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채는 서둘러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하준석 교수님의 제자입니다.” 핸드폰 너머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지금은 시간이 없습니다.] 은채는 조심스럽게 답했다. “저는 언제든 괜찮습니다, 변호사님께서 시간을 정해주시면 찾아뵙겠습니다.” [그럼 6시 이후에 만납시다. 어디에서 만나실 건가요?]“제가 변호사님께서 편한 곳으로 찾아가겠습니다.” [6시 후, JD로펌으로 오세요.] “알겠습니다.” 뚝- 전화가 끊겼다. 은채는 눈을 깜빡이며 생각했다. ‘정말 차가운 사람이네.’현재 아침이었기에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있었다.은채는 영지에게 전화를 걸어 그녀가 시간을 낼 수 있는지 물었다. 돈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영지는 오늘 바빠서 만나기 어려웠기에 다음으로 미루어야 했다. 은채는 계속 호텔에 있는 것이 불편했고, 집은 3개월 동안 리모델링이 될 예정이었기에 그동안 잠시 지낼 곳이 필요했다. 그래서 작은 원룸을 구하기로 했다. 그리고 집 리모델링이 끝나면 이사할 계획이었다. 인터넷에서 찾아보았지만 하루 종일 돌아다녀도 마음에 드는 곳을 찾지 못했다. 오후 5시 반. 은채는 약속 시간보다 일찍 JD법률사무소에 도착했다. 이곳은 J시의 번화가에 위치한 JD로펌의 본사였다. 건물은 하늘을 찌를 듯이 우뚝 솟아 있었고, 위압적인 기세를 자랑했다. 은채는 6시가 지나자 걸음을 옮겨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8대 로펌 중 하나라 그런지 접수 대기실은 넓고 환하게 빛나며, 수십 명은 충분히 대기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은채는 프런트 데스크로 다가가서 물었다. “안녕하세요, 기 변호사님을 만나러 왔어요.” 프런트 데스크 직원이 물었다. “예약하셨나요?” “네.” 은채가 대답했다. “그럼 따라오세요.” 직원이 은채를 데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 층 위로 올라가 사무실 구역을 지나쳤다. 두 사람은 사무실 문 앞에 도착했고 직원이 문을 두드렸다. 똑똑-
은채는 말을 마친 후, 태윤과 어깨를 스치듯 지나쳐 걸어갔다. 그녀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자 태윤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동안 두 사람이 싸운 뒤에는 언제나 은채가 먼저 다가와 사과를 했기에, 태윤이가 이런 상황에서 사과를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비록 은채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그는 자신의 마음을 드러낼 수 없었다. 마음이 복잡하고 불편했기에 결국 친구들에게 연락해 술을 마시기로 했다. 룸 안은 묘하게 고요했고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최근 세아가 감옥에 갇힌 소식이 떠들썩하게 퍼졌다. 모두 그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었고, 세아가 은채를 함정에 빠뜨린 것이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은채가 불법 물품을 가지고 있었다고 오해했다. 세아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깊은 계략을 꾸며왔고, 세 달의 시간 동안 은채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 치밀한 계획을 세운 것이다. 바로 옆에 앉아 있지만, 마음속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으니 정말 무서운 여자였다. 어쩌면 다른 사람들을 속일 계획조차 세웠을 수도 있다. 세아의 행동은 룸에 앉은 남자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었다. 미소 뒤에 칼을 품고 있다는 말을 몸소 체험한 것이다. 주한결이 먼저 침묵을 깨뜨렸다. “태윤아, 너 은채 씨랑 이혼했어?” 그의 목소리는 낮았고 감정이 억눌린 듯했다. 태윤은 소파에 기대어 앉으며 자신감 있게 대답했다. “고은채는 그냥 투정을 부리고 있을 뿐이야.” 한결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내 생각엔 진짜 결심하고 떠나려는 것 같은데?”모두의 시선이 태윤에게 집중되었다. 은채는 세아의 일로 큰 고통을 받았기에, 아마 그로 인해 태윤에 대해 실망했을 수도 있다. 만약 은채가 법정에서 증거를 밝히지 않았다면, 지금쯤 그녀는 죄수복을 입고 고문을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태윤은 다시 은채를 떠올렸다.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긴 머리를 자르고, 의도적으로 태윤을 화나게 만든 것이었다.
은채는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말문이 막혔다. 결국 은채는 늦게까지 책을 읽다가 책상에 엎드린 채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온몸이 뻐근했다. 영지는 술이 깬 뒤 손에 든 카드를 흔들어 보이며 웃었다. “고마워.” 이에 은채는 미소를 지었다. 영지가 떠난 뒤, 은채는 준비를 마친 뒤 출근을 했다. 로펌에 도착하자, 유현은 그녀를 자신의 사무실로 불러 의뢰인을 만나는 자리에 함께 나가자고 했다. 은채는 순순히 대답했다. “제가 준비해야 할 게 있나요?” “듣기만 하면 돼요.” 유현은 외투를 입으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 “알겠습니다.” 은채는 그의 걸음을 따라잡기 위해 종종걸음으로 달려갔다. 그의 다리가 너무 길었기에 따라잡기가 힘들었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 유현은 운전석에 앉았고 은채는 뒷자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차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달렸다. 그들은 한적한 동네의 작은 음식점에서 의뢰인을 만났다. 은채는 유현처럼 유명한 변호사가 왜 이런 외진 곳에 오게 된 건지 의아했지만, 곧 그의 말을 듣고 알게 되었다.“고 변호사님께서 이 사건을 맡으시죠.” 은채는 그제야 깨달았다. 유현은 그녀에게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었던 것이다. 은채는 떨리는 눈동자로 유현을 쳐다보았다. 그는 차가운 인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은채에게는 꽤 잘해주었다. 아마도 하준석의 영향이 큰 듯했다. 은채는 가방에서 녹음펜을 꺼냈다. 이번이 아마 처음으로 의뢰인의 진술을 직접 듣는 기회일 것이다. 은채는 매우 진지하게 들었다. 의뢰인은 젊은 남성으로, 자신의 일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이 마을은 재개발이 될 예정인데, 보상금은 인원 수에 따라 결정되기에 그는 더 많은 돈을 받기 위해 돈을 들여 이름 모를 여자와 가짜 결혼을 했었다. 그런데 현재 보상 기관에서 그를 사기죄로 고발했고, 함께 가짜 결혼을 한 여자도 구속되었다. 그래서 매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한결이 마침 그 장면을 목격한 것이다. 그의 시각에서 보면, 유현과 은채는 매우 친밀한 동작을 보이고 있었다. 한결은 미간을 찌푸리며 더 이상 식사할 기분이 없었다. 은채는 팔을 빼냈다. 유현은 손이 공중에 멈추자 아무렇지 않게 손을 다시 내렸다. 식당에 들어간 후, 1층에는 자리가 없었기에 은채와 유현은 2층 창가 자리에 앉았다. “혹시 가리는 음식이 있나요?” 은채가 물었다. 유현은 짧고 차가운 목소리로 답했다. “없습니다.” “맛은 담백한 게 좋나요, 아니면 매운 거나 달콤한 거...” “담백한 것.” 유현은 매우 간결하고 다소 차가운 방식으로 대답했다. 은채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가 이렇게 차가운 성격이라면, 그의 아내나 여자친구는 어떤 기분일까?‘서 변호사님 같은 사람과 같이 살면 분명 엄청 지루하겠지?’ 은채는 자신이 좋아하는 담백한 요리를 몇 가지 주문했다. 이 집의 탕수육은 맛있지만, 다소 달콤한 맛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은채는 탕수육을 하나 주문했다. 또한, 감자탕을 하나 더 주문했다. 음식이 나올 때까지 두 사람은 말없이 앉아 있었다. 분위기는 꽤 어색했다. 은채는 일부러 대화를 시도했다. “혹시, 하준석 교수님과 잘 아는 사이에요?” 유현은 짧게 대답했다. “네.” 은채는 잠시 놀랐다. 하준석에게서 유현에 대해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서 변호사님은 이미 결혼하셨죠?” 은채는 묻고 나서 바로 후회했다. 좀 사적인 질문이기 때문이다. 어색한 분위기를 풀려고 했는데, 오히려 더 어색해졌다. 은채는 머리를 긁적였다. “왜 제가 결혼했을 거라고 생각하나요?” 유현은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흥미로운 듯 물었다. 은채는 조심스럽게 그를 쳐다봤다. “그 결혼할 나이신 것 같아서요.” 유현의 눈썹을 찡긋거렸다. “제가 나이가 들어 보이나요?” “아니요, 아니에요.” 은채는 급히 해명했다. “서 변호사님은 아직 젊지만, 보통 남자들이
은채는 핸드폰을 꺼내 받았다. “여보세요.” [나야.]“주한결?” 은채는 한결이 자신에게 연락을 할 줄은 예상하지 못한 듯 조금 놀랐다. “무슨 일이야?” 한결은 길가에 서서 은채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말했다. [내일 내 생일인데, 올 거야?] 은채가 고개를 돌리면, 바로 뒤에 있는 한결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은채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간다면, 분명 서태윤을 만나게 될 것이다.그러나 은채는 한결과 매우 친한 사이였다.은채, 태윤과 한결은 모두 같은 학교를 다녔었고, 사실 은채는 한결과 더 오랜 시간을 알고 지냈다. “그래.” 결국 은채는 동의했다. [그럼, 늘 만나던 곳에서 만나.] 한결이 말했다. “응.” ...퇴근 후, 은채는 선물을 고르고 정성스럽게 포장한 뒤 택시를 타고 매번 친구들이 생일마다 가던 춘화원으로 갔다. 방 문 앞에 도착하고 문을 열려던 순간, 안에서 여자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소이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윤아, 너 형수님과의 결혼 3주년 날에 세아와 몸을 섞었던 거지? 그날 형수님이 취했을 때, 세아랑 함께 지하 주차장...” “하하, 나도 기억나. 세아는 제대로 서지 못할 정도로 다리를 떨었는데. 형수님이 하도 취해 있어서 알아차리지 못했던 거지. 참, 세아는 그날 처음이었던 거야?”임경수가 궁금해하며 물었다. 은채는 세게 주먹을 쥐었다. 그녀는 태윤이 바람 핀 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듣게 되자 정말 역겨울 뿐이었다. 그녀는 서태윤이 자기 눈앞에서 이렇게 추악한 일을 했을 줄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태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기에, 당연히 사실을 인정한 것이었다.7년, 7년 동안 쌓아온 감정이 한순간에 헛된 것처럼 느껴졌다. 7년간의 사랑과 헌신은 개에게 밥을 주는 것만도 못했다. 개에게 7년간 밥을 주면 적어도 주인을 알아보며 꼬리를 흔들겠지만 서태윤은? 은채는 가슴이 아팠다. 그건 서태윤이 신경 쓰여서가 아니라 자신의 눈이 멀었던 것에
은채는 망설임 없이 떠났다. 태윤은 갑자기 한결의 배를 세게 걷어찼다. “왜 날 막은 거야?”쨍그랑! 한결은 뒤로 비틀거리면서 넘어졌고, 테이블을 붙잡으며 주위의 그릇과 술잔들을 깨뜨렸다. 경수와 이훈은 급히 나서서 태윤을 말렸다. “태윤아, 한결이도 너를 생각해서 그런 거야. 둘 다 화가 나 있는 상태에서 싸우면 결국 모두 상처받게 될 거야.” 한결은 서둘러 일어나 옷매무새를 바로잡았다. “너희 둘 다 놔둬. 날 때리고 싶다면 어디 한번 때려봐.” 태윤은 비웃으며 말했다. “하하. 정말 고은채를 좋아하나 보네.” 한결은 은채가 다른 남자와 함께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보고,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을 숨길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미 한 번 기회를 놓쳤으니 이번에는 더 이상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한결이가 일부러 은채를 초대한 이유는 바로 태윤과 결판을 내기 위해서였다. “그래, 나는 은채를 오래전부터 좋아했어. 너보다 훨씬 더 오래전에 좋아했었지.” 한결은 마음속에 숨겨놓았던 비밀을 털어놓았다. 마치 오랜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었다. 경수와 이훈은 충격을 받은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이게 무슨 상황인 거지?’태윤도 잠시 놀랐다. 한결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하게 됐어. 그때는 너무 겁이 나서 고백도 못 했고, 나중에 용기를 내려고 했을 때, 은채는 이미 너랑 사귀고 있었어. 나는 너희 둘이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것 같아서 마음을 접었어. 너희가 결혼할 때도 진심으로 축복했었어. 나는 친구로서 그 정도면 충분히 잘한 거라고 생각했어.” 태윤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한결은 비웃으며 말했다. “은채는 너랑 결혼한 뒤, 너를 위해 자신의 사업을 포기하고 온전히 네 삶을 돌보며, 네 일을 지원해 주었어. 반면 넌 성공하고 나니까 다른 여자랑 만나기 시작했잖아?” 태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는 경수와 이훈을
이에 한결도 물러서지 않았다. 두 남자는 서로의 목을 움켜잡고 있었다. 한결은 힘겹게 소리쳤다. “서태윤, 그거 알아? 네가 오세아와 썸 타기 시작한 그날부터, 나는 네가 불장난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 나는 그저 은채가 너를 사랑하는 마음이 조금씩 사라지는 걸 지켜보고 있었어. 처음부터 나는 은채가 불법 물품에 손을 대리라고는 믿지 않았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네가 정말로 은채가 아니라 오세아를 믿을 정도로 어리석은지 보고 싶었어. 결과적으로, 너는 정말 어리석게도 오세아를 믿었지.”“나는 네가 은채를 감옥에 보낸 후, 은채가 너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접게 되면 직접 구해줄 생각이었어. 하지만 너랑 내가 모두 은채를 과소평가한 거지. 은채가 법정에서 반격을 시작한 순간부터, 네게 마음을 완전히 닫은 거야. 네가 은채의 사랑을 조금씩 짓밟아 버린 거야...” “X발, 네가 은채를 몰래 좋아했으니 네가 세아에 대해 모두 말해준 거 아니야?” “정신 좀 차려!”한결이 화를 내며 외쳤다. “난 네가 생각하는 만큼 비열하지 않아. 은채가 눈이 멀지 않은 이상, 너와 오세아가 바람핀 걸 몰랐을 리가 없잖아! 내가 너더러 오세아랑 만나라고 강요한 거야? 네가 스스로 그 여자와 몸을 섞었던 거잖아!”한결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좋아, 내가 강요했다고 치자. 그럼 내가 네 것을 강제로 오세아한테 밀어넣기까지 했겠어? 모두 네가 혼자서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벌인 짓이잖아!”태윤의 이마에 핏줄이 부풀어 오르며 마치 터질 듯한 모습이었다. 그는 이성을 완전히 잃은 듯 한결을 죽여버리려 했다. 경수는 상황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다. 그는 이를 꽉 깨물고 술병을 들어 태윤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태윤은 곧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경수는 한결을 향해 소리쳤다. “너 왜 이렇게 서태윤을 자극한 거야! 정말 죽기라도 할 생각이야?” “이훈아, 얼른 와서 도와줘!” 경수가 급히 외쳤다. “그, 그래!” 이훈은 그제
영지는 슬쩍 다가가 태윤의 상태를 확인했다. 의사에게 물어보니 다행히 외상이어서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고 했다. 영지는 매우 실망스러운 듯 혀를 찼다.“아쉽네.”그리고 은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가 봤는데 죽진 않았어.]은채는 메시지를 보고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핸드폰을 내려놓고 마지막 술잔을 비운 후, 계산을 하고 바를 나섰다.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에 어지러워 비틀거렸다. 바 안에서 두 명의 젊은 남자가 은채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예쁜 데다가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는 은채를 보자 그들은 앙심을 품었다. 은채가 바를 나선 뒤, 그들은 은채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은채는 길가에 서서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9시가 좀 넘은 시간이었다. 길거리의 가로등 아래서 그녀는 둥글게 퍼져 나가는 빛에 휩싸였다. 그녀의 그림자는 길게 늘어져 있었다.아직 시간이 이른 편이었지만, 은채가 서 있는 곳은 바 뒤편의 골목이라 매우 한적했다. 마침 택시도 쉽게 다니지 않는 곳이었다. 은채는 어쩌면 스스로 집에 돌아가기 힘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영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영지야, 나 좀 취했어, 와서 나 좀 데려가...” 은채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그녀의 입을 막았다.“은채야? 은채야!” 영지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급히 은채의 이름을 불렀다. 은채는 눈을 크게 뜨며 당황했다. 그 순간, 그녀는 유현의 말이 떠올랐다. 유현은 그녀에게 언제나 침착하라고 했었다. ‘그래, 당황하면 안 돼. 당황할수록 일이 더 뒤틀릴 거야.’‘법정에서도, 위험에 처했을 때도...’ 은채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빠르게 생각했다. 그녀는 뒤에서 접근한 남자의 발을 밟았다. 남자가 고통스러워하며 손을 놓자 은채는 팔꿈치로 힘껏 밀쳐서 남자를 완전히 떼어놓고 재빨리 거리로 달려갔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면 안전할 수 있을 것이다. “젠장.”은채의 입을 막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