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유라는 더욱 서러움이 밀려왔다.“오빠, 진짜 그 여자 좋아하게 된 거예요?”구승훈의 굵은 눈썹이 살짝 좁혀졌다. “넌 쓸데없는 생각이 너무 많아.”...강하리는 이틀 동안 집에서 휴식을 취한 후 회사로 돌아왔다. 엘리베이터에서 막 내리려던 찰나 안예서가 달려왔다.“보스, 이제 괜찮아요?”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걱정시켜서 미안해.”안예서는 그녀의 팔짱을 끼고 놓지 않았다.“전 보스가 혹시라도 나쁜 마음을 먹을까 봐 너무 무서웠다고요. 사이버 폭력에 시달려 우울증으로 자살한 사람 엄청 많잖아요.”강하리는 그녀의 말에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난 아직 그 정도로 나약하지 않아.”안예서는 주위를 휙 둘러보고는 강하리의 귀에 대고 속닥거렸다.“보스는 모르겠지만 전 사실 그때 계속 생각했어요. 보스랑 대표님이 진짜 뭔가가 있었으면 하고요. 그래서 송유라가 화가나 미쳐버리게!”강하리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쓸데없는 생각 좀 하지 마. 대표님은 나를 눈에 차지 않아 하셔.”안예서는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그날 송유라가 회사에 찾아와 대표님이랑 한바탕 난리를 치고 울며 떠났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이건 대표님이 그래도 보는 눈이 있다는 걸 설명하지 않겠어요. 아니면 보스가 대표님을 유혹해 보는 건 어때요?”그 말에 강하리가 멈칫했다.“송유라가 왔었어?”안예서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울면서 왔다가 울면서 갔어요. 전여친 주제에 자기가 뭐 약혼녀라도 되는 줄 아나 봐요. 진짜 쌤통이야.”강하리는 입술을 앙다물고는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대양그룹과의 협력 건은 어떻게 됐어? 이제 서명할 수 있겠지?”안예서는 속도 없이 곧바로 강하리의 질문에 끌려갔다. “네, 이미 계약을 확정하는 단계에 있지만 서명은 보경시에 가서 해야 할 것 같아요.”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구승훈은 계약서에 서명할 때면 보통 전담 비서를 데리고 갔다.그녀가 계약서를 확인하고 구
원래 안현우의 회사에는 그저 비즈니스 분쟁이 몇 개 생겼을 뿐이었다.안현우가 요즘 확실히 바쁘긴 했어도 그로 하여금 분별력을 잃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하지만 구승훈이 저번에 안현우더러 이사회를 조심하라 이른 후 안현우는 이사회를 한바탕 뒤엎었다.그 기간 자연스레 많은 이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그렇게 해왔는데 불과 며칠 전, 안현우는 그의 이사회에 사실 아무 문제 없음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그 비즈니스 분쟁들 전부 구승훈 그 자식이 꾸민 짓이었다.구승훈이 던진 한 마디에 그 많은 고생을 한 것이다. 구승훈이 이렇게 나온다는 건 안현우로서는 한가지 이유로밖에는 해석되지 않았다. 강하리 때문이겠지.안현우는 이 일을 도저히 참고 넘어갈 수 없었다.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 오게 되었다.구승훈한텐 감히 어쩌진 못해도 강하리한테 못 올까.강하리는 멍했다. 구승훈이 안현우를 건드릴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 말이다.강하리의 입가의 핏기가 하얗게 가시고 있었다. 머릿속은 온통 뒤죽박죽되었다.하지만 찰나에 불과했다. 강하리는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구승훈이 안현우를 건드린 것은 그녀 때문이 아닐 것이다. 강하리는 자신의 주제를 잘 알고 있었다.“이번 일이 저랑 무슨 관련이 있는데요?”안현우는 조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정말 강 부장이랑 상관없는 일입니까?”“난 승훈이와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란 사이예요. 만약 그대 때문이 아니라면 왜 승훈이가 내 회사를 건드립니까!”강하리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구 대표님이 송유라 씨랑 안 대표님이 가깝게 지내는 게 거슬리셨나 보죠. 안 대표님이 송유라 씨 좋아했던 건 맞잖아요. 아닌가요? 그리고 모두가 잘 알고 있죠. 송유라 씨가 구 대표님이 제일 아끼는 사람이란 걸. 안 대표님도 잘 알고 계시잖아요, 제가 구 대표님한테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정말 저 때문에 당신을 건드렸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안현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시간이 좀 지나서야 그의 입술이 떨어졌다.“저랑 유라 씨가 친한 거 승훈이는 늘 알고
안현우는 순간적으로 강하리의 귓가에 바짝 붙어왔다. 그리고 음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만약 내가 그댈 강제로 취한다면 구승훈이 강 부장을 죽일까요, 날 죽일까요?”강하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구 대표님이 안 대표님을 죽일지는 모르겠지만 가만두진 않을 거예요. 구 대표님이 어떤 분이신지 안 대표님이 더 잘 알고 계실 텐데요. 구 대표님이 다른 남자가 자기 여자를 건드는 꼴을 허락할 것 같아요?”안현우는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강 부장 그대가 승훈이 여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대는 그저 노리개에 불과하죠.”강하리의 입가가 굳어졌다. “그렇다 해도 구 대표님이 안 대표님을 건드린 건 사실이니까요. 아닌가요?”안현우는 눈을 번쩍 떴다.강하리는 그런 안현우를 밀며 문을 열었다. “먼 데까지 안 나갑니다. 그럼 조심히 가세요. 안 대표님.”안현우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그로서는 확실히 더 이상 강하리를 건드릴 수 없었다.구승훈이 안현우에게 가르친 수업의 대가가 이리도 컸다.불과 두 개월 사이에 빚어진 피해는 안현우의 회사로서는 2년이라는 시간에 걸쳐서 복구해야 할 것이다.안현우는 이대로 물러나기 분했고 나가면서도 강하리를 자극했다.“강 부장, 이렇게 나오는 거 재밌습니까? 정말 그대가 유라 씨를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까? 구승훈이 송유라 씨를 얼마나 끔찍이 여기는지 그대는 모를 겁니다.”강하리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송유라와 경쟁할 마음이 애초에 없었으니 말이다.강하리는 자신의 주제를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구승훈이 얼마나 송유라를 아끼는지도 똑똑히 알고 있었다.그렇지만 강하리는 더 이상 안현우와 말씨름할 인내심이 없었다.“안 대표님, 보안팀을 불러야 물러나실 거예요?”안현우는 고개를 돌려 눈앞의 여자를 바라보았다.매혹적인 몸매에 검은 생머리가 어깨에 드리워진, 허리도 예전에 비해 얇아진 강하리였다. 안현우가 강하리에게 예전보다 예뻐졌다고 얘기한 건 정말 빈말이 아니었다
구승훈의 말에 강하리의 눈초리가 파르르 떨렸다.강하리는 손등을 꼬집으며 있어서는 안될 이 두근거림을 무시하려 애썼다.침묵이 흐른 뒤 강하리는 물었다. “왜죠? 대표님은 늘 신경 쓰지 않으셨잖아요."구승훈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구승훈은 무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소름이 돋으리만치 차갑고 공허하며 심지어 조금의 음울함도 깃든 듯한 기색으로.“난 당연히 관심 없어. 그렇지만 난 누가 내 물건을 탐내는 건 싫거든. 더군다나 손대려고 했다면 더더욱.”강하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거였구나, 그럼 그렇지. 원래 그랬어야 하는 거지.구승훈은 확실히 손을 쓸 것이다, 자기 것이 넘보였단 이유로.강하리 때문이 아닌.다시 말하자면 탐낸 것이 그가 기르던 고양이든, 강아지든 구승훈은 똑같은 행동을 했을 거란 소리였다.강하리는 침착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러곤 얼굴에 가까스로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네, 알겠습니다.”구승훈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강 부장은 내가 뭐 때문에 손썼다고 생각했는데?”강하리는 숨을 깊게 들이 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아 저는 대표님이 또 제가 불쌍해서 도와주는 건 줄 알았습니다.”구승훈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웃었다. “강 부장이 그렇게 생각해도 틀리진 않고.”강하리는 가슴 한켠이 시큰해 오는 걸 뒤로 하고 웃으며 말했다. “더 볼일 없으시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구승훈이 그녀를 불러세웠다. “이렇게 간다고?”강하리는 입가에 힘을 주었다.구승훈이 손을 내밀어 덥석 강하리의 팔목을 잡았다. 팔목을 가볍게 쓰다듬으면서 구승훈은 말했다.“말 좀 예쁘게 해. 아니면 환심 살만한 행동을 하든가. 강 부장은 그런 거 몰라?”강하리는 못 하는 게 아니었다. 그녀도 남자들이 뭘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단지 지금 하기 싫을 뿐이었다.강하리는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구승훈을 보며 말했다. “그럼 대표님은 뭘 듣고 싶은 건가요? 제가 다 들려드릴 수 있는데. 좋아해요, 사랑해요. 이
마케팅팀에도 회식은 원래 뺄 수 없는 일환이었다. 하지만 올해 강하리는 도저히 그럴 기분이 나지 않아 지금까지 별다른 동작을 보이지 않았다.강하리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 입을 열었다. “예서 씨가 진행해 줘. 준비가 다 되면 나한테 얘기하고.”안예서는 강하리를 놓아주지 않았다.“보스, 다들 회식할 때 애인을 데려오고 싶어 하는데 그래도 되나요?”강하리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누구든 데려와도 돼.”안예서는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그럼, 보스는요? 아니면 그날 저희가 남자들 좀 불러볼게요. 소개팅해 보실래요?”강하리는 잽싸게 거절했다. 더 이상 피곤해질 일이 생기지 말았으면 했다.“괜찮아. 아직 연애할 마음이 없거든.”말이 끝나고 강하리는 안예서를 가볍게 토닥이고는 얘기했다. “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 너희들도 얼른 자리에 돌아와서 일들 해.”“알겠어요.”강하리는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핸드폰에서 손연지의 연락이 울리고 있었다.“하리야, 요양병원 자료를 방금 너한테 보냈어.”강하리는 짧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하리야, 너 진짜 떠나려고? 일단 어머니한테 위험한 결정인 걸 떠나서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너 지금 얼마나 모았는데? 만약 거기에 도착한 뒤에 돈이 부족하면 그때는 어쩔 건지 생각해 봤어? 거기에 도착한 이후에 다시...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거잖아.”손연지는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하지만 강하리도 친구가 하는 말의 뜻을 알고 있었다.거기로 떠난 뒤에 남자한테 빌붙어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강하리는 점점 속이 답답해짐을 느꼈다.그랬다. 강하리는 떠나고 싶었다.하지만 엄마의 치료비가 제일 큰 걸림돌이었다.손연지의 말은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이 아니었다.매달 몇천만 원씩 빠지는 치료비는 강하리 같은 평범한 직장인이 부담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지금 여기서는 적어도 엄마의 치료비 정도는 해결할 수 있었다.만약 거기서 정말 치료
강하리는 손연지의 전화를 끊고 요양병원의 자료를 살펴보았다.확실히 손연지의 말대로 환경이나 시설이 좋았다.유일하게 머리 아프게 하는 구석이 치료비였다.강하리는 약하게 숨을 한번 내쉬었다.자료를 금방 정리했는데 마침 구승훈에게서 전화가 걸려 오고 있었다.“계약서는 문제없어. 강 부장은 나랑 출장 좀 같이 가지. 조금 이따 비행기 타고 보경시에 갈 거니까 아래서 기다릴게.”강하리는 어안이 벙벙했다. “대표님, 매번 전담 비서와 함께 가셨잖아요?”구승훈은 가볍게 웃었다. “난 강 부장이랑 가고 싶은데. 안돼?”강하리는 구승훈에게 말문이 막혀 뭘 얘기할지 몰랐다.구승훈은 엄연히 대표였고 자연스럽게 누구와 출장을 가도 다 되는 거였다.강하리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입을 열었다. “저 오늘 업무가 많아서요, 대표님...”“이번 건은 강 부장 거야. 상황도 강 부장이 더 잘 알 테고. 강 부장, 원래 강 부장 소관이야.”강하리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전 아직 짐도 싸지 않았는데요.”수화기 건너편 남자의 인내가 눈에 띄게 바닥났다.“보경시에 도착하면 그때 사는 거로 해. 아래서 기다릴 테니까 빨리 와.”구승훈은 이 말을 끝으로 전화를 껐다.강하리는 꺼진 핸드폰을 바라보며 답답한 기운을 느꼈다.하지만 업무상의 일이었기 때문에 강하리는 결국 짐을 싸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가기 전에 안예서와 얘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구 대표님이랑 출장 좀 다녀올 거야. 팀 회식은 이미 준비해 뒀으니까, 너희가 돌아오면 그때 회식비 청구해.”안예서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보스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게요.”강하리가 빙긋 웃었다. “그래도 되고.”회사 아래 세워져 있던 컬리넌의 차창이 반쯤 내려졌다.남자는 손에 담배 한 개비를 끼우고 느슨하게 좌석에 기대있었다. 눈동자에는 자유분방함과 제멋대로 하는 성격이 그득하게 담겨있었다.강하리가 다가오자 남자는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시선은 강하리 얼굴에 고정한 채.원래 좋지 않았던 안색은 지
하지만 그것도 단지 일시적인 감정일 뿐, 그는 이내 그 생각을 접었다. 구승훈은 그제야 자신이 결코 강하리의 반골 기질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소리 없는 반항이었지만 그 힘만큼은 절대로 약하지 않았다. 강하리가 매번 소원하게 굴 때마다 불쾌감이 마구 치솟았다. 그저 고분고분하게 자신에게 의지하도록 그녀의 날개를 확 부러트리고 싶었지만 결국에는 참았다.어차피 그럴 필요도 없었다. 어디까지나 애인일 뿐이었고 그녀가 계속 그의 곁에 머물러 있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불쾌한 마음은 무조건 풀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였다. 강하리의 턱을 잡아 치켜올린 구승훈은 안하무인이었다.“이건 다 강 부장이 당연히 해야 하는 일 아닌가? 만약 이만한 일도 제대로 못 한다면 강 부장은 그 돈도 가질 자격이 없는 거야.”구승훈의 쌀쌀맞은 눈빛에는 한치의 욕망도 담겨있지 않았고 오히려 분노가 스며 있었다.사실 강하리는 그가 왜 화가 났는지 알고 있었다. 이 남자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멀어지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마치 아무런 근거 없는 그의 소유욕처럼 말이다.하지만... 강하리도 더 이상 휘둘리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녀는 쓴 속을 주워 삼키며 간신히 웃음을 쥐어 짜냈다.“좋아요. 제가 대표님을 어떻게 만족시켜 드리면 될까요?”“손으로 하면 돼.”구승훈이 여유 있고 편한 자세로 문에 기대서서 말하자 고개를 끄덕인 강하리는 그의 팬츠 버클을 풀고 안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부드러운 손길이 닿는 순간 구승훈의 입술이 다시 강하리의 입술에 포개졌다.카드를 미처 넣을 새도 없이 어둑한 방에서 하는 키스는 뭔가 더 야릇한 느낌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하리는 체력이 바닥까지 소모되어 후반부에는 거의 구승훈이 그녀의 손을 잡고 움직였다....거사를 치른 후 구승훈은 강하리의 귓불을 깨물며 말했다.“날로 먹네, 강 부장.”“미안해요. 하지만 정말 힘이 남아나지 않는걸요.”아픔을 참으며 말하
살짝 저릿한 느낌이 전해지는 입술 아래로 구승훈의 목젖이 두어 번 오르내리더니 그는 강하리의 목덜미를 거칠게 잡았다. 그리고 입에서 건조하고 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강 부장은 고작 가벼운 입맞춤 따위로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계속 해.”그녀의 목을 문지르며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에 강하리의 미간이 구겨졌다.“대표님, 저희 저녁 연회에 참석해야 하는데요.”구승훈은 눈썹을 치켜뜨고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그럼 일단 빚진 거로 하든가.”말을 마친 그는 숄을 꺼내와 강하리의 어깨에 걸쳐주었다.“가자.”저녁 연회는 한 채의 별장에서 진행 중이었고 아마도 사적인 연회 같았다. 구승훈이 강하리를 데리고 별장에 들어섰을 때 삼십 대 초반의 한 남자가 맞이하러 나왔다.“구승훈, 너 지각이야!”남자가 다가와 웃으며 말하자 그의 목소리에 모두의 이목이 그들에게로 쏠렸다. 구승훈이라는 이름 세글자는 어디를 가나 항상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강하리는 그의 팔짱을 낀 채 저에게로 쏟아지는 수많은 시선의 세례를 감내해야만 했다.약삭빠른 사람들은 벌써 와서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구승훈은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보려고 다가오는 이들을 두세 마디 말로 돌려보냈고 제일 처음 말을 걸어온 남자만 남게 되었다. 남자의 눈길이 강하리에게 닿으며 의미심장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승훈아, 누군지 소개 안 해줄 거야?”“회사 동료, 강하리 부장이야.”구승훈이 강하리를 흘긋 보며 말하자 그 남자는 싱긋 웃었다.“아, 동료였어. 난 또 여자 친구인 줄 알았잖아!”구승훈은 대꾸하지 않고 강하리를 보며 이어서 소개했다.“이쪽은 법무법인 정세, 대표 변호사 심준호야.”강하리는 TV에서 이 남자를 본 적이 있다. 법무법인 정세는 국내 최대 대형로펌이다. 전문적으로는 공정거래 분쟁과 재산 분할 및 재벌 이혼 소송 분야의 법률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정세의 대표는 도무지 속을 알 수가 없고 매우 무자비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석연란의 말에 사람들이 표정이 확 바뀌었다.아무도 이런 가십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심씨 가문의 손녀, 진태형의 딸이 스폰을 받았다고?심씨 가문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사람들은 믿지 못해도 저마다 좋지 않은 추측을 할 수밖에 없었다.다들 봤다시피 강하리의 외모는 아름다웠고 누군가 돈을 주고 취하고 싶어 하는 것도 당연했다.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무의식적으로 약간의 경멸이 그들의 눈에 보였다.돈 많은 사람일수록 원래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고 든다.예전 같았으면 이 사람들이 강하리처럼 배경도 없고 뒷배도 없는 여자에게 눈길조차 주지도 않았겠지만 갑자기 심씨 가문의 조카이자 진태형의 딸이 되니 당연히 수많은 사람의 질투를 불러왔다.이제 석연란의 말까지 더해지자 순식간에 사람들은 싸늘하게 조롱하기 시작했다.“심씨 가문의 손녀라고 해서 얼마나 고귀한가 했더니, 그런 물건이었어? 같은 하늘 아래 숨을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 역겹네.”“어떻게 스폰까지 받지? 그러면 돈만 주면 아무 남자와 잔다는 말이잖아?”“모르지. 그러니까 이런 곳에서도 구 대표 몰래 남자를 찾은 거 아니겠어?”히죽거리는 사람들의 말 속엔 조롱만이 가득했고 석연란은 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하는 말에 의기양양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심씨 가문이 지켜준다고 해서 정말 머리 꼭대기에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강하리를 철저히 망가뜨리겠다고 다짐했으니 반드시 해내리라.그때 누군가 석연란을 툭 쳤다.“또 어떤 정보가 있어요? 재밌는 일 있으면 공유 좀 하죠.”석연란이 콧방귀를 뀌며 말하려는 순간 뒤돌아보니 진태형의 무표정하고 차가운 얼굴이 보였다.순간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곧 다시 차갑게 웃었다. 어차피 다 사실만을 얘기했는데 무서울 게 뭐가 있나.“태형 씨, 방금 안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강하리랑 우리 해찬이가 무슨 짓을 했길래 구 대표가 그렇게 가요?”적나라한 의도가 담긴 말이었다. 강하리가 주해찬과 낯 뜨거운 짓을 해서 구승훈이 화가 났다는 뜻이다.사람들
강하리는 구승훈에게 안긴 채 올라가 샤워를 한 뒤 깊은 잠에 빠졌다.구승훈은 조용히 잠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그의 눈에는 복잡하게 억눌린 감정이 가득했다.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약을 챙겨 그녀의 몸에 난 잇자국에 조금씩 발라주었다.하는 내내 구승훈의 움직임은 부드러웠지만 이마에 툭 튀어나온 핏줄이 그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약을 다 바른 뒤 그는 침대 옆 탁자 서랍에서 벨벳 상자를 꺼냈다.상자 안에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들어 있었다.사실 지난번에 강하리를 데려왔을 때 준비했던 반지인데 한번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니 이젠 감히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구승훈은 반지를 꺼내 강하리의 왼손 약지에 끼워주고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손가락에 입맞춤하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미안해.”그러고는 일어나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서둘러 도착한 구승재가 노민준에게 받은 진정 효과가 있는 주사를 구승훈에게 건넸고 구승훈은 망설임 없이 주사를 자기 팔에 꽂았다.구승재는 순간 마음이 아팠다.“형...”구승훈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구승재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형, 우리 해외로 가자. 해외 연구소에 가자, 응?”입꼬리를 올리는 구승훈의 눈에 조금의 온기도 없었다.“그럴 필요 없어. 민준이 형도 어쩔 수 없다면 해외로 가도 마찬가지야.”약을 다 밀어 넣은 그는 조심스레 주사기를 종이로 감쌋다.“여기서 잘 지켜보고 있다가 강하리가 깨어나면 같이 말동무나 해줘. 근데 해서는 안 될 말은 하지 마, 알았지?”그렇게 말한 뒤 그는 밖으로 나가서 주사기를 쓰레기통에 버렸다.진씨 가문의 생일 파티에서 강하리와 함께 떠나는 구승훈을 많은 사람이 목격했고 석미란의 날카로운 목소리는 더욱 시선을 끌었다.구승훈에게 맞은 주해찬은 얼굴과 입술에 시퍼렇게 멍이 들었고 모든 과정을 보진 못했지만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진태형은 사람을 시켜 현장을 정리하고 지켜보던 사람들을 모두 내보낸 뒤 방으로 들어갔다.무거운
걸음을 멈춘 구승훈이 뒤돌아 주해찬에게 주먹을 날렸고 참을 수 없다는 듯 주해찬에게 주먹을 연달아 내리꽂았다.그때 갑자기 방문이 열리면서 석미란이 비명을 지르며 뛰어 들어왔다.“구승훈! 뭐 하는 거야! 감히 해찬이를 때려? 경찰 부를 거야, 신고할 거야!”구승훈이 비아냥거렸다.“그래요, 신고하세요.”그렇게 말한 뒤 그는 곧장 강하리를 안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방을 나갔다.석미란이 화가 나서 뭐라고 말하려는데 주해찬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그는 휠체어에 멍하니 앉아 강하리를 안고 떠나는 구승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사실 그는 오늘 강하리에게 무슨 짓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한 번만 기회를 얻고 싶었다.주먹질에 맞아도 싸다.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하리에게 빚을 졌다.이정숙에게 잡혀 발을 뺄 수 없었던 진태형이 서둘러 도착했을 땐 구승훈이 강하리를 안고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두 눈에 감출 수 없는 살기에 진태형이 구승훈의 팔을 붙잡았다.이대로 강하리를 해칠까 봐 두려웠는데 걸음을 멈춘 구승훈이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어두운 눈빛으로 말했다.“아버님, 저 하리 다치게 하지 않아요.”진태형은 잠시 구승훈을 바라보다가 손을 놓았고 구승훈의 차는 빠르게 달려 거의 순식간에 별장으로 돌아왔다.강하리는 조수석에서 이미 잠들어 있었고 구승훈은 차를 세우고 문을 쾅 닫은 뒤 조수석에서 강하리를 안고 내려왔다.그녀를 안는 힘이 너무 셌던 탓인지 강하리가 갑자기 몸부림을 쳤고 구승훈은 참지 못하고 그녀를 차 위로 밀어붙인 채 키스를 했다.거칠고 난폭했다.키스라고 하기엔 물고 뜯는다는 표현이 더 적절했다.깊은 욕망과 살기가 뒤섞인 눈빛은 당장이라도 여자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 같았다.그가 아프게 깨물자 강하리는 밀어내기 시작했고 구승훈은 그녀의 손을 포박한 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나 말고 주해찬이랑 키스하려고?”남자의 목소리가 싸늘했고 흐릿한 눈을 뜬 강하리는 구승훈의 분노로 가
화장실 문 앞에 도착한 구승훈은 강하리가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 옆 벽에 기대어 기다렸다.하지만 10분이 지나도 강하리가 인기척을 보이지 않자 심장이 철렁하며 휴대폰을 꺼내 강하리에게 전화를 걸었다.상대의 휴대폰이 꺼졌다는 음성에 남자의 얼굴이 단번에 굳어지며 곧장 발을 뻗어 화장실 문을 발로 차서 열었다.안에선 강하리의 모습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강하리는 머릿속이 어지럽고 몸에서 주체할 수 없이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누군가 자신을 안는 느낌이 들었지만 뿌리칠 수 없었고 곧바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힘겹게 눈을 뜨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구승훈의 얼굴이 보였다.“구승훈...”강하리가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만지려 했지만 갑자기 눈물로 인해 시야가 흐려졌다.“왜 나랑 결혼하지 않는 거야? 나랑 결혼한다고 했잖아, 연정이한테 온전한 가정을 만들어 준다고 했잖아. 구승훈, 한 달의 시간을 줄게. 나랑 결혼해 줘, 알았지?”그녀의 첫마디를 듣자마자 주해찬의 눈이 번쩍 뜨였지만 강하리의 입에서 구승훈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는 차가운 얼음 동굴에 빠진 것 같았다.그랬구나.진시연은 강하리가 기꺼이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게 할 방법이 있다고 했다.그게 그를 구승훈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일 줄이야.그는 쓴웃음을 내뱉으며 휠체어 팔걸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하리야, 넌 내가 그렇게 싫어?”강하리는 눈가에 눈물을 머금었지만 입가엔 웃음이 흘러나왔다.“내가 충분히 보여주지 않았어? 구승훈, 얼마나 좋아해야 날 전적으로 믿어줄 거야?”웃는 그녀의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난 사실 당신이 항상 날 믿지 않는 게 무척 괴로워.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 둘이 같이 짊어지고 싶은데 항상 날 빼놓잖아. 구승훈, 어떻게 해야 나한테 온전히 마음을 열어줄 건데?”주해찬의 손가락이 살짝 떨리며 앞으로 다가가 강하리의 손을 잡았다.“하리야, 구승훈 사랑하지 마, 응?”강하리는 웃으며 그를 밀쳐냈다.그녀도 더 이상 구승훈을 사랑하고 싶지
그런데 갑자기 진태형에게 친딸이 하나 더 생기고 그게 심씨 가문의 손녀일 줄 누가 알았겠나.이제 진시연의 처지가 어색해진 건 당연했고 사람들은 진시연을 보고 웃으며 인사를 나눈 뒤 곧바로 흩어졌다.진시연은 짙은 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샴페인 잔을 손에 들고 있었다.그녀는 사람들의 의미심장한 시선을 못 본 척 걸음을 옮겨 구승훈에게 다가갔다.“구승훈 씨, 오랜만이네요.”구승훈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무심하게 와인 잔을 들고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셨다.대답하지도 않았고 그녀와 대화를 나눌 생각도 없어 보이자 진시연은 그의 옆에 서서 우울한 표정으로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구승훈 씨, 내가 F 대륙에서 야생동물에게 공격당했을 때 날 구해주고 밤새 업고 병원으로 가 치료받게 해준 거 기억나요?”구승훈이 피식 웃었다.“그땐 개나 소나 다 구해줬을 겁니다.”진시연의 얼굴이 다소 일그러졌다.그녀는 오랜 세월 기억하고 있던 것이 구승훈의 입에서 개나 소나가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우울한 눈빛을 감춘 채 말을 이어갔다.“그래도 저한텐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에요. 구승훈 씨, 우리 앞으로 잘 지내봐요, 네? 전 정말 그쪽이랑 잘 지내고 싶어요.”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진시연 씨, 진심으로 살려줘서 고마우면 나한테서 멀리 떨어져요. 내 아내가 날 오해하는 건 싫으니까.”진시연은 당황했다.“아내요? 두 사람 결혼해요?”구승훈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진시연 씨, 멀리하라고요. 못 알아들어요?”구승훈이 그렇게 말한 뒤 걸음을 옮겨 강하리에게 다가가는데 진시연이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그의 뒤에서 소리쳤다.“구승훈 씨, 강하리가 정말 좋은 여자라고 생각해요? 그쪽 잡고 놓아주지 않으면서 주해찬이랑 알콩달콩 지내는데 정말 하나도 신경 안 쓰여요?”구승훈은 걸음을 멈추고 얼음같이 싸늘한 얼굴로 돌아보았다.“진시연 씨, 멀쩡히 진씨 가문에 남고 싶으면 얌전히 있어요. 아니면 심씨 가문도, 나도 그쪽 무사히 B시에 남겨두지 않을 테니까.”진시연의 얼
강하리는 결국 구승훈이 보내준 드레스를 입었다.파란 드레스에 네크라인과 치맛단에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혀있어 여성스러우면서도 고상하고 품위 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오픈 숄더는 쇄골을 모두 드러냈고 새하얀 쇄골에는 투명한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달려 있었다.강하리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진태형의 딸, 심씨 가문의 손녀라는 대단한 신분을 가진 사람이 B시에 몇이나 되겠나.게다가...허리를 굽혀 강하리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리는 구승훈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구씨 가문이 어떤 배경을 가졌는지 모두가 안다.비록 구승훈이 구씨 가문을 처참히 무너뜨렸지만 그의 손에는 구씨 가문의 재산 90%와 B시 문씨 가문의 모든 재산이 있으니 기존 구씨 가문보다 그 세력이 더 대단했다.모두의 시선이 여기로 쏠렸지만 구승훈의 눈에는 눈앞에 있는 여자만 보였다.몸을 살짝 굽혀 강하리에게 손을 내밀자 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에 자기 손을 얹었다.심준호가 선물한 드레스를 아무 말 없이 찢어버린 구승훈에게 조금 화가 났지만 개자식의 소유욕이 발동한 게 하루 이틀도 아니었다.오히려 그런 그의 반응에 다시 예전 구승훈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그동안 그녀의 마음을 가로막고 있던 장벽이 옅어지는 느낌이었다.구승훈의 눈가에 미소가 번지며 강하리가 밖으로 나오자마자 팔을 뻗었다.강하리는 그의 팔짱을 낀 채 사람들의 시선 아래 진씨 가문 저택으로 따라 들어갔다.“이게 우리 결혼식이면 얼마나 좋을까. 왠지 정말 결혼식 같지 않아?”구승훈이 강하리의 귀에 속삭이자 강하리는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바라보았다.“나도 이게 우리 결혼식이었으면 좋겠어.”구승훈이 걸음을 멈칫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서두르지 마, 결혼식 할 거니까.”강하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진태형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강하리를 보자 눈을 반짝이며 이쪽으로 걸어왔다.“아빠.”강하리가 낮은 소리로 부르고 곧이어 구승훈도 그를
“언제 왔어?” 강하리가 구승훈을 바라보며 그의 빨갛게 충혈된 눈동자에 시선이 향했다.지난 며칠 동안 구승훈은 이곳에 머물지 않았다.회사를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요 며칠 구승훈은 많이 바빴고 모임이 끊이질 않아 근처에 미리 준비해 둔 별장으로 갔다.강하리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봤다.“지난 며칠 동안 잠은 잤어?”구승훈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품에 안았다.“잠을 못 자. 강 대표님이 와서 재워주면 안 돼?”강하리가 웃었다.“그래, 오늘 짐 챙겨서 그쪽으로 갈게.”구승훈은 멈칫하다가 이내 입꼬리를 피식 올렸다.쉽게 승낙하니 다소 허탈한 느낌이 들었다.원래 상처들은 거의 다 나았지만 그가 요즘 매일 복싱장으로 가서 속에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풀었기에 몸에 새로운 상처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강하리가 정말 오면 그는 괴롭기만 할 거다.아내가 옆에 있는 데도 안지 못하는 그 기분을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정말 올 거야?”강하리가 웃었다.“왜, 내가 가는 게 싫어? 아니면 다른 여자가 있는 거야?”구승훈은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그럴 배짱이 있는 것 같아?”강하리는 그의 넥타이를 잡고 끌어당겨 허리를 굽히게 한 뒤 시선을 마주 보았다.“그러면 방 청소나 하고 나랑 연정이가 갈 테니까 기다려.”말을 마친 그녀는 구승훈의 넥타이를 놓아주고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구승훈은 문에 기댄 채 웃음을 터뜨리며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강하리를 거절할 수가 없다는 걸 인정했다.잠시 후 드레스룸에서 나온 강하리는 심플한 드레스를 입었는데도 유난히 아름다워 보였다.하지만 구승훈은 그녀가 나오는 순간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내가 보낸 드레스는 어딨어?”강하리는 머리를 뒤로 넘기며 무심하게 대꾸했다.“너무 더워서 시원한 걸로 바꿨어.”구승훈은 강하리의 등 뒤로 훤히 뚫린 구멍을 바라봤다.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위로 끌어올리자 뒤쪽의 아름다운 나비 모양의 뼈가 드러났다.허리까지 훤히 뚫린 디자인의 옷을 바라보는 구승훈의 눈빛이 어두
강하리의 입꼬리가 움찔했다.건너편 사옥에 새로 회사가 들어왔다는 건 아는데 에비뉴와 정안 그룹일 줄은 몰랐다.하지만 생각해 보니 이해가 됐다.그렇지 않고서야 구승훈이 왜 회사 근처 식당에 나타났겠는가.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연성으로 안 돌아가?”구승훈의 눈동자는 온통 그녀로 가득 찼다.“너랑 아이가 어디 있으면 나도 함께 할 거야.”강하리가 구승훈의 시선을 마주했다.“나도 꼭 B시에 있을 필요는 없어. JM의 업무는 어디서든 할 수 있으니까.”어쨌든 연성은 구씨 가문의 영역이었고 연성에 깊게 뿌리 박은 구씨 가문은 B시에서 그다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구승훈이 시선을 내려 그녀를 바라보았다.“하지만 네가 다시는 가족과 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난 네가 연인이든 가족이든 둘 다 가졌으면 좋겠어, 자기야.”두 사람 중에 적어도 한쪽은 가족의 사랑을 받아야 하니까.강하리의 코끝이 갑자기 시큰해지며 구승훈을 바라보았다.“예물도 도착했는데 그러면 결혼할래, 구승훈?”멈칫한 구승훈은 씁쓸함이 가슴에 밀려왔지만 그래도 얼굴에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강 대표님, 그렇게 급한가?”강하리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나랑 결혼할 거야?”구승훈의 눈에 머금었던 미소가 점점 사라지더니 손가락이 강하리의 눈가에 닿았다.“자기야, 준비할 시간 좀 줘.” 강하리는 쓴웃음을 내뱉었다.“알았어, 기다릴게.”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곧장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구승훈은 복잡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회사 앞에 서서 얼굴을 찡그렸다.그가 돌아서서 길 건너편으로 걸어가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렸는지 모른다.구승재는 진작 위에서 구승훈과 강하리가 함께 서 있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두 사람이 화해했는지 확인하려고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왔다.하지만 아래에 내려오자 형이 찌푸린 얼굴로 걸어올 줄이야.‘쯧... 아직 화해 못 했네.’“형, 하리 씨가 아직 용서 안 해준대?”구승훈은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눈가에 억눌린 짜증을 내비
하지만 구승훈의 숨김과 솔직하지 못한 태도는 강하리의 마음을 조금 불편하게 만들었다.구승훈은 강하리가 화가 났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뒤 강하리를 품에 안고 입을 열었다.“제 아내, 강하리에요.”강하리가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바라보자 구승훈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나지막이 말했다.“내 체면 좀 살려주면 안 돼, 여보?”강하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여자의 시선이 반짝이더니 강하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안녕하세요, 사모님. 전 구승훈 씨 담당 정신과 의사, 여나경이라고 해요.”강하리는 멈칫하다가 구승훈의 불면증이 떠올라 그를 슬쩍 보고는 이렇게 물었다.“이 사람 상태 어때요?”구승훈의 눈동자가 살짝 어두워지고 여자는 눈치껏 웃으며 말했다.“복잡한 경우라 치료 과정도 번거로울 수 있지만 제가 최선을 다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사모님.”강하리는 자세히 묻고 싶었지만 여자가 먼저 웃으며 말했다.“죄송하지만 전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그러고는 이내 자리를 떴다.여자가 가고 구승훈은 힘껏 강하리의 허리를 꼬집었다.“정주현이랑 밥 맛있게 먹었어?”강하리는 곧장 그의 손을 떼어냈다.“다른 여자랑 밥 맛있게 먹었어?”구승훈이 웃었다.“그래도 강 대표님이랑 먹는 게 맛있지.”강하리는 능글맞게 웃는 남자를 보며 문득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어젯밤 혼자 발코니에 서 있을 때처럼 왠지 이 남자가 홀로 버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구승훈, 당신 몸...”구승훈은 속으로 흠칫하며 조용히 강하리를 품에 안고 만족스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강 대표님 걱정하는 눈빛을 보니 다 나은 것 같네.”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구승훈의 품에 기대어 안겼고 구승훈의 눈동자는 한층 어두워졌다.강하리가 걱정한다는 걸 잘 안다.예전 같았으면 걱정해 주는 그녀의 모습에 날 듯이 기뻐했을 텐데 지금 상황에서는 강하리가 알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지금은 감히 프러포즈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그 약은 그에게 시한폭탄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