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에게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생기는 이질감에 강주환은 돌연 동작을 멈췄다. 어쩐지 여자의 냄새가 어제와 달리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급기야 흥분이 가시고 그는 눈을 번쩍 떴다.강주환은 키스를 기대하는 듯한 모습의 안효주를 발견하고 미간을 구겼다. 뒤이어 그녀의 몸에 난 흔적을 보고는 머리가 핑 도는 것 같기도 했다.‘어떻게 이럴 수가...’어젯밤 강주환은 평소와 다름없이 술을 마셨다. 비록 취하기는 했지만, 그의 품에 부딪힌 여자가 윤성아라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아무리 안효주와 똑같게 생겼다고 해도 냄새가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다.강주환의 마음을 흔들 수 있는 것은 4년 전과 똑같은 윤성아의 향기뿐이었다. 그러니 어젯밤에 만난 사람도 틀림없이 윤성아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왜 역겨운 체취를 풍기는 여자가 품 안에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너 뭐야?”강주환은 안효주를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무섭도록 차가운 표정으로 물었다.“성아는?”“...”안효주는 잠깐 침묵하더니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성아라니요? 주환 씨, 저희 어제부터 계속 같이 있었잖아요. 어젯밤에는 얼마나 열정적이던지...”안효주는 수줍은 표정으로 말했다. 마치 어제 진짜로 강주환과 하룻밤 보낸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곳곳에 난 흔적을 자연스럽게 드러냈다.“이것 봐요!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마 기억 못 하는 거예요?”안효주의 서운하다는 표정을 보고 강주환은 미간을 구겼다. 그리고 단호하게 대답했다.“절대 너일 리가 없어.”안효주는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다. 그저 여전히 불쌍한 표정으로 어젯밤의 상황을 거짓으로 설명했다.“저 어제는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술 마시러 왔거든요. 근데 주량이 약한 탓에 몇 잔 마시고 금방 취해 버렸어요. 그리고 화장실 가는 길에 주환 씨랑 마주치고 이곳에 오게 된 거예요.”안효주의 설명은 흠잡을 데가 없었다. 하지만 강주환은 여전히 어젯밤 만났던 사람이
“판이라니요! 먼저 사람을 착각한 건 주환 씨에요. 저는 그냥 주환 씨가 너무 좋아서...”“허!”강주환은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역겹다는 듯이 싸늘하게 말했다.“기자들은 어떻게 된 거야? 혹시 이것도 네 짓인가? 하는 말을 듣자 하니 너와 만나달라고 협박이라도 할 생각인가 보네?”“아니에요.”안효주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머리를 저으며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진짜 모르는 일이에요. 어젯밤 그대로 기절해 버리고 지금까지 잤다고요. 주환 씨도 봤잖아요, 네가 언제 일어났는지. 기자를 부를 시간은 없었어요. 올 줄 알았더라면 옷이라도 입고 있었겠죠.”첫 번째 의혹에 관해 설명하고 난 안효주는 또 두 번째 의혹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그리고 저희가 사귄다는 말도 어쩔 수 없이 한 거예요. 기사들의 표정 못 봤어요? 혹시 저희가 아무 말도 안 하면 어떤 식으로 기사를 낼지 모른다고요. 저희는 호진 그룹과 한연 그룹을 대표하고 있는데 나쁜 기사 때문에 주가라도 영향받으면 어떡해요.”말을 마친 안효주는 조심스럽게 강주환의 옷깃을 잡았다. 그리고 이 이상의 스킨십은 하지 않고 세상 불쌍한 표정으로 말했다.“주환 씨, 그냥 저랑 결혼해 주면 안 돼요? 저희 나름 잘 어울리잖아요. 저는 한연 그룹의 유일한 딸이에요. 어차피 저희는 정략결혼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인데 생판 모르는 남과 결혼할 바에는 차라리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게 좋잖아요, 안 그래요?”강주환이 아무 말도 없자 안효주는 또다시 어젯밤을 들먹이며 눈물을 머금은 채 말했다.“저는 믿어요. 만약 주환 씨가 저한테 마음이 없었다면 애초에 건드리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말이에요. 저는 주환 씨를 사랑해요. 주환 씨가 저를 누군가의 대역으로 생각한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결혼만 할 수 있다면요. 주환 씨 집안에서도 저를 마음에 들어 할 거예요.”강주환은 미간을 찌푸린 채 침묵에 잠겼다. 비록 화가 나기는 하지만 안효주의 말이 틀리지도 않았다.기사가 퍼지면 주가가 영향받는 것도, 강주환이 고은희의
강주환은 미간을 찌푸렸다.‘이게 우연일 수도 있나?’하필이면 술집 CCTV가 고장 났을 때, 하필이면 기자들은 거짓 제보를 받았고, 또 하필이면 그의 룸에 들어왔다는 것이 과연 우연일지 강주환은 의심이 들었다. 더구나 윤성아가 되기 위해 그를 속인 적 있는 안효주와 함께 있을 때 말이다.이때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화면에 ‘어머니’라고 뜬 것을 보고 강주환은 바로 수락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주환아, 이게 무슨 일이니? 너와 만나던 윤 비서가 한연 그룹 둘째라는 기사가 사실이야?”“같은 사람 아니에요.”“누가 봐도 같은 사람이던데 아니라니, 내가 윤 비서 얼굴도 모를 것 같아?”“닮기는 했지만 진짜 아니에요. 기사에 나온 사람은 운성 안씨 가문 사람이에요.”강주환의 설명에도 고은희는 여전히 미심쩍은 듯 물었다.“그래?”“네, 확인도 해보지 않고 한연 그룹을 들먹일 기자가 어디 있겠어요.”이제는 고은희도 설득된 듯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 확인차 마지막으로 물었다.“진짜 윤 비서가 아니라는 거지?”“네.”“다행이네.”고은희는 이제야 시름 놓고 이어서 말했다.“비록 나는 윤 비서의 생김새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세상에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니. 이제는 그냥 받아들이련다. 한연 그룹의 둘째라면 말도 또박또박 잘하는 것이 네 짝으로도 괜찮을 것 같구나. 운성 안씨 가문, 나쁘지 않아.”혼잣말이라도 하는 듯 주절주절 말하던 고은희는 돌연 강주환에게 말했다.“이런 기사가 난 김에 그냥 약혼해.”“싫어요.”“왜? 너 윤 비서의 얼굴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니? 윤 비서가 죽은 마당에 똑같이 생긴 데다가 집안까지 좋은 여자랑 결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운성시.안효주가 남자의 외투를 걸치고 취재하는 영상을 본 안진강은 화부터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금세 진정하고 생각을 바꿨다. 안효주가 전에 만났던 남자들에 비해 강주환은 아주 훌륭한 사윗감이었기 때문이다.안진강은 안효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혼내는 것이
안효주는 운성 안씨 가문의 둘째 딸이다. 그러니 그녀가 윤정월의 친딸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없었다.강주환은 일단 안효주가 안진강과 윤정월 사이의 혼외자식이라고 추측했다. 만약 아니라면 일이 아주 복잡해질 것이다.강주환은 안진강의 표정을 빤히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안효주 씨가 안진강 대표님과 서연우 여사님의 딸이 맞냐는 뜻이에요.”“하, 효주가 우리 딸이 아니면 누구 딸이라는 거예요?!”강주환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러고는 차가운 눈빛으로 안진강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래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강주환이 몸을 돌려 떠난 다음에도 안진강은 한참이나 제자리에 서 있었다. 강주환의 질문이 어떤 뜻인지, 또 어떤 의도를 품고 있는지 전부 다 의문이었다.‘효주가 내 친딸이 아닐 리가 있나... 잠깐!’안진강은 문득 안효주가 유난히 부모와 닮지 않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는 물론이고 어머니인 서연우와도 전혀 닮지 않았으니 말이다.“쌍둥이가 어떻게 하나도 안 닮았죠?”“옛날 같으면 병원에서 아이가 바뀐 줄 알겠어요. 딸 둘이 달라도 너무 다르네요.”주변 사람들이 했던 말이 하나 둘씩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최근 몇 년 동안 안진강은 사업에 매진하느라 자식 교육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4년 전 첫째 딸 안효연이 죽고 나서 둘째 딸 안효주가 언니와 똑같은 얼굴로 성형했을 뿐만 아니라 행동과 말투도 따라 하는 것을 보고서도 개의치 않았다.안효연은 안효주보다 훨씬 예뻤을 뿐만 아니라, 성격 또한 어른들의 기대에 부합되었다. 그래서 그는 안효주가 안효연을 따라 하는 것이 나름 좋게 발전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서연우도 안효주의 변화에 기뻐했으니 말이다.하지만 오늘 강주환의 말을 듣고 나니, 그는 처음으로 안효주에게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서연우가 쌍둥이를 임신하고 나서부터 출산할 때까지 그는 언제나 함께 있었다. 심지어 분만실까지 따라 들어갔으니, 임신 과정에 착오가 생겼을 리는 없었다.이때 안진강은 문득 서연우
비즈니스 파티의 기억이 아직 새록새록 했던 안진강은 도무지 강주환의 변덕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안효주와 강주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강주환은 왜 안효주가 껄끄럽다고 했는지 꼬치꼬치 캐물었다.사실대로 대답할 수 없었던 안효주는 그저 눈물만 펑펑 흘릴 뿐이었다.“아빠,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주환 씨가 생각을 바꾸고 책임지겠다고 한 게 중요한 거죠. 언제 시간 될 때 저희 다 같이 만나요. 만나서 얘기하면 또 다를 거예요.”“됐어! 내 면전에 대고 책임질 생각이 없다고 한 녀석을 만나서 뭐 해? 강 대표는 너를 좋아하지 않아. 약혼하고 결혼한다고 해도 가정에 충실할 사람이 아니야. 이런 사위는 없는 게 나아! 우리 집안을 무시해도 유분수지.”안진강의 단호한 태도에 안효주는 더욱 크게 흐느끼며 말했다.“저는 주환 씨가 좋아요! 주환 씨가 아니면 안 된다고요! 처음부터 약혼하지 못했던 데도 다 이유가 있어요. 지금은 잘 해결됐으니 제 행복을 위해서라도 이만 허락해 주시면 안 돼요?”안효주는 안진강의 표정이 약간 풀린 것을 보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계속해서 애원했다.“주환 씨도 약혼을 허락한 이상 무조건 저한테 잘해줄 거예요. 저도 주환 씨랑 함께라면 행복해질 자신이 있어요!”안진강은 아주 고집스러운 사람이다. 그가 강주환에 인상은 변함없었고, 안효주와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도 변함없었다. 그래서 그는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다. 안효주가 아무리 빌고 애원해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안진강이 마음을 굳힌 것을 보고 안효주는 울고불고하며 난리를 쳤다. 그리고 빨갛게 부은 눈으로 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 뱉어 버렸다.“저까지 죽어야 속이 후련하시겠어요? 언니 한 명 죽인 거로 모자랐냐고요! 아빠는 지금 하나 남은 딸을 절벽 끝으로 몰아세우는 것과 다름없어요!”“뭐?!”안효주의 말에 혈압이 오른 안진강은 순간 눈앞이 핑 도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안효주는 여전히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억지를 부렸다.“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주환
말을 마친 장석호는 윤성아에게도 사고 장면의 CCTV를 보여줬다.비 오는 날의 어두운 밤, 양지강은 휘청거리며 도로를 달리다가 빠르게 지나가는 차에 치여 쓰러졌다. 운전석에서는 한 여자가 내려와 그의 상황을 살펴봤다. 그러자 그는 여자의 다리를 잡으며 뭐라 말했지만, 여자는 매몰차게 뿌리치며 돈을 던져주기만 했다.여자가 다시 차에 올라타서 시동을 걸자 양지강은 몸으로라도 막으려고 했다. 그러다가 또다시 차에 치여 아예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여자는 겁먹은 듯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가 그대로 도망갔다.그날은 비가 아주 쏟아지듯 내린 날이었다. CCTV도 뚝뚝 멀어지는 물방울로 인해 희미하기는 했지만 피투성이가 된 채 차를 막으려던 양지강의 모습, 그리고 매몰차게 그를 뿌리치던 여자의 모습은 아주 선명하게 보였다.여자는 애초부터 사고에 책임질 마음이 없어 보였다. 자신의 차에 치여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도 CCTV가 주변에 있는지 없는지부터 확인했으니 말이다.이때 장석호가 여자의 얼굴을 확대했다. 너무 먼 거리에서 찍힌 영상이라 화질이 나쁘기는 했지만 무시할 수 없는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윤성아는 곧 CCTV 속 여자의 얼굴이 자신과 똑같다는 것을 발견했다.‘안효주! 이건 틀림없이 안효주야!’양지강을 죽인 사람이 안효주일 줄은 아무리 윤성아라고 해도 예상치 못했다.“비록 CCTV에 잡힌 얼굴이 희미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저희가 최선을 다해 조사할게요. 다행히 차량 번호판이 제대로 찍혀서...”장석호는 설명을 계속했지만, 윤성아는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눈물은 주체가 되지 않고 줄줄 흘러내렸고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형사님, 이 영상 한 번 더 봐도 될까요?”“그럼요.”장석호는 CCTV를 재생했다.윤성아는 눈을 똑바로 뜨고 양지강이 차에 치이고, 버둥거리며 일어나고, 또다시 차에 치여 쓰러지는 모습을 바라봤다. 비록 소리가 들리지 않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안효주를 그녀로 착각한 듯했다.비 오는 날 밤의 시골길, 사채업자에
놀라움이 가시고 난 장석호는 진지한 표정으로 윤성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만약 범인이 진짜 운성 안씨 가문의 둘째 딸이라면... 고소를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워낙 오래전의 사건이기도 하고 장례식이 끝났기 때문에 증거 자료가 부족해요. 더구나 단순 사고로 종결 난 사건이기도 해서 윤성아 씨한테 아주 불리해요. 안씨 가문의 둘째 딸은 얼마 전 금방 호진 그룹의 대표님과 약혼했어요. 그러니 최고의 변호사로 구성된 법무팀도 있을 거예요. 저는 두 분이 따로 만나 합의를 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싫어요. 돈은 필요 없어요.”윤성아는 단호한 말투로 장석호의 제안을 거절하고는 이어서 말했다.“저는 안효주 씨가 법적 책임을 지기를 원해요. 만약 안효주 씨가 아빠를 병원에 데려다줬더라면 사망까지 이르지 않았을 거니까요. 뺑소니는 명백한 범죄예요!”윤성아는 또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장석호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알겠어요. 윤성아 씨가 고소를 원하니 제가 일단 증거 자료를 정리해 놓을게요.”이틀 후.안효주는 법원의 소환장을 받고 눈을 크게 떴다. 반년 전의 뺑소니 사건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는 심장이 다 벌렁거리기 시작했다.‘말도 안 돼. 반년이나 지난 사건을 도대체 누가 조사하고 있는 거지?’안효주는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바로 운성으로 돌아가 안진강과 만났다.“아빠, 저 어떡해요? 사실 제가 반년 전 사람을 치고 도망간 적 있는데... 법원에서 소환장을 보냈어요. 저는 진짜 일부러 사고를 낸 게 아니에요. 그 사람 누구랑 싸웠는지 모르겠지만 피투성이가 된 채 시커먼 길목에서 갑자기 나왔는데 제가 어떻게 안 놀라요! 처음 사고가 났을 때 이미 돈을 줬는데 계속 막아서던 걸 보면 돈을 노리고 일부러 다가온 게 분명해요.”안효주는 눈물을 흘리면서 뻔뻔하게 말했다.“저는 잘못한 것 없어요. 다 그 사람이 갑자기 끼어들었기 때문이에요.”안진강은 화가 치밀어 올라 목덜미를 잡았다. 어찌 됐든 안효주가 사람일 치어 죽은 건 사
안효주는 약속과 달리 오만한 자세로 대충 사과했다.“그날 제 차에 치인 사람이 성아 씨 아버지인 줄 몰랐어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달려들어서 제 차를 막아서는데, 범죄자와 만난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아무튼 사고를 낸 건 사실이니까 일단 사과할게요.”윤성아는 차가운 눈빛으로 뻔뻔한 표정의 안효주를 바라봤다.“그것도 사과라고 하는 거예요? 교육이라는 것을 받아본 적 있는 정상인이라면 이게 범죄 행위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만약 안효주 씨가 도망가지 않았더라면 제 아버지는 살 수 있었어요.”윤성아는 눈시울을 붉히며 언성을 높였다.“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목숨이 그렇게도 우스워요? 안효주 씨가 도망친 다음에도 제 아버지는 살아 있었어요!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 버둥거렸다고요! 비 오는 날의 길가에 혼자 남아 있다고 해도 포기하지 않았어요! 그러다 결국 빗속에서 목숨을 다하게 되었죠...”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함과 동시에 윤성아는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목 놓아 소리를 질렀다.“안효주 씨의 잘못된 선택으로 한 사람이 죽었어요! 안효주 씨가 제 아버지를 죽였다고요!”윤성아는 절대 안효주를 용서할 수 없었다. 안효주 때문에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녀를 사랑해 주던 사람이 죽었으니 말이다. 이제는 윤정월에게 제대로 미움받고 집 없는 고아가 되기도 했다.“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안효주는 또다시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사과했다. 말투도 표정도 전혀 미안해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성아 씨 아버지가 갑자기 뛰어들어 제 차를 막아서지만 않았어도 사고가 나지 않았을 테니까요. 성아 씨 아버지는 돌아가신 지도 한참 됐죠? 합의금은 얼마든지 줄 테니까 말만 해요. 지금 바로 계좌 이체를 해줄 수도 있어요. 돈을 받고 고소를 취하해 줘요. 알겠죠?”“싫어요.”윤성아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는 돈을 원하지 않는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오직 양지강을 위해 복수하는 것뿐이었다.너무나도
남서훈은 싱긋 웃었다.아직 임신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맥으로 정확히 짚어 낼 순 없었지만 느낌은...“아마 남동생일 거야.”“아... 남동생...”양나나는 눈을 굴리더니 남서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남동생도 좋은 것 같아요. 동생 태어나면 저랑 엄마가 동생한테 의술도 가르쳐주고 아빠랑 사업하는 것도 배우고요. 그리고 남자애는 너무 응석 받아줄 필요도 없고 내가 맘껏 부려 먹을 수 있잖아요.”자기 뒤꽁무니를 쫄랑쫄랑 따라다니며 누나, 누나 하고 부르는 장면을 상상하니 양나나는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어떻게 생긴 남동생이 엄마 배 속에서 태어날까, 양나나도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그러나 남서훈이 임신 다섯 달째로 접어드는 어느 날, 양나나는 실종됐다.양준회와 남서훈은 매일 안절부절못하여 속이 타들어 갔다.둘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세력을 동원해 전 세계 각 곳을 샅샅이 뒤졌지만 여전히 양나나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양나나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그때 양나나는 이미 8살이었다.남서훈은 딸을 찾지 못해 날마다 눈물로 얼굴을 적셨다. 그녀는 점점 야위어갔다.그걸 보는 양준회는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는 아내를 꼭 끌어안고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나나는 똑똑한 아이야. 당신이 의술과 독 쓰는 법도 잘 가르쳐줬으니까 별일 없을 거야. 나나는 너와 내가 낳은 딸이야. 전에 풍운파에 혼자 몰래 들어가서도 그 안을 마구 헤집고 다녔잖아.”아무튼 그는 양나나가 어디에 가서 어떠한 상황에 부딪히던 자신을 잘 보호할 거라고, 아무 일 없이 잘 살아 있을 거라고 남서훈을 위로했다.남서훈도 굳게 믿고 있었다. 양나나의 시체를 보게 되지 않는 한 그들의 딸은 세상 어딘가에 꼭 살아있을 거라고.그 후 넉 달이 지났다. 9달이 된 배는 불룩하게 튀어나왔다.양나나는 아직도 찾지 못했고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그러다 남서훈은 아들을 낳았다. 강보에 싸여 품에 안겨있는 아들을 보며 남서훈은 양나나를 그리워했다.“나나야,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네 뒤꽁무
그리고 바로 그날 오후.양준회와 남서훈, 그리고 백나연과 성진훤, 이렇게 네 사람은 백무산을 찾아갔다.그를 만나자마자 양준회와 성진훤은 백무산한테 사과부터 했다.어리둥절한 백무산은 그들이 왜 갑자기 찾아와서 사과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 후 양준회는 남서훈의 어깨를 와락 감싸안았고 성진훤도 보란 듯이 백나연의 손을 꼭 잡았다. 성진훤은 원래 양준회처럼 백나연을 확 끌어안고 싶었지만 미래 장인어른이 될 사람 앞이라 행동을 조심스럽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여 손만 잡았다.백무산은 더 혼란스럽고 얼떨떨해졌다.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그는 눈알이 튀어져 나올 듯하게 그들 넷을 번갈아 쳐다봤다.그때 양준회가 입을 열었다.“어르신, 우리 서훈이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입니다. 남씨 집안의 특수한 사정으로 어릴 때부터 남장을 했던 것이고, 백나연 씨와의 혼약도 그저 소동극이었습니다. 이 일은 서훈이한테 책임 묻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노여움이 있으시면 저한테 푸세요.”그 말에 백무산은 눈살을 찌푸렸다.남서훈이 여자라니... 어떻게 그런 일이?여자가 그의 딸과 약혼했다니,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었다.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란 말인가.백무산은 불같이 화를 냈다.그러자 백나연이 나섰다.“아빠, 이 일은 서훈이 탓이 아니에요, 제가, 제가 꼭 도와달라고 했어요.”“뭐야? 널 도와줘?”“네.”백나연이 설명했다,“아빠랑 오빠가 자꾸 소개팅 주선하는 바람에 제가 너무 골치 아파서 서훈이한테 도와달라고 부탁한 거예요, 나랑 약혼하자고. 그럼 아빠랑 오빠가 나한테 선 자리를 더는 강요 안 할 거 아니에요. 서훈이는 싫다고 했는데 내가 억지 써서 해주기로 한 거예요.”백나연은 자기 잘못이라고 매우 강조했다.그녀의 눈빛에 아픔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전 그때 결혼할 생각이 없었어요... 그리고 저랑 서훈이는 서로 약속했어요. 누가 먼저 운명의 상대를 만나게 되든, 그때 되면 파혼하기로요. 절대 서로의 앞날을 방해하지 않기로 했어요. 이제
그 순간 용준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한 번 떨어지기 시작한 눈물은 그칠 줄을 모르고 펑펑 쏟아졌다.이게 얼마 만인가.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고 싶은 생각을 항상 했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그는 오늘 끝내 그녀를 안을 수 있었다. 팔을 뻗어 그녀를 껴안고 얼굴을 그녀의 어깨에 파묻은 채 용준은 또 한참을 울었다.예서는 그가 평생 사랑한 유일한 여자였다.그는 품속에 있는 그녀를 부드럽고 진실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난 네가 고마워. 넌 너무 용감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용감해. 옛날 일은 이미 다 지나갔어. 넌 이것만 기억해. 난 널 사랑하고, 네가 있어야만 내가 살 수 있어. 네가 있으니까 내가 괴물로 변하지 않은 거야. 아니면 난 모든 걸 다 망가뜨렸을 거야. 스스로도 혐오하는 그런 나쁜 인간으로 돼버렸을 거야.”예서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도 알고 있었다. 남자가 하려는 말이 뭔지 그녀는 모두 알고 있었다.이날, 둘은 아주 오랫동안 얘기를 나눴다.예서는 더는 용준을 불편해하지 않았다. 용준이 있으므로 하여 그녀는 더 빨리 회복될 것이었다.그렇게 예서가 하루하루 나아지고 있을 때. 남서훈과 양나나는 한 번 나가 돌아다니기로 했다.한 거리의 상가 앞을 지나가고 있는데, 남자애 몇 명이 갑자기 튀어나와 양나나를 에워쌌다.그들은 매우 들뜬 소리로 말했다.“대장! 살아 있었어요?”“너무 잘 됐어요!”“대장, 대장을 그 사람들이 데려간 후로 우린 계속 대장의 소식을 기다렸어요. 대장도 그 애들처럼 상처투성이가 돼서 돌아오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다고요.”“지금은 어떤 상황이에요? 대장이 후계자가 된 거예요?”양나나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 라고 대답했다.그리고 주변을 둘러싼 남자애들한테 말했다.“난 후계자 되는 것에 관심 없어. 풍운파에 지금 남아있는 건 의술을 배우기 위해서야.”양나나는 시선을 남서훈한테 향하며 그들한테 남서훈을 소개했다.“이분이 내 스승님이야, 우리 스승님 엄청 대단해!”그날, 양나나는 그
지난 날에 발생한 그 끔찍한 과거를 스스로 입에 올리는 용준은 피가 흘러나올 듯이 눈이 시뻘겋게 물들었고 감정이 폭발할 한계치까지 다다랐다.그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애써 가라앉혔다.몇 분 후에야 그는 비로소 다시 입을 열었다.“그놈들은 죄다 죽여버려야 할 놈들이에요. 예서가 이쁘니까, 내 앞에서 예서를... 그때 예서는 이미 내 아이를 임신했는데...”용준의 온몸에서 난폭한 기운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돌아서서 주먹으로 나무를 세게 한 방 내리쳤다. 그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며 낙엽이 우수수 떨어졌다.그 큰 나무가 흔들릴 정도면 얼마나 센 펀치를 날렸는지 알 수 있었다.그의 손마디도 살이 찢겨나가 새빨간 피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는 감각을 느낄 수 없는 사람처럼 상처에 무덤덤했다. 아마도 손보다 마음이 더 아팠을 터였다.용준은 그때 일만 생각하면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심장이 뜯겨나가는 것처럼 아팠다. 예서가 피투성이가 된 채 텅 빈 눈으로 누더기 인형처럼 맥없이 쓰러져서 누워있던 참혹한 장면만 머릿속에 떠올리면 그놈들을 무참하게 도륙을 내고 싶었다.그리고 그는 그렇게 하였다.풍운파의 보스가 된 후 첫 번째로 한 일이 바로 예서의 복수를 하는 것이었다.그놈들의 범죄증거를 전부 찾아내 한 명도 빠짐없이 직접 처단했다.그때 그들은 무릎을 꿇고 울며불며 용서를 빌었다. 막다른 길에 몰려 살려고 해도 안 되고 죽으려고 해도 죽지 못할 때, 그들은 찌질이같이 눈물 콧물을 쥐어짜며 애원했다. 제발 살려달라고, 잘못했다고.정작 그들은 용준이나 예서한테 그런 자비를 베푼 적이 없는데 말이다.용준의 목소리는 점점 차가워졌다.“그것들이 나와 예서의 모든 것을 망치고 날 시궁창에 몰아넣었죠. 여전히 난 이렇게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생지옥에서 살고 있어요. 그것들은 백번 죽어도 마땅해요!”그러나 그놈들이 죽는다고 해서 상처가 아무는 것은 아니었다.용준은 피로 물든 주먹을 으스러지게 잡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들은 예서가 그들이 한
용준은 원래 정직한 사람이었고, 금호의 일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그는 어둠이 없는 밝은 햇빛 아래에서 사는 반듯한 사람이었다.그러나 일부 국제조직에서는 용준을 불안하게 여겼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고, 심지어 그가 의심되어 오랫동안 그에게 전자발찌를 채웠다.아무 일도 저지르지 않았지만 그는 범죄자 취급을 당했고, 그리하여 생활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더더욱 생각지도 못한 건, 그 당시 그와 깊은 사랑에 빠져있었던 여자친구마저 누구한테 몹쓸 짓을 당하게 된 것이다.그러므로 용준이 점점 나쁘게 변하여 나중에 어떤 일을 저지르게 되었던, 모두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요 몇 년 동안 풍운파는 용준의 관리하에 동남아에서 제일 큰 폭력조직으로 성장하였고, 닥치는 대로 무슨 일이나 다 저지르는 편이었지만 딱 한 가지 철칙이 있었다. 그건 바로 노약자와 여자, 아이들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거였다.의리도 지켰다.하지만...“그건 중요하지 않아요.”남서훈이 말했다.“이 세상은 원래 흑과 백으로 나뉘는 게 아니니깐요. 동남아는 원래 상황이 어수선하잖아요. 무장세력과 폭력조직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일시적으로 바꿀 수도 없어요. 오히려 풍운파와 같은 조직이 있다는 게 더 도움이 될지도 몰라요.”양준회가 그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어떤 측면으로 보면 용준은 꽤 마음에 드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둘은 원수지간이다. 양준회가 그의 아버지를 죽였다. 비록 지금까지는 아무 짓을 안 했어도, 또 그가 원래 정직한 사람이었다고 해도, 풍운파를 이렇게 여러 해 동안 다스린 용준이 지금은 어떤 사람인지 누구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그리하여 양준회는 안심할 수 없었다. 여전히 남서훈과 같이 풍운파를 즉시 떠나려고 했다.“하지만 나나도 여기 있어요.”남서훈이 예상치도 못한 폭탄을 터트렸다. 양준회는 깜짝 놀랐다.양나나가 여기에 있다는 건 상상도 못 했다.하지만 놀란 것도 잠시, 그는 바로 말했다.“그럼 나나도 같이 떠나면 돼.”갇힌 두 달
강하영이 부케를 내던지는 일순간 우양주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부케를 향해 몸을 날렸다. 공중에서 부케를 잽싸게 낚아채는 그의 모습이 정지화면인 양 사람들의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부케를 손에 쥔 그다음 순간, 그는 부케와 함께 바다에 떨어졌다.모두가 경악했다.강하영은 크루즈 난간 쪽으로 달려가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남자를 보며 입을 떡 벌리고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선원들이 즉시 튜브를 던졌고, 또 어떤 사람들은 즉시 뛰어내려 구조하려 했지만 강주환이 그들을 말렸다.왜 구하지 말라는 건지 이해 안 된다는 듯한 눈빛으로 윤성아는 강주환을 쳐다봤다.그러다 팔로 물살을 가르며 바다에 둥둥 떠 있는 우양주가 크루즈 위에 있는 강하영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치는 걸 듣고 왜 그러는지 알 것만 같았다.“여보, 어쨌든 내가 부케 받았으니까 당신 나랑 결혼식 치러야 돼요! 안 그러면...”그 뒤엔 위협적인 말이 따라야 하는데 우양주도 무엇으로 강하영을 협박할 수 있을지 몰랐다. 남은 건 자신의 이 몸뚱이 하나뿐인데...“안 그러면 나 안 올라갈 거야. 여기 바다에 계속 있을 거야, 결혼식도 못 하는데 그냥 빠져 죽지 뭐.”강하영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바다에 빠진 남자를 까만 눈동자로 차분하게 내려다보며 끝내 입을 열었다.“빠져 죽고 싶으면 그렇게 해요. 안 말려요.”“...”우양주는 서럽게 그녀를 쳐다봤다.역시나 아내는 매정했고 자신에 대해 애정이 없었다.그러나 그때 윤성아 곁에 서있는 강주환이 무덤덤하게 한마디 했다.“내 기억이 맞다면, 이 바다에 상어가 출몰한다고 했어요. 식인 상어.”강주환은 고개를 돌려 강하영한테 말했다. “지금 아직 상어가 오지 않아서 그렇지, 나타나기만 하면 한꺼번에 열 몇 마리씩 무리 지어서 나올 거예요. 그게 게네들 습성이라. 이야... 쟨 아마 그러면 뼛조각도 남지 않겠네.”“...”그 말에 강하영이 급해 났다. 말투도 전처럼 차분하고 담담하지 않았다.난간에 기대어 우양주를 향해 내리 소리 질렀다.“뭐
미리 준비한 축사를 울먹이며 끝까지 다 읽고는 원이림을 향해 볼멘소리를 했다.“너 이 놈 자식, 내가 죽을 때까지 네가 결혼하는 걸 못 보는 줄 알았다. 아이고... 드디어 결혼하는구나. 너도 이제 가정이 생겼어.”“너 똑바로 들어. 은진이한테 평생 잘 해줘야 돼, 아내한테 잘 하는 건 우리 집안 내력이야. 나도 네 엄마 말을 엄청 잘 들었어. 너도 똑같아, 알겠니? 오늘부터는 은진이한테 더 잘해야 돼, 말도 잘 듣고, 은진이부터 생각하고 배려해 주고. 은진이가 조금이라도 맘고생을 하게 되는 날엔 내가 너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알겠어?!”원이림은 새카만 눈동자로 여은진을 깊게, 애틋하게 들여다보며 그녀와 깍지를 낀 두 손에 힘을 더 주었다.“걱정 마세요. 난 평생 우리 여보 맘고생 안 시킬 거예요.”여보라는 호칭이 지금 이 시각부터 명실상부하게 되었다.원이림은 그녀의 손을 잡고 크루즈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그리고 미리 준비된 데이지 꽃을 바다로 뿌렸다. 하얀 꽃잎들이 파도에 실려 멀리 떠내려갔다.둘은 거기에 선 채 눈물을 머금고 울먹이며 말했다.“어머니, 아버지. 저 너무 행복해요. 우리 너무 행복해요.”결혼식의 마지막을 장식할 부케 토스하는 시간이 다가왔다.강주환과 윤성아, 그리고 나엽과 안효연은 모두 기혼자로서 나가지 않고 구경만 했다. 하객 중에 미혼인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었다.우양주도 강하영의 손을 잡고 그리로 향했다.강하영은 몸을 뒤로 빼면서 말했다.“우린 결혼했는데 왜 부케를 받으러 가요? 다른 사람한테 갈 좋은 축복을 왜 우리끼리 받겠다고 달려들어요, 쓸데없이. 그렇게 할 일 없고 힘이 남아돌면 내가 다른 일 하게 해 줄게요.”“무슨 일?”강하영은 푸른 바다를 향해 눈을 힐끔 하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당신 수영 좋아하잖아요. 내가 엉덩이 확 걷어찰 테니까 바다로 들어가서 수영이나 할래요?”“...”저번에 강하영과 같이 수영하면서 그녀가 자신한테 새빨간 수영팬티를 사줘 창피를 당하고 나서부터 우양주는 수영하는
여은진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예쁘게 미소 지었다.“나 다 알아요.”지난 1년 동안 그가 어떻게 해왔는지 잘 아는 그녀는 더 이상의 맹세와 언약 같은 건 필요 없었다.“응!”여은진을 안은 채로 원이림은 그녀의 여린 입술에 쪽쪽거리며 뽀뽀를 했다.장내의 플래시 세례가 정신없이 터지는 가운데 그는 돌아서서 무대 아래에 앉아있는 모든 사람한테 당찬 목소리로 선포했다.“오늘 저의 이 행복한 순간을 지켜본 여기 계신 모든 증인 분들한테 제가 선물을 준비할 생각입니다. 나중에 저희 베린 그룹에 가셔서 선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번 달 20일에 저와 은진이의 결혼식이 있을 예정이니 여러분들께서 모두 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여은진을 안고 시상대를 내려가려 했다.여은진이 내려달라고 했지만 그는 내려놓지 않았다. 그렇게 안은 채로 시상식장을 걸어 나와 차에 올라탔다.럭셔리한 롤스로이스가 천천히 내달리고 있었다.여은진은 아직도 그의 품에 안긴 채로 있었다.“이번 달 20일에 결혼한다고요? 그럼 열흘밖에 안 남았는데, 너무 촉박하지 않아요?”그녀가 눈을 들어 바라보며 물었다.“아니, 전혀.”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떨구며 원이림이 말했다.“시간이 모자라지만 않았으면 내일에라도 당장 결혼식 치르고 싶어.”반년이 넘는 동안, 그는 매일 결혼식에 관한 모든 것을 준비하고 있었다.결혼반지, 웨딩드레스, 그리고 결혼에 필요한 모든 물품과 디테일한 사항들을 전부 준비하고 체크했다. 그녀가 결혼을 동의하는 그 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그리고 그 순간이 끝내 다가왔다.웨딩사진을 찍는 것 외에는 크게 시간을 들일 일도 없었다.다만 여은진이 임신했기 때문에 너무 빠듯하게 스케줄을 잡지 않고 싶었을 뿐이다.결혼식에 참석할 하객을 초대하는 일도 있긴 하지만 10일이면 충분했다.촉박하지 않을뿐더러 시간적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여보, 우리 지금 바로 혼인신고 하러 가.”원이림은 한시라도 더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기사한테 얘기하여 구청으로 가자
원이림은 금방 샤워를 마친 여은진한테로 다가가 그녀의 팔을 끌어당겨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다음에는 당연히 침대로 향했다.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수순을 밟아갔다.한창 격렬해지려던 찰나, 원이림은 짧게 비명을 질렀다. 크게 지르진 않았다. 본능적으로 소리를 내질렀지만 그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여은진이 알아차리지도 못한 새에 살에 푹 찔린 그 가는 물건을 빼내야겠다고 머릿속으로 빨리 반응했다.하지만 역시 늦었다.여은진이 몸을 일으켜 스탠드를 켰고, 어두웠던 방안은 환한 빛으로 채워졌다.이어 급히 그를 살피던 여은진은 원이림의 엉덩이에 바늘이 하나 꽂혀있는 걸 발견했다.짧고 가는 옷을 꿰맬 때 쓰는 그런 바늘이었다.여은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얼굴로 남자를 보며 물었다.“어떻게 바늘에 찔릴 수 있어요? 침대에 왜 바늘이...”“...”꽂힌 바늘을 빼며 원이림은 이야기를 얼버무렸다.“괜찮아, 그냥 바늘인데 뭐. 별로 아프지도 않아.”그러고는 또 다짜고짜 몸을 뒤집으며 여은진을 몸 아래로 깔았다.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손을 뻗어 스탠드를 끄고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탐했다. 잠깐 벌어진 에피소드를 그녀의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진행 중이었던 일을 마무리하려는 의지였다.하지만 여은진은 그의 키스를 받아내면서도 오후 그의 당황스러운 표정과 난데없이 침대에 나타난 바늘을 함께 떠올렸다. 정신을 쏙 빼놓으려는 지금의 행동도 분명 그것과 연관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잠깐만.”여은진은 원이림을 밀어내고 다시 한번 스탠드를 켰다.의심이 부풀어 오른 눈으로 빤히 그를 노려봤다. “똑바로 말해요. 아까 그 바늘로 수작 부린 거 맞죠? 말해요, 몇 개나 찔렀어요?”“...”끝내는 발각되었다. 원이림은 이실직고했다. 강주환이 원흉이라고, 그가 시켜서 했다고 불었다.“여보, 나 며칠 전에 운봉 비즈니스 회담에 참석했는데 거기서 강주환을 만났어. 그 자식이 날 비웃는 거야. 그리고 이렇게 하라고 아이디어를 내줬어. 바늘로 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