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그래. 마음대로 해.”강나현은 반우정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귀족 어린이집의 경쟁은 유난히 치열했고 반우정보다 잘 만들고 연설문을 잘 쓴 아이들은 널리고 널렸다.조금 전 이미 우수작으로 뽑힌 다른 작품들을 둘러본 강나현은 반우정이 1등 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다.반우정은 작품을 들고 무대에 올랐다.아이는 흰색 긴팔 셔츠에 빨간 체크무늬 교복 치마를 입고 머리에 작은 머리핀을 두 개 꽂고 있었다.반우정은 사랑스럽고 올망졸망한 이목구비에 긴 속눈썹이 검은 눈동자를 더더욱 돋보이게 했다.하지만 아이가 무대에 오르자마자 몇몇 학부모들이 수군거렸다.“반씨 가문 꼬마 아가씨가 조금 뚱뚱한 것 같지 않아요?”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조롱했다.“저게 조금 뚱뚱한 건가요?”두 학부모는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킥킥 웃었다.재벌가 사모님들은 딸을 늘씬하고 아리따운 아가씨로 키우는데 반우정은 무척 건장한 체격이라 또래 여학생들 사이에서도 남다른 모습이었다.반우정은 무대에서 학부모와 심사위원들에게 손수 만든 작품을 선보였다.플라스틱 빨대로 지은 한옥이었다.“이건 엄마와 제가 함께 만든 한옥이에요. 진짜 한옥을 똑같은 비율로 100배 축소해서 만든 작품이죠.”반우정의 말이 끝나자마자 카메라 대각선에 있던 프롬프트 화면이 검게 변했다.강민아도 아이의 눈빛이 달라진 걸 알아차리고 고개를 홱 돌리니 검게 변한 프롬프트 화면과 함께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한 중년 여성의 모습도 보였다.입을 벙긋하며 무의식적으로 ‘어머님’ 소리가 나올 뻔했지만 꾹 삼켰다.“회장님.”“어머니.”강민아와 반하준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전 시어머니와 인사를 나눈 강민아는 센터 콘솔 쪽으로 가서 프롬프터가 왜 갑자기 꺼졌는지 물어보려는데 연진숙이 그런 그녀의 손목을 홱 낚아챘다.“내가 끄라고 했어.”강민아는 경악했다.“회장님, 왜 이러시는 거예요?”“정이가 상을 받으면 민이 마음은 어떨지 생각해 봤어? 민아 너는 엄마가 돼서 아이들을 공평하게 대할 줄도 모르니?”그녀를
아이들의 강연이 끝나고 연설문을 전부 외운 반우정이 의심할 여지 없이 1등을 차지했다.교장 유영호가 반우정에게 직접 꽃을 달아주었고 반현민은 아래에서 무대 위에 상을 받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태어나 처음으로 어린이집 행사에서 아무런 상도 받지 못한 채 웃음거리만 되었다.눈물이 핑 돌던 반현민은 사람들 틈에서 강민아를 찾았다.“우리 착한 손자!” 연진숙이 다가와 반현민을 품에 안았다.“할머니!” 반현민이 울음을 터뜨리자 연진숙은 따뜻하고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울지 마. 내 사랑하는 손자, 할머니 마음속에 넌 언제나 1등이야!”반현민이 코를 훌쩍거렸다.“하지만 정이에겐 꽃이 있잖아요... 할머니, 빨리 엄마한테 돌아와서 내 숙제 도와달라고 해요. 아니면 나도 엄마처럼 집 나갈 거예요!”할머니가 자신을 편애하기에 이런 협박이 잘 먹힌다는 걸 아이는 알고 있었다.연진숙이 문득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너 집 나가면 학교에서 올스타 상을 못 받아.”연진숙은 휴지를 꺼내 반현민의 얼굴을 닦아주었다.입학한 이래 학기마다 전교 최고 명예는 반현민의 몫이었다.반우정도 모든 성적이 그와 견줄만했지만 학기마다 주는 올스타 상은 오직 반현민만 받았다.연진숙이 이렇게 말했다.“넌 반씨 가문 도련님이니까 올스타 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 거야. 양심 없는 네 엄마 따라 반씨 가문을 떠날 거야?”반현민은 입술을 깨물며 연진숙의 품에 안겼다.아이는 엄마가 도와주지 않아도 전교 최고의 영예는 자신의 것이라고 믿었다.무대에서 내려온 반우정이 강나현 앞으로 찾아와 도도한 얼굴을 치켜들었다.“나한테 사과해요.”강나현이 대수롭지 않은 듯 웃으며 오히려 반우정을 조롱했다.“여자애가 사사건건 따지고 들면 사랑스럽지 않아.”반우정은 어디서 그런 말투를 배웠는지 말끝을 길게 늘렸다.“이모, 남자답게 쿨할 수는 없어요?”강나현의 얼굴이 어색하게 일그러졌다.“정이 너, 그런 말버릇은 어디서 배웠어!”반우정은 작품을 손에 든 채 목소리를 높였다.“내 한옥에 사
“할머니, 정이가 또 날 때려요!”반현민이 흐느끼자 반우정은 양옆으로 늘어뜨린 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태생적으로 힘이 세서 어렸을 때 힘을 잘 조절하지 못해 실수로 반현민을 몇 번 다치게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부터 연진숙은 반우정을 경계했다.반현민도 매번 할머니에게 찾아가 일러바쳤고 연진숙은 언제나 반현민의 편이었다.연진숙이 심술궂은 얼굴로 다가와 반우정의 가슴에 달린 작은 꽃을 떼어내려고 손을 뻗었다.“반우정, 학교에서 사람을 때렸으니 넌 꽃을 받을 자격이 없어! 선생님께 1년 동안 우수 학생으로 선발될 자격을 취소하라고 할 거야!”반현민은 할머니의 다리에 기대 우는 척 손으로 얼굴을 감싸더니 고개를 돌려 반우정을 몰래 흘겨보았다.제자리에 서 있던 반우정의 눈앞이 흐릿하게 변해갔다.울고 싶지 않은데 차오르는 눈물이 말을 듣지 않았다.강민아와 함께 만든 한옥은 심하게 변형되어 도저히 복원할 수 없는 상태였다.반우정은 코끝이 시큰거리며 폐허 속에 홀로 버려진 듯 어찌할 바를 몰랐다.문득 날씬한 실루엣이 아이의 앞을 가로막았다.엄마였다.“회장님, 반현민이 먼저 한옥을 망가뜨려서 우정이가 밀친 거잖아요.”연진숙은 여전히 일어나지 못한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강나현을 가리켰다.“네 딸이 오빠한테 손대는 것도 모자라 다른 사람까지 넘어뜨렸어!”연진숙은 강나현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녀가 다친 걸 이용해 강민아에게 한바탕 쓴소리를 해댔다.강나현도 딴생각이 있었다. 반하준의 관심을 받고 싶지만 나약한 환자로 낙인찍히고 싶지는 않았다.다섯 살짜리 여자아이가 발차기 한 번에 자신을 넘어뜨렸다는 걸 친구들이 알면 얼굴을 어떻게 들고 다니겠나.강민아가 정면으로 맞받아쳤다.“카메라 영상에 강나현이 일부러 우정이 한옥을 망가뜨리려 했던 게 찍혔어요. 우정이가 1등 하면 강나현이 사과하기로 내기한 것도 사람들이 다 들었고요.”강민아가 언성을 높였다.“강나현, 사과 안 해?”강나현은 종아리를 문지르며 말했다.“이젠 반우정이 나한
강당에 있던 다른 학부모들도 모두 휴대폰을 통해 인터넷에서 들끓고 있는 여론을 확인했다.“우리 학교가 검색어에 올랐어요!”“연 회장님의 정체가 순식간에 드러났네요.”“다들 그래도 보는 눈이 있네요. 반 대표가 이혼한 건 몰라도 강나현이 내연녀인 건 다 알아요.”“나도 강나현 싫어요. 허구한 날 내 남편이랑 시시덕거려요.”“엊그제 밤에 술에 취한 남편을 데리러 갔는데 강나현이 배 대표 무릎 위에 앉아 자기 속옷을 벗어서 서 대표 얼굴에 거는 거예요. 내 남편은 그냥 장난하는 거래요.”학부모들이 수군거리고 있을 때 연진숙은 카메라 감독을 질책했다.“당장 생방송 꺼. 반씨 가문 명예를 훼손하면 당신들도 고소할 거야!”감독은 진땀을 흘렸다.“연 회장님, 방송은 이미 껐습니다.”예상치 못하게 벌어진 일이라 뒤늦게 정신을 차린 감독은 서둘러 생방송 카메라를 껐지만 연진숙이 반우정을 퇴학시키겠다는 말은 고스란히 송출되었다.휴대폰이 터질 지경으로 연락을 받은 유영호가 서둘러 달려와 상황을 정리했다.“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는 게 좋겠어요. 다들 얼른 흩어지세요.”유영호는 학부모들을 강당 밖으로 인도하라는 듯 교사들에게 손짓했다.연진숙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반우정은 친손녀라 그냥 넘어갈 순 있어도 강민아는 절대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정아, 난 네가 아직 반씨 가문을 놓지 못했다는 거 알아. 다시 한번 기회를 줄 테니 잘 생각해 봐. 엄마랑 같이 살래, 아빠랑 살래?”반우정은 또렷한 눈망울로 말했다.“전 엄마랑 살래요.”연진숙은 강민아를 사납게 노려보며 아이에게 가스라이팅을 하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를 날렸다.“정아, 엄마가 혼자 반씨 가문을 떠나는 게 불쌍해서 같이 가려는 거지?”반하준과 강민아가 이혼 서류에 서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연진숙은 분노해 집안 물건을 마구 부숴버렸다.그녀는 오늘 특별히 강민아에게 한 수 가르치려고 학교에 찾아온 거다.“아니요.” 반우정은 망설임 없이 부인했다.“엄마 앞에서 속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연진숙은 지나치게 순진한 손녀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네 엄마 따라가면 학비도 못 낼 거야.”연진숙은 반우정이 앞으로 어떤 일을 겪게 될지 아직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녀는 원망 섞인 눈빛으로 강민아를 바라보았다.“고작 대학만 졸업한 네가 정이를 어떻게 키울지 두고 보겠어. 정이 너는 네 인생이 이미 바닥을 쳤고 민이와 뛰어넘을 수도 없는 간극이 생겼다는 걸 몰라. 아무리 노력해도 정이 넌 민이 수준에 도달할 수 없어!”강민아는 차분한 어투로 말했다.“둘 다 내 배 속에서 태어난 아이예요. 민이가 가진 건 정이도 가져야죠. 반씨 가문에서 공평하게 챙겨줄 수 없다면 내가 정이를 데리고 가서 원하는 대로 성장할 수 있게 도와줄 거예요.”강민아가 반우정을 데리고 떠나려던 찰나, 서류 가방을 들고 강당으로 들어오는 여러 명의 사람을 보았다.일행의 선두에 선 중년 남자는 단정한 흰색 셔츠에 검은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낯익은 얼굴을 마주한 강민아는 동공이 움츠러들었다.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까.“청... 청장님?”유영호가 놀라서 탄성을 지르자 사람들은 강당 입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교육청 청장 백강훈이야.”“대회도 끝났는데 백강훈이 왜 왔지?”유영호와 다른 학교 임원들이 서둘러 달려가 환영 인사를 건넸다.“청장님, 우리 학교에 와주셔서 영광입니다.”유영호는 [환경 지킴이] 강연대회를 생방송으로 진행한 게 대성공을 거둔 것 같아 환한 미소를 지었다.며칠째 영월로 출장을 갔던 교육청 청장까지 얼굴을 비추러 왔으니 말이다.유영호가 백강훈을 상석으로 안내하려던 순간 백강훈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전화를 했는데 안 받아서 내가 직접 왔어.”유영호의 등에는 순식간에 식은땀이 흘렀다.“죄송합니다. 휴대폰 배터리가 다 되어서...”상대는 변명을 듣고 싶지 않은 듯 곧바로 이렇게 물었다.“인터넷에 그 난리가 났는데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지?”유영호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아이고, 별일 아닙니다. 학부모들도
백강훈이 유영호에게 말했다.“이 일 처리하려고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여기로 왔어. 저 여자가 물러나지 않으면 승덕은 신입생이 아니라 지금 다니는 학생들도 남아있지 않을 거야.”유영호가 다급하게 연진숙을 돌아보자 그녀가 눈치를 주었다.“교장 선생님, 저희 부신 그룹이 승덕의 가장 큰 후원자인데...”유영호는 부신 그룹의 재정적 지원을 잃고 싶지 않았고 교육청 사람들에게 밉보이고 싶지도 않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어머니, 그만하세요!”반하준의 목소리가 주위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그렇게 창피를 당하고도 부족하세요?”그는 백강훈에게 말했다.“어머니 이사진 자리는 제가 이어받겠습니다.”거절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한 남자의 강렬한 기세가 보였다.백강훈이 반하준과 강민아를 번갈아 보다가 웃으며 말했다.“반 대표님은 모친보다 훌륭하게 해내길 바랍니다.”강민아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반우정에게 말했다.“우린 가자.”“강민아!”반하준의 목소리가 뒤에서 울려 퍼졌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엇, 하준아!”연진숙은 강당을 빠져나가는 강민아의 뒤를 쫓아가는 아들을 보며 서둘러 소리를 질렀다.유영호가 반하준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고 있던 백강훈을 보며 말했다.“반 대표님은 서경의 훌륭한 인물이죠. 저런 분이 이사진으로 계신다면 승덕은 분명히 한단계 더 비상할 겁니다.”“강민아도 한때 훌륭한 사람이었어.”백강훈이 감탄하듯 말했지만 유영호는 알아듣지 못해 당황했다. 하지만 청장이 자신을 멍청하다고 생각할까 봐 감히 묻지 못했다....반하준이 어린이집 주차장으로 갔을 때 강민아가 반우정을 차에 태우고 뒷좌석 문을 닫는 게 보였다.그녀가 앞으로 돌아가 운전석에 타려는데 반하준이 걸어오고 있었다.정장 차림에 긴 다리와 잘록한 허리, 눈에 띄게 잘생긴 얼굴을 지닌 남자는 늘 굳은 표정을 짓고 있어 강민아는 그가 꼭 빚이라도 받으러 다가오는 것 같았다.강민아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운전석에 올라타 문을 닫으려는 순간 강한 힘을 느꼈다.고개를
강민아가 선물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사파이어 팔찌가 놓여 있었다.그녀는 어두워진 눈동자로 팔찌를 집어 들며 물었다.“사이즈 얼마야?”“14.2.”무심코 뱉는 남자의 말에 웃음이 터진 강민아는 목구멍에서 비릿한 단맛이 느껴졌다.“그건 나현이 사이즈야.”그녀가 창밖으로 손을 내밀자 빛에 반짝이는 사파이어 팔찌가 손에서 툭 떨어졌다.반하준은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까만 동공에 감정의 파도가 요동쳤다.“나현이를 신경 쓰고 질투해서 나랑 싸우겠다는 거지? 나현이랑 나는 20년 넘게 알고 지냈는데 우리 둘 사이에 정말 뭐가 있었다면 네가 낄 틈이 있었겠어?”강민아는 반하준의 말에 아득한 기억을 떠올리듯 백미러에 그녀의 버석한 미소가 비쳤다.“기억나? 3년 전 어느 날 밤에 당신이 강나현 찾으러 가면서 나보고 혼자 병원에 가라고 했을 때. 그날 나 열이 39도까지 올랐어. 주치의는 휴가를 냈고 도우미들도 다 퇴근해서 당신이 차로 데려다주기만을 기다렸는데...”강민아의 설명에 반하준은 기억을 떠올렸다.“택시 타고 병원에 가지 않았어?”강민아는 왜 이런 사소한 일까지 마음에 두고 있는 걸까.“병원에 가서 여러 번 전화했는데 안 받더라...”“나현이가 술에 취해 해변으로 뛰어갔는데 어두워서 찾느라 정신이 없었어.”이렇게 말하며 반하준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강민아는 왜 자꾸 강나현에게 신경을 쓰는 건지.여자가 질투를 하기 시작하면 더 이상 사랑스럽지 않은데 말이다.앞을 응시하던 강민아의 눈앞이 흐려졌다.“반하준, 난 그때 병원에서 당신이 와서 임신중절수술 동의서에 사인하길 기다리고 있었어.”예상치 못한 말에 남자는 당황했다.“유산을 했다고? 왜 나한테 말 안 했어?”강민아는 거울 속 자신의 표정이 보기 싫어 시선을 내린 채 긴 속눈썹을 드리웠다.7년 동안 가슴을 가득 채웠던 사랑은 다 닳아 없어졌고 남은 건 증오뿐이었다.“그때 내가 왜 열이 났는지 기억나?”남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장난기 많은 반
“꺄악!”강나현은 반하준의 뒤에서 비명을 질렀다.반하준이 뒤를 돌아보니 강나현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머리카락이 흩어진 채 고개를 든 그녀가 빤히 반하준을 바라보았다.“하준 오빠...”남자의 머릿속에는 18살 나이에 생명을 다한 반유하가 불길 속에서 울부짖으며 자신을 부르는 장면이 떠올라 눈앞의 장면과 겹쳤다. 영원히 잊을 수 없었다.반하준은 강나현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를 부축해 줬다.남자의 차에 탄 강나현은 치솟는 기쁨을 애써 억누르며 말했다.“이 팔찌는 어떻게 할 거야?”강나현이 손바닥을 펼치며 물었다.“버려.” 남자의 목소리는 극도로 싸늘했다.“그래!” 강나현은 흔쾌히 답하며 창문을 향해 던지는 동작을 취하고는 손목을 돌려 조용히 팔찌를 주머니에 넣었다....반씨 저택 서재.잘생긴 남자가 책상 앞에 앉아 강민아의 진료 기록을 읽다가 ‘임신중절’이라는 단어에 시선이 멈칫했다.반하준은 물에 빠진 듯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컴퓨터 화면에는 태아의 다급한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문득 그 소리가 멈췄다. 보이지 않는 칼날이 반하준의 가슴을 난도질하는 듯 통증이 밀려와 허리를 굽히니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그 순간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전화기를 집어 드는 손마저 떨려와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천년이 지나도 녹지 않는 차가운 얼음처럼 그의 표정은 싸늘하기만 했다.“대표님, 사모님께서 이혼 서류에 약속했던 돈은 언제 보낼 건지 물어보셨어요.”“지금 보내.”반하준의 목소리가 다소 비현실적으로 들려 전화기 너머로 망설이던 비서가 말을 이어갔다.“대표님, 이혼 서류에는 사모님께 일시불로 120억을 줘야 한다고...”“줘.” 반하준의 말투는 단호했다.별 볼 일 없는 가정에서 태어난 강민아는 단번에 120억을 주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거다.120억은 그녀에게 삼키지 못할 떡이 될 거고, 반하준은 멀지 않아 그녀가 자신에게 다시 찾아와 애원할 거라 생각했다....강민아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은행 계좌에 120억이 입
순진한 정이의 목소리에 반하준 뒤에 있던 선생님들은 흥미로운 표정이었다.반하준은 당황하며 서둘러 해명했다.“아니야...”그는 고개를 들어 강민아를 바라보면서 속으로 짜증이 솟구쳤다.“아빠는 강나현이랑 잔 적 없어! 절대 그런 적이 없다고!”마치 강민아에게 하는 말인 듯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그런데 반하준의 해명은 정이의 논리를 이길 수 없었다.“하지만 이모가 아빠의 친구인 것처럼 현이 씨도 엄마의 친구인데요?”“달라!”반하준이 부정하자 정이는 볼을 부풀리며 여전히 반박하려는 반하준의 눈빛을 똑바로 마주하더니 오히려 그를 가르치기 시작했다.“아저씨, 자기한테는 관대하고 남한테는 엄격하면 안 되죠. 그건 내로남불이에요!”말문이 막힌 반하준은 어른의 사생활과 관련된 주제에 대해 다섯 살짜리 아이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그러다 문득 생각이 나서 강민아에게 물었다.“대체 정이한테 무슨 말을 했길래 강나현과 내 사이를 이렇게 생각하는 거야?”강민아는 콧방귀를 뀌며 설명하고 싶지도, 그와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았다.“아저씨는 엄마를 오해하고 있어요.”딸이 입을 열자 반하준는 한결 마음이 풀려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아빠가 했던 행동 때문에 네가 오해를 한 것 같으니까 지금 확실하게 말할게. 아빠와 이모는 그저 친구 사이야. 우리는 절대 네 엄마와 이 자식처럼...”윤세현은 몸을 돌려 강민아를 끌어안고 자기 머리를 강민아의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그녀는 반하준을 향해 도발하듯 말했다.“엥? 친구랑 안은 적 없어요?”“...”반하준의 목소리가 뚝 멈추며 정이가 대신 대답했다 “내가 이모랑 아저씨 안고 있는 거 봤는데?”옆에 있던 선생님들은 구석에 숨어서 구경하기 바빴다.윤세현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웃었다.“친구 사이에 서로 안는 건 당연하지. 가까운 사이면 뽀뽀도 하고.”말하며 그녀가 강민아의 얼굴에 쪽 입을 맞추자 반하준은 순식간에 속에서 피가 끓으며 입안에는 비릿한 피 맛이 가득 느껴졌다.주먹을 불끈 쥔 그의 손등
반하준은 자신의 역할을 부각하고 딸에게 아빠의 능력을 알려주기 위해 거침없이 말을 이어갔다. “방송국 팀을 불러줄 수도 있고 춤추고 싶으면 아빠가 국내외 최고의 댄서들에게 연락할 수도 있어. 정아, 뭐가 됐든 넌 내 딸이니까 최대한 나한테 의지했으면 좋겠어.”정이는 다소 당황한 표정이었다. 아이의 기억 속 반하준은 지금처럼 관심을 보인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애정을 보이니 불편하기만 했다.“정아, 네가 나한테 의지했으면 좋겠어. 전에는 아빠가 미안했어. 넌 이제 겨우 다섯살이니까 지금부터라도 충분히 보상해 줄 수 있어.”정이는 반하준의 말이 어디까지 진실이고 거짓인지 알 수 없었고, 그 뒤에 숨은 반하준의 의도도 분석할 수 없었다.그저 자신의 직감과 감정에만 근거해서 남자에게 대꾸했다.“아저씨, 엄마랑 날 방해만 하지 마세요.”반하준은 즉시 부인했다 “내가 왜 방해해...”“하지만 아저씨는 현이 씨를 좋아하지 않고 엄마와 현이 씨가 함께 있는 걸 반대하잖아요.”반하준은 칼로 가슴을 후벼파는 듯한 통증과 입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그는 불쑥 말을 뱉을 뻔했다.‘당연히 반대하지!’강민아 곁에 다른 남자들이 나타나고 윤세현이 강민아의 진짜 사랑이라는 데 반대하지 않을 수가 있나.‘진짜 사랑’이라는 말이 씨앗처럼 반하준의 마음에 자리 잡아 싹을 틔우고 심장을 관통하는 가시로 자랐다.반하준은 위태롭게 요동치는 심장을 느꼈다.자기 핏줄인 딸이 강민아와 윤세현의 만남을 응원하고 있었다.젠장!반하준은 심각한 얼굴로 진지하게 말했다.“네 엄마는 이미 남자 친구가 있는데 네가 말하는 현이 씨가 같은 집에 살면서 엄마랑 자는 건 바람피우는 거야!”강민아의 감정사를 딸에게 너무 자세하게 얘기하고 싶지는 않아 그는 씁쓸하게 말했다.“아빠는 엄마가 널 잘못 가르칠까 봐 걱정하는 거야.”강민아와 윤세현은 서로를 바라봤고, 윤세현은 입술을 달싹이며 가슴이 들썩거릴 정도로 새어 나오는 웃음을 힘겹게 참았다.강민아는 윤세현을 향해 어깨를 으쓱거렸다
강민아는 반하준을 차갑게 바라봤다.이미 조금 전 강당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엘리베이터가 오작동하고 반하준이 우연히 이곳에 나타난 것으로 보아 그의 의도는 이미 뻔했다.강민아는 정이의 손을 잡은 채 식은땀이 삐질 났다. 정말 미친놈이다. 말로는 제 딸이라고 하면서 정이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었다.하지만 구체적인 증거 없이는 본인이 엘리베이터 오작동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거다.강민아는 가슴 속에서 터져 나오려는 분노를 참았다.“반진경이 정이를 노리는 거 알고 있었어?”“요즘 어머니랑 가깝게 지내고 있어...”다시 말해 반진경은 연진숙의 지시를 받고 학교에서 오만방자하게 날뛴 것이다.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더니 문화부 선생님 몇 명이 나타났다.그들은 반하준을 보고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반 대표님.”정이도 그들을 안다. 별님반에서 축제에 참여할 때 그들이 심사위원석에 앉아 있었다.“안녕하세요. 저는 햇님반 강윤정이라고 합니다. 축제에서 단독으로 공연하고 싶은데 그래도 되나요?”정이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진지한 얼굴로 여러 선생님을 바라보았다.그들은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반하준을 돌아보며 이사장인 그가 동의하면 그들도 그의 뜻에 따를 생각이었다.하지만 이런 암묵적인 규칙을 정이 앞에서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강민아가 반하준에게 물었다.“여기서 내가 애원하길 기다리는 거야?”반하준은 강민아가 부탁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기에 깊은 동공에 웃음기가 번뜩였다.“나한테 부탁하면 정이가 축제에 참여하는 걸 쉽게 해결할 수 있지.”정이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축제에 참여하고 싶지만 무슨 공연을 할지 생각은 못 했어요.”아이는 진지하게 선생님들을 향해 말했다.“연습하고 나서 선생님들께 보여드릴게요. 제 공연이 마음에 드시면 제가 무대에 올라가 친구들 앞에서 공연하는 걸 응원해 주세요.”반하준은 정이가 자신을 무시하는 태도에 이렇게 물었다.“정아, 아빠 도움은 필요 없어? 네가 아빠 딸이
반하준은 강민아가 고개를 돌린 채 윤세현을 향해 흐뭇한 미소를 짓는 모습에 멈칫했다.강민아가 이렇게 웃는 건 처음 본다. 심은호에게도 이렇게 웃어준 적이 없는데, 마치 윤세현이 하는 말은 다 들어준다는 표정이었다.날카로운 단검이 그의 심장을 연달아 찌르는 것 같아 반하준의 호흡이 거칠어졌다.소꿉친구가 이토록 위협적인 존재였던가.윤세현과 강민아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온 사이라는 건 알지만 상대를 안중에도 둔 적이 없었다.반씨 가문의 후계자인 그가 외딴 마을에서 상경한 사람에게 눈길을 줄 리가 없으니까.강민아와 윤세현이 친한 친구 사이라는 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반하준은 윤세현을 경멸하고 있었다.그런데 강민아가 윤세현이 진짜 사랑이라는 말에 동의할 줄이야.윤세현이 진짜 사랑이고 심은호가 남자 친구이면 그는 뭐란 말인가.7년 동안 둘의 결혼은 그저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 걸까?무거운 쇠망치가 반하준을 내리치는 듯 뻥 뚫린 가슴에 차갑고 쌀쌀한 바람이 계속 쏟아져 들어와 오장육부를 후벼팠다.“강민아!”그의 어두운 눈동자는 짙은 먹물로 뒤덮인 것처럼 보였고 미간은 잔뜩 주름이 잡혀 있었다.“이 자식이 진짜 사랑이면 심은호는 뭐야?”“당신 심은호 좋아해?”강민아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왜 그렇게 관심이 많아?”자신을 올곧게 쳐다보는 남자의 눈가에 씁쓸한 기색이 담긴 게 보였다.강민아는 풍성한 속눈썹을 깜박이면서 전남편을 마주하고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들어? 우린 모르는 사이야. 이혼할 땐 나보고 절대 돌아오지 말라더니 왜 이젠 당신이 계속 내 앞에 나타나는 건데?”강민아의 말에 남자의 말투도 차가워졌다.“네 착각이야. 설마 내가 일부러 너랑 마주치려고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는 거야?”반하준은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비웃더니 어두운 눈동자에 경멸을 드러냈다. 그러면서도 마음에 찔려서 강민아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사실 일부러 강민아와 마주치려고 이곳에 나타난 거다.강민아가 정이를
잡아보니 윤세현의 깡마른 팔에 반하준의 눈에선 경멸의 빛이 번뜩였다.이렇게 깡마른 놈이 감히 그의 여자를 건드리다니.“반하준, 뭐 하는 거야!”강민아는 소리를 지르며 윤세현을 꽉 잡고 있는 반하준의 손을 떼어내려 했다.“손 풀어!”반하준은 윤세현을 뒤로 보내며 감싸는 강민아를 보고 왠지 모를 분노가 밀려왔다. 그는 역겨운 듯 윤세현의 팔을 뿌리치더니 강민아에게 날카롭게 쏘아붙였다.“왜 계속 이렇게 약해빠진 놈이랑 있는 거야? 이 자식도 심은호랑 똑같이 여우짓 하면서 연약한 척 너한테 지켜달라고 하잖아.”반하준이 씩씩거려도 강민아는 퉁명스럽게 대꾸할 뿐이었다.“난 이런 게 좋아.”남자는 그녀를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강민아는 그와 같은 남자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나.반하준이 봤을 때 심은호와 윤세현은 지극히 닮았다. 둘 다 연약하고 그가 조금만 건드리면 손쉽게 제압할 것 같았다.하지만 그들이 계속해서 강민아의 뒤에 숨기 때문에 강민아는 점점 더 그를 미워하고 있었다.반하준의 턱이 굳게 다물리며 피부밑으로 튀어나온 핏줄이 꿈틀거렸다.그때 정이가 앳된 목소리로 말했다.“아까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심하게 흔들렸는데 현이 씨가 저와 엄마를 지켜줬어요. 아저씨, 현이 씨한테 그렇게 못되게 굴지 마세요!”정이가 단호하게 말하자 반하준이 물었다.“이 사람이 좋아?”정이는 반하준이 윤세현에 관해 물어본다는 것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난 현이 씨가 제일 좋아요!”“그럼 이 사람이 좋아, 심은호가 좋아?”반하준은 정이에게서 답을 찾고 싶었다.“음...”정이가 풍성한 속눈썹을 깜빡이며 질문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난 현이 씨가 더 좋아요!”아이가 무슨 처세술을 알겠나. 그저 본인 생각대로 솔직하게 답할 뿐이었다.정이의 말을 들은 윤세현은 미소를 지으며 반하준 때문에 언짢았던 기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왜?”반하준이 묻자 정이가 동그란 손가락을 접어가며 세었다.“현이 씨는 요리도 잘하고 좋은 향기도 나요. 나랑
“네가 강씨 가문으로 돌아가면서 우경아는 널 양딸로 데려가 네 보호자가 될 절차를 밟을 수 없게 되었어. 그러다 네가 결혼했다는 걸 알고... 너한테 완전히 흥미를 잃었지.”강민아는 먼 외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우경아의 발목을 잡은 세력은 뭔데?”윤세현은 고개를 저었다.“그건 우경아도 아직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윤세현의 맑은 눈동자가 진지하게 반짝였다.“내 생각엔 그 힘이 널 지켜주는 것 같아.”강민아도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물었다.“우경아에게 내 과거에 대해 말한 적 있어?”윤세현은 멍하니 고개를 흔들었다.“몇 번이나 날 떠보긴 했어도 난 네 일에 대해 조금도 털어놓지 않았어. 미린국에 오면서 너와 완전히 갈라졌다고 했거든.”강민아는 생각에 잠긴 채 말했다.“내가 볼 때 우경아는 오래전부터 날 지켜봤던 것 같아. 나에 대해 자세히 조사하고 너조차 모르는 내 일을 다 알고 있었어.”강민아는 더 생각하기 싫어 다시 가벼운 어투로 윤세현에게 물었다.“우경아가 나한테 무슨 짓할까 봐 학교로 온 거야?”“서경에 오자마자 너 때문에 양자 테크가 억대 손해를 봤다는 소식을 들었어. 우경아가 직접 널 만나러 학교에 온다는 얘기도... 우경아는 무자비한 사람이라 건드리기만 하면 제자리에서 상도 엎어. 너한테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강민아의 두 눈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담겨 있었다 “난 아직 그 여자한테 거대한 이용 가치가 있어서 당분간은 나한테 아무 짓도 못 해.”오히려 윤세현을 달래며 말을 이어갔다.“걱정하지 마, 이미 우경아와 거래를 달성했거든.”윤세현은 어리둥절했다.“어떤 거래?”“내가 양자 테크의 통솔권을 가지고 우경아와 협업하는 동시에 1분기 투자금 4천억을 요구했어. 거기에 향후 양자 테크의 수익은 100% 나한테 돌아오기로 했지.”윤세현은 찬 공기를 들이켜며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동의했어?”“응.”“어떻게?”강민아와 우경아가 협상한 조건은 윤세현에게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었다.강민아가
“현이 씨!”윤세현을 보자마자 정이의 눈이 환하게 빛나며 폴짝폴짝 윤세현을 향해 달려갔다.윤세현은 강민아에 대한 걱정에 코끝에서 열기 섞인 숨결이 흘러나왔다.“현이 씨, 너무 보고 싶었어요!”정이의 앳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윤세현은 쭈그리고 앉더니 정이의 의상을 보고 자기 외투를 벗어 아이에게 입혀주었다.“정이 너무 예쁘다.”정이의 머리가 조금 헝클어진 것을 발견하고 손을 뻗어 빗겨주었다.강민아는 윤세현을 향해 걸어갔다 “왔어?”지난주 윤세현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 집을 나서면서 떠나기 전 곧 돌아오겠다는 말만 남겼다.강민아는 윤세현에게 뭘 하러 가는 건지 묻지 않고 정이와 함께 윤세현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그런데 뜻밖에도 윤세현이 서경으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학교로 달려올 줄이야.우경아는 윤세현과 일정한 거리로 좁혀질 때쯤 말을 꺼냈다.“이번에 고생했어.”멈칫하던 윤세현의 조각상처럼 잘생긴 얼굴이 엄숙하게 바뀌었다.강민아는 우경아 앞에서 유독 경직된 윤세현을 알아차렸다.윤세현은 우경아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면서 잠긴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엄마, 민아는...”우경아는 붉은 입술을 말아 올렸고, 찬 바람에 풍성하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더더욱 아름다움을 뽐냈다.“오랜만에 보는 건데 친구랑 좋은 시간 보내.”우경아는 강민아를 쳐다보지 않고 윤세현에게만 명령했다.“오늘 밤에 호텔로 와서 보고하고.”윤세현은 공손하게 우경아를 향해 답했다.“네.”우경아가 자리를 떠나서야 굳어있던 윤세현은 긴장이 풀리며 정이의 손을 잡고 강민아를 향해 걸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우 대표가 너 힘들게 했어?”강민아는 고개를 저었다.“미린국에 간 첫해에 한 거물이 널 눈여겨보고 거둬줘서 자리를 잡을 수 있다고 했잖아. 그 거물이 우경아였어?”5년 전 윤세현은 강민아가 준 거금을 들고 미린국에 가면서 둘은 멀리 떨어지게 되었고, 윤세현은 나쁜 소식은 전부 감추고 좋은 소식만 전해주었다.그때 강민아는 두 아이를 낳은 터라 윤세현과
우경아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었다. 강민아에게 40억을 주고 쫓아냈는데 이제 그녀를 다시 데려오려니 상대가 4천억을 원하고 있었다.그리고 그녀는 강민아가 4천억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원한다는 걸 알고 있다.우경아의 목구멍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랫동안 사업을 하면서 피를 말리는 협력자나 경쟁자를 만나본 적 없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녀는 여전히 강민아 앞에서 여유로웠다. “강민아 씨, 이 바닥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당신에게 수익의 70%를 줄 수는 있어요. 투자는 이사회의 승인을 받아야...”“프로젝트 전체를 나한테 주지 않으면 전 그쪽이랑 일 안 해요.”“말도 안 되는 소리!”우경아가 낮게 윽박질렀다. 한 번도 그녀에게서 먹잇감을 통째로 가져가는 사람은 없었다.강민아는 여전히 사람 좋은 표정으로 부드럽게 한숨을 쉬었다.“전 우 대표님이 무서워서 시작부터 많은 걸 바라는 거예요. 이미 한번 절 아웃시켜서 아직 마음이 불안하거든요. 저한테 큰 조각을 넘기기 싫고 수익의 100%를 넘기지 않는다면 전 그쪽이랑 일 안 해요. 세상은 저 없이 잘만 돌아가고 우 대표님은 저 말고 다른 사람 알아봐도 되니까요.”강민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우경아를 지나쳐갔다.우경아는 자신이 소유한 양자 테크나 옴 테크에서 데려온 전문가들이 강민아가 건넨 대형 모델을 사흘 밤낮으로 연구해도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것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강민아!”그녀가 소리쳐 부르자 강민아는 뒤에서 들려오는 우경아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강성진과 도민영 사이에서 당신 같은 딸이 나올 줄은 몰랐네요.”강민아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우 대표님, 칭찬 감사합니다.” 우경아의 목구멍에서 차가운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강민아를 만나러 직접 승덕까지 찾아오고 반씨 가문 사람과 무례한 교사까지 혼내줬으니 강민아가 은혜를 알아줄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면 그녀와의 협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강민아가 조금도 물러서지 않을 줄이야.우경아는 우유부단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강민아가 확신에 찬 어투로 말했다.“너무 일찍 저에게 등 돌린 걸 후회하고 계시네요.”“강민아 씨, 우리한테 넘겨준 데이터를 조작한 거죠?”우경아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고 눈빛에는 극도의 압박감이 느껴졌다.그녀에게서 음산한 냉기가 퍼져나갔지만 옆에 앉아 있던 강민아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제가 왜 조작해요? 우 대표님 밑에 일하는 직원의 능력이 부족한 거죠. 섣불리 사람을 배신하니까 벌써 200억 정도 손해를 보셨죠?”팔짱을 낀 우경아의 정성껏 관리한 손톱이 연분홍빛을 띠고 있었다.강민아의 말에 그녀는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그녀는 진작 자신이 없으면 우영 그룹의 양자 테크에서 억대 손해를 볼 것을 예상하였던 걸까?심지어 수백억을 손해 볼 때 우경아가 자신을 찾아올 거란 것도 예상했다.그 생각에 우경아는 살짝 놀랐다.조금 전 자신이 나타났을 때 강민아가 전혀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던 걸 떠올리며 우경아는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여자를 다시 살펴보았다. 그러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강민아 씨는 함께 일하기 좋은 사람인 것 같네요. 내가 그쪽을 오해했어요. 7년 동안 집안에만 갇혀 지낸 여자가 아무리 성적이 뛰어나도 별 능력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공부를 잘하는 건 아무 쓸데가 없어요. 날고 기는 천재도 이론만 빠삭하고 실전에는 멍청이니까. 확실히 그쪽은 날 놀라게 하네요.”강민아를 바라보는 우경아의 두 눈엔 그녀를 손에 쥐고 싶은 충동이 타올랐다.“강민아 씨, 우리 계속 같이 일합시다. 전에 일은 내가 미안했어요. 나는 지금 진심으로 협업을 제안하는 겁니다. 협업 말고도 여러 가지 도와줄 수 있어요. 예를 들면...”앞을 돌아보니 그녀에게 맞아서 얼굴이 부어오른 반진경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무대 위에서 발레하는 반연주에게 시선이 향했다.그녀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나랑 같이 일하면 그쪽 딸 센터로 만들어 줄게요.”“그건 됐어요.”강민아가 단호하게 거절했다.“어른들 싸움에 아이들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