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꺄악!”강나현은 반하준의 뒤에서 비명을 질렀다.반하준이 뒤를 돌아보니 강나현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머리카락이 흩어진 채 고개를 든 그녀가 빤히 반하준을 바라보았다.“하준 오빠...”남자의 머릿속에는 18살 나이에 생명을 다한 반유하가 불길 속에서 울부짖으며 자신을 부르는 장면이 떠올라 눈앞의 장면과 겹쳤다. 영원히 잊을 수 없었다.반하준은 강나현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를 부축해 줬다.남자의 차에 탄 강나현은 치솟는 기쁨을 애써 억누르며 말했다.“이 팔찌는 어떻게 할 거야?”강나현이 손바닥을 펼치며 물었다.“버려.” 남자의 목소리는 극도로 싸늘했다.“그래!” 강나현은 흔쾌히 답하며 창문을 향해 던지는 동작을 취하고는 손목을 돌려 조용히 팔찌를 주머니에 넣었다....반씨 저택 서재.잘생긴 남자가 책상 앞에 앉아 강민아의 진료 기록을 읽다가 ‘임신중절’이라는 단어에 시선이 멈칫했다.반하준은 물에 빠진 듯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컴퓨터 화면에는 태아의 다급한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문득 그 소리가 멈췄다. 보이지 않는 칼날이 반하준의 가슴을 난도질하는 듯 통증이 밀려와 허리를 굽히니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그 순간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전화기를 집어 드는 손마저 떨려와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천년이 지나도 녹지 않는 차가운 얼음처럼 그의 표정은 싸늘하기만 했다.“대표님, 사모님께서 이혼 서류에 약속했던 돈은 언제 보낼 건지 물어보셨어요.”“지금 보내.”반하준의 목소리가 다소 비현실적으로 들려 전화기 너머로 망설이던 비서가 말을 이어갔다.“대표님, 이혼 서류에는 사모님께 일시불로 120억을 줘야 한다고...”“줘.” 반하준의 말투는 단호했다.별 볼 일 없는 가정에서 태어난 강민아는 단번에 120억을 주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거다.120억은 그녀에게 삼키지 못할 떡이 될 거고, 반하준은 멀지 않아 그녀가 자신에게 다시 찾아와 애원할 거라 생각했다....강민아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은행 계좌에 120억이 입
심은호의 기분이 좋다는 걸 눈치챈 진 변호사가 말했다.“큰손 고객인가요?”“응.”진 변호사는 호기심에 캐물었다.“얼마나 대단한 고객인데 그렇게 기뻐하세요?”“이번 사건만 이기면 난 결혼할 거야.”변호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심은호는 서경에서 유명한 싱글남으로 여성에게 ‘알레르기’가 있는 연애 불능자였다.직업 때문에 남성이든 여성이든 감히 그에게 수작 부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일단 그를 건드리는 사람은 누구든 법원이나 경찰서로 직행했으니까.회의실 전체가 소란스러워졌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고객과 사건이면 심은호가 인생의 새로운 막을 열어볼 결심까지 하게 만드는 걸까....얼마 지나지 않아 강민아는 태화 증권의 매니저로부터 연락을 받았다.“120억이 있는데 주식에 투자할 생각이에요.”매니저는 경악했다.“120억이요? 그러면 우리 회사로 오셔서 바로 계좌를 개설하시죠.”강민아가 반우정을 데리고 태화 증권 건물로 들어가자 반우정은 호기심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매니저 홍민기는 두 사람을 프라이빗 VIP룸으로 데려가 계좌 개설 절차를 도왔다.반우정은 강민아와 홍민기 사이에서 수수료 조율 과정을 지켜보았다. 한 번도 본적 없는 강민아의 모습이었다.‘엄마가 독수리처럼 예리하고 매서울 때도 있구나.’홍민기는 결국 강민아에게 커리어를 시작한 이래 가장 낮은 수수료를 제안했다.“강민아 씨는 돈을 어떻게 나눌 생각이세요?”강민아는 홍민기에게 포스트잇 한 장을 건넸다.“내일 이 주식 좀 사주세요.”포스트잇을 건네받은 강민기는 처음엔 아무 생각 없이 훑어보았다. 매일 주식을 다루는 게 일이라 코드만 보고도 주식의 최근 그래프가 눈앞에 그려졌다.그러다 문득 홍민기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120억을 전부 여기에 투자하려고요?”“네.”“다른 건 생각해 보지 않으시겠어요?”“생각 없어요.”홍민기는 한숨을 내쉬었다.“미리 말씀드리지만 지금 시장이 좋지 않아서 일주일 뒤면 120억 중에 20억도 안 남을 거예요.”강민아가 부드러운 미소를
“알았어.”전화를 끊으려던 반하준이 무심코 질문을 던졌다.“강민아와는 어떻게 연락이 닿았어?”홍민기는 정중하게 답했다.“심 변호사님이 소개해 주셨어요.”고개를 든 반하준의 흑백이 분명한 두 눈에 희미한 안개가 드리워졌다.“심은호?”홍민기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아요.”반하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음침하고 차가운 기운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강민아가 강씨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도우미는 이미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이혼했으니 부모님께 제대로 말씀드려야 한다.강민아는 먼저 반우정을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가 아이의 옷을 갈아입힌 뒤 손까지 깨끗이 씻고 나왔을 때쯤 부모님과 마주쳤다.“우리 딸 왔어?”어머니 도민영이 아버지 강성진의 품에 안긴 채 그의 가슴에 기대고 있었다.앳된 얼굴이 30대도 안 돼 보이지만 사실 도민영의 나이는 벌써 마흔여섯이었다.강민아는 강씨 가문으로 돌아온 후 그녀가 외출하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다.도민영은 늘 흰색의 긴 원피스를 입고 아기처럼 강성진의 품에 안겨 있었다.강성진은 쉰이 넘은 나이에도 키가 크고 체격이 건장한 데다 잘생긴 얼굴은 세월이 지나면서 더더욱 성숙한 분위기를 내뿜었다. “아빠, 엄마.”강민아가 어색하게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어딜 뻔뻔하게 들어와!”강성진이 굳은 얼굴로 꾸짖자 도민영은 어깨를 움츠리고 고양이처럼 남자의 가슴에 비비적거렸다.“어머, 성진 씨. 나 놀랐잖아.”강성진은 고개를 돌려 도민영에게 시선을 집중했다.도민영을 안고 아래층으로 내려간 그는 깨지기 쉬운 유리그릇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움직여 도민영을... 아기 의자에 내려놓았다.강민아는 애써 시선을 돌리며 부엌으로 들어가 반우정과 함께 두 사람 맞은편에 앉았다.도민영 앞에는 아기 그릇이 놓여 있었고 그녀는 숟가락을 깨물며 반우정을 바라봤다.“정이는 왜 아기 그릇을 안 써?”반우정이 젓가락을 들며 말했다.“전 키 커야 해서 이젠 아기 그릇으로 부족해요.”도민영이 눈을 깜빡
강민아가 웃으며 말했다.“버린 쓰레기는 많아. 천천히 주워봐.”강나현이 옷을 다 벗고 반하준의 침대에 누워 있다고 해도 강민아는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그녀는 그저 미소 지으며 강나현이 몰락하는 모습을 지켜볼 것이다.강나현의 팔찌가 반하준이 준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강성진은 오히려 안심했다.그는 강나현이 여전히 반하준의 마음을 단단히 붙잡고 있다고 생각했다.식탁 위에서 강성진은 강민아를 겨냥해 말을 던졌다.“하준이가 너랑 이혼한 건 분명 네가 뭔가를 잘못했기 때문이겠지. 당장 재혼해! 우리 강씨 가문에 이혼한 여자는 있을 수 없어! 정말 한심하다. 한심해. 창피하지도 않아? 서른 살에 애까지 딸린 이혼녀를 누가 좋아하겠어?”강민아는 느긋하게 식사하며 가끔 반우정이 밥 먹는 모습을 살폈다.“아빠, 제가 왜 반하준이랑 이혼했는지는 안 물어보세요?”“왜긴 왜야! 남자 하나 붙잡지도 못하면서! 반씨 가문과의 혼인은 내가 정말 못 볼꼴까지 보면서 간신히 성사한 거야. 지금까지 너무 쉽게 살았지? 그러니까 지금 이러는 거지!”“아빠.”강민아의 표정이 차가워졌다.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도민영이 끼어들었다.“딸, 어서 하준이한테 사과해. 이번만큼은 용서를 빌어야 해. 이렇게 이혼하면 너 하준이보다 더 좋은 남자는 못 만난다?”강성진은 경멸스러운 시선으로 강민아를 보며 말했다.“역시 시골에서 와서 그런지 세상 물정을 몰라!”그는 강민아를 가리키며 도민영에게 말했다.“우리 손에서 자라지 않았다고 이혼도 우리한테 미리 알리지 않은 것 좀 봐.”“미리 알렸다면 이혼도 못 했겠죠.”강성진은 콧방귀를 뀌고 곁눈질로 강나현을 쳐다보더니 강민아에게 물었다.“하준이랑 이혼 협의서 써서 위자료 챙겼다며?”그의 목소리가 점점 강압적으로 변했다.“그 많은 돈을 바보같이 은행에 적금 들어둔 건 아니겠지? 회사 계좌로 이체해라. 매년 배당금도 주마.”“전부 주식에 투자했어요.”“뭐라고?”강성진의 목소리가 한순간에 싸늘해졌다.강민아는 귀가 어두
“아아악!”깜짝 놀란 도민영이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테이블이 뒤집히는 순간 강성진은 도민영을 안아 들고 황급히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강민아는 그 모습을 보고 곧바로 달려가 반우정을 품에 안고 가장 가까운 주방으로 뛰어갔다.“흑! 성진 씨, 나 너무 무서워!”도민영은 두 팔로 강성진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강성진은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민영아, 걱정하지 마. 본때를 보여주면 저 둘도 조용해질 거야.”겁에 질린 도민영은 온몸을 움츠렸다.반면 강나현의 얼굴에는 짙은 웃음이 떠올랐다.‘집에 돌아온 뒤로 아빠한테 맞아본 적 없겠지. 딸과 손녀에게 손을 대는 모습, 볼만 하겠어.’“강민아! 당장 나와!”강성진은 주방 쪽으로 걸어가며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그는 허리띠 버클을 풀고 벨트를 빼 들었다.그 모습은 마치 훈련된 조교 같았다.주방에서 나타난 강민아의 손에는 날카로운 칼이 들려 있었다.반우정을 주방 안쪽으로 밀어 넣은 뒤 강민아는 문 앞에 서서 마치 성문을 지키는 장수처럼 버텼다.그녀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강성진의 손에 들린 벨트를 보자 그녀는 오히려 모성애가 불타오르며 전투 의지가 강렬하게 치솟았다.강민아는 한때 18년 만에 찾아온 친부모에게서 사랑을 기대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이제는 깨달았다.‘우정이랑 같이 살아가려면 이 얄팍한 혈연도 완전히 끊어내야 해!’“아빠, 한번 제대로 겨뤄볼까요? 아빠의 벨트가 빠를까요? 제 칼이 빠를까요?”강성진은 크고 건장한 체격에 오랫동안 운동으로 단련된 몸을 가지고 있었고 반면 강민아는 매일 살림에 시달리는 가녀린 전업주부일 뿐이었다.그런 상황만 고려한다면 강성진이 그녀를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다.하지만 강성진은 그녀의 눈빛에서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느꼈다.그녀는 마치 정글 속에서 사냥꾼을 만나 새끼를 지키려는 암사자처럼 죽음을 불사하는 기세를 풍겼다.강성진은 저도 모르게 등골이 서늘해졌다.“감히 네가 내게 칼을 들이밀어?""강성
“엄마, 저 아까 잘못한 거예요? 테이블 엎으면 안 됐어요?”아직 어린 반우정은 자기가 테이블을 엎어서 강씨 가문에서 쫓겨난 거로 생각했다.강민아는 반우정에게 되물었다.“만약 다시 기회가 온다면 또 테이블을 엎을 거야?”반우정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엄마를 지키고 싶었어요.”강민아는 따뜻하게 미소 지었다.“우정이는 할 수 있는 일을 한 거니 엄마의 영웅이야.”“엄마야말로 우정이의 영웅이에요!”반우정은 강민아 품을 파고들었다.엄마의 칭찬을 들은 반우정은 눈을 반짝이며 부끄러운 듯한 얼굴로 말했다.“하지만 힘을 너무 세게 썼어요. 이러면 여자애 같지 않죠?”“우정이는 원래 여자아이야. 여자아이라도 여러 가지 모습이 될 수 있어. 정해진 모습이라는 건 없어.”강민아는 반우정을 부드럽게 안았다.“우정아, 너는 타고난 힘을 가지고 있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거란다. 엄마는 네가 그걸 자랑스럽게 여겼으면 해. 여자아이가 너무 약하면 결국 누군가에게 기대야만 하거든. 하지만 엄마는 네가 절대 여자라는 이유로 자신을 부정하길 원하지 않아. 네가 어떤 모습이든 넌 항상 엄마의 예쁜 딸이야.”반우정은 강민아의 말에 용기를 얻었다.“엄마, 예전부터 복싱 배우고 싶었어요. 더 강해지고 싶어요.”반씨 가문에 있을 때 그녀는 반현민과 함께 축구, 격투 수업을 듣고 싶었지만 연진숙이 여자아이는 밖에서 뛰어다니며 소리치는 게 아니라고 강하게 반대했다.“잘됐네. 삼촌이 헬스장을 운영하거든. 엄마가 삼촌한테 얘기해서 좋은 복싱 선생님을 구해달라고 할게.”“엄마, 최고예요!”반우정은 강민아의 품에 기댔다가 문득 고개를 들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로 가요?”강민아는 그녀의 부드러운 검은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답했다.“시그니엘로 가고 있단다.”그녀는 반하준과 이혼하면서 현금 외에도 집과 상가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받았다.그녀가 당연히 받아야 할 몫이었다.물론 지금도 새집을 알아보고 있었다.강민아는 주식 투자로 충분한 돈
그는 얼굴을 찌푸린 채 욕조에 몸을 담그고 뜨거운 물을 견뎌냈다.그는 가정부에게 물 온도는 40.3도로 맞춰달라고 여러 번 당부했었다.욕실의 향은 그가 들어오기 10분 전에 피워야 한다고도 했었다.욕조 가장자리에 있는 가죽 쿠션에 기댄 반하준은 내부 조명도 제대로 맞춰지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했다.“쯧.”‘강민아는 7년 동안 단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는데.’반하준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조금만 참으면 돼. 강민아는 곧 돌아올 거야.’...다음 날 아침 핸드폰을 집어 든 강민아는 홍민기가 보낸 문자를 발견했다.[강민아 씨, 정말로 120억 모두 주식에 투자하시겠습니까?][네. 확실합니다. 개장하면 바로 전량 매수해 주세요.][알겠습니다.]홍민기는 다시 한번 당부했다.[후회하시면 안 됩니다.]강민아는 컴퓨터를 켜고 자신이 직접 만든 주식 시세 분석 프로그램을 실행했다.그녀가 만든 프로그램은 주식 시장이 바닥을 치고 다시 반등할 때라고 알려주고 있었다.주식 시장이 개장하자 강민아가 홍민기에게 매수하라고 한 주식의 주가가 오르기 시작했다.강민아가 컴퓨터를 끄자마자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모르는 번호였다.최근 이력서를 내고 있었기에 그녀는 인사팀의 연락을 놓치지 않으려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사모님. 저예요.”전화기 너머에서 오소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혹시 도련님 빨간색 커프스단추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오소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민아는 전화를 끊었다.‘커프스단추가 어디 있는지 내가 알 게 뭐야!’강민아는 아이 방으로 가서 반우정의 숙제를 확인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거실의 유선 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벨 소리가 넓은 거실에 울려 퍼지자 조금 섬뜩했다.강민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유선 전화의 선을 뽑아버렸다.그녀가 방에 돌아가기도 전에 초인종이 울렸다.문을 연 그녀의 앞에는 단지 관리자가 서 있었다.그는 강민아에게 자신의 핸드폰을 건넸다.강민아는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받았고 그녀의 귓가에는 빙하처럼 차가운
“하준 오빠?”강나현은 반하준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것을 발견했다.그건 그녀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언니가 뭐라고 한 거야?”반하준은 한참을 뜸 들이다가 답했다.“아직도 나한테 화내고 있어.”그는 방금 자신을 향해 쏟아낸 말들이 정말로 강민아의 입에서 나온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언니 혹시 갱년기 아니야? 애 낳은 여자는 확 늙는다더라.”한바탕 화를 낸 강민아는 전화를 끊고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아파트 관리자에게 내밀었다.관리자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그녀가 손을 까닥이자 관리자는 그제야 황급히 핸드폰을 받아 들고 도망치듯 뛰어갔다.시그니엘을 당장이라도 벗어나고 싶었던 강민아는 반우정에게 다가가 물었다.“엄마랑 같이 엄마 선생님 보러 갈까?”“좋아요!”심씨 가문으로 출발하기 전 강민아는 심은호에게 미리 연락을 넣었다.그녀는 꽃집에 들러 꽃을 사고 취보헌에 들러 심한기가 평소 즐겨 쓰던 선지를 골랐다.그렇게 준비를 마친 뒤 강민아는 심씨 가문 저택 앞에 도착했다.하지만 그녀를 맞이한 것은 심은호가 아닌 심씨 가문의 가정부였다.저택으로 들어가는 길에 그녀는 응접실에 세워진 화이트보드를 보았다.그 위에는 복잡한 수학 문제가 적혀 있었다.그녀는 가정부의 안내를 받아 복도에서 대기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가정부는 난처한 표정으로 심한기의 방에서 나왔다.“어르신께서 방금 약을 드셔서 컨디션이 좋지 않으십니다. 잠시 기다려주실 수 있으실까요?”강민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날 만나고 싶어 하지 않으시는 구나.’“알겠습니다.”그녀는 조용히 대답하고 응접실로 향했다.강민아는 반우정과 함께 한참을 앉아 있었다.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화이트보드로 향했다.그리고 10분 후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이트보드 앞으로 가 마커를 집어 들고 계산을 시작했다.순간 그녀는 학생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창밖으로 더운 바람이 불어왔고 오동 나뭇잎이 사각거렸다.복도에서 학생들의 발소리까지 들려오자 그녀는
민이가 수없이 넘어졌지만 그때마다 강민아가 가장 먼저 달려와 아이를 일으켜 세웠다.뒤돌아 뒤에 있는 사람이 강나현이라는 것을 확인한 아이는 목구멍까지 차오르던 흐느낌이 순식간에 멎어버렸다.강나현은 민이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민아, 슬퍼하지 마. 나랑 같이 오토바이 타고 바람 쐬러 가자. 저 사람들은 무시해.”민이는 코를 훌쩍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역시 나한테 잘해주는 건 현이 형밖에 없어요.”강나현은 미소를 지었다.“내가 네 작은 아빠잖아! 내가 너한테 잘해주지 않으면 누가 잘해주겠어? 가자!”강나현은 민이의 손을 잡고 주차장으로 가서 민이에게 헬멧을 씌워주고 오토바이를 탔다.강철 짐승 같은 오토바이가 주차장을 빠져나올 때쯤 경찰 몇 명이 강나현을 찾고 있었다.레이싱 슈트로 강나현을 알아본 경찰들은 곧바로 경찰증을 꺼내 들었다.“강나현 씨, 차 세우세요!”강나현이 액셀을 끝까지 밟았고 검은색 대형 오토바이가 주차장 밖으로 돌진했다.“강나현 씨, 어디 가세요!”“강나현 씨!”강나현이 떠나는 것을 본 경찰들은 곧바로 무전기를 눌러 다른 동료들에게 알렸다.“긴급 지원 바랍니다. 안전사고 관련 용의자 여성이 오토바이를 타고 도주 중입니다!”“다들 주의하세요. 강변 대로 모든 길목을 막고 가 9898 오토바이를 막으세요.”민이가 가고 기자들은 다시 강민아를 에워쌌다.강민아는 여러 명의 경찰이 경기장에 들어와 선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반하준이 고개를 돌리니 심은호가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소나무처럼 곧게 뻗은 체격에 입고 있던 코트 자락이 거센 바람에 흩날리고, 머리카락이 살짝 휘날리며 얇은 입술에는 거침없고 당당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심은호의 뒤에는 두 손을 깍지 낀 채 재킷으로 손을 가린 기술자 한 명이 따라오고 있었다.기술자 뒤에는 경찰관 두 명이 더 있었다.누가 봐도 재킷에 가려진 것은 수갑이 채워진 기술자의 손이었다.한 형사가 반하준 앞에 다가와 경찰증을 보여주었고, 그의 등장에
“애가 대단한 걸 좋아하는 건 당연한 거지. 뭐 문제 있어?” 강나현이 민이의 편을 들었다.“더 대단한 엄마를 원하는 게 뭐가 문제야?”강민아는 역겹다는 듯 눈을 흘겼다.“머리에 든 것도 없는 게 어디서 나한테 말을 걸어?”“너!”많은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강나현은 이미지 때문에 차마 욕설을 내뱉을 수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반하준에게 도움을 청하는 눈빛을 보냈다.반하준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졌고 속은 차마 드러낼 수 없는 감정 때문에 들끓고 있었다.햇볕은 따가웠지만 코로 들이마시는 공기는 얼음 칼날처럼 반하준의 폐부를 조각내고 있었다.그의 목소리는 차가운 얼음장 같았다.“결국엔 우리한테 잘 보이려고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정체 공개한 것 아니야?”강민아가 차갑게 웃었다.“난 이제 당신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착각 좀 그만할래?”반하준의 얇은 입술이 굳게 다물어지면서 얼굴도 딱딱하게 굳었다.강민아가 말을 이어갔다.“내가 레이서 신분을 공개한 건 당신들 부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야. 당신들 인정이나 받으려고 ALI 수학 경시대회에 출전한 것도 아니야. 난 이제 반씨 가문 사모님이 아니라 강민아로 살 거야.”기자가 강민아에게 마이크를 내밀며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강민아 씨, 전남편과 아들에게 원한이 깊어 보이는데 왜 반씨 가문에서 7년이나 지내고 지금에서야 나온 겁니까?”강민아의 눈빛이 공허해지며 그녀는 심호흡하고 말했다.“제가 엄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아이들이 태어난 후 그녀는 아이들이 잠든 모습을 수없이 지켜보고, 활짝 웃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눈물을 닦아주고, 작은 몸을 껴안아 주었다.목욕을 시키고, 음식을 만들어주고, 이 닦는 법도 끊임없이 가르쳤다.아이들의 성장 과정을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았고,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쁨을 느꼈다.그녀와 아이들이 서로를 사랑한다면 그것만으로 만족했다.그녀는 검은 눈동자로 민이를 바라보았다.“전 엄마로서 최선을 다했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습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오늘 저는 드림과 함께 트랙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제 모습을 솔직하게 드러내면서 엄마가 되어도 여전히 당당하게 트랙을 누빌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액셀을 밟고 두려움 없이 앞으로 나아가기만 한다면 언제 출발해도 늦지 않으니까요.”강나현은 한 손으로 허리를 짚은 채 입을 벙긋하며 눈을 깜빡였다.“네가 어떻게 루나야!”참 웃긴다.강민아는 지금 루나를 사칭하는 걸까?“루나 맞아.”갑자기 무거운 남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강나현은 소리를 따라 돌아보고 나서야 말한 사람이 반하준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녀는 충격에 휩싸여 혼란스럽기만 했다.“하준 씨도 혹시 이 여자한테 속아서...”반하준의 움켜쥔 두 주먹 손등에서는 핏줄이 튀어나와 있었다. 경기가 끝난 지 몇 분이 지나도 그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 허탈함에 빠져 있었다.충격의 파도가 그를 덮쳐서 그의 얼굴을 마구 할퀴며 볼품없는 상태로 만들었다.그리고 이젠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강민아가 루나라는 현실을 마주해야 한다.“내가 직접 저 여자가 드림에 올라타 트랙에서 질주하는 걸 봤어. 루나 맞아.”말하는 반하준의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주변의 시끄러운 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반하준의 말은 청천벽력처럼 강나현의 멍한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그녀는 충격에 휩싸여 무의식적으로 현실을 부정하기 시작했다.“말도 안 돼...”강나현은 여전히 믿지 않으려 했다.“엄마!”정이가 폴짝폴짝 뛰며 강민아에게 달려갔다.“엇!”반석현도 강민아를 향해 달렸다.강민아가 쭈그리고 앉자 반석현과 정이가 딱풀처럼 강민아 품에 쏙 들어갔다.멀지 않은 곳에 서서 그 장면을 지켜보던 민이는 온몸이 굳어버린 채 발이 땅에 붙은 듯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기 어려웠다.아이는 레이싱 슈트를 입고 있는 강민아를 바라보는 지금도 루나와 강민아를 연관 짓지 못했다.민이는 삐죽거리며 빽 소리를 질렀다.“왜 나한테 거짓말했어요?”강민아가 아이를 돌아보았고
“왜... 왜 그 가식적인 여자가 루나야. 으아앙!”민이의 작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입을 크게 벌리며 울부짖었다!...털썩.또 다른 VIP 룸에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기술자는 결승선에 무사히 도착한 드림을 보자 마치 척추가 몸에서 빠져나간 듯 상반신이 푹 삶은 면처럼 무너졌다.그제야 용기를 내어 고개를 돌리며 뒤에 서서 자신의 생사를 좌우할 심은호를 바라볼 수 있었다.그는 시선을 스크린에 고정한 채 두 눈에 오로지 강민아만 담았다.심은호의 손은 장인이 정성스럽게 조각한 공예품 같았고 손등에는 흰 피부를 뚫고 나올 듯한 핏줄이 부풀어져 있었다.가느다란 손가락 끝이 유리에 닿아 반복해서 문질렀다.심은호의 각도에서 보면 저기 멀리 스크린에 있는 여자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느껴졌다.입꼬리가 올라가고 살짝 올라간 날카로운 눈매에는 미소가 번졌다.스크린 속 강민아가 무심코 고개를 들자 그녀의 밝고도 당찬 눈빛이 시공간을 가로질러 심은호와 마주하는 듯했다.유리 위에 올려놓은 그의 손이 흠칫 떨리며 꼭 무모한 장난을 치다가 상대에게 들킨 기분이었다.심은호의 심장이 조용히 요동치기 시작했다.입꼬리가 올라가며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겁쟁이라 그저 이런 식으로만 마음속 밝은 달을 어루만지는 걸 상상할 뿐이다....강나현은 헬멧을 들고 차에서 내려 무덤덤한 표정으로 문을 닫았다.비록 꼴찌를 했지만 어쨌든 아마추어 선수라는 생각에 당당했다.카메라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만 하면 화제성과 인기를 끌 것이고, 설령 졌다고 해도 당당한 모습으로 마주해야 했다.취재진이 현장에 들어오자 그녀가 앞장서서 다가가는데 그들이 전부 드림 쪽으로 달려가는 게 보였다.강나현은 입을 삐죽거렸다. 반하준이 거금을 들여 루나를 그녀의 코치로 데려와 레이싱 라이선스 취득을 도와주려 한다는 생각에 다가가 인사를 건넬 작정이었다.백미러를 슬쩍 보니 메이크업을 완벽하게 해 아이를 낳은 여자와 함께 서 있으면 분위기나 미모로 절대 루나에게 뒤처
객석에서 강기성은 강성진에게 연락했다.“네, 아버지. 나현이가 졌어요. 네, 꼴찌 했어요. 그것도 앞사람과 격차가 아주 크게.”말하며 강기성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고 전화기 너머로 강성진의 욕설이 들렸다.“걔는 머리에 물만 들어찬 거 아니냐? 망신당할 짓을 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이제 서경 전체가 쓸모없는 놈이라는 걸 알겠네.”전화기 반대편에 있던 강성진이 이마를 부여잡고 말했다.“걔가 강씨 가문 망신은 혼자 다 시키는구나!”강기성은 다른 재벌 2세들이 흥분하며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대박, 루나가 얼굴을 공개하기로 한 거야?”“세상에, 신비한 여신 루나가 직접 베일을 벗다니.”그들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몇몇은 망원경을 들고 트랙에 있는 루나를 보거나 휴대폰을 들고 카메라를 확대했다. 일부는 쌍안경으로 트랙에 있는 루나를 가리켰고, 다른 친구들은 휴대폰을 꺼내 휴대폰 렌즈를 가까이 가져갔다.무심코 대형 스크린을 올려다본 강기성은 그대로 굳어버리며 손에서 휴대폰이 미끄러졌다.툭.소리와 함께 휴대폰이 바닥에 떨어졌다....강민아는 한 손에 헬멧을 들고 객석을 향해 손을 흔들며 돌아설 때마다 큰 환호를 불러일으켰다.“루나가 이렇게 어렸어?”“엇, 낯이 익은데? 왜 어디서 본 것 같지?”“강민아다! 얼마 전 ALI 수학 경시대회 금상 수상했던 천재 주부. 세상에, 그 여자가 루나였어!”“수학 천재 강민아? 그 사람이 루나라고? 세상에, 강민아는 신이야.”루나가 강민아라는 사실을 알게 된 많은 관중들이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우와, 엄마다!”육성민, 윤세현과 함께 첫 번째 줄에 앉아 있던 정이는 대형 스크린에 나타난 강민아를 보자마자 흥분한 나머지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난간에 기대어 발끝을 세우더니 잔뜩 들떠서 육성민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엄마가 레이싱도 해요! 너무 대단해요!”“너희 엄마가 국내 최고의 여성 카레이서야!”...“우와!”반석현은 유리 벽에 두 손을 갖다 댄 채 두 눈에는 수천
강나현은 드림의 보닛이 올라간 것을 알아차리고는 의기양양하게 입술을 말아 올렸다.이제 드림은 속도를 늦추지 않으면 사고가 벌어져 차나 사람이나 무사하지 못할 거다.기술자가 깃발을 흔들며 강민아에게 피트로 들어오라는 신호를 보냈다.레이싱 경기에서는 가장 빠른 랩타임을 기록하는데 드림의 보닛을 조정해도 루나는 경기에서 최고 기록을 낼 수 있었다.하지만 드림은 멈출 생각이 없는 듯 피트 앞을 지나쳐 속도를 높였다.“정비하러 가지 않았어!”“저렇게 됐는데 루나는 경기를 이어간다고?”기술자조차 입을 크게 벌리고 여전히 보닛이 들린 채 전속력으로 달리는 드림을 초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세상에!”서경의 도련님들이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 몇몇은 망원경을 들고 대형 스크린을 조준했다.강기성은 그들 사이에 앉아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드림이 속도를 늦출 생각이 없음을 확인한 강기성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그의 옆에 앉은 김예나는 레이싱 경기를 처음 보는데도 보닛이 올라가고 운전자의 시야가 가려진 상황에서 차가 언제든 트랙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김예나는 입을 가리고 중얼거렸다.“왜 레이서가 차를 멈추지 않는 거죠?”강기성은 2초 동안 대형 스크린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스릴 넘치는 장면에 피가 끓어오르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국내 최고 여성 레이서에게 이건 아무것도 아니니까.”윤세현은 손을 뻗어 눈앞의 난간을 잡았다.과거 서경의 레이스를 준비하는 동안 강민아는 이 트랙에서 한 바퀴, 또 한 바퀴를 달리며 하루에 8, 9시간씩 연습하고 타이어를 수없이 마모시켰다.이 트랙의 모든 코너와 직선 구간은 강민아의 머릿속에 단단히 각인되어 있었기에 5년이 지난 지금도 강민아는 눈을 감고도 이 트랙을 달릴 수 있었다.“말도 안 돼.”연진숙은 콧방귀를 뀌었다. 보닛이 열렸는데도 멈춰서 정비할 생각이 없는 무모한 여자는 쳐다보지도 않을 거다.민이는 두 손을 통유리창에 댄 채 반석현과 놀랍도록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두 아이는 숨 쉬는
“쓸모없는 건 어딜 가나 똑같지.”“강나현의 실력은 아마추어 수준에도 못 미쳐요. 우리가 최고급 레이스카를 개조해 줬는데 액셀을 끝까지 밟지도 못하네요.”“난 먼저 짐 싸서 돌아갈 거예요. 강나현과 같이 망신당하고 싶지 않네요.”트랙에서 강나현과 다른 차들 사이의 거리는 점점 벌어졌고 강나현의 기대와 다르게 앞쪽에서 실수가 일어나진 않았다.왜 그들이 전부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을까.어느 레이서도 속도를 줄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강나현은 조금 당황했다. 다른 차들이 실수하지 않으면 꼴찌는 그녀의 몫이었다.그녀의 두 눈에 점점 더 사나운 기운이 퍼져갔다. 절대 이대로 꼴찌를 할 수는 없다.아직 남아있는 비장의 카드가 있으니까.“루나 파이팅! 루나 파이팅!”VIP 룸에서 민이는 드림의 레이싱카 모형을 손에 들고 유리창 앞에 서서 신나게 방방 뛰었다.자리에 앉은 연진숙은 레이싱에 전혀 관심이 없지만 귀한 손자가 입이 닳도록 말하던 루나를 보려고 왔다.하지만 연진숙은 루나가 반씨 가문 저택의 문턱조차 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그녀가 알기로 루나는 5년 전 결혼하고 아이를 낳기 위해 은퇴했다.루나가 5년 만에 복귀한 것에 대해 사람들은 집안에서 그녀가 다시 일을 시작하고 경력을 쌓는 것에 동의했거나, 남편과 문제가 생겨서 돈을 벌어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건 아닌지 추측했다.하지만 이유가 무엇이든 연진숙의 눈에 여자가 밖에서 돈을 번다는 건 남편이 쓰레기라는 의미였다.연진숙은 어떻게 하면 귀한 손자가 루나를 새엄마로 삼는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있을지 고민하며 민이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루나 같은 여자가 부신 그룹 도련님의 눈에 들어 민이의 새엄마가 될 기회가 있다는 걸 알면 어떻게든 반하준을 꼬드길 거라고 생각했다.경기가 끝나면 루나를 찾아가 제대로 얘기해 볼 생각이다.“민아, 물 좀 마셔.”“민아, 포도 먹을래? 이리 와, 내가 먹여줄게.”“민아, 딸기 좀 먹어. 딸기 맛있네.”세 명의 재벌가 아가씨들은 물컵과 과일 접시
반하준이 다가가 드림의 문을 당기며 강민아를 차 밖으로 끌어내려는데 몇몇 스태프들이 즉시 다가와 그를 떼어놓았다.“반 대표님, 곧 경기 시작해요!”“반 대표님, 루나 경기 준비하는 데 방해하지 마세요.”그러자 반하준이 말했다.“드림에 탄 사람은 강민아예요. 그 여자가 어떻게 루나인가요!”본인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문이 닫히고 강민아가 드림을 몰고 트랙으로 향했다.“비켜!”뛰어난 신체 능력 덕분에 반하준은 자신을 막고 있던 스태프들을 밀어내고 트랙 가장자리로 달려갔다.강민아는 드림을 예열한 후에도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드림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자 수만 명의 관중이 환호성을 질렀다.“루나! 루나!”수만 명의 레이싱 팬들은 트랙의 시작점을 향해 달리는 드림의 모습을 보며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강민아는 왜 드림에서 내리지 않을까.반하준은 주위를 둘러보았다.‘레이스가 곧 시작되는데 왜 루나는 아직 안 나타나는 거지?’차에 앉아 있던 강나현은 트랙 가장자리에 나타난 반하준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창문을 내리고 반하준에게 인사를 하려고 했다.VIP석에 앉아 경기를 관람할 수도 있었는데 굳이 경기장까지 찾아왔다는 건 그녀에게 관심이 지대하다는 뜻이었기에 강나현은 내심 뿌듯했다.차창이 내려가고 강나현은 반하준을 향해 신나게 손을 흔들었다.“하준 씨!”그녀의 목소리는 헬멧에 묻혀서 잘 들리지 않았다.반하준은 강나현이 운전하는 레이스카는 쳐다보지도 않았다.“강나현 씨, 창문 열어놓고 뭐 하는 겁니까? 곧 경기 시작하는데!”콘솔에 있던 빈센트는 갑자기 창문을 여는 강나현을 보고 순간 혈압이 최고조로 치솟아 무전기에 대고 소리를 지르며 연이어 욕설을 내뱉었다.빈센트가 외국어로 얘기하니 알아듣지 못하는 강나현은 제 쪽에서 되레 불쾌한 듯 소리를 질렀다.“왜 소리를 질러요!”통역사는 서둘러 무전기를 들고 다급한 목소리로 강나현을 재촉했다.“빨리 창문 닫고 레이스 준비하세요!”강나현의 통역을 담당한 청년 역시 호흡곤란이 올 지경이었
작고 동그란 턱에 얼굴은 갸름한 달걀형이었다.여자의 입술은 새콤달콤한 체리를 닮았고 코는 오뚝했으며 눈매는 부드러웠다.검은색 머리카락을 뒤로 질끈 묶고 귓가에 몇 가닥 잔머리가 흘러내렸다.반하준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이다.반하준은 눈을 크게 뜬 채 강민아를 똑바로 응시하며 온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그의 머릿속도 정지 버튼이 눌렸다.‘루나 얼굴이 왜 강민아로 보일까.’말도 안 된다.아직도 그 우스꽝스러운 꿈속에 있는 건가.객석에서 수만 명의 압도적인 함성이 거대한 파도처럼 반하준을 향해 밀려들자 그는 온몸이 흔들리며 번뜩 정신을 차렸다.강민아는 반하준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듯 그대로 무시하고 지나쳐가는데, 반하준이 돌아서서 달려가더니 강민아의 손을 낚아챘다.“네가 왜 여기 있어?”남자는 의심과 불신의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왜 이런 옷을 입고 있어?”고개를 숙여 강민아의 손에 들려 있는 헬멧을 내려다보니 그건 루나의 것이 맞았다.입을 벙긋하던 그는 종이 뭉텅이가 목구멍에 꽉 막힌 느낌이었다.“루나를 위해 자원봉사 하러 온 거야?”그의 목구멍에선 본인조차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비현실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래야만 했다.그는 마음속으로 단호하게 생각을 굳혔다.루나가 시범경기에 참가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국제 레이싱 대회 자원봉사자 모집 이벤트에는 수천 명의 레이싱 팬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많은 사람들은 월급이 깎일지라도 당장 하던 일을 내려놓고 레이스 자원봉사자로 지원했다.루나의 레이스를 가까이서 보기 위해, 그리고 여신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영광을 위해서였다.강민아는 반하준의 질문을 듣고 웃음을 터뜨렸다.“얼마나 멍청하면 그런 질문을 하지?”레이싱 슈트를 입고 헬멧을 쓴 채 반하준 앞에 나타났는데도 남자는 여전히 그녀와 루나를 연관 짓지 못했다.멍청해서 그런 게 아니라 애초에 뼛속까지 그녀를 경멸하고 있기 때문이다.순수하고 어렸던 시절에 진심으로 반하준을 사랑하고 용감하게 뛰어들었는데, 이 남자는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