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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주방에 은채의 바쁜 뒷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방 안에도 아무도 없었다.

태윤은 핸드폰을 꺼내 은채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지만, 화면을 열자 카드 사용 내역이 가득 차 있었다. 평소에 핸드폰을 항상 무음 모드로 해 놓는 태윤은 하나하나 내역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신현은행]

11/29 15:17 일시불 6,100,000원 결제

11/29 15:39 일시불 12,000,000원 결제

11/29 16:10 일시불 4,250,000원 결제

11/29 16:21 일시불 16,540,000원 결제

11/29 16:42 일시불 9,280,000원 결제

...

끝도 없이 이어지는 소비 내역에 태윤은 얼굴을 찌푸렸다. 다시 은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태윤은 이마를 더욱 세게 찌푸렸다.

돈이 아까운 건 아니었다. 은채가 지금 옆에 없다는 사실이 마음속을 허전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태윤은 답답함에 넥타이를 풀어보기도 했지만, 어쩐지 여전히 숨이 막히는 듯했다.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일을 하려고 했다.

서재로 들어가니 책상 위에 놓인 이혼 서류와 결혼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 반지는 은채가 4년 동안 한 번도 빼지 않았던 것이었다.

태윤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는 다시 은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편 은채는 영지와 함께 바에서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며 즐기고 있었기에 전화 벨소리를 못 들었다.

다음 날,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가 걸려온 걸 발견했다. 그녀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숙취에 두통을 느꼈다.

이쯤 되면 태윤은 이미 이혼 서류를 봤을 터였다. 그래서 은채는 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태윤이 바로 전화를 받자 은채는 조금 놀랐다.

예전의 태윤은 너무 바빠서 전화를 제때 받지 못하거나, 가끔은 아예 받지 않곤 했었다.

‘이번엔 빨리 받네.’

“어제 어디 갔냐?”

태윤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마치 추궁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과거의 은채는 그의 기분이 조금이라도 나빠졌다면 항상 달래주려고 애썼다, 그러나 지금의 은채는 예전과 달랐다.

은채는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난 이미 이혼 서류에 서명했어. 확인하고 문제없으면 서명해.”

“고은채, 장난 그만치고 배고프니까 얼른 돌아와서 아침이나 준비해.”

어제 은채가 카드를 엄청나게 긁었기에, 태윤은 그녀가 그저 화를 내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은채가 자신을 매우 사랑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혼 서류따위 신경 쓰지도 않았고, 하루 저녁쯤이면 화가 풀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은채는 차분하게 말했다.

“이혼하자고, 내 말 못 들었어?”

“고은채, 진심이야?”

은채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가 말을 이어갔다.

“고은채, 넌 졸업하자마자 나랑 결혼했어. 일 해본 적 없으면서 나랑 이혼하고 나서 어떻게 살 생각이야?”

“너랑 상관없어. 양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내가 쓴 이혼 서류에 빨리 서명해. 더는 연락하지 않을 게. 재산은 반으로 나누자. 내가 너한테 7년 동안 쓴 시간을 고려하면 그만큼은 해줘야지. 안 그래?”

은채는 침대에 앉아 주위를 둘러봤다. YSL 블랙 골드 하이힐은 어지럽게 던져져 있었고, 샤넬 화이트 비즈 장식의 백은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바버리 코트는 문 앞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은채는 현재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 그리고 곧 영지가 남긴 메모지를 봤다.

“은태야, 술이 약하면 적당히 마셨어야지. 네가 옷에 토해버려서 옷은 벗겨줬으니 아침에 일어나면 꼭 세척해 둬!”

“고은채, 후회하지 마!”

태윤이 분노를 터뜨렸다.

뚝-

전화는 바로 끊어졌다.

은채는 한쪽 눈썹을 찡긋거리며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자신의 주소를 태윤에게 보내며 말했다.

[재산 분할은 이미 이혼 서류에 다 써 놨으니까, 확인하고 이의 없으면 서명하고 나한테 보내.]

태윤은 주방 앞에 서 있었다. 배가 고팠지만, 그는 요리를 할 줄 몰랐다.

매일 아침 7시에 반드시 아침을 먹어야 했기에, 예전에는 이 시간에 은채가 아침을 준비해줬다.

따르릉-

핸드폰이 울렸다.

확인해보자 은채가 보낸 메시지였다. 메시지를 읽은 태윤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끝까지 해보자는 거지?’

태윤은 은채가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정말로 이혼을 하려는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은채는 이미 세아를 알고 있었지만 계속 모르는 척했었다. 그저 태윤을 놓치기 싫었던 것뿐이었다.

만약 은채가 진심으로 이혼을 원했다면, 이미 오래전에 이혼했을 것이다.

‘고은채는 그냥 화가 나서 이러는 것뿐이야.’

태윤은 화가 나서 책상 위의 이혼 서류에 서명한 뒤, 퀵 서비스에 연락해 이혼 서류를 보내기로 했다.

은채는 눈을 비비며 정신을 차리려고 했다. 어제 술을 꽤 많이 마셨던 것인지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은채는 일어나서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샤워 후, 수건을 두르고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머리카락을 쳐다봤다.

어제 쇼핑을 갔을 때, 영지를 따라 전신 스파를 하고 손톱 관리도 받았다. 갑자기 생각난 김에, 머리를 짧게 자르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은채의 머리카락은 타고난 갈색이었고, 아무런 스타일링을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매끄러웠다. 끝부분이 살짝 안으로 말려 있었고, 그대로 풀어놓으면 아주 청순해 보였다.

태윤은 은채가 침대에 누워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린 모습을 가장 좋아했다.

그는 늘 이렇게 말했다.

“네가 머리 풀고 누워 있는 모습을 보면 정말 못 참겠어...”

두 사람이 서로 온기를 나눈 후, 은채의 머리카락이 얼굴과 목에 달라붙어 매우 유혹적이었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이 은채의 순수함을 강조한다면, 짧은 머리는 그 자체로 독특한 매력을 보여주었고 특히 그녀의 턱선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은채가 머리를 귀 뒤로 넘기자 작은 얼굴 턱선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새로 한 헤어스타일이 마음에 들었다.

똑똑-

누군가가 은채의 방 문을 두드렸다. 은채는 샤워 가운을 걸친 채로 일어나 문을 열러 갔다.

문 앞에는 퀵 서비스 기사가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고은채 씨 맞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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