강하리의 작은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음에 불쾌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안 대표, 만약 한가해서 할 일이 없는 거라면 내가 다시 일거리를 만들어 줘?”간신히 표정 관리를 한 안현우는 한참이 지나서야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승훈아, 고작 이런 년 때문에 친구와 사이가 틀어질 필요는 없잖아?”“있고 말고는 내가 판단할 일이야. 안 대표가 그래도 여전히 시도해 보고 싶다면 내가 제대로 상대해 주지.”흥, 콧방귀를 낀 안현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구승훈에게 시달릴 때의 그 고통을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구승훈이 가볍게 던진 한마디로 안현우는 피를 토할 것 같은 고통에 몸부림쳐야 했다. 이 남자는 그들 무리에서도 속내를 알 수 없고 무자비하기로 명성이 자자했다. 하지만 그가 강하리를 좋아한다고 말한다면 안현우는 여전히 믿지 못했다. 구승훈, 이 남자는 쉽게 마음이 흔들릴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송유라도 있는데 그가 어떻게 강하리를 좋아할 수나 있을까? 그를 적대한 이유는 아마도 남자의 소유욕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물건을 본인은 싫어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이 염두에 두는 것이 못마땅할 뿐이다.“그냥 해본 말이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 승훈아.”구승훈은 그를 흘끗 쳐다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송유라는 구승훈의 옆에 앉아 있는 강하리를 보고 미소를 머금었던 얼굴이 금세 굳어 버렸다.“강 부장님도 왔네요?”그녀의 말에 강하리는 대꾸하지 않았다. 송유라는 입술을 삐죽였다.“오빠, 왜 강 부장이 온다고 말해주지 않았어요?”기분이 별로인 구승훈은 송유라를
구승훈은 그녀의 손목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어디 불편해?”“불편하면 먼저 가라고 할 거예요?”확실히 불편하기는 했지만 그저 마음만 있을 뿐 그녀는 그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약 가져다 달라고 할 테니까 밥 먹고 가.”강하리는 웃는 얼굴로 그의 손을 뿌리치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구승훈이 왜 굳이 그녀에게 이 식사 자리에 남으라고 하는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불편해하는 모습을 보려고? 아니면 송유라와 자신이 얼마나 사이가 좋은지 보여주기 위해서?’밖으로 나온 그녀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룸 안, 구승훈은 송유라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왜 자꾸 저 여자 괴롭히는 거야? 재미있어?”그 말에 송유라는 펄쩍 뛰었다.“괴롭히긴 누가 괴롭혀요? 난 분명 좋게 좋게 얘기했다고요. 언짢은 얼굴로 퉁명스럽게 말한 사람은 강하리예요.”“그냥 못 본 척하면 될 거 아니야?”그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그럼, 오빠는 저 여자 왜 데리고 온 거예요? 왜 나한테 이러냐고요? 나 좋아한다고 했었잖아요.”“송유라, 말은 똑바로 해야지. 애초에 먼저 헤어지자고 한 사람은 너였어.”“아직도 나한테 화난 거예요?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해서?”송유라는 눈시울을 붉히며 물었다. “아니.”사실 그 일에 대해 화난 건 아니었다. 감정이라는 건 원래 그 사람의 자유니까. 송유라가 떠나기를 원한다면 그는 굳이 붙잡을 생각이 없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갔다.“잠깐 나갔다 올게."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녀는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봤죠? 구 대표가 점점 강하리에 대해 신경 쓰고 있는 거.”옆에 있던 안현우는 불난 집에 부채질이라도 하듯 한마디 내뱉었고 그의 말에 송유라의 안색은 더더욱 어두워졌다. 사실 그가 말하지 않아도 그녀는 눈치챌 수 있었다. 구승훈이 강하리에 대해 점점 더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최근 들어서는 그가 강하리를 좋아하고 있다는
그 당시, 송유라가 올린 사진 때문에 인터넷은 난리가 났었다. 하지만 그 사진은 사실 오래전부터 찍혀 있던 사진이었고 막 회의장에 도착했을 때 찍힌 사진이었다. 송유라는 단지 적당한 시기에 그걸 인터넷에 뿌렸을 뿐이다. 그녀는 강하리가 구승훈을 찾아가 따지고 성질을 부리기를 바랐다. 구승훈 같은 성격이라면 여자가 끊임없이 따지고 성질부리는 걸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몇 번 말다툼이 있다 보면 그는 분명 싫증을 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승훈 오빠는 널 전혀 신경 쓰지 않아. 넌 네 신세가 불쌍하지도 않니?”가슴이 답답해진 강하리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사실 그녀는 송유라의 말을 그다지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만은 잘 알고 있다. 그 사진이 언제 찍혔던지 구승훈의 묵인이 없었다면 송유라가 그런 상황에서 트위터에 사진을 올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가 그 일에 대해 신경 썼다면 아마 진작에 그 게시물을 삭제하도록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게시물은 아직도 인터넷에 버젓이 걸려 있다. 두 사람이 화해하지 않았더라도 두 사람 사이에 다른 사람은 끼어들 수 없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분명히 보여주는 듯 말이다. 강하리는 깊을 숨을 들이마시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송유라, 나랑 구 대표가 어떻게 되든 그건 우리 두 사람 사이의 일이야. 그 사람이 날 신경 쓰든 안 쓰든 그건 너랑은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 네가 무슨 자격으로 우리 두 사람 사이를 간섭할 수 있는지 모르겠네?”웃으며 말하는 강하리를 보고 송유라는 이를 악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송유라한테는 그럴 자격이 없었다. 전 여자친구의 입장에서 그것도 구승훈이 스스로 자신은 솔로라고 밝힌 이 시점에서 그녀에게 무슨 자격이 있겠는가?“그냥 네가 불쌍해 보여서. 오빠 곁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명분도 없이. 역시 마음이 없는 사람한테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니까. 강하리, 오빠한테 넌 그냥 섹스 파트너일 뿐이야.”그 말을 들은 강하리는 얼굴이 약간 창백해진
다행히 저녁 식사는 이내 끝이 났다. 자리에서 일어날 때 송유라가 갑자기 놀러 가고 싶다고 입을 열었다. 구승훈은 아무 말도 없이 강하리만 쳐다보았다.“난 안 될 것 같아요. 세 사람만 놀러 가요.”“승훈이 넌?”안현우가 물었다.“좀 피곤해. 다음에 하자.”나른한 기색이 역력해 보이는 그는 많이 피곤한 것 같았다. 송유라는 입을 삐죽거리더니 어쩔 수 없이 포기했다. 잠시 후, 밖으로 나오던 그들은 마침 정주현과 마주쳤다. 정주현은 그들보다 나이가 어렸다. 양복 차림이 아닌 캐주얼한 옷을 입고 그는 활기찬 소년의 모습이었다. 강하리를 발견한 그가 눈빛을 반짝거렸다.“강하리 씨.” 그가 그녀한테 먼저 인사를 건네고는 그제야 구승훈을 향해 입을 열었다.“구 대표님,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반가워요.”한편, 강하리는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얼굴이 굳어진 구승훈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그러나 정주현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고 그저 강하리만 쳐다보았다.“하리 씨,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요?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요.”“조금 피곤해서요. 미안하지만 먼저 가볼게요. 그럼, 이만.”말을 마친 그녀는 이내 자리를 떴다. 정주현은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그녀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고는 그제야 구승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어 그는 구승훈 옆에 찰싹 붙어있던 송유라를 힐끗 쳐다보았다. “구 대표님, 대표님과 강 부장님 두 분 사귀는 사이 아니죠? 아니라면 제가 강 부장님한테 대시할 생각이거든요.”그 말에 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차갑게 웃었다.“정주현 씨, 남의 여자는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는 걸 모르는 겁니까?”말하는 그의 눈빛에 싸늘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가뜩이나 기분이 안 좋았는데 정주현의 말을 듣고 나니 마음이 더 안 좋아졌다.사실 정주현은 구승훈이 조금 두려웠다. 구승훈이라는 사람은 상류층에서 신 같은 존재였다. 그의 아버지뻘 되는 사람이라도 젊은 구승훈 앞에서는
그의 키스에 깜짝 놀란 강하리는 그를 밀어냈다.“승훈 씨.”이곳은 레스토랑 입구의 주차장이었고 오가는 사람이 많은 곳이었다. 그러나 구승훈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고 그녀에게 반항할 여지조차 주지 않았다. 그의 키스는 화가 잔뜩 난 사람처럼 거칠었다. 오늘 밤, 자신이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와 이러고 싶지는 않았다.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 그녀는 있는 힘껏 발버둥 쳤다.“강하리, 계속 발버둥 칠래?”그의 싸늘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들려왔고 그 소리에 그녀는 몸이 뻣뻣해졌다.“여기서 이러지 말아요.”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애원했다. 사실 그는 처음부터 그녀에게 어찌할 생각이 없었다. 잠시 후, 정주현이 자리를 뜬 것을 확인한 그는 바로 강하리를 안아 차에 태웠다. 차에 올라탄 그녀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구승훈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는 시동을 걸었다.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그녀를 문으로 있는 힘껏 밀어붙였다. 미친 듯이 몰아치는 그의 키스에 그녀는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고 거침없이 그의 키스에 호응했다. 이 남자 앞에서 반항은 아무 소용이 없었고 그녀를 더 힘들게 할 뿐이었다.강하리는 팔을 뻗어 그의 목을 감싸고는 까치발을 들고 그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흠칫하던 구승훈은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옷이 흐트러지고 분위기는 순식간에 후끈 달아올랐다. 그는 단번에 그녀의 옷을 찢어버렸다. 쌀쌀한 기운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에게 달라붙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구승훈은 피식 웃었다.“왜? 벌써 안달이 난 거야?”“추워요.”그는 그녀를 번쩍 안아 올리고는 그녀의 쇄골에 얼굴을 묻고 그녀를 거침없이 탐했다. “강 부장, 걱정하지 마. 곧 뜨겁게 만들어 줄 테니까.”이내 그가 그녀를 침대에 거칠게 내던졌다. 그녀가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또다시 그녀의 입술을 덮어버렸다.뜨거운 키스는 점점 아래로 향
“샤워요.”그녀가 한마디 툭 내뱉고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욕실로 들어갔다.욕실로 들어온 후,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물을 왈칵 쏟았다.그동안 사실 그 아이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많이 애를 썼다. 그러나 기억은 끌어안고 있을수록 그녀를 더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내려놓으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오늘 밤, 그 남자가 또다시 그녀의 상처를 끄집어냈다.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에 그녀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뜨거운 물이 샤워부스에서 흘러내렸고 그녀는 뜨거운 물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자신의 몸을 감쌌다. 이렇게 해야만 마음의 고통이 조금 풀리는 것만 같았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지만 그녀는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가슴이 찢어지지만 그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울었다. 구승훈에 대한 그녀의 사랑도 그렇다.처음에는 뜨겁고 강렬하고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가 하루하루 반복되는 시간이 흐르면서 그 사랑도 소리 없이 다 사라져 버린 것 같다.잠시 후, 그제야 마음이 가라앉은 그녀는 타올을 잡아당겨 몸에 둘렀다.욕실을 나가니 그가 담배를 손에 쥔 채 창가에 서 있었다.그녀를 발견한 그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욕실로 들어가 드라이기를 가지고 나왔다.“이리 와.”그녀는 그 자리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고 그 모습에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이리 오라고. 내 말 안 들려?”강하리는 앞으로 다가가 드라이기를 잡았다.“내가 할게요.”그러나 그는 손을 놓지 않았고 그녀를 자기 앞에 있는 의자에 앉혔다. 따뜻한 바람이 귓가를 스치고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그의 손이 지나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잠시 후, 머리를 다 말리고 나서야 그가 입을 열었다. “강하리, 이제 다시 그런 말 하지 마. 나 그런 말 듣기 싫어.”“내가 틀린 말 했어요? 사실이잖아요. 승훈 씨는 내가 승훈 씨한테 다른 걸 원하기를 바라는 거예요?”차갑게 말하는 그녀를 그는 힐끗 쳐다보았다.“그럼 내가 한 말 사실이라는 거야?”
깊은 밤부터 시작해 날이 밝을 때까지, 그는 오랫동안 그녀를 괴롭힌 후에야 그녀를 놓아주었다. “자.”강하리는 눈을 감고 바로 잠이 들었다. 얼마 후, 시간을 확인해 보니 오전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그가 핸드폰을 집어 들고 침실로 나와 심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오늘은 못 갈 것 같아. 다음에 보자.”그 말에 강하리를 만나보고 싶었던 심준호는 다소 실망한 모습이었다. “그럼... 강하리 씨는?”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피식 웃었다. “우리 강 부장한테 지나치게 관심이 많은 거 아니야?”그 말을 듣고 심준호는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렸다.“너 진짜 강하리 씨 좋아하는 거지?”구승훈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와 강하리는 좋아한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은 관계였다.다만 강하리 이 여자에 대해 변태스러울 정도로 지나친 소유욕이 있는 건 인정한다. 그러나 이런 소유욕은 남자라면 다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할 얘기 더 있어? 없으면 전화 끊어.”“아니, 잠깐.”심준호가 급히 입을 열었다.“오해하지 마, 난 너네 강 부장한테 전혀 다른 뜻 없으니까. 어제 예진이가 갑자기 강 부장이 우리 누나랑 많이 닮았다고 하더라. 그래서 물어본 거야.”구승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확실해?”“응. 난 잘 모르겠는데, 예진이는 포토그래퍼라서 이런 쪽에 많이 민감한 편이야. 어제 강하리 씨 사진과 우리 누나 사진이랑 비교해 보니까 확실히 비슷한 구석이 많았어.”구승훈은 아무 말도 없이 침대에서 조용히 자는 강하리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가 입을 열었다.“이 세상에 닮은 사람은 많아.”“나도 그거 아는데. 하지만 닮은 사람을 봤으니까 한 번쯤은 물어봐야 하잖아. 놓치기라도 하면 어떡해?”심준호가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어갔다.“강하리 씨 어머니의 성함이 뭔지 알아?”그 말에 구승훈은 미간을 찌푸렸다. 거기에 대해서는 그도 정말 모르고 있었다.그저 강하리의 어머니가 큰 교통사고로 당해 병원에 입원해 있
“배고파?”배가 고팠던 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 그 식사 자리가 너무 불편해 별로 먹지 못하였고 오늘도 여태껏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일어나, 나가서 밥 먹자.”“움직이기 싫어요. 그냥 주문해서 먹어요.”그녀의 말에 구승훈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렇게 자고도 아직 회복이 안 돼?”“오랫동안 일했으니까요.”그가 웃으며 그녀에게 옷을 입혀주었다.“일어나서 운동 좀 해.” 옷을 입혀주며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강 부장도 보경대학 나왔다고 했지? 나 구경 좀 시켜줘.”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갑자기 보경대학은 왜요?”“강 부장에 대해 알아가고 싶어서.”그녀는 거절할 수가 없었고 거절한다고 해도 이 남자한테는 소용없을 것이다. 어쩔 수 없었던 그녀는 시큰거리는 허리를 펴고 옷을 주섬주섬 챙겨입었다.두 사람은 밥을 먹고 난 뒤, 보경대학으로 향했고 날은 이미 어두워진 상태였다.보경대학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짙은 어둠이 깔려있었다. 캠퍼스에는 각양각색의 커플들이 있었다.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 함께 산책하는 사람들,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구승훈과 함께 캠퍼스를 걸어 다니면서 문득 그녀는 옛 기억이 떠올랐다. 언젠가는 그녀도 캠퍼스 어딘가에서 이 남자를 우연히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었다. 심지어 그녀는 말이 안 되는 우연한 만남을 위해 가장 먼 길을 돌아 매일 수업을 들으러 가기도 했었다.그러나 아쉽게도 그런 상황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승훈 씨는 어디서 대학 다녔어요?”그녀는 갑자기 물었다.“강주에서.”그 말에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었고 순식간에 몸이 굳어버렸다. 구승훈은 외국에서 대학을 다녔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녀였기 때문에 그가 강주에서 대학에 다녔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 당시 두 사람이 함께 살았던 그 작은 어촌 마을이 바로 강주에 있었다.“왜... 왜 강주예요?”그는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얘기를 하듯 담담해 보였다.“그냥, 가고 싶어서.”아주 짤막한 대답이
여초연이 얼마나 치밀하게 움직이는 사람인지 구승훈이 제일 잘 안다.정말 여초연이 연정이를 데려갔다면 그렇게 쉽게 꼬리를 드러내지 않았을 테고 초조했던 그는 계속해서 그녀가 먼저 빈틈을 보이길 기다릴 수가 없었다.그래서 소란을 일으킨 뒤 그녀의 움직임을 주시할 생각이었다.그녀의 수단으로 봤을 때 누군가 자기를 지켜보는 걸 모를 리 없었다.그런데도 오늘 대놓고 이곳으로 왔다는 건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그를 유인한 걸까?그렇다면 연정이에게 일어난 일이 그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더 분명해지지 않나?어쨌든 구승훈은 연정이를 먼저 생각해야 했다.연정이가 정말 그녀의 손에 있고 막다른 길에 이른 그녀가 무슨 짓을 할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조심할 수밖에 없다.그 시각 목란정원에서 여초연은 복도에서 누군가와 휴대폰을 들고 영상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상대는 여자아이를 안고 있었다. 이쪽의 깊은 밤과 달리 저쪽은 태양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강하리는 다음 날 주해찬과 함께 B시로 갔다.비행기에서 막 내린 두 사람은 입국 게이트에서 정주현이 신나게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았다.“강하리 씨, 드디어 왔네요!”강하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주해찬을 흘깃 쳐다보았다.주해찬은 무기력하게 어깨를 으쓱했다.“어쩔 수 없었어. 계속 물어보니까 시간을 알려줄 수밖에.”정주현은 곧바로 불만을 터뜨렸다. “강하리 씨, B시로 오면 알려준다면서 이러는 건 아니죠!”강하리는 힘없이 웃었다.“가요.”그러던 중 정주현은 강하리와 함께 일하고 싶다는 걸 다시 한번 언급했지만 강하리는 여전히 부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정주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강하리를 바라보았다. “하리 씨, 그래도 우리 같이 일한 적이 있는데 이러면 대양그룹에 불만이 있는 것 같잖아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정 회장님이 절 찾아오라고 시켰어요?”정주현은 부인하지 않았다.“영감탱이한테 불만 있는 건 아니죠? 지난번에 구정우 도와줘서 그래요?”강하리는 침묵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정주현은 그
구승훈의 주변에 우중충한 공기가 감돌았고 차가운 시선은 올곧게 주해찬에게 향했다.가까이 다가온 주해찬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구승훈은 조금도 피할 생각 없이 그대로 얻어맞은 뒤 이윽고 주해찬의 손목에 주먹을 내리쳤다.그 손이 조금 전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 구승훈은 그의 뼈를 부러뜨릴 기세로 달려들었다.주해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눈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구승훈, 하리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알아? 병원에서 그 며칠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아? 네가 뭔데 계속해서 걔한테 상처를 줘, 네가 뭐라고 걔한테 그런 식으로 강요해!”강하리가 병원에서 지냈던 걸 언급하자 구승훈의 표정이 굳어졌다.당연히 그는 그녀가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고 있었다.매일 의사가 진정제를 놓아야 겨우 잠을 잘 수 있었다.심한 우울증이었다.노민준이 그날 했던 말을 그는 여태 기억하고 있었다.“이러면 언제든 극단적인 선택을 할 위험이 있어. 이젠 살아갈 의욕을 완전히 잃었어.”구승훈의 몸이 경직되었지만 꿋꿋하게 받아쳤다.“주해찬 당신이 뭔데 나랑 하리 사이에 끼어들어?”주해찬은 입가에 무심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아무리 그냥 선배라도 걔가 너한테 괴롭힘당하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정말 그냥 선배가 되고 싶은 거야? 주해찬, 네 개수작을 모를 것 같아? 이 기회를 이용하려는 거잖아.”잠시 멈칫하던 주해찬은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내가 아무리 이용하는 거라고 해도 억지로 강요하는 너보다 나아. 구승훈, 사람 존중하는 방법부터 배우고 다시 하리 앞에 나타나. 그전까지 넌 자격 없으니까.”주해찬은 말을 마치고 곧장 차 쪽으로 몸을 돌렸다.비를 맞으며 서 있던 구승훈은 한참이 지나서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자격이 없다고...맞는 말이긴 한데 그럼 주해찬은 자격이 있다는 말인가?그는 입가를 가볍게 문지르며 위쪽을 올려다보았다.강하리는 주방에 약을 먹으러 가다가 비속에 서 있는 구승훈을 보게 될 줄은 몰랐
가서 팔찌를 가지고 백아영의 생일을 보낸 후 출국할 생각이었고 그 외 일은 지금 당장 처리할 기분이 아니었다.구승훈이 무슨 말을 하려는데 손연지의 집 밑에 우산을 쓴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주해찬이었다.비 오는 밤, 가로등에 반사된 남자의 모습은 약간 서늘한 기운을 풍겼다.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무척 적극적이네.”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렬한 불빛이 주해찬에게 비추자 뒤를 돌아본 그가 구승훈의 차에서 내려 걸어오는 강하리를 발견했다.구승훈은 보지 못한 듯 강하리를 향해 걸어가는 그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검은 우산이 머리 위로 드리워지며 주해찬의 낮은 톤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걱정돼서 보러 왔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다.“난 괜찮아요. 걱정시켜서 미안해요.”그때 주해찬이 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하리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구 대표님.”구승훈은 고개를 숙이고 담배에 불을 붙인 뒤 가벼운 웃음을 내뱉으며 주해찬을 향해 시선을 들어 올렸다.“주해찬 씨가 뭐라고 저한테 감사 인사를 하는 거죠?”주해찬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하리의 선배로서요.”그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려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시간도 늦었는데 일찍 집에 가서 쉬어.”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해찬이 우산을 들고 건물 쪽으로 따라나섰다.구승훈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얼굴에 서리가 낀 것 같은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헤드라이트가 두 사람의 실루엣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비를 맞으며 우산 아래서 두 사람의 어깨는 단단히 맞닿은 것 같았다.건물 입구에 다다랐을 때야 강하리가 나지막이 말했다.“선배, 나 혼자 올라가면 돼요.”주해찬의 시선이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입술이 어딘가 부딪힌 것처럼 살이 갈라져 있었다.갈 때는 괜찮았는데 돌아올 땐 입술이 찢어진 채로 왔다.구승훈에 대한 강하리의 쌀쌀맞은 태도는 다 지켜보고 있었다.“구승훈이 강요했어?”주해찬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강하리는 몸이 굳어지더
한편 여초연은 거실 소파에 앉아있고 도우미가 옆에서 옷을 걸쳐주었다.“사모님, 시간이 늦었는데 일찍 쉬세요.”여초연은 밖의 하늘을 바라보다가 옷을 두른 채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승훈이는 요즘 어떻게 지내요?”도우미는 얼굴을 찡그렸다.“잘 지내지 못해요. 강하리라는 여자가 우리 집안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보세요. 어르신까지 들여보냈는데 큰 도련님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여자한테 홀딱 넘어간 게 틀림없어요.”여초연은 밖에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면서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앞으로 그런 말 하지 마요. 승훈이가 좋아하는 사람이고 내 며느리니까.”도우미가 입술을 달싹였다.“그래도 구씨 집안이 그 여자 때문에 이 모양이 됐잖아요!”SH그룹이 합병되면서 구씨 집안은 뿌리 없는 나무처럼 흔들리고 있었다.도우미들의 일자리도 위협받는 상황에서 정작 여초연은 조금의 초조함도 보이지 않았다.“게다가 큰 도련님도 그 여자 때문에 사모님께 화를 냈잖아요.”여초연은 부드럽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우산을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따라오지 마요.”그녀가 속삭이자 도우미는 즉시 발걸음을 멈췄다.비 내리는 어느 날 밤, 검은색 승용차가 구씨 집안 저택에서 시내 반대편 목란정원을 향해 유유히 달렸다.목란정원은 여초연이 소유한 정원인데 그녀는 때때로 며칠씩 이곳에 오곤 했다.구승재는 그녀를 따라 목란정원 입구까지 갔다가 차를 멈췄다.그는 목란정원의 출입구를 바라보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그동안 형의 지시로 구씨 저택에 머물면서 집안사람들을 돌보고 있었지만 사실은 여초연을 감시하는 것이었다.여초연의 차가 목란정원에 들어가는 것을 본 구승재는 휴대폰을 꺼내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다.고요한 밤, 구승훈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강하리의 몸이 굳어졌고 구승훈의 입술은 그녀의 귀에 닿은 상태였다.“전화 좀 받고 올게.”구승훈이 떠난 후 강하리 휴대폰도 울렸다.주해찬의 전화였다.“하리야, 비행기표 샀으니까 내일 데리러 갈게.”“그래요.
구승훈은 상처받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웃었다.“하리야, 넌 늘 그렇듯 매정하네.”강하리가 뒤돌아 휴대폰으로 택시를 부르려는데 구승훈이 그녀의 휴대폰을 움켜잡았다.“딱 하룻밤만. 너 안 건드릴게, 응?”강하리의 몸이 굳어졌고 구승훈은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하리야, 내 소원 들어주는 거라고 생각해. 네가 이 집에서 아이와 함께 지내는 모습을 몇 번이나 상상했는지 몰라. 여기가 우리 집이야.”강하리의 코끝이 시큰거렸지만 그래도 결국 구승훈의 손을 뿌리쳤다.너무도 분명한 그녀의 거절에 구승훈은 답답한 가슴에 고통이 밀려왔고 쓴웃음을 짓던 그는 더 그녀에게 강요하지 않았다.“샤워하고 나오면 다시 데려다줄게.”말을 마친 그는 돌아서서 화장실로 들어갔다.구승훈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데 강하리는 통화 중이었다.발걸음이 멈칫한 그는 통화 상대가 주해찬이란 것을 알아차렸다.“선배, 전 괜찮아요.”“알았어, 항공편 예약해. 나도 같이 갈게.”강하리가 전화를 끊는데 구승훈이 갑자기 다가와 그녀를 껴안고 고개를 숙여 입 맞추었다.“구승훈!” 강하리는 그의 키스에 깜짝 놀라 그를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구승훈은 점점 더 꽉 그녀를 붙잡았다.그는 강하리의 턱을 잡고 깊숙이 파고들며 조금의 부드러움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하게, 마치 화풀이나 비난하듯 키스를 퍼부었다.강하리는 벽에 단단히 밀려서 몸부림을 치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그녀가 다리를 들어 그의 아랫도리를 가격하려는데 구승훈이 먼저 그녀의 다리를 붙들었다.강하리가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구승훈의 키스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힘의 격차로 인해 그녀는 반격할 방법이 없었다.강하리는 화가 나서 얼굴마저 하얗게 질렸고 구승훈은 실컷 헤집어놓은 뒤에야 그녀를 놓아주었다.강하리가 그의 뺨을 때렸고 이내 구승훈의 얼굴엔 손자국이 생겨났다.그러나 그의 손가락은 키스로 인해 부어오른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하리야, 나 생각이 바뀌었어.”강하리가 멈칫했다.“무
그리고는 강하리를 곧장 차에 밀어 넣었다.차는 빗속을 뚫고 달려 나갔다.구승훈의 차는 굉장히 빨랐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시내를 벗어나 한 별장 앞에 멈춰 섰다.구승훈은 주차가 끝나자마자 차에서 내려 강하리를 빌라 안으로 끌어당겼다.빌라는 강하리가 선호하는 스타일로 안팎을 의도적으로 꾸몄다.안으로 들어선 강하리는 몸이 굳어버렸다.“여긴 내가 준비한 신혼집이야.”구승훈이 문득 등 뒤에서 이렇게 말했다.“결혼하면 여기서 지내려고 했어. 하리야, 정말 이대로 날 버릴 거야?”강하리는 꾸며진 방을 둘러보며 마음이 씁쓸했지만 애써 두 눈에 담기는 감정을 감추었다.“구승훈, 내가 그렇게 고통받는 걸 어떻게 지켜보기만 했어?”말문이 막힌 구승훈은 갑자기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미안해.” 남자의 목소리는 죄책감으로 가득했다.“다 내 잘못이야.”강하리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애쓰며 낮은 웃음을 지었다.너무 지쳤다.한때 열정적이었던 사랑이 이제는 고문처럼 느껴졌다.그날 구승훈이 아직도 자기를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강하리는 답을 알 수 없었다.어쩌면 오랫동안 사랑했던 남자일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미워하는 마음이 더 컸다.강하리는 구승훈이 진심으로 미웠다.그의 무자비함과 강압적인 성격이 싫었다.둘 사이에서 그는 항상 그녀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행동했고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입장이었다.그래, 어쩌면 그는 그녀를 위해, 아이를 위해 그랬을 수도 있다.하지만 자신이 해준 것들이 그녀가 진정 원하는 것인지 물어본 적은 없었다.강하리가 발버둥쳤지만 구승훈은 더 꽉 끌어안았다.“구승훈, 그만하자.”구승훈의 목소리가 잠겼다.“그만하자니, 무슨 말이야? 하리야, 우리 사이가 이대로 끝날 것 같아? 문씨 집안도, 구씨 집안도 망했고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다 사라졌는데 이제 와서 그만하자고?”“우리 아이가 죽었잖아!”뒤돌아선 강하리의 눈엔 온통 고통만이 가득한 채로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구
“어떻게 알았어?”구승훈은 웃으며 눈을 내리깔고 테이블 아래 두 사람이 잡고 있는 손을 바라보았다.“이상해?”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구승훈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하리야, 내가 포기하지 않겠다고 했잖아. 당연히 네 일에 대해선 다 알고 있지.”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손을 빼냈다.“그럴 필요 없어.”유난히 침착한 그 말이 구승훈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필요한지 아닌지는 네가 결정하는 게 아니야. 강하리, 내가 뭘 하든 그건 내 일이야.”강하리가 비웃었다.“하지만 난 이제 당신이랑 더 엮이고 싶지 않아.”구승훈의 목울대가 꿈틀거리며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몇 마디 말로 두 사람 사이는 또다시 교착 상태에 빠졌고 일어나서 밖으로 나온 강하리는 그제야 휴대폰을 꺼내 안예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그녀는 최소한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는 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구승훈이 옆에 앉아있자 마치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던 치유할 수 없는 상처, 두 사람의 목숨이 다시금 떠오르는 듯했다.그녀의 어머니와 아이...강하리가 가정에서 나오는데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멍하니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데 문득 연정이가 사고를 당한 날 밤도 비 오는 밤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그날 밤이 어땠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연정이가 이렇게 비 오는 밤에 춥고 무서워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강하리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비를 바라보다가 눈가에 차오르는 시큰함을 꾹 참고 빗속으로 걸어가는 순간 머리 위로 드리워진 우산이 그녀를 덮었다.고개를 들자 미소를 머금은 주해찬의 눈동자와 마주쳤다.“그렇게 비속우로 달려가면 감기 걸리잖아.”강하리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우산 챙기는 걸 깜빡해서.”“왜 전화 안 했어?”주해찬의 우산은 완전히 그녀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내가 마침 저녁을 먹으러 오지 않았으면 이대로 비를 맞으며 돌아가려고 했어?”주해찬의 눈에는 나무람과 관심이 가득했고 강하리는 웃으며 시선을 다른 곳
B시 대양그룹.정양철이 사무실로 들어가니 이미 비서가 대기하고 있었다.“강하리 검색어는 어떻게 된 거야?”비서는 잠시 머뭇거렸다.“사모님께서 대양그룹 명의로 매수한 것인데 아마도 회장님을 시험하려는 의도 같습니다.”정 회장이 강하리를 아낀다면 이 일을 거론할 것이고 신경 쓰지 않는다면 하든 말든 넘어가겠지.정양철의 얼굴에 알 수 없는 표정이 스쳤고 그가 말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주현이 통해 강하리에게 연락해서 대양그룹이 JM과 함께 일하고 싶다는 말을 전하라고 해.”말을 마친 그가 멈칫했다.“집사람이 물어보면 강하리에 대한 보상이라고 하고.”비서의 눈이 번뜩이더니 대답을 마치고 자리를 떠났다.강하리는 정주현의 전화를 받고 깜짝 놀랐다.지난번 구승훈과 함께 대양그룹 입찰을 뺏은 이후 정양철 측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하지만 이번에는 정양철이 무슨 꿍꿍이로 합작을 원하는 건지 모르겠다.지금은 정양철을 상대로 놀아줄 기분이 아니었다.“정주현 씨, 대양그룹에서 마음만 먹으면 파트너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겠죠?”정주현은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듣고는 다소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강하리 씨, 우리랑 같이 일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강하리가 함께 일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려던 찰나, 정주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B시에 언제 와요? 얼굴 보고 얘기할까요? 협업 안 해도 오랜만에 얼굴 한번 봐요. 우리 안 본 지 오래됐잖아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알았어요, 그럼 가면 연락할게요.”정주현이 전화를 끊자 사무실 앞에 서 있는 연미숙의 모습이 보였다.“엄마, 여기서 뭐 해?”연미숙이 웃었다.“우리가 강하리랑 같이 일해?”정주현은 고개를 끄덕였다.“아빠가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구씨 집안에 매달리는 게 아니라 밖으로 사업을 넓히려는 것 같아.”연미숙은 인상을 찌푸렸다. “꼭 강하리여야만 대외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거야?”정주현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강하리가 왜?”연미숙은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
구승훈은 차갑게 웃으며 자신도 모르게 핸들을 꽉 움켜쥐었다.그는 차에서 내리지 않고 두 사람이 차 안에서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모르겠지만 강하리의 얼굴에 번진 미소가 전혀 억지스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화사한 아침 햇살 같은 그 미소가 구승훈은 왠지 모르게 눈에 거슬렸다.강하리는 차에서 내려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된 구승훈의 차가 보였다.그녀는 발걸음을 잠시 멈추었지만 시선을 돌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강하리가 안으로 들어간 후 주해찬은 차에서 내려 구승훈의 차 쪽으로 걸어갔다.그가 창문을 살며시 두드리자 구승훈이 창문을 내렸다.“구 대표님 시간 있으세요? 얘기 좀 할까요?”구승훈은 가볍게 웃었다.“주해찬 씨는 남의 연애에 참견하는 걸 좋아하나 봐요?”구승훈의 가시 돋친 말에도 주해찬은 계속 웃기만 했다.“구승훈 씨, 당신과 하리가 잘 지낸다면 나도 굳이 끼어들고 싶진 않은데 당신은 하리를 행복하게 해준 적이 있긴 한가요?”그의 말에 구승훈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그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들이마신 후 말을 시작했다.“주해찬 씨, 행복하든 아니든 그건 다 나와 강하리 사이의 일이지 당신이랑은 아무 상관이 없잖아요.”주해찬은 조롱 섞인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웃었다. “구승훈 씨, 내가 하리 데려간다고 했죠. 이번엔 말한 대로 합니다.”말을 마친 그는 돌아서서 다시 차로 향했다.구승훈의 얼굴에서 미소가 조금씩 완전히 사라진 채 떠나는 차를 바라보았다.그는 한참 동안 손에 쥔 휴대폰을 내려다보면서 결국 강하리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싶은 마음을 참지 못했다.[그 자식이랑 떠날 거야?]강하리가 위층으로 올라가는데 전화벨이 울렸고 그녀는 한참 동안 들여다보다가 그냥 대화창을 닫아버렸다.구승훈은 전송된 메시지에 답장이 오지 않자 가벼운 웃음을 터뜨리며 입안의 쓴맛을 삼키고 휴대폰을 치우려던 찰나, 구승재의 전화가 걸려 왔다.“형, 큰어머니가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