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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안영빈은 은퇴할 나이에 이르렀고, 태윤의 이름이 널리 퍼지면서 그 역시 덩달아 많은 이익을 얻었다.

“하 교수님께는 정말 미안하다는 말 밖에 드릴 게 없네.”

은채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그 당시 하준석은 은채를 엄청 아껴주고 가르쳐주는 데 애썼다.

그의 친손녀인 영지보다도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은채는 그 사랑에 보답을 해주지 못할 망정, 하준석을 창피한 방식으로 은퇴하게 만들었다.

모두 은채가 사랑에 눈이 멀어 내린 섣부른 판단이었다.

그로 인해 하준석은 얼굴조차 들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옛날 일들이 떠오르자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아이고, 자책하지 마. 우리 집 고집 센 노인네랑 안 교수님은 평생 라이벌이었잖아. 그 두 사람은 타고난 천적이야. 이미 오래 지난 일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은채가 눈물을 흘리자 영지는 당황하며 말했다.

영지는 서둘러 분위기를 전환하려 했다.

“내가 너보다는 훨씬 노인네 속을 썩였거든. 안 그래도 날 후계자로 키우려고 했는데, 내가 금융 쪽으로 가버리는 바람에 3일 내내 밥을 안 먹은 적도 있다니까!”

영지는 어릴 때부터 하준석에게 교육을 받았지만, 그녀는 법학이 적성에 맞지 않았다. 결국 억지로 로스쿨에 들어갔지만, 졸업 후 변호사로 일하지 않았고 몰래 금융을 공부해 금융 업계로 진출했다.

결국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가장 중요하다. 영지는 처음부터 법학에 관심이 없었기에, 아무리 강요해도 소용이 없었다.

“하 교수님은 지금 어떻게 지내셔?”

은채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잘 지내셔. 은퇴 후에는 꽃도 키우고 새도 키우며 즐겁게 지내고 계셔. 동네에 어르신들이 많이 모이셔서 함께 춤도 추시거든. 내가 할아버지한테 춤 배워보라고 했더니 눈을 흘기시면서 나보고 미쳤다고 하시더라. 하여간 고집이 너무 세서 문제야...”

영지는 잠시 침묵을 지킨 후 말했다.

“내일 가서 뵈러 갈 건데, 나랑 같이 갈래?”

은채는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하준석이 정직 교수 승진 기회를 잃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일자리라도 구하고 나서 뵈러 갈게.”

은채는 손끝을 보며 말했다.

먼저 성과를 따내야만, 하준석에게 제대로 된 보답을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때가 되어야 하준석을 뵐 자격이 있을 것 같았다.

영지는 더 이상 은채를 설득하지 않았다. 은채에게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영지는 은채의 손을 힐끔 보더니 입을 오므렸다.

“네 손이 정말 예뻤었는데.”

영지는 어렸을 때 은채의 손을 정말 부러워했다. 은채의 손은 가늘고 부드러웠고, 피부는 하얗고 부드러웠다. 정말 얼굴도 예쁘고 손도 예뻤다.

은채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태윤은 결벽증이 있어서 은채는 늘 직접 집을 완벽하게 청소해야 했다.

태윤이가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면 은채는 마사지 기술을 배워 태윤에게 마사지를 해주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의 손은 점차 거칠어졌다. 예전처럼 가늘고 부드럽지 않았다.

“정말 한심한 놈. 네가 자기 때문에 외국 연수 기회까지 포기하고 보살펴줬는데 감히 바람을 펴? 차라리 차에 치여 확 뒤져버렸으면 좋겠네.”

영지는 화가 나서 욕을 했다.

이에 은채는 그저 미소를 지었다.

“참.”

영지는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신호등 앞에서 가방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은채에게 건넸다.

“뭐야?”

은채는 호기심에 물었다.

“너 직장 찾고 있다고 했잖아?”

영지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로펌 하나 소개해 줄게.”

은채는 명함을 받아 들고 살펴보았다. 깨끗한 하얀 명함 위에 적힌 이름은 기유현이었다.

“기유현?”

영지는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은채는 더 이상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졸업 후 가정주부로 지냈지만, 법조계에서 기유현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유현은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아직도 그가 어떤 배경을 가졌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문철은 법조계의 ‘저승사자’라 불리며,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변호사’라는 별명을 가졌다. 그의 교묘한 논리는 판사조차도 기겁하게 만들 정도였다.

대부분 판사들은 그가 맡은 사건에 출석하는 것을 꺼리기도 했다.

유현은 항상 사람들이 질 거라 생각하는 사건에서 극적인 반전을 일으켰고, 한 번도 진 적이 없다는 전설을 갖고 있었다.

사실 은채는 영지가 유현의 연락처를 구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어쨌든 영지는 금융에 관한 일을 하고 있었으니까.

영지는 은채의 의아한 표정을 보고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내가 아무리 못나도, 우리 집은 법조계 집안이야. 할아버지는 로스쿨 교수님이고, 아버지는 판사잖아. 나만 조금 뒤떨어지긴 했지만 내가 가진 인맥은 엄청나거든. 그러니 나만 믿어.”

은채는 그 말을 들으면서 뭔가를 눈치챘다. 그리고 손끝으로 명함을 꽉 쥐며 생각했다.

“아, 알겠어. 솔직히 말할게. 내가 할아버지한테 네가 이혼한다는 걸 말했거든.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도와준 거야. 네가 성적을 따내기 전까진 절대 찾아오지 말라고 하셨어.”

영지는 한 번에 쏟아내듯 말했다. 역시나, 영지는 거짓말을 잘 못했다.

은채는 분명 하준석이 도와준 것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안 그러면, 4년 넘게 가정주부로 일한 데다가 경험조차 없는 그녀가 이렇게 대단한 변호사와 함께 일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정말 고마워.”

은채가 말했다.

“나한테만 고마운 거야?”

영지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하 교수님의 체면을 되찾아줄만한 훌륭한 변호사가 되면 직접 사죄하러 찾아갈게.”

은채가 굳건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래, 그날이 오길 기다리고 있을게.”

영지가 미소 지었다.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며 파출소에 도착했다.

영지가 물었다.

“같이 들어가 줄까?”

“괜찮아. 그냥 서명만 하고 차를 가져오면 돼. 먼저 가봐.”

은채는 차에서 내렸다.

“응.”

영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가.”

은채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영지가 떠난 뒤, 은채는 파출소에 들어가 서명하고 차량을 되찾았다.

그 후 은채는 한 작은 인테리어 회사를 찾았다. 그녀는 작은 아파트를 선택했지만, 그 집 안은 태윤과 함께 살았던 모습 그대로였기에, 전면적으로 집을 리모델링할 계획이었다.

호텔에서 계속 사는 건 좋은 해결책이 아니었으니까.

그녀는 집 안에 있던 태윤의 흔적을 모두 지워버릴 생각이었기에, 예전에 사용했던 가구들을 모두 중고 시장에 팔았고, 태윤이 자주 쓰지 않던 물건들은 모두 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물건들도 함께 처리했다.

인테리어 디자이너와 계획을 확정하고, 자재를 정하고 계약서를 작성하며 계약금을 지급했다.

집 열쇠를 넘기고, 나머지 일은 그들에게 맡기기로 했다.

인테리어 회사에서 나온 후, 은채는 은행으로 갔다.

그녀는 현금 80억과 40억의 펀드를 나눠 가졌는데, 펀드는 그대로 두기로 했다. 현금 중 40억은 정기 예금에 넣었는데, 이율이 꽤 높았다.

그리고 나머지 40억은 남겨두었다.

영지는 금융 쪽에서 일하고 있어서 실적을 올려야 했기에, 은채는 영지에게 40억을 투자해 리스크를 분담하면서, 영지의 실적을 올리는데 도움을 주기로 했다.

모든 계획이 마무리된 후, 은채는 호텔로 돌아가 푹 쉬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난 은채는 침대 옆에 앉아 명함에 적힌 번호를 보며 몇 분간 망설이더니 결국 번호를 눌렀다.

몇 초 후, 전화가 연결되었다.

상대방은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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