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얼굴을 찌푸린 채 욕조에 몸을 담그고 뜨거운 물을 견뎌냈다.그는 가정부에게 물 온도는 40.3도로 맞춰달라고 여러 번 당부했었다.욕실의 향은 그가 들어오기 10분 전에 피워야 한다고도 했었다.욕조 가장자리에 있는 가죽 쿠션에 기댄 반하준은 내부 조명도 제대로 맞춰지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했다.“쯧.”‘강민아는 7년 동안 단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는데.’반하준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조금만 참으면 돼. 강민아는 곧 돌아올 거야.’...다음 날 아침 핸드폰을 집어 든 강민아는 홍민기가 보낸 문자를 발견했다.[강민아 씨, 정말로 120억 모두 주식에 투자하시겠습니까?][네. 확실합니다. 개장하면 바로 전량 매수해 주세요.][알겠습니다.]홍민기는 다시 한번 당부했다.[후회하시면 안 됩니다.]강민아는 컴퓨터를 켜고 자신이 직접 만든 주식 시세 분석 프로그램을 실행했다.그녀가 만든 프로그램은 주식 시장이 바닥을 치고 다시 반등할 때라고 알려주고 있었다.주식 시장이 개장하자 강민아가 홍민기에게 매수하라고 한 주식의 주가가 오르기 시작했다.강민아가 컴퓨터를 끄자마자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모르는 번호였다.최근 이력서를 내고 있었기에 그녀는 인사팀의 연락을 놓치지 않으려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사모님. 저예요.”전화기 너머에서 오소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혹시 도련님 빨간색 커프스단추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오소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민아는 전화를 끊었다.‘커프스단추가 어디 있는지 내가 알 게 뭐야!’강민아는 아이 방으로 가서 반우정의 숙제를 확인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거실의 유선 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벨 소리가 넓은 거실에 울려 퍼지자 조금 섬뜩했다.강민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유선 전화의 선을 뽑아버렸다.그녀가 방에 돌아가기도 전에 초인종이 울렸다.문을 연 그녀의 앞에는 단지 관리자가 서 있었다.그는 강민아에게 자신의 핸드폰을 건넸다.강민아는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받았고 그녀의 귓가에는 빙하처럼 차가운
“하준 오빠?”강나현은 반하준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것을 발견했다.그건 그녀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언니가 뭐라고 한 거야?”반하준은 한참을 뜸 들이다가 답했다.“아직도 나한테 화내고 있어.”그는 방금 자신을 향해 쏟아낸 말들이 정말로 강민아의 입에서 나온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언니 혹시 갱년기 아니야? 애 낳은 여자는 확 늙는다더라.”한바탕 화를 낸 강민아는 전화를 끊고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아파트 관리자에게 내밀었다.관리자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그녀가 손을 까닥이자 관리자는 그제야 황급히 핸드폰을 받아 들고 도망치듯 뛰어갔다.시그니엘을 당장이라도 벗어나고 싶었던 강민아는 반우정에게 다가가 물었다.“엄마랑 같이 엄마 선생님 보러 갈까?”“좋아요!”심씨 가문으로 출발하기 전 강민아는 심은호에게 미리 연락을 넣었다.그녀는 꽃집에 들러 꽃을 사고 취보헌에 들러 심한기가 평소 즐겨 쓰던 선지를 골랐다.그렇게 준비를 마친 뒤 강민아는 심씨 가문 저택 앞에 도착했다.하지만 그녀를 맞이한 것은 심은호가 아닌 심씨 가문의 가정부였다.저택으로 들어가는 길에 그녀는 응접실에 세워진 화이트보드를 보았다.그 위에는 복잡한 수학 문제가 적혀 있었다.그녀는 가정부의 안내를 받아 복도에서 대기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가정부는 난처한 표정으로 심한기의 방에서 나왔다.“어르신께서 방금 약을 드셔서 컨디션이 좋지 않으십니다. 잠시 기다려주실 수 있으실까요?”강민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날 만나고 싶어 하지 않으시는 구나.’“알겠습니다.”그녀는 조용히 대답하고 응접실로 향했다.강민아는 반우정과 함께 한참을 앉아 있었다.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화이트보드로 향했다.그리고 10분 후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이트보드 앞으로 가 마커를 집어 들고 계산을 시작했다.순간 그녀는 학생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창밖으로 더운 바람이 불어왔고 오동 나뭇잎이 사각거렸다.복도에서 학생들의 발소리까지 들려오자 그녀는
마치 보이지 않는 밧줄이 강민아의 목을 조르는 듯 그녀는 숨을 쉴 수 없었다.심한기는 네이비 리넨 홈웨어를 입고 있었고 몸은 마르고 허약해 보였다.그의 머리는 온통 희었고 등은 굽어 있었다.강민아는 본능적으로 선생님이라고 부르려 했지만 자신은 이미 그럴 자격을 잃었다는 것을 깨달았다.순간 그녀의 시야가 흐려졌다.“할아버지, 안녕하세요!”반우정의 어린 목소리가 봄비처럼 상쾌하게 들려왔다.“할아버지가 우리 엄마가 그렇게 자랑하시던 학식이 풍부하고 재능이 뛰어나신 교육자이자 뛰어난 수학자 심한기 할아버지 맞으세요?”심한기는 통통하고 사랑스러운 반우정을 바라보며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네 딸이냐?”강민아는 급히 답했다.“네. 반우정이에요.”옆에 있던 누군가가 흥분하며 말했다.“교수님, 교수님께서 내신 문제 이분이 푸셨어요.”잠시 멈칫하던 심한기가 응접실로 향했다.강민아는 심한기의 걸음걸이가 안정적이라는 것을 발견했다.심은호가 말한 것처럼 몸 상태가 예전 같지 않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심한기는 화이트보드 앞에 서서 강민아가 쓴 풀이 공식을 보다가 마른 어깨를 떨었다.“내가 가르친 걸 다 기억하고 있었구나.”그녀가 기억하고 있을수록 심한기는 서글펐고 강민아가 자신의 미래를 포기한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강민아가 화이트보드를 보며 말했다.“대학에서 배운 지식을 다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화이트보드 앞에 서니 예전에 배웠던 공식들이 머릿속에 떠올랐어요.”“정말 교수님의 제자였어?”옆에 서 있던 남학생들이 속삭였다.“아니다!”심한기는 완고하게 부정했다.강민아가 박사 학위를 포기하기로 한 날 그는 강민아에게 누군가 대학에서 지도교수가 누구였는지 물어보면 자신의 이름은 절대 말하지 말라고 선언했었다.그렇게 강민아는 학사 학위만을 취득하고 학교를 떠났고 두 사람의 사제지간은 완전히 끊어졌다.학생들은 즉시 입을 다물었고 심한기는 차가운 눈빛으로 강민아를 바라보며 목소리를 낮췄다.“들어와서 얘기하자.”그는 학생들 앞에서 강민아
심한기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패륜이라는 말이 입에서 튀어나오려고 했지만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참았다.“왜 그 꼴인 거야?”심은호는 분명 옷을 입고 있었지만 차라리 안 입은 것보다 더 요염해 보였다.심한기의 짙은 눈썹이 격렬하게 떨렸다.“비를 맞았어요.”심은호는 무심하게 답하며 젖은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강민아의 각도에서 보면 그의 옆모습은 완벽한 황금비율을 이루고 있었다.오뚝한 콧날은 미끄럼틀처럼 매끈했고 한쪽 볼의 깊게 팬 보조개는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심한기는 심은호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저도 모르게 손으로 눈을 가렸다.아들의 존재감이 너무나 눈부셔 선글라스가 필요했다.“아버지, 침대에 누워 쉬셔야 해요.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내가 뭘 무리한다는 거냐?”‘무리하는 건 너잖아! 색기 넘치는 공작새가 되어버려서는...’심한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민아가 걱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그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심은호는 그를 침대에 눕혀 버렸다.심은호가 베개를 몇 번 두드리자 먼지가 흩날리며 심한기가 기침하기 시작했다.강민아는 급히 물을 따랐다.“교수님, 물 좀 드세요.”그녀는 물컵을 들고 와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심한기를 바라보았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운 넘치던 분이 갑자기 이렇게 기침을 멈추지 못하다니.’심한기는 기침하면서도 강민아에게 말하려 했으나 심은호가 그의 손을 눌러 제지하고 강민아의 손에서 물컵을 받아 들었다.차가운 손끝이 스치는 순간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이 느껴졌다.스치는 봄바람처럼 아무런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아버지, 지금은 물 마시면 안 돼요. 잠시 쉬면 괜찮아질 거예요.”말을 마친 심은호는 강민아가 직접 따라준 따뜻한 물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그 모습을 본 심한기는 말문이 턱 막혔다.심은호는 몸을 앞으로 숙이며 강민아의 시야를 가렸다.덕분에 강민아는 심한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듣지 못했다.심은호는 심한기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요.”‘알긴 뭘
“아버지, 살살 좀 하세요.”심은호는 피하지 않고 심한기가 휘두른 지팡이를 맞았다.심한기는 지팡이 끝으로 심은호의 허리에 달라붙은 옷을 툭툭 쳤다.“좀 점잖게 굴 수 없어? 완전히 체면을 구기는구나. 여우한테 홀린 거야, 뭐야? 너! 너! 너! 도대체 왜 사람을 유혹하고 다녀?”“쉿! 목소리 좀 낮추세요.”심은호가 황급히 타이르며 말했다.“조용히 하라고? 이게 자랑스러운 일이냐?”심한기는 아들의 모습에 얼굴이 화끈거렸다.그러나 심은호는 태연하게 말했다.“계속 유혹해야 하는데 들리면 안 되죠.”심은호를 향해 눈을 흘긴 심한기는 기가 막혔다.강민아는 반우정에게 만화책 몇 권을 가져다주고 가정부에게 종이와 색연필도 빌려왔다.반우정은 집중력이 좋아 조용히 앉아 몇 시간 동안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안녕하세요. 교수님께서 새로 출제하신 문제 좀 풀어보라고 하셔서요.”반우정에게 놀만한 것들을 쥐여준 뒤 강민아는 심한기의 학생에게 문제지를 한 장 달라고 했다.“서경 대학 학생이세요?”남학생은 다섯 살짜리 반우정을 흘깃 쳐다보며 물었다.“아니요. 저는 고연 대학 졸업했어요.”남학생이 다시 물었다.“석사생인가요? 아니면 박사생이세요?”강민아는 웃으며 답했다.“학부 졸업 후 공부를 계속하진 않았어요.”테이블 주변에 앉아 있던 몇몇 학생들이 고개를 들고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문제지를 건넨 남학생이 말했다.“그럼 이 문제 못 푸실 텐데요. 심 교수님이 내주신 문제는 최소 석사 2년 차 정도는 되어야 풀 수 있어요.”검은 뿔테 안경을 쓴 남학생이 조소하며 중얼거렸다.“학부생이 올림피아드 문제를 푼다고?”“아이도 저렇게 큰데 올림피아드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다른 학생이 팔꿈치로 그를 살짝 밀며 말했다.“하지만 교수님이 화이트보드에 적은 문제를 풀었잖아. 우리는 일주일 동안 연구했는데도 못 풀어서 교수님한테 엄청나게 혼났거든...”검은 뿔테 안경을 쓴 남학생은 강민아를 의심스럽게 바라보며 말
심한기의 학생들이 모두 몰려들었고 그들은 구경거리를 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흥, 봐봐. 이거 완전 엉망진창이야.”배진영이 문제 아래 적힌 공식을 보며 하나하나 조롱하기 시작했다.그러나 계속 스캔하던 그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이... 이게 증명이 됐다고?”강민아의 풀이는 그가 풀었던 방법보다 훨씬 간결하고 이해하기 쉬웠다.배진영은 자신을 한 대 치고 싶었다.‘난 왜 이런 풀이법은 생각해 내지 못했지?’“말도 안 돼! 썼다고 해서 정답이라는 보장은 없잖아.”다른 학생이 그의 손에서 문제지를 낚아채 갔다.주변 학생들도 목을 길게 빼고 증명 과정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침묵했다.강민아는 단순히 빠른 속도로 문제를 풀었을 뿐만 아니라 심한기가 낸 모든 문제를 증명해 낸 것이었다.강민아를 바라보는 학생들의 시선이 변했다.“선... 선배님. 너무 빠르신 거 아니에요?”“저 이거 이틀 동안 잡고 있었는데 선배님이 한 시간 만에 푼 것보다 못해요.”학생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강민아는 담담하게 말했다.“올림피아드 문제라면 대회 시간 안에 풀어야죠.”“그렇다고 해도 모두가 선배님처럼 빨리 풀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강민아는 올림피아드 대회에서 늘 가장 먼저 답지를 제출하곤 했다.그녀는 대회 스타일에 특화된 실력을 갖추고 있었고 이것이야말로 심한기가 가장 안타까워하는 부분이었다.“선배님, 정말 학부만 졸업하신 건가요?”“예전에 몇 번 대회를 나간 적이 있어서 문제 풀이에는 익숙해요.”학생들은 그녀가 단순한 학부 졸업생이 아니라 올림피아드 전문가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선배님, 혹시 이 문제 풀이 과정을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그 순간 무심코 고개를 돌린 반우정은 강민아가 화이트보드 앞에 서서 서경대 학생들에게 풀이를 설명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와아...”반우정은 입을 동그랗게 벌리며 낮은 탄성을 내뱉었다.평소 강민아는 그녀와 반현민 옆에 앉아 나지막한 목소리로 숙제를 도와주곤 했다.하지만 지금 그녀는
“선배님, 대회에서 만날 날을 기대할게요.”“꼴등 하면 재밌겠네.”배진영이 비웃듯 말했다.“ALI 수학 경시대회는 일반인도 참가할 수 있어서 매년 백지로 제출하는 사람도 많아요. 순위표에는 항상 0점이 가득하고 참가자의 이름과 신분도 공개되죠. 선배님,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세요.”강민아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만약 제 순위가 더 높으면 나는 ALI 경시 대회 성적이 강민아보다 낮다는 문구를 새긴 티셔츠 일주일 동안 입는 거 어때요?”이는 엘리트 학생들에게 가장 큰 모욕을 줄 수 있는 일이었다.수치스러운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서경대 캠퍼스에서 생활해야 할 테니 말이다.강민아의 도발에 배진영도 의지를 불태웠다.“좋아요. 저보다 잘하란 말은 안 해요. 하지만 200등 밖으로 밀려나면 교수님 댁에 와서 저희랑 같이 공부할 자격이 없으니 그만 오세요.”“진영아, 그래도 한 시간 만에 세 문제나 풀었어.”옆에서 다른 학생들이 그를 말렸다.“시험지 푸는 게 뭐 대수야? 대회에서는 LaTex로 답을 작성해야 해. 대학 때 배우기나 했겠어?”다른 학생들이 앞다투어 그를 달렸고 배진영은 자리에 앉으면서도 중얼거렸다.“가정주부가 수학 경시대회에 나간다고? 이건 사회적 자원 낭비야.”강민아는 마음을 가다듬고 시험지를 계속 풀었다.다른 사람들의 비웃음은 그녀를 상처입히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이 힘든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녀는 이 길을 걸어 정상에 오른 적이 있었고 그녀는 단지 다시 정상으로 돌아가려고 할 뿐이었다.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그녀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큰 문제를 하나 해결한 그녀의 마음은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깊은숨을 내쉬며 고개를 든 순간 그녀는 잠든 반우정을 조심스럽게 안고 있는 심은호를 발견했다.그녀가 일어나려는 순간 심은호가 입 모양으로 말했다. “제가 데리고 들어갈게요.”강민아는 심은호가 심한기의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심한기는 이미 침대에서 일어나 있었다
육성민은 심은호가 반우정을 안고 있는 모습을 보자마자 차 문을 열고 내렸다.그는 190cm에 가까운 키에 단단한 근육질 몸매를 자랑했다.검은 반팔 티셔츠는 선명한 근육 라인에 의해 팽팽하게 늘어나 있었다.“주세요.”육성민이 심은호를 향해 손을 뻗자 단단한 근육이 뚜렷이 보였다.심은호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 결국 반우정을 그의 품에 넘겼다.육성민은 한 손으로 정이를 번쩍 안아 들고 강민아를 향해 말했다.“가자.”강민아는 심은호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넨 후 육성민의 차에 올랐다.육성민은 반우정을 뒷좌석에 조심스럽게 눕히고 문을 닫은 뒤 운전석으로 향했다.심은호의 옆을 지나던 육성민은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훑어보았다.심은호는 육성민의 시선을 무시하고 부드러운 눈빛으로 강민아를 바라보며 말했다.“조심히 들어가요.”그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지만 친근함보다는 어딘가 거리감이 느껴지는 웃음이었다.심은호는 차량이 점점 멀어지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육성민은 백미러를 통해 심은호를 흘끗 보더니 태연하게 물었다.“아까 그 사람은 누구야?”“심 교수님 아들 심은호야.”육성민이 나지막이 말했다.“전에 너희 학교에서 본 적 있어.”강민아는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그냥 아버지 보러 왔던 거겠지.”강민아가 아는 한 심은호는 서경대 학생이 아니었다.하지만 육성민은 강민아를 만나러 서경대에 갔을 때 항상 강의실 뒤쪽 구석에 검은 마스크를 쓰고 야구 모자를 눌러쓴 남자를 떠올렸다.그 남자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 애썼지만 육성민은 군에서의 경험 덕분에 오히려 그런 사람들에게 더 민감했다.“그놈 좀 수상해. 앞으로 조심해.”육성민이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했다.강민아는 순간 멈칫했다.심은호를 수상하다고 생각하기엔 그의 이미지는 너무도 고결하고 완벽했다.육성민은 더 이상 그 주제를 이어가지 않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앞으로 어쩔 생각이야?”그는 이미 강민아가 반하준과 이혼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때 반우정이 깨어나며 말했다.“아빠
순진한 정이의 목소리에 반하준 뒤에 있던 선생님들은 흥미로운 표정이었다.반하준은 당황하며 서둘러 해명했다.“아니야...”그는 고개를 들어 강민아를 바라보면서 속으로 짜증이 솟구쳤다.“아빠는 강나현이랑 잔 적 없어! 절대 그런 적이 없다고!”마치 강민아에게 하는 말인 듯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그런데 반하준의 해명은 정이의 논리를 이길 수 없었다.“하지만 이모가 아빠의 친구인 것처럼 현이 씨도 엄마의 친구인데요?”“달라!”반하준이 부정하자 정이는 볼을 부풀리며 여전히 반박하려는 반하준의 눈빛을 똑바로 마주하더니 오히려 그를 가르치기 시작했다.“아저씨, 자기한테는 관대하고 남한테는 엄격하면 안 되죠. 그건 내로남불이에요!”말문이 막힌 반하준은 어른의 사생활과 관련된 주제에 대해 다섯 살짜리 아이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그러다 문득 생각이 나서 강민아에게 물었다.“대체 정이한테 무슨 말을 했길래 강나현과 내 사이를 이렇게 생각하는 거야?”강민아는 콧방귀를 뀌며 설명하고 싶지도, 그와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았다.“아저씨는 엄마를 오해하고 있어요.”딸이 입을 열자 반하준는 한결 마음이 풀려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아빠가 했던 행동 때문에 네가 오해를 한 것 같으니까 지금 확실하게 말할게. 아빠와 이모는 그저 친구 사이야. 우리는 절대 네 엄마와 이 자식처럼...”윤세현은 몸을 돌려 강민아를 끌어안고 자기 머리를 강민아의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그녀는 반하준을 향해 도발하듯 말했다.“엥? 친구랑 안은 적 없어요?”“...”반하준의 목소리가 뚝 멈추며 정이가 대신 대답했다 “내가 이모랑 아저씨 안고 있는 거 봤는데?”옆에 있던 선생님들은 구석에 숨어서 구경하기 바빴다.윤세현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웃었다.“친구 사이에 서로 안는 건 당연하지. 가까운 사이면 뽀뽀도 하고.”말하며 그녀가 강민아의 얼굴에 쪽 입을 맞추자 반하준은 순식간에 속에서 피가 끓으며 입안에는 비릿한 피 맛이 가득 느껴졌다.주먹을 불끈 쥔 그의 손등
반하준은 자신의 역할을 부각하고 딸에게 아빠의 능력을 알려주기 위해 거침없이 말을 이어갔다. “방송국 팀을 불러줄 수도 있고 춤추고 싶으면 아빠가 국내외 최고의 댄서들에게 연락할 수도 있어. 정아, 뭐가 됐든 넌 내 딸이니까 최대한 나한테 의지했으면 좋겠어.”정이는 다소 당황한 표정이었다. 아이의 기억 속 반하준은 지금처럼 관심을 보인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애정을 보이니 불편하기만 했다.“정아, 네가 나한테 의지했으면 좋겠어. 전에는 아빠가 미안했어. 넌 이제 겨우 다섯살이니까 지금부터라도 충분히 보상해 줄 수 있어.”정이는 반하준의 말이 어디까지 진실이고 거짓인지 알 수 없었고, 그 뒤에 숨은 반하준의 의도도 분석할 수 없었다.그저 자신의 직감과 감정에만 근거해서 남자에게 대꾸했다.“아저씨, 엄마랑 날 방해만 하지 마세요.”반하준은 즉시 부인했다 “내가 왜 방해해...”“하지만 아저씨는 현이 씨를 좋아하지 않고 엄마와 현이 씨가 함께 있는 걸 반대하잖아요.”반하준은 칼로 가슴을 후벼파는 듯한 통증과 입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그는 불쑥 말을 뱉을 뻔했다.‘당연히 반대하지!’강민아 곁에 다른 남자들이 나타나고 윤세현이 강민아의 진짜 사랑이라는 데 반대하지 않을 수가 있나.‘진짜 사랑’이라는 말이 씨앗처럼 반하준의 마음에 자리 잡아 싹을 틔우고 심장을 관통하는 가시로 자랐다.반하준은 위태롭게 요동치는 심장을 느꼈다.자기 핏줄인 딸이 강민아와 윤세현의 만남을 응원하고 있었다.젠장!반하준은 심각한 얼굴로 진지하게 말했다.“네 엄마는 이미 남자 친구가 있는데 네가 말하는 현이 씨가 같은 집에 살면서 엄마랑 자는 건 바람피우는 거야!”강민아의 감정사를 딸에게 너무 자세하게 얘기하고 싶지는 않아 그는 씁쓸하게 말했다.“아빠는 엄마가 널 잘못 가르칠까 봐 걱정하는 거야.”강민아와 윤세현은 서로를 바라봤고, 윤세현은 입술을 달싹이며 가슴이 들썩거릴 정도로 새어 나오는 웃음을 힘겹게 참았다.강민아는 윤세현을 향해 어깨를 으쓱거렸다
강민아는 반하준을 차갑게 바라봤다.이미 조금 전 강당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엘리베이터가 오작동하고 반하준이 우연히 이곳에 나타난 것으로 보아 그의 의도는 이미 뻔했다.강민아는 정이의 손을 잡은 채 식은땀이 삐질 났다. 정말 미친놈이다. 말로는 제 딸이라고 하면서 정이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었다.하지만 구체적인 증거 없이는 본인이 엘리베이터 오작동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거다.강민아는 가슴 속에서 터져 나오려는 분노를 참았다.“반진경이 정이를 노리는 거 알고 있었어?”“요즘 어머니랑 가깝게 지내고 있어...”다시 말해 반진경은 연진숙의 지시를 받고 학교에서 오만방자하게 날뛴 것이다.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더니 문화부 선생님 몇 명이 나타났다.그들은 반하준을 보고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반 대표님.”정이도 그들을 안다. 별님반에서 축제에 참여할 때 그들이 심사위원석에 앉아 있었다.“안녕하세요. 저는 햇님반 강윤정이라고 합니다. 축제에서 단독으로 공연하고 싶은데 그래도 되나요?”정이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진지한 얼굴로 여러 선생님을 바라보았다.그들은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반하준을 돌아보며 이사장인 그가 동의하면 그들도 그의 뜻에 따를 생각이었다.하지만 이런 암묵적인 규칙을 정이 앞에서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강민아가 반하준에게 물었다.“여기서 내가 애원하길 기다리는 거야?”반하준은 강민아가 부탁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기에 깊은 동공에 웃음기가 번뜩였다.“나한테 부탁하면 정이가 축제에 참여하는 걸 쉽게 해결할 수 있지.”정이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축제에 참여하고 싶지만 무슨 공연을 할지 생각은 못 했어요.”아이는 진지하게 선생님들을 향해 말했다.“연습하고 나서 선생님들께 보여드릴게요. 제 공연이 마음에 드시면 제가 무대에 올라가 친구들 앞에서 공연하는 걸 응원해 주세요.”반하준은 정이가 자신을 무시하는 태도에 이렇게 물었다.“정아, 아빠 도움은 필요 없어? 네가 아빠 딸이
반하준은 강민아가 고개를 돌린 채 윤세현을 향해 흐뭇한 미소를 짓는 모습에 멈칫했다.강민아가 이렇게 웃는 건 처음 본다. 심은호에게도 이렇게 웃어준 적이 없는데, 마치 윤세현이 하는 말은 다 들어준다는 표정이었다.날카로운 단검이 그의 심장을 연달아 찌르는 것 같아 반하준의 호흡이 거칠어졌다.소꿉친구가 이토록 위협적인 존재였던가.윤세현과 강민아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온 사이라는 건 알지만 상대를 안중에도 둔 적이 없었다.반씨 가문의 후계자인 그가 외딴 마을에서 상경한 사람에게 눈길을 줄 리가 없으니까.강민아와 윤세현이 친한 친구 사이라는 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반하준은 윤세현을 경멸하고 있었다.그런데 강민아가 윤세현이 진짜 사랑이라는 말에 동의할 줄이야.윤세현이 진짜 사랑이고 심은호가 남자 친구이면 그는 뭐란 말인가.7년 동안 둘의 결혼은 그저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 걸까?무거운 쇠망치가 반하준을 내리치는 듯 뻥 뚫린 가슴에 차갑고 쌀쌀한 바람이 계속 쏟아져 들어와 오장육부를 후벼팠다.“강민아!”그의 어두운 눈동자는 짙은 먹물로 뒤덮인 것처럼 보였고 미간은 잔뜩 주름이 잡혀 있었다.“이 자식이 진짜 사랑이면 심은호는 뭐야?”“당신 심은호 좋아해?”강민아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왜 그렇게 관심이 많아?”자신을 올곧게 쳐다보는 남자의 눈가에 씁쓸한 기색이 담긴 게 보였다.강민아는 풍성한 속눈썹을 깜박이면서 전남편을 마주하고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들어? 우린 모르는 사이야. 이혼할 땐 나보고 절대 돌아오지 말라더니 왜 이젠 당신이 계속 내 앞에 나타나는 건데?”강민아의 말에 남자의 말투도 차가워졌다.“네 착각이야. 설마 내가 일부러 너랑 마주치려고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는 거야?”반하준은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비웃더니 어두운 눈동자에 경멸을 드러냈다. 그러면서도 마음에 찔려서 강민아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사실 일부러 강민아와 마주치려고 이곳에 나타난 거다.강민아가 정이를
잡아보니 윤세현의 깡마른 팔에 반하준의 눈에선 경멸의 빛이 번뜩였다.이렇게 깡마른 놈이 감히 그의 여자를 건드리다니.“반하준, 뭐 하는 거야!”강민아는 소리를 지르며 윤세현을 꽉 잡고 있는 반하준의 손을 떼어내려 했다.“손 풀어!”반하준은 윤세현을 뒤로 보내며 감싸는 강민아를 보고 왠지 모를 분노가 밀려왔다. 그는 역겨운 듯 윤세현의 팔을 뿌리치더니 강민아에게 날카롭게 쏘아붙였다.“왜 계속 이렇게 약해빠진 놈이랑 있는 거야? 이 자식도 심은호랑 똑같이 여우짓 하면서 연약한 척 너한테 지켜달라고 하잖아.”반하준이 씩씩거려도 강민아는 퉁명스럽게 대꾸할 뿐이었다.“난 이런 게 좋아.”남자는 그녀를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강민아는 그와 같은 남자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나.반하준이 봤을 때 심은호와 윤세현은 지극히 닮았다. 둘 다 연약하고 그가 조금만 건드리면 손쉽게 제압할 것 같았다.하지만 그들이 계속해서 강민아의 뒤에 숨기 때문에 강민아는 점점 더 그를 미워하고 있었다.반하준의 턱이 굳게 다물리며 피부밑으로 튀어나온 핏줄이 꿈틀거렸다.그때 정이가 앳된 목소리로 말했다.“아까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심하게 흔들렸는데 현이 씨가 저와 엄마를 지켜줬어요. 아저씨, 현이 씨한테 그렇게 못되게 굴지 마세요!”정이가 단호하게 말하자 반하준이 물었다.“이 사람이 좋아?”정이는 반하준이 윤세현에 관해 물어본다는 것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난 현이 씨가 제일 좋아요!”“그럼 이 사람이 좋아, 심은호가 좋아?”반하준은 정이에게서 답을 찾고 싶었다.“음...”정이가 풍성한 속눈썹을 깜빡이며 질문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난 현이 씨가 더 좋아요!”아이가 무슨 처세술을 알겠나. 그저 본인 생각대로 솔직하게 답할 뿐이었다.정이의 말을 들은 윤세현은 미소를 지으며 반하준 때문에 언짢았던 기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왜?”반하준이 묻자 정이가 동그란 손가락을 접어가며 세었다.“현이 씨는 요리도 잘하고 좋은 향기도 나요. 나랑
“네가 강씨 가문으로 돌아가면서 우경아는 널 양딸로 데려가 네 보호자가 될 절차를 밟을 수 없게 되었어. 그러다 네가 결혼했다는 걸 알고... 너한테 완전히 흥미를 잃었지.”강민아는 먼 외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우경아의 발목을 잡은 세력은 뭔데?”윤세현은 고개를 저었다.“그건 우경아도 아직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윤세현의 맑은 눈동자가 진지하게 반짝였다.“내 생각엔 그 힘이 널 지켜주는 것 같아.”강민아도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물었다.“우경아에게 내 과거에 대해 말한 적 있어?”윤세현은 멍하니 고개를 흔들었다.“몇 번이나 날 떠보긴 했어도 난 네 일에 대해 조금도 털어놓지 않았어. 미린국에 오면서 너와 완전히 갈라졌다고 했거든.”강민아는 생각에 잠긴 채 말했다.“내가 볼 때 우경아는 오래전부터 날 지켜봤던 것 같아. 나에 대해 자세히 조사하고 너조차 모르는 내 일을 다 알고 있었어.”강민아는 더 생각하기 싫어 다시 가벼운 어투로 윤세현에게 물었다.“우경아가 나한테 무슨 짓할까 봐 학교로 온 거야?”“서경에 오자마자 너 때문에 양자 테크가 억대 손해를 봤다는 소식을 들었어. 우경아가 직접 널 만나러 학교에 온다는 얘기도... 우경아는 무자비한 사람이라 건드리기만 하면 제자리에서 상도 엎어. 너한테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강민아의 두 눈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담겨 있었다 “난 아직 그 여자한테 거대한 이용 가치가 있어서 당분간은 나한테 아무 짓도 못 해.”오히려 윤세현을 달래며 말을 이어갔다.“걱정하지 마, 이미 우경아와 거래를 달성했거든.”윤세현은 어리둥절했다.“어떤 거래?”“내가 양자 테크의 통솔권을 가지고 우경아와 협업하는 동시에 1분기 투자금 4천억을 요구했어. 거기에 향후 양자 테크의 수익은 100% 나한테 돌아오기로 했지.”윤세현은 찬 공기를 들이켜며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동의했어?”“응.”“어떻게?”강민아와 우경아가 협상한 조건은 윤세현에게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었다.강민아가
“현이 씨!”윤세현을 보자마자 정이의 눈이 환하게 빛나며 폴짝폴짝 윤세현을 향해 달려갔다.윤세현은 강민아에 대한 걱정에 코끝에서 열기 섞인 숨결이 흘러나왔다.“현이 씨, 너무 보고 싶었어요!”정이의 앳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윤세현은 쭈그리고 앉더니 정이의 의상을 보고 자기 외투를 벗어 아이에게 입혀주었다.“정이 너무 예쁘다.”정이의 머리가 조금 헝클어진 것을 발견하고 손을 뻗어 빗겨주었다.강민아는 윤세현을 향해 걸어갔다 “왔어?”지난주 윤세현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 집을 나서면서 떠나기 전 곧 돌아오겠다는 말만 남겼다.강민아는 윤세현에게 뭘 하러 가는 건지 묻지 않고 정이와 함께 윤세현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그런데 뜻밖에도 윤세현이 서경으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학교로 달려올 줄이야.우경아는 윤세현과 일정한 거리로 좁혀질 때쯤 말을 꺼냈다.“이번에 고생했어.”멈칫하던 윤세현의 조각상처럼 잘생긴 얼굴이 엄숙하게 바뀌었다.강민아는 우경아 앞에서 유독 경직된 윤세현을 알아차렸다.윤세현은 우경아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면서 잠긴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엄마, 민아는...”우경아는 붉은 입술을 말아 올렸고, 찬 바람에 풍성하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더더욱 아름다움을 뽐냈다.“오랜만에 보는 건데 친구랑 좋은 시간 보내.”우경아는 강민아를 쳐다보지 않고 윤세현에게만 명령했다.“오늘 밤에 호텔로 와서 보고하고.”윤세현은 공손하게 우경아를 향해 답했다.“네.”우경아가 자리를 떠나서야 굳어있던 윤세현은 긴장이 풀리며 정이의 손을 잡고 강민아를 향해 걸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우 대표가 너 힘들게 했어?”강민아는 고개를 저었다.“미린국에 간 첫해에 한 거물이 널 눈여겨보고 거둬줘서 자리를 잡을 수 있다고 했잖아. 그 거물이 우경아였어?”5년 전 윤세현은 강민아가 준 거금을 들고 미린국에 가면서 둘은 멀리 떨어지게 되었고, 윤세현은 나쁜 소식은 전부 감추고 좋은 소식만 전해주었다.그때 강민아는 두 아이를 낳은 터라 윤세현과
우경아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었다. 강민아에게 40억을 주고 쫓아냈는데 이제 그녀를 다시 데려오려니 상대가 4천억을 원하고 있었다.그리고 그녀는 강민아가 4천억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원한다는 걸 알고 있다.우경아의 목구멍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랫동안 사업을 하면서 피를 말리는 협력자나 경쟁자를 만나본 적 없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녀는 여전히 강민아 앞에서 여유로웠다. “강민아 씨, 이 바닥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당신에게 수익의 70%를 줄 수는 있어요. 투자는 이사회의 승인을 받아야...”“프로젝트 전체를 나한테 주지 않으면 전 그쪽이랑 일 안 해요.”“말도 안 되는 소리!”우경아가 낮게 윽박질렀다. 한 번도 그녀에게서 먹잇감을 통째로 가져가는 사람은 없었다.강민아는 여전히 사람 좋은 표정으로 부드럽게 한숨을 쉬었다.“전 우 대표님이 무서워서 시작부터 많은 걸 바라는 거예요. 이미 한번 절 아웃시켜서 아직 마음이 불안하거든요. 저한테 큰 조각을 넘기기 싫고 수익의 100%를 넘기지 않는다면 전 그쪽이랑 일 안 해요. 세상은 저 없이 잘만 돌아가고 우 대표님은 저 말고 다른 사람 알아봐도 되니까요.”강민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우경아를 지나쳐갔다.우경아는 자신이 소유한 양자 테크나 옴 테크에서 데려온 전문가들이 강민아가 건넨 대형 모델을 사흘 밤낮으로 연구해도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것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강민아!”그녀가 소리쳐 부르자 강민아는 뒤에서 들려오는 우경아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강성진과 도민영 사이에서 당신 같은 딸이 나올 줄은 몰랐네요.”강민아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우 대표님, 칭찬 감사합니다.” 우경아의 목구멍에서 차가운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강민아를 만나러 직접 승덕까지 찾아오고 반씨 가문 사람과 무례한 교사까지 혼내줬으니 강민아가 은혜를 알아줄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면 그녀와의 협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강민아가 조금도 물러서지 않을 줄이야.우경아는 우유부단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강민아가 확신에 찬 어투로 말했다.“너무 일찍 저에게 등 돌린 걸 후회하고 계시네요.”“강민아 씨, 우리한테 넘겨준 데이터를 조작한 거죠?”우경아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고 눈빛에는 극도의 압박감이 느껴졌다.그녀에게서 음산한 냉기가 퍼져나갔지만 옆에 앉아 있던 강민아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제가 왜 조작해요? 우 대표님 밑에 일하는 직원의 능력이 부족한 거죠. 섣불리 사람을 배신하니까 벌써 200억 정도 손해를 보셨죠?”팔짱을 낀 우경아의 정성껏 관리한 손톱이 연분홍빛을 띠고 있었다.강민아의 말에 그녀는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그녀는 진작 자신이 없으면 우영 그룹의 양자 테크에서 억대 손해를 볼 것을 예상하였던 걸까?심지어 수백억을 손해 볼 때 우경아가 자신을 찾아올 거란 것도 예상했다.그 생각에 우경아는 살짝 놀랐다.조금 전 자신이 나타났을 때 강민아가 전혀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던 걸 떠올리며 우경아는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여자를 다시 살펴보았다. 그러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강민아 씨는 함께 일하기 좋은 사람인 것 같네요. 내가 그쪽을 오해했어요. 7년 동안 집안에만 갇혀 지낸 여자가 아무리 성적이 뛰어나도 별 능력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공부를 잘하는 건 아무 쓸데가 없어요. 날고 기는 천재도 이론만 빠삭하고 실전에는 멍청이니까. 확실히 그쪽은 날 놀라게 하네요.”강민아를 바라보는 우경아의 두 눈엔 그녀를 손에 쥐고 싶은 충동이 타올랐다.“강민아 씨, 우리 계속 같이 일합시다. 전에 일은 내가 미안했어요. 나는 지금 진심으로 협업을 제안하는 겁니다. 협업 말고도 여러 가지 도와줄 수 있어요. 예를 들면...”앞을 돌아보니 그녀에게 맞아서 얼굴이 부어오른 반진경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무대 위에서 발레하는 반연주에게 시선이 향했다.그녀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나랑 같이 일하면 그쪽 딸 센터로 만들어 줄게요.”“그건 됐어요.”강민아가 단호하게 거절했다.“어른들 싸움에 아이들까지