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승훈은 그녀의 이마를 만졌다.“이제 열이 없네. 일어나서 뭐라도 먹어.”말을 마친 남자는 곧바로 침실을 나갔다.강하리는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복잡한 감정을 모두 뒤로하고 일어나서 샤워하러 갔다. 그녀가 나왔을 때 구승훈은 이미 식사를 차려놓았다.팥죽이었다.구승훈은 눈을 치켜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맛 좀 봐. 처음 만들어 봐서 맛있는지 모르겠어.”강하리는 놀라서 멈칫했다. 그녀는 구승훈이 밥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두 사람은 3년 동안 함께 지냈지만, 구승훈이 요리하는 모습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강하리는 이 남자가 주방에 서있는 모습이 어떨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그녀가 계속 움직이지 않자 구승훈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마음에 안 들어?”강하리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 그녀는 팥죽을 꽤 좋아했다. 어릴 때 그녀가 아플 때면 정서원이 자주 팥죽을 끓여주곤 했다.그런데 오늘 아침 일어나 보니 뜻밖에도 구승훈이 팥죽을 끓여 주었다.그녀는 일순간 마음에 전해져 오는 그 느낌을 형언할 수 없었다.“그런데 표정이 왜 이래?”“그냥 당신이 밥할 줄은 몰랐거든요.”강하리가 구승훈을 바라보자 구승훈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응, 유라가 어렸을 때 아플 때마다 팥죽을 즐겨 먹었거든.”강하리는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 들며 방금 따뜻해지려고 하던 가슴에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것 같았다. 속눈썹이 몇 번 떨리더니 쓴 미소가 뒤따랐다.“그랬군요.”마음이 싹 식어버린 그녀는 잠시 멈칫하다가 이어서 말했다.“대표님은 송유라 씨를 정말 좋아하나 봐요.”그렇지 않다면 구승훈의 성격상 어떻게 특별히 한 사람을 위해 요리를 배울 수 있었을까?구승훈은 침묵하고 이 말에 답하지 않았다. 그는 송유라와의 일에 대해 다른 사람과 말하기를 꺼려 했다.그는 강하리 앞에 죽을 들이밀었다.“먹어 봐.”자기도 모르게 숟가락을 꽉 움켜쥔 강하리는 한참이 지나서야 말했다.“네, 고맙습니다. 대표님.”강하리의 태도가 다시 차분
송유라는 더욱 서러움이 밀려왔다.“오빠, 진짜 그 여자 좋아하게 된 거예요?”구승훈의 굵은 눈썹이 살짝 좁혀졌다. “넌 쓸데없는 생각이 너무 많아.”...강하리는 이틀 동안 집에서 휴식을 취한 후 회사로 돌아왔다. 엘리베이터에서 막 내리려던 찰나 안예서가 달려왔다.“보스, 이제 괜찮아요?”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걱정시켜서 미안해.”안예서는 그녀의 팔짱을 끼고 놓지 않았다.“전 보스가 혹시라도 나쁜 마음을 먹을까 봐 너무 무서웠다고요. 사이버 폭력에 시달려 우울증으로 자살한 사람 엄청 많잖아요.”강하리는 그녀의 말에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난 아직 그 정도로 나약하지 않아.”안예서는 주위를 휙 둘러보고는 강하리의 귀에 대고 속닥거렸다.“보스는 모르겠지만 전 사실 그때 계속 생각했어요. 보스랑 대표님이 진짜 뭔가가 있었으면 하고요. 그래서 송유라가 화가나 미쳐버리게!”강하리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쓸데없는 생각 좀 하지 마. 대표님은 나를 눈에 차지 않아 하셔.”안예서는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그날 송유라가 회사에 찾아와 대표님이랑 한바탕 난리를 치고 울며 떠났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이건 대표님이 그래도 보는 눈이 있다는 걸 설명하지 않겠어요. 아니면 보스가 대표님을 유혹해 보는 건 어때요?”그 말에 강하리가 멈칫했다.“송유라가 왔었어?”안예서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울면서 왔다가 울면서 갔어요. 전여친 주제에 자기가 뭐 약혼녀라도 되는 줄 아나 봐요. 진짜 쌤통이야.”강하리는 입술을 앙다물고는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대양그룹과의 협력 건은 어떻게 됐어? 이제 서명할 수 있겠지?”안예서는 속도 없이 곧바로 강하리의 질문에 끌려갔다. “네, 이미 계약을 확정하는 단계에 있지만 서명은 보경시에 가서 해야 할 것 같아요.”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구승훈은 계약서에 서명할 때면 보통 전담 비서를 데리고 갔다.그녀가 계약서를 확인하고 구
원래 안현우의 회사에는 그저 비즈니스 분쟁이 몇 개 생겼을 뿐이었다.안현우가 요즘 확실히 바쁘긴 했어도 그로 하여금 분별력을 잃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하지만 구승훈이 저번에 안현우더러 이사회를 조심하라 이른 후 안현우는 이사회를 한바탕 뒤엎었다.그 기간 자연스레 많은 이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그렇게 해왔는데 불과 며칠 전, 안현우는 그의 이사회에 사실 아무 문제 없음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그 비즈니스 분쟁들 전부 구승훈 그 자식이 꾸민 짓이었다.구승훈이 던진 한 마디에 그 많은 고생을 한 것이다. 구승훈이 이렇게 나온다는 건 안현우로서는 한가지 이유로밖에는 해석되지 않았다. 강하리 때문이겠지.안현우는 이 일을 도저히 참고 넘어갈 수 없었다.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 오게 되었다.구승훈한텐 감히 어쩌진 못해도 강하리한테 못 올까.강하리는 멍했다. 구승훈이 안현우를 건드릴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 말이다.강하리의 입가의 핏기가 하얗게 가시고 있었다. 머릿속은 온통 뒤죽박죽되었다.하지만 찰나에 불과했다. 강하리는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구승훈이 안현우를 건드린 것은 그녀 때문이 아닐 것이다. 강하리는 자신의 주제를 잘 알고 있었다.“이번 일이 저랑 무슨 관련이 있는데요?”안현우는 조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정말 강 부장이랑 상관없는 일입니까?”“난 승훈이와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란 사이예요. 만약 그대 때문이 아니라면 왜 승훈이가 내 회사를 건드립니까!”강하리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구 대표님이 송유라 씨랑 안 대표님이 가깝게 지내는 게 거슬리셨나 보죠. 안 대표님이 송유라 씨 좋아했던 건 맞잖아요. 아닌가요? 그리고 모두가 잘 알고 있죠. 송유라 씨가 구 대표님이 제일 아끼는 사람이란 걸. 안 대표님도 잘 알고 계시잖아요, 제가 구 대표님한테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정말 저 때문에 당신을 건드렸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안현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시간이 좀 지나서야 그의 입술이 떨어졌다.“저랑 유라 씨가 친한 거 승훈이는 늘 알고
안현우는 순간적으로 강하리의 귓가에 바짝 붙어왔다. 그리고 음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만약 내가 그댈 강제로 취한다면 구승훈이 강 부장을 죽일까요, 날 죽일까요?”강하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구 대표님이 안 대표님을 죽일지는 모르겠지만 가만두진 않을 거예요. 구 대표님이 어떤 분이신지 안 대표님이 더 잘 알고 계실 텐데요. 구 대표님이 다른 남자가 자기 여자를 건드는 꼴을 허락할 것 같아요?”안현우는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강 부장 그대가 승훈이 여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대는 그저 노리개에 불과하죠.”강하리의 입가가 굳어졌다. “그렇다 해도 구 대표님이 안 대표님을 건드린 건 사실이니까요. 아닌가요?”안현우는 눈을 번쩍 떴다.강하리는 그런 안현우를 밀며 문을 열었다. “먼 데까지 안 나갑니다. 그럼 조심히 가세요. 안 대표님.”안현우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그로서는 확실히 더 이상 강하리를 건드릴 수 없었다.구승훈이 안현우에게 가르친 수업의 대가가 이리도 컸다.불과 두 개월 사이에 빚어진 피해는 안현우의 회사로서는 2년이라는 시간에 걸쳐서 복구해야 할 것이다.안현우는 이대로 물러나기 분했고 나가면서도 강하리를 자극했다.“강 부장, 이렇게 나오는 거 재밌습니까? 정말 그대가 유라 씨를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까? 구승훈이 송유라 씨를 얼마나 끔찍이 여기는지 그대는 모를 겁니다.”강하리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송유라와 경쟁할 마음이 애초에 없었으니 말이다.강하리는 자신의 주제를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구승훈이 얼마나 송유라를 아끼는지도 똑똑히 알고 있었다.그렇지만 강하리는 더 이상 안현우와 말씨름할 인내심이 없었다.“안 대표님, 보안팀을 불러야 물러나실 거예요?”안현우는 고개를 돌려 눈앞의 여자를 바라보았다.매혹적인 몸매에 검은 생머리가 어깨에 드리워진, 허리도 예전에 비해 얇아진 강하리였다. 안현우가 강하리에게 예전보다 예뻐졌다고 얘기한 건 정말 빈말이 아니었다
구승훈의 말에 강하리의 눈초리가 파르르 떨렸다.강하리는 손등을 꼬집으며 있어서는 안될 이 두근거림을 무시하려 애썼다.침묵이 흐른 뒤 강하리는 물었다. “왜죠? 대표님은 늘 신경 쓰지 않으셨잖아요."구승훈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구승훈은 무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소름이 돋으리만치 차갑고 공허하며 심지어 조금의 음울함도 깃든 듯한 기색으로.“난 당연히 관심 없어. 그렇지만 난 누가 내 물건을 탐내는 건 싫거든. 더군다나 손대려고 했다면 더더욱.”강하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거였구나, 그럼 그렇지. 원래 그랬어야 하는 거지.구승훈은 확실히 손을 쓸 것이다, 자기 것이 넘보였단 이유로.강하리 때문이 아닌.다시 말하자면 탐낸 것이 그가 기르던 고양이든, 강아지든 구승훈은 똑같은 행동을 했을 거란 소리였다.강하리는 침착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러곤 얼굴에 가까스로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네, 알겠습니다.”구승훈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강 부장은 내가 뭐 때문에 손썼다고 생각했는데?”강하리는 숨을 깊게 들이 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아 저는 대표님이 또 제가 불쌍해서 도와주는 건 줄 알았습니다.”구승훈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웃었다. “강 부장이 그렇게 생각해도 틀리진 않고.”강하리는 가슴 한켠이 시큰해 오는 걸 뒤로 하고 웃으며 말했다. “더 볼일 없으시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구승훈이 그녀를 불러세웠다. “이렇게 간다고?”강하리는 입가에 힘을 주었다.구승훈이 손을 내밀어 덥석 강하리의 팔목을 잡았다. 팔목을 가볍게 쓰다듬으면서 구승훈은 말했다.“말 좀 예쁘게 해. 아니면 환심 살만한 행동을 하든가. 강 부장은 그런 거 몰라?”강하리는 못 하는 게 아니었다. 그녀도 남자들이 뭘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단지 지금 하기 싫을 뿐이었다.강하리는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구승훈을 보며 말했다. “그럼 대표님은 뭘 듣고 싶은 건가요? 제가 다 들려드릴 수 있는데. 좋아해요, 사랑해요. 이
마케팅팀에도 회식은 원래 뺄 수 없는 일환이었다. 하지만 올해 강하리는 도저히 그럴 기분이 나지 않아 지금까지 별다른 동작을 보이지 않았다.강하리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 입을 열었다. “예서 씨가 진행해 줘. 준비가 다 되면 나한테 얘기하고.”안예서는 강하리를 놓아주지 않았다.“보스, 다들 회식할 때 애인을 데려오고 싶어 하는데 그래도 되나요?”강하리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누구든 데려와도 돼.”안예서는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그럼, 보스는요? 아니면 그날 저희가 남자들 좀 불러볼게요. 소개팅해 보실래요?”강하리는 잽싸게 거절했다. 더 이상 피곤해질 일이 생기지 말았으면 했다.“괜찮아. 아직 연애할 마음이 없거든.”말이 끝나고 강하리는 안예서를 가볍게 토닥이고는 얘기했다. “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 너희들도 얼른 자리에 돌아와서 일들 해.”“알겠어요.”강하리는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핸드폰에서 손연지의 연락이 울리고 있었다.“하리야, 요양병원 자료를 방금 너한테 보냈어.”강하리는 짧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하리야, 너 진짜 떠나려고? 일단 어머니한테 위험한 결정인 걸 떠나서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너 지금 얼마나 모았는데? 만약 거기에 도착한 뒤에 돈이 부족하면 그때는 어쩔 건지 생각해 봤어? 거기에 도착한 이후에 다시...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거잖아.”손연지는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하지만 강하리도 친구가 하는 말의 뜻을 알고 있었다.거기로 떠난 뒤에 남자한테 빌붙어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강하리는 점점 속이 답답해짐을 느꼈다.그랬다. 강하리는 떠나고 싶었다.하지만 엄마의 치료비가 제일 큰 걸림돌이었다.손연지의 말은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이 아니었다.매달 몇천만 원씩 빠지는 치료비는 강하리 같은 평범한 직장인이 부담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지금 여기서는 적어도 엄마의 치료비 정도는 해결할 수 있었다.만약 거기서 정말 치료
강하리는 손연지의 전화를 끊고 요양병원의 자료를 살펴보았다.확실히 손연지의 말대로 환경이나 시설이 좋았다.유일하게 머리 아프게 하는 구석이 치료비였다.강하리는 약하게 숨을 한번 내쉬었다.자료를 금방 정리했는데 마침 구승훈에게서 전화가 걸려 오고 있었다.“계약서는 문제없어. 강 부장은 나랑 출장 좀 같이 가지. 조금 이따 비행기 타고 보경시에 갈 거니까 아래서 기다릴게.”강하리는 어안이 벙벙했다. “대표님, 매번 전담 비서와 함께 가셨잖아요?”구승훈은 가볍게 웃었다. “난 강 부장이랑 가고 싶은데. 안돼?”강하리는 구승훈에게 말문이 막혀 뭘 얘기할지 몰랐다.구승훈은 엄연히 대표였고 자연스럽게 누구와 출장을 가도 다 되는 거였다.강하리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입을 열었다. “저 오늘 업무가 많아서요, 대표님...”“이번 건은 강 부장 거야. 상황도 강 부장이 더 잘 알 테고. 강 부장, 원래 강 부장 소관이야.”강하리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전 아직 짐도 싸지 않았는데요.”수화기 건너편 남자의 인내가 눈에 띄게 바닥났다.“보경시에 도착하면 그때 사는 거로 해. 아래서 기다릴 테니까 빨리 와.”구승훈은 이 말을 끝으로 전화를 껐다.강하리는 꺼진 핸드폰을 바라보며 답답한 기운을 느꼈다.하지만 업무상의 일이었기 때문에 강하리는 결국 짐을 싸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가기 전에 안예서와 얘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구 대표님이랑 출장 좀 다녀올 거야. 팀 회식은 이미 준비해 뒀으니까, 너희가 돌아오면 그때 회식비 청구해.”안예서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보스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게요.”강하리가 빙긋 웃었다. “그래도 되고.”회사 아래 세워져 있던 컬리넌의 차창이 반쯤 내려졌다.남자는 손에 담배 한 개비를 끼우고 느슨하게 좌석에 기대있었다. 눈동자에는 자유분방함과 제멋대로 하는 성격이 그득하게 담겨있었다.강하리가 다가오자 남자는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시선은 강하리 얼굴에 고정한 채.원래 좋지 않았던 안색은 지
하지만 그것도 단지 일시적인 감정일 뿐, 그는 이내 그 생각을 접었다. 구승훈은 그제야 자신이 결코 강하리의 반골 기질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소리 없는 반항이었지만 그 힘만큼은 절대로 약하지 않았다. 강하리가 매번 소원하게 굴 때마다 불쾌감이 마구 치솟았다. 그저 고분고분하게 자신에게 의지하도록 그녀의 날개를 확 부러트리고 싶었지만 결국에는 참았다.어차피 그럴 필요도 없었다. 어디까지나 애인일 뿐이었고 그녀가 계속 그의 곁에 머물러 있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불쾌한 마음은 무조건 풀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였다. 강하리의 턱을 잡아 치켜올린 구승훈은 안하무인이었다.“이건 다 강 부장이 당연히 해야 하는 일 아닌가? 만약 이만한 일도 제대로 못 한다면 강 부장은 그 돈도 가질 자격이 없는 거야.”구승훈의 쌀쌀맞은 눈빛에는 한치의 욕망도 담겨있지 않았고 오히려 분노가 스며 있었다.사실 강하리는 그가 왜 화가 났는지 알고 있었다. 이 남자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멀어지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마치 아무런 근거 없는 그의 소유욕처럼 말이다.하지만... 강하리도 더 이상 휘둘리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녀는 쓴 속을 주워 삼키며 간신히 웃음을 쥐어 짜냈다.“좋아요. 제가 대표님을 어떻게 만족시켜 드리면 될까요?”“손으로 하면 돼.”구승훈이 여유 있고 편한 자세로 문에 기대서서 말하자 고개를 끄덕인 강하리는 그의 팬츠 버클을 풀고 안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부드러운 손길이 닿는 순간 구승훈의 입술이 다시 강하리의 입술에 포개졌다.카드를 미처 넣을 새도 없이 어둑한 방에서 하는 키스는 뭔가 더 야릇한 느낌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하리는 체력이 바닥까지 소모되어 후반부에는 거의 구승훈이 그녀의 손을 잡고 움직였다....거사를 치른 후 구승훈은 강하리의 귓불을 깨물며 말했다.“날로 먹네, 강 부장.”“미안해요. 하지만 정말 힘이 남아나지 않는걸요.”아픔을 참으며 말하
여초연이 얼마나 치밀하게 움직이는 사람인지 구승훈이 제일 잘 안다.정말 여초연이 연정이를 데려갔다면 그렇게 쉽게 꼬리를 드러내지 않았을 테고 초조했던 그는 계속해서 그녀가 먼저 빈틈을 보이길 기다릴 수가 없었다.그래서 소란을 일으킨 뒤 그녀의 움직임을 주시할 생각이었다.그녀의 수단으로 봤을 때 누군가 자기를 지켜보는 걸 모를 리 없었다.그런데도 오늘 대놓고 이곳으로 왔다는 건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그를 유인한 걸까?그렇다면 연정이에게 일어난 일이 그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더 분명해지지 않나?어쨌든 구승훈은 연정이를 먼저 생각해야 했다.연정이가 정말 그녀의 손에 있고 막다른 길에 이른 그녀가 무슨 짓을 할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조심할 수밖에 없다.그 시각 목란정원에서 여초연은 복도에서 누군가와 휴대폰을 들고 영상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상대는 여자아이를 안고 있었다. 이쪽의 깊은 밤과 달리 저쪽은 태양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강하리는 다음 날 주해찬과 함께 B시로 갔다.비행기에서 막 내린 두 사람은 입국 게이트에서 정주현이 신나게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았다.“강하리 씨, 드디어 왔네요!”강하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주해찬을 흘깃 쳐다보았다.주해찬은 무기력하게 어깨를 으쓱했다.“어쩔 수 없었어. 계속 물어보니까 시간을 알려줄 수밖에.”정주현은 곧바로 불만을 터뜨렸다. “강하리 씨, B시로 오면 알려준다면서 이러는 건 아니죠!”강하리는 힘없이 웃었다.“가요.”그러던 중 정주현은 강하리와 함께 일하고 싶다는 걸 다시 한번 언급했지만 강하리는 여전히 부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정주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강하리를 바라보았다. “하리 씨, 그래도 우리 같이 일한 적이 있는데 이러면 대양그룹에 불만이 있는 것 같잖아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정 회장님이 절 찾아오라고 시켰어요?”정주현은 부인하지 않았다.“영감탱이한테 불만 있는 건 아니죠? 지난번에 구정우 도와줘서 그래요?”강하리는 침묵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정주현은 그
구승훈의 주변에 우중충한 공기가 감돌았고 차가운 시선은 올곧게 주해찬에게 향했다.가까이 다가온 주해찬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구승훈은 조금도 피할 생각 없이 그대로 얻어맞은 뒤 이윽고 주해찬의 손목에 주먹을 내리쳤다.그 손이 조금 전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 구승훈은 그의 뼈를 부러뜨릴 기세로 달려들었다.주해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눈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구승훈, 하리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알아? 병원에서 그 며칠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아? 네가 뭔데 계속해서 걔한테 상처를 줘, 네가 뭐라고 걔한테 그런 식으로 강요해!”강하리가 병원에서 지냈던 걸 언급하자 구승훈의 표정이 굳어졌다.당연히 그는 그녀가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고 있었다.매일 의사가 진정제를 놓아야 겨우 잠을 잘 수 있었다.심한 우울증이었다.노민준이 그날 했던 말을 그는 여태 기억하고 있었다.“이러면 언제든 극단적인 선택을 할 위험이 있어. 이젠 살아갈 의욕을 완전히 잃었어.”구승훈의 몸이 경직되었지만 꿋꿋하게 받아쳤다.“주해찬 당신이 뭔데 나랑 하리 사이에 끼어들어?”주해찬은 입가에 무심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아무리 그냥 선배라도 걔가 너한테 괴롭힘당하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정말 그냥 선배가 되고 싶은 거야? 주해찬, 네 개수작을 모를 것 같아? 이 기회를 이용하려는 거잖아.”잠시 멈칫하던 주해찬은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내가 아무리 이용하는 거라고 해도 억지로 강요하는 너보다 나아. 구승훈, 사람 존중하는 방법부터 배우고 다시 하리 앞에 나타나. 그전까지 넌 자격 없으니까.”주해찬은 말을 마치고 곧장 차 쪽으로 몸을 돌렸다.비를 맞으며 서 있던 구승훈은 한참이 지나서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자격이 없다고...맞는 말이긴 한데 그럼 주해찬은 자격이 있다는 말인가?그는 입가를 가볍게 문지르며 위쪽을 올려다보았다.강하리는 주방에 약을 먹으러 가다가 비속에 서 있는 구승훈을 보게 될 줄은 몰랐
가서 팔찌를 가지고 백아영의 생일을 보낸 후 출국할 생각이었고 그 외 일은 지금 당장 처리할 기분이 아니었다.구승훈이 무슨 말을 하려는데 손연지의 집 밑에 우산을 쓴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주해찬이었다.비 오는 밤, 가로등에 반사된 남자의 모습은 약간 서늘한 기운을 풍겼다.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무척 적극적이네.”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렬한 불빛이 주해찬에게 비추자 뒤를 돌아본 그가 구승훈의 차에서 내려 걸어오는 강하리를 발견했다.구승훈은 보지 못한 듯 강하리를 향해 걸어가는 그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검은 우산이 머리 위로 드리워지며 주해찬의 낮은 톤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걱정돼서 보러 왔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다.“난 괜찮아요. 걱정시켜서 미안해요.”그때 주해찬이 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하리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구 대표님.”구승훈은 고개를 숙이고 담배에 불을 붙인 뒤 가벼운 웃음을 내뱉으며 주해찬을 향해 시선을 들어 올렸다.“주해찬 씨가 뭐라고 저한테 감사 인사를 하는 거죠?”주해찬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하리의 선배로서요.”그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려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시간도 늦었는데 일찍 집에 가서 쉬어.”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해찬이 우산을 들고 건물 쪽으로 따라나섰다.구승훈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얼굴에 서리가 낀 것 같은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헤드라이트가 두 사람의 실루엣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비를 맞으며 우산 아래서 두 사람의 어깨는 단단히 맞닿은 것 같았다.건물 입구에 다다랐을 때야 강하리가 나지막이 말했다.“선배, 나 혼자 올라가면 돼요.”주해찬의 시선이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입술이 어딘가 부딪힌 것처럼 살이 갈라져 있었다.갈 때는 괜찮았는데 돌아올 땐 입술이 찢어진 채로 왔다.구승훈에 대한 강하리의 쌀쌀맞은 태도는 다 지켜보고 있었다.“구승훈이 강요했어?”주해찬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강하리는 몸이 굳어지더
한편 여초연은 거실 소파에 앉아있고 도우미가 옆에서 옷을 걸쳐주었다.“사모님, 시간이 늦었는데 일찍 쉬세요.”여초연은 밖의 하늘을 바라보다가 옷을 두른 채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승훈이는 요즘 어떻게 지내요?”도우미는 얼굴을 찡그렸다.“잘 지내지 못해요. 강하리라는 여자가 우리 집안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보세요. 어르신까지 들여보냈는데 큰 도련님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여자한테 홀딱 넘어간 게 틀림없어요.”여초연은 밖에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면서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앞으로 그런 말 하지 마요. 승훈이가 좋아하는 사람이고 내 며느리니까.”도우미가 입술을 달싹였다.“그래도 구씨 집안이 그 여자 때문에 이 모양이 됐잖아요!”SH그룹이 합병되면서 구씨 집안은 뿌리 없는 나무처럼 흔들리고 있었다.도우미들의 일자리도 위협받는 상황에서 정작 여초연은 조금의 초조함도 보이지 않았다.“게다가 큰 도련님도 그 여자 때문에 사모님께 화를 냈잖아요.”여초연은 부드럽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우산을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따라오지 마요.”그녀가 속삭이자 도우미는 즉시 발걸음을 멈췄다.비 내리는 어느 날 밤, 검은색 승용차가 구씨 집안 저택에서 시내 반대편 목란정원을 향해 유유히 달렸다.목란정원은 여초연이 소유한 정원인데 그녀는 때때로 며칠씩 이곳에 오곤 했다.구승재는 그녀를 따라 목란정원 입구까지 갔다가 차를 멈췄다.그는 목란정원의 출입구를 바라보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그동안 형의 지시로 구씨 저택에 머물면서 집안사람들을 돌보고 있었지만 사실은 여초연을 감시하는 것이었다.여초연의 차가 목란정원에 들어가는 것을 본 구승재는 휴대폰을 꺼내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다.고요한 밤, 구승훈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강하리의 몸이 굳어졌고 구승훈의 입술은 그녀의 귀에 닿은 상태였다.“전화 좀 받고 올게.”구승훈이 떠난 후 강하리 휴대폰도 울렸다.주해찬의 전화였다.“하리야, 비행기표 샀으니까 내일 데리러 갈게.”“그래요.
구승훈은 상처받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웃었다.“하리야, 넌 늘 그렇듯 매정하네.”강하리가 뒤돌아 휴대폰으로 택시를 부르려는데 구승훈이 그녀의 휴대폰을 움켜잡았다.“딱 하룻밤만. 너 안 건드릴게, 응?”강하리의 몸이 굳어졌고 구승훈은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하리야, 내 소원 들어주는 거라고 생각해. 네가 이 집에서 아이와 함께 지내는 모습을 몇 번이나 상상했는지 몰라. 여기가 우리 집이야.”강하리의 코끝이 시큰거렸지만 그래도 결국 구승훈의 손을 뿌리쳤다.너무도 분명한 그녀의 거절에 구승훈은 답답한 가슴에 고통이 밀려왔고 쓴웃음을 짓던 그는 더 그녀에게 강요하지 않았다.“샤워하고 나오면 다시 데려다줄게.”말을 마친 그는 돌아서서 화장실로 들어갔다.구승훈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데 강하리는 통화 중이었다.발걸음이 멈칫한 그는 통화 상대가 주해찬이란 것을 알아차렸다.“선배, 전 괜찮아요.”“알았어, 항공편 예약해. 나도 같이 갈게.”강하리가 전화를 끊는데 구승훈이 갑자기 다가와 그녀를 껴안고 고개를 숙여 입 맞추었다.“구승훈!” 강하리는 그의 키스에 깜짝 놀라 그를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구승훈은 점점 더 꽉 그녀를 붙잡았다.그는 강하리의 턱을 잡고 깊숙이 파고들며 조금의 부드러움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하게, 마치 화풀이나 비난하듯 키스를 퍼부었다.강하리는 벽에 단단히 밀려서 몸부림을 치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그녀가 다리를 들어 그의 아랫도리를 가격하려는데 구승훈이 먼저 그녀의 다리를 붙들었다.강하리가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구승훈의 키스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힘의 격차로 인해 그녀는 반격할 방법이 없었다.강하리는 화가 나서 얼굴마저 하얗게 질렸고 구승훈은 실컷 헤집어놓은 뒤에야 그녀를 놓아주었다.강하리가 그의 뺨을 때렸고 이내 구승훈의 얼굴엔 손자국이 생겨났다.그러나 그의 손가락은 키스로 인해 부어오른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하리야, 나 생각이 바뀌었어.”강하리가 멈칫했다.“무
그리고는 강하리를 곧장 차에 밀어 넣었다.차는 빗속을 뚫고 달려 나갔다.구승훈의 차는 굉장히 빨랐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시내를 벗어나 한 별장 앞에 멈춰 섰다.구승훈은 주차가 끝나자마자 차에서 내려 강하리를 빌라 안으로 끌어당겼다.빌라는 강하리가 선호하는 스타일로 안팎을 의도적으로 꾸몄다.안으로 들어선 강하리는 몸이 굳어버렸다.“여긴 내가 준비한 신혼집이야.”구승훈이 문득 등 뒤에서 이렇게 말했다.“결혼하면 여기서 지내려고 했어. 하리야, 정말 이대로 날 버릴 거야?”강하리는 꾸며진 방을 둘러보며 마음이 씁쓸했지만 애써 두 눈에 담기는 감정을 감추었다.“구승훈, 내가 그렇게 고통받는 걸 어떻게 지켜보기만 했어?”말문이 막힌 구승훈은 갑자기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미안해.” 남자의 목소리는 죄책감으로 가득했다.“다 내 잘못이야.”강하리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애쓰며 낮은 웃음을 지었다.너무 지쳤다.한때 열정적이었던 사랑이 이제는 고문처럼 느껴졌다.그날 구승훈이 아직도 자기를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강하리는 답을 알 수 없었다.어쩌면 오랫동안 사랑했던 남자일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미워하는 마음이 더 컸다.강하리는 구승훈이 진심으로 미웠다.그의 무자비함과 강압적인 성격이 싫었다.둘 사이에서 그는 항상 그녀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행동했고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입장이었다.그래, 어쩌면 그는 그녀를 위해, 아이를 위해 그랬을 수도 있다.하지만 자신이 해준 것들이 그녀가 진정 원하는 것인지 물어본 적은 없었다.강하리가 발버둥쳤지만 구승훈은 더 꽉 끌어안았다.“구승훈, 그만하자.”구승훈의 목소리가 잠겼다.“그만하자니, 무슨 말이야? 하리야, 우리 사이가 이대로 끝날 것 같아? 문씨 집안도, 구씨 집안도 망했고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다 사라졌는데 이제 와서 그만하자고?”“우리 아이가 죽었잖아!”뒤돌아선 강하리의 눈엔 온통 고통만이 가득한 채로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구
“어떻게 알았어?”구승훈은 웃으며 눈을 내리깔고 테이블 아래 두 사람이 잡고 있는 손을 바라보았다.“이상해?”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구승훈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하리야, 내가 포기하지 않겠다고 했잖아. 당연히 네 일에 대해선 다 알고 있지.”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손을 빼냈다.“그럴 필요 없어.”유난히 침착한 그 말이 구승훈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필요한지 아닌지는 네가 결정하는 게 아니야. 강하리, 내가 뭘 하든 그건 내 일이야.”강하리가 비웃었다.“하지만 난 이제 당신이랑 더 엮이고 싶지 않아.”구승훈의 목울대가 꿈틀거리며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몇 마디 말로 두 사람 사이는 또다시 교착 상태에 빠졌고 일어나서 밖으로 나온 강하리는 그제야 휴대폰을 꺼내 안예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그녀는 최소한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는 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구승훈이 옆에 앉아있자 마치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던 치유할 수 없는 상처, 두 사람의 목숨이 다시금 떠오르는 듯했다.그녀의 어머니와 아이...강하리가 가정에서 나오는데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멍하니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데 문득 연정이가 사고를 당한 날 밤도 비 오는 밤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그날 밤이 어땠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연정이가 이렇게 비 오는 밤에 춥고 무서워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강하리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비를 바라보다가 눈가에 차오르는 시큰함을 꾹 참고 빗속으로 걸어가는 순간 머리 위로 드리워진 우산이 그녀를 덮었다.고개를 들자 미소를 머금은 주해찬의 눈동자와 마주쳤다.“그렇게 비속우로 달려가면 감기 걸리잖아.”강하리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우산 챙기는 걸 깜빡해서.”“왜 전화 안 했어?”주해찬의 우산은 완전히 그녀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내가 마침 저녁을 먹으러 오지 않았으면 이대로 비를 맞으며 돌아가려고 했어?”주해찬의 눈에는 나무람과 관심이 가득했고 강하리는 웃으며 시선을 다른 곳
B시 대양그룹.정양철이 사무실로 들어가니 이미 비서가 대기하고 있었다.“강하리 검색어는 어떻게 된 거야?”비서는 잠시 머뭇거렸다.“사모님께서 대양그룹 명의로 매수한 것인데 아마도 회장님을 시험하려는 의도 같습니다.”정 회장이 강하리를 아낀다면 이 일을 거론할 것이고 신경 쓰지 않는다면 하든 말든 넘어가겠지.정양철의 얼굴에 알 수 없는 표정이 스쳤고 그가 말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주현이 통해 강하리에게 연락해서 대양그룹이 JM과 함께 일하고 싶다는 말을 전하라고 해.”말을 마친 그가 멈칫했다.“집사람이 물어보면 강하리에 대한 보상이라고 하고.”비서의 눈이 번뜩이더니 대답을 마치고 자리를 떠났다.강하리는 정주현의 전화를 받고 깜짝 놀랐다.지난번 구승훈과 함께 대양그룹 입찰을 뺏은 이후 정양철 측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하지만 이번에는 정양철이 무슨 꿍꿍이로 합작을 원하는 건지 모르겠다.지금은 정양철을 상대로 놀아줄 기분이 아니었다.“정주현 씨, 대양그룹에서 마음만 먹으면 파트너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겠죠?”정주현은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듣고는 다소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강하리 씨, 우리랑 같이 일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강하리가 함께 일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려던 찰나, 정주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B시에 언제 와요? 얼굴 보고 얘기할까요? 협업 안 해도 오랜만에 얼굴 한번 봐요. 우리 안 본 지 오래됐잖아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알았어요, 그럼 가면 연락할게요.”정주현이 전화를 끊자 사무실 앞에 서 있는 연미숙의 모습이 보였다.“엄마, 여기서 뭐 해?”연미숙이 웃었다.“우리가 강하리랑 같이 일해?”정주현은 고개를 끄덕였다.“아빠가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구씨 집안에 매달리는 게 아니라 밖으로 사업을 넓히려는 것 같아.”연미숙은 인상을 찌푸렸다. “꼭 강하리여야만 대외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거야?”정주현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강하리가 왜?”연미숙은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
구승훈은 차갑게 웃으며 자신도 모르게 핸들을 꽉 움켜쥐었다.그는 차에서 내리지 않고 두 사람이 차 안에서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모르겠지만 강하리의 얼굴에 번진 미소가 전혀 억지스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화사한 아침 햇살 같은 그 미소가 구승훈은 왠지 모르게 눈에 거슬렸다.강하리는 차에서 내려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된 구승훈의 차가 보였다.그녀는 발걸음을 잠시 멈추었지만 시선을 돌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강하리가 안으로 들어간 후 주해찬은 차에서 내려 구승훈의 차 쪽으로 걸어갔다.그가 창문을 살며시 두드리자 구승훈이 창문을 내렸다.“구 대표님 시간 있으세요? 얘기 좀 할까요?”구승훈은 가볍게 웃었다.“주해찬 씨는 남의 연애에 참견하는 걸 좋아하나 봐요?”구승훈의 가시 돋친 말에도 주해찬은 계속 웃기만 했다.“구승훈 씨, 당신과 하리가 잘 지낸다면 나도 굳이 끼어들고 싶진 않은데 당신은 하리를 행복하게 해준 적이 있긴 한가요?”그의 말에 구승훈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그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들이마신 후 말을 시작했다.“주해찬 씨, 행복하든 아니든 그건 다 나와 강하리 사이의 일이지 당신이랑은 아무 상관이 없잖아요.”주해찬은 조롱 섞인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웃었다. “구승훈 씨, 내가 하리 데려간다고 했죠. 이번엔 말한 대로 합니다.”말을 마친 그는 돌아서서 다시 차로 향했다.구승훈의 얼굴에서 미소가 조금씩 완전히 사라진 채 떠나는 차를 바라보았다.그는 한참 동안 손에 쥔 휴대폰을 내려다보면서 결국 강하리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싶은 마음을 참지 못했다.[그 자식이랑 떠날 거야?]강하리가 위층으로 올라가는데 전화벨이 울렸고 그녀는 한참 동안 들여다보다가 그냥 대화창을 닫아버렸다.구승훈은 전송된 메시지에 답장이 오지 않자 가벼운 웃음을 터뜨리며 입안의 쓴맛을 삼키고 휴대폰을 치우려던 찰나, 구승재의 전화가 걸려 왔다.“형, 큰어머니가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