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그래. 마음대로 해.”강나현은 반우정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귀족 어린이집의 경쟁은 유난히 치열했고 반우정보다 잘 만들고 연설문을 잘 쓴 아이들은 널리고 널렸다.조금 전 이미 우수작으로 뽑힌 다른 작품들을 둘러본 강나현은 반우정이 1등 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다.반우정은 작품을 들고 무대에 올랐다.아이는 흰색 긴팔 셔츠에 빨간 체크무늬 교복 치마를 입고 머리에 작은 머리핀을 두 개 꽂고 있었다.반우정은 사랑스럽고 올망졸망한 이목구비에 긴 속눈썹이 검은 눈동자를 더더욱 돋보이게 했다.하지만 아이가 무대에 오르자마자 몇몇 학부모들이 수군거렸다.“반씨 가문 꼬마 아가씨가 조금 뚱뚱한 것 같지 않아요?”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조롱했다.“저게 조금 뚱뚱한 건가요?”두 학부모는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킥킥 웃었다.재벌가 사모님들은 딸을 늘씬하고 아리따운 아가씨로 키우는데 반우정은 무척 건장한 체격이라 또래 여학생들 사이에서도 남다른 모습이었다.반우정은 무대에서 학부모와 심사위원들에게 손수 만든 작품을 선보였다.플라스틱 빨대로 지은 한옥이었다.“이건 엄마와 제가 함께 만든 한옥이에요. 진짜 한옥을 똑같은 비율로 100배 축소해서 만든 작품이죠.”반우정의 말이 끝나자마자 카메라 대각선에 있던 프롬프트 화면이 검게 변했다.강민아도 아이의 눈빛이 달라진 걸 알아차리고 고개를 홱 돌리니 검게 변한 프롬프트 화면과 함께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한 중년 여성의 모습도 보였다.입을 벙긋하며 무의식적으로 ‘어머님’ 소리가 나올 뻔했지만 꾹 삼켰다.“회장님.”“어머니.”강민아와 반하준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전 시어머니와 인사를 나눈 강민아는 센터 콘솔 쪽으로 가서 프롬프터가 왜 갑자기 꺼졌는지 물어보려는데 연진숙이 그런 그녀의 손목을 홱 낚아챘다.“내가 끄라고 했어.”강민아는 경악했다.“회장님, 왜 이러시는 거예요?”“정이가 상을 받으면 민이 마음은 어떨지 생각해 봤어? 민아 너는 엄마가 돼서 아이들을 공평하게 대할 줄도 모르니?”그녀를
아이들의 강연이 끝나고 연설문을 전부 외운 반우정이 의심할 여지 없이 1등을 차지했다.교장 유영호가 반우정에게 직접 꽃을 달아주었고 반현민은 아래에서 무대 위에 상을 받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태어나 처음으로 어린이집 행사에서 아무런 상도 받지 못한 채 웃음거리만 되었다.눈물이 핑 돌던 반현민은 사람들 틈에서 강민아를 찾았다.“우리 착한 손자!” 연진숙이 다가와 반현민을 품에 안았다.“할머니!” 반현민이 울음을 터뜨리자 연진숙은 따뜻하고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울지 마. 내 사랑하는 손자, 할머니 마음속에 넌 언제나 1등이야!”반현민이 코를 훌쩍거렸다.“하지만 정이에겐 꽃이 있잖아요... 할머니, 빨리 엄마한테 돌아와서 내 숙제 도와달라고 해요. 아니면 나도 엄마처럼 집 나갈 거예요!”할머니가 자신을 편애하기에 이런 협박이 잘 먹힌다는 걸 아이는 알고 있었다.연진숙이 문득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너 집 나가면 학교에서 올스타 상을 못 받아.”연진숙은 휴지를 꺼내 반현민의 얼굴을 닦아주었다.입학한 이래 학기마다 전교 최고 명예는 반현민의 몫이었다.반우정도 모든 성적이 그와 견줄만했지만 학기마다 주는 올스타 상은 오직 반현민만 받았다.연진숙이 이렇게 말했다.“넌 반씨 가문 도련님이니까 올스타 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 거야. 양심 없는 네 엄마 따라 반씨 가문을 떠날 거야?”반현민은 입술을 깨물며 연진숙의 품에 안겼다.아이는 엄마가 도와주지 않아도 전교 최고의 영예는 자신의 것이라고 믿었다.무대에서 내려온 반우정이 강나현 앞으로 찾아와 도도한 얼굴을 치켜들었다.“나한테 사과해요.”강나현이 대수롭지 않은 듯 웃으며 오히려 반우정을 조롱했다.“여자애가 사사건건 따지고 들면 사랑스럽지 않아.”반우정은 어디서 그런 말투를 배웠는지 말끝을 길게 늘렸다.“이모, 남자답게 쿨할 수는 없어요?”강나현의 얼굴이 어색하게 일그러졌다.“정이 너, 그런 말버릇은 어디서 배웠어!”반우정은 작품을 손에 든 채 목소리를 높였다.“내 한옥에 사
“할머니, 정이가 또 날 때려요!”반현민이 흐느끼자 반우정은 양옆으로 늘어뜨린 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태생적으로 힘이 세서 어렸을 때 힘을 잘 조절하지 못해 실수로 반현민을 몇 번 다치게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부터 연진숙은 반우정을 경계했다.반현민도 매번 할머니에게 찾아가 일러바쳤고 연진숙은 언제나 반현민의 편이었다.연진숙이 심술궂은 얼굴로 다가와 반우정의 가슴에 달린 작은 꽃을 떼어내려고 손을 뻗었다.“반우정, 학교에서 사람을 때렸으니 넌 꽃을 받을 자격이 없어! 선생님께 1년 동안 우수 학생으로 선발될 자격을 취소하라고 할 거야!”반현민은 할머니의 다리에 기대 우는 척 손으로 얼굴을 감싸더니 고개를 돌려 반우정을 몰래 흘겨보았다.제자리에 서 있던 반우정의 눈앞이 흐릿하게 변해갔다.울고 싶지 않은데 차오르는 눈물이 말을 듣지 않았다.강민아와 함께 만든 한옥은 심하게 변형되어 도저히 복원할 수 없는 상태였다.반우정은 코끝이 시큰거리며 폐허 속에 홀로 버려진 듯 어찌할 바를 몰랐다.문득 날씬한 실루엣이 아이의 앞을 가로막았다.엄마였다.“회장님, 반현민이 먼저 한옥을 망가뜨려서 우정이가 밀친 거잖아요.”연진숙은 여전히 일어나지 못한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강나현을 가리켰다.“네 딸이 오빠한테 손대는 것도 모자라 다른 사람까지 넘어뜨렸어!”연진숙은 강나현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녀가 다친 걸 이용해 강민아에게 한바탕 쓴소리를 해댔다.강나현도 딴생각이 있었다. 반하준의 관심을 받고 싶지만 나약한 환자로 낙인찍히고 싶지는 않았다.다섯 살짜리 여자아이가 발차기 한 번에 자신을 넘어뜨렸다는 걸 친구들이 알면 얼굴을 어떻게 들고 다니겠나.강민아가 정면으로 맞받아쳤다.“카메라 영상에 강나현이 일부러 우정이 한옥을 망가뜨리려 했던 게 찍혔어요. 우정이가 1등 하면 강나현이 사과하기로 내기한 것도 사람들이 다 들었고요.”강민아가 언성을 높였다.“강나현, 사과 안 해?”강나현은 종아리를 문지르며 말했다.“이젠 반우정이 나한
강당에 있던 다른 학부모들도 모두 휴대폰을 통해 인터넷에서 들끓고 있는 여론을 확인했다.“우리 학교가 검색어에 올랐어요!”“연 회장님의 정체가 순식간에 드러났네요.”“다들 그래도 보는 눈이 있네요. 반 대표가 이혼한 건 몰라도 강나현이 내연녀인 건 다 알아요.”“나도 강나현 싫어요. 허구한 날 내 남편이랑 시시덕거려요.”“엊그제 밤에 술에 취한 남편을 데리러 갔는데 강나현이 배 대표 무릎 위에 앉아 자기 속옷을 벗어서 서 대표 얼굴에 거는 거예요. 내 남편은 그냥 장난하는 거래요.”학부모들이 수군거리고 있을 때 연진숙은 카메라 감독을 질책했다.“당장 생방송 꺼. 반씨 가문 명예를 훼손하면 당신들도 고소할 거야!”감독은 진땀을 흘렸다.“연 회장님, 방송은 이미 껐습니다.”예상치 못하게 벌어진 일이라 뒤늦게 정신을 차린 감독은 서둘러 생방송 카메라를 껐지만 연진숙이 반우정을 퇴학시키겠다는 말은 고스란히 송출되었다.휴대폰이 터질 지경으로 연락을 받은 유영호가 서둘러 달려와 상황을 정리했다.“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는 게 좋겠어요. 다들 얼른 흩어지세요.”유영호는 학부모들을 강당 밖으로 인도하라는 듯 교사들에게 손짓했다.연진숙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반우정은 친손녀라 그냥 넘어갈 순 있어도 강민아는 절대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정아, 난 네가 아직 반씨 가문을 놓지 못했다는 거 알아. 다시 한번 기회를 줄 테니 잘 생각해 봐. 엄마랑 같이 살래, 아빠랑 살래?”반우정은 또렷한 눈망울로 말했다.“전 엄마랑 살래요.”연진숙은 강민아를 사납게 노려보며 아이에게 가스라이팅을 하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를 날렸다.“정아, 엄마가 혼자 반씨 가문을 떠나는 게 불쌍해서 같이 가려는 거지?”반하준과 강민아가 이혼 서류에 서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연진숙은 분노해 집안 물건을 마구 부숴버렸다.그녀는 오늘 특별히 강민아에게 한 수 가르치려고 학교에 찾아온 거다.“아니요.” 반우정은 망설임 없이 부인했다.“엄마 앞에서 속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연진숙은 지나치게 순진한 손녀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네 엄마 따라가면 학비도 못 낼 거야.”연진숙은 반우정이 앞으로 어떤 일을 겪게 될지 아직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녀는 원망 섞인 눈빛으로 강민아를 바라보았다.“고작 대학만 졸업한 네가 정이를 어떻게 키울지 두고 보겠어. 정이 너는 네 인생이 이미 바닥을 쳤고 민이와 뛰어넘을 수도 없는 간극이 생겼다는 걸 몰라. 아무리 노력해도 정이 넌 민이 수준에 도달할 수 없어!”강민아는 차분한 어투로 말했다.“둘 다 내 배 속에서 태어난 아이예요. 민이가 가진 건 정이도 가져야죠. 반씨 가문에서 공평하게 챙겨줄 수 없다면 내가 정이를 데리고 가서 원하는 대로 성장할 수 있게 도와줄 거예요.”강민아가 반우정을 데리고 떠나려던 찰나, 서류 가방을 들고 강당으로 들어오는 여러 명의 사람을 보았다.일행의 선두에 선 중년 남자는 단정한 흰색 셔츠에 검은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낯익은 얼굴을 마주한 강민아는 동공이 움츠러들었다.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까.“청... 청장님?”유영호가 놀라서 탄성을 지르자 사람들은 강당 입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교육청 청장 백강훈이야.”“대회도 끝났는데 백강훈이 왜 왔지?”유영호와 다른 학교 임원들이 서둘러 달려가 환영 인사를 건넸다.“청장님, 우리 학교에 와주셔서 영광입니다.”유영호는 [환경 지킴이] 강연대회를 생방송으로 진행한 게 대성공을 거둔 것 같아 환한 미소를 지었다.며칠째 영월로 출장을 갔던 교육청 청장까지 얼굴을 비추러 왔으니 말이다.유영호가 백강훈을 상석으로 안내하려던 순간 백강훈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전화를 했는데 안 받아서 내가 직접 왔어.”유영호의 등에는 순식간에 식은땀이 흘렀다.“죄송합니다. 휴대폰 배터리가 다 되어서...”상대는 변명을 듣고 싶지 않은 듯 곧바로 이렇게 물었다.“인터넷에 그 난리가 났는데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지?”유영호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아이고, 별일 아닙니다. 학부모들도
백강훈이 유영호에게 말했다.“이 일 처리하려고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여기로 왔어. 저 여자가 물러나지 않으면 승덕은 신입생이 아니라 지금 다니는 학생들도 남아있지 않을 거야.”유영호가 다급하게 연진숙을 돌아보자 그녀가 눈치를 주었다.“교장 선생님, 저희 부신 그룹이 승덕의 가장 큰 후원자인데...”유영호는 부신 그룹의 재정적 지원을 잃고 싶지 않았고 교육청 사람들에게 밉보이고 싶지도 않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어머니, 그만하세요!”반하준의 목소리가 주위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그렇게 창피를 당하고도 부족하세요?”그는 백강훈에게 말했다.“어머니 이사진 자리는 제가 이어받겠습니다.”거절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한 남자의 강렬한 기세가 보였다.백강훈이 반하준과 강민아를 번갈아 보다가 웃으며 말했다.“반 대표님은 모친보다 훌륭하게 해내길 바랍니다.”강민아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반우정에게 말했다.“우린 가자.”“강민아!”반하준의 목소리가 뒤에서 울려 퍼졌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엇, 하준아!”연진숙은 강당을 빠져나가는 강민아의 뒤를 쫓아가는 아들을 보며 서둘러 소리를 질렀다.유영호가 반하준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고 있던 백강훈을 보며 말했다.“반 대표님은 서경의 훌륭한 인물이죠. 저런 분이 이사진으로 계신다면 승덕은 분명히 한단계 더 비상할 겁니다.”“강민아도 한때 훌륭한 사람이었어.”백강훈이 감탄하듯 말했지만 유영호는 알아듣지 못해 당황했다. 하지만 청장이 자신을 멍청하다고 생각할까 봐 감히 묻지 못했다....반하준이 어린이집 주차장으로 갔을 때 강민아가 반우정을 차에 태우고 뒷좌석 문을 닫는 게 보였다.그녀가 앞으로 돌아가 운전석에 타려는데 반하준이 걸어오고 있었다.정장 차림에 긴 다리와 잘록한 허리, 눈에 띄게 잘생긴 얼굴을 지닌 남자는 늘 굳은 표정을 짓고 있어 강민아는 그가 꼭 빚이라도 받으러 다가오는 것 같았다.강민아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운전석에 올라타 문을 닫으려는 순간 강한 힘을 느꼈다.고개를
강민아가 선물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사파이어 팔찌가 놓여 있었다.그녀는 어두워진 눈동자로 팔찌를 집어 들며 물었다.“사이즈 얼마야?”“14.2.”무심코 뱉는 남자의 말에 웃음이 터진 강민아는 목구멍에서 비릿한 단맛이 느껴졌다.“그건 나현이 사이즈야.”그녀가 창밖으로 손을 내밀자 빛에 반짝이는 사파이어 팔찌가 손에서 툭 떨어졌다.반하준은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까만 동공에 감정의 파도가 요동쳤다.“나현이를 신경 쓰고 질투해서 나랑 싸우겠다는 거지? 나현이랑 나는 20년 넘게 알고 지냈는데 우리 둘 사이에 정말 뭐가 있었다면 네가 낄 틈이 있었겠어?”강민아는 반하준의 말에 아득한 기억을 떠올리듯 백미러에 그녀의 버석한 미소가 비쳤다.“기억나? 3년 전 어느 날 밤에 당신이 강나현 찾으러 가면서 나보고 혼자 병원에 가라고 했을 때. 그날 나 열이 39도까지 올랐어. 주치의는 휴가를 냈고 도우미들도 다 퇴근해서 당신이 차로 데려다주기만을 기다렸는데...”강민아의 설명에 반하준은 기억을 떠올렸다.“택시 타고 병원에 가지 않았어?”강민아는 왜 이런 사소한 일까지 마음에 두고 있는 걸까.“병원에 가서 여러 번 전화했는데 안 받더라...”“나현이가 술에 취해 해변으로 뛰어갔는데 어두워서 찾느라 정신이 없었어.”이렇게 말하며 반하준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강민아는 왜 자꾸 강나현에게 신경을 쓰는 건지.여자가 질투를 하기 시작하면 더 이상 사랑스럽지 않은데 말이다.앞을 응시하던 강민아의 눈앞이 흐려졌다.“반하준, 난 그때 병원에서 당신이 와서 임신중절수술 동의서에 사인하길 기다리고 있었어.”예상치 못한 말에 남자는 당황했다.“유산을 했다고? 왜 나한테 말 안 했어?”강민아는 거울 속 자신의 표정이 보기 싫어 시선을 내린 채 긴 속눈썹을 드리웠다.7년 동안 가슴을 가득 채웠던 사랑은 다 닳아 없어졌고 남은 건 증오뿐이었다.“그때 내가 왜 열이 났는지 기억나?”남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장난기 많은 반
“꺄악!”강나현은 반하준의 뒤에서 비명을 질렀다.반하준이 뒤를 돌아보니 강나현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머리카락이 흩어진 채 고개를 든 그녀가 빤히 반하준을 바라보았다.“하준 오빠...”남자의 머릿속에는 18살 나이에 생명을 다한 반유하가 불길 속에서 울부짖으며 자신을 부르는 장면이 떠올라 눈앞의 장면과 겹쳤다. 영원히 잊을 수 없었다.반하준은 강나현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를 부축해 줬다.남자의 차에 탄 강나현은 치솟는 기쁨을 애써 억누르며 말했다.“이 팔찌는 어떻게 할 거야?”강나현이 손바닥을 펼치며 물었다.“버려.” 남자의 목소리는 극도로 싸늘했다.“그래!” 강나현은 흔쾌히 답하며 창문을 향해 던지는 동작을 취하고는 손목을 돌려 조용히 팔찌를 주머니에 넣었다....반씨 저택 서재.잘생긴 남자가 책상 앞에 앉아 강민아의 진료 기록을 읽다가 ‘임신중절’이라는 단어에 시선이 멈칫했다.반하준은 물에 빠진 듯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컴퓨터 화면에는 태아의 다급한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문득 그 소리가 멈췄다. 보이지 않는 칼날이 반하준의 가슴을 난도질하는 듯 통증이 밀려와 허리를 굽히니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그 순간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전화기를 집어 드는 손마저 떨려와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천년이 지나도 녹지 않는 차가운 얼음처럼 그의 표정은 싸늘하기만 했다.“대표님, 사모님께서 이혼 서류에 약속했던 돈은 언제 보낼 건지 물어보셨어요.”“지금 보내.”반하준의 목소리가 다소 비현실적으로 들려 전화기 너머로 망설이던 비서가 말을 이어갔다.“대표님, 이혼 서류에는 사모님께 일시불로 120억을 줘야 한다고...”“줘.” 반하준의 말투는 단호했다.별 볼 일 없는 가정에서 태어난 강민아는 단번에 120억을 주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거다.120억은 그녀에게 삼키지 못할 떡이 될 거고, 반하준은 멀지 않아 그녀가 자신에게 다시 찾아와 애원할 거라 생각했다....강민아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은행 계좌에 120억이 입
심은호는 소파 주위를 두 번 돌아다니다가 육성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육성민이 퉁명스럽게 전화를 받는데 다급하면서도 우렁찬 심은호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삼촌이 빨리 가서 정이 데려와요. 민아 씨가 힘들게 오랜만에 옛사랑과 재회하는데 아무도 방해하면 안 되죠! 다음 주에 민아 씨 시범경기에 참가하니까 난 건강만 신경 쓸 거예요. 윤세현과 하룻밤 보내고 나면 기운을 차리지 못한다고요!”말하면서 심은호는 심장이 거듭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전화기 너머 헬스장에 있던 육성민은 짙은 파란색 트레이닝 복을 입고 있었는데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축축하게 젖은 머리카락도 고슴도치 가시처럼 하나씩 솟아 있었다.육성민은 얇은 입술을 달싹였다. 가슴이 들썩이면서 젖은 옷 아래에 감춰진 근육이 이따금 굴곡진 선을 자랑했다.그는 한 손에는 휴대폰을, 다른 한 손에는 20㎏짜리 아령을 들고 있었다.지금 당장 심은호가 앞에 서 있다면 육성민은 아령을 손에 들고 거침없이 그의 머리를 내리쳤을 것이다.“누가 그쪽 삼촌입니까?”육성민이 욕설을 퍼부으려는데 심은호가 진지하게 물었다.“내가 삼촌이라고 부르는 게 거슬리죠? 낯설어서 그래요. 내가 몇 번 부르면 익숙해질 거예요.”육성민이 차갑게 쏘아붙였다.“죽고 싶습니까?”전화기 너머 심은호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그쪽이 정이 안 데려가면 내가 가요. 하지만 내 주먹을 통제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네요. 윤세현을 감옥에 보내고 싶지만 민아 씨가 슬퍼할 테니 그러진 못하겠죠.”육성민은 심은호의 슬픈 독백을 들으며 머릿속에서 지끈거리는 통증만 느꼈다.그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솔직하게 다 얘기했다.“윤세현 씨는 여자고 민아 절친이에요. 당신 바보예요? 그쪽 클럽과 계약까지 했는데 아랫도리가 달려있는지 아닌지도 몰라요?”육성민의 꾸지람이 귀를 찔렀고, 심은호의 가느다란 속눈썹이 위로 쭉 뻗으며 2초 동안 머릿속이 하얘졌다.정신을 차린 그가 전화기 너머로 물었다.“윤세현이 여자라고요?”
그런 그녀를 끌어당겨 서경으로 데려간 건 강민아였다.강민아에 비하면 그녀는 평범하기 그지없었다.윤세현이 서경에 온 첫해에 강민아가 장학금으로 그녀를 먹여 살렸다.문라이트 클럽에 영입된 그녀가 매니저에게 윤세현을 소개해 그녀의 내비게이터가 된 것이었다.빈센트와 다른 멤버들은 거금을 들여 데려온 해외 엔지니어라 처음에는 윤세현과 말도 하지 않았다.그런데 강민아가 그녀의 손을 잡고 계속해서 앞으로 달릴 수 있게 도왔다.두 사람이 각자의 길을 가게 됐을 때 강민아는 거의 전 재산을 털어 윤세현이 유학하는 데 보태주었다.[14살 때 반 선생님은 날 서경으로 데려와 가장 비싼 옷을 입히고, 가장 비싼 수입 문구류를 쓰게 하고, 차를 배정해 주고, 개인 아파트에 살게 해줬어. 나를 타락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과중한 노동과 불필요한 사교 활동을 멀리하고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거야. 이제 스무 살이 된 나는 너에게도 같은 삶을 주고 싶어. 뉴욕에서 제일 좋은 아파트에 살고, 제일 좋은 학교에 다니고, 의식주 모두 최고급으로 마련해주고 싶어.세현아, 난 네가 더 높이, 더 멀리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어.]과거 강민아가 한 말을 윤세현은 항상 기억하고 있었다.윤세현은 강민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네 말대로 여러 학과를 공부하다가 연구와는 적성이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미술, 디자인, 감상을 전공하게 됐어. 네가 내 비싼 학비를 지원해 주고 내가 용감하게 꿈을 이룰 수 있는 자본과 뒷심이 되어주었어. 민아야, 내가 만든 패션 브랜드는 밀란 패션쇼에 올랐고, 내가 디자인한 주얼리는 헐리워드에서 서로 뺏느라 바빠. 네 도움이 없었다면 난 정상에 오르지 못했을 거야. 네가 날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줬어. 이젠 내가 돌아왔으니까 나도 널 돕고 싶어. 더 나은 네가 될 수 있게!”윤세현은 귓불이 붉게 물들면서도 오랫동안 마음에 간직했던 말을 용기 내어 강민아에게 전했다.강민아는 가슴에 뜨거운 열기가 소용돌이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연분홍빛
“...”할 말이 없다....저녁이 되자 강민아는 한 상 가득 차렸고 윤세현은 전부 자신이 좋아하던 음식인 것을 보고 순식간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그녀는 강민아 옆에 앉아 혀까지 삼켜버릴 기세로 고기찜을 먹기 시작했다.정신없이 허겁지겁 먹는 그녀를 정이가 빤히 바라보자 윤세현은 순간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졌다.“정아, 미안해.”정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엄마 요리가 맛있다고 생각하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네요. 현이 씨, 많이 먹어요!”과거 반씨 가문에서 연진숙은 강민아에게 반하준과 아이들의 하루 세 끼를 책임지라고 했는데, 강민아가 요리할 때마다 반하준과 민이는 늘 트집을 잡았다.매번 강민아가 하는 요리만 먹으면서도 민이는 그녀가 한 요리를 마지못해 먹는다며 둘러대곤 했다.“민아, 그렇게 먹기 싫으면 먹지 마.”정이가 말해봤지만 민이는 이렇게 대꾸했다.“엄마 체면 때문에 먹어주는 거야!”할머니에게 배운 버릇이라는 걸 안다. 반씨 가문 미래 후계자로서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절대 남에게 드러내지 말라고 가르쳤으니까.그것도 모자라 강민아에게 더 훌륭한 재벌가 사모님이 되도록 노력하라고 했다.하지만 사람 마음에 가시가 박히면 그 가시를 빼버려도 아물지 않는 상처가 남기 마련이다.설령 엄마가 정말 부족한 게 있어도 정이는 강민아가 속상해하는 게 싫었다.게다가 정이 눈에 매일 엄마가 해준 요리를 먹는 건 무척이나 행복한 일이었다.강민아는 맛있게 먹는 윤세현을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요리를 잘했지만 반씨 가문에서 7년 동안 지내면서 점차 자신의 요리 솜씨에 자신감을 잃어갔다.윤세현은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또 한 그릇을 떠 왔다.강민아가 반찬 네 가지와 국물을 끓였는데 접시가 전부 텅텅 비어버렸다.세 사람이 식사를 마치고 윤세현과 정이는 설거지를 도맡았다. 아이는 윤세현을 데리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음식물 쓰레기도 척척 버렸다.강민아가 따뜻한 물 석 잔을 따라 주방에서 나왔을 때 윤세현은 캐리어에서 접힌 서류를 꺼내 테이블
그는 루나가 일부러 자신을 꼬드긴다고 생각했다.여자들이 이런 식으로 밀고 당기는 걸 수없이 봐왔으니까.하지만 루나가 원하는 스포츠카를 경매에 부쳤는데도 루나가 나타나도록 유인하는 데 실패했다.이에 반하준은 종주산에서의 레이스가 빠르고 격정적인 하룻밤 단꿈이 아니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그런데 이번에 루나가 다시 나타난다는 말에 반하준은 엄규민에게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국제 레이싱 대회에서 루나가 나타나면 잘 지켜봐!”그는 루나의 헬멧을 벗기고 그녀의 진짜 모습을 보고 싶다는 강한 충동이 들었다....검은색 드림이 도로 위를 달리고 조수석에 윤세현이 앉았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운전하는 강민아를 바라보며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마치 5년 전,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이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5년 동안 연락이 끊겼다가 다시 만났어도 마치 서로의 마음이 한 번도 떨어지지 않은 것처럼 조금의 어색함도 느껴지지 않았다.“발동기가 소음이 좀 심하네. 오늘 밤에 정비소로 보내서 제대로 고쳐야겠어.”강민아가 대답했다.“그래, 같이 가자.”그녀와 단둘이 있으니 윤세현은 부쩍 말수가 늘었다.“내가 돌아와서 시범경기에 참여하는 거야?”강민아는 흑백이 분명한 눈동자로 앞만 주시했다.“세현아, 난 언제 시작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해. 내가 다시 레이서의 길을 걷게 된다면 가장 먼저 함께하고 싶은 사람은 너야.”그녀의 말에 윤세현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다시 레이서의 길을 가려고?”“응.”강민아는 핸들을 꽉 잡았다.“이번에는 더 이상 루나라는 이름에 숨지 않고 전 세계에 루나의 본명이 강민아라는 걸 알릴 거야.”육성민이 운전하는 SUV 뒷좌석엔 심은호와 정이가 앉아 있었다.심은호는 두 손을 운전석과 조수석 뒤편에 올려놓은 채 시선은 줄곧 이미 차들 사이로 사라진 드림을 노려보고 있었다.“쫓아가요. 바짝 붙어요. 기사님, 제 아내와 바람난 남자가 저 차 안에 있어요!”육성민의 이마가 들썩이며 푸른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당장 차 밖으로
“루나도 시범경기에 참가한다고요?”이 소식을 처음 들은 엄규민은 강민아에게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그걸 어떻게 알아요?”하지만 이내 알 것 같았다. 윤세현이 강민아에게 말했겠지.강민아와 윤세현은 워낙 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그녀가 레이싱에 대해 전혀 몰라도 윤세현으로부터 루나에 대해 들었을 것이다.루나가 시범 경기에 출전한다는 소식을 접한 빈센트는 승부욕에 불이 붙었다.“루나가 복귀한다고요?”그는 다른 동료들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루나의 성공은 우리 덕분이라는 걸 보여줄 거예요. 우리의 도움 없이 루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빈센트가 윤세현에게 흥분하며 말했다.“루나가 문라이트 클럽 대표의 챙김을 받아 우리보다 더 대단한 팀을 만들어야만 시범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따낼 수 있을 거야.”또 다른 엔지니어도 이렇게 말했다.“현재 전 세계에서 우리보다 더 강한 레이싱 팀은 없어. 우리는 아마추어 선수로 루나를 이길 거야. 윤세현, 똑똑히 지켜봐!”윤세현의 눈은 빨갛게 달아올랐고 얼굴은 피가 거꾸로 솟아올라 연분홍빛으로 물들었다.오만한 외국인들에게 너무 화가 나서 말도 잇지 못했다.그때 시원한 물처럼 차가운 강민아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그러면 어디 한번 두고 보죠. 너무 비참하게 지지는 않길 바라요.”강민아는 그들을 향해 담담한 미소를 짓고는 차가운 손을 윤세현의 뜨거운 볼에 갖다 댔다.“열 좀 식히고 집에 가자.”심은호는 강민아와 윤세현의 다정한 모습에 입에서 쓴맛이 느껴졌다.그는 팔짱을 낀 채 엔지니어라는 사람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문라이트 레이싱 클럽이 해체된 후 루나를 위해 일하던 팀원들은 여러 회사에 스카우트되어 높은 연봉을 받으며 일하게 됐다.빈센트는 문라이트 레이싱 팀에서 총괄 엔지니어로 있다가 클럽에서 일하던 경험으로 자서전까지 썼다.루나 곁에서 일했다는 경험만으로 여러 명문대에 객원 교수로 초빙되기도 했다.심은호가 일을 맡긴 매니저의 눈에 띄어 영입되었고 루나 덕에 유명세를 치렀으면서 이제 저만치 콧
엄규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윤세현이 말했다.“전 부신 그룹이 싫어요. 제가 소유한 회사 전부 부신 그룹과 협업하지 않을 거예요.”엄규민은 의아했다.“혹시 부신 그룹에 대해 어떤 오해가 있으신가요?”그가 강민아를 돌아보더니 알겠다는 듯 윤세현에게 물었다.“혹시 강민아 씨가 부신 그룹에 대해 좋지 않은 얘기를 했나요? 윤 선생님, 오해하지 마세요. 강민아 씨는 부신 그룹에 대해 모릅니다. 게다가 저희 대표님과 사이도 좋지 않습니다. 반 대표님께선 거금을 들여서 강나현 씨 레이싱 코치로 모시고 싶어 합니다. 신중하게 생각을...”“됐어요.”윤세현은 엄규민을 경계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강민아에게 딱 붙어 그녀의 어깨에 턱을 올려놓았다.“난 루나만 위해서 일해요.”“윤세현, 하늘에서 떨어지는 돈을 왜 안 받아?”한 중년 남자가 다가왔다. 그의 이름은 빈센트, 문라이트 레이싱 클럽 엔지니어 중 한 명이었다.윤세현의 얼굴이 굳어졌다.“반하준이 세계적인 대회에서 프로 레이서가 아닌 아마추어 선수를 도와달라는데 부끄럽지 않아요?”빈센트는 대수롭지 않은 듯 두 손을 벌리며 말했다.“그냥 시범 경기잖아.”강민아는 엄규민과 윤세현의 말에서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강나현이 국제 레이싱 대회에 출전한다고요?” 엄규민은 강민아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저희 부신 그룹이 이번 서경에서 열리는 국제 레이싱 대회의 스폰서 중 하나라 강나현 씨가 레이서로 시범 경기에 출전할 예정입니다.”그러면서 웃으며 덧붙였다.“강민아 씨는 잘 모르겠지만 윤 선생님과 친구시죠? 윤 선생님은 최고의 여자 레이서 루나 선수 곁을 지켰어요. 훌륭한 내비게이터라 반 대표님께서 거액을 들여 데려가려는 거니까 강민아 씨는 윤 선생님 돈 버는 데 방해하지 마세요.”“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는 줄 아네.”강민아의 말에 엄규민의 잘난 척하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고, 옆에서는 윤세현이 빈센트에게 말했다.“아마추어 레이서가 시범 경기에 출전했다는 건 시범 경기에 출전할 수 있었던
심은호는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어가며 손발이 차가워지고 속에선 열불이 들끓었다.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다.강민아의 침대가 그렇게 크다면 셋이 같이 자는 건 안 될 게 뭐가 있나!말문이 막힌 심은호의 목울대가 요동쳤다.강민아는 심은호의 붉어진 눈가를 보고 물었다.“심은호 씨, 왜 그래요?”남자가 고개를 저으며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아니에요. 민아 씨가 행복하면 됐어요.”강민아는 어리둥절했고, 두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고 있던 윤세현이 턱을 그녀의 어깨 위로 올려놓으며 작게 말했다.“저 사람 이상해.”심은호는 두 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살면서 이런 서러움을 당해본 적이 없었다.저 기생오라비가 강민아의 애정을 믿고 이 틈에 그를 모함하고 있다.심은호가 입을 열어 조롱하려는데...강민아가 다정하게 윤세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우선 집에 가자. 10시간 동안 비행기 타느라 힘들었지? 집에 가서 씻고 푹 쉬어.”심은호는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물에 빠진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짓는 그의 머리 위로 만약 귀가 있었다면 축 늘어졌을 거다.‘그래, 윤세현만 챙기지.’그는 그냥 어두운 구석에 숨어서 혼자 상처를 핥으며 질투심에 미쳐버릴 수밖에. 잔뜩 뒤틀리고 벌레가 되어서 기어다니기나 하겠지.심은호에게서 원망 섞인 기운이 끊임없이 흘러나오자 윤세현은 자신과 강민아의 등을 완전히 밀착시켰다.“응!”그러면서 강민아의 코트에 비비적거렸다.5년 동안 떨어져 지냈지만 두 사람은 한 번도 헤어진 적 없었던 것처럼 가까웠다.두 사람이 서로에게 기대고 나서야 윤세현은 5년 동안 비어 있던 자신의 마음이 비로소 채워졌음을 느꼈다.“저 사람 윤세현 아닌가?”“우리랑 같은 비행기 타고 왔는데 몰랐어?”입국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커다란 짐을 카트에 가득 싣고 온 외국인들이 여러 명 있었다.그들은 한참 동안 윤세현을 관찰하면서 윤세현의 품에 안겨 있는 강민아를 살펴보았다.윤세현이 누구와 이토록 가깝게 지내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윤세현은 칼날 같은 심은호의 눈빛을 보고 작은 심장이 몇 번이나 놀랐는지 모른다.‘누구지? 낯이 익은데.’이제 막 비행기에서 내렸는데 원수라도 만난 걸까.정이는 가볍게 캐리어를 끌며 매끄러운 타일 위를 날아다녔다.심은호의 눈빛에 놀란 윤세현은 강민아의 뒤로 숨었다.낯을 가리는 그녀에겐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무척 힘들었는데 빤히 쳐다보는 이성의 눈빛은 더더욱 불편했다.늘 머리를 짧게 자르고 옷도 중성적으로 입어서 이성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하는 일이 드물었다.본다고 해도 잘생긴 외모에 대부분은 우호적인 시선을 보냈다.육성민이 덤덤하게 윤세현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오랜만이네요.”윤세현도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강민아의 오빠에 대해서는 키 크고 가슴도 크다는 것 외엔 별다른 기억이 없었다.강민아가 윤세현에게 소개했다.“이쪽은 심은호 씨, 문라이트 클럽 대표야.”윤세현은 제법 놀라며 고개를 돌려 강민아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난 줄곧 문라이트 대표가 느끼한 아저씨인 줄 알았어.”심은호는 빠득 이가 갈렸다.‘저 기생오라비가!’감히 그가 보는 앞에서 강민아와 귓속말을 주고받는 건 기선제압이 아니고 뭘까.심은호는 서늘한 시선으로 윤세현을 뚫어져라 보며 손을 내밀고 차갑게 말했다.“안녕하세요.”윤세현은 강민아의 팔짱을 낀 채 심은호와 악수할 생각이 없는 듯 고개만 끄덕였다.심은호의 어두운 눈동자엔 두꺼운 얼음이 한층 더 쌓였다.강민아가 설명했다.“세현이가 낯을 가려서 남자와 신체적 접촉하는 게 익숙하지 않아요.”강민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심은호가 강한 적대감을 드러낸 탓인지 윤세현이 목을 움츠리며 강민아 뒤로 숨었다.그녀의 두 손이 자연스럽게 강민아의 허리를 감쌌다.이렇게 강민아를 안으면 안정감이 느껴졌다.심은호의 눈동자에 드리웠던 차가운 얼음이 쩍쩍 갈라졌다.자주 사람을 죽이는 친구에게 먼저 오른손을 자를지, 왼손을 자를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그런데 강민아는 윤세현의 스킨십에
심은호는 경멸 섞인 야유를 내뱉었다.“허, 누구 심장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네요.”그가 딱딱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오만하게 비아냥거린 뒤 육성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육성민의 표정도 굳어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팔짱을 낀 채 다정하게 안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볼 뿐, 깊고 어두운 눈가엔 흐뭇한 감정까지 담겨 있었다.‘나만 한심한 놈이야?’부서진다는 심장은 심은호 것이었나보다.‘역시 육 소위, 흐트러짐이 없네.’사실은 그도 당장 달려가 윤세현에게 주먹을 날리고 싶지만 강민아 때문에 억지로 참는 게 분명하다.심은호는 깊게 심호흡하며 육성민을 따라 배우기로 했다. ‘이 정도 아량도 없이 어떻게 첩 노릇을 해?’“나도 뽀뽀할래요!”윤세현에게 다정하게 입 맞추는 강민아를 본 정이도 기회가 오자마자 달려들었다.강민아가 정이를 안아들자 정이는 윤세현의 볼에 여러 번 뽀뽀했다.윤세현의 눈가는 촉촉했고 목까지 빨개진 그녀가 수줍게 말했다.“네 딸이야?”강민아는 고개를 끄덕였다.“응, 이름은 강윤정, 그냥 정이라고 불러.”윤세현은 다정하게 정이를 안아주었고 강민아는 그녀와 정이를 동시에 품에 가두었다.심은호는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옛말에 하늘에서 떨어져 다친 학처럼 잘생긴 얼굴이 창백해졌다.“그쪽은 왜 안 가요?”심은호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내가 왜 가요?”육성민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그쪽이 죽이고 시체는 내가 처리할게요.”심은호는 육성민의 감옥생활까지 생각해 둔 상태였다.한꺼번에 두 라이벌을 제거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육성민이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내며 윤세현에 대한 심은호의 적대감을 알아차리고 경고했다.“오랜만에 만났는데 방해하지 마세요.”심은호는 경악했다.“오빠가 돼서 둘이 공공장소에서 뽀뽀하고 껴안는 걸 그냥 놔둘 거예요?”육성민은 크게 이상해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그게 뭐 어때서요? 민아가 얼마 만에 윤세현을 만난 건데요.”심은호는 다시 봤다는 눈빛으로 육성민을 바라보았다.“육 소위님은 진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