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안현우의 회사에는 그저 비즈니스 분쟁이 몇 개 생겼을 뿐이었다.안현우가 요즘 확실히 바쁘긴 했어도 그로 하여금 분별력을 잃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하지만 구승훈이 저번에 안현우더러 이사회를 조심하라 이른 후 안현우는 이사회를 한바탕 뒤엎었다.그 기간 자연스레 많은 이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그렇게 해왔는데 불과 며칠 전, 안현우는 그의 이사회에 사실 아무 문제 없음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그 비즈니스 분쟁들 전부 구승훈 그 자식이 꾸민 짓이었다.구승훈이 던진 한 마디에 그 많은 고생을 한 것이다. 구승훈이 이렇게 나온다는 건 안현우로서는 한가지 이유로밖에는 해석되지 않았다. 강하리 때문이겠지.안현우는 이 일을 도저히 참고 넘어갈 수 없었다.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 오게 되었다.구승훈한텐 감히 어쩌진 못해도 강하리한테 못 올까.강하리는 멍했다. 구승훈이 안현우를 건드릴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 말이다.강하리의 입가의 핏기가 하얗게 가시고 있었다. 머릿속은 온통 뒤죽박죽되었다.하지만 찰나에 불과했다. 강하리는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구승훈이 안현우를 건드린 것은 그녀 때문이 아닐 것이다. 강하리는 자신의 주제를 잘 알고 있었다.“이번 일이 저랑 무슨 관련이 있는데요?”안현우는 조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정말 강 부장이랑 상관없는 일입니까?”“난 승훈이와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란 사이예요. 만약 그대 때문이 아니라면 왜 승훈이가 내 회사를 건드립니까!”강하리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구 대표님이 송유라 씨랑 안 대표님이 가깝게 지내는 게 거슬리셨나 보죠. 안 대표님이 송유라 씨 좋아했던 건 맞잖아요. 아닌가요? 그리고 모두가 잘 알고 있죠. 송유라 씨가 구 대표님이 제일 아끼는 사람이란 걸. 안 대표님도 잘 알고 계시잖아요, 제가 구 대표님한테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정말 저 때문에 당신을 건드렸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안현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시간이 좀 지나서야 그의 입술이 떨어졌다.“저랑 유라 씨가 친한 거 승훈이는 늘 알고
안현우는 순간적으로 강하리의 귓가에 바짝 붙어왔다. 그리고 음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만약 내가 그댈 강제로 취한다면 구승훈이 강 부장을 죽일까요, 날 죽일까요?”강하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구 대표님이 안 대표님을 죽일지는 모르겠지만 가만두진 않을 거예요. 구 대표님이 어떤 분이신지 안 대표님이 더 잘 알고 계실 텐데요. 구 대표님이 다른 남자가 자기 여자를 건드는 꼴을 허락할 것 같아요?”안현우는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강 부장 그대가 승훈이 여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대는 그저 노리개에 불과하죠.”강하리의 입가가 굳어졌다. “그렇다 해도 구 대표님이 안 대표님을 건드린 건 사실이니까요. 아닌가요?”안현우는 눈을 번쩍 떴다.강하리는 그런 안현우를 밀며 문을 열었다. “먼 데까지 안 나갑니다. 그럼 조심히 가세요. 안 대표님.”안현우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그로서는 확실히 더 이상 강하리를 건드릴 수 없었다.구승훈이 안현우에게 가르친 수업의 대가가 이리도 컸다.불과 두 개월 사이에 빚어진 피해는 안현우의 회사로서는 2년이라는 시간에 걸쳐서 복구해야 할 것이다.안현우는 이대로 물러나기 분했고 나가면서도 강하리를 자극했다.“강 부장, 이렇게 나오는 거 재밌습니까? 정말 그대가 유라 씨를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까? 구승훈이 송유라 씨를 얼마나 끔찍이 여기는지 그대는 모를 겁니다.”강하리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송유라와 경쟁할 마음이 애초에 없었으니 말이다.강하리는 자신의 주제를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구승훈이 얼마나 송유라를 아끼는지도 똑똑히 알고 있었다.그렇지만 강하리는 더 이상 안현우와 말씨름할 인내심이 없었다.“안 대표님, 보안팀을 불러야 물러나실 거예요?”안현우는 고개를 돌려 눈앞의 여자를 바라보았다.매혹적인 몸매에 검은 생머리가 어깨에 드리워진, 허리도 예전에 비해 얇아진 강하리였다. 안현우가 강하리에게 예전보다 예뻐졌다고 얘기한 건 정말 빈말이 아니었다
구승훈의 말에 강하리의 눈초리가 파르르 떨렸다.강하리는 손등을 꼬집으며 있어서는 안될 이 두근거림을 무시하려 애썼다.침묵이 흐른 뒤 강하리는 물었다. “왜죠? 대표님은 늘 신경 쓰지 않으셨잖아요."구승훈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구승훈은 무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소름이 돋으리만치 차갑고 공허하며 심지어 조금의 음울함도 깃든 듯한 기색으로.“난 당연히 관심 없어. 그렇지만 난 누가 내 물건을 탐내는 건 싫거든. 더군다나 손대려고 했다면 더더욱.”강하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거였구나, 그럼 그렇지. 원래 그랬어야 하는 거지.구승훈은 확실히 손을 쓸 것이다, 자기 것이 넘보였단 이유로.강하리 때문이 아닌.다시 말하자면 탐낸 것이 그가 기르던 고양이든, 강아지든 구승훈은 똑같은 행동을 했을 거란 소리였다.강하리는 침착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러곤 얼굴에 가까스로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네, 알겠습니다.”구승훈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강 부장은 내가 뭐 때문에 손썼다고 생각했는데?”강하리는 숨을 깊게 들이 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아 저는 대표님이 또 제가 불쌍해서 도와주는 건 줄 알았습니다.”구승훈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웃었다. “강 부장이 그렇게 생각해도 틀리진 않고.”강하리는 가슴 한켠이 시큰해 오는 걸 뒤로 하고 웃으며 말했다. “더 볼일 없으시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구승훈이 그녀를 불러세웠다. “이렇게 간다고?”강하리는 입가에 힘을 주었다.구승훈이 손을 내밀어 덥석 강하리의 팔목을 잡았다. 팔목을 가볍게 쓰다듬으면서 구승훈은 말했다.“말 좀 예쁘게 해. 아니면 환심 살만한 행동을 하든가. 강 부장은 그런 거 몰라?”강하리는 못 하는 게 아니었다. 그녀도 남자들이 뭘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단지 지금 하기 싫을 뿐이었다.강하리는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구승훈을 보며 말했다. “그럼 대표님은 뭘 듣고 싶은 건가요? 제가 다 들려드릴 수 있는데. 좋아해요, 사랑해요. 이
마케팅팀에도 회식은 원래 뺄 수 없는 일환이었다. 하지만 올해 강하리는 도저히 그럴 기분이 나지 않아 지금까지 별다른 동작을 보이지 않았다.강하리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 입을 열었다. “예서 씨가 진행해 줘. 준비가 다 되면 나한테 얘기하고.”안예서는 강하리를 놓아주지 않았다.“보스, 다들 회식할 때 애인을 데려오고 싶어 하는데 그래도 되나요?”강하리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누구든 데려와도 돼.”안예서는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그럼, 보스는요? 아니면 그날 저희가 남자들 좀 불러볼게요. 소개팅해 보실래요?”강하리는 잽싸게 거절했다. 더 이상 피곤해질 일이 생기지 말았으면 했다.“괜찮아. 아직 연애할 마음이 없거든.”말이 끝나고 강하리는 안예서를 가볍게 토닥이고는 얘기했다. “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 너희들도 얼른 자리에 돌아와서 일들 해.”“알겠어요.”강하리는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핸드폰에서 손연지의 연락이 울리고 있었다.“하리야, 요양병원 자료를 방금 너한테 보냈어.”강하리는 짧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하리야, 너 진짜 떠나려고? 일단 어머니한테 위험한 결정인 걸 떠나서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너 지금 얼마나 모았는데? 만약 거기에 도착한 뒤에 돈이 부족하면 그때는 어쩔 건지 생각해 봤어? 거기에 도착한 이후에 다시...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거잖아.”손연지는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하지만 강하리도 친구가 하는 말의 뜻을 알고 있었다.거기로 떠난 뒤에 남자한테 빌붙어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강하리는 점점 속이 답답해짐을 느꼈다.그랬다. 강하리는 떠나고 싶었다.하지만 엄마의 치료비가 제일 큰 걸림돌이었다.손연지의 말은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이 아니었다.매달 몇천만 원씩 빠지는 치료비는 강하리 같은 평범한 직장인이 부담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지금 여기서는 적어도 엄마의 치료비 정도는 해결할 수 있었다.만약 거기서 정말 치료
강하리는 손연지의 전화를 끊고 요양병원의 자료를 살펴보았다.확실히 손연지의 말대로 환경이나 시설이 좋았다.유일하게 머리 아프게 하는 구석이 치료비였다.강하리는 약하게 숨을 한번 내쉬었다.자료를 금방 정리했는데 마침 구승훈에게서 전화가 걸려 오고 있었다.“계약서는 문제없어. 강 부장은 나랑 출장 좀 같이 가지. 조금 이따 비행기 타고 보경시에 갈 거니까 아래서 기다릴게.”강하리는 어안이 벙벙했다. “대표님, 매번 전담 비서와 함께 가셨잖아요?”구승훈은 가볍게 웃었다. “난 강 부장이랑 가고 싶은데. 안돼?”강하리는 구승훈에게 말문이 막혀 뭘 얘기할지 몰랐다.구승훈은 엄연히 대표였고 자연스럽게 누구와 출장을 가도 다 되는 거였다.강하리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입을 열었다. “저 오늘 업무가 많아서요, 대표님...”“이번 건은 강 부장 거야. 상황도 강 부장이 더 잘 알 테고. 강 부장, 원래 강 부장 소관이야.”강하리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전 아직 짐도 싸지 않았는데요.”수화기 건너편 남자의 인내가 눈에 띄게 바닥났다.“보경시에 도착하면 그때 사는 거로 해. 아래서 기다릴 테니까 빨리 와.”구승훈은 이 말을 끝으로 전화를 껐다.강하리는 꺼진 핸드폰을 바라보며 답답한 기운을 느꼈다.하지만 업무상의 일이었기 때문에 강하리는 결국 짐을 싸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가기 전에 안예서와 얘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구 대표님이랑 출장 좀 다녀올 거야. 팀 회식은 이미 준비해 뒀으니까, 너희가 돌아오면 그때 회식비 청구해.”안예서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보스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게요.”강하리가 빙긋 웃었다. “그래도 되고.”회사 아래 세워져 있던 컬리넌의 차창이 반쯤 내려졌다.남자는 손에 담배 한 개비를 끼우고 느슨하게 좌석에 기대있었다. 눈동자에는 자유분방함과 제멋대로 하는 성격이 그득하게 담겨있었다.강하리가 다가오자 남자는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시선은 강하리 얼굴에 고정한 채.원래 좋지 않았던 안색은 지
하지만 그것도 단지 일시적인 감정일 뿐, 그는 이내 그 생각을 접었다. 구승훈은 그제야 자신이 결코 강하리의 반골 기질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소리 없는 반항이었지만 그 힘만큼은 절대로 약하지 않았다. 강하리가 매번 소원하게 굴 때마다 불쾌감이 마구 치솟았다. 그저 고분고분하게 자신에게 의지하도록 그녀의 날개를 확 부러트리고 싶었지만 결국에는 참았다.어차피 그럴 필요도 없었다. 어디까지나 애인일 뿐이었고 그녀가 계속 그의 곁에 머물러 있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불쾌한 마음은 무조건 풀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였다. 강하리의 턱을 잡아 치켜올린 구승훈은 안하무인이었다.“이건 다 강 부장이 당연히 해야 하는 일 아닌가? 만약 이만한 일도 제대로 못 한다면 강 부장은 그 돈도 가질 자격이 없는 거야.”구승훈의 쌀쌀맞은 눈빛에는 한치의 욕망도 담겨있지 않았고 오히려 분노가 스며 있었다.사실 강하리는 그가 왜 화가 났는지 알고 있었다. 이 남자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멀어지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마치 아무런 근거 없는 그의 소유욕처럼 말이다.하지만... 강하리도 더 이상 휘둘리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녀는 쓴 속을 주워 삼키며 간신히 웃음을 쥐어 짜냈다.“좋아요. 제가 대표님을 어떻게 만족시켜 드리면 될까요?”“손으로 하면 돼.”구승훈이 여유 있고 편한 자세로 문에 기대서서 말하자 고개를 끄덕인 강하리는 그의 팬츠 버클을 풀고 안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부드러운 손길이 닿는 순간 구승훈의 입술이 다시 강하리의 입술에 포개졌다.카드를 미처 넣을 새도 없이 어둑한 방에서 하는 키스는 뭔가 더 야릇한 느낌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하리는 체력이 바닥까지 소모되어 후반부에는 거의 구승훈이 그녀의 손을 잡고 움직였다....거사를 치른 후 구승훈은 강하리의 귓불을 깨물며 말했다.“날로 먹네, 강 부장.”“미안해요. 하지만 정말 힘이 남아나지 않는걸요.”아픔을 참으며 말하
살짝 저릿한 느낌이 전해지는 입술 아래로 구승훈의 목젖이 두어 번 오르내리더니 그는 강하리의 목덜미를 거칠게 잡았다. 그리고 입에서 건조하고 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강 부장은 고작 가벼운 입맞춤 따위로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계속 해.”그녀의 목을 문지르며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에 강하리의 미간이 구겨졌다.“대표님, 저희 저녁 연회에 참석해야 하는데요.”구승훈은 눈썹을 치켜뜨고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그럼 일단 빚진 거로 하든가.”말을 마친 그는 숄을 꺼내와 강하리의 어깨에 걸쳐주었다.“가자.”저녁 연회는 한 채의 별장에서 진행 중이었고 아마도 사적인 연회 같았다. 구승훈이 강하리를 데리고 별장에 들어섰을 때 삼십 대 초반의 한 남자가 맞이하러 나왔다.“구승훈, 너 지각이야!”남자가 다가와 웃으며 말하자 그의 목소리에 모두의 이목이 그들에게로 쏠렸다. 구승훈이라는 이름 세글자는 어디를 가나 항상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강하리는 그의 팔짱을 낀 채 저에게로 쏟아지는 수많은 시선의 세례를 감내해야만 했다.약삭빠른 사람들은 벌써 와서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구승훈은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보려고 다가오는 이들을 두세 마디 말로 돌려보냈고 제일 처음 말을 걸어온 남자만 남게 되었다. 남자의 눈길이 강하리에게 닿으며 의미심장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승훈아, 누군지 소개 안 해줄 거야?”“회사 동료, 강하리 부장이야.”구승훈이 강하리를 흘긋 보며 말하자 그 남자는 싱긋 웃었다.“아, 동료였어. 난 또 여자 친구인 줄 알았잖아!”구승훈은 대꾸하지 않고 강하리를 보며 이어서 소개했다.“이쪽은 법무법인 정세, 대표 변호사 심준호야.”강하리는 TV에서 이 남자를 본 적이 있다. 법무법인 정세는 국내 최대 대형로펌이다. 전문적으로는 공정거래 분쟁과 재산 분할 및 재벌 이혼 소송 분야의 법률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정세의 대표는 도무지 속을 알 수가 없고 매우 무자비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구승훈의 미간이 살짝 좁혀지고 심준호는 쓴 미소를 지었다.“내 위에 누나가 한 명 있는데 나보다 족히 20살이 많아. 그런데 어릴 때 실종되고 나서 지금까지 찾지 못해서 부모님께서 수년 동안 늘 안타까워하셨어. 특히 엄마는 누나 얘기만 나오면 눈물을 글썽이시고.”심준호는 휴대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 사진 속의 여인은 무척 아름답고 옅은 미소는 부드러움을 담고 있었다. 눈썹이 살짝 좁혀든 구승훈은 왠지 모르게 사진 속 사람이 낯설지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회상해 보아도 어디서 봤는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실종된 지는 몇 년 됐어?”“아마 28년은 됐을 거야.”만약 사진이 없었다면 심준호는 이미 자기 누나의 외모를 까맣게 잊어버렸을 것이다. 구승훈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사람을 시켜 계속 알아보라고 할게.”“고마워.”심준호는 구승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애피타이저를 두세 입 먹은 강하리는 더는 음식이 들어가지 않았다. 연회장이 조금 답답해진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발코니로 걸어갔다. 찬 바람이 불어와 으슬으슬한 한기를 느낀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숄로 몸을 감쌌다. 이때 한 사람이 옆으로 다가와 그녀에게 술잔을 건넸다. 고개를 돌려보니 대양그룹 총수의 아들 정주현이 옆에 서있었다. 대양그룹, 바로 그들의 이번 협력 파트너였다. 강하리는 지체하지 않고 고개를 살며시 숙이며 인사했다.“안녕하세요, 정주현 씨.”“이제야 강 부장님을 실제로 뵙는군요. 동영상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예쁘시네요.”정주현은 인사를 하며 다시 손에 들린 술잔을 강하리 앞으로 건넸다. 하지만 그녀는 받지 않고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미안해요, 주현 씨. 전 술을 못 마셔요.”“에이, 거짓말하지 마요. 강 부장님, 술을 아주 잘 마신다고 들었어요.”정주현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강하리는 여전히 거절하는 태도로 일관했다.“요즘 약을 먹고 있어서 진짜 못 마셔요.”그 말에 정주현도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그럼 조금 있다가 저랑
하지만 오늘은 특별히 마트까지 다녀와 한 상 가득 차렸는데 모두 구승훈이 평소 좋아하던 음식들이었다.구승훈은 다소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최후의 만찬은 아니지?”강하리가 눈을 흘겼다.“먹든 말든 맘대로 해.”가정부가 어쩔 수 없이 옆에서 해명했다.“사모님이 대표님께서 그동안 많이 야위었다고 영양 보충을 위해 특별히 만드신 거예요. 대표님 입맛을 잘 아니까 앞으로 자주 요리하겠다는 말씀까지 하셨어요.”구승훈은 주방에서 음식을 나르고 있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은 채 다가갔고 어느 틈에 그의 품에 안긴 강하리의 귓가에 한 마디가 들렸다.“강 대표님이 이러면 난 밥 먹을 생각도 없어지는데.”말하며 남자가 뒤에서 두 번 허리 짓까지 해대자 강하는 저도 모르게 옆을 돌아보았고 가정부는 웃으며 연정이를 안은 채 다른 곳으로 가고 있었다.강하리는 얼굴이 화끈거려 구승훈을 홱 노려보았다.“좀 점잖게 굴 수 없어?”구승훈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자잘한 입맞춤을 남겼다.“지금 충분히 점잖은 거야. 아주머니와 연정이가 없었으면 넌 지금 여기서 덮쳐졌어.”구승훈은 그 말을 하고 나면 강하리가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강하리가 뒤돌아서서 그의 입술에 입맞춤했다.“조금만 참아. 오늘 밤엔 뭘 하든 다 들어줄게.”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문밖으로 걸어 나갔고 당황한 구승훈의 목울대가 꿈틀거렸다.젠장, 이젠 정말 밥 생각이 사라졌다.손연지는 저녁 식사가 시작되기 전에 서둘러 돌아왔고 밥을 먹으며 강하리에게 일 얘기를 했다.그러다 문득 말을 멈추고 강하리와 구승훈을 번갈아 바라보는데 두 사람이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왠지 모르게 자신이 더더욱 여기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손연지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려 어린이 의자에 앉아 밥을 집어 먹는 연정이를 바라보았다.“이모는 아무것도 모르는 네가 참 부럽다.”연정이가 숟가락을 들고 밥 한 숟가락을 떠서 손연지에게 건네며 입으로는 엄마라고 불렀다.손연지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
임희주는 여전히 굴복하지 않는 구승훈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결국 구승훈의 어두운 눈빛에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앞으로 다시는 사모님 찾아가지 않을게요. 하지만 의사인 제 말도 들어주셨으면 좋겠네요. 계속 이러시면 안 돼요.”“그건 임 선생이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창문이 올라가고 검은색 마이바흐가 밤의 네온사인 속으로 사라졌다.임희주는 마침내 한숨을 내쉬며 휴대폰을 꺼내 노민준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차 안에서 준봉은 뒷좌석에 앉은 구승훈의 상태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차 밖의 불빛이 이따금 아른거리며 준봉은 상사의 안색을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굳이 짐작할 필요도 없이 기분이 안 좋다는 걸 알 수 있었다.준봉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래도 말했다.“대표님, 제 생각엔 임 선생님도 좋은 마음에 그런 건데 정말 서두르다가 역효과가 날 수도 있지 않을까요?”말을 마친 준봉은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임희주가 좋은 의도에서 그랬든 아니든 절대 강하리에게 찾아가 그런 얘기를 해서는 안 됐다.오늘 임희주와 강하리의 대화 내용은 구승훈이 일찌감치 카페의 카메라 영상을 도출해 알아냈다.누가 그에게 부담을 준다든지, 지나치게 강요한다든지, 이런 말을 어떻게 감히 강하리에게 하도록 내버려두겠나.준봉은 조용히 다시 뒤를 돌아보았고 구승훈은 무표정하게 앞을 바라보면서도 입을 열지 않았다.서산 퍼스트 빌리지는 시내 한복판에 있었지만 무척 조용했고 준봉이 차를 세우자 별장 마당에서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렸다.고개를 돌리니 희미한 불빛 아래 마당에서 연정이가 혼자서 강하리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걸음마를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안정적으로 걷지는 못했지만 그런데도 강하리는 감격스러운 모습이었다.연정이가 강하리에게 몇 걸음 다가서더니 강하리의 품으로 뛰어들었고 강하리가 미소를 지으며 연정이를 안자 모녀의 웃음소리가 정원에 울려 퍼졌다.내내 싸늘했던 구승훈의 표정이 마침내 부드럽게 바뀌었고 강하리가 연정이를 품에 안은 채
“승훈아,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 너만 원하면 내일 열 명이라도 보내줄게.”회의실에서 너도나도 한마디씩 말하며 늙은이들은 책상을 쾅 내리쳤지만 구승훈은 태연하게 자리에 앉아있었다.옆에서 지켜보는 준봉이 더 불안했지만 구승훈은 가만히 있었고 재밌는 연극이라도 치켜보는 듯 이따금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한 번씩 두드렸다.“구승훈, 우리 말 듣고 있는 거야?”휴대폰 화면에 아내라는 글이 뜨자 구승훈의 눈빛이 단번에 부드러워지더니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곧장 휴대폰을 들었다.“퇴근했어?”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운 목소리에 강하리는 감정을 억누르며 낮게 답했다.“언제 퇴근해?”구승훈은 회의실에서 하나같이 격앙된 표정을 짓는 늙은이들을 훑어보았다.“곧.”“그래.”그렇게 말한 뒤 강하리는 전화를 끊었다.구승훈은 회의실에 착석한 사람들을 바라보며 눈썹을 치켜올렸고 방금 강하리의 전화를 받을 때 보였던 온화함은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싸늘함만 남았다.“얘기 다 끝났습니까?”한 마디에 회의실은 순식간에 정적이 흘렀고 구승훈은 회의실 안을 훑어보더니 마침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여씨 가문 조상의 묘 하나 파헤친 걸로 왜들 그리 흥분하세요?”말과 함께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말끔히 사라졌다.“안타깝지만 그런 수작 나한텐 안 통합니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이 회사에 남고 싶지 않은 사람은 당장 나가도 좋습니다. 정안에 차고 넘치는 게 주주들이라서요. 하지만 여기 남아서 나와 내 아내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면 당신들 조상 무덤까지 파헤칠 겁니다. 회의 끝.”구승훈이 그렇게 말하고 밖으로 나가자 준봉은 그의 뒤를 따르며 회의실에 있는 주주들을 바라보았다.하나같이 표정들이 가관이었다.정안그룹이 과거 SH그룹보다 훨씬 대단했기에 주주들은 바보가 아닌 이상 정안의 지분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늙은이들이 한 방 먹은 모습을 보니 준봉도 속이 시원했다.그동안 저 늙은이들이 뒤에서 남몰래 강하리
제 자리에 멈춰 선 여명희는 화가 나서 피를 토할 지경이었지만 강하리는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진시연 또한 한번 들여보낸 이상 두 번을 못 할까.강하리는 다소 어수선한 마음을 추스르고 곧장 심씨 가문으로 향했고 심준호는 여전히 그녀가 오는 것을 보고 조금 놀랐다.“오호, 시집갔다고 친정은 잊은 줄 알았는데? 며칠 동안 오지도 않았잖아.”강하리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외숙모는 아직 안 돌아왔어요?”최근에야 애당초 집안 어른들의 의견에 따라 심준호의 결혼이 확정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하지만 그 이면에는 심준호 본인이 약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작을 부렸는지 모른다.결국 이 결혼은 심준호가 심예진을 곁에 묶어두기 위한 수단이었다.반면 심예진은 처음부터 정략결혼으로만 받아들였고 심지어 외국에서 만나는 남자 친구까지 생겼기에 심준호는 강하리가 숙모 얘기를 꺼내자 눈썹이 들썩거렸다.“다 커서 이젠 팔이 밖으로 굽네?”강하리는 웃으며 옆으로 가서 심준호에게 차 한 잔을 따라주었다.“삼촌, 숙모 찾으러 안 갈 거예요?”심준호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걱정하지 마, 네 숙모는 어디로 도망 못 가.”그렇게 말한 뒤 그는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여긴 왜 왔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심준호에게 구승훈에 대한 이야기를 한 뒤 이렇게 물었다.“삼촌한테는 얘기했어요?”심준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소 어두운 눈빛으로 말했다.“승훈이가 말한 적은 없는데...”심준호는 문득 어렸을 때 본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승훈이는 어릴 때부터 심리적인 문제가 있었어. 그리고 그 원인이 어머니였지.”심준호는 강하리에게 당시 본 장면에 관해 이야기했고 무표정하던 강하리의 얼굴이 어느 순간부터 창백하게 변하기 시작했다.심준호는 잠시 멈칫하다가 말을 이어갔다.“기억을 잃고 다른 사람으로 착각한 것도 정신과 치료로 받은 전기충격 치료 때문이었어. 그때 아마 9살 정도 됐겠네.”심준호는 쓴웃음을 지었다.“그 작은 꼬맹이가 한계까
아무리 멍청해도 지금 강하리가 그녀에게 한 방 먹였다는 걸 깨달은 여명희는 가슴 속 분노가 순식간에 치밀어 올랐고 이를 갈며 강하리를 노려보았다.하지만 강하리는 고개를 진태형 쪽으로 돌릴 뿐이었다.“별일 없으면 전 가볼게요. 외할머니댁에 다녀와야 해서.”진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조심히 가.”강하리가 대답을 마치고 뒤돌아 떠나려는데 여명희가 소리를 질렀다.“강하리 씨, 거기 서요.”말을 마친 그가 진태형을 돌아보았다.“진 장관님은 계속 사적인 일에 권력을 행사하실 건가요? 그쪽 따님은 잘못해도 벌을 받지 않나요?”여명희의 말이 끝나자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진태형에게 집중됐다.그동안 외교부 내부에서는 진태형이 권력을 남용해 JM과 계약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강하리의 비즈니스 능력과 JM의 업무 태도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게다가 외교부에는 모든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통역사가 부족했기에 소문이 돌아도 진정 캐묻는 사람은 없었다.이제 여명희가 이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이상 사람들은 무시하고 싶어도 무시할 수 없었다.강하리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여명희를 돌아보았다.“여명희 씨는 사람을 모함하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네요. 제가 무슨 실수를 했죠?”“통역할 때 실수하지 않았나요?”여명희의 말이 끝나자 진태형 옆에 서 있던 통역실 주임이 얼굴을 찡그렸다.“강하리 씨의 번역은 한 치의 실수도 없었는데 그러는 여명희 씨는 오늘 어떻게 된 거예요?”여명희는 깜짝 놀랐다.“뭐라고요? 강하리가 실수한 게 하나도 없다고요? 하지만 아까는... 나한테 거짓말했어? 또 날 속였네! 망할 년, 강하리 이 망할 년, 네가 진 장관님 딸이라고...”“입 다물어!”여명희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누군가 호통을 쳤고 진태형이 어두운 눈빛으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았다.“외교부가 당신들이 장난하는 곳인 줄 알아? 오늘 통역에 큰 문제가 없어서 다행이지, 만약 문제가 생겼다면 당신들 중 누가 그 책임을 질 건데!”진태형이 단호하게 말하자 아무도 감히 소리를
강하리는 무심하게 시선을 거두었다.손목시계를 내려다보던 그녀는 지금 원고를 찾으러 가기에는 너무 늦었고 옆에 있는 독일어 번역본을 살펴본 뒤 다시 돌려주었다.러시아어 번역을 맡은 강하리는 회의 과정을 간단히 종이에 적고 헤드셋을 착용했다.여명희는 강하리의 무심한 표정을 바라보며 마음속에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원고가 없어졌는데 잘난 척은.’비록 강하리의 통역 실력은 외교부 내에서 전설과 같은 존재였지만 오늘 회의의 번역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은 참석한 모든 번역가가 알고 있었다.10년 차 베테랑 통역사도 조심스러울 정도로 난해한 전문 용어가 많은데 강하리가 한 치의 실수도 없이 동시통역을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지 않았다.강하리가 조금의 실수라도 하면 그녀를 외교부에서 쫓아낼 수 있는 방법이 생긴다!여명희는 비웃으며 시선을 돌려 헤드셋을 들어 올렸고 장장 세 시간이 넘는 긴 회의가 이어졌다.강하리는 마침내 헤드셋을 벗고 나지막이 한숨을 쉰 뒤 고개를 돌려 여명희를 바라봤다. 여명희의 얼굴은 극도로 일그러져 있었다.회의가 시작된 후 강하리 일만 생각하느라 정신이 산만해져 초반에 작은 실수를 저질렀는데 이후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그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이미 당황한 상태였다.이후에는 더 이상 실수를 하지 않았지만 전체 번역 과정에서 그녀의 실력은 그리 좋지 않았다.뛰어나지도 않았고 심지어 이제 막 사회에 진출한 대학생들보다 뒤처지는 수준이었다.여명희는 헤드셋을 탁자 위로 던져버리고는 고개를 돌려 강하리를 바라보는데 강하리는 이미 시선을 돌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문 앞에 다다랐을 때야 그녀는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참, 오늘 통역본 누가 담당했어요?”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부드러웠지만 순식간에 장내에 고요함이 찾아왔다.회의 시작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요. 주임님께 물어볼게요.”말을 마친 강하리가 나가려는데 여명희가 그녀
강하리의 표정은 태연했지만 커피잔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최근 증상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어요? 어떤 치료를 받고 있나요?”임희주는 그런 질문을 할 줄 몰랐는지 잠시 말을 멈추고 난감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사실 지금은 증상이 뚜렷하지 않은데 유난히 조급하세요. 빨리 낫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사모님은 왜 그렇게 서두르는지 아세요? 혹시 무슨 일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그러는 건가요? 그게 아니면 일상에서 누가 부담을 주고 있나요?”강하리의 얼굴이 갑자기 하얗게 질리더니 커피잔을 잡고 있던 손가락 마디마디도 서서히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그녀는 한참 동안 임희주를 바라보다가 말했다.“지금 증상이 어떤지, 어느 정도인지 알려주세요.”임희주는 잠시 침묵했다.“죄송하지만 대표님께서 말하지 않으셨다면 저도 말씀드릴 수 없어요.”“제가 아내인 데도요?”“죄송해요.”강하리가 웃었다.“임 선생님, 만약 구승훈 씨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수술 동의서에 사인해야 할 사람이 나란 건 알고 있죠?”임희주의 입꼬리가 움찔했지만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했다.“죄송해요.”강하리는 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부담감을 느끼는 부분에 대해선 제가 나중에 물어볼게요.”임희주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마워요.”강하리가 떠난 뒤에야 임희주는 시선을 돌려 한숨을 내쉬며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다.“대표님, 사모님 상대하기 너무 힘드네요.”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제 아내를 만났습니까?”“네, 우연히 만났어요.”임희주가 커피를 살며시 저었다.“미안해요. 아직 대표님 상황에 대해 모르는 줄 모르고 서두르지 않게 설득해 달라던 참이었는데.”구승훈은 잠시 침묵했다.“속도 늦출 필요 없다고 했는데 제 말 못 알아들으세요?”“다른 뜻이 아니라 그냥...”“할 말 있으면 나한테 직접 얘기하고 다시는 내 아내한테 찾아가지 마세요.”구승훈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임희주는 휴대전화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더니 구승훈
노민우는 다음 날 아침 일찍 떠났고 손연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하니 문 앞에 서 있었다.“아쉬워?”강하리가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뒤에서 묻자 돌아보는 손연지의 눈에 머금은 눈물이 보였다.강하리는 깜짝 놀라 황급히 손연지를 토닥였다.“그렇게 아쉬우면 돌아오라고 해. 울긴 왜 울어?”하지만 손연지는 웃으며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내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돌아오라고 하겠어. 하리야, 지금은 약혼녀가 있는 사람이야.”“그럼 넌?”강하리는 손연지의 다소 부은 눈을 바라보니 어젯밤에 운 게 분명했다.“난 열심히 일하면서 살아야지. 돈, 돈, 돈을 벌 거야. 난 돈 많은 사람이 될 거야!”손연지는 말을 마친 후 웃음을 터뜨리더니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참, 나 몸조리 끝나면 이사 갈 거야. 계속 너희 집에서 애정행각이나 보면서 신세 질 수는 없어.”그녀가 구승훈을 흘끗 쳐다보며 말하자 구승훈이 피식 웃었다.“손 선생님은 신세 지고 있다는 걸 알고 계시네요?”손연지는 그를 흘겨보며 강하리를 안았다.“아니면 하리야, 나랑 같이 나가서 살래?”순간 구승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손 선생님은 B시에서도 쫓겨나고 싶은 건 아니죠?”손연지는 강하리에게 기대었다.“자기야, 나 B시에서 쫓아낼 거야?”강하리는 다소 어이가 없다는 듯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구승훈을 노려보았다.“얼른 출근이나 해.”구승훈은 다가와 손연지의 품에서 그녀를 떼어냈다.“일단 약부터 바르자.”강하리의 어깨는 사실 더 이상 아프지 않았지만 물집이 더 커진 상태였다.구승훈은 이틀 정도 쉬라고 했지만 강하리는 오늘 외교부 회의가 있어 출근해야 했다.약을 바르고 나니 손연지도 준비를 마친 뒤라 강하리는 그녀를 병원에 데려다주고 자리를 잡게 도와준 뒤 이렇게 덧붙였다.“연지야, 난 그래도 네가 나와 함께 좀 더 지냈으면 좋겠어.”노민우는 약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갔지만 이미 약혼한 이상 그렇게 쉽게 파혼할 리 만무했다.그 과정에서 분명 손연지도 끌어들일 텐
손연지는 번뜩 정신을 차리고 옆에 있던 샴푸를 집어 들어 그에게 던졌다.“나가!”노민우는 샴푸를 피하며 순식간에 옷을 벗었다.“씻으면서 얘기하자.”“얘기하긴 뭘... 읍...”손연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노민우가 그녀의 입을 막았고 몇 번이나 그를 밀어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욕실의 온도가 빠르게 올라가고 닿은 두 몸이 곧바로 욕망에 달아올랐다.노민우는 손연지의 입술을 깨물었다.“이젠 해도 돼?”손연지가 다리를 들어 가격하자 노민우는 중요 부위를 가린 채 뒤로 물러섰다.익숙한 행동에 괜히 안쓰러웠지만 그는 얼굴이 파랗게 질릴 정도로 화가 난 손연지를 능글맞게 바라봤다.“농담이야. 아직 몸이 성치 않은데 못한다는 거 알아.”손연지가 타월을 꺼내 몸을 감싸고 돌아서서 밖으로 걸어 나가자 노민우도 서둘러 수건을 집어 들고 뒤를 따랐다.“안 해도 되니까 오늘 밤에 같이 자면 안 돼? 손연지, 앞으로 1년 동안 못 볼 수도 있잖아.”머리를 말리던 손연지의 손이 멈칫하며 이렇게 말했다.“바닥에서 자.”“네.”노민우가 말을 마치자마자 아래층에서 강하리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렸고 손연지가 놀라며 옷을 입고 내려가려고 하자 노민우가 말렸다.“가지 마. 승훈이가 있잖아.”손연지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내려가지 않았다.다행히도 구승훈이 강하리를 품에 안고 올라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두 사람은 문 앞에서 엿들은 뒤 노민우는 절뚝거리며 바닥으로 돌아갔다.손연지가 침대 옆에 기댄 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하니 있자 노민우가 그녀에게 다가갔다.“바보가 됐네?”정신을 차린 손연지가 무의식적으로 다리를 들자 노민우는 손연지의 발목을 잡았다.“마지막 밤인데 나 좀 그만 찰 수는 없어?”손연지는 그의 손에서 발을 빼고 싶었지만 노민우는 놓지 않았다.“내가 모를 줄 알아? 이거 놓으면 또 발길질할 거잖아.”손연지는 이를 갈며 베개를 집어 들어 노민우의 얼굴에 내리쳤다.“나가서 자!”노민우는 베개를 껴안은 채 바닥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