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사라진 아내, 돌아온 나: Chapter 11 - Chapter 20

240 Chapters

제11화

반하준을 돌아보던 강민아는 제자리에 굳어버렸다.해가 정말로 서쪽에서 떴나. 그동안 반하준에게 어린이집에서 여는 학부모 동반 활동에 참석하라고 여러 번 말했어도 그는 늘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시어머니 연진숙도 어린이집 활동 때문에 반하준을 귀찮게 하지 말라고 그녀에게 한소리를 했었다.자녀를 교육하고 자녀와 관련된 모든 문제를 처리하는 것은 전적으로 아내인 강민아의 책임이라면서 말이다.눈 깜짝할 사이에 강나현과 반하준이 강민아 앞으로 다가왔다.“언니, 내가 하준 씨 데려왔어.”자신을 바라보는 강민아의 눈동자에 초점이 없는 것을 본 남자는 피식 웃음이 났다.강민아가 어떻게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엔 누가 봐도 사랑이 가득하지 않나.반하준이 강민아 옆에 앉고 강나현도 반하준 옆에 자리를 잡았다.이곳에 있던 재벌가 사모님들이 저마다 이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흥미진진하게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이따가 민이 손재주 보면 깜짝 놀랄 거야.”강나현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반하준에게 속삭이는 모습이 뒤에서 보면 두 사람의 머리가 바짝 붙어있는 것 같았다.“오늘 반차 냈어?”강민아의 목소리가 들리자 반하준이 대답하기도 전에 강나현이 끼어들었다.“하준 씨 오늘 바쁜데 내가 한 시간만 내서 민이 강연 보러 오자고 했어.”강민아의 입가에 조롱 섞인 미소가 번졌다.“나현이 네가 하는 말이면 다 듣네.”발붙일 틈도 없이 바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단지 반하준에겐 그녀가 중요하지 않았던 거다.막이 걷히고 아이들의 강연이 시작되자 강나현이 무대를 가리키며 신이 나서 외쳤다.“하준 씨 아들 무대에 올랐어!”반현민은 카트를 이용해 1미터가 넘는 커다랗고 빨간 골판지 상자를 무대 위로 가져갔다.붉은 상자엔 ‘우수작'이라는 라벨이 눈에 띄게 붙어 있었다.반현민은 무대 아래 착석한 반하준을 보고 자랑스럽게 가슴을 쭉 내밀었다.강나현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아빠가 정말로 그녀의 말 한마디에 보러 온 것이다.반현민의 맑고 앳된 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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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민아, 얼른 건담 로봇 꺼내.”강나현이 손을 내밀자 반현민은 곧장 상자를 닫으며 당황한 듯 강나현을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아니요. 꺼내면 안 돼요.”“꺼내!”강나현이 낮게 윽박질렀다.“내가 힘들게 건담 로봇 만들어줬는데 네가 이렇게 감추면 얼마나 창피하겠어!”반현민은 강나현이 상자를 열지 못하도록 아예 골판지 상자에 몸을 밀착시켰다.강나현은 아이를 떼어내려 하고 아이는 종이 상자를 꽉 붙잡고 버텼다.그때 갑자기 상자가 뒤집어지고 안에 있던 플라스틱 빨대가 모두 쏟아져 나왔다.흩어진 빨대 더미 속엔 분홍색 포스트잇 한 장도 들어 있었다.포스트잇에 적힌 글이 카메라를 통해 스크린에 그대로 전해졌다.[고작 59,900원으로 사람한테 밤새 건담 로봇을 만들라고 해? 나가 죽어!]반현민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플라스틱 빨대가 무대 아래로 굴러가는 것을 지켜보았다.무대 아래 서 있던 주아영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민아, 너 숙제를 안 해 온 거야?”“아니요. 전 했어요!”반현민의 작은 입은 떨리고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주아영은 포스트잇을 집어 들고 아이에게 물었다.“그러면 이 쪽지는 뭐야? 누구한테 돈을 주고 시킨 거야? 선생님은 너희들이 부모님과 함께 숙제를 완성하길 바랐는데 어떻게 선생님한테 거짓말을 할 수가 있어?”“윽...”한 번도 이처럼 억울함을 당한 적이 없던 아이는 작은 체구로 큰 무대에 주저앉은 모습이 꼭 버려진 아기 새 같았다.“전...”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걸 잘 알았다.반현민은 강민아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강민아가 반씨 가문을 떠나지 않았다면 플라스틱 빨대로 만든 아름답고 멋진 건담 로봇을 만들 수 있었을 거다.아직 완성되지 못한 건담 로봇은 강나현이 망가뜨렸고, 강나현의 거짓말 때문에 이렇게 큰 상자에 쓸데없는 플라스틱 빨대만 잔뜩 들어 있었다.그리고 자신과 강나현은 선생님과 모두를 속인 거짓말쟁이가 되었다.억울한 마음에 눈물이 반현민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아이가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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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강나현은 황급히 반현민의 입을 막았다.“네 엄마가 와도 무슨 소용이 있어? 널 1등으로 만들어 줄 능력은 있대?”반현민은 흐느끼며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반우정이 있는 방향을 돌아보았다.훌륭한 작품을 만든 반우정은 무대 옆에 줄을 서서 올라가 강연하길 기다리고 있었다.“엄마는 정이를 1등으로 만들어줬을 거예요!”강나현이 비웃었다.“정이는 1등 못 해.”반현민은 눈물이 맺힌 눈으로 강나현을 바라보았다.“내 말 안 믿어?”강나현은 반현민의 어깨를 살며시 감쌌다.“저걸 봐.”반우정의 옆에 놓인 거대한 비닐봉지엔 아이가 만든 작품이 담겨 있었다.강나현은 비열한 웃음을 머금은 채 다가가 비닐봉지를 콱 밟으려 했다.힐끗 강나현의 모습을 엿보던 반우정은 강나현보다 훨씬 작은 키로 여자의 발목을 잽싸게 움켜잡아 거대한 힘으로 상대를 넘어뜨렸다.“꺄악!” 바닥에 쓰러지며 비명을 지른 강나현은 분노에 휩싸였다.“반우정, 네가 날 밀어?”반우정이 말했다.“내 작품 밟을 뻔했잖아요!”강나현은 바닥에 주저앉아 부딪혀서 아픈 팔꿈치를 감쌌다.“대체 뭘 보고 내가 네 걸 밟았다는 거야? 네가 일부러 날 민 거잖아!”반우정의 힘이 세다는 건 알고 있지만 50킬로가 넘는 그녀를 단번에 넘어뜨릴 줄은 몰랐다.“정아!”강민아는 강나현이 반우정과 다투는 모습을 보고 서둘러 달려갔다.강나현은 뒤따라온 반하준을 보고 곧장 일러바쳤다.“내가 비틀거리는데 하준 씨 딸이 내 발목을 잡고 넘어뜨렸어. 내가 재빨리 반응하지 않았으면 머리가 바닥에 부딪혔을 거야.”강나현은 위협적으로 말했고 반하준도 딸의 힘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정아, 나현 이모한테 사과해.”아버지의 위엄은 거스를 수 없었기에 반우정은 화가 나서 얼굴이 빨개졌다.“이모가 먼저 내 작품 밟으려고 했어요!”강나현이 곧장 쏘아붙였다.“그래서 내가 밟았어? 그냥 네가 날 노리고 그런 거잖아!”강민아는 반우정을 옆으로 끌어당겼고 아이는 어린 새처럼 그녀의 다리를 감싸 안았다.반우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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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그래그래. 마음대로 해.”강나현은 반우정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귀족 어린이집의 경쟁은 유난히 치열했고 반우정보다 잘 만들고 연설문을 잘 쓴 아이들은 널리고 널렸다.조금 전 이미 우수작으로 뽑힌 다른 작품들을 둘러본 강나현은 반우정이 1등 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다.반우정은 작품을 들고 무대에 올랐다.아이는 흰색 긴팔 셔츠에 빨간 체크무늬 교복 치마를 입고 머리에 작은 머리핀을 두 개 꽂고 있었다.반우정은 사랑스럽고 올망졸망한 이목구비에 긴 속눈썹이 검은 눈동자를 더더욱 돋보이게 했다.하지만 아이가 무대에 오르자마자 몇몇 학부모들이 수군거렸다.“반씨 가문 꼬마 아가씨가 조금 뚱뚱한 것 같지 않아요?”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조롱했다.“저게 조금 뚱뚱한 건가요?”두 학부모는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킥킥 웃었다.재벌가 사모님들은 딸을 늘씬하고 아리따운 아가씨로 키우는데 반우정은 무척 건장한 체격이라 또래 여학생들 사이에서도 남다른 모습이었다.반우정은 무대에서 학부모와 심사위원들에게 손수 만든 작품을 선보였다.플라스틱 빨대로 지은 한옥이었다.“이건 엄마와 제가 함께 만든 한옥이에요. 진짜 한옥을 똑같은 비율로 100배 축소해서 만든 작품이죠.”반우정의 말이 끝나자마자 카메라 대각선에 있던 프롬프트 화면이 검게 변했다.강민아도 아이의 눈빛이 달라진 걸 알아차리고 고개를 홱 돌리니 검게 변한 프롬프트 화면과 함께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한 중년 여성의 모습도 보였다.입을 벙긋하며 무의식적으로 ‘어머님’ 소리가 나올 뻔했지만 꾹 삼켰다.“회장님.”“어머니.”강민아와 반하준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전 시어머니와 인사를 나눈 강민아는 센터 콘솔 쪽으로 가서 프롬프터가 왜 갑자기 꺼졌는지 물어보려는데 연진숙이 그런 그녀의 손목을 홱 낚아챘다.“내가 끄라고 했어.”강민아는 경악했다.“회장님, 왜 이러시는 거예요?”“정이가 상을 받으면 민이 마음은 어떨지 생각해 봤어? 민아 너는 엄마가 돼서 아이들을 공평하게 대할 줄도 모르니?”그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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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아이들의 강연이 끝나고 연설문을 전부 외운 반우정이 의심할 여지 없이 1등을 차지했다.교장 유영호가 반우정에게 직접 꽃을 달아주었고 반현민은 아래에서 무대 위에 상을 받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태어나 처음으로 어린이집 행사에서 아무런 상도 받지 못한 채 웃음거리만 되었다.눈물이 핑 돌던 반현민은 사람들 틈에서 강민아를 찾았다.“우리 착한 손자!” 연진숙이 다가와 반현민을 품에 안았다.“할머니!” 반현민이 울음을 터뜨리자 연진숙은 따뜻하고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울지 마. 내 사랑하는 손자, 할머니 마음속에 넌 언제나 1등이야!”반현민이 코를 훌쩍거렸다.“하지만 정이에겐 꽃이 있잖아요... 할머니, 빨리 엄마한테 돌아와서 내 숙제 도와달라고 해요. 아니면 나도 엄마처럼 집 나갈 거예요!”할머니가 자신을 편애하기에 이런 협박이 잘 먹힌다는 걸 아이는 알고 있었다.연진숙이 문득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너 집 나가면 학교에서 올스타 상을 못 받아.”연진숙은 휴지를 꺼내 반현민의 얼굴을 닦아주었다.입학한 이래 학기마다 전교 최고 명예는 반현민의 몫이었다.반우정도 모든 성적이 그와 견줄만했지만 학기마다 주는 올스타 상은 오직 반현민만 받았다.연진숙이 이렇게 말했다.“넌 반씨 가문 도련님이니까 올스타 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 거야. 양심 없는 네 엄마 따라 반씨 가문을 떠날 거야?”반현민은 입술을 깨물며 연진숙의 품에 안겼다.아이는 엄마가 도와주지 않아도 전교 최고의 영예는 자신의 것이라고 믿었다.무대에서 내려온 반우정이 강나현 앞으로 찾아와 도도한 얼굴을 치켜들었다.“나한테 사과해요.”강나현이 대수롭지 않은 듯 웃으며 오히려 반우정을 조롱했다.“여자애가 사사건건 따지고 들면 사랑스럽지 않아.”반우정은 어디서 그런 말투를 배웠는지 말끝을 길게 늘렸다.“이모, 남자답게 쿨할 수는 없어요?”강나현의 얼굴이 어색하게 일그러졌다.“정이 너, 그런 말버릇은 어디서 배웠어!”반우정은 작품을 손에 든 채 목소리를 높였다.“내 한옥에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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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할머니, 정이가 또 날 때려요!”반현민이 흐느끼자 반우정은 양옆으로 늘어뜨린 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태생적으로 힘이 세서 어렸을 때 힘을 잘 조절하지 못해 실수로 반현민을 몇 번 다치게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부터 연진숙은 반우정을 경계했다.반현민도 매번 할머니에게 찾아가 일러바쳤고 연진숙은 언제나 반현민의 편이었다.연진숙이 심술궂은 얼굴로 다가와 반우정의 가슴에 달린 작은 꽃을 떼어내려고 손을 뻗었다.“반우정, 학교에서 사람을 때렸으니 넌 꽃을 받을 자격이 없어! 선생님께 1년 동안 우수 학생으로 선발될 자격을 취소하라고 할 거야!”반현민은 할머니의 다리에 기대 우는 척 손으로 얼굴을 감싸더니 고개를 돌려 반우정을 몰래 흘겨보았다.제자리에 서 있던 반우정의 눈앞이 흐릿하게 변해갔다.울고 싶지 않은데 차오르는 눈물이 말을 듣지 않았다.강민아와 함께 만든 한옥은 심하게 변형되어 도저히 복원할 수 없는 상태였다.반우정은 코끝이 시큰거리며 폐허 속에 홀로 버려진 듯 어찌할 바를 몰랐다.문득 날씬한 실루엣이 아이의 앞을 가로막았다.엄마였다.“회장님, 반현민이 먼저 한옥을 망가뜨려서 우정이가 밀친 거잖아요.”연진숙은 여전히 일어나지 못한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강나현을 가리켰다.“네 딸이 오빠한테 손대는 것도 모자라 다른 사람까지 넘어뜨렸어!”연진숙은 강나현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녀가 다친 걸 이용해 강민아에게 한바탕 쓴소리를 해댔다.강나현도 딴생각이 있었다. 반하준의 관심을 받고 싶지만 나약한 환자로 낙인찍히고 싶지는 않았다.다섯 살짜리 여자아이가 발차기 한 번에 자신을 넘어뜨렸다는 걸 친구들이 알면 얼굴을 어떻게 들고 다니겠나.강민아가 정면으로 맞받아쳤다.“카메라 영상에 강나현이 일부러 우정이 한옥을 망가뜨리려 했던 게 찍혔어요. 우정이가 1등 하면 강나현이 사과하기로 내기한 것도 사람들이 다 들었고요.”강민아가 언성을 높였다.“강나현, 사과 안 해?”강나현은 종아리를 문지르며 말했다.“이젠 반우정이 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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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강당에 있던 다른 학부모들도 모두 휴대폰을 통해 인터넷에서 들끓고 있는 여론을 확인했다.“우리 학교가 검색어에 올랐어요!”“연 회장님의 정체가 순식간에 드러났네요.”“다들 그래도 보는 눈이 있네요. 반 대표가 이혼한 건 몰라도 강나현이 내연녀인 건 다 알아요.”“나도 강나현 싫어요. 허구한 날 내 남편이랑 시시덕거려요.”“엊그제 밤에 술에 취한 남편을 데리러 갔는데 강나현이 배 대표 무릎 위에 앉아 자기 속옷을 벗어서 서 대표 얼굴에 거는 거예요. 내 남편은 그냥 장난하는 거래요.”학부모들이 수군거리고 있을 때 연진숙은 카메라 감독을 질책했다.“당장 생방송 꺼. 반씨 가문 명예를 훼손하면 당신들도 고소할 거야!”감독은 진땀을 흘렸다.“연 회장님, 방송은 이미 껐습니다.”예상치 못하게 벌어진 일이라 뒤늦게 정신을 차린 감독은 서둘러 생방송 카메라를 껐지만 연진숙이 반우정을 퇴학시키겠다는 말은 고스란히 송출되었다.휴대폰이 터질 지경으로 연락을 받은 유영호가 서둘러 달려와 상황을 정리했다.“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는 게 좋겠어요. 다들 얼른 흩어지세요.”유영호는 학부모들을 강당 밖으로 인도하라는 듯 교사들에게 손짓했다.연진숙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반우정은 친손녀라 그냥 넘어갈 순 있어도 강민아는 절대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정아, 난 네가 아직 반씨 가문을 놓지 못했다는 거 알아. 다시 한번 기회를 줄 테니 잘 생각해 봐. 엄마랑 같이 살래, 아빠랑 살래?”반우정은 또렷한 눈망울로 말했다.“전 엄마랑 살래요.”연진숙은 강민아를 사납게 노려보며 아이에게 가스라이팅을 하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를 날렸다.“정아, 엄마가 혼자 반씨 가문을 떠나는 게 불쌍해서 같이 가려는 거지?”반하준과 강민아가 이혼 서류에 서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연진숙은 분노해 집안 물건을 마구 부숴버렸다.그녀는 오늘 특별히 강민아에게 한 수 가르치려고 학교에 찾아온 거다.“아니요.” 반우정은 망설임 없이 부인했다.“엄마 앞에서 속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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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연진숙은 지나치게 순진한 손녀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네 엄마 따라가면 학비도 못 낼 거야.”연진숙은 반우정이 앞으로 어떤 일을 겪게 될지 아직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녀는 원망 섞인 눈빛으로 강민아를 바라보았다.“고작 대학만 졸업한 네가 정이를 어떻게 키울지 두고 보겠어. 정이 너는 네 인생이 이미 바닥을 쳤고 민이와 뛰어넘을 수도 없는 간극이 생겼다는 걸 몰라. 아무리 노력해도 정이 넌 민이 수준에 도달할 수 없어!”강민아는 차분한 어투로 말했다.“둘 다 내 배 속에서 태어난 아이예요. 민이가 가진 건 정이도 가져야죠. 반씨 가문에서 공평하게 챙겨줄 수 없다면 내가 정이를 데리고 가서 원하는 대로 성장할 수 있게 도와줄 거예요.”강민아가 반우정을 데리고 떠나려던 찰나, 서류 가방을 들고 강당으로 들어오는 여러 명의 사람을 보았다.일행의 선두에 선 중년 남자는 단정한 흰색 셔츠에 검은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낯익은 얼굴을 마주한 강민아는 동공이 움츠러들었다.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까.“청... 청장님?”유영호가 놀라서 탄성을 지르자 사람들은 강당 입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교육청 청장 백강훈이야.”“대회도 끝났는데 백강훈이 왜 왔지?”유영호와 다른 학교 임원들이 서둘러 달려가 환영 인사를 건넸다.“청장님, 우리 학교에 와주셔서 영광입니다.”유영호는 [환경 지킴이] 강연대회를 생방송으로 진행한 게 대성공을 거둔 것 같아 환한 미소를 지었다.며칠째 영월로 출장을 갔던 교육청 청장까지 얼굴을 비추러 왔으니 말이다.유영호가 백강훈을 상석으로 안내하려던 순간 백강훈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전화를 했는데 안 받아서 내가 직접 왔어.”유영호의 등에는 순식간에 식은땀이 흘렀다.“죄송합니다. 휴대폰 배터리가 다 되어서...”상대는 변명을 듣고 싶지 않은 듯 곧바로 이렇게 물었다.“인터넷에 그 난리가 났는데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지?”유영호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아이고, 별일 아닙니다. 학부모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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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백강훈이 유영호에게 말했다.“이 일 처리하려고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여기로 왔어. 저 여자가 물러나지 않으면 승덕은 신입생이 아니라 지금 다니는 학생들도 남아있지 않을 거야.”유영호가 다급하게 연진숙을 돌아보자 그녀가 눈치를 주었다.“교장 선생님, 저희 부신 그룹이 승덕의 가장 큰 후원자인데...”유영호는 부신 그룹의 재정적 지원을 잃고 싶지 않았고 교육청 사람들에게 밉보이고 싶지도 않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어머니, 그만하세요!”반하준의 목소리가 주위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그렇게 창피를 당하고도 부족하세요?”그는 백강훈에게 말했다.“어머니 이사진 자리는 제가 이어받겠습니다.”거절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한 남자의 강렬한 기세가 보였다.백강훈이 반하준과 강민아를 번갈아 보다가 웃으며 말했다.“반 대표님은 모친보다 훌륭하게 해내길 바랍니다.”강민아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반우정에게 말했다.“우린 가자.”“강민아!”반하준의 목소리가 뒤에서 울려 퍼졌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엇, 하준아!”연진숙은 강당을 빠져나가는 강민아의 뒤를 쫓아가는 아들을 보며 서둘러 소리를 질렀다.유영호가 반하준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고 있던 백강훈을 보며 말했다.“반 대표님은 서경의 훌륭한 인물이죠. 저런 분이 이사진으로 계신다면 승덕은 분명히 한단계 더 비상할 겁니다.”“강민아도 한때 훌륭한 사람이었어.”백강훈이 감탄하듯 말했지만 유영호는 알아듣지 못해 당황했다. 하지만 청장이 자신을 멍청하다고 생각할까 봐 감히 묻지 못했다....반하준이 어린이집 주차장으로 갔을 때 강민아가 반우정을 차에 태우고 뒷좌석 문을 닫는 게 보였다.그녀가 앞으로 돌아가 운전석에 타려는데 반하준이 걸어오고 있었다.정장 차림에 긴 다리와 잘록한 허리, 눈에 띄게 잘생긴 얼굴을 지닌 남자는 늘 굳은 표정을 짓고 있어 강민아는 그가 꼭 빚이라도 받으러 다가오는 것 같았다.강민아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운전석에 올라타 문을 닫으려는 순간 강한 힘을 느꼈다.고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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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강민아가 선물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사파이어 팔찌가 놓여 있었다.그녀는 어두워진 눈동자로 팔찌를 집어 들며 물었다.“사이즈 얼마야?”“14.2.”무심코 뱉는 남자의 말에 웃음이 터진 강민아는 목구멍에서 비릿한 단맛이 느껴졌다.“그건 나현이 사이즈야.”그녀가 창밖으로 손을 내밀자 빛에 반짝이는 사파이어 팔찌가 손에서 툭 떨어졌다.반하준은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까만 동공에 감정의 파도가 요동쳤다.“나현이를 신경 쓰고 질투해서 나랑 싸우겠다는 거지? 나현이랑 나는 20년 넘게 알고 지냈는데 우리 둘 사이에 정말 뭐가 있었다면 네가 낄 틈이 있었겠어?”강민아는 반하준의 말에 아득한 기억을 떠올리듯 백미러에 그녀의 버석한 미소가 비쳤다.“기억나? 3년 전 어느 날 밤에 당신이 강나현 찾으러 가면서 나보고 혼자 병원에 가라고 했을 때. 그날 나 열이 39도까지 올랐어. 주치의는 휴가를 냈고 도우미들도 다 퇴근해서 당신이 차로 데려다주기만을 기다렸는데...”강민아의 설명에 반하준은 기억을 떠올렸다.“택시 타고 병원에 가지 않았어?”강민아는 왜 이런 사소한 일까지 마음에 두고 있는 걸까.“병원에 가서 여러 번 전화했는데 안 받더라...”“나현이가 술에 취해 해변으로 뛰어갔는데 어두워서 찾느라 정신이 없었어.”이렇게 말하며 반하준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강민아는 왜 자꾸 강나현에게 신경을 쓰는 건지.여자가 질투를 하기 시작하면 더 이상 사랑스럽지 않은데 말이다.앞을 응시하던 강민아의 눈앞이 흐려졌다.“반하준, 난 그때 병원에서 당신이 와서 임신중절수술 동의서에 사인하길 기다리고 있었어.”예상치 못한 말에 남자는 당황했다.“유산을 했다고? 왜 나한테 말 안 했어?”강민아는 거울 속 자신의 표정이 보기 싫어 시선을 내린 채 긴 속눈썹을 드리웠다.7년 동안 가슴을 가득 채웠던 사랑은 다 닳아 없어졌고 남은 건 증오뿐이었다.“그때 내가 왜 열이 났는지 기억나?”남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장난기 많은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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